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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 정약용의 牧民心書

oldhabit 2008. 5. 24. 12:24

 
 
정약용의 『목민심서』

'목민심서‘의 핵심 내용

‘목민심서’는 정약용의 대표적인 저술로서, 그가 강진에서 귀양살이를 하는 동안에 쓴 책이다. ‘목민(牧民)’이란 백성을 기른다는 뜻이다. 따라서, 목민관이란 백성을 가장 가까이에서 다스리는 고을의 수령을 뜻한다. 또한 ‘심서(心書)’란 귀양살이를 하고 있기 때문에 목민할 마음만 있을 뿐 몸서 실행할 수 없다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목민심서’는 총 12편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 편은 다시 6조로 세분되어 있다. 각 편의 내용은 1. 부임(赴任), 2 율기(律己), 3. 봉공(奉公), 4. 애민(愛民), 5. 이전(吏典), 6. 호전(戶典), 7. 예전(禮典), 8. 병전(兵典), 9. 형전(刑典), 10. 공전(工典), 11. 진황(陳荒), 12. 해관(解官) 등이다. 이제 각 편의 내용을 살펴보기로 하자.
 

1. 부임(赴任)

부임(赴任)편에는 목민관으로 발령을 받고 고을로 부임할 때 유의해야 할 6가지 사항에 대한 내용이 담겨 있다. 정약용은 목민관이 여러 벼슬 중에서 가장 어렵고 책임이 무거운 직책이라고 하였다. 목민관은 임금의 뜻에 따라 백성들을 보살펴야 하는 직책인 동시에 모든 면에서 모범이 되어야 하는 자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목민관은 부임할 때부터 검소한 복장을 해야 하며, 백성들에게 폐를 끼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나라에서 주는 비용 외에는 한 푼도 백성의 돈을 받아서는 안 되며, 일을 처리 할 때는 공과 사를 분명히 구분해야 한다. 또한 아랫사람들이 자신 모르게 백성을 괴롭히는 일이 없도록 단속해야 한다.

2. 율기(律己)

율기(律己)는 ‘몸을 다스리는 원칙’ 이란 뜻으로서, 율기 편에는 목민관이 지켜야 할 생활 원칙이 담겨 있다. 목민관은 몸가짐을 절도 있게 해서 위엄을 갖추어야 한다. 위엄이란 아랫사람이나 백성들을 너그럽게 대하는 동시에 원칙을 지키는 것을 통해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것이다. 마음가짐은 언제나 청렴결백해야 한다. 다른 사람의 청탁을 받아서는 안 되며, 생활은 언제나 검소하게 해야 한다. 집안을 잘 다스리는 것도 목민관의 중요한 덕목이다. 지방에 부임할 때는 가족을 데리고 가지 말아야 하며, 형제나 친척이 방문했을 때는 오래 머무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이는 쓸데없는 청탁이 오가고 물자가 낭비되는 일을 막기 위해서이다. 모든 것을 절약하고 아껴서 백성들에게 은혜를 베푸는 것 또한 목민관이 지켜야 할 원칙이다.

3. 봉공(奉公)

봉공(奉公)은 임금을 섬긴다는 뜻이다. 따라서 봉공 편에는 위로는 임금을 섬기고 아래로는 백성을 섬기는 방법이 적혀 있다. 목민관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임금의 뜻을 백성에게 잘 알리는 일이다. 당시에는 나라에 큰 일이 있을 때 교문(敎文)이나 사문(赦文)과 같은 공문서를 각 고을로 내려 보냈다. 하지만 글이 너무 어려워 일반 백성들이 그 뜻을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목민관은 이것을 쉽게 풀어 써서 백서들에게 알려 주어야 한다. 목민관은 법을 잘 지키는 한편 지방에서 내려오는 잘못된 관행을 바로잡는데 힘써야 한다. 공문서는 정해진 기간 내에 완벽하게 처리해야 한다. 또한 공납과 같은 세금을 공정하게 징수해서 아전들이 부정을 저지르는 일이 없도록 철저히 단속해야 한다. 외국 선박이 표류해 들어온 경우에는 예의를 갖춰 잘 보살펴 주어야 하며, 그들에 관한 모든 것(배의 모양, 크기, 문자 등)을 빠짐없이 기록해 상부에 보고해야 한다. 이 때 그들의 좋은 점은 보고 배워야 하며 백성들에게 폐를 끼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4. 애민(愛民)

