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의 미학
부제: 애통의 영성
본문: 막14:72
1. 눈물의 의미
언젠가 TV에서 재방영하는 터미네이터라는 영화를 보았습니다. 대단히 유명한 영화라서 아마 대부분 보셨을테지요. 그 2편의 마지막 장면을 영화평론가들은 역사상 가장 멋있는 장면 중의 하나라고 합니다. 사이보그 터미네이터가 스스로 용광로 속으로 들어가면서 엄지손가락을 세우며 마지막 작별을 고합니다. 참 감동적인 장면입니다. 그런데 그 장면과 함께 막 용광로에 들어가기 전에 주인공 소년이 가지 말라고 붙잡으며 눈물을 흘립니다. 그리고 터미네이터는 그 눈물을 보며 “나는 이 눈물의 의미를 알고 있다. 하지만 나에게는 없다”라고 합니다. 영화의 전체 줄거리는 바로 사이보그인 터미네이터의 무한정한 힘과 능력에 포커스를 맞추고 있지만, 그 모든 능력도 이 한 방울의 소년의 눈물에 왠지 왜소해지는 설정이 참으로 인상적입니다. 그렇게 보면 눈물이라는 것은 오직 사람에게만 있는 특별한 생리적 현상이며 또한 심리적 영적인 현상이기도 합니다.
눈물을 흘리며 슬퍼한다는 말을 다른 말로 바꾸면 애통한다고 합니다. 사람은 일평생을 살면서 최소한 몇 번 정도는 애통하는 일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을 슬퍼하는 일이나 또는 자신의 일이나 환경에 대한 실패와 좌절로 인한 애통하는 일도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애통하는 일이 있었습니까?
성경 속의 이야기 중에서 애통하고 통회하는 사람의 이야기는 대단히 많이 나옵니다. 그 중에서도 참 인상적인 눈물은 요셉의 눈물입니다. 형들에 의해서 죽음에 이르게 된 요셉은 오히려 눈물로서 형들을 위로하고 용서하는 이야기는 창세기 이야기의 가장 극적인 부분으로 수많은 믿는 자들에게 감동과 위로를 줍니다. 다윗은 자신의 죄를 통회자복 함으로써 하나님으로부터 새로운 언약을 받는 놀라는 일이 일어나기도 하는데, 이 언약의 사건을 우리는 신학적으로 헤세드라고 하는 무조건적인 하나님의 사랑의 사건이라고 합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나사로의 죽음을 전해 듣고 사람들과 함께 애통해 하시는 이야기는 우리들의 가슴을 여미게 만들기도 합니다. 이런 애통의 눈물은 하나님의 특별한 구속의 은총을 불러일으키는 놀라운 능력이 있습니다.
2. 한 밤에 일어난 일
오늘 우리가 보는 본문의 이야기는 너무나 유명한 주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시기 전날 하룻밤에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이 예루살렘의 하룻밤의 시간 속에서는 어떤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는지 그 속으로 잠시 들어가 봅니다.
예수께서는 마지막 만찬을 배설하시고, 떡과 포도주의 영원성(의미의 상징성)을 제자들에게 가르치셨습니다. 생명에 관한 것이지요. 그리고는 감람산으로 방향을 정하셨습니다. 제자들을 모으시고는 말씀을 하십니다. 그런데 정을 떼려고 말씀을 하신 것일까요?(막14:27 이하)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들이 흩어지리라’
희미한 불빛 아래에서 주님은 너무 가혹한 말씀을 제자들에게 하고 계십니다. 이 말씀을 들은 베드로는 즉시로 반문하기를 “다 버릴지라도 나는 그리하지 않겠나이다”라고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단연코 베드로의 배신을 이야기하십니다.
“오늘 이 밤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베드로가 정색을 하며 다시 부인합니다. 힘 있게 말하기를 “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이렇게 말하니 다른 제자들도 이구동성으로 같은 말을 합니다. 하지만 이런 제자들의 이야기는 아무런 위로가 되지를 못합니다.
겟세마네 동산에 이르러 제자들을 한 곳에 모으시고, 베드로 야고보 요한을 데리고 자리를 옮기시고는 기도를 시작하십니다. 주님의 간절한 기도는 밤이 새도록 계속되었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고뇌의 기도는 땀방울이 핏방울로 되어 떨어지는 간절한 기도였다고 누가는 보도하고 있습니다. 왜 이런 고뇌의 기도였는지 우리는 잘 알 수 없습니다. 그냥 육신을 가진 주님의 두려움과 슬픔을 극복하기 위한 기도였다고 하기에는 너무나 깊은 기도입니다. 어쩌면 하나님이 창조하신 거룩한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자들로부터 시작될 엄청난 비극적 사건에 대한 주님의 참담함이 그토록 절실한 기도를 하시게 되었을까요...
