書/行書행서

추사의 편지글

oldhabit 2009. 6. 18. 10:49

 

초의(草衣)에게 <35.5×45cm>

 

『완당전집』권5 「여초의(與草衣)」19에 실려 있다.

 

[겉봉] 일로향실(一爐香室)께. 과천에서.

스님을 보내고 나서 답신이 없어 몹시 궁금했는데 하인을 통해 손수 쓰신 글을 받으니 흐믓할 뿐만 아니라, 피안(彼岸)에 이르고 나서 어떠한 장애가 있다 해도 아무 두려움이 없겠습니다. 다만 산중에서 몸조리한 지 벌써 많은 시간이 지났을 터인데 그 동안 많이 나으셨습니까? 다시 걱정됩니다.

이 몸은 여전히 초췌한데 담(痰)까지 생겨 몹시 괴롭습니다.

등잔을 보내드리니 반드시 철취(鐵嘴, 철로 된 입부리)로 보완해주시기 바랍니다. 신이화(辛夷花)와 네 개의 수석, 다섯 개의 누룩은 보낸 대로 잘 받았습니다. 감사합니다. 누룩은 그냥 쓸 수 없으니 다음 편에 자세히 일러주시기 바랍니다. 팔이 아프기도 하고 바쁘기도 해 이만 줄입니다.

 

안경은 정말 효험이 있습니까? 화로는 멀리 보내기 어려워 부쳐주지 못하니 안타깝습니다.

계묘년(1843) 10월 10일 올림.

 

 

 

답호운대사(答浩雲大師) <28×53cm>

 

<해붕영찬>과 함께 『해붕영찬첩』에 들어 있으며, 첩속에는 초의의 발문도 있다.

 

[겉봉] 호운대사(浩雲大師)께. 과천에서

 

알지도 못하는 어떤 사람이 갑자기 글을 보내왔으니 매우 기이한 일이오. 해붕노사의 문하이므로 인연 삼을 만한 일이니, 생소한 객이 찾아온 것은 아니겠지요. 노붕(老鵬)은 나의 옛 벗으로, 뒤를 잇는 제자가 너무 없어 적적하다고 들었는데, 아직 영정을 만들어 공양하려는 이가 있는 것이오? 영정은 노인[해붕]의 본디 뜻이 아니지만, 병을 무릅쓰고 간략히 추려서 보낸 것이 있소. 그 밖의 경우라면 평생 알지도 못하는 어떤 사람이 어떻게 찬(贊)을 지을 수 있겠소. 잘 헤아려서 쓰지는 못한 것 같소. 병이 심해서 어렵게 적으오. 그럼.

5월 12일 병과(病果)

 

 

 

답상무(答商懋) <27.3×41.3cm>

 

추사가 제주도에서 양자인 김상무에게 보낸 것이다.

 

지금 찾아온 집안 머슴을 통해 편지를 보았다. 해가 바뀌고 첫 소식이어서 큰 위안을 주는 구나. 네 친어머니의 대상(大祥)과 담제(禫祭)를 마치고 나서 몹시 허전할 듯하여 안쓰럽구나.

봄이 이미 무르익었는데 편지가 있은 뒤로 모두 편안하며, 네 중부의 병환은 요즘 어떻느냐? 멀리서 그립기도하고 걱정도 되는구나. 네 아내는 순산하여 아들을 더 얻은 기쁨이 있느냐? 날마다 기대하며 축원한다. 듣자하니 네가 근친(覲親, 부모를 찾아뵘)하고 싶어 한다 했는데, 내가 보고 싶은 마음이 더욱 간절하므로 어떤 일에도 방해받지 말아야겠지만, 멀리 바다를 건너야 하는 데다가 나쁜 기운이 한창 심할 때여서 걱정 때문에 마음이 뒤숭숭하구나.

나는 입과 코에서 열이 나 여전히 고통스럽고, 눈병이 갈수록 심하여 걱정이다.

너의 출발이 이 편지가 도착한 뒤일지 모르겠다. 부디 조심하기 바란다. 그럼

병오년(1846) 3월 2일 부(父)

 

마천십연(磨穿十硏) <42×44cm>

 

『완당전집』권3「여권돈인(與權敦仁)」32에 실려 있으며, 문집의 내용과 약간의 차이가 보인다. 글씨에 대한 추사의 노력을 말해주는 “70년 동안 열 개의 벼루를 없애고 천여 자루의 붓을 다 닳게 했다”는 구절이 있다.

 

옛 사람들의 글씨는 간찰체(簡札體)라는 것이 따로 없습니다. 『순화각첩(淳化閣帖)』의 경우는 진(晉)나라 사람들의 글씨가 많은데 간찰만을 위주로 하지 않았으니, 간찰은 바로 우리나라의 가장 나쁜 습관입니다. 제 글씨는 비록 말할 것도 못 되지만, 70년 동안 열 개의 벼루를 갈아 없애고 천여 자루의 붓을 다 닳게 했으면서 한번도 간찰의 (필)법을 익힌 적이 없고, 실제로 간찰에 별도의 체식(體式)이 있는 줄도 모릅니다. 그래서 제게 글씨를 청하는 사람들이 간찰체를 이야기할 때마다 못 한다며 거절합니다. 승려들이 간찰체에 더욱 얽매이는데, 그 뜻을 알 수 없습니다.

