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이뉴스 이종찬 기자]
양복 입은 신사가
요리집 문 앞에서 매를 맞는데
왜 맞을까 왜 맞을까 원인은 한 가지 돈이 없어
들어갈 땐 폼을 내어 들어가더니
나올 적엔 돈이 없어 쩔쩔매다가
뒷문으로 살금살금 도망치다가
매를 맞누나 매를 맞누나
으하하하 우습다 이히히히 우습다
하하하하 우습다 호호호호 우습다
으하하하 하하하 우습다
돈 없으면 집에 가서 빈대떡이나 부쳐 먹지
한 푼 없는 건달이 요리집이 무어냐 기생집이 무어냐
-'빈대떡 신사', 한복남
민초들의 깊은 애환이 서린 음식 빈대떡. 이명박 정부 들어 '신보릿고개'가 이어지면서 민초의 음식이란 꼬리표가 붙은 빈대떡도 "돈 없으면 집에 가서 빈대떡이나 부쳐 먹지" 하는, 예전의 값 싼 음식이 아닌 듯하다. 빈대떡 3장에 9천원, 막걸리 한 병에 3천원 받으니, 폼(?) 잡고 마구 시켜먹다가는 자칫 '매'를 맞을 수도 있다.
고유가 시대를 맞아, 민초들이 즐겨 먹던 그 빈대떡조차도 마음 놓고 먹을 수 없는 정말 살기 어려운 세상. '신보릿고개'가 민초들의 허리띠를 꽉꽉 졸라매고 있다. 하지만 어쩌랴. 장맛비가 오락가락 할 때면 허연 막걸리와 함께 눈에 자꾸 밟히는 그 음식. 그나마 빈대떡만큼 값 싼 음식을 찾기도 힘들지 않은가.
부침개와 더불어 '한국의 피자'라 불리는 빈대떡. 빈대떡은 오래 묵은 벗들과 함께 옛 고향집 분위기가 나는 집에 앉아 추억을 나누며 먹을 때 가장 맛이 좋다. 막걸리 한 잔 시원하게 쭈욱 들이킨 뒤 바삭바삭 부서지는 빈대떡 한 점 어리굴젓에 찍어 입에 넣어보라. 장맛비에 칙칙 식어가는 무더위처럼 세상 시름이 한 풀 꺾이리라.
빈대떡의 처음 이름은 '빈자'(貧者)떡
"빈대떡은 원래 기름에 부친 고기를 제사상이나 교자상에 올려놓을 때 밑받침용으로 쓴 음식이야. 까닭에 가난한 사람을 위한 음식이라 하여 '빈자'(貧者)떡으로 불리다가 지금의 빈대떡이 되었다는 설이 있지. 조선시대에는 흉년이 들면 부잣집이나 세도가의 집에서 빈자떡을 만들어 남대문 밖에 모인 유랑민들과 거렁뱅이들에게 던져 주었다는 이야기도 있어." - 윤재걸(시인, 언론인)
예로부터 민초들의 허기를 달래고 건강까지 알뜰하게 챙겨준 빈대떡. 빈대떡은 녹두로 만든 음식이어서 단백질이 풍부하다. 게다가 고기를 자주 먹지 못하는 민초들에게 영양가를 보충해주는 음식이기도 했다. 특히 녹두는 한방에서 피부병 치료와 해독, 피로회복에 효과가 있으며, 식욕을 돋구는 역할까지 한다고 나와 있으니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랴.
1970년대 초반. 나그네가 중학교에 다닐 무렵, 창원군 상남면(지금의 창원시 상남동)에는 4자와 9자가 붙은 날마다 제법 큰 장이 섰다. 어물전에서부터 음식시장 옷시장 나무시장 소시장까지, 상남장에 가면 없는 게 거의 없었다. 그중 음식시장 한 귀퉁이 공터에서 꼬부랑 할머니가 지글지글 구워내는 빈대떡은 보기만 해도 침이 절로 꿀꺽 넘어가곤 했다.
