言/간직하나人

[스크랩] 황금찬

oldhabit 2008. 5. 24. 14:41

한국 시세계를 영원히 영롱하게 밝힐 촛불, 후백 황금찬

뉴스일자: 2007-12-08

                               * 한국 시세계를 영원히 영롱하게 밝힐 촛불, 후백 황금찬 * /  안재동

 

  ▣ 작품으로 인생을 말하는 시인

  “작품으로 ‘인생’을 말하는 시인”으로 흔히 묘사되는 후백(后白) 황금찬(黃錦燦) 시인. <보리고개>, <별과 고기>, <촛불>, <낙엽시초>, <심상>이란 시가 특히 인상 깊다. 그의 창작 업적은 그의 성과 이름에서 받을 수 있는 뉘앙스처럼 그야말로 ‘황금 빛 찬란’하다.
  한 예술가를 조명하는 것은 예술가가 살다 간 그 시대의 청사진을 보는 것과 같다고 한다. 모름지기 예술가가 걸어온 삶의 역정(歷程)은 후세들이 필히 만나야 하고 연구해야할 과제가 아닐까 한다. 그런 관점에서 우리시대의 대표적 원로 예술가인 황금찬 시인을 심층적으로 조명해 보고자 한다. 황금찬 시인

   황금찬 시인은 1948년 당시의 문예지 『새사람』과『기독교 가정』등에 시를 발표한 것을 시작으로 1953년에 『문예』와 『현대문학』을 통해 정식 등단했다. 
  그가 48세가 되던 해인 1965년에는 처녀시집 『현장』을 세상에 내놓았다. 1980년대는 그의 가장 활발한 활동기라 볼 수 있는데, 시집 9권, 산문집 7권 등 무려 15권이나 되는 많은 수의 저서를 출간하기도 했다.
  그는 지금까지 창작시집 33권, 산문집 22권 등 모두 55권이나 되는 대량의 저서를 출간했고, 우리시대 문인이라면 그를 한국의 명실상부한 대문호로 칭하는 데 주저하는 사람은 아마 아무도 없을 것이다.

욕구불만으로 우는 놈을
매를 쳐 보내고 나면
나뭇가지에서 노래하는 새소리도
모두 그놈의 울음소리 같다.
연필 한 자루 값은 4원
공책은 3원
7원이 없는 아버지는
종이에 그린 호랑이가 된다.
옛날에 내가
월사금 4십전을 못냈다고
보통학교에서 쫓겨오면
말없이 우시던
어머님의 눈물이 생각난다.
그런 날
거리에서 친구를 만나도
반갑지 않다.
수신 강화 같은 대화를 귓등으로 흘리고 돌아오면
울고 갔던 그놈이 잠들어 있다.
잠든 놈의 손을 만져본다.
손톱 밑에 때가 까맣다.
가난한 아버지는
종이에 그린 호랑이
보릿고개에서
울음 우는
아버지는 종이 호랑이
밀림으로 가라
아프리카로 가라
산중에서 군주가 되라
아! 종이 호랑이여.
...가슴 한구석이 많이 아파온다.

-<심상> 전문

  황금찬 선생은 문단에 데뷔한 이래 지금까지 근 50년이 넘는 세월동안 끊임없이 왕성한 창작활동을 한 시인으로 특히 유명하다.   
  1955년 1월 창간된 월간지 『현대문학』은 2004년 12월호가 통권 600호로 기록되었는데, 그 동안 문인 570명(시인 237명, 소설가 133명, 평론가 74명, 기타 36명)을 배출하고, 수록작품 3만4천여 편을 수록한 것으로 밝혀졌다.
  그 중 시 부문에서는 서정주의 작품이 128편으로 제일 많이 수록됐고, 111편이 수록된 박두진에 이어 105편이 수록된 황금찬 선생이 세 번째 최다 작품 수록 시인으로 기록되고 있다. 네 번째로 많은 작품이 수록된 작가는 95편의 김춘수 시인이다.
  황금찬 시인은 현재 80대 후반의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창작활동을 계속하고 있으며, 계간<詩마을>을 발행하는 일과 해변시인학교의 교장으로 활동 중이다.
  다 아는 사실이지만 그는 한국 문단의 큰 어른이며 원로 중의 원로 문인에 해당한다. 하지만 아직도 그는 언제, 어디서, 누구를 만날지라도 늘 소년스런 순수함과 친근감을 잃지 않는 것으로 소문나 있다.

밤에 눈을 뜬다.
그리고 호수 위에
내려앉는다.

물고기들이
입을 열고
별을 주워먹는다.

너는 신기한 구슬
고기 배를 뚫고 나와
그 자리에 떠 있다.

별을 먹은 고기들은
영광에 취하여
구름을 보고 있다.

별이 뜨는 밤이면
밤마다 같은 자리에
내려앉는다.

밤마다 고기는 별을 주워먹지만
별은 고기 뱃속에 있지 않고
먼 하늘에 떠 있다.

-<별과 고기> 전문

   1956년 4월, 『현대문학』에서 박두진 시인이 황금찬의 시를 추천한 후, “황금찬씨는 평범한 주제요, 인생을 보는 눈도 일부러 기밀함을 꾀하지 않고 진솔한 것이 좋았습니다. 너무 타당하고 수월스런 당신의 서정이 시로써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것은 다름 아닌 이 당신의 진솔성과 그것을 휩싸주는 생에 대한 허무감 같은 것이었던가 합니다.”라며 추천소감을 밝혔다고 한다.
  황금찬 선생의 시적 중심 정서는 일상적 서정성이며, 창작 방법론은 쉬운 시와 일상적인 시, 미학적 방법론은 세계와 인간을 조망하는 미학적 낭만주의, 그리고 탈정치적 실존으로서 창작 당시의 사회 역사적 배경이 거의 등장 않는다는 점 등으로 압축되는 것이 그의 시세계에 대한 일반적인 평가다.
  허소라 시인(군산대학교 명예교수)이 쓴 ‘다시 읽는 기독교 명시 - 황금찬 <촛불>’이란 제하의 글을 잠시 살펴본다.

촛불!
심지에 불을 붙이면
그 때부터 종말을 향해
출발하는 것이다.

어두움을 밀어내는
그 연약한 저항
누구의 정신을 배운
조용한 희생일까.

존재할 때
이미 마련되어 있는
시간의 국한을
모르고 있어
운명이다.

한정된 시간을
불태워 가도
슬퍼하지 않고
순간을 꽃으로 향유하며
춤추는 촛불.                     


- ‘촛불’ 전문 -

 

  일반적으로 ‘촛불’은 한 알의 밀알이 썩음으로 30배에서 60배 열매를 거두듯, 소거(消去)를 통한 자기 희생의 거룩한 표상물로 인유되어 왔다. 자기 한 몸을 태워 어둠을 밝혀주는 그 정결한 희생은 ‘종말’이라는 시한부 때문에 더욱 거룩히 묘사되어 왔다. 둘째 연의 “어두움을 밀어 내는” 속의 ‘어두움’의 정체는 시대마다 또는 작가의 주제 설정에 따라 다소 다르겠지만 궁극적으로는 ‘비가치’와의 맞섬이 될 것이다. 비록 ‘시간의 국한’을 모르는 나약한 운명이었지만 마침내 그것이 강할 수 있었음은 이미 선험적으로 그 ‘누구의 정신’과의 합일을 수락했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 ‘누구의 정신’이란 두말 할 나위 없이 인류의 구원을 위해 두려움 없이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정신일 것이며 나아가 암담한 시대를 살아가는 시인의 지고한 시적 결의라 할 수 있다.
  특히 끝 연에선 한정된 시간을 불태워가면서도 슬퍼하지 않는 촛불의 모습에다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의 영원한 승리를 압맥해 놓은 것은 이 작품의 결정구라 할 수 있다. 순간을 영원으로, 그리고 기쁨으로 승화시킬 수 있음은 시인의 주체적 인식의 결과로 이 어둡고 속악한 현세에 진정한 삶의 한 모형을 제시하고 있는 이 작품은 읽는 이에게 새삼 옷깃을 여미게 한다.(허소라, ‘다시 읽는 기독교 명시’에서)


