言/사는이치知

책-오래된 마을

oldhabit 2009. 5. 5. 13:52

» 〈오래된 마을〉




〈오래된 마을〉
김용택 지음/한겨레출판·1만1000원

 

섬진강 시인 김용택(61)씨의 산문이 <오래된 마을>이란 제목으로 묶여 나왔다. 전북 임실군 덕치면 진메마을. <오래된 마을>은 시인이 나고 자라 이순이 넘은 지금도 살고 있는 그 마을에 웅숭깊은 순정으로 부치는 ‘러브 레터’이겠다. 마을 이름 그대로, 진짜배기 산녘에서 가난하지만 넉넉하게 묵묵히 엎드려 농사짓고 살아온 마을 사람들의 삶의 풍경들이 어린아이 같은 시인의 호기심 총총한 눈망울을 통해 아로새겨진다.

 

닭을 팔아 아들의 등록금을 내주고는 차비가 없어 팍팍한 15리 신작로 길을 걸어갔던 시인의 어머니. 동네 일이라면 모두 소상히 알고 있는 큰집 형님. 평생 땅만 파다 낫에 베이고 호미에 찍히고 성한 데 없는 험한 손을 가진 한수 형님. 종길이 아제와 탱자나무집 할머니, 수남이 누님과 큰집 형수 등이 모두 시인의 관찰 대상 1호들이다.

 

“아갸, 금방 여그 있던 노끈이 어디로 갔다냐? 아까 용택이 어매가 그 끈을 보고 뱀인지 알고 놀라더니 어디다 던져부렀다냐?”

 

호미를 챙기던 한수 형님은 이날따라 꼭 말끝에 욕을 달고, 큰집 마늘밭에서는 형수, 이환이 아주머니가 마늘 쫑지를 뽑으며 무지 시끄럽게 이야기하는데, 시인은 어머니에게서 ‘모두 조금씩 귀가 먹어서 그런다’는 걸 알게 된다. “동네 사람들이 모두 노인이 되어 저렇게 새소리, 차 지나는 소리들을 들으며 크게 고함을 지르듯 말을 하는 것이지요.”

 

‘삼십칠 명의 장정들과 삼십칠 명의 아낙네들이 삼십칠 채의 지붕 아래 식구들을 거느리고 오백년을 살았던 마을’은 이렇게 ‘다섯의 노인 내외와 홀로 사는 어머니들의 밤’으로 늙고 있다.

 

동네를 합쳐도 열네 집에 스물여덟 명. 그러나 이 오래된 작은 마을은 여전히 “한수 형님이 고추 모종을 했는데 45포기가 모자란다”고 함께 걱정하고, “인택이네 집에서 밥 먹은 뒤 큰집에서 누룽지를 먹고, 어머니와 이환이 아주머니가 수남이 누님이랑 형수랑 같이 쑥떡을 만드는” 공동체다. 그러니 시인은 “가난하나, 따사로운 햇살과 싱그러운 바람을 매만지는 손이 있고 그 아름다운 손으로 땅에 씨를 묻는” 작은 마을 사람들의 변하지 않은 공동체적인 삶이 인류의 미래라고 믿는다.

 

» 김용택 시인이 사는 섬진강 마을 사람들의 모습. 시인 집에 묵었던 사진작가 한금선씨가 포착했다. 덕치초등학교 앞에서 노는 아이들, 진메마을의 징검다리, 우산을 쓴 한수 형님, 토란대를 다듬는 어르신. 한겨레출판 제공

인택이네서 밥먹고 큰집서 누룽지

수남이 누님이랑 형수랑 쑥떡 빚고

흙에서 난 몸 핏줄같은 강물과 닿고…

따뜻한 공동체 삶 산문에 곱게 담아

 

시인에게 그가 사는 오래된 마을의 산과 강, 그리고 거기 사는 사람들은 그 자신의 몸과도 같다. “내 육체는 마을 흙으로 빚어졌고, 내 피는 그 강물입니다. 내 노래는 그 강가에 사는 사람들의 입을 통해 세상에 나왔습니다. 내 핏줄은 그 강물로 이어져 있어 그 강물이 아프면 내가 아프고 그 땅이 아프면 내 몸이 아픕니다.”

