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꽃에게 길을 묻다(산문집)
저자 : 글, 사진-조용호
출판사 : 생각의 나무
출판일 : 2006
*산수유꽃 진 자리
-나태주-
사랑한다, 나는 사랑하는 사람을 가졌다.
누구에겐가 말해주긴 해야 했는데
마음 놓고 말해줄 사람 없어
산수유꽃 진 옆에 와 무심히 중얼거린 소리
노랗게 핀 산수요꽃이 외워두었다가
따사로운 햇빛한테 들려주고
놀러온 산새에게 들려주고
시냇물 소리한테까지 들려주어
사랑한다,나는 사랑하는 사람을 가졌다
차마 이름까진 말해줄 수 없어 이름만 빼고
알려준 나의 말
여름 한 철 시냇물이 줄창 외우며 흘러가더니
이제 가을도 저물어 시냇물 소리도 입을 다물고
다만 산수유꽃 진 자리 산수유 열매들만
내리는 눈발 속에 더욱 예쁘고 붉습니다
*나리 나리 개나리
-기형도-
누이여
또 다시 운비늘 더미를 일으켜 세우며
시간이 빠르게 이동하였다
어느 날의 잔잔한 어둠이
이파리 하나 피우지 못한 너의 생애를
소리없이 꺽어갔던 그 투명한
나리 나리 개나리
네가 두드릴 곳 하나 없는 거리
봄은 또 다시 접혔던 꽃술을 펴고
찬물로 눈을 헹구며 유령처럼 나는 꽃을 꺽는다.
*개나리
-김사인-
한 번은 보았던 듯도 하다
황홀하게 자지라드는
저 현기증과 아우성 소리
내 목숨 샛노란 병아리 떼 되어 순결한 입술로 짹짹거릴 때
그 때 쯤 한 번은
우리 만났던 듯도 해라
몇 날 몇 밤을 그대
눈 흡떠 기다렸을 것이나
어쩔거나
그리운 얼굴 보이지 않으니
4월 하늘
현기증 나는 비수로다
그대 아뜩한 절망의 유혹을 이기고
내가 가리
*기억을 향하여 봄이 왔다
(..........)
봄은 살아 있지 않은 것은 묻지 않는다.
떠다니는 내 기억의 얼음장마다
부르지 않아도 뜨거운 안개가 쌓일 뿐이다.
잠글 수 없는 것이 어디 시간 뿐이랴
아아, 하나의 작은 죽음이 얼마나 큰 죽음들을 거느리는가
*무어래요
-정지용-
한길로만 오시다
한 고개 넘어 우리집
앞문으로 오시지는 말고
뒤 ㅅ 동산 새이 ㅅ 길로 오십쇼
늦은 봄날
복사꽃 연분홍 이슬비가 나리시거든
뒤 ㅅ 동산 새이 ㅅ길로 오십쇼
바람 피해 오시는 이처럼 들레시면
누가 무어래요?
*봄
-서정주-
복사꽃 피고, 복사꽃 지고, 뱀이 눈 뜨고
초록제비 무처오는 하늬바람 우에 혼령있는
하눌이여, 피가 잘 도라....이무 병病도
없으면 가시내야, 슬픈일좀 슬픈일좀, 있어야겠다.
*이별의 날에
-오세영-
이제 붙들지 않으란다
더는 복사꽃처럼 져서
네 뺨을 적시던 눈물의 흔적처럼
고운 아지랑이 되어 푸른 하늘을 어른거려도 좋다.
*자운영꽃
-나태주-
잃어버린 옛날이야기가
모두 여기 와 꽃으로 피었을 줄이야,
자운영 꽃밭에 누워 있는 너를 보았다.
너는 하오의 햇빛이 눈부신지 눈을 질끈 감고
팔베개를 한 채 길게 누워 있었다.
자운영꽃들이 바람에 흔들리면서 너의 얼굴을 간질였다.
