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가톨릭측의 천진암 역사왜곡’과 관련, 법현스님의 기고를 소개합니다.
귀의삼보 하옵고, 불보살님의 가피가 항상 함께 하시기를 기원 드립니다. 신부님! 10년 전에 보내드렸던 편지를 다시 꺼내들고 읽어보니 한편으로는 저 스스로의 무관심에 심한 부끄러움을 느꼈습니다. 또 한편으로는 신부님을 비롯한 가톨릭계의 무관심에도 좋지 않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기억하시는지요. 10년 전 제가 편지를 보냈을 때 신도회장이라는 단국대 교수를 보내 사과하셨던 일과 문서를 새로 인쇄하겠다는 약속을 했던 사실을 말입니다. 그 때 제 편지의 내용은 이랬습니다.
“세기말의 민중들이 항상 그리던 위대한 지도자를 맞이하는 꿈을 꿀 때마다 등장하는 ‘나=지도자=메시아=부처님’ 등의 말을 대할 때마다 종교 간의 대화와 상대 종교의 교리에 대한 체계적 이해가 절실히 필요함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구기독교(가톨릭)에서 진행하고 있는 토착화 운동에 자그마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차에 천진암에 관한 가톨릭교도 특히 신부님의 관심을 알게 되었고 내ㆍ외의 마찰에도 불구하고 장구한 세월을 두고 이벽 선생 등이 공부했던 천진암을 성역화 하시는 모습에 이교도로서의 시샘보다는 부러운 마음이 앞섰던 것이 사실이었습니다. 특히 세계 어느 나라의 전교 역사와도 달리 우리의 천주교가 외국의 선교사 파견 없이 스스로의 필요성과 공부에 의해 출발했다는 사실을 입증하려 노력하심에 경의까지 생겨나곤 했습니다.
… (중략) …
가톨릭의 성지로 가꾸어가고 있는 ‘천진암’이 어떤 곳입니까? 바로 요즘의 ‘명동성당’처럼 어렵거나 외로운 사람들이 보호를 받은 곳 아닙니까?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에서 자유롭게 공부할 수 없었던 초기 가톨릭교도들이 한강 너머 산기슭에 숨어있는 천진암에 모여 스님들의 보호아래 가톨릭을 배웠던 것이 아닙니까? 그 과보로 죄 없는 스님들이 무참히 목숨을 빼앗기고 그것도 모자라 오늘날에 와서는 절까지도 흔적이 없어진 것 아닙니까?
스님들의 목숨을 빼앗아간 것은 당시 조정의 일이지만 사찰까지 없애버린 것은 바로 신부님을 비롯한 요즈음의 가톨릭 당국이지요. 참으로 배은망덕도 유분수라는 말이 떠오릅니다. 더구나 “천진암을 꾸미고 가꾸는 일은 한국 천주교회 뿐 아니라 우리 민족의 자랑이요 긍지”라 하신 신부님의 말씀에 비춰보았을 때 차라리 서글픈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감히 불출가자의 한사람으로서 다음 사항을 요구하는 바입니다.
① 지금까지 발행된 ‘한국 천주교회 발상지 천진암 성지’(안내지도 및 설명서)를 전량 회수하고 남아있는 것까지 공개적으로 폐기 처분해 주십시오. ② 잘못을 반성하고 시정하는 의미에서 ‘한국 천주교회 발상지 천진암 성지’의 내용 중 해당부분을 “스님들을 깨워서…”로 시정해 새로 인쇄해 주십시오. 이중 1부만 저에게 보내 주십시오. ③ 공개 사과도 요구하고 싶으나 이 정도로 줄이고 위에 요청한 사항을 언제까지 이행하실 것인지 분명한 응답을 바랍니다. 응답을 하지 않으시거나 기대에 어긋나는 경우 전 불교계 종단과 합심해서 대응할 계획임을 알려 드립니다.”
