言/사는이치知

놀이로서의 詩 쓰기

oldhabit 2008. 9. 8. 18:08

                             놀이로서의 시 쓰기


                                                     -김기택-

1. 기다리기

한 편의 시가 나오기 전까지 나도 내 안에서 무엇이 나올지 모른다. 궁금해서 기다려진다. 시가 나오기를 기다릴 때 시가 어린애 같다는 생각이 종종 든다. 이 녀석은 성질이 청개구리 같아서 꺼내려 하면 얼른 숨는다. 아무리 좋은 컨디션. 고요한 시간, 알맞은 분위기를 준비해 놓고 유혹해도 좀처럼 나오지 않는다. 무관심한 척, 아무도 자기에게 관심이 없는 것처럼 하면, 그때서야 저도 심심하고 궁금하니까 살살 고개를 쳐든다. 내가 전혀 글을 쓸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면, 예를 들면 펜도 종이도 없거나 만원 전철 안에 있거나 하여 쓰기 곤란한 상황에 처하면, 갑자기 나에게 놀자고 덤벼든다. 이 녀석이 스스로 찾아와 놀자고 하는 건 흔치 않은 일이므로 나는 어떻게 해서라도 이 녀석과 놀아주려고 노력한다. 잘 놀아주지 않으면 잘 뻗치던 상상력을 대부분 잃어버리기 십상이다.

그래서 언제 갑자기 찾아올지 모르는 이 녀석을 위해 가방이나 주머니에 필기구와 수첩을 준비해 두어야 한다. 일을 할 때나 놀 때나 일상에 빠져 있어도 무의식적인 마음의 더듬이는 늘 세워두어야 한다. 그러나 시를 잡을 준비가 잘 되어 있다는 것을 알면 그 녀석도 눈치가 빤해서 잡히려고 하지 않는다. 이 녀석은 내가 준비가 안 된 순간을 느닷없이 급습하여 난처한 상황에 빠져 쩔쩔매는 것을 즐기는 것 같다. 어떤 때는 새벽꿈에 찾아와 상상력에 발동을 거는데, 일어나면 신기하게도 싹 사라진다. 번번히 당하지만, 그럴 때마다 이 녀석은 그런 어수룩한 나를 보는 게 여간 즐겁지 않은가 보다. 가만히 있을 때보다는 걷거나 버스 안에서 창 밖을 보거나 움직일 때 이 녀석은 더 자극을 받는다. 그래도 때때로 나에게 제대로 걸려 꼼짝 못하고 작품이 되어 나오곤 한다.


2. 산 채로 잡기

내 시에는 묘사가 많지만, 시 쓰는 과정에서 실제로 묘사할 대상을 보는 것은 시 쓰기에 오히려 방해가 된다. 시는 대상을 있는 그대로 그리는 것이 아니라 시인의 시각이나 인식, 마음에 따라 그것을 변형시키기 때문이다. 대상을 상상력 위에 올려놓을 때 그것은 실체를 보는 것 보다 더 생생하고 활발한 움직임을 보인다. 나는 대상을 상상의 공간에서 움직이게 해 놓고 그것을 관찰하는 것을 좋아한다. 글자로 표현된 것이 내가 가상공간에서 상상했던 것과 같이 실감이 나지 않으면 그것이 생생하게 환기될 때까지 몇 번이고 수정한다. 그것이 상상 공간에서 본 것처럼 생생하게 될 때까지 하나도 놓치지 않고 표현하려다 보니 미세한 것까지 표현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과장과 허풍이 나오게 된다. 과장과 허풍도 인식의 소산이다. 과장이나 허풍은 평면적인 그림에서 보면 잘 보이지 않거나 지나치기 쉽거나 감춰진 것들을 선명하게 드러낸다. 평면적인 사실 속에 숨은 사소한 것들 그러나 시에서는 중요한 가치들을 깨우는 것이다.