  ▣ 가난과 노동으로 점철됐던 젊은 시절

  황금찬 시인은 1918년 8월 10일 강원도 양양군 도천면 논산리에서 농부의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당시 그의 부친은 농사를 하였지만 어디까지나 소작농이었고 자기의 농토라고는 단 한 평도 없었다. 그나마 해가 갈수록 사정이 어려워져 소작할 농토마저 얻지 못하게 되자 그가 여덟 살 나던 해 이른 봄에 북간도로 떠나게 된다. 그 과정에서 신북청과 나흥 등지에서 닦고 있던 기찻길 공사장에서 일을 하며 여비를 벌다가 무너지는 흙더미에 중국 노동자 여럿이 깔려 죽는 것을 보았다고 한다. 그 후 일 년 가까이 걸어서 도착한 곳이 함경남도와 함경북도의 경계에 있는 마천령의 밑에 있는 용소동이란 마을이었다. 그는 거기서 그 마을의 훈장격인 어느 노인에게서 천자문도 배웠다. 그러나 그 곳에서도 여전히 형편이 어려워 그가 9살 되던 해에 겨우 밥이나 얻어먹는 조건으로 다른 마을에 있는 어느 집에 소먹이는 일과 소먹이는 꼴을 베는 일을 하는 아이로 가 있기도 했다.
  그나마 그의 가족은 용소동에서조차 겨울을 넘기지 못하고 마천령을 넘어 어산동이란 곳을 지나 성진으로 가게 된다.
  어산동은 마천령 바로 밑에 있는 마을이고 성진 시내까지는 약 30리 떨어진 거리, 그 앞으로 맑은 물이 흘러 욱동과 본동 사이로 흐른다. 그 물을 남대천이라고 한다. 그 남대천가에 집이라고 있는 움막에서 며칠을 지내고 그 후에 찾아간 곳이 재골유씨들의 마을이었다. 그 마을에서 처음 만난 친구들이 유종한이요, 유종문이요, 유봉기요, 유종설이었다.
  그 마을에서 황금찬 선생은 비로소 문화의 눈을 뜨기 시작한다.『예술가의 삶』(혜화당, 1993)이란 저서를 통해 그는 “생각하면 내게는 한없이 고마운 마을이다. 그리고 그 마을의 친구들이 끝없이 고맙게만 생각된다.”라고 밝히고 있다. 그 마을에서 그를 가장 가깝게 대해 주던 친구는 유병섭이란 사람이었는데 그 친구는 아버지가 없었다. 나이는 소년 황금찬보다 두 살 위였고 보통학교 6학년에 다니면서 철도구락부에 나가 일을 하고 있었다. 황금찬 선생은 그에 대해 “나는 그 친구의 신세를 많이 졌었다. 내가 동경에 있을 때, 놀랍게도 유병섭은 철도국에서 일하다가 실수로 기차에 치여 죽었다는 것이었다.”고 술회하면서, 그의 죽음을 참으로 가슴 아파하고 있다. 소년 황금찬이 성진을 떠날 때 습작한 시가 있다.

어산동에서 발원하여
너는 흐르고 있다.

너는 마을 사람들처럼
신도 신지 않고
맨발로 흐르고 있구나

풀숲과
돌밭을 지나도
발이 아프지 않더냐
한마디의 시름도 없이
흘러 바다로 가는구나.

어느 날
냇가에서 나는 너를 보고
울기도 했느니

너는 내게
귀를 열어라
입을 열라고 했느니

지금이야
생각난다.
귀를 열어도
듣지 말아라.
입을 열어도
말하지 말아라.
그래 마음 맑게 흘러라.

나는 너를
남대천이라고 했고
너는 한 권의 책이라고 했다.

그래 너는 나에게
읽으라고 했다.
내가 너를 다 읽는 날
나도 비로소
한 권의 책이라고 했다.

그러나 나는 아직도
너를 다 읽지 못하고 있다.
너를 다 읽는 날
나도 물이 되리라 했다.

-<남대천> 전문

  황금찬 선생은 “노동은 신선하다는 말은 사실이 아니다. 신선하다고 해야 하겠지만 직접 힘든 노동을 해 보면 결코 노동은 신선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라는 말을 『예술가의 삶』의 서두에 적고, 젊은 날 동경 시절 중노동으로 지낸 삶을 다음과 같이 공개하고 있다.

  동경 시절 몇 년 간 나는 실로 많은 노동을 해 보았다. 사람이 일생을 살아가면서 남에게 자기의 자랑을 할 것이 많다고들 하는데 나는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남에게 드러내 놓고 자랑할 것이 없다. 동경 시절만 해도 내가 벌어 내가 공부했으니 나에게 자랑할 것이 뭐가 있겠는가. 그저 남들보다 많은 고생을 했다는 것이 자랑이라면 자랑이라고 할까. 자랑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내가 거주하던 곳은 ‘시바구’에 있는 아주 가난한 사람들이 들어 살고 있는 편문전 아파트였다(말이 아파트이지 아주 작은 돗자리 4매 반을 깐 목조의 집이었다). 그 집엔 쥐와 빈대가 하도 많아서 밤에 잠을 제대로 잘 수 없을 정도로 쥐의 시끄럼과 빈대의 난폭이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나는 그 집에서 몇 년을 지냈던 것이다. 본래 동경으로 갈 때 유학을 간 것이 아니었다. 벌 수 있으면 어떤 일이라도 하여 고생을 이기며 학교를 다녀 보겠다는 마음이었다. 그러니 노동은 내 운명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나는 그 아파트에서 언제나 자취를 했다. 모든 것은 모두 내 손으로 했다. 바느질도 하고 밥도 짓고 빨래도 하고 반찬도 손으로 만들었다.
  남들은 여름방학이나 겨울방학이 되면 모두들 고향으로 돌아간다. 하지만 나는 그 방학을 이용하여 돈을 벌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 집에서 좀 가까운 시바우라(동경의 항구)를 주로 갔고 거기가 여의치 않으면 집에선 좀 멀지만 후까가와(공장이 많은 곳)에 가기도 했다. 지금 내 기억으로는 당시 전문대학의 한 학기 등록금이 3백 원이 아니었던가 생각된다.
  부두에 나가 하루 종일 강한 노동을 하면 2원이나 2원50전, 가장 많이 주는 곳이래야 3원을 주었다. 그런 노동은 시작하여 끝날 때까지 쉬는 시간이 단 일 분도 없다. 하루 종일 기계처럼 돌아가야 하는 것이다. 일이 끝나면 어느 직장이고 그날의 임금을 그 자리에서 현금으로 준다. 코피가 터지며 아무리 고된 일을 했어도 그날의 임금을 현금으로 받아 쥐고 나면 모든 괴로움은 그만 풀리고 만다. 하지만 전신이 무서운 매를 맞은 것처럼 무겁고 아프다. 그런 날엔 술을 마셔야 하는데 나는 그때 술을 마실 줄 몰랐다. 어디든지 가야 한다.
  그때 음악은 나의 구원이었다. 마치 종교보다도 더 높고 큰 것 같았다. 차를 마시며 울 수도 있었고 음악을 들으며 억울한 심정을 달랠 수도 있었다. 지금 생각해도 그때의 음악은 나를 구원해 준 것이라고 생각한다. 음악을 좋아하고 음악을 들을 수 있다는 것은 나를 불행의 길에서 행복의 세계로 인도한 것이라고 믿고 있다.(『예술가의 삶』에서)

보릿고개 밑에서
아이가 울고 있다.
아이가 흘리는 눈물 속에
할머니가 울고 있는 것이 보인다.
할아버지가 울고 있다.
아버지의 눈물, 외할머니의 흐느낌,
어머니가 울고 있다.
내가 울고 있다.
소년은 죽은 동생의 마지막
눈물을 생각한다.

에베레스트는 아시아의 산이다.
몽블랑은 유럽,
와스카란은 아메리카의 것,
아프리카엔 킬리만자로가 있다.

이 산들은 거리가 멀다.
우리는 누구도 배를 묻지 않았다.
그런데 코리아의 보릿고개는 높다.
한없이 높아서 많은 사람이 울며 갔다.
- 굶으며 넘었다.
얼마나한 사람은 죽어서 못 넘었다.
코리아의 보릿고개,
안 넘을 수 없는 운명의 해발 구천 미터
소년은 풀밭에 누웠다.
하늘은 한 알의 보리알,
지금 내 앞에 아무것도 보이는 것이 없다.

-<보릿고개> 전문


  ▣ 시와 음악을 위하여

  황금찬 선생의 동경 시절, 음악을 들으며 차를 마실 수 있는 음악당이란 곳이 있었는데, 그가 몹시 울고 싶거나 우울한 날이면 그 곳에서 드보르자크의 <신세계> 2악장이나 차이코프스키의 <비창> 1악장, 베토벤의 <운명> 1악장, 멘델스존의 바이올린 협주곡, 브람스의 바이올린 협주곡 등을 자주 들었다고 한다. 그처럼 음악에 대한 그의 관심과 취향이 남다르다고 볼 수 있다. 과거 성진에서의 소년 시절로 잠시 다시 돌아가 보자. 당시 30세가 좀 넘은 어느 맹인 청년이 운영하던 음악집에서 기회 닿는 대로였지만 한 일년 정도 음악을 열심히 듣곤 했었는데, 그 곳에서 주로 듣던 음악은 베토벤과 모차르트의 관현악 연주 그리고 리스트와 쇼팽의 피아노곡이었다고 한다. 그 때 베토벤의 관현악 전곡을 몇 번 들을 수 있었는데 아무리 들어도 다시 듣고 싶은 곡은 제5번 <운명>이었다고 한다. 그렇게 그는 소년 시절에도 음악집에 가서 밤이 깊도록 음악을 들었다는 것이다.
  또 낮에는 시집들을 열심히 읽었는데 일본의 북원백추(北原白秋)와 석천탁목(石川ꟓ木)이란 작가의 시집도 읽었다고 한다. 북원백추는 근대적 일본 시단을 그대로 형성시킨 시인이다. 북원백추의 시 중에는 <탱자꽃>과 <이 길은>이란 시를 애송했으며, 그 두 시는 그의 영혼을 울릴 정도로 뛰어난 작품은 아니었지만 아주 쉽게 씌어진 것이며 추억의 정이 담겨진 시였다고 한다.
  황금찬 선생은 또 “김소월의 시 중에서 내가 좋아했던 시는 <산유화>, <산>, <진달래꽃>이었며, 한용운의 시집 『님의 침묵』은 읽어도 읽어도 싫지 않았다. 그 중에서도 <알 수 없어요>가 더욱 아름다웠다. 한용운의 시 중 <복종>이란 시는 친구들끼리 줄줄 외곤 하였는데 복종하고 싶은 사람에게 복종하는 것이 곧 자유라고 생각하였다.”라면서, “외국 사람들의 시도 많이 좋아했는데, 알프레드 테니슨의 <제야의 노래>, <이녹 아든>, 애드거 앨런 포의 <애너벨리>, 아카디아의 <슬픈 사랑 이야기>, 롱펠로의 <에반젤린> 등이 그것이다. 그와 같은 시와 함께 이태준의 소설 <까마귀>도 나의 젊은 날의 꿈을 갖게 해 준 명작들이다. 나는 지금도 그 작품들을 생각하며 추억의 사과들을 딴다.”는 말을 『예술가의 삶』에 적어 놓고 있다.


