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ta Amore(사랑행전) 고전13:9-13
1. 쿼바디스
한 순례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아피아(Appia)라는 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그 길은 이탈리아의 로마로 통하는 많은 길 중의 하나의 큰 길이었습니다. 날은 해가 기울어지기 시작하여 황혼의 들녘이 조금은 스산한 느낌으로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가만히 그의 행색을 보니 늘어진 어깨와 후줄근한 의복이 상당히 지친 그의 심신을 드러내 보였습니다. 그의 걸음걸이로 볼 때 그는 어떤 목적지를 향한 걸음이 아니라 그저 앞을 향해서 지친 걸음을 내딛는 것 같이 보입니다. 그가 가는 길에 한 사람이 조금은 앞서 그의 길을 동행하기 시작했습니다. 석양을 바라보며 등을 보이는 사람은 그냥 큰 그늘같이 보였습니다. 한참 묵묵히 가던 그가 뒤따르는 사내에게 말을 걸었습니다.
“지난 며칠간 로마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당신은 왜 로마를 등지고 가고 있습니까?”
“이 길은 로마로 통하는 길인데 선생도 로마에서 온 길일텐데 지난 수일간 로마에서 있었던 일을 선생은 모르고 계신가 보군요. 오래전부터 시작된 일이지만 로마에서도 수년전 팔레스틴 지역의 유대인 한 사람의 이야기가 전해진 뒤로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 많이 생겼지요. 그래서 로마 전체가 이 문제로 큰 소동이 일어나기 시작하고 그 유대인을 추종하는 사람들을 잡아 가두고 죽이는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저도 그 소동을 피해서 지금 다른 지방으로 가고 있는 길입니다.”
“왜 사람들은 그 유대 사람을 따릅니까”
“그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입니다”(마16:16)
“그 사람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그 분은 예수라고 합니다”
이 말을 하려는 순간 이 사내의 가슴은 너무나 메이기 시작했습니다. 그 이름을 생각하는 것조차도 이제는 가슴 깊은 슬픔과 그리움이 몰려오기 시작합니다. 그는 지난 날 그가 지극히 사랑했던 그 분을 생각하며 한없는 서러움에 잠기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갑자기 등을 보이고 앞서 있던 그 사람이 사내에게 등을 돌렸습니다. 바로 그 순간 울던 사내는 소스라치게 놀라고 맙니다. 그는 바로 사내가 그토록 그리워하던 그의 스승이었습니다. 울던 사내는 베드로였고, 돌아선 사람은 바로 예수님이었습니다. 너무나 놀랍고 반가운 마음에 베드로는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주님 주님은 어디로 가십니까?(Quo vadis, Domine?)”
“나는 네가 버린 양을 찾아 로마로 간다. 로마에 가서 십자가에 달릴 것이다”
“주님이 왜 십자가에 또 달리신단 말씀입니까?”
“내가 그들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이 말을 들은 베드로는 갑자기 가슴이 뜨거워지며 조금 전 그렇게 좌절하고 절망했던 그 마음이 어느새 사라지고 지극한 평강이 임하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마음을 추스르고 보니 이미 예수님은 사라지고 계시지 않았습니다. 베드로는 더 이상 머뭇거리지 않았습니다. 그가 오던 길을 바로 돌이켜 로마로 향했습니다. 로마로 향하던 그는 지난 날 주님과의 대화를 기억했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내 어린 양을 먹이라”(요21:15-17)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요1:42)
2. 베드로 행전(Acta Petri)
이 이야기는 외경의 베드로 행전에 나오는 이야기를 조금 제가 각색을 해보았습니다. 각색을 했다고 경전에 나오는 원문을 그렇게 많이 변형시키지는 않았습니다. 잠깐 외경이 무엇인지 알아보고 이야기를 다시 하겠습니다.(이하 생략가능, 발췌의 글) -QTE
구약외경
우리가 보는 성경외에 외전(外典)·경외경(經外經)이라고 하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현재 쓰고 있는 성경 즉, 정경(正經)과 대비되며, 그리스어 형용사 아포크리포스(apokryphos:감추어진)에서 유래한 말로서, 원래 구약의 ‘70인역’에는 포함되고 헤브라이어 성서에 들지 않은 것을 가리키는 말로 쓰였다고합니다.