한편,
피를 짜는 절실한 기도를 하고 계시는 그 시간에 주님의 제자들은 깊은 잠에 빠져있었습니다. 주님이 깨우셨지만 그들은 여전히 그 시간에 잠이 들어있었습니다. 어쩌면 그들의 잠은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이 상황에서 오래전 아브람의 깊은 잠을 잠깐 연상해봅니다(창15:12) 하나님께서 그와 후손에게 주신 언약이 임할 시간에 그는 깊은 잠에 빠져있었습니다. 그가 올린 쪼갠 고기 사이로 하나님의 햇불이 지나가시며, 그의 후손에게 주어질 장엄한 역사와 언약이 주어질 때 아브람은 잠들어 있었습니다. 바로 주님의 십자가로 인한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와 죄 사함 그리고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언약이 세워질 바로 그 시간에 제자들은 잠들어 있게 되는 아이러니를 우리는 발견합니다. 하나님의 시간은 우리의 의지와 의식의 저편에서 우리와 상관없이 흐르고 있는 것일까요...
또 한편,
예수를 팔고, 죽이기를 작정한 자들의 모의도 그 시간 대단히 깊어지고 심층적인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가롯 유다는 그의 스승의 입에 죽음의 키스를 하는 예행연습을 하고 그와 동시에 칼과 몽치를 든 살해자들이 덮쳐서 주님을 사로잡을 계획이 완성됩니다. 그리고 이 계획은 바로 실행에 옮겨져서는 성공하게 됩니다.
주님을 발견한 유다는 반갑게 주님께 키스했고, 그들에게 이르기를 이 자를 단단히 끌어가라고 합니다. 종내 이 참담한 비극이 실행되어졌고, 그리고 뒤이어 주님의 제자들은 뿔뿔이 흩어지고 도망하게 됩니다. 물론 주님께서 이미 예견하셨지만 너무나 무기력하게 도망하는 자들을 주님은 어떤 눈을 보고 계셨을까요? 조금 전까지 죽기를 작정하고 주님을 배신하지 않겠다던 모든 제자들은 이미 종적을 감추어버렸습니다. 뒤이어 나오는 이야기가 오늘의 본문,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베드로의 처절한 배신입니다. 과연 그는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예수를 세 번 부인하고 급기야 저주하게 되었습니다.
3. 남 몰래 흘리는 눈물
한 밤중에 너무 많은 일들이 숨 가프고, 가슴 아프게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바로 이 현장 속에 베드로의 눈물이 흐르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어떤 모습으로 울었을까요? 땅바닥에 엎드려 땅을 치면 울었을까요? 아니면 마치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의 석양 길의 모습 같이 낙담하여 어깨를 늘인 채 울먹이며 걸었을까요? 아니면 마치 벌거벗은 어느 청년의 모습으로 도망치듯이 달음질치며 울었을까요?
오늘 본문에 보니 베드로는 주님의 말씀이 기억되어 생각하고 울었더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한 순간 베드로에게 만감이 교차했을 것입니다. 분명히 그는 목숨을 걸고 주님을 배신하지 않겠다고 맹세했지만 너무나 허무하게 그 약속을 저버렸고 더구나 그는 주님을 저주하기까지 했습니다. 자신의 연약함과 비참함에 그는 너무나 애통해 했을 것입니다. 그토록 주님은 그를 사랑하셨고, 그에 대한 특별한 애정을 보이셨습니다. 지난 삼년의 시간이 주마등 같이 흐르며 베드로의 심령에 깊은 슬픔이 휘몰아치기 시작했을 것입니다. 그는 그렇게 슬퍼하며 애통했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 주님을 불쌍하게 여기는 긍휼의 마음, 자신의 죄악 된 모습을 그는 처절하게 눈물로서 씻어 내리기 시작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날 밤의 이야기는 끝이 납니다.
