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남주
1946년 전남 해남에서 태어남.
1974년 《창작과 비평》으로 등단.
시집 『진혼가』 『나의 칼 나의 피』 『조국은 하나다』 『솔직히 말하자』 『사상의 거처』
『이 좋은 세상에』 등이 있음.
옥중시전집 『저 창살에 햇살이 1·2』
산문집 『산이라면 넘어주고 강이라면 건너주고』 『시와 혁명』1994년 작고.
김남주는 ‘대지의 시인’이었다(김 준 태/시인)
·시인의 사명은 귀향歸鄕이다. ―프리드리히 횔덜린
·시인은 그 민족과 함께 울고 웃지 않으면 안 된다. ―가르시아 로르까
·흙(혹은 대지)에서 발바닥을 뗀 문학은 힘이 없다. 아무리 힘센 거인이라도 땅에서 발이 떨어졌을 땐 힘없이 넘어지게 마련인 것처럼 문학도 그렇다. ―김남주
·김남주는 요절시인이 아니다. 그는 고향으로 돌아가 살고 있는 시인이다. 행여 시간을 놓칠세라 황급하게 고향의 논밭으로 돌아간 ‘한국의 마지막 농촌시인’이다. ―김준태
오랜만에 고향 해남을 찾아간다. 광주에서 삼백 리 길, 서울에서 천 리 길인 한반도의 ‘땅끝’ 마을 해남. 지금이야 두 시간이면 족히 닿을 수 있지만 60년대 그 시절만 하더라도 광주에서 버스로 5시간이나 걸리기도 했던 해남 가는 길. 그러나 나는 천 리면 어떠랴 만 리 길이면 또 어떠랴 하면서 고향 가는 날은 온통 들뜬 심정이다.
일찍이 서산대사께서 “내가 열반에 들거든 내 유품들을 저 해남 대흥사(대둔사)에 모셔라. 해남 땅은 삼재(三災 : 물·불·바람 혹은 전쟁·전염병·흉년 따위의 재앙)를 면할 수 있는 천하의 명당이니라.”고 말한 곳이 아닌가. 84년의 생애 중에서 무려 41년 동안이나 용맹정진한 묘향산 보현사를 제쳐두고 굳이 남녘땅 해남 대흥사를 택한 서산대사. 아마 그래서 님의 말씀처럼이나 해남은 지리학적 의미로서의 ‘땅끝’이 아니라 무엇인가를 다시 담아 놓을 수 있는, 그리하여 그 무엇들을 다시 꽃 피우게 할 수 있는 그런 ‘시작始作의 땅’으로서 더 간절한 의미를 갖는 땅으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것 같다.
광주 시외버스 터미널에서 출발한 버스는 어느덧 영암 월출산 터널을 지나 해남군 지역으로 들어선다. “월출산 높더니마는 미운 것이 안개로다. 천황 제일봉을 일시에 가리는구나. 두어라 해 퍼진 후면 안개 아니 걷히랴.” 영암 월출산 풀티재를 넘을 때마다 언제나 읊조리곤 했던 고산 윤선도의 시구를 두어 차례 입술에 올리는 사이 내가 탄 버스는 그렇게 한반도의 최남단 지역 해남의 논밭을 가로질러 달린다.
바로 이때인가 싶다. 고향을 찾을 때마다 언제나 그랬듯이 ‘먼 옛사람’이 돼버렸음에도 불구하고 오늘 또한 김남주 시인이 구름과 바람결을 헤치고 다가와 미소짓는다. 나보다 한국문단에는 늦게 나왔지만 두 살이 위인 동향 선배 김남주 시인. 그는 자신의 고향마을 지붕들이 옹기종기 모여 사는 곳으로 나를 안내한다. 해남읍내에서 남쪽으로 4km 지점에 위치한 삼산면 봉학리란 마을. 완도로 가는 국도에서 조금 비껴 서자 전형적인 한국의 소나무 숲 사이로 그리웠던 시절의 새떼들이 쏟아내는 노래 소리가 한창이다. 시인의 어린 시절을, 그리고 그의 생전 필생의 시와 사상과 행동을 지배했던 ‘고향의 흙(대지)’이 어디로 무너져 내리지 않고 고스란히 남아서 이 봄날 파릇파릇 숨쉬느라 바쁜 모습들이다.