외경에 대한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의 명칭도 서로 다른데, 가톨릭 학자들은 외경을 제2정경(正經:經典, deuterocanonical)이라고 지칭함으로써 정경에 거의 준하는 권위를 부여하고 있는 반면에, 프로테스탄트 즉 개신교 학자들은 정경에 들어가지 못한 종교적인 책을 지칭하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외경의 형성 경위는 이스라엘 역사 중 바빌로니아 포로기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바빌로니아에서 포로생활을 해야만 하였던 이스라엘인들은 포로기 이후에 성전의 재건과 헤브라이어 성서의 정경화 작업에 힘을 기울이게 되었습니다. 이후 여러 경전이 생기고 정경화 작업이 이루어지면서 정경에는 빠졌지만 경전으로 인정되는 외경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신약 외경
신약 외경은 대개 A.D. 2세기 이후에 기록된 신약정경 외 책들을 통칭하여 가리키는 말입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사도시대, 1세기부터 기록되기 시작한 권위를 가지는 외경들도 많으며, 시간이 지나면서 내용이 보완되었습니다. 외경은 초대 교회의 각종 생활 자료들을 풍부하게 담고 있으며, 초기 가톨릭 교회의 성전(사도교의 전승)을 형성하는 데에 많은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기록상 신약성서 27 권 중 A.D. 90년경에 쓰여진 요한 계시록을 제외하면 대부분 베드로나 사도 바울 생전에 기술된 책들입니다. 따라서 성서에는 베드로나 바울, 그리고 다른 사도들의 죽음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언급이 없습니다 (사도들 중 가장 먼저 순교한 사도 성 야고보 제외. 야고보의 순교에 대해서는 사도행전에 기록이 있음). 대신 27 권이 신약성서로 확정되기 전에 고대 교회에서 읽었던 성서들 중에는 교부들이 각 사도들의 행적에 대해서 기록해놓은 책들이 있는데, 베드로와 바울의 행적을 중심으로 교회 탄생 이야기를 전해 주는 성서 정경(正經)은 「사도행전」입니다.
그러나, 비록 성서 정경에는 포함되지 않았지만, 사도들의 생애, 선교 활동과 순교 등을 담고 있는 책들도 있는데, 이를 「외경(外經)사도행전」이라 부릅니다. 예컨대, 「베드로 행전」, 「바울 행전」, 「도마 행전」, 「요한 행전」 등이 여기에 속하며, 이 가운데 가장 오래되고 유명한 것이 바로 「베드로 행전」입니다.
이 작품은 180년~190년경에 소아시아 또는 로마에서 씌어졌으나, 저자가 누구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전해지고 있는 작품은 원작의 2/3정도에 지나지 않는데, 아마 잃어버린 부분에는 베드로 사도가 로마에 가기 전에 예루살렘에서 활동한 내용이 담겨 있었을 것으로 미루어 짐작합니다. -UNQTE
오늘 우리는 이 「베드로 행전」을 통해서 또 다른 사도행전의 이야기를 알아보기로 합니다. 「베드로 행전」은 베드로 사도가 로마에서 활동하고 순교한 이야기를 전해줍니다. 좀 더 이야기를 들어가 보겠습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의 그리스도인들과 작별하고 스페인으로 떠나자, 마술사 시몬이 로마에 와서 갖가지 현란한 묘기로 그리스도인들을 유혹합니다. 이 마술사 시몬은 사도행전에 8장에 나오는 사마리아의 큰 자로 자칭하던 그 시몬입니다. 바로 이때 베드로가 로마에 건너와서 마술사 시몬과 서로 여러 가지 기적 시범을 보이면서 한 판 대결을 벌이게 됩니다. 멋지게 하늘을 나는 시범을 보이던 마술사 시몬은 베드로의 기도로 말미암아 떨어져서 다리가 세 군데나 부러지게 되는데, 이 대목은 마치 무협소설을 읽는 듯한 느낌마저 들게 합니다. 마침내 기적 대결은 베드로의 승리로 끝나고, 마술사 시몬은 들것에 실려 가서 수술을 받았으나 죽고 맙니다.