신부님, 그런데 그렇게 약속하시고도 신부님이 직접 작성하신 여러 인쇄물들과 인터넷 홈페이지 등의 글이 전혀 변하지 않았더군요. 이제 다시 분명하게 요구합니다. 앞의 두 가지 요구는 지금도 정당합니다. 책자와 인터넷 그리고 석조물에 씌어 있는 잘못된 내용을 바로잡아 주십시오. 그리고 천진암은 스님들이 살았다고 하는 기록에 의해서도 폐사가 아닌 것이 분명합니다. 단군을 천진(天眞)이라고 한 것이 아니라 부처님의 모습을 천진이라고 한 것입니다. 역사를 왜곡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한 말씀 더 드리겠습니다. 성역화도 좋지만 가톨릭교도를 대신해 목숨까지 버린 스님들이 살던 곳, 대웅전 등을 제대로 표시해 주십시오. 가능하면 그 건물도 그대로 복원하는 것이 역사적 사실과 진실에 부합하는 것입니다. 주어사에 있던 해운스님의 비도 불교계에 돌려주십시오. 가톨릭을 믿는 이들이 많이 사는 나라 사람들에 의해 훼손된 이스탄불에 있는 성 소피아성당의 성화(聖畵)가 성화 자체를 그리지 않는 이슬람인들에 의해 복원되고 있는 사실을 깊이 생각하시고, 천진암의 백년 뒤 좋은 모습을 우리 후손들과 세계인에게 보여주실 것을 기대하겠습니다.
[불교신문 2267호/ 10월4일자]
초점 / ‘역사왜곡 논란’ 경기 광주 천진암 사찰이 있었던 곳… 지금은 타종교 ‘성지’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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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광주시 퇴촌면에 위치한 천진암은 한국 가톨릭의 발상지로 널리 알려졌다. 가톨릭측의 주장에 따르면 “1779년을 전후해 이벽, 정약용, 정약전, 정약종, 이승훈 등 소장 유학자들이 폐사가 된 천진암을 찾아 강학회를 열었다. 강학회는 단순히 서학(西學)을 공부하던 모임에서 벗어나 신앙생활로 발전했으며, 이에 따라 한국 최초의 가톨릭교회로서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때문에 한국 가톨릭 발상지로서 권위를 부여해 성지(聖地)로 추앙받고 있다. 하지만 “가톨릭 측은 성지로서 권위를 부여하는 과정에서 역사를 심각하게 왜곡하는 누를 범하고 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전언이다. 특히 스님들이 엄연히 수행했던 천진암을 ‘폐사’한 곳이었다는 표현이나, 잠시 짧은 기간동안 불교의 암자였다는 주장은 도를 넘어섰다는 의견이 많다.
<사진설명: 경기 광주 천진암(天眞庵)터. 사찰 터였던 이곳에서 가톨릭 측이 공사를 하고 있다. 광주=김형주 기자> 전문가들은 천진암이 폐사가 아니라는 증거로 다산 정약용의 시를 들었다. 김상홍 단국대 교수는 ‘다산과 천진암의 관계’라는 논문에서 이를 분명히 밝히고 있다. 천진암강학회가 열린 후 18년이 지난 1797년 정약용은 정약전, 정약종 두 형과 더불어 천진암으로 놀러갔다. 그 소회는 〈유천진암기(游天眞菴記)〉와 시문 8제 15수에 기록돼 있다. 시문 가운데 다산이 천진암에서 형제들과 유숙하면서 밤에 지은 〈사석(寺夕)〉이란 시는 가장 명확한 증거다. ‘…누가 이 좋은 언덕과 골짜기 가져다가 / 두어 명 스님들만 차지하게 했던가(留與數僧專).’ ‘…종소리 나자 스님들과 죽을 먹고(鍾動隨僧粥) / 향은 꺼져 나그네와 함께 잠들었구나….’ 이를 보면 가톨릭 측 주장과 달리 1779년 이후에도 천진암은 스님들이 수행하던 도량이었음을 알 수 있다. 가톨릭 측이 천진암이 폐사였음을 주장하는 근거는 역시 정약용의 글이다. 1801년 순조1년 이승훈.이가환 등 가톨릭교도와 진보적 사상가 100여 명이 처형되고 400여 명이 유배된 신유사옥으로 유배생활을 했던 정약용이 18년 만에 풀려나 66세인 1827년 천진암을 다시 찾아가 지은 〈천진소요집(天眞逍遙集)〉이 그것이다. ‘밤에 천진사에서 잤는데 절이 퇴락해 옛 모습을 찾아볼 수가 없다(夜宿天眞寺 寺破無舊觀)’고 적혀 있다. 가톨릭 측은 이 글을 증거로 천진암이 폐사였다고 내세우고 있다. 가톨릭측 ‘일방적’ 주장 정약용 ‘천진소요집’서 1779년 천진암은 폐사였다 사찰의미 ‘庵’대신 ‘菴’표기 불교계 ‘역사적’ 반박 정약용 ‘유천진암기’에 1779년 후에도 스님들 수행 도와준 게 오히려 화근 돼
