言/사모하는惠

질투섞인 사랑

oldhabit 2008. 5. 24. 10:49

질투 섞인 사랑

엔도 슈사꾸는 <예수의 생애> 서두에서 “참된 예수의 모습이나 얼굴은 그와 더불어 산 자, 예수가 그의 인생을 가로지른 인간 이외에는 그 누구도 본 적이 없다. 예수의 생애를 말하고 있는 성서마저 그의 외모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성서를 읽을 때, 우리들이 왠지 예수의 모습을 그려볼 수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은, 성서를 쓴 사람들, 곧 예수를 알았던 사람들이 평생토록 그를 잊을 수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라고 적고 있다. 창전백삼(倉田百三)이 <사랑과 인식의 출발>이란 책에서 말한 것처럼,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사람의 운명을 사랑한다는 것일 텐데, 성서를 지은 이들은 아마도 예수의 운명을 절실히 사랑했던 연인들이었을 것이다. 그분의 목숨마저 삼켜버린 세상 속에서 그분의 살 냄새와 언어, 그 음색(音色)마저도 기억해내려고 안간힘 쓰던 사람들은 그분의 생애를 자신의 생애로 삼아 살기로 작정했을 것이다. 그런 뜻에서 창전이 한 말은 옳다.

 


종교는 자기에 대한 요구이다. 자기를 참으로 살리고자 하는 내부 생명의 노력이다. 불완전한 자가 완전함을 구하는 사모(思慕)이다. 스스로 가난하고, 거짓으로 가득 차고 흔들려서 위태로움을 아는 겸손한 마음이 풍성하고 진실하며 결단코 동요되지 않는 절대의 실재를 구하는 무한한 동경이다. 혼자서 고독하게 살아갈 수 없는 쓸쓸한 혼이 영원히 변하지 않는 애인과 함께 살고자 하는 절실한 염원이다.

 


러시아의 대문호라는 도스토예프스키가 만났던 예수 역시 그와 같은 줄에 서 있다. <죄와 벌>을 썼던 그는 1847년 짜르체제 아래서 급진적인 정치서클에 가담하였는데, 그 결과는 엄청난 것이었다. 2년 뒤에 그룹 전체, 24명의 청년 이상주의자들이 체포당하였고, 그중 21명은 사형을 선고받았다. 사형언도를 받은 뒤 형장으로 끌려간 도스토예프스키는 말 그대로 최후의 순간에 사면을 받았다. 그는 4년 동안 시베리아에서 강제노동을 하고, 뒤이어 4년 동안 군복무를 선고받는다. 당시 그는 책도 펜도 없이 아무하고도 만나지 못한 채 살아야 했는데, 손에 쥘 수 있는 것은 신약성서 한 권뿐이었다. 그 절명의 시기에 도스토예프스키는 엄청난 신앙에 직면하였다. 마흔 살이 다 되어 페테스부르그에 돌아 온 그는 자신이 발견한 은밀하고 과감한 사랑을 이렇게 고백하였다.

 


나는 예수보다 더 아름답고 심오하고 동정심 있고 이성적이고 인간적이고 완전한 존재는 없다고 믿습니다. 나는 질투 섞인 사랑을 고백합니다. 예수와 같은 존재는 있지 않을 뿐 아니라 있을 수도 없습니다. 나는 또 말하고 싶습니다. 누군가 나에게 예수가 진실 밖에 있다는 것을 입증한다면, 그 진실이 참으로 예수 밖에 있다면, 나는 차라리 진실이 아니라 예수와 함께 남는 쪽을 택하겠습니다.”

 


이처럼 ‘오직 예수만’을 고집한다는 것은 현대의 종교상황에 걸맞지 않은 구태의연한 발상인지도 모른다. 이른바 타종교와의 일치와 연대를 추구하는 하는 신앙은 ‘세상에 열려 있는 신앙’이고, 모든 종교가 그리스도교와 마찬가지의 무게로 세상을 구원하는 진리임을 가르치는 게 진보적 견해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이 일반론에 근거할 때 실상 구원의 힘은 증발해 버린다. 어느 인생에게는 나름대로 결정적 국면을 마련해 준 종교가 있기 마련이고, 그 결정적 국면의 정점에는 언제나 어떤 사람이 있다. 즉 그가 예수이든 석가이든 노자이든 공자이든 어떤 인격에 매료당해야 우리의 삶이 한 걸음 크게 진화한다. 그런 의미에서 도스토예프스키의 ‘임’은 그의 특정한 러시아적 종교 상황에서 역시 예수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히려 “그 진실이 참으로 예수 밖에 있다면, 나는 차라리 진실이 아니라 예수와 함께 남는 쪽을 택하겠습니다”라고 고백할 만큼의 절박한 신앙에 사로잡혀 있지 않은 자신을 먼저 부끄러워해야 할 것이다. 만일 예수의 모습이 일그러져 있다 하더라도 그 흉터마저도 끌어안고 가겠다는 심경에 사로잡히는 것이 사랑이고 신앙이다. 때론 맹목적인 사랑에도 희망의 근거가 자리 잡는다. 어리석어 보이는 이에게서 지혜가 자란다. 임이란 그런 것이다. 임이란 복종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이 쪽에서 기꺼이 바치는 복종이다. 내 삶의 상처 입은 부위를 말끔히 치유해 준 임을 무조건 따르겠다는 데, 주변 사람들이 찧고 까부는 입방아를 상관할 이유가 없다.      

