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과 함께 읽는 시]이형권 시인의 ‘동백꽃 편지’ | |||||||||
붉은 마음 ‘툭’ 떨어지는 소리에 꺼내 본 가슴속 연서(戀書) | |||||||||
아직은 저릿한 찬바람에도 꽃이 피었다고 누군가에게 편지를 쓰고 싶어지는 봄입니다”
#1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담은 베르디의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우리나라에서는 ‘춘희’로 알려져 있다)’의 원작 제목은 ‘동백꽃 부인’이다. 두 사람의 사랑을 이어주는 매개체가 바로 동백꽃이기 때문이다. 주인공 알프레도와 비올레타가 운명적인 첫 만남을 가졌던 날, 알프레도에게 마음을 연 비올레타는 자신이 무척이나 좋아하는 꽃, 동백꽃을 가슴에서 떼어 그에게 건네며 “이 꽃이 시들 때쯤 다시 만나자”고 말한다. 정열의 장미도, 순수의 백합도 아닌 동백꽃에 약속을 실어 전한 것은 이들이 결코 함께 영원할 수 없음을 뜻한다. 하루 만에 시들어버리는 동백꽃은 바로 다음날 연인을 만나게 해주지만 빨갛게 멍든 꽃잎처럼 두 사람의 마음에 핏빛 생채기를 남겼다. 매서운 북풍을 이겨내고 먼저 봄을 알리려 피어나는 동백꽃. 겨울이 혹독할수록, 시련이 클수록 동백은 더 붉게 타오른다. 그 고결한 자태에 ‘당신을 누구보다 사랑한다’는 의미를 새겨 전통 혼례식을 장식하기도 한다지만, 어쩐지 나에게 동백꽃의 느낌이란 처연하게 번지는 ‘뭉클함’이다. 벚꽃처럼 나릿나릿 흘려보내지도 않고 매화처럼 말갛게 보여주지도 않는, 그저 아무 일 없었던 양 가장 춥고 깊은 곳에 꾹꾹 눌러 넣은 감정이 다져지고 다져져서 빨갛게 맺힌 듯한, 그런 느낌. 애써 아무렇지 않은. 여자에게 버림받고 살얼음 낀 선운사 도랑물을 맨발로 건너며 발이 아리는 시린 물에 이 악물고 그까짓 사랑 때문에 그까짓 여자 때문에 다시는 울지 말자 다시는 울지 말자 눈물을 감추다가 동백꽃 붉게 터지는 선운사 뒤안에 가서 엉엉 울었다
꽃이 피는 건 힘들어도 지는 건 잠깐이더군 골고루 쳐다볼 틈 없이 님 한 번 생각할 틈 없이 아주 잠깐이더군
그대가 처음 내 속에 피어날 때처럼 잊는 것 또한 그렇게 순간이면 좋겠네
멀리서 웃는 그대여 산 넘어 가는 그대여
꽃이 지는 건 쉬워도 잊는 건 한참이더군 영영 한참이더군
사람이 지는 것도 잠깐일 수는 없을까. 그것도 동백꽃 지듯, 선명하게 만개한 그 모습 그대로 ‘툭’ 하고. 여느 꽃처럼 사그라지어 떨어진다거나 질척하게 빛을 잃은 모습을 보이지 않아서다. 시들지 않은 온전한 꽃떨기가 이를 ‘앙’ 다문 듯한 결의로 툭 떨어진 동백꽃은 땅에서 한 번 더 피어난다. 마치 예리한 칼로 베어낸 듯하게. 마음 속 슬며시 번지는 핏빛은 비릿하지만 그래도 조금은 후련하다. 송창식이 노래한 ‘눈물처럼 후두둑 지는 꽃’을 따라 가슴 깊이 묻어두었던 눈물을 후두둑 흘려보내고 나면, 이제는 진짜 봄을 기다릴 차례다. ‘잊는 건 영영 한참’이라는 말처럼, 비록 그대를 ‘영영’ 잊지 못하게 될 것을 스스로 잘 알고 있다 하더라도. 동백은 떨어졌으니까.
절정기에 ‘모가지’째 떨어지는 동백꽃은 우리네 삶을, 사랑을, 고독을 이야기하기에 가장 좋은 꽃일지도 모른다. 그래서일까. 시인들 중에는 유난히 동백을 노래한 이가 많다. 트레킹 코스를 따라 해안 절벽에 다다르면 동백꽃이 떨어져 뭉클하게 피어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 강렬함 앞에서 조금은 쓰라린 사랑의 기억이 되살아날지도 모른다. 꽃과 함께 말없이 훌쩍 흘려보내낸다. 그러고 나서 ‘이제는 봄이 온다’고 설레는 편지를 써보도록 하자.
푸른 파도가 봄의 향취를 밀어올리고, 꿈틀대는 생명력이 약동하는 황톳빛 남도를 떠올리게 하는 시인 이형권은 문예지 「녹두꽃」, 「사상문예운동」, 「창작과 비평」에 시를 발표하며 문단에 발을 들였다. 대학 시절 이태호 교수에게 한국미술사를 사사하고 문화유산을 찾아다니는 답사 전문가로도 활동하고 있다. 직업이 여행을 하는 일인지라 시를 이정표 삼아 바람처럼 흘러 다니는 중이다. ‘동백꽃 편지’가 담긴 시집 「슬픈 것이 흘러가는 시간이다」와 「문화유산을 찾아서」, 「산사」, 「어린이 문화유산 답사기」등을 펴냈다. 지난해 ‘잊혀진 첫사랑’ 같던 시를 조심스레 끄집어내 첫 시집을 낸 데 힘입어, 요즘은 틈틈이 ‘그곳’에 머물러 있는 고양된 감정과 추억을 시로 옮기고 있다고 하니 두 번째 시집을 기대해야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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