“나의 아버지와 고정희 아버지는 아주 가까운 친구 사이였지. 그래서 한때는 서로 사돈을 삼자고 농담 아닌 진담, 진담 아닌 농담도 즐겁게 나누며 살았던 모양이야. 저 건너 고정희네 마을도 우리 마을처럼 대흥사 계곡에서 흘러내린 물로 농사를 짓고 있지.”
살아 생전 김남주가 했던 말을 떠올리려니 아닌 게 아니라 김남주 생가와 고정희 생가는 고작 1.5km 거리를 사이에 두고 있다. 1980년대 한국시를 대표하는 김남주 시인과 고정희 시인. 생년월일을 짚어보니 전자는 1946년생으로 봉학리에서 태어났고 후자는 1948년생으로 송정리에서 태어났다. 물론 봉학리와 송정리는 행정구역상으로 같은 삼산면에 속하며 예로부터 대둔산 대흥사의 사찰문화권에 깊숙이 뿌리를 대었던 마을로 보인다. 두 마을은 대흥사와는 불과 2.5km 거리에 자리잡고 있는지라 대둔산 최고봉인 두륜봉을 아주 가까운 모습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이윽고 김남주의 고향집 마당에 들어선 나는 그와 얘기를 나누는 것을 잊지 않는다.
“남주! 오랜만일세.”
“준태 자네도 참 오랜만이네. 이미 아홉 해 전에 죽은 내가 무슨 얘깃거리가 된다고? 허허, 하지만 염려할 것 없네. 내 개인 이야기가 아니고 내가 태어난 ‘우리 동네’에 얽힌 얘기를 한다면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네. 우리 동네… 가진 것이라곤 흙과 나무와 새소리밖에 없는 우리 동네… 그리고 저 죄 없이 누워 있는 논밭들과 농부들의 황폐한 얼굴빛… 하지만 이 흙 위에 서면 언제나 내 가슴엔 힘이 솟구친다네.”
1988년 12월 21일. 전주교도소에서 9년 3개월만에 출감한 김남주 시인을 만나 인터뷰한 내용 몇 대목을 이 자리에 옮겨와 보면 감회가 깊을 것 같다. 내가 5·18필화사건으로 고교교사에서 해직된 후 신문사에 들어가 일하고 있었던 그 무렵 인터뷰다.
―김남주 시인, 그럼 우리에게 있어 시인은 누구이고, 무엇입니까?
“시인은 우선 시대의 중대한 문제를 비켜가서는 안 됩니다. 그래야 우리가 바라는 민족문학이 올바르게 설 수 있으니까요. 시인은 싸우는 사람과 동의어입니다.”
―김남주 시인은 앞으로 생활을 어디에서 할 예정입니까?
“고향에 내려가서 흙의 노동을 할 것입니다. 건강과 시를 보살피기 위해서도 그렇습니다. 문학의 힘은 노동과 자기와의 부단한 투쟁을 통하여 솟구치는 것이기도 한데 문학은 이를테면 민중의 생활과 직결된 것이지요. 그리고 대지에서, 흙에서 발바닥을 뗀 문학(시)은 힘이 없습니다. 아무리 힘센 거인이라도 땅에서 발이 떨어졌을 땐 힘없이 넘어지게 마련입니다. 문학 역시 대지(흙)와 노동에서 발을 뗐을 경우 절로 힘이 빠져버림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인간이 인간으로 거듭날 수 있는 것은 노동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미개한 원시인에서 인간으로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대지 위에서 행해지는 노동의 덕분이라는 것입니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한목소리로 말하고 있듯이 60년대 한국 민족문학의 정점을 김수영·신동엽이 이루었다면 70년대는 김지하이고 80년대는 김남주이다. 온몸을 바쳐 싸웠던 실천행동에서도 그랬었지만 이들의 문학적 성과물 또한 한국시를 상당한 수준으로까지 이끌어 올렸다는데 이견을 달 사람들은 없는 줄로 안다. 그런데 내가 이 자리에서 주목하고 싶은 것은 김남주의 모든 시편들이 대지(흙)를 바탕에 깔고 씌어졌다는 그 말이다. 자유와 투쟁을 노래한 시이든, 통일을 노래한 시이든, 민중과 민족을 노래한 시이든, 광주학살에 분노한 시이든, 자기변혁을 노래한 시이든, 아니면 고향의 풀꽃들을 노래하는 서정시이든―김남주의 모든 시편들은 흙과 대지 위에 분명히 자신이 두 다리를 탄탄하게 세우고 있다는 사실이다.