진짜배기 사랑을 만해 한용운은 ‘당신이 아니더면’이란 시편에서 읊조린다.

 


당신이 아니더면 포시랍고 매끄럽던 얼굴이 왜 주름살이 접혀요.

당신이 괴롭지만 않다면 언제까지라도 나는 늙지 아니할 테여요.

맨 첨에 당신에게 안기던 그때대로 있을 테여요.

 


그러나 늙고 병들고 죽기까지라도 당신 때문이라면 나는 싫지 않아요.

나에게 생명을 주든지 죽음을 주든지 당신의 뜻대로만 하셔요.

나는 곧 당신이어요.

 


이런 사랑을 한번 해보자는 게 신앙이다. 나에게도 그런 신앙이 있을까. 더 정확히 말하자면, 내게도 그런 임이 있었는가, 아니 있는가, 아님 장차 그런 임을 만날 수 있을까, 묻고 되묻는 게 되는 우린 역시 가련한 중생이다. 임을 만난 사람은 사랑에 대해서 설명하지 않는 법이다. 말한다 해도 더듬거릴 뿐이다. 그의 명호를 부를 때마다 진동이 오고, 가슴이 달아오른다. 객?관?적이라는 말은 빛을 잃어버린다. 그런 의미에서 신학을 연구한다는 것은 하느님을 만나지 못한 사람들의 비루한 변명에 지나지 않는지도 모른다. 정작 하느님을 만난 사람들은 말이 없는데, 많은 경우에 학자들은 엉거주춤한 자세로 장광설을 늘어놓는다. 자신의 어설픈 속내를 들킬까 두려워하는 탓이다.

 


임을 기다리는 마음

우리가 임을 그리워하는 것은 아무래도 어둠 때문이다. 내 상처 부위가 덧나고 있기 때문이다. 의지할 나뭇가지가 모두 부러져 나갔기 때문일 것이다. 유난히 추웠던 겨울, 마음이 바삭 부서져 버릴 것 같이 얼어버리고, 위로인양 흰눈만이 유난히 하늘에서 쏟아져 내려왔던 거리에서 부자들의 ‘새로운 자유’를 위해 가난한 이들은 배고플 자유를 얻고, 나라 경제 회복을 위해 노동자들의 생계가 협박당해 온 시간이 끝날 줄 모른다. 어제 상처받았던 영혼은 오늘도 상처받을 것이고, 내일도 멍이 풀리지 않을 것이다. 교회마저도 종교의 산뜻하고 ‘새로운 자유’를 위해 성전 앞뜰을 청소하려고 나선 판국이다. 이 참에 양성우 시인의 해묵은 시들이 다시 빛을 뿌리며 달려온다.

   

멀고 험한 길 빈손으로 돌아와

밤새워 땅을 치는 이 시절의 아비들아.

바람 부는 모래벌판 깎아지른 벼랑 아래

마르고 터진 입술 지근지근 깨물며

우리들이 손꼽아 기다리는 것은 무엇인가?

도대체, 지푸라기 하찮은 작은 티끌로

천이만리 끝도 없이 떠밀리다가

이제는 죽음의 숲, 어둠의 수렁에서

 


밤새워 땅을 치는

이 시절의 아비들아,

진눈깨비 산골짜기 살얼음판에

비로소 오실 이의 아침길을 위하여

산 자는 산 자와 함께 몸을 씻고

죽은 자는 죽은 자와 함께 뼈를 씻으며

늘 깨어 있으라..

지금은 여전히 깊은 밤이다.

