言/간직하나人

징기스칸

oldhabit 2009. 2. 25. 20:28
집안이 나쁘다고 탓하지 말라.
나는 아홉 살 때 아버지를 잃고 마을에서 쫓겨났다.

가난하다고 말하지 말라.
나는 들쥐를 잡아먹으며 연명했고,
목숨을 건 전쟁이 내 직업이고 내 일이었다.

작은 나라에서 태어났다고 말하지 말라.
그림자 말고는 친구도 없고 병사로만 10만.
백성은 어린애, 노인까지 합쳐 2백만도 되지 않았다.

배운게 없다고 힘이 없다고 탓하지 말라.
나는 내 이름도 쓸 줄 몰랐으나
남의 말에 귀 기울이면서 현명해지는 법을 배웠다.

너무 막막하다고, 그래서 포기해야겠다고 말하지 말라.

나는 목에 칼을 쓰고도 탈출했고,
뺨에 화살을 맞고 죽었다 살아나기도 했다.

적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었다.
나는 내게 거추장스러운 것은 깡그리 쓸어버렸다.

나를 극복하는 그순간 나는 징기스칸이 되었다.

 

  징기스칸의 전략에 관한 분석


1995년 말에 미국 워싱턴 포스트지는 세계사에서 지난 1천년간 가장 중요한 인물로 징기스칸을 꼽았다. 현대에 이르러서야 징기스칸이 단순한 정복자가 아님이 알려지고 있는 실정이다.

본 연구는 징기스칸의 전략에 관한 분석 4회연재중 4회째로 징기스칸이 참여한 주요 전투 중 서하(西夏)지역 전투에 관한 내용이다.


당시 몽골은 문자가 없었다. 그래서 징기스칸은 글을 몰랐다. 따라서 징기스칸의 기록은 위 구르(Ug-urs), 중국, 페르시아, 아르메니아 등의 역사 문서와 유럽인 여행자들의 기록에 드문드문 기재되어 있었다. 이렇게 기록을 남긴 사람들은 모두 징키스칸의 반대편 사람들이어서 징기스칸을 침략자로 보고 기록하여 살육과 약탈을 일삼는 잔인한 정복자로 기록에 남기고 있다.



서하지역(西夏地城) 전투와 징기스칸의 유언

1219년 징기스칸이 호라즘정벌에 나설 때 서하왕에게 원병 차출을 요청했으나 서하왕은 몽골을 지극히 싫어한 나머지 이를 거절했다. 그래서 이를 응징하기 위해 서기 1226년에 징기스칸은 서하(西夏, 탕구트)로 침입했다. 침입도중에 한가 한 틈을 타서 비탈진 산에서 사냥을 하다가 낙마하여 크게 다쳤다. 토룬 체르비가 원정을 연기하자고 건의했으나 징기스칸에 의해 거절되었다. 징기스칸이 서하왕에게 최후 통첩을 보냈으나 서하의 대신 아샤감부는 도발 책임을 한 몸에 지고 징기스칸에게 도전했다. 몽골군은 1226년 3월 에친 고르에서 서하로 쳐들어가 감주(甘州 : 지금 酒泉)을 점령하고 여름 주둔지를 산위에 설치하여 쉬고 가을에 동쪽으로 나아가 양주(凉州)를 점령했다. 서하의 대신 아샤감부군을 아랴산산맥에서 격파하고 서하인을 닥치는대로 마음대로 처치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이때 야율초재는 비옥한 땅과 솜씨있는 주민들의 가치를 역설하고 주민을 보호하여 세금을 부과한다면 파괴하여 살육하는 것 보다 훨씬 이익이라는 것을 설명했다. 징기스칸은 야율초재로 하여금 규칙적인 행정을 취하도록 조치했다.

한편 오고타이는 무장 차간을 사령관으로 하여 1226년에 금나라로 진입하여 금의 기병을 제압하고 위수(渭水)를 따라 서안(西安)까지 이르러 변경을 향해 진격했다. 그러자 겁을 먹은 금제(金帝)는 사신을 보내 화의를 청하여 1226년에 화의가 성립되었다. 이후 징기스칸은 서하(西夏)만 공략할 때 우려되는 배후위협을 제거했다.