예컨대 김남주의 시적 상상력하며 시적 언어들은 거의 대부분이 그의 고향 해남의 논과 밭에서, 그리고 거기에 사는 농민들의 삶 속에서 생산된 것들이다. 그래서 그의 시는 메마르지 않고 생경하지도 않고 촉촉이 물기를 내뿜는다. 거칠게 쏟아대는, 메시지가 강한, 정치현실을 질타하는 시에서도 그의 시편들은 방금 쟁기로 갈아 엎어놓은 흙 알갱이처럼 햇빛을 받아 반짝반짝 빛나다가 마침내 우리의 가슴을 깊숙이 적시거나 흔든다. 그리하여 그는 ‘한국의 마지막 농촌시인(혹은 농민시인)’이란 레테르를 그의 이름 앞에 또 하나 더 붙여놓아도 좋을 그런 시인인지 모른다.
유신독재에 정면으로 항거한 함성지 사건과 남민전 사건 등으로 10여 년을 옥살이한 김남주. 그러나 그는 오히려 비단결 같은 마음을 가진 시인이었다. “시인은 현실에 굳건히 발을 딛고 시대의 중대한 문제와 싸우는 해방전사와 같은 사람”이어야 한다고 행동으로 외치다가 오랜 감옥생활에서 얻은 옥독獄毒으로 마흔아홉의 짧은 나이로 생을 마쳤지만 그가 즐겨 부른 노래들은 전투적인 노래가 아니었다.
그의 18번은 남인수의 노래로 알려진 「고향의 그림자」 따위다. 수배자 혹은 보호감찰 대상자가 되어 언제나 쫓겨다니며 숨어 살아야 했던 그는 자신의 아버지께서 땅에 묻히던 날마저도 감옥문을 나갈 수가 없어 ‘신세타령’하듯 “찾아갈 곳은 못 되더라…”로 시작되는 노래를 섧게 섧게 부른 것이다. “찾아갈 곳은 못 되더라 내 고향 / 버리고 떠난 고향이길래 수박등 흐려진 / 선창가 전봇대에 기대서서 울 적에 / 똑딱선 프로펠라 소리가 이 밤도 / 처량하게 들린다 물 위에 복사꽃 / 그림자같이 내 고향 꿈에 어린다”를 부를 때 그의 두 눈동자는 항상 고향 하늘을 향하고 있었다. 그래서 눈물 글썽이던 김남주의 농촌적 순결성―그것이 바로 그의 시의 무기가 아니었을까.
