言/간직하나人

기형도

oldhabit 2009. 5. 5. 22:35

죽음이 살다 간 자리

―기형도론―




정효구(문학평론가)


1


젊은 시인 기형도의 충격적인 죽음이 문단을 침통하게 한 지도 몇 개월이 지났다. 기형도의 죽음 앞에서 사람들은 여러가지 모양으로 그의 영혼을 위로하였으니, 혹자는 눈물로, 혹자는 추억담으로, 혹자는 문학론으로, 혹자는 시집의 발간으로 그의 삶과 만남으로써 그를 위로하였던 것이다. 내가 지금 쓰고 있는 이 글 또한 그와 같은 성격을 갖고 있는 것 가운데 하나이다. 그러나 나는 이 글을 기형도에 대한 추억과 위로의 성격으로부터 얼마간 거리를 둔, 냉정한 평론의 형태로 채우고자 한다. 기형도의 갑작스런 죽음은 분명 많은 사람들을 참을 수 없는 충격과 아쉬움의 바다로 밀어넣은 사건이지만, 이제 우리는 감정적 동요로부터 벗

어나 그의 문학을 문학사의 바른 자리에 위치시킬 의무가 있기 때문이다.


2


인간의 눈이 두 개인 것은 매우 상징적인 의미를 갖는다. 인간의 한 쪽 눈은 끊임없이 밝고 아름다운 세계를 뒤쫓고 있으며, 다른 한 쪽 눈은 이와 대극의 자리에서 부단히 어둡고 추한 구석을 들쑤셔 내는 것으로 불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들은 이 상반된 두개의 눈을 항상 운명처럼 양쪽에 달고 다니는 게 보통이지만 이 철칙 같은 인간의 보편적 질서가 여지없이 무너지는 경우도 우리 주위에는 종종 나타난다. 그 예를 멀리서 찾아낼 것도 없이, 바로 지금, 이 자리에서 내가 논하고자 하는 기형도가 그 구체적인 실례를 가장 충실하게 보여주는 사람이다. 그는 인간이 보편적으로 가지고 있는 두 개의 눈 가운데서 철저하게 부정적이며 비극적인 시각만을 유지하고 다녔기 때문이다. 그의 이와 같은 시각은 너무도 철저하고 완벽하여 그의 시집을 읽는 독자들이라면 누구나 비오는 저녁거리에 선 것처럼 우울의 심연으로 깊이 잠겨들고 만다.

기형도의 시집에는 죽음만이 살아 있다. 그의 시집에서 줄곧 활발하게 움직이는 죽음의 형태들은 다양한 모습으로 고리를 이루고 일렁인다. 나는 그 고리들을 생각나는 대로 이 곳에 나열하기로 한다 : 그의 시에는 빛이 없고 어둠만 있다, 따스한 체온이 없고 차가운 얼음만 가득하다, 웃음이 없고 슬픔만 있다, 희망이 없고 절망만 있다, 말이 없고 침묵만 있다, 청춘이 없고 백발만 있다, 낯익은 친구가 없고 낯설은 세상뿐이다, 아름다운 꽃밭이 없고 검은 외투만 있다, 평온이 없고 불안만 있다, 풍요로움이 없고 가난만 있다, 건강한 육체가 없고 허약한 얼굴만 있다. 어디 이뿐인가. 기형도의 시집 『입 속의 검은 잎』은 이 이외에도 수

많은 부정적 혹은 비극적인 내용들을 평상복처럼 입고 다닌다. 나는 앞서, 살아 있는 것이라곤 죽음 뿐인 것이 바로 기형도의 시집이라고 말하였다. 이런 점에서, 기형도는 29년이라는 세월을 살아왔음에도 불구하고 그에 상응하는 세월을 죽음과의 만남으로 보낸 것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서서히, 그리고 침착하게 죽음과의 만남을 삶으로 살아오다가,29년의 삶을 마감하고 죽음 자체가 되어버린 것이다. 나는 이 글을 통하여 그가 어떤 방식으로 죽음과 해후하면서 살아왔는가를 추적해보고자 한다. 인간이 가진 두 개의 눈 가운데서 그 하나를 철저히 가린 결과, 그가 만났고 또 살아온 죽음의 세계가 어떤 것이었는가를 살펴보자는 것이다.


