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의 잔고를 바닥내다
-임동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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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생처음 마이너스통장을 개설하려고 주거래은행 대출창구로 갔어 꽃무늬 넥타이를 맨 직원이 습관처럼 물었어 무슨 일로 오셨느냐고, 나는 마이너스통장을 개설하려 왔다고 했어 계좌번호를 묻기에 얼른 잔고가 바닥 난 통장을 건네주었어 229,22,0307,291 키보드에 계좌번호를 쳐 넣자 모니터화면에 뭔가가 떠올랐어 그 사내가 측은한 눈빛으로 얼마를 쓰시겠느냐고 나지막이 말했어 도리어 내가 얼마나 가능하냐고 물었어 그 사내는 이 백 만원하고 무 자르듯 말했어 순간 수년간 거래해온 내 신용이 고것 밖에 안 된다는 사실에 울컥, 서러워졌어 애써 밝은 표정을 만들며 한 오 백은 안될까요, 하고 사정을 했어 그러자 사내는 직업이 뭐냐고 또 물었지 그래서 나는 당당하게 아아, 대한민국 시인이라고 말해주었지 그랬더니 그 사내 시인도 직업이냐고 낄낄거렸어 연봉이 얼마냐고 툴툴거렸어 그리고 아주 단호하게 말했어 보증을 세우세요, 보증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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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남자가 통장을 다시 내밀었을 때, 구부러진 내 몸에서는 장마철 그 곰팡내가 훅 끼쳐왔어 그때 가장 시급한 것은 내 젊음을 찾는 일이었어 보증 받지 못한 자리, 보증 받지 못한 세월이 우수수 떨어지는 은행잎 되어 길바닥을 노랗게 물들였어 단칸 셋방에서 시작한 신혼, 아들 딸 키우느라 등 굽은 세월이 덕지덕지 쌓여서 먼지처럼 풀풀 날아다녔어 오로지 앞만 보고 달려온 추억들이 낙엽처럼 쌓이는, 날마다 나사가 풀리는, 내 몸의 무게가 깃털처럼 가벼워지는… 오오, 보상받을 수 없는 세월만 키웠던 거야 이제 내 몸은 차압당할 염려가 없어 누가 보증을 서달라고 해도 안심이야 담보로 잡기엔 내 몸은 이제 너무 빈약한 걸! 그래 안심이야, 안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