우리가 사도행전에서도 본 바와 같이 사도들은 선교지에서 많은 설교를 합니다. 베드로는 로마에서 금욕생활에 관해서 설교했습니다. 베드로의 가르침에 감명을 받은 수많은 부인들은 남편과 헤어지거나 정상적인 부부생활을 거부하거나 방탕한 로마의 문화를 거부하게 되었고, 그 결과, 베드로는 로마 집정관이었던 아그리파의 미움을 사게 되었습니다. 죽음의 위협을 느낀 베드로는 혼자서 로마를 빠져나가고 있었습니다. 바로 이때 예수와 베드로의 극적인 만남이 이루어집니다.
원문을 직접 옮겨보았습니다.
『로마 성문을 벗어나자, 베드로는 로마로 들어가시는 주님을 뵈었다. 베드로가 「주님, 어디로 가십니까?」 라고 여쭈었다. 주님께서는 「십자가에 못박히려고 로마로 가는 길이오」 라고 말씀하셨다. 베드로가 「주님, 십자가에 다시 못박히시겠다는 말씀입니까」라고 여쭈었다. 주님께서 「그렇소, 베드로. 나는 다시 십자가에 못박힐 것이오」라고 대답하셨다. 그제서야 베드로는 제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하늘로 다시 오르시는 주님을 뵈었다. 마침내 베드로는 기쁨에 가득 차서 주님을 찬미하면서 로마로 돌아갔다. 왜냐하면 「나는 십자가에 못박힐 것이오」라는 말씀은 베드로에게 일어나야 할 일이었기 때문이다』.
이미 예수께서 예고하신 운명대로(요21:18-19), 베드로는 집정관에게 잡혀가 사형선고를 받게 됩니다. 사형장에 들어선 베드로는 사형집행자들에게 머리를 아래로 해서 십자가에 못 박아 달라고 청합니다. 우리는 흔히 베드로가 주님이신 예수와 똑같은 모습으로 십자가에 매달릴 수 없다고 고집하여 십자가에 거꾸로 못 박혔다고 알고 있지만, 「베드로 행전」이 전해주는 내용은 조금 다릅니다. 베드로에 따르면, 죄 많은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거꾸로 태어났다. 그 결과 인간의 눈에는 『추한 것이 아름다운 것으로 악한 것이 선한 것으로』 뒤바뀌어 비쳐졌다. 그러니 죽을 때에도 세상을 거꾸로 살아온 죄인답게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하여 베드로는 스스로 모든 죄인의 상징이 되어 십자가에 매달렸고, 마지막 순간까지 인간들의 회개를 외치고는, 『감사합니다』라는 말을 남기고 숨을 거두었습니다. 이 거룩한 사도의 마지막 모습은 마치 예수님의 골고다 십자가 사건을 그대로 재현하는 것 같습니다. 베드로의 위대함이 참으로 드러나는 이야기일 것입니다.
지금도 로마 변두리 아피아 길에는 베드로와 주님의 만남을 기념하는 「쿼바디스 성당」이 자그마하게 자리 잡고 있습니다. 시골 냄새가 물씬 풍기는 이 길을 걷노라면, 다시 로마로 발길을 돌리던 베드로 사도의 그 뜨거운 사랑의 마음을 느낄 수 있을 듯합니다. 베드로가 정말 「베드로 행전」이 전하는 대로 주님을 다시 만나 뵈었는지 자신 있게 이야기 할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주님의 사랑을 확인했다는 것입니다.