3


기형도의 시는 불길한 안개의 이미지로부터 시작된다. 그가 내다보는 세상은 언제나 자욱한 안개로 덮여 있다. 신춘문예 당선작이기도 한 「안개」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가끔씩 안개가 끼지 않는 날이면

방죽 위로 걸어가는 얼굴들은 모두 낯설다. 서로를 경계하며

바쁘게 지나가고, 맑고 쓸쓸한 아침들은 그러나

아주 드물다. 이곳은 안개의 聖域이기 때문이다.

-「안개」에서


인용부분의 핵심은 그곳에 날마다 안개가 낀다는 사실과, 안개가 끼지 않은 날이 되면 방죽 위를 걸어가는 사람들의 얼굴이 매우 낯설게만 보인다는 것이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기형도의 안개는 김승옥의 안개(「무진기행」을 생각해보라)와도 달라서 언제나 빛을 냉혹하게 잠식한다. 그 안개는 밝음과 아름다움을 추구하고자 하는 인간의 한 쪽 눈을 까맣게 가린다. 아니다. 이렇게 말하면 전말이 바뀐 셈이다.안개가 기형도의 눈을 가린 것이 아니라 기형도의 눈이 안개만을 골라댄 것일 터이다. 어쨌든 기형도의 시에는 안개가 자욱이 끼어 있거니와, 안개에 익숙해진 시인에게 있어서, 안개가 걷힌 후의 밝은 빛이란 두려운 존

재이다. 따라서 시인은 다음과 같이 말한 것이다. "가끔씩 안개가 끼지 않는 날이면/방죽 위로 걸어가는 얼굴들은 모두 낯설다"고. 기형도에게 있어서 밝음의 세계란 음지식물이 정오의 태양을 직선으로 쐬게 된 것처럼 어리둥절하고 낯선 일이다. 이와 같은 기형도의 안개는 불행한 사건들을 연속적으로 동반한다. 그 불행한 사건들이란, 한밤중에 여공이 겁탈당하는 일, 취객이 방죽 위에서 얼어죽는 일,그 주검을 삼륜차가 쓰레기 더미인 줄 알고 지나간 일, 상처입은 사내들이 떠나고는 돌아오지 않는 일 등이다. 이처럼 안개와 관련된 그의 기억이란 어느 하나도 유쾌하고 행복한 일과는 거리가 멀다. 안개로부터 불길하게 출발한 기형도의 시는 이어서 어둠의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그의 시집에는 어둠의 그림자가 빽빽하게 들

어차 있다. 이 어둠의 그림자는 안개의 어두운 이미지가 보다 강화된 형태를 띠고 나타난 것이리라.


내가 살아온 것은 거의

기적적이었다

오랫동안 나는 곰팡이 피어

나는 어둡고 축축한 세계에서

아무도 들여다보지 않는 질서


속에서, 텅 빈 희망 속에서

어찌 스스로의 일생을 예언할 수 있겠는가

-「오래된 書籍」에서


인용시를 통해서 그대로 확인할 수 있는 바와 같이, 그가 머문 곳은 어둡고 축축한 세계이다. 그는 곰팡이 핀 얼굴로 이 어둡고 축축한 세계에 머물렀거니와, 그곳은 텅 빈 희망만이 허수아비처럼 서 있는 곳이다. 따라서 그가 "살아온 것은 거의/기적적이었다". 빽빽하게 덧씌워진 어둠 속에서 흉칙한 곰팡이의 얼굴로 산다는 것은, 죽음을 살았다는 말과 동일하다. 그래서 그는 다음과 같은 자학적인 언어들을 내뱉고 만다.


나를

한번이라도 본 사람은 모두

나를 떠나갔다, 나의 영혼은

검은 페이지가 대부분이다, 그러니 누가 나를

펼쳐볼 것인가.

