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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대 국문학과 정민 교수의 홈페이지는 즐겨 찾는 사이트 중의 한 곳. 박지원, 박제가, 이덕무, 유득공의 글 등 풍부한 한문학 자료들을 일목요연하게 구비해 놓은 곳이다. 이런 사이트와 만나면 인터넷의 해악을 운운하는 발언들이 무색해질 수밖에 없다. 인터넷도 얼마든 생산적 커뮤니케이션의 장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이런 사이트들은 몸소 구현해주고 있다. 이곳에서 만난 다음의 문장은 오래 마음을 끈다. 명말의 문장가 장대(張岱)가 그의 저서 〈다섯 이인전의 서문(五異人傳序)〉에서 했다는 말이란다. "사람이 벽(癖)이 없으면 더불어 사귈 수가 없다. 깊은 정이 없기 때문이다. 사람이 흠[疵]이 없으면 더불어 사귈 것이 없다. 참된 기운이 없는 까닭이다." 무언가에 병적으로 미친 사람만이 깊은 정과 참된 기운을 갖추고 있다는 뜻이란다. 청나라 때 장조(張潮)는 <유몽영(幽夢影)>에서 또 이렇게 말했다던가. "꽃에 나비가 없을 수 없고, 산에 샘이 없어서는 안 된다. 돌에는 이끼가 있어야 제격이고, 물에는 물풀이 없을 수 없다. 교목엔 덩굴이 없어서는 안되고, 사람은 벽(癖)이 없어서는 안 된다." 선비들이 벽(癖)을 옹호한 것은 왜일까 벽(癖)이란 어떤 것에 대한 기호가 지나쳐서 억제할 수 없는 병적인 상태가 된 것을 뜻한다. 도벽, 노름벽, 주벽이란 단어들에서 짐작할 수 있듯, 벽(癖)은 대체로 부정적인 뜻을 함축한다. 벽(癖)은 끊을 수 없는 것, 절제할 수 없는 통제불능의 것이란 뉘앙스를 풍긴다. 그러므로 그것은 이성의 산물이 아니라 열정의 산물이다. 통제의 영역이 아니라 일탈의 영역에 벽(癖)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점잖고 근엄하신 선비들이 벽(癖)을 옹호한 것은 왜일까. 구부러진박차난초, 갈색난초, 뻣뻣한난초, 비틀린난초, 빛나는잎난초, 쇠뿔난초, 입술난초, 뱀난초, 민둥부리난초, 쥐고리난초, 노새귀난초, 그림자마녀난초, 물거미난초, 가짜물거미난초, 귀부인머릿단난초… 난초의 세계는 상상을 불허하는 다양성의 세계다. 이 책은 말한다. "많은 식물들이 제꽃가루받이를 하는데 이는 번식력을 높이고 종을 보존하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동일한 유전물질을 반복해서 다시 사용하는 제꽃가루받이를 하면, 종은 유지되지만 진화나 개선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제꽃가루받이를 하는 식물들은 계속해서 단순하고 평범한 형태로 남아 있는데, 예를 들면 잡초들이 그렇다. 발달된 식물들은 딴꽃가루받이를 한다." 난초들은 절대로 제꽃가루받이를 하지 않는다 대부분의 난초들은 절대로 제꽃가루받이를 하지 않는단다. 자신의 꽃가루를 인공적으로 암술머리에 묻혀줘도 수정이 이루어지지 않는단다. 어떤 종들은 자신의 꽃가루가 암술머리에 닿으면 그 독 때문에 죽기도 한단다. 이를 두고 놀라워한다면 아직 때는 이르다. 이 책은 실로 어안이 벙벙해질 정도로 놀라운 난초의 세계를 소개한다. 한 대목을 더 소개하자. "많은 (난초의) 종들은 자기가 좋아하는 곤충들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기 때문에 곤충들은 난초를 동종으로 착각하고 그 꽃에 내려앉는다. 