작은 벌들이 귓전에서 쉼 없이 잉잉-거렸다
벌이 콧등에 내려앉아도 너는 눈을 잠시 찡그렸을 뿐이다.
언젠가 교황의 장례미사에서 보았던 것처럼 꽃들에 둘러싸여 누워 있는 너는
평화로운 주검 같았다.
하오의 자운영 꽃밭에서라면 살아서 미리 맛보는 죽음도 그리 막막하지는 않을 것이다.
*해당화
-한용운-
당신은 해당화 피기 전에 오신다고 하였습니다
봄은 벌써 늦었습니다
봄이 오기 전에는 어서 오기를 바랐더니
봄이 오고 보니 너무 일찍 왔나 두려워합니다
철모르는 아이들은 뒷동산에 해당화가 피었다고 다투어 말하기로
듣고도 뭇 들은 채하였더니
야속한 봄바람은 나는 꽃을 불어서 경대 위에 놓입니다 그려
시름없이 꽃을 주워서 입술에 대고 '너는 언제 피었니'하고 물었습니다
꽃은 말도 없이 나의 눈물에 비쳐서 둘도 되고 셋도 됩니다.
*해당화 심던 날
-김종해-
해당화는 흰 치마를 입고 왔다
남양주에서 온 그 여자
한 때 바다와 동거했던 그 여자
가녀린 발목에 모래가 묻어 있고
달빛을 업고 서 있는 여자
알 몸이 눈부시다
서오릉 언덕 아래
해당화를 심은 날 밤
밤새도록 파도 소리 들리고
내 발목에도 모래가 묻어 있다
*국화가 '돌아 와 거울 앞에 선 늙은 누님' 이라면 해당화는 추억 속 어린 누님 같은 꽃이다.
어두워질수록 더 진하게 날아 오는 해당화향은 누님 냄새를 닮았고, 연분홍 꽃잎안에 가득 담긴 짙고 선명한 노란 수술은
누림의 굵은 눈물방울 같다.
해당화 누님은 인당수를 바라보며 하냥 흔들리는 중이다.
*홀로가 아니랍니다
-오세영-
홀로라니요
울 밑의 작약이
겨우내 언 흙을 밀치고 뾰족이
새움울 틔울 때
거기서 당신의 부드러운 손길을 보았는데요
(.........)
하늘이 이렇게 푸르른 날
내 어찌 당신 없이 홀로
이 세상을 살아갈 수가 있겠습니까
*'치자꽃 설화'
-박규리-
사랑하는 사람을 달래 보내고
돌아서 돌계단을 오르는 스님 눈가에
설운 눈물방울 쓸쓸히 피는 것을
종탑 뒤에 몰래 숨어 보고야 말았습니다.
아무도 없는 법당문 하나만 열어놓고
기도하는 소리가 빗물에 우는 듯 들렸습니다.
밀어내던 가슴은 못이 되어 오히려
제 가슴을 아프게 뚫는 것인지
목탁 소리만 저 홀로 바닥을 뒹굴다
끊어질 듯 이어지곤 하였습니다.
여자는 돌계단 밑 치자꽃 아래
한참을 앉았다 일어서더니
오늘따라 엷은 가랑비 오는 소리와 짝을 찾는 쑥국새 울음소리 가득한 산길을 휘청이며 떠내려가는 것이였습니다.
나는 멀어지는 여자의 젖은 어깨를 보며 사랑하는 일이야말로 가장 어려운 일인 줄 알 것 같았습니다.
한 번도 사랑받지 못한 사람이야말로 가장 가난한 줄도 알 것 같았습니다.
떠난 사람보다 더 섧게만 보이는 잿빛 등도 나는 괜시리 내가 버림받는 여자가 되어 버릴수록 더 깊어지는 산길에 하염없이 앉았습니다.
*꽃 지는 날
-안도현-
뜰 안에 석류꽃이 마구 뚝뚝지는 날
떨어진 꽃이 아까워 몇 개 주워 들었더니
꽃이 그냥 지는 즐 아나?