-「오래된 書籍」에서


그렇다. 그는 긴 어둠 속에 홀로 갇혀 있다. 그를 "한번이라도 본 사람은 모두" 그를 "떠나갔다".이처럼 모든 사람들이 그를 떠나간 것은, 그만이 칩거하는 어둡고 축축한 세계로부터의 떠남이다. 이러한 그는 자기 자신을 검은 페이지로 가득한 낡은 서적쯤으로 생각한다. 이 자학적인 자기 규정은 어느 누구도 이 페이지를 펼쳐보지 않을 것이고, 따라서 나는 "아무도 들여다보지 않는 질서" 속에 홀로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는 어둡고 축축한 방을 빠져나올 수가 없다. 그 방은 외로움과 고독이 불길하게 꿈틀거리고, 두려움과 절망도 천근의 무게로 내려앉는 곳이지만, 이미 이와 같은 어둠의 세계는 그에게 습관처럼 꽉 달라붙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말한다. "습관은 아교처럼 안전하다"고. 이처럼 그가 어둡고 축축한 방을 삶의 중심 공간으로 삼았다는 사실은, 때를 가리지 않고 검은 외투만 찾아 입고 나타난 시 속의 사내와도 관련된다. 기형도의 시집에는 검은 외투의 사내가 살고 있다. 그 검은 외투는 그를 둘러싼 어둠과 밀폐의 흔적인 것이다. 어둡고 축축한 방에서 검은 외투를 입고 살아가는 사람, 그가 바로 시집 『입 속의 검은 잎』을 쓴 시인이

다.


4


기형도의 눈에 비친 세상은 온통 검은 빛으로 물들어 있기가 일쑤이고, 생명을 가진 것조차 죽어 있는 무기물처럼 적막하다. 그의 의식을 파고드는 이 검은 색조에의 집착은 "유리창을 쏟아버릴 것 같은 검은 건물들"이라고 말함으로써 도시를 온통 검은 빌딩의 숲으로 만들기도 하고,"검은 옷을 입은 햇빛들"이라고 말함으로써 햇빛 자체를 부정하기도 한다. 이 이외에도 그는 "입 속에 악착같이 매달린 검은 잎"을 통하여 죽음의 공포를 예견하기도 하고, "얇고 검은 입술"로 자신의 입술을 비유함으로써 더 이상 노래할 수 없는 시인의 불운을 예고하기도 한다. 검은 색채에 대한 집착, 어쩌면 이것은 집착이라기보다 한 쪽 눈을 철저하게 봉쇄하고 비극적인 시각으로 세상을 탐지한 사람들의 필연적인 결과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와 같은 검은 색채에의 집착은 살아 있는 것에 대한 거부의 몸짓과도 상통한다. 그래서 그의 시집에는 어두운 광물질의 심상이 주종을 이루며 널려 있다.

① 그의 입술은 마른 가랑잎(51면)

② 혀는 흉기처럼 단단하다(44면)

③ 코트 주머니 속에는 딱딱한 손이 들어 있다(35면)

④ 어머니는 마른 손으로 종잇장 같은 내 배를 자꾸만 쓸어 내렸다(90면)

⑤ 그는 쉽게 들켜버린다/무슨 딱딱한 덩어리처럼(22면)

⑥ 견고한 지퍼의 모습으로 /그의 입은 가지런한 이빨을 단 한 번 열어 보인다(19면)

⑦ 공중에 뜬 생선가시처럼/놀란 듯 새하얗게 서 있는 겨울 나무들(18면)


위와 같은 표현들을 열거하자면 끝이 없다. 그의 시집에는 거의가 이런 식으로 생물들이 무기물화 내지는 무생물화되어 있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시인들은 무생물을 생물화 혹은 의인화하는 데 익숙해 있다. 그들은 바위에도 생명을 부여하고, 한 알 모래알에도 엄숙하게 생명을 부여한다. 이와 같은 인간의 상상력은 아마도 세상의 모든 것을 생명 있는 것으로 치환시켜 생명의 공간을 더욱 풍요롭게 하고, 나아가서는 목숨을 연장시키고자 하는 내적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데서 나온 것일 터이다. 그런데 기형도의 경우는 어떠한가. 그는 생물을 모두 무생물화시킴으로써, 생물로 부터 목숨을 빼앗고 만다. 따라서 그가 사는 세상은 마른 각질들의 세상처럼 딱딱하고 생명 있는 것들은 이미 죽음을 맞이했거나 추하게 늙은 모양을 취하고 있다. 예컨대, 입술은 마른 가랑잎이 되었고, 혀는 흉기처럼 단단하게 굳어 있으며, 손은 딱딱하게 응고되어 있다. 그런가 하면 그의 배는 마치 종잇장처럼 얄팍하고, 그의 이빨은 지퍼의 모습으로 열린다. 어디 이뿐인가. ⑤에서 보는 바와 같이 그 노인은 살아 있는 인간이 아니라 무슨 딱딱한 덩어리와 같이 엉겨 있다.

