言/오래묵을詩

여우비

oldhabit 2008. 6. 6. 11:39

시간 속에 늙어온 남자가

후드득 후드득 비를 맞는다

둔해 가던 감각들이

깜짝깜짝 놀라면서 비를 맞는다


탯줄에 매달린

애처럼

애호박이 점점 살찌는 여름

물로 가득한 줄기들은

꿈틀거리며 태양을 향해 기어오르고


자라나며 굵어지던 등뼈 속에

점점 커지던 얼굴 속에

쭈굴쭈굴 시들던 꿈의 떡잎,

체념이

충동을 억누르며

글썽이는 땅 위에서

두꺼운 체념을 뚫고

충동이 화산처럼 불을 뿜지 못하는

마그마 같은 가슴,

가슴이 점점 식어 굳어가는 땅 위에서


결실도 없이 늙어온 남자가

후드득 후드득 비를 맞는다

커다란 초조 속에

깜짝깜짝 놀라면서 비를 맞는다.

 

              "여우비"

 

                           -정호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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