공터에 깔아놓은 덕석에 어른들이 삼삼오오 앉아 막걸리를 시키면 그저 공짜로 구워주던 그 갈빛 빈대떡. 하지만 나그네는 한 번도 그 빈대떡을 먹어보지 못했다. 어머니께서 빈대떡은 빈대 같은 거지들이나 먹는 음식이라고, 빈대떡을 먹으면 빈대 같은 삶을 살게 된다고, 빈대떡을 파는 시장 공터에 얼씬도 하지 못하게 했기 때문이었다.
피맛골 60여년 터주대감, 빈대떡 먹으며 '신보릿고개' 넘는다
"피맛골은 마차를 피하는 골목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어. 조선시대 종로통을 걸어가다 보면 5분마다 한번 꼴로 높은 양반들의 가마를 만나는 것이 하도 아니꼽고 더러워, 허리를 펴고 당당하게 걸어갈 수 있는 골목이 필요했던 거지. 그때부터 사람들의 발길이 잦아지면서 노점과 주막이 생기기 시작했던 것 같아." - 윤재걸
빈대떡, 하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집이 있다. 교보문고 뒤편 피맛골 들머리에 시골 고향집처럼 오도카니 자리 잡고 있는 그 빈대떡 전문점. 식당 들머리에 가득 쌓인 막걸리 빈 병을 바라보면 언뜻 막걸리 전문점 같기도 한 이 집은 녹두 빈대떡을 60여 년 넘게 구워온, 그야말로 수식어가 더 필요 없는 빈대떡 전문점이다.
1946년 처음 문을 열 때 이 집은 한옥이 처마에 처마를 기대고 있는 피맛골 골목 공터에 긴 나무 의자와 탁자 등을 대충대충 놓고 빈대떡을 구워 막걸리와 함께 파는 노점이었다. 그때 손님들이 긴 의자에 줄줄이 앉아 음식을 먹는 모습이 마치 열차 실내와 비슷하게 보인다 하여, 이 집을 열차집이라 불렀단다.
이 집이 지금의 장소로 옮긴 것은 1970년대 초. 그러니까 지난 1977년부터 지금의 주인인 윤해순, 우제은씨가 이 집을 물려받아 옛 방식 그대로 돼지기름에 빈대떡을 바삭바삭하게 구워 팔고 있다. 단지 60여년 앞과 달라진 게 있다면 차림표에 굴전, 파전, 조개탕, 두부가 추가되었다는 것.
빈대떡 한 점에 어리굴젓 올려 먹는 향긋 고소한 맛 일품
"겉보기는 이래도 이 집이 빈대떡으로 엄청 유명한 집이야. 서울 살면서 이 집을 모르면 거의 간첩(?)이라고 봐야지. 오는 손님들도 대학생부터 80대 노인에 이르기까지 다양해. 나 또한 기자생활 할 때 하루 걸러 올 정도로 단골집이었지. 이 집 빈대떡의 바삭바삭한 맛은 돼지기름으로 구워내기 때문이야." - 윤재걸
지난 10일(화) 밤 9시. 촛불문화제에 참석했다가 목도 축이고, 출출한 배고픔도 달래기 위해 찾았던 피맛골 빈대떡 전문점. 이 집은 지난 해 여름, 나그네의 음식 길라잡이 윤재걸 선배의 소개로 처음 왔다가 녹두 빈대떡의 바삭바삭한 맛과 짭쪼롬하면서도 상큼한 어리굴젓의 맛에 포옥 빠져 일주일에 한두 번씩 찾는 나그네의 단골집이기도 하다.
1층과 2층으로 나뉘어진 이 집 빈대떡의 특징은 널찍하고도 검은 사각 프라이팬에 돼지기름을 넉넉히 둘러 뜨겁게 가열시킨 뒤 주방에서 곧바로 갈아낸 녹두가루를 밀가루와 함께 반죽해서 즉석에서 구워낸다는 점이다. 그래서일까. 빈대떡을 한 점 집어 입에 넣으면 바삭바삭한 씹히면서 입 안 가득 고소한 감칠맛이 맴돈다.