기형도의 의식과 상상력은 바로 위와 같은 광물질의 상상력 내지는 죽음의 상상력인 것이다. 설사 이러한 규정으로부터 백보 양보한다 하더라도 그의 상상력은 모든 것이 비인간화되고 소외화 되는 그런 내적 욕구와 관련된다. 따라서 그가 감지하는 인간들의 육체는 누추한 몰골로 어둠 속을 헤매거나, 마치 "쓸쓸한 가축들처럼" 거리를 배회한다. 이와 같은 사실들을 염두에 두고 본다면, 그의 시집 도처에서 그가 자신의 육체를 아무렇게나 마구 집어던

지고 자학의 늪으로 빠져드는 것은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에게는 희망이 없다. 설령 희망이 있다 하더라도, 그는 희망을 경멸한다. 그에게 있어서 희망은 인간을 유혹하는 망령과 같은 것이다. 희망의 끝은 아무것도 없거나 절망뿐이라는 게 그의 생각이다. 이와 같은 부정적 희망론을 말하기 위하여, 그는 다음과 같이 탄식한다. "길 위에서 일생을 그르치고 있는 희망이여"라고. 그런데 그는 희망만을 경멸하는 데서 멈추지 않는다. 그에게는 추억 또한 지독한 경멸의 대상이다. 따라서, 그는 「추억에 대한 경멸」을 제목으로 하여 한 편의 작품을 창작하거니와, 그 시를 통하여 그는 "사진첩을 내동댕이"치는 한 사내를 주목하고 있다. 우리의 추억과 미래의 희망이 오직 경멸스러운 존재로만 남게 되었을 때, 인간들을 구원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란 말인가. 그는 이러한 자신의 독특한 삶을 설명하기 위하여 몇 차례나 반복하여 다음과 같은 류의 말들을 시의 행간 속에 흘려놓고 있다.


① 아무도 내가 살아온 내용에 간섭해서는 안 된다

-「추억에 대한 경멸」에서

② 내 무시무시한 생애는 얼마나 매력적인가

-「흔해빠진 독서」에서

③ 그는 완전히 다르게 살고 싶었다. 나에게도 그만한 권리는 있지 않은가.

-「여행자」에서


현재의 어둠뿐이 아니라 과거의 추억과 미래의 희망까지 경멸한 그의 삶 ―이것은 분명 그 자신의 말처럼 "완전히 다르게 살"았던 삶이고, 또한 그의 말처럼 무시무시한 생애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인용시에서 처럼 "아무도 내가 살아온 내용에 간섭해서는 안 된다"고 단언하는가 하면, 그 무시무시한 나의 생애가 "얼마나 매력적인가"라고 자문한다. 그뿐만 아니라, 나에게도 그러한 삶을 살 만한 "권리는 있지 않은가"라고 되묻는다. 이와 같이 자신의 독특한 삶을 권리와 개성으로 평가할 때만 해도, 그에게 있어서 자신의 인생은 완전히 무의미하기만 한 것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고집 섞인 패기가 오랫동안 계속되지는 못하였기에, 그는 다음과 같은 허무주의적이고 비극적인 자기성찰의 언어들을 쏟아 놓는다.


① 진눈깨비 쏟아진다,갑자기 눈물이 흐른다,나는 불행하다.

-「진눈깨비」에서

② 나는 이미 늙은 것이다

-「정거장에서의 충고」에서

위에서 보는 바와 같이, 그는 불행하다고 고백한다. 그리고 나는 이미 늙은 것이라고 자학한다. 불행한 자와 늙은 자가 가야할 길은 어디로 나 있는 것일까. "구름 밑을 천천히 쏘다니는 개처럼/지칠 줄 모르고 공중에서 머뭇거렸구나"라고 살아온 날들과 살아 있다는 사실을 자학하는 자가 가야 할 길은 또한 어디로 나 있는 것일까. 그에게는 세상이 크고 무의미한 짐짝과 같이 매달려 있다. 이 짐짝을 매달고 갈 만한 길이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① 그러나 물을 끝없이 갈아 주어도 저 꽃은 죽고 말 것이다.

-「오후 4시의 희망」에서

② 그 춥고 큰 방에서 書記는 혼자 울고 있었다!