애민(愛民)편은 백성을 사랑하는 방법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목민관은 노인을 공경하고 불쌍한 백성을 보살펴야 할 의무가 있다. 특히 사궁(四窮)을 구제하는 데 힘써야 한다. 사궁이란 홀아비와 과부, 고아, 늙어서 의지할 곳이 없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다. 재미있는 사실은 목민관이 합독(合獨)이라 하여 홀아비와 과부를 재혼시키는 일에 힘써야 한다고 말한 점이다. 집 안에 초상이 난 사람에게는 요역을 면제해 주고, 환자에게는 정역(征役)을 면제해 주어야 한다. 목민관은 자연 재해가 나지 않도록 항상 대비해야 하며, 재해가 생겼을 때는 백성들을 위로하고 구호하는 데 힘써야 한다.

5. 이전(吏典)

이전(吏典) 편부터 공전(工典) 편까지는 각 방의 세부 업무에 대해 설명한 부분이다. 조선 시대의 지방 행정 조직은 수령 이래 이(吏), 호(戶), 예(禮), 병(兵), 형(刑), 공(工)의 6방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목민관은 6방의 업무를 총괄하는 책임자이므로, 마땅히 모든 업무를 빈틈없이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 이전(吏典) 편에서는 아전을 잘 다스리기 위해서는 목민관 스스로 자기 몸을 잘 다스려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따라서, 목민관은 아랫사람을 은혜로 대하고 법으로 단속해야 한다. 아무리 학문이 뛰어나더라도 아전을 단속할 줄 모르면 백성을 다시를 수 없다. 그리고 백성을 잘 다스리려면 무엇보다도 인재를 등용하여 적재적소에 배치할 줄 알아야 한다. 관리를 뽑을 때는 충성과 신의를 첫째 기준으로 삼아야 하며, 재주나 지혜는 그 다음으로 보아야 한다. 또한 관리가 한 일은 반드시 공적을 따져 상벌을 주어야 한다. 그래야만 백성들로 하여금 믿고 따르게 할 수 있다.

6. 호전(戶典)

호전(戶典)편에서는 세금을 거두는 일에 대해 말하고 있다. 소출량을 기준으로 한 세금 징수는 정확한 실태 파악이 어렵기 때문에 문제가 있었다. 정약용은 이 점을 비판하고 공정한 세금 징수를 위해 해마다 직접 조사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목민관은 원활한 조세 업무를 위해서 호적(戶籍)을 정비하고 부정 방지에 힘써야 한다. 또한 국민 경제의 근본이 농업을 장려하는 정책을 펴야 한다. 농사를 권장하는 핵심은 세금을 덜어 주고 부역을 적게 하여 토지 개척을 장려하는 것이다. 권농 정책에는 벼농사 장려뿐만 아니라 목축과 양잠의 장려, 소의 도축을 막는 일 등이 모두 포함된다.

7. 예전(禮典)

예전(禮典) 편에서는 제사와 손님 접대, 교육, 신분 제도 등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목민관의 중요한 임무 중 하나는 정성을 다해 제(祭)를 지내는 일이다. 미풍양속을 해치는 미신적인 제사가 있다면, 사람들을 계몽하여 없애 버려야 한다. 또한 교육을 장려하고 과거 공부를 권장하여 인재를 양성해야 한다. 문란해진 신분 제도를 바로잡는 일도 목민관이 해야 한다.

8. 병전(兵典)

병전(兵典) 편에서는 군대를 키우고 잘 훈련하여 외적의 침입에 대비해야 한다는 점을 말하고 있다. 당시에는 병역 의무자가 군대에 가는 대신 옷감을 내고 면제를 받는 제도가 있었는데, 여기에는 부정이 많았다. 목민관은 이러한 부정을 가려내어 가난한 백성들이 피해를 입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또한 병기(兵器)들을 수리하고 보충하여 늘 비상사태에 대비해야 하며, 외적의 침입이 있을 때는 목숨을 걸고 지방을 지켜야 한다.