3. 믿음과 소망
외경의 베드로 행전에는 베드로의 사역중 주님과의 동행과 예루살렘 교회 이후의 일들이 기록되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의 행적에 관해서는 우리는 복음서와 사도행전을 통해서 볼 수 있습니다. 특히 베드로가 주님을 만나서 동행하며 주님의 사역의 동반자가 되어 가는 과정은 우리는 복음서를 통해서 볼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로 치면 옛날 함경도 지역이라고 할까요... 오래전부터 소외의 땅 갈릴리에서 그는 어부로 살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던 그가 주님의 부르심을 받고 주님과 동고동락하는 삶을 시작하였습니다. 처음에는 선지자 중의 한사람이거나 혹은 베드로의 아비와 그 아비의 아비, 또 그 아비의 아비가 그토록 바라던 메시아 즉, 자신들의 암울한 상황을 타개하고 새로운 나라를 세워줄 왕이었던 것으로 믿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었습니다. 그가 동행했던 왕이 되어줄 이 분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아들로서 오신 분이었습니다. 그냥 선지자로서 그들의 조상의 왕들의 모습이 아닌 거룩한 신성을 가지고 계신 분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확인 하게된 베드로와 동료들에게는 확실히 주님을 향한 굳건한 믿음과 또한 그를 통한 왕국의 건설 나아가서는 하나님 나라의 건설에 대한 소망이 있었습니다(마16:16)
이제 가는 곳마다 귀신이 떠나가고 병이 치유되고 앉은뱅이가 일어서며 물위를 걷는 초월적 체험을 하게 됩니다. 수많은 군중들이 예수님과 그들 일행을 따라다니는 것을 보면서 정말 대단한 자부심과 함께 꿈을 키워나가기 시작했습니다. 또한 예수님이 세우실 왕국의 영광을 분배하는 소망은 참으로 신명나기까지 했습니다. 마태의 기록을 보면 제자들은 주를 좇는 상급으로 무엇을 얻을지에 대해서 대단히 고무적이었습니다. 또한 주님의 12보좌와 심판에 대한 약속은 그들의 영혼에 울리는 신명나는 음악소리였습니다(마19:27-28) 거칠 것이 없고 두려울 것도 없었습니다. 주님과 함께 한다는 믿음은 곧 소망이었고 그것은 바로 그들이 원하는 무엇이든지 이루어지는 놀라운 역사였고, 증거가 되기 시작했습니다(히11:1)
그런 그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바로 조금 전까지 그들이 믿고 소망하던 모든 일들이 한순간에 무너지는 일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예수께서 잡혀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는 일이었습니다. 바로 그 순간 그들에게 그동안 자리하고 있던 모든 믿음과 소망은 한 순간에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모든 제자들이 등을 돌리기 시작했고 어떤 제자는 바로 그 자리에서 옷을 발가벗긴 채로 도망가기도 하고, 또 베드로는 주님을 부인하다가 급기야 저주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주님을 뒤로 한 채 낙심한 그는 갈릴리로 가서 다시 어부의 자리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마치 엠마오 도상에서 낙심하여 가는 제자들의 무심한 “요 근래에 예루살렘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던가?”하는 무심 속으로 돌아 가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들이 가지고 있던 그 굳건한 반석 같은 믿음과 그 영광스러운 소망은 불과 며칠 상관에 새벽의 서리와도 같이 스러지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가지고 있는 믿음과 소망의 연약성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보는 바, 사도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보내는 권면에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내가 산을 옮길만한 믿음이 있을지라도....(고전13:2) 바로 믿음의 불완전성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4. 사랑의 체험
베드로가 가진 주님과의 동행의 경험은 분명히 다른 어떤 사람보다도 탁월하고 구별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가 가진 주님을 향한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그 실체가 지극히 연약한 것이었습니다. 그런 그에게 사도행전이나 베드로행전에서의 그의 모습은 대단히 역동적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 역동성 내에는 분명히 어떤 특별한 계기가 있음을 발견합니다. 그것은 무엇이겠습니까?
이전에 베드로에게 주어진 예수의 경험은 분명히 놀랍고 경이로운 신의 능력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경험은 베드로에게 무한한 믿음과 소망을 부여한 것이 틀림이 없습니다. 하지만 그런 엄청난 경험도 베드로에게 예수를 품고 세상을 감당할 수 있는 온전함이 되지는 못했습니다. 그것은 무엇이었을까요? 요한복음 21장에서 주님은 베드로에게 오셔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질문하십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분명히 확인 하신 주님은 베드로에게 내 양을 먹이라는 놀라운 이야기를 하십니다. 바로 생명에 관한 진지한 논의와 검증이요 결정입니다. 생명세계에 대한 절대적 신뢰와 위임을 하시는 장면입니다. 그 검증의 잣대는 바로 주님께서 바라보신 베드로의 사랑이었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시는 예수님의 말씀은 내가 너를 사랑하고 세상을 사랑하는 그 사랑을 가지고 있느냐는 심층적인 질문이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그런 주님의 질문에 대한 명확한 인식을 하지는 못했습니다. 주께서는 바로 그런 세상을 향한 사랑을 강조하신 것이었지만 베드로에게는 여전히 그 넓고 온전한 사랑을 품기에는 아직 이른 시간이었을까요? 결국 베드로는 “주께서 저를 알고 계십니다”라고 고백합니다. 이 고백을 들은 주님은 재차 내 양을 먹이라고 권면을 하십니다.