베드로의 사도됨의 시작은 바로 이 눈물에서 시작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눈물이 하염없이 흐르는 애통하는 마음속에 바로 주님의 거룩한 영이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전에 그가 아무리 주님을 따라 다니며 놀라운 능력을 보고 따라 행했다고 할지라고 그의 영적인 변화가 없이는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그에게 주어진 주님의 사명과 놀라운 은사는 바로 이 한줄기 눈물로서 비로소 물꼬가 터지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애통하는 자에게 임하는 주님의 위로하심과 역사하심입니다. 애통하는 자에게 주님의 자리가 주님을 위한 생명의 여백과 공간이 생기는 진리입니다. 그래서 지난 시간 우리는 주님의 산상수훈의 말씀을 통하여 은혜와 생명의 여백을 이야기 했습니다. 바로 주님의 말씀이 바로 그 말씀입니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마5:4)
4. 체험
저는 어린 시절 어머니의 애통해 하는 모습을 본 적이 있습니다. 나이차가 많이 나는 큰형님이 군대입대를 위해서 삼천포에서 배를 타고 멀리 떠나는 때였습니다. 형님이 배에 오르고 배가 조금씩 움직이면서 형님은 제게 배 위에서 껌을 한통 던져주었습니다. 멀리 가는 형님을 위해 어머니께서 주신 것이었습니다. 저는 껌에 잠깐 정신을 팔았지만 선창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통곡하는 어머니를 보며 난감했습니다. 저는 그 이전에도 이후에도 그토록 슬퍼하는 어머니의 모습을 본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또 한 번은 외할머니와 막내이모를 따라 동네 점쟁이 집에 갔다가 할머니와 이모가 하염없이 흘리는 눈물을 보며 밖으로 나와서 몰래 울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냥 슬펐습니다. 그리고 그 슬픔은 세월이 가면서 그냥 한 때 있었던 슬픈 추억으로만 기억됩니다.
하지만 제 인생에 전환점이 되는 눈물의 사건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여러분도 잘 아시다시피 제가 고삼 때 겪었던 교회 안에서의 애통하던 일입니다. 환경과 나의 연약성으로 인한 죄악 된 삶으로 고단한 영혼이 지쳐가던 그 때에 주님은 뜻하지 않게 저를 아무도 없는 예배당으로 부르시고 알 수 없는 시간동안 하염없는 눈물을 흘리게 하셨습니다. 바로 그 눈물이 저를 완전히 다른 인생의 돌파를 허락하게 되었습니다. 이후에 많은 세월이 흐른 후 주님을 떠나 방황하고 타락하여 완전히 삶을 포기하던 그 때에도 주님은 저를 부르시고 너무도 깊은 애통의 눈물을 흘리게 하셨습니다. 그것이 두 번째 주 안에서의 눈물이었습니다.
세 번째는 선양원의 사역이 힘에 겨워있을 때 달리는 차 안에서 갑작스런 주님의 영혼들을 향한 뜨거운 마음이 저를 애통해 하게 했고, 주님의 임재를 체험케 되었습니다. 그리고 가장 최근에 부끄러운 일이지만 선양원이 전주로 이전하면서 수개월 동안 저는 처음으로 주님께 불평을 해보았습니다. 제가 과연 무엇을 제대로 하지 못한 것이 있습니까? 어째서 선양원은 유난히 물질의 문제로 이렇게 고통을 당해야 하고 이렇게 선한 사업이 왜 갈수록 위축되고 세상으로부터 힘들어야 합니까? 라는 불평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하염없이 힘을 잃어가고 있었습니다. 무기력해지는 제 자신을 추스를 생각도 없이 그냥 그렇게 주님을 향한 서운한 마음속에서 제 손발을 스스로 묶어버리기 시작했습니다. 더 이상 주께서 알아서 하시라는 체념이 찾아들기 시작했습니다.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에게 가까이 하시고 중심에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는 시편(시 34:18)의 말씀이 참으로 제게 주시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런데 마침 친구 목사님이 감리교 연수원에서 하는 영성 프로그램에 저를 등록해 주어서 성의를 생각해서 참여를 했습니다. 역시 예상대로 전혀 그 영적현장은 제게는 무기력함을 느끼는 시간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때에 주께서 강하게 역사하셨습니다. 바로 지난 날 제게 임했던 애통이 찾아왔습니다. 그것은 바로 주님의 애통이었고 성령의 눈물이었습니다. 주위의 사람들이 당혹해 하는 바람에 프로그램에도 빠져서 깊은 애통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리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습니다. 