지는 꽃이 있어야 피는 꽃도 있는게지
지는 꽃 때문에 석류 알이 굵어지는 거 모르나?
어머니, 지는 꽃 어머니가 나 안쓰럽다는 듯 바라보시고,
그나저나 너는 돈 벌 생각은 않고 꽃 지는거만 하루종일 바라보나?
어머니 꽃 지는 날은 꽃 바라보는 게 돈 버는 거지요
석류알만 한 불알 두 쪽 차고 앉아 나, 건들거리고
*구절초
"자래 머리에 꽃 꽂았습네다"
영화'웰컴 투 동막골'에서 조금 모자란 여인으로 둥장해 강원도 사투리를 능란하게 구사했던 강혜쩡이 머리에 꽂았던 꽃 이름은?
임하룡이 제정신이 아닌 여자라는 의미로'자래 머리에 꽃 꽂았습네다'라고 했던 그 꽃 말이다.
에두르지 않고 말하자면 이 질문의 정답은'구절초'이다
가을이 시작되면 우리네 산야에 무수히 피어나는 대표적인 가을 꽃이다.
서리가 내리고 가을이 저물면 구절토도 함께 진다.
머리에 꽃을 꽂으면 왜 모자란 사람이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순박하고 청초한 이미지를 위해서라면 강혜정이 꽂은 구절초는 제대로 선택한 꽃이었다.
눈물의 시인 박용래도 구절초를 '머리핀 대신 꽂아도 좋을 사랑'이라고 노래했다.
구절초
-박용래-
누이야 가을이 오는 길목 구절초 매디매디 나부끼는 사랑아
내 고장 부소산 기슭에 지천으로 피는 사랑아
뿌리를 대려서 약으로도 먹던 기억
여학생을 부르면 마아가렜 여름 모자 차양에 숨었든 꽃
단추 구멍에 달아도, 머리핀 대신 꽂아도 좋을 사랑아
여우가 우는 秋分 도깨비불이 스러진 자리에 피는 사랑아
누이야 가을이 오는 길목 매디매디 눈물 비친 사랑아
*내가 사랑하는 당신은
-도종환-
저녁 숲에 내리는 황금빛 노을이기보다는
구름 사이에 뜬 별이였으면 좋겠어
내가 사랑하는 당신은
버드나무 실가지 가볍게 딛으며 오르는 만월이기보다는
동짓달 스무날 빈 논길을 쓰다듬는 달빛이였음 싶어.
꽃분에 가꾼 국화의 우아함보다는
해가 뜨고 지는 일에 고개를 끄덕일 줄 아는 구절초이었음 해.
*구절초
_유안진-
들꽃처럼 나는
욕심없이 살지만
그리움이 많아서
한이 깊은 여자
서리 걷힌 아침나절
풀밭에 서면
가사장삼입은
비구니의 행렬
그 틈에 끼어 든
나는
구절초
다사로운 오늘 별은
聖者의 미소
'유안진 시인은 구절초에서 비구니의 이미지를 보았다.
그리움과 한을 꼭꼭 가슴 밑바닥에 눌러 숨기고,
사바세계의 헛된 번뇌를 모두 끊어 생의 궁극을 찾기 위해 산야를 만행하는 여승의 이미지를 보았다.
하늘의 뜬 별이 성자의 미소를 띠고 그 비구니들을 다사롭게 굽어 본다.
*유월의 작약은
너무 붉어, 치정이다.
남해도 외딴 바닷가 달콤한 치자꽃은
당신이 날 버리고 다른 사람을 사랑한다면
내 사랑 죽어버릴 거라고 몸을 흔든다
2007.7.4.
'讀 > 지혜로울讀' 카테고리의 다른 글
中國에는 왜 갔어? (0) | 2010.01.30 |
---|---|
노름 마치 (0) | 2010.01.30 |
별을 보여 드립니다 . 눈길 (0) | 2010.01.30 |
꽃담 (0) | 2010.01.30 |
쉽고 뜻깊은 불교 이야기 (0) | 2010.01.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