 

그런 시인이 마을에서 유독 미워하며 아옹다옹 싸우는 두 존재가 있으니 학교 참새와 뒷집 닭이다. 떼 지어 날아와 지지고 볶고 지글자글거리기 시작해서 해가 질 때까지 오두방정 지랄들을 떠는 참새들에게 “조용히들 좀 안 해!” 꽥 고함지르며 신경질을 부리는가 하면 새벽 4시반이면 아침 선잠을 깨우고 “욱!” 하고 겁을 줘도 전혀 기죽지 않는 뒷집 닭더러 “저 닭대가리!” 하며 뒤로 움찔 내빼는 것이다.

 

시인의 순정한 동심은 이렇게 읽는이를 배시시 웃게 만드는데, 학교에서 실컷 꽃구경을 하다 벚꽃잎이 머리에 붙은 줄 모르고 귀가한 시인은 이렇게 우쭐댄다. “세상에, 머리에 꽃잎이 내려앉아 집까지 따라오다니요. 사람들이 보며 그랬을 것입니다. ‘역시 시인은 달라!’라고요.”

 

<오래된 마을>은 지난해 여름 38년 만에 교단을 아주 떠난 시인이 ‘자연인으로서 인생 2막’을 연 뒤 처음 내놓은 산문집이기도 하다. “꽃 피는 살구나무 아래 앉아 문득 고개 들었더니 서른이었고, 아이들이랑 살구 줍다가 일어섰더니 마흔이었고, 날리는 꽃잎을 줍던 아이들 웃음소리에 뒤돌아보았더니 쉰이었습니다. 학교를 떠나며 묵묵히 나를 보는 살구나무를 바라다보니, 어느새 내 나이 머리 허연 예순입니다.”

 

마을 사람들을 통해서 시인은 자연과 생태, 농사짓는 일에 대한 그윽한 사랑과 이해로 나아간다. 곡식들은 주인의 발소리를 듣고 자라고, 꾀꼬리 울음소리 듣고 참깨가 나고, 보리타작하는 도리깨 소리 듣고 토란이 나는 것이다. 동네 산과 들에서 일어나는 일이라면 모두 알고 있는 큰집 형님에게선 참깨와 촛불의 힘을 깨닫는다. 참깨 싹들이 무더기 지어 돋아난 모습을 보고 “참 이쁘지요잉” 하는 시인에게 큰집 형님은 왜 참깨들이 한 구덩이에서 많은 싹이 나오는지 일러준다.

 

“참깨를 한 구덩이에 두세 개씩 넣으면 이것들이 하도 싹이 작아서 땅을 못 뚫고 나온다네. 그래서 참깨 구덩이에서는 저렇게 많은 싹이 나온당게. 여러 개를 한 구덩이에 넣어야 저것들이 힘을 합쳐 땅을 뚫고 흙을 밀어내며 나온당게.”

 

시인은 놀라고 또 놀라며 이렇게 적는다. “광화문에 모여든 촛불 생각이 났습니다. 작은 촛불들이 모여 나라를 들어 올리잖아요?”

 

해 저물녘 시인이 바람을 타고 잎들이 하얗게 뒤집어지는 장관을 보며 ‘감동을 잘하는 내가 홀로 감동을 하려니 조금 벅차다’고 하니, 꽃 피고 지는 이 봄날에 <오래된 마을>을 들고 ‘저무는 섬진강을 따라가며’(<섬진강1>) 거닐어 봄직하다. 운이 좋으면 시인의 어머니와 진메마을 아주머니들이 뜨끈뜨끈한 쑥떡을 빚어주실지도 모르니 말이다.

 

 

허미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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