바뀐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물질이 들어 온 것도 아니고, 도우는 손길이 생긴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주님이 여전히 깊은 사랑으로 저를 품어주시는 것을 느꼈고 그것으로 저는 새롭게 자유함을 얻기 시작했습니다. 슬픔과 괴로운 환경의 어려움은 현실적으로 여전히 존재했지만 저는 그 가운데 있지 않았습니다. 그 상황으로부터 자유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미 오래전에 저는 자유자이었지만 스스로 나를 결박하는 올무에서 또다른 자유를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거룩한 분 앞에서 모든 올무를 벗어던진 거룩한 단독자의 나의 모습을 회복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5. 애통과 신의 성품
애통은 영혼의 고통을 치료하시는 하나님의 은총의 도구입니다. 애통할 때 우리는 눈물을 흘리게 됩니다. 애통하며 눈물을 흘릴 때 상처받은 영혼에 치유의 역사가 일어나게 됩니다. 눈물은 영혼을 치유하는 약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신비로운 선물입니다. 눈물을 흘리면서 성경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성경과 눈물이 만날 때 성경은 우리 영혼을 위해 최고의 선물을 내어 놓습니다. A W 토저는 “성경은 눈물 속에서 쓰였기 때문에, 눈물 앞에 최고의 보물을 내놓는다”고 말했습니다. 애통이 좋은 것은 애통을 통해 통회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애통할 때 우리는 자신의 참된 모습을 보고 회개하게 되고, 애통할 때 우리 영혼은 정화됩니다. 존 클리마쿠스는 ‘영적 상승의 사다리’라는 책에서 애통을 ‘영혼 안에 있는 황금 채찍’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는 진심으로 애통할 때 우리는 ‘극도로 자비로워지고’ 비판하지 않게 된다고 말합니다.
애통할 때 우리의 마음은 부드러워지고, 우리 영혼은 맑아집니다. 애통할 때 우리 자신의 참된 모습을 보고 회개하게 되며, 애통할 때 더 이상 교만할 수가 없습니다. 애통은 회개의 시녀이며, 회개는 겸손으로 이어지는 관문이기도 합니다. 애통할 때 우리 안에 있는 잘못된 욕망들이 모두 송두리째 정화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애통을 우리의 잘못된 욕망을 해독하는 해독제로 삼아야 합니다. 제임스 화이트는 “우리가 겪는 슬픔은 하나님께서 우리 삶 속에 있는 불순물을 제거하시는 수단이다”고 말했습니다.
애통하는 것은 아픔을 수반하고 고통을 동반합니다. 불순물이 제거되는 과정은 고통스럽지만, 그러나 애통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신성을 체험하게 됩니다. 애통 후에 찾아오는 것은 은밀한 위로이며, 애통 후에 찾아오는 것은 정결함입니다. 애통 후에 찾아오는 것은 기쁨이며, 애통 후에 하늘의 평안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애통 후에 소망이 물밀듯 밀려오는 것을 경험하게 되기도 합니다.
베드로의 애통은 바로 그가 체험한 주님의 신성을 재확인하여 그의 영혼 깊숙한 곳으로 주님을 채우고 그의 영혼이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을 닮아가는 삶을 시작하는 재출발의 거룩한 영성이었습니다.
갈수록 영이 메말라가고 건조해지는 세상 속에서 우리는 힘겨워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런 세상 속으로부터 선양원에 모인 우리는 과연 무엇으로 영혼을 채우고 있습니까? 이제 우리는 이제까지 알아오고 생각해 왔던 많은 것으로부터 자유 해져야합니다. 무엇보다도 영혼의 자유함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자유를 위해서는 거룩한 생명의 세계로 들어가야 합니다. 그 생명은 곧 하나님의 나라요 거룩한 신성 즉 신의 품성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우리의 가식과 교만과 모든 헛된 욕망으로부터 벗어나야 합니다. 그 첫걸음이 바로 우리의 깊은 고독과 슬픔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슬픔과 고독을 드러내십시오. 감추고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그럴수록 우리는 신성에서 멀어지고 그 분과의 관계에서 소외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그 분에게 솔직하게 나타내시고 표현하십시오. 주께서는 바로 그런 우리의 모습을 보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고후12:10)
주님을 위한 영혼의 여백을 만들어내십시오.
애통하는 영성, 곧 눈물의 미학은 바로 신의 성품에의 참여입니다.
마라나타!
주여 오시옵소서!