징기스칸은 몸이 계속 쇠퇴했지만 서하 정벌을 재촉했다. 1226년 11월에 영주(靈州 : 연대기에 도루메게이로 표시된 도시)를 공격하여 서하의 원군을 평원에서 격파하고 12월에 영주를 점령했다. 징기스칸의 보조군은 수도 영하(寧夏 : 지금의 銀川)를 포위했다. 징기스칸은 주력군을 이끌고 하주(荷州 : 蘭州 서남쪽 100킬로 되는 지역)를 공략했다. 그리고 3월에 서영(西寧)을 함락했다. 4월에 육반산(六盤山)으로 병력을 이동했다. 그리고 여름 더위를 피했다. 서하왕 이현(李晛)은 화의를 청했으나 거절되고 서하왕의 처형은 토룬 체르비에게 명령이 떨어졌다. 결국 영하성은 함락되고 서하왕 이현(李晛)은 항복했다. 그래서 서하는 망하고 말았다. 1227년 2월 장남 주치는 아랄해 북쪽 영지에서 병사했다. 징기스칸이 서하를 점령한 이유는 배반에 대한 응징의 성격을 띄고 있지만 금국의 서쪽을 노출시켜 차후 금정벌을 유리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서하를 항복받은 후 징기스칸은 더위를 피하여 육반산(六盤山)에 머물며 재발한 병을 조리했다.

징기스칸은 중병으로 사망하기 전 금나라를 멸망시키지 못하고 죽는데 대한 아쉬움을 남기면서 아들 오고타아와 투루이 및 제장을 모아놓고 금나라를 점령하는 방안을 유언하고 병사했다. 유언내용은 다음과 같다.

“금은 정예군을 동관(潼關 : 陝西 山西, 河南 三省의 요충지)에 배치하여 남으로 연산(連山)을 방패로 하고 북으로 황하를 장애물로 하고 있어 쉽게 격파할 수가 없다. 그러나 그것을 공략할 방안이 없는 것은 아니다. 송(宋)과 금(金)은 앙숙간이다. 송나라에게 길을 빌리면 송은 길을 빌려 줄 것이고 이 길을 따라 남쪽에서 변경을 급습하면 금은 동관에 있는 정예 주력을 구원차 변경으로 보낼 것이다. 그러나 동관에서 변경까지 길은 멀어서 인마(人馬)는 지쳐 태반을 상실할 것이므로 쉽게 깨뜨릴 수 있으리라. 그것을 알면서 공격하지 못하는 것이 애통하다.”

징기스칸은 서기 1227년 8월 18일 감숙(甘肅)의 야영지에서 66세(일설에 73세)로 생애를 마쳤다. 서기 1232년 뒤를 이은 징기스칸의 셋째 아들 오고타이칸은 금나라를 정벌하기 위해 대군을 일으켰다. 오고타이칸은 산서(山西) 방면에서 남하하여 황하를 건너 변경으로 진격하고, 송나라와 제휴를 요청하고 금을 멸망시키면 황하 이남을 송나라에 넘겨주기로 약속했다. 이때 송조정에서는 조범(趙范)한 사람만 반대하고 모두 찬성하였다. 오고타이칸의 동생 투루이는 동관 서남쪽을 돌아 남송(南宋) 영토를 지나 하남성(河南省) 남단에서 출발하여 남쪽에서부터 금의 수도 변경을 육박하였다. 이때 변경 포위전의 사령관은 수부타이(Subtai : 速不台)였다. 그러나 변경성은 북송 때부터 수도여서 외호(外壕)와 내호(內壕)로 둘러싸여 견고했다. 금군(金軍) 6만명이 성벽에서 일제히 화살을 쏘고 신무기인 진천뢰(震天雷)를 폭발시켜 몽골군을 놀라게 하였다. 3개월간의 공방전에 성내 무기, 식량이 떨어지고 여름철이라 장티푸스가 만연하여 금제 애종은 변경성을 탈출하게 되었고, 뒤이어 1234년에 금의 수도 변경은 함락되고 말았다. 이 전투는 징기스칸의 유언이 그대로 적중한 전투였다.


징기스칸의 전투 결과 분석

지금까지 징기스칸이 지휘한 전투를 중점적으로 훑어보았다. 여기서 각 전투에서 징기스칸이 조치한 주요 내용을 나열해 보면 다음과 같다.

중도전투

1) 금나라를 침입하기 전에 장성 가까이 있는 옹구트족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고 요나라 사람들이 귀순해 오자 그들의 정보를 최대로 활용하였다.