  ▣ 詩作과 만남, 그리고 詩

  이번엔, 황금찬 선생이 詩作에 대한 관심은 언제부터 가지기 시작했으며, 그의 시업(詩業)의 뿌리는 어디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쪽으로 초점을 돌려보자.『내 문학의 뿌리』(도서출판 답게, 2002)에 기록된 내용은 다음과 같다.

  내가 소년 시절 처음 만난 잡지는 『아이생활』이었다. 「기독교 소회」에서 발간하는 월간 소년 소녀 잡지인데 잡지 값이 10전이었다. 이 잡지는 내게 친구가 됐고 스승이 되었으며 또한 학교가 된 것이다. 지금 내 나이의 근방에 있는 사람이면 그 『아이생활』의 독자 아닌 사람이 별로 없을 것이다.
  나는 이 잡지를 통해 문학의 꿈을 키웠고, 음악을 사랑하게 되었으며 그림 이야기를 좋아하게 되었다. 그 잡지를 통해 세계 명작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고, 그 명작들의 줄임 번역을 읽을 수가 있었다. 가령 『죄와 벌』이니 『부활』이며 『장발장』, 『주홍글씨』 등 비록 단편적인 소개이지만 그래도 들을 수 있었고, 호메로스의 『오디세이』며 또 『사랑의 학교』며 『이녹아든』이며 『에반젤린』 등 세계 명작들의 이야기를 우리는 소년시절에 그 『아이생활』을 통해 짧게나마 듣고 알 수 있었다.
  어린 시절 나의 시인의 꿈은 그렇게 자라가고 있었다. 그 때 일본 사람들이 자기 청소년을 위해 발간하던 잡지 중에 『킹그』라는 잡지가 있었는데 나는 그 잡지의 영향은 별로 받은 일이 없다고 본다.
  1929년 문학잡지 『삼천리』가 창간되었다. 하나 우리들에게 참 힘든 잡지였다. 그러나 『아이생활』에서 한 걸음 발전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었다.
  1931년 『신동아』란 종합잡지가 발간되었는데 그 잡지는 우리들에겐 수준이 높은 잡지였다. 그래도 우리들은 그 『신동아』를 사들고 다녔다. 그 무렵이다. 1932년인가 내 친구의 형님이 나를 부른다고 했다. 그 분은 최규용이라고 했는데 소설 공부를 하는 사람이었다. 나보다는 나이도 많고 공부도 많이 한 사람이다. 내가 찾아 갔더니 그 분의 말이 “오늘 아주 유명한 사람을 찾아가는데 같이 가자”는 것이었다. 그 분이 누구냐고 했더니 ‘최서해’라고 한다. 그 분의 이름을 들은 바 있지만 작품은 읽은 것이 없었다. 최규용이 그 분을 소개한다. ‘성진’ 사람인데 하도 가난하여 부두에서 막노동을 했고 하지만 좋은 소설을 써서 유명한 작가라고 했다.
  그 분을 찾아간다는 것이다. 그 유명한 사람을 만난다는 것이 한없이 기쁘고 또 두려웠다. 친구의 형님을 따라간 곳이 어느 허름한 여관방이었다.
  무엇인가를 쓰고 있다가 우리를 맞아주었다. 나는 아무 말도 못하고 앉아 있었고 최규용이 열심히 묻곤 했다. 한참 후에 최서해 선생이 “저 소년은 왜 왔는가?”하고 묻는다. “시를 공부하고 있는 아인데 선생님을 뵙고 싶다고 해서 같이 왔우애라.” 최규용의 말이다. 최서해 선생님이 나를 바라보면서 “시 공부 열심히 하나?” “시인되기가 쉽지 않아 시를 열심히 읽고 또 지어보고 해야돼. 결국 시 공부를 했느냐가 문제가 되는 것이지.” 하신다. 내가 문학가를 처음 만난 기억이다. 나는 그 날의 일을 영원한 기억 속에 두고 있다. 내 시업의 뿌리는 그 날부터 더 깊게 자리했는지 모른다.(『내 문학의 뿌리』에서)