2008년 6월 첫번째 날
만덕산에서
부제: 애통의 영성
본문: 막14:72
1. 눈물의 의미
언젠가 TV에서 재방영하는 터미네이터라는 영화를 보았습니다. 대단히 유명한 영화라서 아마 대부분 보셨을테지요. 그 2편의 마지막 장면을 영화평론가들은 역사상 가장 멋있는 장면 중의 하나라고 합니다. 사이보그 터미네이터가 스스로 용광로 속으로 들어가면서 엄지손가락을 세우며 마지막 작별을 고합니다. 참 감동적인 장면입니다. 그런데 그 장면과 함께 막 용광로에 들어가기 전에 주인공 소년이 가지 말라고 붙잡으며 눈물을 흘립니다. 그리고 터미네이터는 그 눈물을 보며 “나는 이 눈물의 의미를 알고 있다. 하지만 나에게는 없다”라고 합니다. 영화의 전체 줄거리는 바로 사이보그인 터미네이터의 무한정한 힘과 능력에 포커스를 맞추고 있지만, 그 모든 능력도 이 한 방울의 소년의 눈물에 왠지 왜소해지는 설정이 참으로 인상적입니다. 그렇게 보면 눈물이라는 것은 오직 사람에게만 있는 특별한 생리적 현상이며 또한 심리적 영적인 현상이기도 합니다.
눈물을 흘리며 슬퍼한다는 말을 다른 말로 바꾸면 애통한다고 합니다. 사람은 일평생을 살면서 최소한 몇 번 정도는 애통하는 일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을 슬퍼하는 일이나 또는 자신의 일이나 환경에 대한 실패와 좌절로 인한 애통하는 일도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애통하는 일이 있었습니까?
성경 속의 이야기 중에서 애통하고 통회하는 사람의 이야기는 대단히 많이 나옵니다. 그 중에서도 참 인상적인 눈물은 요셉의 눈물입니다. 형들에 의해서 죽음에 이르게 된 요셉은 오히려 눈물로서 형들을 위로하고 용서하는 이야기는 창세기 이야기의 가장 극적인 부분으로 수많은 믿는 자들에게 감동과 위로를 줍니다. 다윗은 자신의 죄를 통회자복 함으로써 하나님으로부터 새로운 언약을 받는 놀라는 일이 일어나기도 하는데, 이 언약의 사건을 우리는 신학적으로 헤세드라고 하는 무조건적인 하나님의 사랑의 사건이라고 합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나사로의 죽음을 전해 듣고 사람들과 함께 애통해 하시는 이야기는 우리들의 가슴을 여미게 만들기도 합니다. 이런 애통의 눈물은 하나님의 특별한 구속의 은총을 불러일으키는 놀라운 능력이 있습니다.
2. 한 밤에 일어난 일
오늘 우리가 보는 본문의 이야기는 너무나 유명한 주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시기 전날 하룻밤에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이 예루살렘의 하룻밤의 시간 속에서는 어떤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는지 그 속으로 잠시 들어가 봅니다.
예수께서는 마지막 만찬을 배설하시고, 떡과 포도주의 영원성(의미의 상징성)을 제자들에게 가르치셨습니다. 생명에 관한 것이지요. 그리고는 감람산으로 방향을 정하셨습니다. 제자들을 모으시고는 말씀을 하십니다. 그런데 정을 떼려고 말씀을 하신 것일까요?(막14:27 이하)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들이 흩어지리라’
희미한 불빛 아래에서 주님은 너무 가혹한 말씀을 제자들에게 하고 계십니다. 이 말씀을 들은 베드로는 즉시로 반문하기를 “다 버릴지라도 나는 그리하지 않겠나이다”라고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단연코 베드로의 배신을 이야기하십니다.
“오늘 이 밤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베드로가 정색을 하며 다시 부인합니다. 힘 있게 말하기를 “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이렇게 말하니 다른 제자들도 이구동성으로 같은 말을 합니다. 하지만 이런 제자들의 이야기는 아무런 위로가 되지를 못합니다.
겟세마네 동산에 이르러 제자들을 한 곳에 모으시고, 베드로 야고보 요한을 데리고 자리를 옮기시고는 기도를 시작하십니다. 주님의 간절한 기도는 밤이 새도록 계속되었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고뇌의 기도는 땀방울이 핏방울로 되어 떨어지는 간절한 기도였다고 누가는 보도하고 있습니다. 왜 이런 고뇌의 기도였는지 우리는 잘 알 수 없습니다. 그냥 육신을 가진 주님의 두려움과 슬픔을 극복하기 위한 기도였다고 하기에는 너무나 깊은 기도입니다. 어쩌면 하나님이 창조하신 거룩한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자들로부터 시작될 엄청난 비극적 사건에 대한 주님의 참담함이 그토록 절실한 기도를 하시게 되었을까요...
