書/楷書해서

九成宮禮泉銘

oldhabit 2008. 6. 20. 17:07

 

九成宮醴泉銘(唐, 歐陽詢)

 


당나라는 서예사에서 매우 휘황찬란한 전환기로, 특히 근엄한 해법을 전형으로 삼고 있다.  이러한 것은 초당사대가에 의해 실현되었다.  그 중에서 해법이 가장 정확하고 용필이 굳세고 험절한 사람은 구양순을 능가할 수 없다.  그는 스스로 새로운 뜻을 창조하고 풍격이 매우 두드러졌기 때문에 그의 글씨를 ‘구체(歐體)’라고 부른다.

구양순(歐陽詢, 557-641)의 자는 신본(信本)이고 담주임상(潭州臨湘, 지금의 湖南省 長沙) 사람으로 당나라의 걸출한 서예가ㆍ서예교육자ㆍ대학자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영민함이 뛰어났고 뜻이 돈독하면서 게으르지 않았다.  『구당서(舊唐書)』에서는 그를 “경사를 두루 보았고 특히 삼사(三史)에 정통했다.”라고 했다.  일찍이 진, 수, 당 삼조에 벼슬했는데, 수나라 때는 태상박사(太常博士)를 지내다가 당나라에 들어와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ㆍ태자솔경령(太子率更令), 홍문관학사(弘文館學士) 등을 지냈기 때문에 ‘구양솔경(歐陽率更)’이라 불렸다.  전하는 작품으로는 <화도사옹선사탑명(化度寺邕禪師塔銘)>, <구성궁예천명(九成宮醴泉銘)>, <황보탄비(皇甫誕碑)>, <방언겸비(房彦謙碑)>, <몽전첩(夢奠帖)>, <복상첩(卜商帖)>, <장한사로첩(張翰思鱸帖)> 등이 있다.  당 고조 무덕(武德) 7년(624) 구양순은 배구(裵矩), 진숙달(陳叔達), 령호덕분(令狐德棻) 등 10여 명과 더불어 조서를 받들어 당시 최대 규모의 책인 『예문유취(藝文類聚)』를 편찬했다.

구양순의 해서작품으로는 마땅히 <구성궁예천명>을 꼽을 수 있다.

<구성궁예천명>은 당나라 정관 6년(632) 4월에 새긴 것으로 위징(魏徵)이 글을 짓고 구양순의 나이 75세에 쓴 것으로 만년의 노필이라 하겠다.  이 비는 역대로 매우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옹방강은 『복초재문집(復初齋文集)』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구양순의 해서인 <구성궁비>, <황보탄비>, <우공비>는 모두 전반에 힘이 굳세고 뒤로 갈수록 점차로 가볍게 수렴된다.  비록 <화도사비>가 순박하고 예스러워 상품으로 치지만 이것 역시 후반이 전반보다 수렴되었으니 스스로 필격을 이룸이 종신토록 한결같다.  오직 <예천명>만 전반이 굳세고 후반이 너그러워 모든 비들이 전반은 펼치고 후반은 수렴한 것과 같지 않다.  어찌 칙명을 받들어 썼기 때문에 단정함을 나타내려고 그런 것인가, 아니면 글자 형세가 조금 커서 수렴시키지 않고 펼친 것인가?  요점은 그 결체에 합하고 장법을 헤아린 것으로 이는 구양순 평생에 독특한 뜻을 발휘하여 모든 것이 법도와 방원에 지극함을 나타내었다.  그러므로 모든 서예가와 백대의 법이 되었다.

 


용필을 보면 남북 양파의 특징을 합했고 부아구(浮鵝鉤)는 모두 예서 필법을 사용했다.  갈고리를 할 때 먼저 붓을 누른 뒤에 조금씩 가볍게 들어 물결에 따라 배를 미는 방법으로 오른쪽 위로 향해 들려 보냈으니, 예를 들면 ‘九’자가 그러하다.  기타 갈고리의 특징은 첫째로 필봉을 내보냄에 짧고 포만하며, 둘째는 각도가 대부분 90°이거나 혹은 90°보다 크며 골력을 안에다 감추어 기개가 웅장하고 혼후하다.  꺾음은 내엽법을 사용했고 경중의 변화는 은밀한 사이에 있으며 굳세면서 기운이 둥글고 유창하여 왕희지의 신수를 얻었다.  가로획은 순반역법(順反逆法)을 채용해 골기가 평화롭다.  주된 가로획의 경우는 때때로 왼쪽을 피하고 오른쪽을 펴는 법을 채용해 기타 서예가와 상반된 것 같다.  세로획은 역반순법(逆反順法)을 운용해 역필로 곧게 내려 마치 칼날이 골육 사이를 드나드는 것 같아 밖은 험준하고 날카로움이 나타나고 안은 온아함을 함유했으니, 이는 ‘구체’에서 가장 공력이 나타나는 곳이다.  삼수변에서 중간의 점은 모두 삼각형으로 세우는 법을 운용했으니 이는 북비에서 나온 법이다.  세워서 왼쪽으로 삐치는 획은 ⅔는 세로획 법을 운용한 뒤에 형세를 따라 둥글게 삐쳤다.  이렇게 하면 이미 중심이 평형을 이루면서 또한 아랫부분이 유창하고 붓털의 표일함에 도달할 수 있다.  결체는 안이 조밀하고 밖이 성근 법을 채용했고 중궁은 수렴하여 정갈하고 주필은 밖이 성글게 했다.  필세는 마치 망치를 때리고 북을 두드리는 것 같고 파리하면서 굳세어 정신이 맑고 기가 상쾌하다.  그러나 배우는 사람이 이런 법을 얻지 못하면 쉽게 관각체의 마도에 빠질 수 있다. 

 

벽하

 가재벽성산하(家在碧城山下)

 

 

<<구성궁예천명>>

왼쪽 마지막에 "맑기가 거울 같고 맛이 좋기가 예(醴)와 같다"는 내용이 보입니다.

붉은 낙관은 벽하(碧下)라고 했는데 벽하는 조주승(趙周昇, 1854-1905)으로

석정 이정직의 문하에서 배운 바 있고 글씨, 특히 해서에 능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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