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 그 모순의 식물
옛 사람들이 대[竹]를 매화, 난초 그리고 국화와 더불어 사군자의 반열에 올려놓은 것은 그에게 선비다운 풍모가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리라. 사계절 푸른 잎을 바꾸지 않고 곧게 자란 외모에서는 선비의 지조를 느꼈고, 그 몸뚱이 속의 텅 빔을 보고는 선비의 겸허를 읽었을 지 모른다. 그러나 가만히 들여다보면 대는 옛 사람들이 생각한 것처럼 그렇게 선비다운 속성만을 지닌 식물은 아니다.
대라는 식물은 소속이 불분명하다. 나무도 아니면서 그렇다고 풀이라고 하기도 곤란하다. 일년에 다 자란 것을 보면 풀의 속성을 지닌 것 같기도 하고, 한편 여러 해 사는 것을 보면 나무의 속성을 지닌 것 같기도 하다. 또한 그 생김새가 여느 식물과도 다르다. 속이 황당하게 텅 비었는가 하면 일정한 간격으로 마디를 매달고 있다.
속이 빈 대를 놓고 사람들은 겸허를 말한다. 욕심을 비운 자의 표상으로 생각하기도 한다. 대가 정말 욕심이 없는 겸허한 식물인가. 평소 대에 관해 자세히 살펴본 사람이라면 이와는 다른 생각을 갖게 될지 모른다. 대는 다른 식물과는 달리 굉장히 빨리 성장하려는 속성을 지니고 있다. 죽순이 자라는 것을 지켜보고 있으면 쉽게 수긍하리라. 죽순은 며칠 사이에 어미의 키만큼 자란다. 그런 다음 죽순의 표피에 싸인 껍질이 벗겨지고 가지가 돋은 후에 잎이 피어난다. 대의 생장은 거의 몇 개월에 완성된다. 해가 거듭 되어도 대는 그 육질이 단단해질 뿐이지 더 자라지는 않는다.
대가 속이 빈 것은 성장의 그 빠른 속성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빨리 자라고자 하다 보니까 미처 속을 채울 겨를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속을 비우다보니까 그 약함을 견디기 위해 중간 중간에 마디를 만들게 되었으리라. 대가 속을 비운 것은 겸허나 무욕에서가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인 성급함과 욕망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대는 욕심이 많은 식물이다.
대는 그 뿌리를 깊게 내리지 않는다. 대신 옆으로 길게 뻗는다. 대는 씨로서 번식하는 것이 아니라 뿌리로 번식한다. 대의 뿌리가 여느 식물의 뿌리보다 빠르고 길게 뻗어나가는 것 역시 새끼에 대한 강렬한 욕심 때문으로 보인다. 그래서 대의 뿌리도 그 줄기와 마찬가지로 속이 비어 있고 마디를 지니고 있다.
대는 대 이외의 다른 식물과 더불어 살지 않는다. 굳게 얽히고 설킨 그 뿌리들이 다른 식물들과의 공존을 용납하지 않는다. 설령 어떤 식물이 천신만고 끝에 대밭에 뿌리를 내렸다손치더라도 그 짙은 잎새의 그늘 때문에 오래 견뎌내기가 힘들다.
대를 곧다고 말한다, 사람의 성질의 곧음을 대에 비유해서 대쪽같다고도 한다. 물론 대의 몸통을 쪼개 본 사람은 대가 얼마나 쉽게 파열되는가를 알 수 있으리라. 칼만 대면 이내 곧게 갈라지고 마는 대쪽에서 우리는 그 곧음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한편 생각하면 이는 다른 식물과는 달리 끈기와 인내가 부족한 것임을 또한 인정하지 않기도 어렵다. 살아있는 대가 얼마나 유연하게 바람에 흔들리는가를 보라. 대는 강직보다는 오히려 유연함이 그의 천성이라고 할 수 있다. 대는 강직과 유연을 아울러 지닌 모순의 식물이다.
대밭은 늘 소란하다. 바람에 잘 흔들리는 대의 이파리들이 서로 부딪치면서내는 소리다. 대밭에 서 있으면 소인잡배들이 모인 저자 속처럼 시끄럽다. 과묵한 선비의 기상은 전혀 찾을 수 없다. 이러한 대를 어찌하여 군자의 반열에 끼어 넣었는지 모를 일이다.
나는 어린 시절에 대와 함께 살았다. 내 조부께서 자리잡은 곡성(谷城) 등구정(登龜亭) 마을의 우리 집은 대밭 속에 묻힌 초가 삼간이었다. 서쪽을 제외한 동 남 북쪽이 온통 대숲으로 가득했다. 집이 먼저였는지 대밭이 먼저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아무튼 우리 집은 대밭 속에 자리한 집이었다. 여름철엔 시원했지만 겨울철에는 종일 볕이 들지 않아서 무척 추웠다. 죽순이 돋아날 무렵이면 내 조부께서는 아침 일찍부터 일어나셔서 대와의 전쟁을 벌이셨다. 집안을 향해 침범해 들어오는 대의 첨병들― 죽순들을 제거하느라고 영일이 없었다. 놈들은 마당뿐만이 아니라, 부엌이며 헛간 가릴 것 없이 돋아났는데 우리가 미쳐 발견하지 못한 어떤 놈은 지붕을 뚫고 솟아오르기도 했다. 겨울 바람에 서걱대는 스산한 댓잎새 소리, 눈이 많이 내린 날 밤이면 그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이따금 들리는 대마디 부러지는 소리, 달이 밝은 밤이면 봉창에 유령처럼 스치는 댓잎의 그림자… 나는 대의 성곽 속에 갇힌 가난한 왕자였다. 나는 대에 무한한 연민을 느낀다. 내 유년의 정서는 거의 대로 말미암아 이루어졌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리라.
그래서 그럴까. 나는 대처럼 아직 지사(志士)도 못되며, 겸허도 못 익히고 있다. 우유부단 세상일에 그저 그렇게 살아간다. 엉거주춤 모순 투성이다. 하기야 그렇게 사는 것이 과히 나쁜 것만은 아닐지도 모른다.
-임보님의 수필-
'言 > 젖지않을江' 카테고리의 다른 글
어머니의 강에 몸을 씻고, 마음에 새살이 돋게, (0) | 2008.05.24 |
---|---|
fish (0) | 2008.05.24 |
Dans Le Soleil et Le Vent (0) | 2008.05.24 |
우리 문화 박물지 (0) | 2008.05.24 |
Magda's waltz (0) | 2008.05.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