2) 중도 전투에서 변보외장성을 점령하여 금나라를 쉽게 공격할 수 있는 거점을 마련했으나 몽골군은 기마병 이여서 요새를 수비하는 데는 부적합하고 마초를 구하기 어려운 겨울 철수해 버렸다.

3) 징기스칸이 부상당하여 철수하면서도 요동 지역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그 지역의 거란인이 귀순해 오자 제베로 하여금 탈취하게 하여 동쪽의 위협을 제거했다.

4) 금군은 장성과 요새 진지에서 수비함으로 측면을 우회하여 후방을 교란시켰다.

5) 중도를 포위하여 성을 넘기 힘들자, 하북지역을 소탕 및 약탈을 하여 금제로 하여금 항복하도록 유도했다.

6) 중도 고립되었으나 몽골군이 사상자 많을 것을 우려하여 선득 금제의 화의를 받아 들였다.

호라즘 전투

1) 먼저 호라즘을 침입하기 전에 호라즘을 가까이 있는 터키계 아루스란왕, 카루루크왕, 위구르왕 바르추크, 그리고 아루마리크왕 수크나크 데긴을 자기편으로 끌어 들여 종군하도록 했다.

2) 4개군 1개 별동대로 시르 따리아강 전면을 동시에 공격하면서 징기스칸 자신은 전투가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는 시르 따리아강을 도하하여 현지 주민의 안내를 받아 부하라 및 사마르칸트성을 배후 공격하여 적을 혼란에 빠뜨린 후 공격했다.

3) 공성을 할 때 적지역의 포로들을 동원하여 헤자를 메우거나 공성장비를 이동시키도록 하였으며 심지어 최전선에서 적이 자기 백성들과 싸우도록 하여 적의 전의를 감소시키도록 했다.

4) 이슬람교장로, 성직자, 법률박사, 법관 등 수천명에 대해 보호령을 내리고 엄중히 지켰다. 그래서 그 지역 통치에 활용했다. 그리고 기술자는 절대로 죽이지 않고 살려주고 활용하도록 했다.

5) 징기스칸은 4개군 1개 별동대가 최종적으로 사마르칸트에 합류하도록 하는 전장내 집중하는 전략을 호라즘 전투에 사용하였다.

6) 전투에 완전히 승리하자 그 여세를 몰아 4개 군으로 편성하여 제베, 수부 타이군은 무하메드를 추적하도록 하고 주치, 차가타이, 오코타이군은 호라즘 잔여 지역을 소탕하게 하고 투루이는 무하메드 아들이 준동하는 호라산을 소탕하도록 하여 전무후무한 전과 확대를 하였다.

7) 전과 확대 기간 중에 잠제도(역마제도)를 활용하여 징기스칸은 예하 부대의 이동 사항을 파악하고 있었다.

파르완과 인더스 강변 전투

1) 파르완전투 지역을 둘러보고 시키 쿠두크에게 전투 지역 선정이 잘못되었음을 지적한 것을 보면 징기스칸이 전투시 지형 지물을 잘 활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2) 징기스칸은 孫子兵法에 나오는 攻其無備 出其不意 戰法을 최대로 활용했다. 그래서 자랄 웃딘을 추격할 때 밤낮 가리지 않고 급히 추격하여 적이 예상하지 않는 시기와 장소에서 적을 급습했다.

2) 적을 포위할 때도 적이 한 곳에 집중하여 돌파할 것에 대비하여 전열을 여러 겹으로 하여 포위망을 좁혀 나아갔다.

3) 파르완과 인더스강변 전투는 징기스칸의 작전과 전술이 얼마나 집요했는가를 보여주는 전투였다.

西夏(탕구트) 전투

1) 징기스칸은 배반자는 철저히 응징을 한다는 것을 보여 준 전투가 서하정벌이다. 그는 아픈 몸을 이끌고 서하정벌에 나서서 자기각 죽은 후에 서하왕을 죽이는 임무를 사랑하는 부하에게 맡겼다.

2) 서하공격도 바로 수도록 진겨가지 않고 금나라와 서하 국경 지대로 우회하여 공격하였다.

3) 임종하면서 아들에게 금나라의 수도 변경을 송나라 영토를 빌리어서 우회하여 배후에서 공격하도록 유언하였다. 그는 우회 기동 배후 기습 공격의 귀재였다고 할 수 있다.