아기무덤 고와서
꼭
안아 주고 싶고
어미무덤 포근해서
꼭 안기고 싶고
나는 몰랐네 예전에
우리나라 무덤이 이렇게
곱고 포근한 줄을
나이 들어 애기 낳고
추운 날
양지바른
산에 들에 가서야 알았네
―― 「무덤」
찬서리
나무 끝을 나는 까치를 위해
홍시 하나 남겨둘 줄 아는
조선의 마음이여
―― 「옛 마을을 지나며」
시 「무덤」과 「옛 마을을 지나며」를 읽노라면 어느새 내가(아니 우리들 모두가) 그의 고향마을 가까이에 와 있음을 알게 된다. 아니 우리들 모두가 저마다 자신들의 고향 산모롱이쯤에 닿아 있음을 고요히 느끼는 것이다. 그렇게 멀지 않았던 옛날, 적어도 김남주가 어린 시절을 보냈던 그 시절만 하더라도 고향 마을로 가는 양지바른 산비탈에는 아기무덤과 어미무덤이 함께 누워 있는 것을 흔히 볼 수 있었다. 어디서 날아온 것인지는 몰라도 손에 쥐듯 제비꽃 몇 송이를 피우며 누워 있는 아기무덤과 어미무덤―그 모습이 한량없이 예쁘다며 시인은 “아기무덤 고와서 꼭 안아주고 싶고 어미 무덤 포근해서 꼭 안기고 싶”다고 말한 뒤 “우리나라 무덤 이렇게 곱고 포근한 줄을 …추운 날 양지바른 산에 들에 가서야 알았”노라고 노래한다. 모르긴 몰라도 한국 서정시 중에서 가장 예쁘고 감동이 깊은 시로 읽혀질 것 같다는 생각이다.
아기무덤과 어미무덤을 죽음의 흔적으로 보지 않고 꼭 안기고 싶은 생명체인 듯 노래하는 시인은 역시 시 「옛 마을을 지나며」에서도 예사롭지 않게 새로운 발견을 하고 환희에 젖는다. 단순한 나무 끝이 아니라 “찬서리” 나무 끝을 나는 까치들을 위해 홍시 하나쯤은 남겨두는 우리네 농촌 사람들의 마음을 “조선의 마음”이라고 크게 비유하며 추켜올려 세운다. 감나무 가지 끝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홍시(까치밥) 하나에서 우리 민족의 ‘여유’를 발견한 이 시는 김남주 시인이 바라고 바랐던 우리 민족의 ‘희망’ 그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여유가 없으면 희망이 없고 희망이 없으면 통일할 수 있는 여유도 또한 마련되지 않기 때문이리라. 「옛 마을을 지나며」는 단 4행밖에 안 되는 시이지만 ‘큰 시’라는 느낌이 불끈 들게 됨은 어쩔 수가 없다.
독일의 시인 프리드리히 횔덜린은 “시인의 사명은 귀향이다”라고 노래했다. 그 말은 시인이 민족과 함께 울고 웃으며 노래하기 위해서(스페인 시인 가르시아 로르까)는 시인 자신이 그 나라 사람들의 고향의 흙과 자연, 그 모든 생명체들의 꿈틀거림을 통해서 다시 태어나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말일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오늘 내가 해남에 가서 만난 시인 김남주가 “대지에 뿌리박은 문학(시)이야말로 쉽게 넘어지지 않는다”고 실천적으로 강조한 말은 내일의 한국문학에 분명히 유효한 코드가 될 것으로 점쳐진다.
김남주― 그는 남녘 땅끝 마을이 낳은 ‘대지의 시인’이었다. 그의 시 「고목」을 읽으며 그와의 만남을 끝낸다. 「고목」은 차라리 「거목」이라고 제목을 고쳐도 좋을 시가 아닐까. 김남주 고향 역시 몇백 년 족히 넘은 듯한 거목이 한국의 여느 마을처럼 그곳을 지키고 있었다. 그 거목은 어쩌면 김남주 시인이 노래했던 것처럼이나 푸르게 가지와 이파리를 퍼뜨리고 있었다.
대지에 뿌리를 내리고
해를 향해 사방팔방으로 팔을 뻗고 있는 저 나무를 보라
주름살 투성이 얼굴과
상처 자국으로 벌집이 된 몸의 이곳저곳을 보라
나도 저러고 싶다 한 오백 년
쉽게 살고 싶지 않다 저 나무처럼
길손의 그늘이라도 되고 싶다. ―― 「고목」
이상주의자가 받은 형벌(?) ― 김남주
김남주의 시와 그의 생애를 보면서 나는 이상주의자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본다. 김남주는 누가 뭐래도 근본적으로 이상주의자였고, 그 이상주의자의 꿈을 위하여 자신의 일생을 바친 사람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이상주의자는 고귀하다. 이상주의자는 순결하다. 이상주의자는 정의롭다. 그러나 이상주의자만큼 위험하고, 이상주의자만큼 외롭고, 이상주의자만큼 결핍감에 사로잡히는 자가 또 있을까.