그때 꽃가루가 그 곤충의 몸에 달라붙고, 그 곤충이 다른 난초에 가서 똑같은 실수를 반복할 때 첫 번째 꽃의 꽃가루가 두 번째 꽃의 암술머리에 묻혀진다. 다시 말해서, 곤충들보다 난초가 더 똑똑하기 때문에 그런 꽃가루가 가능한 것이다." 포복절도할 일이다. 그러나 이 대목에 이르면 요령부득, 난초의 교활함에 혀를 내두를 수밖에! "어떤 난초들은 꽃가루받이를 해주는 곤충들이 죽이고 싶어하는 적의 모습을 모방한다. 식물학자들은 이런 현상을 위적대관계 pseudoantaagonism라 부르는데, 천적을 발견한 곤충은 공격을 하게 마련이다. 그런 의미 없는 공격과정에서 곤충은 난초의 꽃가루를 몸에 묻히게 되고, 그런 실수를 반복하면서 꽃가루를 퍼뜨린다. 난초의 어떤 종들은 꽃가루받이를 해주는 곤충의 배우자처럼 보이도록 한다. 그 곤충은 이 난초 저 난초 찾아다니며 교미를 하려고 애쓰고, 그렇게 헛수고를 하는 과정에서 이 꽃에서 저 꽃으로 꽃가루받이가 이루어진다. 바로 위교미 pseudocopulation 현상이다." "본래 그 마음은 깨끗함을 즐겨 하여/ 정한 모래 틈에 뿌리를 서려 두고/ 미진(微塵)도 가까이 않고 우로(雨露) 받아 사느니라"라고 노래했던 난초의 시인 가람 이병기 선생이 이런 난초의 세계를 일찍이 알았더라면 어땠을까. 관념의 난초와 실제의 난초는 이렇게 다르다. 미치기 위해서는 미쳐야 한단다 스스로 난초 채취꾼을 자처하는 사람들은 강인하고, 예리하고 객지에서 죽을 각오가 되어 있어야 했단다. 죽음을 부르는 직업, 바로 그것이 난초에 대한 탐미적 열정을 증폭시켰음에 틀림없다. 불가능을 꿈꾼다는 것, 하나가 될 수 없는 것과 하나가 되는 합일에의 꿈, 에로스의 본질이란 그런 것이 아니던가. 위험에 아랑곳없이 세계의 오지를 찾아,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진기하고 아름다운 것을 찾아 떠나는 여행, 이만하면 충분히 목숨을 걸 만하지 않은가. 우리의 삶이 무엇을 결핍하고 있는가
"나는 지난해 여름까지 이름 있는 난초(蘭草) 두 분(盆)을 정성스레, 정말 정성을 다해 길렀었다. 3년 전 거처를 지금의 다래헌(茶來軒)으로 옮겨왔을 때 아는 스님이 우리 방으로 보내준 것이다. 혼자 사는 거처라 살아 있는 생물이라고는 나하고 그 애들뿐이었다. 그 애들을 위해 관계 서적을 구해다 읽었고, 그 애들의 건강을 위해 하이포넥이라는 비료를 바다 건너가는 친지들에게 부탁하여 구해 오기도 했었다. 여름철이면 서늘한 그늘을 찾아 자리를 옮겨주어야 했고, 겨울에는 나는 떨면서도 실내 온도를 높이지 않았다. "그들은(난초 수집가) 진정으로 무언가를 사랑하고, 살아 있는 생명체의 완전성을 믿고, 스스로 신화적인 인물이 되기 위한 모험의 세계에 살며, 어떤 것은 목숨을 바쳐도 좋을 만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고, 자신이 꿈꾸는 인생을 실현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었다." 그 세계는 우리가 안존하고 있는 상식의 세계 바깥에 있다. 경제적 효용성과 환금성(換金性)이 모든 사물과 행위의 가치판단의 잣대가 되고 있는 이 속물스러운 세계로부터도 썩 벗어나 있다. 모험이 있다면 마땅히 그런 것이어야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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