書/行書행서

안진경 - 천하 제2의 행서

oldhabit 2008. 6. 20. 17:22

 안진경 (顔眞卿 ; 709~785)


중국 당(唐)나라의 서예가로서 자는 청신(淸臣)이며 산둥성[山東省] 낭야(琅邪) 임기(臨沂) 출생이다. 노군개국공(魯郡開國公)에 봉해졌기 때문에 안노공(顔魯公)이라고도 불렸다. 남북조시대 이래로 그의 선조 가운데 안등지(顔騰之)·안지추(顔之推)·안사고(顔師古)·안근례(安勤禮) 등이 모두 고문자학(古文字學)을 연구했고 서예에도 뛰어났었다. 인척관계에 있던 은영명(殷令名)·은중용(殷仲容) 부자도 또한 당대 초기의 유명한 서예가였다. 그리고 안진경은 "집안이 가난하여 종이와 붓이 없었으므로 담벽에다 황토로 연습하여 서예를 익혔으며, 해서(楷書)에 특히 뛰어났다"고 한다.


진사(進士)에 급제하고, 여러 관직을 거쳐 평원태수(平原太守)가 되었을 때 안녹산(安祿山)의 반란을 맞았으며, 이때 그는 의병을 거느리고 조정(朝廷)을 위하여 싸웠다. 후에 중앙에 들어가 헌부상서(憲部尙書)에 임명되었으나, 당시의 권신(權臣)에게 잘못 보여 번번이 지방으로 좌천되었다. 784년 덕종(德宗)의 명으로 회서(淮西)의 반장(叛將)인 이희열(李希烈)을 설득하러 갔다가 감금당하였고, 이어서 곧 살해되었다.

그의 글씨는 남조(南朝) 이래 유행해 내려온 왕희지(主羲之)의 전아(典雅)한 서체에 대한 반동이라고도 할 수 있을 만큼 남성적인 박력 속에, 균제미(均齊美)를 충분히 발휘한 것으로, 당대(唐代) 이후의 중국 서도(書道)를 지배하였다. 해서·행서·초서의 각 서체에 모두 능하였으며, 많은 걸작을 남겼다.

 

즉, 평론가들은 〈중흥송마애 中興頌磨崖〉·〈원차산비 元次山碑〉·〈송광평비 宋廣平碑〉·〈안씨가묘비 顔氏家廟碑〉 등과 같은 만년의 작품을 높이 친다. 〈제질문고 祭侄文稿〉의 필적, 〈제백부고 祭佰父稿〉· 〈쟁좌위 爭座位〉· 〈채명원 蔡明遠〉· 〈송류태충서 送劉太沖敍〉 등의 첩(帖)에 나타난 그의 서체는 힘차면서도 급작스럽게 꺾이는 등 변화무쌍하며 전서체(篆書體)와 주문(文)을 겸비했다. 또한 스스로 독자적인 일파를 이루어 한 획도 2왕(二王:王羲之·王獻之 부자)의 필체와 비슷한 것이 없었다.

 

소동파(蘇東坡)는 안진경의 서예와 두보(杜甫)의 시, 그리고 오도현(吳道玄)의 그림을 최고의 모범이 된다고 평했다. 안진경의 서예는 후대의 유공권(柳公權)·양응식(楊凝式)·소식·황정견(黃庭堅)·미불(米)·채경(蔡京)·조병문(趙秉文)·동기창(董其昌)·왕탁(王鐸)·유용(劉墉)·전풍(錢)·하소기(何紹基) 등에게 매우 큰 영향을 미쳤다.

 

안진경의 가문에서 만들어놓은 '안씨자양'(顔氏字樣)은 당대부터 청대(淸代)에 이르기까지 1,000여 년 동안 과거시험장에서 '정체'(正體)의 글씨로 쓰였다. 명(明) 만력연간(萬曆年間:1573~1620)에 이르러서는 간행된 서책의 글자체가 모두 안진경체로 되었는데, 이른바 '노송체자'(老宋體字)로서 수백 년 동안 성행해 지금까지도 끊이지 않고 있다.

 

 

 

 

 

 

 

 안진경의 제질문고祭姪文稿

 

 

 

 

 

 

 행서묵적(行書墨迹). 안진경(顔眞卿)의 작품. 세로 28.2센티미터, 가로 72.3센티미터. 25행, 230자. 이 첩본은 안진경이 자기의 조카를 위해서 쓴 하나의 제문의 초고이다. 그의 조카인 안계명(安季明)은 안록산의 반군에 의하여 피살당하였다. 이 작품은 원래 서법작품으로 쓴 것이 아니다. 극도로 비분한 심정으로 정서를 제대로 가누지 못한 상태에서 썼으므로, 여러군데 잘못쓴 곳이 있고, 덮어쓴 흔적이 있다. 그러나, 바로 이러한 점으로 인하여 이 글자는 필세가 원윤웅기하고, 자태횡생하며, 자연스러운 묘가 잘 드러나 있다. 원나라때의 장경안(張敬晏)은 발문에서 "고(告)는 서간(書簡)만 못하고, 서간은 기초(起草)만 못하다. 고라는 것은 관청에서 만드는 것으로 해서도 단정하지만 결국은 규범에 얽매이는 것이다. 서간은 일시의 흥이 일어 쓰는 것이므로 방종할 수 있다. 그런데, 기초는 또한 무심에서 나온 것이고, 그 손과 마음을 모두 잊은 상태에서 쓰게 되므로, 진정한 묘함을 여기에서 발견할 수 있다" 원나라의 선우추(鮮于樞)는 이 첩을 "천하제이행서(天下第二行書)"로 꼽았다. 이 첩의 진적에는 붓이 쉰 곳과 끈 곳이 역력히 드러난다. 그래서 붓놀림의 과정이니 필봉변환의 묘함을 느낄 수 있다. 행초서를 공부하는 사람에게는 아주 큰 도움이 된다. 원적은 대만고궁박물원에 있다

' > 行書행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高淳先生詩  (0) 2010.03.25
[스크랩] 여초 김응현선생의 행서작품  (0) 2010.03.25
행서  (0) 2010.03.24
추사의 편지글  (0) 2009.06.18
왕희지의 蘭亭序  (0) 2008.06.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