9. 형전(刑典)

형전(刑典) 편에서는 재판과 죄인을 다스리는 방법에 대해 말하고 있다. 재판을 할 때는 사건의 전말을 모두 파악한 뒤 신중하게 판결해야 하며, 특히 옥에 가두거나 형벌을 내릴 때 잘못이 없도록 해야 한다. 또한 거짓으로 남을 고발한 사람은 엄하게 다스려야 한다. 예로부터 어진 목민관은 형벌을 약하게 했으니 지나친 형벌은 피하는 것이 좋다. 옥에 갇힌 죄수에게는 집과 식량을 마련해 주어야 한다. 그러나 폭력을 일삼는 흉악한 자들은 엄하게 다스려야 한다.

10. 공전(工典)

공전(工典) 편에서는 산림과 수리 시설, 환경 미화 등에 대해 말하고 있다. 목민관은 산림을 울창하게 가꾸고 농사의 기본이 되는 수리 시설을 관리할 책임이 있다. 수리 시설의 경우, 지방 토호들이 제멋대로 저수지를 파서 자기 논에만 물을 대는 행동ㅇㄹ 막아야 한다. 관청 건물과 성(成)이 낡거나 무너졌을 때는 마땅히 수리하여야 한다. 도로를 닦고 건전한 공업을 육성하는 것 또한 목민관의 책임이다.

11. 진황(陳荒)

진황(陳荒) 편에서는 재해가 났을 때를 대비해 준비해야 할 사항들에 대해 말하고 있다. 흉년이 들 때를 대비해서 평소에 곡식을 저축하고 창고 안에 있는 식량의 양을 늘 파악하고 있어야 하며, 철저한 대책을 마련해 두어야 한다. 또 흉년이 들어 위급한 때는 조정의 명령을 기다리지 말고 창고를 열어 곡식을 나누어 주어야 한다. 백성을 구제하는 데는 두 가지의 관점이 있는데, 첫째는 시기에 맞추는 것이며, 둘째는 원칙을 세우는 것이다. 이는 정확한 실태 파악을 바탕으로 구휼(救恤)에 나서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또한 목민관은 집을 잃은 백성들에게 쉴 곳을 마련해 주고, 재해에 대한 구제가 끝나면 백서들을 따뜻하게 위로해 주어야 한다.

12. 해관(解官)

해관(解官)이란 관직에서 물러난다는 뜻이다. 해관 편에서는 목민관이 벼슬을 그만두고 물러날 때와 그 이후의 일에 관해 말하고 있다. 벼슬에 연연하는 것은 선비의 도리가 아니며, 떠날 때 많은 재물을 가지고 가는 것 또한 선비가 할 일이 아니다. 백성들이 목민관이 떠나가는 것을 슬퍼하고 길을 막아선다면 훌륭한 목민관이었다고 할 수 있다. 만약 오랜 명으로 눕게 되면 거처를 옮겨서 공무에 지장이 없도록 해야 한다. 또 죽은 뒤에라도 백성들이 내는 돈을 받지 않도록 미리 유언으로 명령해 두어야 한다. 송덕비(頌德碑)나 선정비(善政碑)는 죽은 이후에 세워야 하는 것으로 살아 있을 때 세우는 것은 예가 아니다.
이사에서 살펴본 것처럼 ‘목민심서’는 지방 수령이 갖추어야 할 덕목과 해야 할 일을 총망라해 놓은 책이다.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이 책은 여전히 우리들에게 많은 것을 시사한다. 관리들에게는 좋은 지침서가 되고 그 밖의 사람들에게는 생활의 교훈서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목민심서’가 독자들에게 감동을 줄 수 있는 것이다.

 

저자 소개

정약용(1762~1836)은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실학자로서 1762년에 경기도 광주군 초부면 마현에서 정재원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자는 미용, 또는 송보라고 하였으며, 호는 다산,(茶山), 자하도인, 문암일인 등이며, 당호는 여유당이다. 1789년에 문과에 급제한 이후 동부승지, 병조참의, 곡산부사, 형조참의 등을 두루 역임하였다. 정약용의 형제들은 일찍이 천주교와 관련이 있었다. 그래서 정약용은 1801년 신유박해 때 경상도 장기로 유배되었다가 그 해 황사영 백서사건이 일어나자 전라도 강진으로 옮겨져 그 곳에서 18년간 귀양살이를 했다. 정약용은 이 기간 동안 목민심서를 비롯하여 경세유표(經世遺表), 흠흠신서(欽欽新書), 아언각비(雅言覺非) 등 이른바 ‘여유당전서’를 썼다. 정약용이 남긴 저서는 모두 500여권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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