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리히 프롬의 ‘소유냐 존재냐’
“나는 나를 위한 모든 것을 가지고 싶다. … 소유가 나의 목표일진대 많이 소유하면 할수록 그만큼 나의
존재가 커지기 때문에, 나는 점점 더 탐욕스러워질 수밖에 없다. … 나의 욕망은 끝이 없기에 나는 결코
행복해질 수 없다.” - 본문 중에서
에리히 프롬(1900~1980)
소유보다 존재에 충실할 것을 주장
현대사회는 유례없는 물질적 풍요를구가하고 있다. 그러나 현대인은 결코 더 행복하지 않다. 상대적 박
탈감과 불안, 그리고 피로는 가중된다. 그들은 물질적 가치에 집착하고 과도한 경쟁에 휩싸이며 과다소
비에 빠진다. 이러한 과다소비는 현대사회의 다른 문제인 환경오염을 악화시키는 요인이기도 하다. 자
신의 소유를 과시하기 위해 명품에 집착하는, 소위 명품족도 이러한 현상의 하나다.
에리히 프롬(Erich Fromm)은 이러한 현대 산업사회 문제의 근본에는 ‘소유’에 집착하는 삶의 방식이 존재
한다고 믿는다. 산업사회는 사람들을 ‘그가 갖고 있는 것’에 의해 평가한다. 그가 소유하고 있는 자동차
나 집은 물론이고 그의 직업, 위치, 경력이 그를 규정짓는다.
이런 소유적 모드의 세계에서는 더 많이 갖는 것이 더 나은 인간으로 평가받는 기준이 된다. 그래서 사람
들은 더 많이 갖기 위해 노력한다. 그러나 이렇게 소유적 모드에 집착하는 한 인간은 결코 행복해질 수
없다. 프롬은 인간이 진정으로 행복해지려면 오히려 ‘소유(Haben)’가 아닌 자신의 ‘존재(Sein)’에 집중해
야 한다고 말한다.
프롬은 ‘존재’적 모드가 지배하는 사회를 다음과 같이 규정한다. 첫째, 새로운 사회는 무한성장보다는 필
요에 의한 선택적 성장을 지향한다. 둘째, 물질적 이익보다는 정신적 만족을 추구한다. 쾌락이나 다른 사
람의 인정(認定)이 아닌 진정한 내면적 깨달음에 삶의 중심이 있다. 셋째, 사람들은 기본적인 삶의 안정
을 보장받으며 관료제에 얽매이지 않고 주체적인 결단에 의한 삶을 살아간다.
에리히 프롬은 1900년 독일 프랑크푸르트의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나 프랑크푸르트대학과 하이델베르크
대학에서 공부하고 1933년 나치스의 발흥을 뒤로 하고 미국으로 이주해 예일대, 뉴욕대 등 여러 곳에서
강의를 했다. 1950년에서 1965년 사이에는 멕시코 국립대학의 의학부에서 가르쳤으며 1980년 스위스에서
사망했다.
에리히 프롬은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을 사회문제 해결에까지 적용한 후기 프로이트 학파의 대표적인
학자다. 그는 청년기에 지그문트 프로이트와 칼 마르크스의 영향을 받으며 현대인의 불안과 자유의 의미
에 천착했다. 특히 대중이 파시즘의 선풍에 빠져 들어가는 것을 목격하고 ‘근대인에게서의 자유의 의
미’를 탐구했다. 현대의 정신적 불안은 개인적인 정신분석요법으로는 치유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여 사
회구조변혁과 인간의 심리적 해방을 동시에 추구했다.
이러한 노력은 ‘자유로부터의 도피’(1941) ‘인간의 자유’(1947) ‘건전한 사회’(1955) ‘선(禪)과 정신분
석’(1960) ‘사랑의 기술’(1971) ‘소유냐 존재냐’(1976)와 같은 저작으로 결실을 맺었다.