  ▣ 시의 길을 위하여 살아온 평생
 
  한편, 황금찬 선생은 자신의 삶에 대해 스스로 “시의 길을 위하여 살아온 평생”이라며, 저서 『예술가의 삶』을 통해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나는 열 번을 죽었다 태어나도 시인이 되겠다고 생각한다. 흔히들 말한다. 시인이 된 것을 후회하고 있다고, 나는 그렇지 않다. 내가 시인이 안 되었으면 이 세상에서 할 일이 없다. 나는 나를 잘 알고 있다. 나는 아무런 재주도 없다. 능력이 없는 것이다. 그래도 할 수 있는 일은 노동과 시 쓰는 일 뿐이다. 그것도 남만큼 한다는 뜻이 아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그것밖에 없다는 뜻이다. 내가 시를 쓰지 않았다면 아마도 노동으로 일생을 살았을 것이다. 그 노동과 시 쓰는 일 외에 그래도 있다면 아마도 남을 가르치는 일일 것이다. 그것도 남들만큼 잘하는 것은 아니다. 그냥 했을 뿐이다. 시만을 써서 살 수 없으니까. 노동 대신 택한 것이 교사의 일이었다. 시만을 써서도 살 수 있었다면 나는 다 버리고 시만을 썼을 것이다. 나는 지금까지 대충 세 가지 일을 해 보았다. 학생 때 열심히 한 일은 노동이었다. 참으로 힘든 일을 했다. 낯 설은 이국땅에서 인간 이하의 멸시를 받으며 노동을 했다. 그 때 그 노동도 결국 시인이 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해방이 되면서 택한 것이 교직이었다. 교직생활도 시를 위하여 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내게 있어서 시는 나의 삶의 전부였다. 내 삶에서 시를 우선하지 않은 것은 없었다. 모든 것에 시가 우선했다. 나는 중․고등학교에 만 33년을 있었고 대학에도 20년 이상은 있었다. 그렇지만 직업인으로 직장을 삼지 않고 시인으로 직장을 삼았다. 나는 교직에 있으면서도 시도의 방해가 될 것 같은 일은 하지 않았다. 그것은 내게 능력이 없는 관계도 있었지만 그것보다는 시업의 방해가 될 것 같아 하지 않았다.
  교직에 있어 보면 사람들이 감투를 대단히 좋아한다. 그들은 교직을 통하여 윗자리를 노리고들 있지만 나는 교직을 통하여 좋은 시를 쓰려고 했다. 그렇다고 좋은 시를 썼다는 것은 아니다. 아직까지 마음만 두고 있을 뿐 내가 쓰고 싶은 좋은 시는 못 쓰고 있다. 하지만 나는 후회하지 않는다. 결국 내가 바라던 시 한 편을 못 쓰고 만다 하여도 나는 최선을 다해 노력했다는 것만으로 나는 흡족하다.
  나는 원래 기독교 가정에서 자랐고 교회 주일학교 선생과 교회 합창단을 늘 돕고 있었으며, 아버지가 내게 목사가 되라고 여러 번 권유도 하였다. 내가 목사가 되려고 했다면 그 목사의 권유를 받아들였을 것이다. 하지만 나의 목표는 어디까지나 시인이지 그 외에 다른 길은 생각해 보지도 않았다. 그 때 김 목사의 권유도 뿌리치고 말았다.
  하나 시인으로 등단하는 길이 그리 쉽지도 않았다. 내가 처음 추천을 받으려고 한 것이 39년의 일이다. 1939년 『문장』지가 새로 발간되었다. 거기 추천제도가 새로 생겼다. 시는 3회를 추천받으면 시인으로 등단하는 것이다.
  그 『문장』을 구독하면서 나는 누구보다도 가슴이 벅차 있었다. 나도 추천을 받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작품이라고 생각되는 시 몇 편을 『문장』에 보내고 추천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끝내 추천은 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문장』지에 추천되는 조지훈, 박두진, 박목월, 이한직, 김종한 들의 시를 읽고 나는 놀라기도 했고 내가 쓴 것은 시가 아니라 유행가사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시를 쓴다고 해도 시를 어떻게 쓰는지 또는 시인 한 사람 만나본 일도 없이 그저 혼자 공부하고 있었으니 시의 길을 쉽게 찾을 수가 있었겠는가. 나의 시작 수련의 길은 참으로 고독하였다. 그만이 아니고 슬픈 길이었다. 하지만 나는 참고 견디며 열심히 그 길을 걸었다.
  해방이 되고 지방의 보잘 것 없는 신문에 시랍시고 몇 번 발표한 일은 있었지만 서울에서 발간되는 잡지에 시를 발표한 것은 47년 작가 전영택이 하던 『새사람』이란 잡지에 시를 발표하였다. 그러나 작품이 졸작이어서 마음의 기쁨보다 부끄러움이 더 컸던 작품이었다. 내가 동경 시절 그러니까 42년과 43년 그 때 우리들이 나가던 교회가 있었다. 완전한 학생들의 교회였다. 그 교회 이름은 간다교회다. 나는 목사님의 청으로 매주 교회주보에 시 한 편씩을 실었다. 그것을 약 1년 반이나 계속했는데, 어느 날 목사님이 이젠 더 시를 주보에 실을 수 없다고 했다. 경찰이 강하게 막는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 때 서글펐던 마음을 잊지 못하고 있다.
  49년에는 박목월 시인이 『시문학』이란 잡지를 발간했다. 『시문학』50년 제2집 발간에 내 시가 추천되었다. 한데 추천사만 실려 있고 시는 실려 있지 않았다. 그 후에 안 일이지만 조지훈이 그 시고를 가지고 다니다가 취중에 잃어버렸다는 것이다. 나의 시도는 남들보다 험했고 멀었다. 내가 처음 『문예』에 추천받은 것이 53년이다. 경주를 지나면서였다. 그 땐 『문장』과 같이 3회를 추천받아야 등단하게 되는 것이다.
  54년 두 번째 작품이 추천되었다. 문예지가 한 10일 있으면 나온다더니 제작비가 없어서 그만 폐간되고 말았다. 참으로 나의 시도는 기구하였다. 그 후 나는 『현대문학』에서 추천을 마쳤다. 시도는 준엄한 길이었지만 슬픈 길은 아니었다. 내게는 그 시의 길이 희망의 길로만 생각되었다.
  43년 동경에서 이광수, 유진오, 박영희 그 분들을 만났을 때 그들로부터    문학의 길이 쉬운 길이 아니라는 것을 다시 한 번 실감하였다. 특히 이광수 선생과 여러 차례 만난 자리에서 그 분은 내가 묻는 말에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우리가 말과 글을 다 빼앗기고 말았다 하여도 문학은 해야 됩니다. 결국 그 사람은 역시 민족으로 남을 터이니까. 이 시대가 이렇게 어렵다하여도 열심히 공부하여 우리나라 사람이 이런 글을 썼다고 남겨 놓아야 합니다.” 나는 그 분의 그 말을 지금도 잊지 못하고 있다.
  41년에 우리말로 되어 있던 신문이나 잡지는 한 가지도 남김없이 모두 폐간되고 말았다. 『동아일보』와 『조선일보』그리고 유일한 문학잡지였던 『문장』과 외국문학을 많이 소개하고 평론을 주로 싣던 지성의 잡지 『인문평론』도 폐간되었다.
  40년대 초부터 해방이 될 때까지 한 5년간 문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에게는 가장 무서운 시기였다. 우리말과 우리글로 과연 문학을 할 수 있을까? 이런 의문과 또는 아무리 일본이 강하다 해도 결국 이 전쟁은 미국에 지고 말 것이다, 이렇게도 생각해보니 과연 그렇게 될까 하는 데는 확답이 나오지 않았다. 말과 글은 그 민족의 생명이 되는 것이다. 말과 글을 빼앗기고도 남아 있을 민족은 없다. 이 무렵 나는 나지막한 산간 마을에 숨어들어서 철학을 탐독하며 시를 공부하였다. 결국 내가 쓰는 시가 빛을 못보고 만다고 해도 나는 시를 쓰리라는 생각에서였다.
  내가 강릉에서 서울로 이사 온 해가 54년이다. 내가 서울로 이사한 것도 시 공부를 좀 더 깊이 해 보자는 의도였다. 나는 서울로 와서도 학교생활을 했다. 해마다 봄이 되어 학교 사무담당이 바뀔 때마다 내게 명령조로 학교장이 지시하는 것이다. 교무주임을 맡으라니, 연구주임을 맡으라니 심지어 생활주임을 맡으라니, 그 압력이 많이 가해져 왔지만 나는 그것을 단 하루도 맡지 않았다. 그것이 나의 시도에 장해가 될 것 같아서였다. 하나 학교수업만은 누구에 못지않게 충실히 했다. 남들은 그렇게도 선호하는 윗자리의 직책을 나는 무슨 형벌처럼 절대 거절했던 것이다.
  65년에 나와 아주 가까운 사람으로부터 인천에서 제일 이름이 있는 여학교에 교장으로 가라는 권유를 받았다. 그것을 거절하기가 대단히 어려웠다. 그랬지만 나는 교장 자격증이 없다는 이유로 거절했다. 그는 그런 것은 관계하지 말고 승낙하라는 것이다. 나는 또 하나의 이유를 달았다. 나는 학교에 오래 있었으나 행정과 사무를 전혀 몰라 교장이 될 수 없다고 했다. 그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학교의 모든 일은 서무가 할 것이고 교무는 교감과 교무주임이 해 간다는 것이다. 그리고 자동차며 교장기밀비도 약간 있으니 얼마나 편하겠느냐 수업도 없고 시공부하기엔 가장 좋은 곳이란 것이다.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갈 곳은 아니라고 거절했다. 그 친구는 내게 “좀 쉽고 잘 살아 보라고 했더니 끝내 거절이로군. 앞으로 내게 미안하다고 하며 후회할 날이 있을 걸세.” 하는 것이다. 나는 그런 후회는 지금까지 한 번도 해 본 일이 없다.(『내 문학의 뿌리』에서)


  ▣ 순수 창작시집․수필집을 55권이나 낸, 한국의 대문호

  앞서 언급한 바도 있지만, 아닌 게 아니라 황금찬 선생은 한국의 대문호이다. 황금찬 선생에 대한 이해를 높이기 위하여 그의 창작이력을 좀 구체적으로 살펴보기로 한다.
  그가 세상에 낸 시집(순수 창작집)은 서두에서 이미 밝힌 바 있지만 무려 33권(시선집 제외)이나 된다. 『현장』(청강출판사, 1965), 『오월의 나무』(한림출판사, 1969), 『분수와 나비』(문원사, 1971), 『오후의 한강』(종로서적, 1973), 『산새』(조광출판사, 1975), 『구름과 바위』(선경출판사, 1977), 『한강』(종로서적, 1979), 『한복을 입을 때』(종로서적, 1980), 『기도의 마음자리』(성서간행사, 1981), 『영혼은 잠들지 않고』(영산출판사, 1982), 『나비제』(백록출판사, 1983), 『별이 있는 밤』(양림사, 1983), 『언덕 위에 작은 집』(서문당, 1984), 『기다림도 아픔도 이제는』(맥밀란, 1985), 『조국의 흙 한 줌과 아름다운 주검』(맥밀란, 1985), 『고독과 허무와 사랑과』(혜진출판사, 1986), 『지구에 비극적 종말은 오지 않는다』(미래문화사, 1987), 『사랑교실』(오상출판사, 1989), 『보석의 노래』(정학사, 1990), 『떨어져 있는 곳에서도 잊지 못하는 것은』(종로서적, 1991), 『물새의 꿈과 젊은 잉크로 쓴 편지』(혜화당, 1992), 『하늘에 걸린 정원』(혜화당, 1992), 『겨울꽃』(시마을사, 1993), 『구름은 비에 젖지 않는다』(종로서적, 1994), 『오르페우스의 편지』(청학사, 1996), 『별을 찾아서』(마을사, 1996), 『행복을 파는 가게』(답게출판사, 1997), 『옛날과 물푸레나무』(모아드림, 1998), 『아름다운 아침의 노래』(토우, 1999), 『물방울 속에 우주가 있다』(오감도, 2000), 『우주는 내 마음에 있다』(모아드림, 2001), 『호수와 시인』(들꽃사, 2003), 『조가비 속에서 자라는 나무들』(모아드림, 2004) 등이 그것이다.
  이상과 같은 창작시집뿐만 아니라, 산문집도 자그만치 22권이나 출간했는데, 『실용문작법』(탐구당, 1965), 『고독이 남긴 그림자』(탐구당, 1975), 『모르는 여인의 편지』(선경출판사, 1977), 『원고지에 그린 고향』(청학사, 1979), 『너의 창에 불리 꺼지고』(지인사, 1979), 『그래도 별은 빛나고 있다』(홍익재, 1981), 『정신으로 승리한 문학』(민족문화사, 1983), 『창가에 꽃잎이 지고』(양림사, 1983), 『사랑과 주검을 바라보며』(자유문학사, 1986), 『영원의 뜨락에 내리는 비』(나무사, 1986), 『들국화』(자유문학사, 1986), 『목련꽃 한 잎을 너에게』(문학세계사, 1987), 『이름 모를 들꽃의 향기로』(기린원, 1987), 『그 밤엔 바람이 불고 있었다』(신원문화사, 1988), 『너와 마주한 사랑과 삶의 이야기』(답게출판사, 1990), 『산호꽃밭에 이 시대의 여인을 초대하려네』(스포츠서울, 1992), 『기다림은 늘 황홀하다』(훈민정음, 1993), 『행복과 불행사이』(혜화당, 1993), 『예술가의 삶』(혜화당, 1993), 『나의 서투른 인생론』(모아드림, 1999), 『돌아오지 않는 시간의 저편』(신지식사, 2000), 『나는 어느 호수의 어족인가』(도서출판 천우, 2004) 등이 그것이다.
  황금찬 선생은 일찍이 시동인『청포도』를 결성(1951)해 문학 활동을 적극 전개한 바도 있으며, 시문학상(시문학사 제정, 1965), 월탄문학상(1973), 대한민국문학상(1980), 한국기독교문학상(1981), 서울시문화상(1990), 대한민국 문화예술상(1992) 등의 굵직한 상들을 수상하기도 했다.
  선생은 그의 33번째 시집 『조가비 속에서 자라는 나무들』에서 “또 한 권의 시집을 들고 하늘 아래 선다. 이 시집이 내 서른세 번째 친구가 된다.  
  이제는 자랑할 것도 없고 부끄러울 것도 없는 마음이다. 내 현주소가 하늘로 옮겨진 것 같다. 모든 것들이 커 보인다. 나라는 존재를 희미하게나마 바라볼 수 있을 것 같다. 하늘의 별들이 가까이 온 것 같다. 시와 벗한 지 70년이 넘은 것 같다. 시는 아직도 내게 비밀을 말하지 않는다. 생각하면 슬픈 일이다. 어느 날 내 앞에 그도 올 때가 있으리라.”라며, 그가 시와 함께 살아 온 평생에 대해 마치 화룡점정이라도 하는 듯한 의미의 여운을 남기고 있다.