  

‘넋이라도 있고 없고’라는 시편이다. 비로소 오실 임의 아침길을 위하여 늘 깨어 있을 자는 누구인가. 채근하지 않아도 깨어있을 수밖에 없는 자는 누구인가. 결국 몇몇의 잔치에 들러리 섰던 심신이 피곤한 가난한 영혼들 아니던가. 그들이 새벽을 간절히 기다려 그분의 아침길을 예비하게 되지 않을까. 그들을 기억하는 그 임은 밤새 큰산을 넘어, 스스로 만신창이 되어, 나무 뿌리에 긁힌 상처 그대로 이슬을 털며, 자신을 기다리는 어여쁜 백성을 만나러, 만나서 한번 정회(情懷)를 풀기 위하여, 안타까운 심정으로 안쓰러운 표정으로 그러나 묵묵히 재를 넘어 오고 있는 것은 아닐까. 사랑이란 그런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들, 지금 어디

산비탈길 큰돌을 나르며

멍들고 타는 그 입술 깨물고 있을까?

갈라 터진 논바닥 후벼파면서

남 모르는 노래를 소리 죽여 부르고,

혹은 이리저리 허리 굽고 몰리며

안으로 안으로만 흐느끼고 있을까?

아직은 참으로 새벽이 아니기 때문에

피투성이 곤욕의 문, 칼을 물고 드나들며

사랑하는 사람들, 지금 어디

주먹으로 벽을 치고

부글부글 넘치는 그 가슴을

누르고 있을까?

 


양성우는 ‘마루 위에 쓴 시’에 큰산을 넘어 오는 임의 심경을 이렇게 읊었다. 임의 명호를 부를 때마다 목울대를 적시는 아픔이 있다면, 그대는 지금 사랑을 하고 있는가. 관세음보살을 부르거나 또는 예수 요셉 마리아를 부르는 멸시받던 백성에게 구원이 있는가. 사랑은 조응하는 것이다. 응답을 부르는 것이다. 이심전심(以心傳心)이다. 내가 그의 곁을 차마 마음으로나마 떠나 있지 않다면, 그 역시 언제나 늘 그 자리에 있으리라고 믿는 게 사랑이요 종교요 신앙이다. 내 고단한 삶을 붙들어 주는 힘이다. 가톨릭교회의 사순절은 그런 기다림의 표지다. 잘 기다릴 줄 아는 자만이 시시각각 불현듯 찾아드는 임의 거룩한 얼굴을 맞대면할 수 있을 것이다. 양성우는 ‘꽃 꺾어 그대 앞에’ 바칠 준비가 되어 그런 사람을 기대한다.

 


그대 큰 산 넘어 오랜만에

오시는 임.

꽃 꺾어 그대 앞에

떨리는 손으로 받들고, 두 눈에

넘치는 눈물 애써 누르며

끝없이 그대를 바라보게 하라.

그대 큰 산 넘어 이슬 털고

오시는 임.

꽃 꺾어 그대 앞에

떨리는 손으로 받들고

그대의 발, 머리 풀어 닦으며,

오히려 기쁨에 잦아드는

목소리로

그대를 위하여

길고 뜨거운 사랑의 노래를

부르게 하라.

 


길고 뜨거운 사랑의 노래는 그다지 합리적이지 않다. 아니 합리성을 뛰어 넘는 행동이다. 역사상 진지한 사람들은 많았다. 타인의 고통에 대한 예민한 감수성을 지닌 이들도 적지 않았다. 내가 혹은 그들이 왜 무슨 이유로 고통 당하는지 묻는 사람들은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의 이반처럼 그들이 진지하고 결백할수록 불합리하고 고통스런 압도적 현실에 직면하여 절망한다. 대심문관 이야기에서 보듯이, 예수는 여전히 무력하고 권력은 막강하다. 교회는 그리스도를 유폐시킨 자들이 다스리고, 더이상 실천적으로 예수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반이 말하기 시작할 때 알료샤는 이미 행동하고 있다. 알료샤는 이반과 논쟁하지 않고, 조시마 장로는 카라마조프 노인과 다투지 않는다. 대심문관 이야기에서 그리스도가 대심문관과 논쟁을 벌이지 않고 오히려 그에게 유다에게서 받았던 키스를 되돌려 주었듯이 말이다. 알료샤와 조시마 장로는 세상에 대항하여 반박하기 위한 논거를 제시하지 않고 존재방식을 제시한다. 이론을 들이대지 않고 삶으로 말한다. 

조시마 장로는 알료샤의 친구 리자의 어머니에게 이렇게 얘기한다. “실천적인 사랑의 체험을 통해서, 이웃을 끊임없이 열심히 사랑하도록 노력하십시오. 사랑 안에서 전진한 그만큼 하느님의 존재와 영혼의 불멸을 믿게될 것입니다.” 인간을 구원하는 사랑은 하면 할수록 확장되는 것이다. 도스토예프스키는 늙은 수도 사제 세라피쿠스의 입을 빌어 하나님의 비밀은 모든 존재 안에 있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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