전투 외의 행동

1) 징기스칸은 모든 신들을 존중했다. 최초 금나라를 공격하기 전에 불칸산에서 천신에게 제사를 지냈으며, 호라즘 점령후 이맘(이슬람 승려)이 경전을 설교하도록 했다. 장춘(長春) 도인을 사마르칸트에 초청하여 도교 진리를 들었다. 징기스칸은 그 지역의 종교를 존경하여 종교의 자유를 주었다.

2) 배반과 강탈은 철저히 응징했다. 오트라르 성주가 강탈했기 때문에 서정(西征)길에 올랐고 서하가 서정에 협조하지 않았으므로 서하를 멸망시켰다.

3) 징기스칸은 글을 몰랐다. 위구르인 타타퉁가로부터 문자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문자를 사용하도록 하여 종전 말로만 하던 작전 지시를 문자를 사용하여 전달하도록 했다. 마후무드 야라와치와 마수우드 야?라와치 부자가 우르겐지에서 징기스칸을 만나 도시인이 정복자에게 주는 이익이 무엇인가를 설명하고 도시를 파괴하기 보다 행정법으로 다스리면 정복자에게 큰 이익이 됨을 설명했다. 징기스칸은 그들의 말을 받아 들였다. 그들에게 그 방법을 실천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서하정벌시 야율초재는 비옥한 땅과 일하는 주민들의 가치를 역설하고 주민을 보호하여 세금을 부과한다면 파괴하여 살육하는 것 보다 훨씬 이익이라는 것을 설명하자 징기스칸은 곧 규칙적인 행정을 취하도록 조치했다.

4) 징기스칸은 부하들이 전리품을 착복하거나 잘못을 저지를 때도 화를 냈을 뿐이고 절대로 죽이지 않았다. 그리고 전과를 올리면 곧 상을 주고 직위를 올려 주었다. 징기스칸은 부하를 의심하여 죽이느 일은 절대로 하지 않았다.

5) 정복 지역의 기술자를 살려 주고 우대하여 기술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었다. 그래서 금나라 정벌이 공성법과 수공법을 배우고 호라즘 공격시 공성기, 투석 제작 그리고 항아리에 석유를 넣어 던지는 법을 배워 활용했다.

6) 징기스칸은 기예와 기능이 뛰어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기 좋아했다. 세우델이 몽골 역사를 잘 암기하여 이야기를 했고 토크투아는 세우델의 이야기를 요약하여 노래했다. 야률초제는 천문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는 여러 지식인의 이야기를 듣는 것으로 독서를 대신했다.

7) 징기스칸은 그 지역의 지식인을 존중하고 종족에 상관하지 않고 능력에 따라 등용했다. 심지여 전쟁에까지 그 지역 사람을 동원하여 싸우도록 했다. 특히 상인들을 보호하여 이슬람 상인들은 징기스칸을 도왔다. 실제 서아시아 정보는 상인들로부터 얻은 것이 많았다.

결 론

징기스칸은 기마병(騎馬兵)의 기동성을 이용한 전략적(戰略的), 전술적(戰術的)부대 기동(部隊機動)을 완전히 터득하고 있었으며 이러한 부대를 우회 기동으로 적을 각개 격파하여 적의 병력이 집중할 틈을 주지 않고 전장(戰場)에서의 집결(集結)하여 특정 시기에 특정 장소에서 전력의 우위를 확보했다. 그래서 몽골군은 호라즘전투에서 광정면 기동을 하여 예약된 시기와 장소에 합류했다. 전과 확대를 위해 다시 흩어졌다.

징기스칸은 기동의 이점을 살려 적의 주력이 있는 곳을 우회하여 적의 배후를 공격했다. 그래서 적이 혼란하여 어떤 조치를 취할 틈을 주지 않고 포위 공격하여 섬멸했다. 금나라 공격시 징기스칸은 제베로 하여금 거용관을 배후에서 고역하게 하였으며, 부하라와 사마르칸트도 배후에 갑자기 나타나 적의 허를 찌를 전투였다. 그래서 전략가 리델 하트는 몽골군은 배후 공격을 개척했다고 주장했다.

징기스칸은 몽골군의 광범위한 첩보 조직을 사용하여 철저하게 준비했다. 이 제도는 잠제도로 발전하여 적정보 뿐아니라 자기 부대의 상황을 소상하게 알고 지휘하였다. 다시말 하면 13세기형 Internet 정보망을 활용하였다고 할 수 있다. 첩보 조직은 효과적인 정보를 징기스칸에게 제공하는 한편 적 국민들에게 몽골군의 우수성을 선전했기 때문에 몽골군이 접근하기 전에 이미 공포에 질려 있었다.