  ▣ ‘시의 고향’ 『청포도』의 주역들을 기억하다

  최근 문인들과 문학도들은 창작 작품을 발표할 때 문예지와 인터넷 공간 등을 주로 활용하지만, 동인지 발간도 선호하는 편이다.
  황금찬 선생에게 ‘시의 고향’이나 마찬가지라는 동인지『청포도』의 의미를 되새겨보기 전에 우리나라 동인지의 의미와 역사에 대해 잠시 짚어보기로 한다.
  동인지는 출판사에서 영리를 목적으로 발행하는 상업적인 잡지와는 다르며, 이러한 잡지는 학술·사상·정치·문학 등 각 분야에 걸쳐 있으나, 그 중에서도 양적으로 많은 것은 문학분야의 동인잡지이다. 동인잡지는 일반시민층에서 나온 학자·작가들의 집필자가 등장할 수 있는 근대시민사회를 전제하여 성립된 것이다. 그러나 출판활동이 자본주의적 경영의 대상이 되고나서부터 동인잡지는 잡지출판의 주도적 지위를 잃고 상업출판에 의하여 충족되지 않는 공백을 메우는 역할밖에 할 수 없게 되었다.
  유럽과 미국에서는 18∼19세기에 동인잡지가 발행되었다. 그리고 20세기에 이르러 동인잡지의 존재가 재평가되면서 특히,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이나 미국에서 문명의 기계화에 반항하는 사상가나 작가들이 영리를 목적으로 하지 않는 잡지를 발행함으로써 소수자의 사상 전파에 노력하였다.
  당시 이들 잡지를 ‘소잡지’라고 불렀다. 예를 들면, 포드가 중심이 된 『잉글리시리뷰』(1908)와 메리 부처가 중심이 된 『시그나티아』(1916) 등이 유명하다.
  한국에서도 현대문학(現代文學)의 초창기라고 할 수 있는 3·1운동 전후에 동인지 운동이 활발하였다. 즉, 1919년 2월 1일에 일본 도쿄[東京]에서 김동인(金東仁) 등이 중심이 되어『창조』를 발행하였으며, 이것이 한국 최초 문예동인지의 효시이고 현대문학으로 전환하는 역할을 하면서 1921년 5월 30일까지 통권 9권을 발행했다. 뒤이어 1920년 염상섭(廉想涉)·오상순(吳相淳)·황석우(黃錫禹)·남궁벽(南宮璧)·김억(金億) 등이 중심이 되어 『폐허(廢墟)』를 창간하였다. 이들은 낭만주의·이상주의적(理想主義的) 경향과 함께 퇴폐적이며 세기말적인 흐름을 띠고 있었으나, 1923년까지 2호만을 발행하는 데 그쳤다. 그 후 1922년 낭만파에 속하는 홍사용(洪思容)·이상화(李相和)·박영희(朴英熙)·박종화(朴鍾和)·나도향(羅稻香)·현진건(玄鎭健) 등이 중심이 되어 순문학 동인지 『백조(白潮)』를 간행하였으나 3호 발행에 그쳤다. 그 후 1930년에 김영랑(金永郞)·박용철(朴龍喆)이 『시문학(詩文學)』을 창간하였고, 청록파(靑鹿派)인 조지훈(趙芝薰)·박두진(朴斗鎭)·박목월(朴木月)을 비롯한 김종한(金鍾漢)·임옥인(林玉仁) 등이 활약한 김연만(金鍊萬) 발행의 『문장(文章)』(1939∼1941)이 창간되었고, 이와 때를 같이하여 최재서(崔載瑞)를 중심으로 『인문평론』(1938)이 창간됨으로써 『문장』지와 쌍벽을 이루었다. 이렇게 볼 때 한국현대문학의 발전은 동인지가 주도하였다고 볼 수 있다.(한국동인지문학관 ‘동인지 이야기’에서)

  이제, 황금찬 선생과 직접 관련된 동인지『청포도』의 탄생과 운영 과정에 대해 구체적으로 살펴보기로 한다. 『청포도』에 대해 황금찬 선생이 술회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1951년 당시 강릉에서 시를 공부하고 있는 사람은 많았지만 시동인지에 직접 동참할 사람은 최인희, 이인수, 함혜련, 김유진 그리고 나, 모두 5인이었다. 이 동인회의 이름을 무엇으로 할까 많은 이야기가 있었으나 이인수가 청포도라는 이름이 좋겠다고 하여 그렇게 이름을 지었다. 51년 첫 번째 동인지를 발간하기로 하고 우리는 시고를 모으고 출판비를 마련하였다. 그때만 해도 강릉에는 인쇄소가 없었고 서울엔 그때까지도 환도가 되지 않아 아무런 시설도 없었고 더구나 서울엔 마음대로 드나들 수도 없었다. 그래서 부산까지 가서 출판하기로 하고 이인수가 부산에 갔다.『청포도』표지는 지금은 파리에 가서 살고 있지만 백영수가 그려 첫 번째『청포도』를 발간하였다.
  하지만 첫 번째 동인지로는 체제로 보나 표지화로 보나 그리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리고 일 년이 지난 후 박목월이 제2집은 자기가 내주마고 했다. 작품이 되는 대로 보내면 아주 품위 있게 만들어 주마고 했다. 출판비를 물었더니 그런 것은 염려말고 작품만 보내라는 것이다. 책이 나온 후에 출판비를 이야기하자고 했다. 우리는 시고를 모으고 서문을 쓰고 편집후기도 쓰고 하여 대구 창조사로 우송하였다. 그 당시 박목월 시인이 출판사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 출판사 이름이 창조사였다.
  시고만 보내고 출판비가 쉽게 마련되지 않아 곧 보낼 수가 없었다. 그래서 하루 이틀 하다가 출판비로써는 태반이나 부족한 돈만 보내고 준비되는 대로 보내겠노라고 하였다. 출판비도 제대로 보내지 않았는데 『청포도』제2집이 나왔다. 대구에서 목월이 편지를 보내왔다.
“『청포도』제2집이 나왔습니다. 표지도 이쁘고 체제도 4․6배판에다 종이도 모조를 사용했습니다. 내가 보기엔 아주 품위 있는 책이라 생각됩니다.
  우선 책을 보낼테니 받으시고 사정이 허락하는 대로 출판비는 보내도 되겠습니다. 사정이 허락지 않으면 보내지 않아도 상관없습니다.“

꽃잎으로 쌓올린 절정에서
지금 함부로 부서져 가는 ‘너’
낙엽이여,
창백한 창 앞으로
허물어진 보람의 행렬이 가는 소리.
가없는 공허로 발자국을 메꾸며
최후의 기수들의 기폭이 간다.
이기고 돌아가는 것이 아니다.
그러기에 저 찢어진 깃발들,
다시 언약을 말자
기울어지는 황혼에,
내일 만나는 것은 내가 아니다.
고궁에 국화가 피는데
뜰 위에 서 있는 ‘나’
이별을 생각하지 말자
그리고 문을 닫으라.
낙엽,
다시는 내 가는 곳을 묻지 마라.