하지만 이런 주장에는 다산이 앞서 지은 시문을 면밀히 혹는 의도적으로 살피지 않았다는 혐의가 짙다. 정약용이 36세의 나이로 천진암을 가서 지은 〈유천진암기〉를 무시한 채 30년이 지난 후 쓴 문집만 보고 폐사의 전거로 삼는 것은 무리한 적용이라는 비판이다. 신대현 사찰문화연구원 연구위원은 “조선시대 문헌에서 ‘폐사’라고 했더라도 실제 기능을 했던 사찰도 있었다”며 “불교를 배척하던 당시 시대상황에 따라 일시적으로 스님 등 기거하던 사람이 없는 사찰을 폐사라고 표현한 자의적인 해석이 많았던 점을 볼 때 천진암이 당시 폐사했다고 볼 수 없다”고 말했다. 가톨릭의 천진암에 대한 역사 왜곡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원래 불교 사찰이었다는 사실을 축소하기 위해 암자를 표시하는 庵(암)을 ‘菴’으로 고쳐 썼다. 〈평화신문〉(9월10일자)을 보면 ‘당시 남인계 학자들 호가 모두 녹암(鹿菴), 직암(稷菴) 등 ‘암(菴)’이었으므로, 정약용 선생만이, 또 이곳 천진암에 대해서만, 천진암의 ‘庵’이라는 한자를 ‘菴’이라고 종종 달리 씀으로써, ‘菴’이라는 호를 가진 자기네 단체의 본거지였음을 드러내고 있다’고 하고 있다. 그러나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브리태니커백과사전〉이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는 천진암을 ‘암자 암(庵)’으로 쓰고 있어 가톨릭 측의 이런 주장도 설득력을 잃는다. 가톨릭 측이 천진암을 폐사였다고 한 것에는 다른 의미도 포함돼 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견해다. 분명 1797년 당시 천진암에는 스님들이 있었고 가톨릭 강학회도 열렸는데, 30년이 지난 1827년에는 아무도 없는 폐사 상태였다는 것에 착안한 의문이다. 이에 대해 전문가들은 신유사옥(1801년) 당시 조정(朝廷)이 가톨릭교도를 신고하지 않고 숨겨준 죄목을 들어 천진암 스님들을 처형하고 사찰을 강제 폐쇄했기 때문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가톨릭교도들은 왜 사찰에서 강학회를 열었을까. 프랑스인 샤를르 달레 신부의 1874년 저서 〈한국천주교회사〉에서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정유년(1777)에 유명한 학자 권철신은 정약전과 학식을 얻기를 원하는 그 밖의 학자들과 함께, 방해를 받지 않고 깊은 학문을 연구하기 위해 외딴 절로 갔다.’ 당시 서학(西學)에 대한 박해를 피해 외딴 절인 천진암을 찾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천진암 스님들은 죽음을 무릅쓰고 서학자들의 공부를 도와준 셈이다. 때문에 가톨릭 측의 천진암 주장은 당시 불교가 대승적인 차원에서 카톨릭교도를 도왔다는 역사적 사실을 축소하고 은폐하려는 의도가 숨어있는 것이 아니냐는 의견이 제시되고 있다. 역사학자 이이화 씨는 “천진암 성지에서 이 곳에 옛 절터라는 역사적 사실은 단 한 줄도 발견할 수 없었다”며 “분명한 역사왜곡으로 판단된다”고 말했다. 또 천진암과 함께 잠시 강학회 장소로 사용된 주어사 터에서 발견된 ‘해운당대사의징지비(海雲堂大師義澄之碑)’가 서울 합정동에 위치한 절두산 순교성지에 옮겨져 있는 이유에도 의문이 든다. 이에 따라 천진암에 대한 역사왜곡을 바로잡고 정확한 사실(史實)을 밝혀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폐사가 아닌 제 역할을 하던 수행도량이자 박해받던 가톨릭교도들을 돕던 대자대비의 부처님 말씀을 실천하던 사찰이라는 역사적 진실을 분명히 표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 역사를 의도적으로 왜곡한 가톨릭 측이 참회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종단협 불교인권위원장 진관스님은 “이렇게 불교에 대한 왜곡이 심한데도 관심조차 없었던 불교계도 반성하고 이제라도 역사 바로세우기에 나서야 한다”며 “가톨릭교도 인권과 종교화합 차원에서 참회하고 역사를 재조명하는 데 스스로 앞장서야 한다”고 말했다. 한편 왜곡된 사실을 기록해 물의를 빚고 있는 평화신문 관계자는 “기획이라 표시했지만 사실은 변기영 신부가 보내온 광고다. 신문사측엔 책임이 없다”고 말했다. 현재 사찰의 흔적을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천진암 터에는 대웅전터로 추정되는 위치에 이벽.이승훈 등 강학회에 참석한 5명의 ‘조선교구 설립자 선조’ 묘가 이장돼 있으며 성당, 박물관, 연구원 공사가 한창이다.