막걸리 한 잔 꿀꺽꿀꺽 마신 뒤 부드러운 돼지고기가 든 빈대떡 한 점에 어리굴젓 한 점 올려 입에 넣으면 촛불집회로 쌓였던 온몸의 피로가 순식간에 사라지는 듯하다. 어리굴젓 올린 향긋 고소한 빈대떡을 먹은 뒤 양념간장에 들어있는 양파와 고추로 입가심하고 나면 '빈대떡 신사'라는 노래가 절로 흥얼거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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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리집 문 앞에서 매를 맞는데
왜 맞을까 왜 맞을까 원인은 한 가지 돈이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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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올 적엔 돈이 없어 쩔쩔매다가
뒷문으로 살금살금 도망치다가
매를 맞누나 매를 맞누나
으하하하 우습다 이히히히 우습다
하하하하 우습다 호호호호 우습다
으하하하 하하하 우습다
돈 없으면 집에 가서 빈대떡이나 부쳐 먹지
한 푼 없는 건달이 요리집이 무어냐 기생집이 무어냐
-'빈대떡 신사', 한복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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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유가 시대를 맞아, 민초들이 즐겨 먹던 그 빈대떡조차도 마음 놓고 먹을 수 없는 정말 살기 어려운 세상. '신보릿고개'가 민초들의 허리띠를 꽉꽉 졸라매고 있다. 하지만 어쩌랴. 장맛비가 오락가락 할 때면 허연 막걸리와 함께 눈에 자꾸 밟히는 그 음식. 그나마 빈대떡만큼 값 싼 음식을 찾기도 힘들지 않은가.
부침개와 더불어 '한국의 피자'라 불리는 빈대떡. 빈대떡은 오래 묵은 벗들과 함께 옛 고향집 분위기가 나는 집에 앉아 추억을 나누며 먹을 때 가장 맛이 좋다. 막걸리 한 잔 시원하게 쭈욱 들이킨 뒤 바삭바삭 부서지는 빈대떡 한 점 어리굴젓에 찍어 입에 넣어보라. 장맛비에 칙칙 식어가는 무더위처럼 세상 시름이 한 풀 꺾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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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대떡은 원래 기름에 부친 고기를 제사상이나 교자상에 올려놓을 때 밑받침용으로 쓴 음식이야. 까닭에 가난한 사람을 위한 음식이라 하여 '빈자'(貧者)떡으로 불리다가 지금의 빈대떡이 되었다는 설이 있지. 조선시대에는 흉년이 들면 부잣집이나 세도가의 집에서 빈자떡을 만들어 남대문 밖에 모인 유랑민들과 거렁뱅이들에게 던져 주었다는 이야기도 있어." - 윤재걸(시인, 언론인)
예로부터 민초들의 허기를 달래고 건강까지 알뜰하게 챙겨준 빈대떡. 빈대떡은 녹두로 만든 음식이어서 단백질이 풍부하다. 게다가 고기를 자주 먹지 못하는 민초들에게 영양가를 보충해주는 음식이기도 했다. 특히 녹두는 한방에서 피부병 치료와 해독, 피로회복에 효과가 있으며, 식욕을 돋구는 역할까지 한다고 나와 있으니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랴.
1970년대 초반. 나그네가 중학교에 다닐 무렵, 창원군 상남면(지금의 창원시 상남동)에는 4자와 9자가 붙은 날마다 제법 큰 장이 섰다. 어물전에서부터 음식시장 옷시장 나무시장 소시장까지, 상남장에 가면 없는 게 거의 없었다. 그중 음식시장 한 귀퉁이 공터에서 꼬부랑 할머니가 지글지글 구워내는 빈대떡은 보기만 해도 침이 절로 꿀꺽 넘어가곤 했다.
