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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책-바람이 우리를 데려가는 곳은 어디인가

oldhabit 2008. 5. 24. 11:59

바람이 우리를 데려가는 곳은 어디인가

 

 

이란 영화감독 압바스 키아로스타미가 낸 사진집 <바람이 또 나를 데려가리>

 

     안병기(smreoquf2) 기자   
▲ 책 표지
ⓒ2005 도서출판 <디자인 하우스>
<바람이 나를 데려가리>는 우리나라 영화 팬들에게도 잘 알려져 있는 이란의 영화 감독 압바스 키아로스타미가 낸 사진집이다.

국내에 개봉한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라는 그의 영화는 친구의 숙제를 대신해줘야 할 뜻밖의 상황에 놓인 아이의 이야기다. 영화가 상영되는 내내 관객들은 자기가 사는 마을과 친구가 사는 마을 사이를 바쁘게 뛰어다니는 주인공 아마드의 일거수일투족에 목매달며 함께 조바심을 낸다.

영화 속에서 우리를 그렇게 티 없는 동심의 세계로 이끌었던 그가 이번엔 자신이 찍은 흑백사진을 통해 길의 덧없음과 길 속에 갇힌 인간들의 희로애락을 보여준다.

사진은 본디 간결한 언어다.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사진들은 극도로 절제된 언어를 보여준다. 풍경이 가진 무수한 곁가지를 쳐내고, 불필요한 명암을 삭제하고 마침내 뼈대만 남은 풍경을 눈 앞에 펼쳐 보인다. 우리는 그가 찍어낸 풍경의 언어를 조심조심 읽어 내려간다.

나는 그의 사진 속에 숨은, 아니 삭제된 풍경을 찾아내려 애쓴다. 입술을 꼬물거리며 그가 풀어낸 풍경을 읽어낸다. 풍경 속에 녹아 있던 삶의 허망이 차츰 내 가슴 속에서 되살아나기 시작한다.

ⓒ2005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2005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옆줄로 길게 늘어선 나무들과 흰 눈에 어리는 나무의 그림자들, 빼곡히 들어선 나무들이 보여주는 답답한 풍경들, 길의 끝에 동그마니 놓인 나무 한 그루…. 눈부셔라, 그 존재의 외로움이여.

나무와 나무 사이가 아니라 내 가슴 한복판으로 쏴르르르, 한 줄기 바람이 소리를 내며 스쳐간다. 가지만 남은 앙상한 나무들 사이로 달려가는 한 마리의 말, 누군가가 남긴 어지러운 발자국, 들 가운데 외로이 선 두 그루 나무에게 덮쳐가는 먹구름들…. 위태로워라, 난간에 선 존재들이여.

문득 그의 사진 속에 있는 나무 하나가 's'자 형태로 구부러진다. 찬찬이 바라보니 저 나무 역시 길이었음을 알겠다.

ⓒ2005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2005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저렇게 길이 구부러진 것은 산의 자존심을, 그의 기분을 다치지 않으려 애쓰는 탓이리라.

양떼를 몰고 가는 목동, 큰 길로 자전거를 타고 가는 한 남자의 뒤에 겹쳐진 구릉과 구릉들, 소 등을 타고 들판 사이로 난 길을 어슬렁 어슬렁 가는 남자, 오르막길의 꼭대기에 올라선 남녀, 햇빛에 허옇게 타들어가고 있는 길들, 그 길을 짓누르고 있는 뭉게구름의 육중한 무게….

살아오면서 내가 맛보았던 길들의 다양한 맛이 여기 다 모여 있다. 사진 속에 있는 길 한 개를 꺼내 천천히 씹어본다. 적막한 맛이다. 또 다른 길 한 개를 꺼내 맛본다. 주저앉고 싶을 만큼 아득해진다. 차라리 그의 사진 속 여백으로 걸어들어가 길섶의 한 포기 풀이 되고 싶구나.

세상의 모든 길은 허구다

세상의 모든 길은 허구였다. 나도 그 수많은 허구를 헤치며 여기에 도달해 있다. 도착한 지점의 끝에서 바라보면 처음 출발했던 곳은 보이지 않는다.