한편,
피를 짜는 절실한 기도를 하고 계시는 그 시간에 주님의 제자들은 깊은 잠에 빠져있었습니다. 주님이 깨우셨지만 그들은 여전히 그 시간에 잠이 들어있었습니다. 어쩌면 그들의 잠은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이 상황에서 오래전 아브람의 깊은 잠을 잠깐 연상해봅니다(창15:12) 하나님께서 그와 후손에게 주신 언약이 임할 시간에 그는 깊은 잠에 빠져있었습니다. 그가 올린 쪼갠 고기 사이로 하나님의 햇불이 지나가시며, 그의 후손에게 주어질 장엄한 역사와 언약이 주어질 때 아브람은 잠들어 있었습니다. 바로 주님의 십자가로 인한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와 죄 사함 그리고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언약이 세워질 바로 그 시간에 제자들은 잠들어 있게 되는 아이러니를 우리는 발견합니다. 하나님의 시간은 우리의 의지와 의식의 저편에서 우리와 상관없이 흐르고 있는 것일까요...
또 한편,
예수를 팔고, 죽이기를 작정한 자들의 모의도 그 시간 대단히 깊어지고 심층적인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가롯 유다는 그의 스승의 입에 죽음의 키스를 하는 예행연습을 하고 그와 동시에 칼과 몽치를 든 살해자들이 덮쳐서 주님을 사로잡을 계획이 완성됩니다. 그리고 이 계획은 바로 실행에 옮겨져서는 성공하게 됩니다.
주님을 발견한 유다는 반갑게 주님께 키스했고, 그들에게 이르기를 이 자를 단단히 끌어가라고 합니다. 종내 이 참담한 비극이 실행되어졌고, 그리고 뒤이어 주님의 제자들은 뿔뿔이 흩어지고 도망하게 됩니다. 물론 주님께서 이미 예견하셨지만 너무나 무기력하게 도망하는 자들을 주님은 어떤 눈을 보고 계셨을까요? 조금 전까지 죽기를 작정하고 주님을 배신하지 않겠다던 모든 제자들은 이미 종적을 감추어버렸습니다. 뒤이어 나오는 이야기가 오늘의 본문,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베드로의 처절한 배신입니다. 과연 그는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예수를 세 번 부인하고 급기야 저주하게 되었습니다.
3. 남 몰래 흘리는 눈물
한 밤중에 너무 많은 일들이 숨 가프고, 가슴 아프게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바로 이 현장 속에 베드로의 눈물이 흐르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어떤 모습으로 울었을까요? 땅바닥에 엎드려 땅을 치면 울었을까요? 아니면 마치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의 석양 길의 모습 같이 낙담하여 어깨를 늘인 채 울먹이며 걸었을까요? 아니면 마치 벌거벗은 어느 청년의 모습으로 도망치듯이 달음질치며 울었을까요?
오늘 본문에 보니 베드로는 주님의 말씀이 기억되어 생각하고 울었더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한 순간 베드로에게 만감이 교차했을 것입니다. 분명히 그는 목숨을 걸고 주님을 배신하지 않겠다고 맹세했지만 너무나 허무하게 그 약속을 저버렸고 더구나 그는 주님을 저주하기까지 했습니다. 자신의 연약함과 비참함에 그는 너무나 애통해 했을 것입니다. 그토록 주님은 그를 사랑하셨고, 그에 대한 특별한 애정을 보이셨습니다. 지난 삼년의 시간이 주마등 같이 흐르며 베드로의 심령에 깊은 슬픔이 휘몰아치기 시작했을 것입니다. 그는 그렇게 슬퍼하며 애통했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 주님을 불쌍하게 여기는 긍휼의 마음, 자신의 죄악 된 모습을 그는 처절하게 눈물로서 씻어 내리기 시작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날 밤의 이야기는 끝이 납니다.