에리히 프롬의 저서 ‘소유냐 존재냐’
‘소유냐 존재냐’ (To Have or to Be)는 ‘사랑의 기술’과 더불어 프롬의 후기저술 중 가장 널리 알려지고 이
미 고전의 반열에 올라있는 저작이다. 산업사회가 절정에 있던 1976년에 발표된 이 책에서 프롬은 현대
산업사회의 문제는 근본적으로 ‘소유’에 집착하는 삶의 방식에 있다고 주장했다.
인간은 소유를 추구함으로써 무력감과 고독감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불행히도 소유에 대한
욕망은 끝이 없으며 이러한 추구는 궁극적으로 인간을 불행하게 만든다고 보았다. 10억원을 가진 사람은
100억원을, 100억원을 가진 사람은 1000억원을 갖기를 갈망한다. 그래서 그는 인류가 산업화가 가져온 불
행과 소외에서 벗어나기 위해 ‘소유모드’에서 ‘존재모드’로 전환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두 가지 판이한 삶의 방식을 설명하기 위해 프롬이 든 예(알프레드 테니슨의 시와 일본의 마쓰오
바쇼의 하이쿠)는 너무나 적절하다. ‘갈라진 벽 틈새에 핀 꽃이여/ 나는 너를 그 틈새에서 뽑아내어/ 지
금 뿌리째로 손안에 들고 있다….’ ‘눈여겨 살펴보니/ 울타리 곁에 냉이꽃이 피어있는 것이 보이누나!’
‘꽃을 본 테니슨은 그 꽃을 뿌리째 뽑아 들고 소유한다. 그래서 꽃에 대한 그의 관심은 꽃의 생명을 단절
시키는 결과로 이어진다. 그러나 바쇼는 다만 바라보기만을 원한다. 또한 꽃을 그냥 관조하는 데에 그치
지 않고 꽃과 일체가 되기를, 꽃과 결합하기를 원한다.’(본문 중에서)
여기서 프롬은 바쇼의 태도가 무엇을 소유하거나, 소유하기 위해 탐하지 않고 기쁨에 차서 세계와 하나
되는 실존양식이라 설명한다. 지식을 주워 담고 필기하고 단순 암기하는 데 골몰하는 공부습성을 가진
학생과 지식을 내면화해서 자기화하는 학생의 차이도 마찬가지다.
인터넷 시대의 도래는 이러한 두 모드의 차이를 다시 한 번 극명하게 보여준다. 인터넷에 거의 모든 지식
이 있다고 생각하고 검색만을 즐기고 오려 붙이기를 하는 학생과 꾸준한 독서로 지식을 내면화하고 인터
넷의 정보검색을 통해 그것을 더 강화하는 학생의 진짜 실력 차이는 궁극적으로 하늘과 땅의 차이를 가
져올 것이다.
동양문명에 대한 깊은 이해를 추구했던 프롬은 현대사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의 하나로서 동양
의 존재 모드적 사고방식의 장점을 받아들이려 한 것 같다. 소유와 정복을 추구하는 다이내믹한 서양문
명은 동양문명의 정체성에 충격을 가했지만 이제 동양문명은 서양문명의 한계를 일정 부분 치유할 수 있
는 지혜를 주는 것은 아닐까. 산을 보면 정복하려 하는 서양의 진취적 태도와 산을 관조하며 산과의 일체
화를 즐기는 동양문화의 차이도 좋은 예가 될 것이다.
‘소유냐 존재냐’는 현대사회의 병리를 치유하려는 프롬의 노력이 집약된 저작이다. 그가 주장한 내용은
30년이 지난 지금에도 적실성을 잃지 않고 있고, 그래서 아직도 많은 사람의 공감을 얻고 있다.
여러 분야에서 분출하는 벌거벗은 욕망을 통제하지 못하고 있는 한국 사회는 프롬의 경고를 심각히 받아
들여야 한다. 이 책이 열악한 한국 출판시장에서 현재도 스테디셀러의 위치를 고수하는 것은 전혀 놀라
운 일이 아니다.
- 강규형 명지대 방목기초교육대학 주임교수·현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