-<낙엽시초(落葉詩抄)> 전문

  대구에서 책이 왔다. 제2집은 1집보다 격이 있게 되었다. 표지화는 변종화 화백이 그렸는데 아주 좋은 그림이었다. 시동인지로서는 드물게 볼 수밖에 없는 책이었다. 그렇게 책을 아름답게 꾸며 보내 주었는데 출판비를 그 후 한 푼도 보내지 못하고 말았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가니 잊기도 하고 성의가 퇴색하고 말아, 그 후에는 아주 잊어버리고 말았다.
  나는 그 때 그 일을 생각할 때마다 미안하고 죄스러워 마음이 아프다. 물론 여러 번 박목월에게 미안하다는 말과 죄스럽다는 인사를 하였다. 그럴 때마다 박 시인은 늘 웃고 말았다.
  동인 중의 최인희는 49년에『문예』를 통해 한 번의 추천을 받은 때였고 그 후 두 번째 추천도 다시 받았다.
  나는 48년 전영태 씨가 서울에서 발행하던 잡지『새사람』이란 책에 두 번 시를 발표한 일이 있었다. 그리고 그 후에 나온『기독교 가정』에 많은 작품은 아니었으나 여러 번 작품을 발표한 일이 있었다. 하지만 시동인지『청포도』를 통해서 비로소 비싼 지면에 시를 싣기 시작하였다.『청포도』는 우리 동인들에게 있어서는 시의 고향이 된 것이다. 더구나 잊지 못하는 것은 박목월 선생의 깊은 은혜다. 나는 영혼으로 다시 만나게 될 때 몇 번이고 감사하다는 말을 잊지 않을 것이다.(『예술가의 삶』에서)


  ▣ 시인이 바라본 시인 황금찬

  시인 송명호는 과거 시인 황금찬을 처음 대면했을 때의 특별한 소감을 다음과 같이 나타내고 있다.
  필자는 48세에 첫 시집을 내고 그로부터 20여년 30권에 가까운 저서를 낸 황금찬 시인의 머리를 쳐다보며 왜 계관시인의 월계수 같은 백발이 테를 두르고 있는지를 알 것 같았다. 그러나 필자가 그린 엉터리 기하학의 모래판을 뒤집으며 주장자를 후려갈기는 사자후가 들려 왔다. “詩를 하면 돈하고 멀어디디요.” …멀어디디요. 멀어지지요…, 멀어지지요…, 시를…하면…
  말씀의 누룩이여, 더 이상 발효하지 않는다고 한탄하지 마라. 아이스크림을 쳐 바른 오늘만 달콤하게 빨아대던 너의 입맛으로 어찌 고가댁 시어머니가 빚은 묵은 장맛을 다실 수 있겠는가. 아 이제 다시는 한탄하지 말자. 마실 수 없는 은유법에 지쳐 버렸다고.
  필자는 3천5백 권의 시집이 꽂힌 老시인의 서재에서 떨리는 무릎을 보이지 않게 끌어 당겼으나 빨라지는 맥박을 숨길 수 없었다. 아마도 달마대사의 현신이 뿜어대는 선기(禪氣) 탓이리라. “이 시대의 가장 큰 문제는 예술의 부재에 있디요. 19C까지는 인간이 중심이 된 예술을 했으나 20C 이후에는 예술이 전 세계적 규모로 절망을 향해 갔디. 20C 후반이 이 정도까지 버티어 준 것도 앞서 살았던 훌륭한 시인들 덕분이디. 이제부터는 내일의 등불이 되는 좋은 詩를 써야디. 생각해 보게. 절망이나 욕설만으로 인간을 구원할 수 있겠는가.”
시인의 서러운 음성은 어느덧 축축한 물기가 어리는데 솔바람이 불고 달마존자가 내던지는 송린(松鱗) 하나가 번쩍이고 있었다. 필자는 그 비늘을 들고 툭툭 묻어 나오는 비린내를 맡고 있었다.

기울어지는 시각
싸늘한 거리에 비가 내린다.

운명처럼 마련된 내 생존의 길 앞에
모든 문은 잠기어 있다.
이제는 어쩔 수 없는
이 절박한 지대에서
나는 몸부림을 치며 문을 두드린다.
그러나 門은 열리지 않고
가슴에 박히는 수 없는 傷處
이것은 너무 심한 장난 같다.
사람은 平生을 두고
열리지 않는 문 앞에서 문을 두드리다 가는 것인가 보다.
흘린 피는 「갈꽃」으로 피고
핀 「갈꽃」바람에 울다 그나마 지고나면
조용히 남은 보랏빛 傷處
千代를 두고 다시 萬年을
이 문 앞에서 비를 맞으며
울다 간 사람들―
나도 여기 서서 울고 있다.

  황금찬 시인의 절창인 <門>을 두고 채수영 시인은 말한다.(시정신의 변형 연구, 황금찬론, 동천사)
  『생존의 시간과 생존의 길 앞에 모든 문은 닫혀 있다. 1연과 2연 그리고 3연에 와서 운명과 절박한 상황에서 몸부림치는 시인은 벗어날 수 없는 절망 앞에 한 발 비켜설 수도 없는 한계 상황의 시대를 살고 있다. 4연에 와서 가슴에 박히는 상처는 오히려 운명과 시대의 장난으로 치부하는 시인은 오히려 담담한 자세로 돌아서는 예지를 갖는다. 5연에 오면 일반적인 관념을 앞세워 보편적인 상황을 말한다. 인간은 누구나 열리지 않는 문 앞에서 서성이는 존재이다. 』
  격동의 세월이었다. 일제시대 해방공간, 6·25까지. 1918년생에게 역사에 난파당하는 인간이라는 초라한 이름. 그 시대에 시심의 꽃을 피우고 길러 39세에 시인이 된다. 그로부터 10년 후 첫 시집을 내자마자 무려 20권에 가까운 시집을 쏟아낸다. 대부분의 사람에게 창조력이 사라지는 오십 줄부터 왕성한 창작활동으로 노익장을 불태운다. 그것이 언제나 닫혀 있었던 문이 열렸기 때문일까. 의아함에 젖은 젊은 시인의 눈매를 환한 웃음으로 일깨우는 老시인의 눈초리 끝에서 훨훨 날아오르는 장자의 나비 떼 좀 보아, 오메 방안 가득 뒤덮히겠네?
  황금찬 시인은 결코 남의 단점을 말하는 법이 없었다 한다. 언제나 장점만을―허영자 시인의 말마따나 너무 어려운 일이다. 황금찬 시인은 젊은 여성 팬들이 너무나 많다고 한다. 그 앞에서는 모든 여성이 양귀비요 크레오파트라가 된다고 한다.
  영언문화사에서 출간한 『시인 황금찬 그의 문학과 인간』 제2부를 펴 보자. 30명의 시인들 중 21명이 老시인에게 압도적으로 많은 여성팬이 있었음을 웅변이 아닌 글로 증명해 주고 있다. 재미있는 것은 강릉사범에서 함혜련 시인과 데이트하는 것을 김혜숙 시인이 너무너무 부러워했다는 글이 들어 있다. 둘 다 후일 시인이 되었고 공교롭게도 둘 모두의 글이 황금찬 시인과 데이트를 같은 책 속에서 하고 있는 것이다.
고희 청년이라는 황금찬 시인의 이러한 힘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삼각형에서 원으로의 초월을 일상사에서나 詩에서나 이룬 탓이 아닐까? 그러므로 처음의 기하학으로 돌아가 보고 싶다.

삼각형의 내각의 합은 얼마?


① 유클리드---180°
② 로바체프스키---180°보다 적다.
③ 리이만---180°보다 크다.
그 이유를 말하라.
① 평면의 곡률이 0이므로
② 평면이 음의 곡률(courbure negative)이므로
③ 평면이 양의 곡률(courbure positive)이므로,

  자 우리는 답을 찾기 위해서 ③번의「리이만」을 찾아가 보자. 그에 의하면 모든 삼각형의 내각의 합은 180°보다 크다고 한다.
그렇다면 황금찬 시인이 그리는 삼각형은 리이만의 것이 아니겠는가. 언제나 넉넉한 세계관 위에 열리지 않는 門 앞에서 절망하더라도 그는 음의 곡률 속에서 방황할 것 같지 않다. 詩는 욕설이나 절망을 노래해서 안되며, 희망을 새로움을 꽃피워야 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내각의 합이 언제나 180°보다 큰 삼각형으로 존재하지 않겠는가.