베드로의 사도됨의 시작은 바로 이 눈물에서 시작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눈물이 하염없이 흐르는 애통하는 마음속에 바로 주님의 거룩한 영이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전에 그가 아무리 주님을 따라 다니며 놀라운 능력을 보고 따라 행했다고 할지라고 그의 영적인 변화가 없이는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그에게 주어진 주님의 사명과 놀라운 은사는 바로 이 한줄기 눈물로서 비로소 물꼬가 터지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애통하는 자에게 임하는 주님의 위로하심과 역사하심입니다. 애통하는 자에게 주님의 자리가 주님을 위한 생명의 여백과 공간이 생기는 진리입니다. 그래서 지난 시간 우리는 주님의 산상수훈의 말씀을 통하여 은혜와 생명의 여백을 이야기 했습니다. 바로 주님의 말씀이 바로 그 말씀입니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마5:4)
4. 체험
저는 어린 시절 어머니의 애통해 하는 모습을 본 적이 있습니다. 나이차가 많이 나는 큰형님이 군대입대를 위해서 삼천포에서 배를 타고 멀리 떠나는 때였습니다. 형님이 배에 오르고 배가 조금씩 움직이면서 형님은 제게 배 위에서 껌을 한통 던져주었습니다. 멀리 가는 형님을 위해 어머니께서 주신 것이었습니다. 저는 껌에 잠깐 정신을 팔았지만 선창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통곡하는 어머니를 보며 난감했습니다. 저는 그 이전에도 이후에도 그토록 슬퍼하는 어머니의 모습을 본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또 한 번은 외할머니와 막내이모를 따라 동네 점쟁이 집에 갔다가 할머니와 이모가 하염없이 흘리는 눈물을 보며 밖으로 나와서 몰래 울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냥 슬펐습니다. 그리고 그 슬픔은 세월이 가면서 그냥 한 때 있었던 슬픈 추억으로만 기억됩니다.
하지만 제 인생에 전환점이 되는 눈물의 사건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여러분도 잘 아시다시피 제가 고삼 때 겪었던 교회 안에서의 애통하던 일입니다. 환경과 나의 연약성으로 인한 죄악 된 삶으로 고단한 영혼이 지쳐가던 그 때에 주님은 뜻하지 않게 저를 아무도 없는 예배당으로 부르시고 알 수 없는 시간동안 하염없는 눈물을 흘리게 하셨습니다. 바로 그 눈물이 저를 완전히 다른 인생의 돌파를 허락하게 되었습니다. 이후에 많은 세월이 흐른 후 주님을 떠나 방황하고 타락하여 완전히 삶을 포기하던 그 때에도 주님은 저를 부르시고 너무도 깊은 애통의 눈물을 흘리게 하셨습니다. 그것이 두 번째 주 안에서의 눈물이었습니다.
세 번째는 선양원의 사역이 힘에 겨워있을 때 달리는 차 안에서 갑작스런 주님의 영혼들을 향한 뜨거운 마음이 저를 애통해 하게 했고, 주님의 임재를 체험케 되었습니다. 그리고 가장 최근에 부끄러운 일이지만 선양원이 전주로 이전하면서 수개월 동안 저는 처음으로 주님께 불평을 해보았습니다. 제가 과연 무엇을 제대로 하지 못한 것이 있습니까? 어째서 선양원은 유난히 물질의 문제로 이렇게 고통을 당해야 하고 이렇게 선한 사업이 왜 갈수록 위축되고 세상으로부터 힘들어야 합니까? 라는 불평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하염없이 힘을 잃어가고 있었습니다. 무기력해지는 제 자신을 추스를 생각도 없이 그냥 그렇게 주님을 향한 서운한 마음속에서 제 손발을 스스로 묶어버리기 시작했습니다. 더 이상 주께서 알아서 하시라는 체념이 찾아들기 시작했습니다.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에게 가까이 하시고 중심에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는 시편(시 34:18)의 말씀이 참으로 제게 주시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런데 마침 친구 목사님이 감리교 연수원에서 하는 영성 프로그램에 저를 등록해 주어서 성의를 생각해서 참여를 했습니다. 역시 예상대로 전혀 그 영적현장은 제게는 무기력함을 느끼는 시간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때에 주께서 강하게 역사하셨습니다. 바로 지난 날 제게 임했던 애통이 찾아왔습니다. 그것은 바로 주님의 애통이었고 성령의 눈물이었습니다. 주위의 사람들이 당혹해 하는 바람에 프로그램에도 빠져서 깊은 애통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리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습니다. 바뀐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물질이 들어 온 것도 아니고, 도우는 손길이 생긴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주님이 여전히 깊은 사랑으로 저를 품어주시는 것을 느꼈고 그것으로 저는 새롭게 자유함을 얻기 시작했습니다. 슬픔과 괴로운 환경의 어려움은 현실적으로 여전히 존재했지만 저는 그 가운데 있지 않았습니다. 그 상황으로부터 자유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미 오래전에 저는 자유자이었지만 스스로 나를 결박하는 올무에서 또다른 자유를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거룩한 분 앞에서 모든 올무를 벗어던진 거룩한 단독자의 나의 모습을 회복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5. 애통과 신의 성품