공터에 깔아놓은 덕석에 어른들이 삼삼오오 앉아 막걸리를 시키면 그저 공짜로 구워주던 그 갈빛 빈대떡. 하지만 나그네는 한 번도 그 빈대떡을 먹어보지 못했다. 어머니께서 빈대떡은 빈대 같은 거지들이나 먹는 음식이라고, 빈대떡을 먹으면 빈대 같은 삶을 살게 된다고, 빈대떡을 파는 시장 공터에 얼씬도 하지 못하게 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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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대떡, 하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집이 있다. 교보문고 뒤편 피맛골 들머리에 시골 고향집처럼 오도카니 자리 잡고 있는 그 빈대떡 전문점. 식당 들머리에 가득 쌓인 막걸리 빈 병을 바라보면 언뜻 막걸리 전문점 같기도 한 이 집은 녹두 빈대떡을 60여 년 넘게 구워온, 그야말로 수식어가 더 필요 없는 빈대떡 전문점이다.
1946년 처음 문을 열 때 이 집은 한옥이 처마에 처마를 기대고 있는 피맛골 골목 공터에 긴 나무 의자와 탁자 등을 대충대충 놓고 빈대떡을 구워 막걸리와 함께 파는 노점이었다. 그때 손님들이 긴 의자에 줄줄이 앉아 음식을 먹는 모습이 마치 열차 실내와 비슷하게 보인다 하여, 이 집을 열차집이라 불렀단다.
이 집이 지금의 장소로 옮긴 것은 1970년대 초. 그러니까 지난 1977년부터 지금의 주인인 윤해순, 우제은씨가 이 집을 물려받아 옛 방식 그대로 돼지기름에 빈대떡을 바삭바삭하게 구워 팔고 있다. 단지 60여년 앞과 달라진 게 있다면 차림표에 굴전, 파전, 조개탕, 두부가 추가되었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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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겉보기는 이래도 이 집이 빈대떡으로 엄청 유명한 집이야. 서울 살면서 이 집을 모르면 거의 간첩(?)이라고 봐야지. 오는 손님들도 대학생부터 80대 노인에 이르기까지 다양해. 나 또한 기자생활 할 때 하루 걸러 올 정도로 단골집이었지. 이 집 빈대떡의 바삭바삭한 맛은 돼지기름으로 구워내기 때문이야." - 윤재걸
지난 10일(화) 밤 9시. 촛불문화제에 참석했다가 목도 축이고, 출출한 배고픔도 달래기 위해 찾았던 피맛골 빈대떡 전문점. 이 집은 지난 해 여름, 나그네의 음식 길라잡이 윤재걸 선배의 소개로 처음 왔다가 녹두 빈대떡의 바삭바삭한 맛과 짭쪼롬하면서도 상큼한 어리굴젓의 맛에 포옥 빠져 일주일에 한두 번씩 찾는 나그네의 단골집이기도 하다.
1층과 2층으로 나뉘어진 이 집 빈대떡의 특징은 널찍하고도 검은 사각 프라이팬에 돼지기름을 넉넉히 둘러 뜨겁게 가열시킨 뒤 주방에서 곧바로 갈아낸 녹두가루를 밀가루와 함께 반죽해서 즉석에서 구워낸다는 점이다. 그래서일까. 빈대떡을 한 점 집어 입에 넣으면 바삭바삭한 씹히면서 입 안 가득 고소한 감칠맛이 맴돈다.
막걸리 한 잔 꿀꺽꿀꺽 마신 뒤 부드러운 돼지고기가 든 빈대떡 한 점에 어리굴젓 한 점 올려 입에 넣으면 촛불집회로 쌓였던 온몸의 피로가 순식간에 사라지는 듯하다. 어리굴젓 올린 향긋 고소한 빈대떡을 먹은 뒤 양념간장에 들어있는 양파와 고추로 입가심하고 나면 '빈대떡 신사'라는 노래가 절로 흥얼거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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