시는 언어를 도구로 사용하지만 시 쓰기에서 가장 큰 방해자는 역시 언어이다. 언어와 시가 표현하고자 하는 마음의 다양한 정서 사이에는 아득한 거리가 있다. 표현하고자 하는 바를 담기에는 언어는 너무 상투적이고 단단한 외피로 둘러싸여 있다. 언어는 너무 많은 사람이 사용해 닳고 닳아 살과 피는 별로 없고 뼈다귀 같은 개념 덩어리가 대부분이다. 이것을 그대로 사용하면 시인이 표현하고자 하는 바는 거의 죽고, 딱딱한 관념이나 언어의 질긴 껍질만 남게 될 것이다. 읽는 이의 머리로는 전달되겠지만 몸으로 전달되지는 않는다. 몸으로 전달되지 않으면 감동은 없다.

시인은 자신이 표현하고자 하는 복잡하고 미묘한 개인적인 정서, 살아 있는 생명체로서의 정서를 죽이는 언어를 숙명적으로 시 쓰기에 사용해야 한다. 시인은 자신이 표현하고자 하는 정서를 죽이려고 하는 언어를 사용해서 정서를 죽이지 않고, 가능하면 덜 다치게 하고, 산 채로 전달해야 하는 것이다. 물론 많은 시인 선배들은 은유나 이미지, 객관적 상관물, 아이러니, 낯설게 하기 등 언어를 산 채로 잡아 생생한 그대로 전달하는 여러 방법을 만들어 사용해 왔다. 그러나 그것은 흉내내는 순간 다시 상투어로 돌아가려 한다. 좋은 시는 남들이 썼던 것이 아니라 제 몸에 맞는 새로운 언어, 육화된 언어를 찾아 쓴다.

표현하기 어려운 대상을 만났을 때 나의 놀이 욕구는 더 힘을 얻는다. 나는 온 힘을 집중하여 완강하게 활자화를 거부하는 대상과 싸운다. 나는 그것이 명확하고 알기 쉬운 표현이 될 때까지 물고 늘어진다. 그것이 선명하고 한 번에 알아들을 수 있는 표현이 되어 내 앞에서 얌전하게 꿇어 앉을 때까지 물고 늘어진다. 그 과정이 치열할수록 시 쓰는 즐거움은 커진다. 그 표현과의 싸움에 집중할 때 나는 재미있는 놀이에 집중하는 아이와 조금도 다를 것이 없다. 그러나 즐거운 시 쓰기도 고통이 될 때가 많이 있으니, 그것은 아둔한 재주와 헐거운 연장 때문에 능력의 한계를 절감할 때이다. 잡을 때는 산 것 같았는데, 잡아놓고 보면 죽어있을 때가 많다.


3. 다듬기

퇴고에서 내가 하는 일은 시 쓸 때의 흥분 상태를 가라앉히는 일이다. 흥분 상태에서는 못난 표현도 제 새끼들 마냥 다 예쁘게만 보인다. 군더더기에 상투적인 안이한 표현, 의도적인 오류가 아닌 습관에 의한 오류, 감정의 과잉에 의해 흘러넘친 과장 따위가 작품 속에 빠져 있을 때는 잘 보이지 않는다. 이럴 때 나는 시간의 섬세한 여과작용을 이용한다. 되도록이면 일주일 이상은 묵혀두고 시 쓸 때의 흥분도 충분히 제거시킨다. 그러면 뭔가에 홀린 눈이 조금씩 풀리고 냉정한 태도로 돌아와서 잘못된 표현이나 생각이 눈에 들어오게 된다.

이렇게 일정한 간격을 두고 다듬는 것이 좋은데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늘 시간에 쫓겨 허둥지둥 원고를 보낼 때가 많고, 활자화된 후에야 후회하는 일이 적지 않다. 완성된 원고를 확정하는 일은 늘 어렵고 원고를 보낸 후에도 늘 꺼림칙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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