 

답요선(答堯僊) <26×42cm>

 

요선 유치전은 북청 귀양 시절 추사를 따른 제자로, 추사에게 많은 도움을 준듯하다.

 

균(筠, 金如筠)이 짐을 싸서 떠난 뒤 그립지 않은 날이 없습니다. 달이 차고 다시 기우는 동안 마침내 소식이 끊기고 연락이 닿지 않았는데, 지금 반가운 편지를 받고 맥풍(麥風, 초여름 바람)에 부모님 모시고 잘 있다 하니 그리는 마음을 흔쾌히 달래주었습니다.

저는 줄곧 하릴없이 지내다가 어제 아이가 찾아주어 적적한 마음을 조금이나마 위로해 주었습니다. 보내주신 것들은 잘 받았습니다. 언제쯤 찾아주시겠습니까? 손꼽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럼 만나 뵐 때 말씀드리기로 하고 이만 줄입니다.

4월 20일 올림.

 

 

 

답니동(答泥洞) <25×41cm>

 

[겉봉] 니동(泥洞)께. 삼가 답장 올립니다.

 

세밑에 멀리서 보내신 편지를 보고 그리움을 많이 달랬으며, 또 공사 간에 별고 없으신 줄 아니 기쁘기 이를 데 없습니다.

부리(副吏)에 임명된 것은 매우 다행입니다. 그 동안 지내온 일들은 편지 한 장으로 다할 수 없습니다. 보내주신 세 가지 물품은 잘 받았으며 깊이 감사드립니다. 근래 그곳 소식을 전혀 들을 수 없어 답답합니다. 강도혼(姜道渾)은 잘 돌아갔다고 하는데 그렇습니까? 그 기쁨 이루 형용하기 어렵습니다.

인편이 재촉해서 긴 말 적을 수 없습니다. 그럼

12월 그믐 전날. 과(果) 답.

새 책력을 부칩니다. 다른 곳에도 편지를 보내려 했지만 인편이 너무 서둘러서 마련하지 못하여 안타깝습니다.

 

황청경해(皇淸經解) <24×36cm>

 

모임 자리에서 잠시 뵌 뒤 시간이 지나서도 그리웠는데, 지금 보내신 편지를 받고 포근한 동지(冬至)에 편안하시다 하니 위안이 됩니다. 다만 부스럼의 고통에 대해서는 염려가 적지 않습니다.

저는 기침이 줄곧 사그라들지 않아 걱정입니다.

말씀하신 아홉 사람의 글은 당연히 전집(全集)이 있을 듯합니다. 정징군(程徵君)의 『통예록(通藝錄)』은 고(故) 두실(斗室, 沈象奎) 대감의 장서에서 본 적이 있고, 강세공(江歲貢)의 책은 별도의 문집 없이 『경해(經解, 皇淸經解)』에 모두 들어 있으며, 왕명성(王鳴盛), 전대흔(錢大昕)의 저술은 사람 키만큼 많지만 『경해』의 수록은 대략을 추렸을 뿐이고, 혜사기(惠士奇), 심동(沈彤), 초순(焦循), 장용(臧庸)도 『경해』에서 그 장점을 모두 수록하였고, 상서 왕인지(王引之)의 글은 『경의술문(經義述聞)』, 『경전석사(經傳釋詞)』외에 다른 저서는 판각된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장명경(臧明經)의 증조 장옥림(臧玉林)의 글도 『경해』에 있는데, 이 사람은 명나라 말기 사람으로, 근대에 경서를 논하는 이들은 모두 그를 개산조(開山祖)로 봅니다. 그럼.

편지 받은 날 아우 올림.

 

 

 

한글편지 <21.8×35.5cm>

 

[겉봉] 상장 용산 근봉

 

지난 번 편지 부친 것이 인편에 함께 갈 듯하며, 그 사이 새 본관(本官) 오는 편에 영유(永柔)의 편지 보니 요즘 내내 병환을 떨치지 못하시고 밤낮으로 차도가 있다 없다 한 듯한데, 벌써 여러 달을 끌어 근력(筋力)이 오죽하시겠습니까. 우록정(麀鹿錠)을 자시나 본데 그 약으로 꽤나 차도가 있으신지요. 멀리서 걱정이 이루 말 할 수 없습니다. 나는 지난번과 같고 그저 가려움증으로 못 견디겠습니다. 갑쇠를 안 보낼 길 없어 이리 보내지만, 가는 모습 측은하니 객지에서 더욱 마음을 가다듬지 못하겠습니다. 급히 떠나보내느라 다른 사연 길게 못 하옵니다.

임인년(1842) 동짓달 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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