“내 양을 먹이라”
“세상을 품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이지요...
결국 사랑의 경험이 베드로를 변화시켰습니다. 그는 부활하신 주님의 사랑의 확증을 받은 이후에 진정한 사도성을 확보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다른 제자들의 맏형이 되어서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서 초대교회의 정체성을 확증하는 성령강림의 현장의 산증인 되었고, 사도 바울과 함께 유럽 대륙을 복음화 시키는 놀라운 일을 감당케 된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보는 베드로 행전에서의 베드로의 모습도 그가 여전히 능력의 사도인 것이 확실하지만 그에게는 그 무언가가 결여된 모습입니다. 그것은 바로 주님이 양떼를 바라보시는 그 마음과 긍휼하심 즉 사랑입니다. 아피아 도상에서 만난 주님에게서 온전한 사랑을 체험한 베드로는 결국 사랑의 온전함을 온 몸으로 실천에 옮겼습니다. 베드로의 주님과의 만남은 바로 사랑을 찾아 떠나는 순례자의 길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잘 몰랐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주님이 그를 얼마나 사랑했었는가를 깨닫게 되었고 주님이 그를 떠난 것 같지만 여전히 그의 순례의 길을 동행하고 계셨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순례자의 길을 가는 동안에는 우리는 명확하게 진리를 들여다보*지 못합니다. 하지만 온전한 것에 우리가 도달하게 될 그 때에 비로소 우리는 진리를 명확하게 알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그 사실을 명확히 재확인 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가 그랬고 또한 다른 제자들도 그러했거니와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신뢰하고 의지하지만 그것이 전혀 온전하지 못한 경험을 다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온전히 볼 수 없고 하나님 나라는 여전히 우리에게 감추어져 있습니다. 여전히 우리는 주님과 그 나라에 대하여 아직은 청동거울로 우리자신을 바라보는 것처럼 흐릿하고, 여전히 세상에 대하여는 장성한 분량에 도달치 못한 아이의 일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이 모든 것이 명확해진다고 사도바울은 이야기합니다. 그것은 바로 베드로가 체험하고 제자들이 체험한 주님의 사랑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에 대한 우리들의 확증이 곧 온전함이요, 온전한 것이 우리에게 오는 것입니다. 그 사랑을 우리가 받고 누리고 또한 나누기 시작할 때에 세상이 열리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온전히 들여다보이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세상의 창조의 의지와 그 의도에 대해서 알게 됩니다.
거룩한 생명의 세계가 열리기 시작합니다. 그것은 곧 신의 품성이요, 그 거룩성에 대한 우리의 참여입니다. 즉 사랑하는 자에게 열리는 계시의 세계인 것입니다. 믿음과 소망도 신의 성품에 도달하기 위해서 항상 우리가 품고 가져야 할 품성이지만 그 모든 것을 온전케 하는 것이 바로 사랑의 품성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곧 사랑이십니다. 사랑은 대상이 있어야 합니다. 그 분은 세상을 창조하시고 아름답고 조화롭게 정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정점에 에덴을 지으셔서 동산을 거니시는 것을 즐기셨습니다(창3:8) 그리고 바로 그 곳에 사랑의 대상으로 사람을 지으셨습니다. 사람은 곧 하나님의 품성으로 온전해 집니다. 그래서 사람은 사랑이어야 합니다. 온전한 것은 곧 사랑입니다. 그리고 사랑은 신의 세계를 열어젖히는 동력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노래했습니다.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전13:13)
내 사랑의 대상은 바로 내 가족과 이웃입니다. 사랑을 주십시오. 예수님과 베드로와 같이 사랑을 주십시오. 용서하고 관용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어 보십시오. 그 때 비로소 하나님이 우리에게 명확해지고, 천국이 확연하게 보일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곧 사랑의 행전의 도상입니다. 그래서 소망이 있고 믿음이 있고, 영원한 생명세계가 있습니다.
Acta Amore!
주후 2008년 7월 6일 만덕산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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