괴로움은 노래로 잠재우고
저주로 인내를 극복한다.
남을 미워하지 않고 축복하며
인정 없는 사람에겐 절을 한다.
-<각설이> 중에서

  보나마나 각설이는 Persona의 분신이다. 스스로를 각설이로 설정하였으면서도 남을 미워하지 않고 인정 없는 사람에겐 절을 하겠다며 안으로안으로 다지시며 평생을 살아오신 분.
달마존자께서는 부채를 흔드신다. 미소 띤 눈매에서 날아오르는 나비 떼의 유영. 아득히 우주 속으로 빨려 들어가 유유자적하는 장자의 물고기. 아니 물고기가 되어 장자와 혜자까지 비웃어 주고는 검은 수초들 사이로 사라지듯이 우주의 한쪽에서 별의 거품을 끔뻑거리는 선사(禪師)-황금찬 시인.
시인의 집을 저만치 두고 버스정류장이라는 이름표를 다시 쳐다보았다. 필자를 빤히 쳐다보던 Bus Stop이 말한다. 한 手 배웠느냐고. 예 가슴까지 떨렸습니다. 그대는 지금도 내가 미루나무로 보이는가. 아닙니다. 아직도 멀었네. 他者化까지 갈려면. 기억해 두게. 새싹처럼 파릇파릇한 어느 소녀의 기도를, 왜 老木의 새 순이 더욱 시퍼런가를….
-당신에겐 모든 것이 시작이고, 또 그 시작은 항상 눈부시게 빛나던 당신-
(송명호, ‘삼각형의 내각의 합은?-180°보다 크지….’에서)


  ▣ 자유와 정직의 시인

  유한근 문학평론가(한성디지털대학교 교수)는『어느 해후』(황금찬 시선집, 미래사, 2001)의 해설에서 황금찬 시인의 시세계를 다음과 같이 평론하고 있다.
  1950년대 초반에『문예』와『현대문학』을 통해 詩作 활동을 시작한 황금찬 시인의 시세계는 그 경향적 특성에 따라 몇 가지로 분류해서 살펴볼 수 있다. 그러나 황금찬 시인의 40여 년의 시인적인 삶을 통해서 꿰뚫고 있는 시적 특성은 시대적인 유행 사조에 편승하지 않고 자신의 자연인으로서의 삶에 정직한 시를 써왔다는 점일 것이다. 자연인으로서의 고통스러운 삶을 날카롭고 부정적인 시각으로 대응하지 않고 긍정적인 시각으로 대응하는 한편, 그 시대적인 상상력을 과도한 상징으로 처리하지 않고 정감적인 감각으로 표출하고 있는 점도 황금찬 시인의 시적 특성이 될 것이다. 따라서 황금찬 시인의 시에서는 절망적인 삶, 파행적인 시대의 상황도 시인의 온화한 직관력에 의해서 밝은 삶, 자연에 수순하는 시대상황으로 환치된다. 시인적 삶의 체험에 충실한 생활시, 종교적인 믿음과 명상으로 여과된 명상시로 급박한 시대에 대응할 뿐이다.
  이에 따라 시의 표현론적 특성은 현란한 은유나 상징, 일부러 뒤틀어 놓는 현대시의 경향을 지양하고 단순구조의 미학을 보여준다. 누구나 쉽게 접근하여 이해할 수 있고 감동할 수 있으며, 그 속에 오래 몸담기를 원하는 무기교의 기교를 황금찬 시인은 시의 방법론으로 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이 점에 대해 하현직은 <꿈과 현실의 변증법>이라는 황금찬론에서 이렇게 말한다. “언어에 대한 자세 역시 기교적 수사학에 얽매이지 않고 유로되는 감정이 수반된 인식의 자율성에 의탁하고 있다. 삶에의 미적 탐구에 앞서 윤리적인 사유에 치중하며 다양한 추상적 암시성을 초월하여 구체적인 삶에의 경이를 반영한다.”는 것이 그것이다.
  자연스러운 감정의 흐름은 그에 합당한 언어와 구조로 비틀지 않고 자연스럽게 표출해 낸다는 것이 그의 시의 수사학적 방법론일 것이다.
  황금찬 시인의 시인적 삶은 50년대에서 시작된다. 따라서 6․25라는 비극 공간을 체험한 그 연장 공간에서 황금찬 시인은 시적 삶을 시작했다고 봐야할 것이다. 전후의 비참한 삶을 체험한 시인이 시로 그 체험을 표현하는 데에는 두 가지 방식이 가능할 것이다. 하나는 비극적 삶에 첨예하게 대응하여 실존주의적으로 그것을 굴절시켜 시적 반응을 보인다거나, 아니면 그 대응 방식이 소극적인 방법으로 오히려 서정성으로 탐닉해 나가는, 그것이 다른 하나의 시적 반응이 될 것이다.
  그러나 황금찬 시인은 위의 두 가지 방법에서 벗어나 참담한 삶에 대한 비극적 체험을 민족적인 체험으로 확대하여 의식 공간을 비극적인 절실함으로 인해 축소하지 않고 더욱 확대하여 우주론적 인식으로 극복한다.
  이는 첫 시집『현장』에 수록되어 있는 시에서 찾을 수 있다. 특히 시 <보리고개>는 개인적인 비극체험을 개인에 그치지 않고 세계 공간으로 확대하여 운명론적 해석으로 끝마무리를 한다.
  이렇게 거시적인 시각으로 시적 대상을 바라보기 시작한 황금찬 시인은 70년대에 이르러 현실 극복을 서정에 의탁하기 시작한다. 뿐만 아니라 그 서정이 종교적 신앙과 연결되면서 심오해 진다. 결국 여기에 이르러 황금찬 시인의 시선은 밖에서 안으로 거둬들이게 되는 셈이다. 참담한 현실에 대한 대응보다는 내적인 탐색에 시의 가치를 두기 시작한 셈이다. 이러한 문학적 시선의 변화는 황금찬 시인의 종교적인 체질 때문임도 지나칠 수 없다.
  원론을 다시 확인하는 것에 지나지 않을지는 모르지만, 훌륭한 문학의 마지막 척도가 사상임은 재론할 필요가 없다. 각박한 현실적 삶에 대한 어떤 대응도, 어떠한 철학적 해명이나 정서적인 반응도 어떤 때는 무력할 수 있다. 이러한 시인적 자각은 종교적 사상을 의탁하게 한다.(『어느 해후』에서)


  ▣ 무공해의 시와 소박미
   
  한편, 채수영 문학평론가(신흥대학 문예창작과 교수)는 그의 저서 『시적 감수성과 정신 변혁』(국학자료원, 1999)을 통해 황금찬 시인의 시세계를 다음과 같이 평론하고 있다.