애통은 영혼의 고통을 치료하시는 하나님의 은총의 도구입니다. 애통할 때 우리는 눈물을 흘리게 됩니다. 애통하며 눈물을 흘릴 때 상처받은 영혼에 치유의 역사가 일어나게 됩니다. 눈물은 영혼을 치유하는 약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신비로운 선물입니다. 눈물을 흘리면서 성경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성경과 눈물이 만날 때 성경은 우리 영혼을 위해 최고의 선물을 내어 놓습니다. A W 토저는 “성경은 눈물 속에서 쓰였기 때문에, 눈물 앞에 최고의 보물을 내놓는다”고 말했습니다. 애통이 좋은 것은 애통을 통해 통회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애통할 때 우리는 자신의 참된 모습을 보고 회개하게 되고, 애통할 때 우리 영혼은 정화됩니다. 존 클리마쿠스는 ‘영적 상승의 사다리’라는 책에서 애통을 ‘영혼 안에 있는 황금 채찍’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는 진심으로 애통할 때 우리는 ‘극도로 자비로워지고’ 비판하지 않게 된다고 말합니다.
애통할 때 우리의 마음은 부드러워지고, 우리 영혼은 맑아집니다. 애통할 때 우리 자신의 참된 모습을 보고 회개하게 되며, 애통할 때 더 이상 교만할 수가 없습니다. 애통은 회개의 시녀이며, 회개는 겸손으로 이어지는 관문이기도 합니다. 애통할 때 우리 안에 있는 잘못된 욕망들이 모두 송두리째 정화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애통을 우리의 잘못된 욕망을 해독하는 해독제로 삼아야 합니다. 제임스 화이트는 “우리가 겪는 슬픔은 하나님께서 우리 삶 속에 있는 불순물을 제거하시는 수단이다”고 말했습니다.
애통하는 것은 아픔을 수반하고 고통을 동반합니다. 불순물이 제거되는 과정은 고통스럽지만, 그러나 애통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신성을 체험하게 됩니다. 애통 후에 찾아오는 것은 은밀한 위로이며, 애통 후에 찾아오는 것은 정결함입니다. 애통 후에 찾아오는 것은 기쁨이며, 애통 후에 하늘의 평안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애통 후에 소망이 물밀듯 밀려오는 것을 경험하게 되기도 합니다.
베드로의 애통은 바로 그가 체험한 주님의 신성을 재확인하여 그의 영혼 깊숙한 곳으로 주님을 채우고 그의 영혼이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을 닮아가는 삶을 시작하는 재출발의 거룩한 영성이었습니다.
갈수록 영이 메말라가고 건조해지는 세상 속에서 우리는 힘겨워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런 세상 속으로부터 선양원에 모인 우리는 과연 무엇으로 영혼을 채우고 있습니까? 이제 우리는 이제까지 알아오고 생각해 왔던 많은 것으로부터 자유 해져야합니다. 무엇보다도 영혼의 자유함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자유를 위해서는 거룩한 생명의 세계로 들어가야 합니다. 그 생명은 곧 하나님의 나라요 거룩한 신성 즉 신의 품성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우리의 가식과 교만과 모든 헛된 욕망으로부터 벗어나야 합니다. 그 첫걸음이 바로 우리의 깊은 고독과 슬픔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슬픔과 고독을 드러내십시오. 감추고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그럴수록 우리는 신성에서 멀어지고 그 분과의 관계에서 소외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그 분에게 솔직하게 나타내시고 표현하십시오. 주께서는 바로 그런 우리의 모습을 보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고후12:10)
주님을 위한 영혼의 여백을 만들어내십시오.
애통하는 영성, 곧 눈물의 미학은 바로 신의 성품에의 참여입니다.
마라나타!
주여 오시옵소서!
2008년 6월 첫번째 날
만덕산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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