그런데 말이다. 세속의 찌든 시장터에서, 폭력이 난무하는 전선 같은 세상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상주의자가 나오는 것은 참으로 신기하면서도 고귀한 일이다. 어떻게 드높은 이상주의자의 꿈을 설정하고 그것만을 바라보며 몸을 던질 수 있단 말인가. 그러고 보면 이상주의적 속성은 사람을 마비시키는 힘이 있는 것 같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상주의자의 꿈을 위하여 순교하는 일이 어떻게 가능하겠는가 말이다.
김남주가 가진 이런 이상주의자의 면모를 보면서 나는 그가 변혁시켜 완성시키고자 한 역사의 현실을 생각해본다. 역사란 도대체 어떤 존재인가. 역사는 발전하는가. 인간은 역사를 발전적으로 운영할 능력이 있는 존재인가. 진정 역사는 인간 편에 서 있는가. 역사는 어쩌면 인간에게 복수를 가할 만큼 난폭하고 무정한 존재는 아닌가. 어떻게 하면 역사를 믿고 역사 속에서 유토피아를 건설할 수 있다는 꿈을 지닐 수 있을까. 유토피아는 과연 실현가능한가. 그 유토피아의 모습은 어떠해야 하는가. 이 이외에도 무수한 물음을 열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질문은 이쯤에서 그치기로 하자. 그리고 김남주가 이상주의자의 열정을 바치다 고난과 죽음의 길을 간 일에 대하여 생각해보기로 하자.
김남주는 사회주의자였다. 그에게 사회주의는 모순덩어리의 현실을 넘어서서 유토피아로 가는 길이었다. 그는 순결한 이상주의자의 모습으로 이 사회주의를 신봉하면서 이 땅에 그가 유토피아라고 믿는 사회주의의 나라를 건설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김남주의 이런 생각에 동의하지 않았고, 지금도 동의하지는 않는다. 다만 박노해가 말하듯이 가치로서의 사회주의는 그 나름의 의미와 참뜻을 갖고 있다는 생각을 한다. 그런데 여기서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 사회주의의 나라를 만드는 것이 옳으냐 그르냐 하는 점이 아니라, 그 사회주의의 나라가 옳다고 믿으며 그것의 실현가능성을 신뢰한 김남주야말로 이상주의자의 전형이었다는 점이다.
어찌보면 이런 김남주는 사회주의라는 종교 앞에서 순교한 사람이라고 볼 수 있다. 순교하는 사람은 그가 어떤 것을 믿고 옹호하든지 간에 거의가 이상주의자임이 틀림없다. 이상주의자가 아니라면 세상과 타협하며 살아가지 결코 순교의 방식을 선택하지 않기 때문이다.
순교란 한편 비장하다. 그러나 순교란 다른 한편 어리석다(?). 관념 이전에 육체가, 유토피아 이전에 현실이, 미래 이전에 지금 이곳의 삶이 진실일 터인데 그 관념을 위하여, 유토피아를 위하여, 미래를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던지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상주의자인 김남주, 그는 이상주의자였기 때문에 받아야 할 형벌(?)을 받은 것이다. 그가 받은 형벌 앞에서 우리는 그의 이상세계에 동의하는 문제와는 별도로 아픔을 느낀다. 세속사회와 적당히 타협하며 그 속에서 유연하게 처신하면서 세속의 단맛에 인생을 맡겼다면 그런 고통과 때이른 죽음은 없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리얼리스트의 냉정함과 교활함을 모른 채, 우직하게 이상주의자의 꿈을 삶의 한가운데에 놓고 있는 사람을 보면, 그래서, 심란해진다. 그가 이 세속의 땅에서 당해야 할 고통이 눈앞에 어른거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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