-「기억할 만한 지나침」에서


인용시 ①에서 보는 바와 같이, 그의 의식과 상상력은 죽음의 길을 향하여 가고 있다. "물을 끝없이 갈아 주어도 저 꽃은 죽고 말 것"이니, 삶은 곧 죽음이거나, 죽음에 이르는 길을 걷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인용시 ②는 그가 죽음에 이른 실을 찾아가는 데 하나의 실마리를 제공해 준다. 말하자면 시인에게 있어서 큰 방은 춥고 외로운 곳이다. 그에게는 세상이 짐스럽고, 그 속에 머문다는 것이 쓸쓸한 일이다. 따라서 그는 작고 어두운 방을 찾아 가거니와, 그 방도 두렵고 쓸쓸하여 늘상 두껍고 검은 외투를 입고 다닌다. 그의 시집 곳곳에서 외투를 입고 나타나는 사내의 모습은 바로 이와 같은 시인의 의식과 관련된다. 이렇게 놓고 본다면, 이 시인은 세상에서 큰 방으로, 큰 방에서 작고 어두운 방으로, 작고 어두운 방에서 검은 외투 속으로 자신의 둘레를 좁혀 왔던 것이다. 그런데 이 축소지향의 의식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작품 「안개」의 일절에서 처럼, 그는 "안개의 빈 구멍 속"에 집착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빗줄기의 빈 구멍에 집착하기 시작한다. 아마도 안개의 빈 구멍이나 빗줄기의 빈 구멍은 넓은 방에서의 불안과 외로움을 일시적으로나마 해소하기 위하여 그가 찾아낸 방법적 장치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작고 빈 구멍들은 그의 비극적이며 부정적인 감정들을 일소해주기에는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다. 그래서 그는 더 좁은 공간 속에 머물기 위하여 "나는 압핀처럼 꽂혔답니다" 혹은 "낡아빠진 구두에 쑤셔박힌, 길죽하고 가늘은 자신의 다리"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이것 역시 한계를 지닌 방법적 장치 이상의 것이 못 된다. 그렇다면, 그가 축소지향의 움직임을 밀고 나아가, 이 세상의 절망과 두려움, 슬픔과 외로움 등의 감정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은 무엇인가. 그것은 죽음 그 차제가 되는 것이다. 죽음 그 자체가 되어 "서류뭉치처럼" 죽음 "속에 나란히 붙어 있"는 것, 이것이 바로 그가 비극적인 불

안과 외로움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지는 길이다. 그가 세상을 떠나기 직전에 발표한 「빈집」의 일절인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에서처럼, 그는 세상과 내왕할 수 있는 문을 영원히 잠금으로써 그러한 부정적 감정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

었던 것이다.


5


기형도의 시집 『입 속의 검은 잎』은 철저하게 부정적인 시각, 부정적인 상상력, 부정적인 삶이 끝간 자리를 우리에게 특징적으로 보여준다. 김현의 지적처럼, 이와 같은 시인을 우리의 시사에서 찾아보기 어려울 만큼, 그의 시는 특징적이다. 그뿐만 아니라, 작품을 형상화하는 재능 또한 높은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이와 같은 기형도의 시집을 대하면서, 가장 아쉽게 생각되는 것은 그 가 마감한 짧은 생애이다. 그러나 이 이외에도 문학적인 측면에서의 아쉬움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순수하다. 이 말은 두 가지로 해석될 수 있으니, 그 하나는 인간 존재와 세상의 무의미함을 비판하는 데서 한 치도 물러서지 않는 자세를 의미하며, 다른 하나는 때묻은 어른의 성숙한 시각을 아직 갖추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두 가지는 다같이 그 나름의 중요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겠으나, 순수의 이름으로 전자만을 고집하며 밀고 나아갈 때, 우리들의 세상이 숨겨놓은 다양한 진면목이 상당 부분 상실되는 불운을 안게 된다. 기형도의 시집 『입 속이 검은 잎』은 전자의 시각에만 지나치게 경사된

까닭에, 순수의 편협한 이름 속에 내재된 위험성과 한계점을 그대로 노정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정효구 평론집 『광야의 시학』(1991, 열음사 刊)에서

' > 간직하나人' 카테고리의 다른 글

손석희   (0) 2010.10.20
가수 웅산  (0) 2010.04.10
고산자 김정호의 지리사상  (0) 2009.02.25
징기스칸  (0) 2009.02.25
잔 다르크  (0) 2009.02.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