징기스칸은 사전에 기동할 지역에 대한 정보를 충분히 입수한 후에 통상 3개 종대 대형으로 신속하게 목표 지점으로 진격하되 서로 연락을 취하도록 하여 종대 측면의 안전을 유지하도록 했다. 이러한 신속한 3열 종대형 기동은 적 배후를 찌르는 효과를 얻어 순식간에 적을 무력화하였다.

또한 징기스칸은 몽골군이 기병전에는 능하난 공성전, 보병전, 또는 요새전에 취약함을 알고 현지에서 능력있는 기술자를 우대하여 사용했다. 그는 언제나 새로운 지역에서 기술자를 우대하고 기술자는 죽이지 않고 포로로하여 본국으로 보내거나 현지에서 활용했다. 그러므로 새로운 지역에 적합한 새로운 전술과 무기를 신속하게 배워 활용하였다.

징기스칸은 대상(隊商, 상인)들을 보호하여 오늘날과 같은 유통 체제를 활성화 하도록 했다. 그래서 몽골군이 가는데는 항시 상인들이 들끓었고 몽골군은 그들로부터 많은 정보를 얻었다. 예를 들어 제베와 수부타이가 러시아에 침공하여 러시아연합군을 무찌른 후 크리미아반도에 들어가 제노아상인을 접견한 사실을 참고한다면 징기스칸이 얼마나 상인들을 보호했는가를 알 수 있다.

징기스칸은 글자를 읽을 수 없었으나 현명한 사람들의 말을 경청하고 바른 판단을 내렸다. 점령지역의 지도자들을 우대하고 그들의 신분을 보호해 주고 그 지역의 종교 활동을 존중해 주었다. 부하라에서는 코란경전에 대해 설명하도록 하여 경청했다. 중국의 도교 철인 장춘(張春)의 말을 경청했다. 야라와치 부자와 야율초재가 파괴보다 행정으로 다스리느 것이 이득이라는 것을 설명하자 바로 그렇게 하도록 조치했다. 그는 결심권자로서 뛰어난 판단력을 지니고 있었다.

징기스칸은 거란인 야율야해에게 공로를 인정하여 만호(뒤에 요왕으로 임명)를 부여했고, 중도전투에서 야율초재를 등용하여 행정을 담당하도록 했다. 페르시아인 알라와디(阿刺 而思) 에게는 재정업무를 맡겼다. 그가 점령지를 지배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지역에 귀순한 우수한 인재는 발탁하여 활용할 줄 아는 혜안(慧眼)이 있었기 때문이였다.

후세 사람들은 징기스칸이 큰 야심을 지닌 대정복자라고 하지만 실제 징기스칸은 어려서부터 생존하기 위해 현실에 적응해나가는 소양을 터득하고 이를 발전시켜 나아갔다. 몽골 통일후 금나라가 부당하게 조공을 요청하자 금정벌에 나섰고 여기서 중국의 보병전과 요새전을 터득하고 무카리로 하여금 중국의 병법을 배우도록 했다. 오트라르성주가 대상을 죽이고 사신에 대해 무례한 행위를 하자 호라즘국을 침입했고 이 나라를 정복하자 즉각 전과 확대를 하였다. 이때 역시 현지인을 최대로 활용하였다. 서하왕 이현이 배반하자 서하를 공격하다가 몸을 다쳐 죽음에 이르렀다는 사실을 알고도 서하정벌 계속했다. 그는 서하왕의 배신을 철저히 응징하는 반면에 금나라를 정벌하는 원대한 계획을 실천하면서 죽음을 현실로 받아들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면에서 징기스칸은 현실에 적응하는 탁월한 능력을 지닌 철저한 현실주의 적인 인물이였다. 그래서 현실에 잘 적응하기 위해 몽골인의 부족함을 다른 인종의 우수한 사람을 발탁하여 우대하고 그들의 조언을 듣고 현명한 판단을 하였다. 일찍이 노자(老子)는 “남을 아는 자는 똑똑하다 하고(知人者 智) 자기를 아는 자는 현명하다고 한다(自知者 明)”라고 했는데, 징기스칸은 자기와 자기 만족의 부족함을 알고 다른 민족의 지식을 잘 활용할 줄 아는 명실상부(名實相符)한 지장(智將)임과 동시에 명장(明將 : 현명한 장군)이었다.

 

 

               카페'사랑산'에서 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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