書刻의 歷史
서각의 시작은 구석기시대 말로 추정되나 정확한 사료는 찾아 볼 수가 없다.
단지 인간이 나무나 돌 등 자연물을 이용하여 구술적인 의사전달 보다는 문서적인 의사전달이 필요했으리라 생각된다.
결국 무언가를 기록하여 남기려는 인간본능의 욕구가 시대적, 환경적, 문화적 요인에 의한 변화를 통해 지금의 刻 예술로 발전했다고 할 것이다.
서각의 흔적은 중국 하남성 안양현 소둔에 있는 은나라의 유적(殷墟) 으로서 1899년 이후 여러차례 발굴된데서 비롯되었으며 그
중에 獸骨(수골)과 龜骨(구골)에 새겨져 문자로서 이것은 殷墟文字, 卜辭文字, 甲骨文字 등으로 일컬어지며 귀갑과 수골에 칼이나 송곳으로 새긴 것이 서각의 역사에 큰 밑거름이 되었다.
앞의 "서각의 이해"에서 이미 설명했듯이 경주 불국사 석가탑에서 발견된 신라 경덕왕 10년(715년)의 首善全圖無垢淨光大陀羅尼經(수선전도무구정광대타라니경)<국보 제126호, 두루마리형식, 길이 6m 30㎝, 폭 5.3㎝> ,
八萬大藏經詩箋紙(팔만대장경시전지)<국보 제52호> 등이 우리나라의 서각역사를 증명하는 근거가 되고 서각인들에게 교과서의 역할을 하고 있다.
참고로 여기서 팔만대장경을 설명하자면 잦은 외침으로부터 호국안민을 비는 온 백성의 불심으로 고려 전기(11C 초)에 初雕板(초조판)이 조판되었으나 몽고침입의 병화로 인해 소실되었다고 전해진다
현재까지 보존되어 오는 것은 병화 이후(1236 ~ 1251)에 16년간 강화도에서 제작된 것으로서 이러한 시대적 수난 속에서 지켜져 온 것만으로도 큰 가치를 지니지만
그 재료사용에 있어서 자작나무(白樺木)를 바닷물에 담구어 그늘에 말려 각을 하는 등 세심한 연구와 제작 후 옻칠과 보관하는 방법에 있어서도
기둥나무를 세워 그 사이에 판각을 끼워놓는 방법 등을 보면
세계 불가사의중에 하나라 아니할 수 없다.
지금에 와서는 감히 시도하기에 엄두가 나지 않을뿐더러 또한 단순히 우리에게 주어진 작품이상으로 깊은 예술적, 학문적, 과학적 가치와 그 이상의 의미를 보여주고 있다.
이렇듯 서각의 맥은 불교미술에서 시작되었고 불교양식을 중심으로 발달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 유적으로서는 궁궐이나 사찰, 정자, 누각의 현판 등에서도 刻예술을 찾아볼 수 있으나 건물의 얼굴 역할을 해온 書刻은 刻字에 대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고
다만 대장경에서 간혹 판각한 사람과 佛門의 대선사이름 등의 기록이 남아있고 현판각에서는 글을 쓴 분이나 왕의 이름만이 전해 내려오고 있을 뿐이다.
현대에 와서는 그 현판들이 오랜 세월로 인해 많이 훼손되어 재 복원을 추진하고 있는데 지금은 글 쓴이와 서각인을 함께 표현하기도 한다.
참고로 몇 가지 현판들의 예를 들어보자.
동양에서 목조건물로는 가장 오래된 부석사의 무량수전은 공민왕의 御筆이며 양각으로 처리했고 모판에는 날개가 있고 창덕궁에 있는 인정전은 왕의 즉위식과 외국사신을 접견한 장소로 현판은 양각 처리된 徐榮輔의 글씨로 한옥과의 미적 감각을 위해 모판(테두리)에 단청의 조화가 가미됐다.
또한 창덕궁의 樂善薺(낙선제) 입구에 위치한 長樂門은 李昰應(대원군)의 글씨로 양각된 작품이다. 奉恩寺 경판전에 김정희의 글씨인 판전이 있는데 이 판전은 김정희가 죽기 3일 전에 쓴 글인데 원본은 전해지지 않고 다만 刻작품만이 남아 있다.
그 구성은 양각이며 바닥은 푸른색, 글씨는 순금을 박아 붙인 작품이다. 이처럼 우리나라의 현판은 대부분 평면으로 처리되었고 간단한 조각과 단청으로 조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금세기에 들어와 서각인들이 각을 하는데 있어서 좀더 편리한 방법을 모색하여 서각용 도구의 개발과 새로운 刻法, 돋보이는 색채 등에 관한 연구가 매우 활발해 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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