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縉雲縣城隍廟碑》
이양빙 초당집서 마지막편
又與贺知章1)、崔宗之2)等自为八仙之游3), 谓公谪仙人4),
또 하지장、최종지 등과 어울리어 스스로 여덟 명의 신선이 함께 노닌다고 생각하였다. 이백을 일컬어 하늘에서 인간세계로 쫓겨 온 신선이라 하였다.
朝列赋谪仙之歌, 凡数百首, 多言公之不得意. 天子知其不可留, 乃赐金归之5).
조정의 고관대작들이 연회석에서 종종 이백의 시가를 노래로 부르는 열풍이 불었다. 이백의 시가 작품 수백 수가 전하는데, 대부분의 내용은 이백이 큰 뜻을 얻지 못한 것을 나타낸 작품들이다. 황제께서 이백이 떠나는 마음을 돌이킬 수 없음을 아시고 이에 황금을 하사하고 그가 살던 자연으로 돌아갈 것을 허락하였다.
遂就从祖陈留采访大使彦允6), 请北海高天师授道籙于齐州紫極宫7),
드디어 종조부인 하남성 진류군채방사 이언윤을 찾아갔으며, 북해도사 고천사에게 청하여 제주군의 도교사원인 자극궁에서 도교의 비서를 전해받았다.
장차 동쪽으로 봉래산으로 갔다가, 신선을 찾으러 단구로 수레를 몰았다.
阳冰试弦歌于當塗10), 心非所好11), 公遐不棄我12), 乘扁舟而相顾13).
이양빙이 당도현 현령으로서 책무를 다하고자 평소 음악과 경서 등 교육에 심혈을 기울여보고자 하였는데, (내 자신이 부족한 탓이라) 마음에 만족하는 바가 없었다. 이백은 항상 나를 멀리하거나 저버리는 일이 없어서, 시간을 내어 작은 배를 타고 이백과 함께 서로 얼굴을 바라보면서 담소를 나누었다.
临當挂冠14), 公又疾15)殛16), 草稿萬卷17), 手集未修, 枕上授简18), 俾19)予为序.
마침 관직을 내놓으려할 때에 이백께서 또 병환이 위급하였다. 당시 이백의 시문 원고가 만권이나 남아 있었는데, 친히 문집의 정리를 마치지 못하였다. 병석에서 나에게 정리되지 못한 원고를 책으로 편집해 줄 것을 부탁하였으며, 아울러 나로 하여금 문집의 서문을 짓게 하였다.
论《关睢》之义20), 始愧卜商21). 明《春秋》之辞22), 终惭杜预.
《시경》중에 <관저편>의 대의를 논하려니, 처음에는 문학으로 유명한 공자의 제자 자하에게 부끄럽고, 공자께서 엮은《춘추》의 성현의 오묘한 말씀을 설명하자니, 끝으로는 서진의 역사학자 두예에게 부끄럽구나.(문학과 역사에 박식한 이백에 대한 존경을 나타낸 말)
自中原有事, 公避地八年, 當时著述, 十丧其九, 今所存者, 皆得之他人焉23).
중원에서 안사의 난이 발생한 이래로 이백은 피난 생활을 8년 동안 하였다. 당시의 지은 이백의 시문들은 열에 아홉(10%)은 실전되었다. 지금 남아 전하는 것은 모두 다른 사람들로부터 구한 것이다.
时寶应元年十一月乙酉也.
이때는 바로 대종(代宗) 이예(李豫) 시기의 보응 원년(762) 11월 을유일이었다.
청풍헌에서
이양빙의 전서 천자문이 유명하다.
'書 > 篆書전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천작호합(하늘의 이룸으로 서로 좋게 만남) (0) | 2010.03.29 |
---|---|
[스크랩] 입춘대길 건양다경 (0) | 2010.03.26 |
[스크랩] 지산님의 부채작품 (0) | 2010.03.26 |
[스크랩] 부채 금석문 입니다 즐감하세요 (0) | 2010.03.26 |
[스크랩] 묵지사랑전2점,섬동사랑2점 휘호,황소의 걸음으로1점,묵자와예수 복간기념 묵점선생님께 휘호,라뮤즈사랑휘호... (0) | 2010.03.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