  황금찬의 인간미에 대한 평가는 박목월의 다음 시로 대신할 수 있다.
세상에서 나는 사람을 만났네. 처음 그는 오뉴월 보리밭처럼 有情하고 뽕나무처럼 구수했네. 사귈수록 그의 情은 훈훈하고 욕심 없는 마음이 깊으기만 했네. 그는 평생 가난했지만 항상 그의 눈동자는 어질게 어리석고…마음이 외로울 때는 구석자리에 앉아 서로 말 없이 차를 나누었네. 
-박목월의 <무제>에서
  ‘사람’이라는 시어엔 다의적인 함축성을 갖고 있을 것이다. 정감 깊은 도덕성의 가치를 수반하면서 ‘보리밭처럼 유정’한 친근미 그리고 욕심 없이 담담한 삶의 자세 등, 황금찬의 인간적인 면모를 단적으로 요약하고 있는 박목월의 표현이다. 황금찬의 시에 또 다른 특성은 기교의 현란함을 구사하지 않는 점에서 일정한 자리를 갖고 있다. 이는 언어 감각에 유별스러움이 없고 이미지 천착에서 친근한 일상사를 소재로 독자와의 대화에서 난해한 거리를 갖고 있지 않다.
  황금찬의 시는 현란한 웅변이기보다는 속삭이는 정적인 美感을 앞세우기 때문에 사색의 강물을 따라가거나 조용한 호수를 스쳐가는 바람이거나, 미풍보다 가벼운 나비의 날개에 실리는 몸짓을 계속한다. 또한 남성적인 토운이기보다는 여성적이면서 꿈꾸는 세계를 찾아나서는 때론 통화적인 특징도 내장되어 있다. 이상은 황금찬 시의 기둥을 형성하는 중심 요소들이다.
  황금찬 시에 특성은 사랑과 휴머니즘과 신에 대한 경외 등으로 정신영역을 커버하고 있으며, 그리움과 사랑을 실현하는데 초점이 있다. 그리운 공간을 마련하기 위해 눈을 두리번거리고 사랑이라는 데 본질적인 시의 중심을 마련하기 위해 그의 의지는 집중된다.
  다시 말해서 사랑은 그의 시에 별이나 구름, 나비 혹은 새와 꽃으로 변형의 얼굴을 보이고 있다. ‘밤에 눈을 뜬다. 그리고 호수 위에 내려앉는다.’ <별과 고기>는 별로서의 변형은 황금찬의 정신에 至高性을 고취하기 위한 의도를 내장한다.
  사랑에는 거리가 없어야 한다. 다시 말해서 하나와 하나를 통합하려는 데서 사랑의 아름다움이 헌신을 전제로 안온한 공간을 확보하게 된다는 뜻이다. 황금찬의 사랑은 궁극적으로 거리감이 없는 인간미의 사랑을 위해 그의 시는 표정을 관리한다. 특히 별은 시대적인 어둠이나 정신적인 막힘을 극복하기 위한 자유의지의 일단으로 빛을 발한다.
  나비는 황금찬 시의 상표로 작용 - 강력한 힘도 그렇다고 치장을 위해 어떤 몸짓도 축적할 수 없이 다만 봄을 알리는 역할로 인식된다. 그의 시집『나비제』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나비는 내게 있어서 상징의 대상으로 존재한다. 마치 십자가가 기독교의 상징이듯이, 나비의 이미지는 내게 계속 시로 형상화될 것이다. 그것은 어쩌면 하나의 숙명과도 같은 작업이 될 것만 같다. 나비는 죽지 않는다. 나와 같이 생존할 것이다.”를 발성한 황금찬의 나비는 곧 황금찬 시의 문을 열게 되는 작용점의 기능을 수행한다.
‘고속버스 안에 나비 한 마리가 날고 있다…버스의 창이 열리면 꽃밭이 있겠지만 나의 종점에는 무엇이 있을까 나비와 같이 가고 있다’
  나무와 꽃도 황금찬의 시에서 주요한 이미지로 축조된다. 꽃은 바라보는 대상으로의 화려함과 미래를 예비하는 따스한 마음이 깃들어 있다. ‘가을 꽃씨를 받아 종이에 접는다. 종이 속에 봄을 싸서 서랍 속에 간직한다.’ <꽃씨>는 시인의 정신에 깃들어 있는 화려함을 예비하는 또 다른 정신의 공간을 뜻한다.
  휴머니즘은 문학이 실현하고자 하는 궁극의 종점일 것이다. 어떤 형태로의 표현이 되든 마지막에는 인간을 어떻게 사랑할 수 있는가의 방도를 모색하는 일로 귀결된다. ‘편지 속에 담아 보낸 은행잎 한 장 산 냄새가 나네. 친구의 우정이 향기로 오네.’ <편지>의 감각성에서 인간미를 만날 수 있다는 것은 도시 메카니즘의 삭막한 벌판에서 시가 지녀야할 임무의 모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황금찬의 시에는 우정의 깊이를 만날 때 다감한 속삭임의 전갈이 밀려온다. 이런 예들은 황금찬 시의 감수성을 자극하는 아름다움이자 따스한 체온을 교감할 수 있는 - 황 시인의 정신과 조우하는 즐거움의 관건일 것이다.
  M. 아놀드는 “종교를 대신하는 것이 시다”라는 말로 시와 종교의 일치를 말하고 있다. ‘시인이 도달해야 할 세계는 신앙의 세계가 아닌 가 한다. 그 신앙의 세계에 도달해서 비로소 인생을 말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기도의 마음자리>로 종교와 시의 경우는 구도 즉 닦음이라는 점에서 하나로 합치되는 과정을 취한다. ‘밤 예배가 끝나고 다 돌아간 빈 교회에 소녀가 앉아서 기도를 드린다.’ <소녀의 기도>의 정숙한 태도로 기도를 드리는 소녀의 심상은 곧 시인 자신의 마음을 뜻하기에 ‘가난과 불안과 불목과 시기와 불신과 이렇듯이 탁류의 흐름 속에서 우리들을 건져 주십시오.’를 간구하는 기도는 하늘로의 길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땅에서 평화와 기쁨을 생성하려는 의도로 황 시인의 기도는 일관성을 갖는다. 시는 시인 자신의 영혼을 투척하는 데서 하나의 의미를 건져 올린다면 이는 민족 구성원의 전통이라는 지점에 도달한다.
  소월이나 만해의 시가 1920년대에 유다른 현상은 민족의 전통에서 시심을 일구었다는 데서 가치를 갖는다. 황금찬의 시집 『한강』이나 『한복을 입을 때』에서 민족의 전통을 그의 시와 접목하려는 구체적인 조짐을 보이게 된다. 이는 노년에 이르러서는 민족의 의미와 개인의 의미가 다름이 아니라는 자각을 뜻하게 된다. ‘한복 한 벌 했다 내 평생 두루마기를 입어 본 기억이 없었으니 이것이 처음인 것 같다.……이 나이에 비로소 한 겨레 안에 서는 그런 느낌이 든다.’
  <한복>을 발성하는 시인의 마음은 미처 깨닫지 못했던 과거의 의미와 현재의 자각이 노년에 이르러 깨달음의 공간으로 시의 행로를 넓히게 된다.
  황금찬의 시는 부드럽고 담백하면서도 정적인 미감을 잃지 않는 무기교의 맛을 느끼는데 시의 입지가 있다. 그의 시는 질축한 언어의 헝클어짐이나 현란한 기교의 몸부림을 외면하면서도 속삭이듯 친근한 음성이 소박하게 다가온다. 이는 탈색하지 않는 일상의 언어를 시어로 구사하는 데서 의미의 영역을 넓히는 일면 자연스러운 시의성을 구축하는 요인이 무공해의 시를 추구하는 황금찬의 정신문법이다.


  ▣ 시는 천사가 사용하는 지혜의 전술

  이상으로 황금찬 시인의 시세계와 인품을 두루 살펴보았지만, 그 깊이와 넓이가 도무지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라는 것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황금찬 선생은 詩라는 것에 대한 의미를 다음과 같이 힘주어 말한다.

  “조국의 광복과 독립, 6․25, 그 과정을 거치면서 우리의 시는 크게 혹은 작게 발전하였다. 그러나 아직도 우리 시는 더 크게 비약해야 한다. 이 길을 위해 독자와의 거리를 갖지 말아야 한다. 이 땅에는 시의 독자 되기를 원하지 않는 사람이 아주 많다. 여기에서 시가 독자들에게 배당시키는 혜택은 무엇인가? 어색한 답이 될지 모르겠으나, 시와 독자 사이에는 공리성(公利性)이란 말이 성립된다. 시작품도 독자에게 어떤 이익을 주어야 한다. 이 점에 있어서 시는 독자에게 3가지의 이익을 주게 된다.
  ‘한 가지는 언어의 순화이고, 한 가지는 정서의 순화이고, 한 가지는 생활의 예지이다.’ 이것이 시작품이 독자에게 주는 공리가 되는 것이다. 시인이 크고 깊게 생각해야 할 일은 독자에게 그들이 바라는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면서 시작활동을 하는 것이다.
  시 독자에게는 시가 무엇인지를 이해시켜야 한다. 시가 무엇이냐고 했을 때 시인 각자가 자기대로 시의 정의를 내리고 있다. 이 경우는 한 가지로 통일시킬 수는 없다. 천 명이면 그 정의도 천 가지로 내릴 수 있을 것이다. 이 시적 정의에 따라 독자를 좌우할 수 있으리라. 사람에게는 선과 정의를 위한 나라가 있고 또한 악과 추를 위하는 나라가 있다. 이 두 나라는 모두 한 사람의 마음 속에 있다. 이 두 나라는 언제나 어디서나 싸우게 된다. 그 싸우는 전사는 천사와 악마다.
  그들이 싸움에 사용하는 무기는 둘 다 언어다. 즉 말의 무기다. 이 무기는 세상 모든 무기 중에서 가장 무서운 무기다. 대개는 싸움에서 천사가 승리하게 된다. 이것이 인류의 평화요, 사람의 행복이다. 간혹 악마가 승리하는 경우도 그리 적진 않다. 이것이 평화를 해치는 전쟁이요, 질병, 살인, 불행이다.
  천사가 사용하는 지혜의 전술을 詩라고 한다. 이 전술을 배우지 못하면 인류의 평화나 인간의 행복은 오지 않는다. 악마의 전술도 시다. 하나 그것은 평화나 행복을 위한 것이 아니고 악마세계의 음성이나, 윤리와 도덕을 파괴하고 악마세계의 헌법을 호도하려는 것이다. 그들 시는 어떤 모습으로 형상화되어 있는가. 호랑이의 이빨 같은, 사자의 꼬리 같은, 악마의 칼날 같은, 원숭이의 콧구멍 같은, 그러나 지혜의 전술의 형상화는 향기의 꽃잎 같은, 어머니의 음성 같은, 천사의 입술 같은, 가을 구름 같은, 선과 미는 하나이고 악과 추도 하나이다. 이제 앞으로의 시는 절대 선하고 아름다워야 한다.”(『내 문학의 뿌리』에서)
  한국의 대문호, 황금찬 선생 앞에서 필자는 박목월의 <무제>에서 표현된 바 그대로 오뉴월 보리밭처럼 有情하고 뽕나무처럼 구수하다는 느낌을 실제로 받았으며, 참으로 잔잔하고 어진 그의 눈동자를 바라볼 수 있었다.

 

* 월간 <시사문단> 2005.5월호

출처 : 빈 가슴으로 살 걸 그랬습니다!
글쓴이 : 노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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