김하영 기자 ● 천진암의 수난사 천진암이 언제 완전히 폐사됐고, 가톨릭 성지로 변모했을까. 1989년 9월에 발행된 월간 〈대원〉 제82호에서 피해 당사자들의 증언을 소개, 당시 상황을 짐작케 한다. 마을 노인들을 취재한 〈대원〉지의 기사에 따르면 “가톨릭인들을 숨겨준 탓으로 관가에서 폐사시켰다. 천진암에서 수도하던 스님도 십여분 참형됐다”고 증언하고 있다. 해방 이후 천진암을 다녔다는 신도들의 증언으로 볼 때 천진암은 구한말 중창과정을 걸쳐 1980년 초반까지 유지돼 온 것으로 추정된다. “가톨릭인 숨겨줘 관가에서 폐사 수도하던 스님 10여명 참형 당해” 천진암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1962년의 일이다. 한국정신문화연구원이 발행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영어권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등에 따르면 1962년 남상철에 의해 사지(절터)가 확인됐고, 천진암이 천주학의 시발지라고 주장한 수원교구 내 몇몇 신부들이 1979년 성역화 사업을 시작했다. 정약전이 〈주교요지(主敎要旨)〉를 만든, 가톨릭 시발지에 대해서는 가톨릭내에서도 논란이 많다. 1770년대 가톨릭이 모였던 장소를 정확히 명시하지 않았던 때문이다. 천진암은 그 후보지 가운데 하나였음에도 불구하고 수원교구는 대대적인 성역화 사업에 착수했다. 〈대원〉지에 따르면 변기영 신부의 주도로 천진암 일대의 땅을 사들였는데, 당시 천진암터에 사는 주민들에게 땅을 사들이기 위해 “자신의 과수원에 들어가는 주민을 경찰에 고발하고” “외출 후 집에 돌아올 때 수차례의 검문과 검색을 당하게 만들고” “사찰 신도의 소지품을 검사하는 등” 정부의 협조를 얻어 상식 이하의 행동을 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또 천진암터에 있던 영통사에 대해 “광주시 당국을 동원해 건축중이던 건물을 일방적으로 건축취소시키고, 예불소리가 시끄럽다고 고발하고, 밤에 건달이 사찰에 침입해 거주자를 위협하고, 신도들이 절 앞 개울에서 쉬지 못하도록 감시하는 등”의 행동을 했다는 증언이다. 또 가톨릭계가 추진한 ‘군립공원계획’에 반대한 주민들을 안기부와 경찰서가 조사했다는 내용으로 볼 때, 가톨릭과 광주시의 조직적인 탄압이 지속된 것으로 해석된다. 결국 34만여평에 이르는 땅을 사들인 변신부측은 1979~81년 사이에 이벽.정약종.권철신.권일신.이승훈 등 한국가톨릭회 초기 인물들의 묘를 천진암터로 이장했으며, 1990년 영통사 주지 일영스님이 탄압을 이기지 못하고 사찰에서 나옴으로써 천진암이 불교의 역사에서 사라지게 됐다.
안직수 기자
“가톨릭, 성지 부각 위해 천진암 역사 왜곡” 논란 변기영 신부 평화신문 글 ‘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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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측이 멀쩡한 사찰을 폐사(廢寺)로 표현하는 등 역사왜곡 논란을 일으키고 있다. 평화신문은 ‘김대건 신부 순교 160주년 기획 - 한국천주교발상지 천진암’이란 제목의 9월10일자 글에서 “천진암 성지는 본래 단군 영정 천진(天眞)을 모시고 산제사나 당산제, 산신제 등을 올리던 천진각(天眞閣)이라는 작은 초가 당집 자리로서 (중략) 폐찰이 된 이곳에 모여 아무런 방해를 받지 않고…”라고 지적했다. 이글은 ‘천진암 성지’ 변기영 주임신부가 작성했다.