우리가 돌아보는 순간 길은 자신의 모습을 남김없이 지워버린다. 아, 도로아미타불이었구나. 막막하지만, 다시 시작해야만 하는구나. 우리는 살아가는 내내 허망이라는 걸망을 짊어지고 또 다른 삶의 길을 찾아서 터덕터덕 걸어간다.

사진 역시 허구에 지나지 않는다. 흰 색과 검은 색의 선명한 대비, 여백의 미가 던져주는 허허로움과 적막감. 렌즈의 각도에 따라 그림자의 길이는 길거나 짧게 조절되고 길의 실제 모습은 부풀려지거나 쭈그려뜨려진다.

길과 사진은 허구라는 점에서 비슷한 물성을 지녔다. 나는 그 허구 속으로 얼굴을 들이밀고 내 삶을 들여다본다. 그리고 끝내는 내 생이 얼마나 왜곡됐는지를 눈치 채게 되고, 내가 걸어온 길이 얼마나 무가치하고 덧없는 것이었던가를 깨닫는다.

ⓒ2005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어떻게
늙은 거북은
삼백 년을 살면서
하늘 한 번 보지 않았나


압바스 키아로스타미는 '삼백년이나 산 늙은 거북은 어떻게 하늘 한 번 보지 않았나'하고 의문을 품는다. 이것은 질책인가 아니면 연민인가. '늙은 거북이'인 나는 어쩌다 하늘 한 번 올려다 볼 줄 모르고 살게 되었나.

풍경 위에서 스물스물 증발을 기다리고 있는 아지랑이 같은 그의 언어. 길 위에서 서성거리며 길과의 혼혈을 꿈꾸지만, 언어는 손아귀 가득 움켜쥐면 달아나버리는 바람이다.

그는 움켜쥔 언어가 달아날까봐 사진의 갈피에다 조심조심 시를 적어 넣는다. 그의 시 역시 사진만큼이나 간결해서 일본의 전통시 하이꾸의 한 구절을 연상시킨다.

길이 이어지는 동안은 삶도 여전히 계속된다

길을 주제로 한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이 사진집은 마치 그가 찍은 영화의 한 장면을 스틸하기라도 한 듯이 절제돼 있고 담백하다. 흑백의 프레임에 담겨 있는 사진들은 압바스 키아로스타미가 1970년대 말부터 2000년대까지 찍었던 것들이다. 최소한의 요소를 통해서 최대 효과를 노리는 미니멀한 사진의 구도와 여백미를 추구하는 사진들은 그가 찍은 영화 미학과 궤를 같이 한다.

사진을 바라보는 동안 우리는 때로는 한 줄기 바람 혹은 구름으로 그가 살고 있는 이란이라는 나라의 자연과 풍경을 넘나든다. 우리는 그 낯선 풍경에서 낯익은 삶의 언어를 건져낸다.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1940년 이란의 테헤란에서 태어난 그는 어릴 적부터 그림그리기를 좋아했으며 테헤란 예술대학에서 미술을 전공했다.

1987년에 만든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로 로카르노영화제에서 청동표범상을 수상하면서 세계 영화계에 알려지게 되었다.

이후 <그리고 삶은 계속된다>(1992)가 칸영화제에서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상을, <체리향기>(1996)가 그랑프리를 차지하는 등 특히 유럽에서 절정의 인기를 누리고 있다.

그 자신이 가장 아끼는 작품으로는 <클로즈업>(1990)을 꼽는다. / 안병기
사진을 오래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정지, 말없음 사이에 우리가 삶을 살면서 상실한 것이 무엇인가를 저절로 느끼게 되고 동시에 상실한 그 '무언가'를 찾아 금방이라도 길을 떠나고 싶은 아련함에 빠진다.

이제 책을 덮을 때가 되었다. 가만히 두 눈을 감는다. 그가 내게 보여줬던 수많은 길들을 떠올린다. 그 길이 이끄는 대로 잠자코 따라간다. 이렇게 허위허위 가다보면 길 어딘가에서 잃어버린 내 마음을 만날 것만 같다. 내 삶의 출발 지점에서나 볼 수 있었던 그런 순수함을….

그의 사진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마음이 따스해진다. 난 이후로도 자주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사진 속 길을 자주 찾을 것 같다.
펴낸 곳: 디자인 하우스
저자:압바스 키아로스타미
책값:1만 5,000원
출처 : 빈 가슴으로 살 걸 그랬습니다!
글쓴이 : 노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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