<사진설명: 경기 광주 천진암(天眞庵)터. 사찰 터였던 이곳에서 가톨릭 측이 공사를 하고 있다. 광주=김형주 기자> 그러나 천진암을 폐사로 표현한 것은 명백한 오류다. “1779년 당시 천진암은 폐사되지 않았고 1801년(순조1년) 신유사옥 당시 천주인을 도왔다는 이유로 스님들이 죽임을 당하고 절은 강제 폐사”됐기 때문이다. 신대현 사찰문화연구원 연구위원은 “천진암은 분명 사찰로서 역사가 면면히 이어져 왔다”며 “가톨릭측이 역사를 도외시하면서까지 성지화할 필요가 있었는지 되묻고 싶다”고 말했다.
김하영 기자
천진암 역사왜곡 도 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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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중국의 동북공정으로 한국 사회가 요란하다. 역사를 왜곡했기 때문이다. 부여, 고구려, 발해의 역사를 중국사의 일부로 포함하는 것을 넘어 한강 이북도 원래 중국 영토였다고 주장한다. 침략자의 역사가 정당화될 수 없는데도 강자의 논리와 현재 점령자의 논리를 한껏 누리는 것이다. 일본 역시 독도를 자기네 땅이라 우기고 있을 뿐만 아니라 식민 통치 시절의 잔혹상에 대해 은폐하거나 미화하고 있다. 역사왜곡은 국제사회에서만 발생하는 일이 아닌가 보다. 이제는 천주교가 공공연하게 역사를 왜곡해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한국 천주교의 발상지로 알려진 천진암이 폐사지였다는 주장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경기도 광주군 퇴촌면에 있는 천진암은 탄압의 눈길을 피해 찾아온 이벽, 정약전 등이 천주교 강학회를 연 곳으로 알려져 있다. 1779년의 일인데, 18년 지난 1797년 정약용과 정약전이 찾아 감회를 읊은 시가 〈유천진암기〉에 전하고 있다. 달레가 쓴 〈한국천주교사〉에도 이들이 사찰에서 강학회를 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1989년 9월 간행된 〈대원〉에는 ‘천주교인들을 숨겨주었다는 이유로 강학회가 발각된 다음 관청에 의해 폐사되었다’는 지역 주민들의 증언을 싣고 있다. 성역화를 진행하면서 지역 주민들과 천진암 터에 있던 영통사를 몰아내기 위해 천주교 수원교구측에서 벌인 비양심적인 사건들 역시 잊지 않고 있다. 그런데 이제는 아예 역사를 왜곡하겠다니 실망스럽기 그지없다. 양심이 있다면 천진암을 복원하여 불교계에 돌려주진 못할망정 당시 스님들에 대한 고마움을 알리는 표지석이라도 세워야 할 것이다.
“가톨릭, 불교유물 불법 이전”
주어사 터 비석 ‘절두산 성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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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계가 광주 천진암에 대한 역사왜곡에 이어, 자신들의 종교역사에 의미가 있다는 이유로 불교 유물을 불법으로 옮겨왔다는 사실이 밝혀져 물의를 빚고 있다. 가톨릭계는 지난 1973년 천진암과 함께 가톨릭 강학회가 열린 장소로 지목되던 경기도 여주군 주어사 터에서 해운당대사의징지비(海雲堂大師義澄之碑)를 발견해 서울 합정동에 위치한 ‘양화나루ㆍ잠두봉유적지’로 옮겼다. 절두산성지 박물관 관계자는 “논에 있던 유물을 소유자의 기증의사에 따라 가져온 것으로 소유권은 우리에게 있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타종교 유물을 국가에 신고하지 않고 원 소유자인 불교계 동의도 없이 자신들의 ‘성지’로 가져간 가톨릭 측의 행동에 대한 논란이 뜨거워질 것으로 예상된다. 비석 전면에 ‘해운당대사의징지비(海雲堂大師義澄之碑)’라 새겨진 이 비는 1689년 해운당 의징스님의 상좌 수견천심스님이 세운 것이다.
김하영 기자
초점 / ‘제2 천진암 논란’ 여주 주어사지 유물
발견자가 기증 받았어도 신고절차 어긴 불법행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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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여주군 주어사지(走魚寺址)는 한국 가톨릭사(史)에 있어 천진암만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천진암에 강학회가 열리기 전까지 주어사가 그 장소였기 때문이다. 주어사가 좁아 강학회를 진행하기 불편하자 인근의 천진암으로 자리를 옮겼다고 가톨릭 측은 밝히고 있다. 주어사는 앵자봉을 중심으로 천진암의 동쪽에 있던 사찰로, 천진암과 같이 현재 폐사된 상태다.
<사진설명: 서울 합정동 ‘절두산 성지’에 서있는 경기 여주 주어사 ‘해운당 대사비’. 김형주 기자> 가톨릭 측이 주어사 터를 처음 발견한 것은 1962년이다. 가톨릭 학자 남상철 씨가 마을 노인과 함께 답사하면서 주어사 터와 함께 비석 2기를 찾아냈다. 남상철 씨는 이 결과를 1963년 〈경향잡지〉 1월호에 발표했다고 기록돼 있다. 가톨릭 측은 1967년 양화나루.잠두봉 유적지에 ‘절두산 성지’를 조성하면서 박물관에 필요한 자료를 수집하고 있었고, 이 기록을 근거로 현장조사를 하던 중 경기도 여주군 금사면의 한 논밭 한가운데 박혀 있던 비석을 발견했다. 그리고 이 비석을 그대로 양화나루 유적지로 옮겨왔다. 그 때가 1973년 11월이었다. 가톨릭 박물관에 소장된 불교유물인 의징스님 비 원래 절터로 되돌려놔야 가톨릭 측은 이 비석에 대해 당시 비가 발견된 논 주인이 ‘기증’했으므로 자신들에게 소유권이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문화재보호법에 따르면 의징스님 비와 같은 발견문화재의 경우 일주일 내에 관계당국에 신고해야 한다. 가톨릭 측은 신고의 의무를 저버린 채 자신들의 뜻대로 타종교 유물을 옮겨온 것이다. 문화재 전문가들은 관계당국의 편의주의 행정에도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양화나루.잠두봉 유적은 지난 1997년 사적으로 지정됐지만 서울시나 마포구청 등은 사적지 내에 스님의 비가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는 실정이다. 사적을 지정할 때는 지표조사를 통해 그 주변 유적 유물 등을 현장 조사해 밝히는 것이 절차인데 이를 무시하고 추진한 것이 아니냐는 지적이다. 서울시 사적 399호로 지정된 양화나루.잠두봉 유적은 천주교 서울대교구재단이 소유권을 갖고 있다. 때문에 불교유물인 의징스님 비를 적법한 절차에 따라 국가에 귀속시키거나 원래 있던 절터에 옮겨놔야 한다는 여론이 높다. 하지만 현실적인 한계가 있는 것이 사실이라 논란이 예상된다. 문화재청 동산문화재과 장경복 사무관은 “분명 절차를 어긴 불법을 저질렀다”면서도 “이미 문화재 무단소유에 대한 공소시효 10년이 지나 처벌이 어려울 뿐 아니라, 10년 이상 장기간 동안 문화재를 점유할 경우 그 소유권은 점유자에게 있어 되찾기도 어려워 보인다”고 말했다. 현재 해운당 의징스님의 비는 한국 가톨릭 ‘성인’들의 비석과 흉상에 둘러싸여 외롭게 서 있다. 김하영 기자
제2천진암 논란, 여주 주어사지 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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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합정동 ''절두산 성지''에 서 있는 경기 여주 주어사 ''해운당 대사비''.
김형주 기자
<불교신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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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제가 96년도에 원각사라는 절 주지로 있을 때 천진암에서 발행한 안내자료에 스님들을 비하하는 표현이 있길래 이의를 제기하는 편지를 보냈더니 단국대교수인 신도회장을 보내서 사과하고 고칠 것을 약속해서 문제삼지 않고 그냥 두었다가 지나는 길에 천진암을 들렀더니 안내자료의 문제의 글 "중들을 깨워서..."를 볼펜으로 지우고 볼펜으로 스님이라고 썼길래 "불교성지 천진암을 천주교 성지로 바꿔서 100년이나 건축기간을 들여서 지은다면서 인쇄비용이 없어서 그러시냐 그러시지 말고 잘 인쇄해서 천주교의 미덕을 보여주시라"했더니 흔쾌히 그러마고 해서 그냥 나왔더니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은 모양입니다. 불교신문에서 제가 관심이 있는 것을 어떻게 알고 연락하였기에 특별기고를 한 것입니다. 천진암에 연락하고 찾아 보아야 겠네요. 여러분도 생각을 같이 해 주십시오. 온누리 법현 합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