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나키즘의 도덕
1
인류의 사상사는 한번 요동하는데 수세기를 요하는 진자(侲子)의 요동을 연상케 한다. 장기간의 수면기를 지난 후에 각성의 기간이 오는 것이다. 그때 사상은 당국자―즉 지배자, 입법자, 승려―들이 세심히 주의하여 사상을 속박하여 놓았던 사슬로부터 자신을 해방하는 것이다.
사상은 사슬을 끊어 부순다. 사상은 지금까지 자기를 잘 익혀 오던 모든 것에 대하여 통렬한 비판을 가하고 자기를 양육하여 준 종교적 정치적 법률적 편견이 공허하다는 것을 폭로한다. 그래서 새로운 길을 찾아나갈 연구로 출발한다. 그 신발견을 가지고 우리들의 지식을 풍부하게 하고 새로운 과학을 창조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상의 적년(積年)의 적―지배자, 입법자, 승려―은 졸지의 그들의 패배로부터 회복한다. 그들은 점차 그들의 허물어진 힘을 다시 집결하여 새로운 요구에 그들을 적합시키도록 그들의 신앙과 법전을 개작(改作)하고 다음에 그들이 대단히 유효하게 교양해 오던 사상과 성격의 노예성을 이용하고 또 사회의 일시적 혼란도 이용하고 다시 어떤 사람들의 나태와 기타의 탐욕과 그리고 많은 사람들의 최대의 희망을 이용하여 저 자들은 먼저 교육에 의하여 아동들을 잡고 파고 들어가서 슬금슬금 저희들의 일을 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아동의 의지는 연약한 것이다. 그들을 위협하거나 유혹하기는 대단히 용이하다. 그들(지배자, 입법자, 승려)은 그것을 실행한다. 그들은 아동을 아주 겁쟁이로 만들어 놓고 그 다음에는 지옥의 고민상(苦憫狀)의 무서운 이야기를 해서 들려준다. 그들은 벌을 받은 사람들의 고뇌와 용서할 줄을 모르는 신의 복수를 아동들 앞에서 가장 당연한 일처럼 허풍을 치며 늘어놓는다. 그리고 그 다음 순간에 그들은 아동으로 하여금 ‘질서의 벗’답게 만들기 위하여 형벌과 고문의 무서움을 지껄여가면서 어떤 혁명가의 폭동의 경우를 실증으로 내세우기도 한다. 승려는 아동으로 하여금 법률관념에 습관이 들도록 하고, 그 ‘신의 율법’이라고 불려지는 것에 대하여 무엇보다 더 잘 복종하도록 시킨다. 또 법률가는 국가의 법률을 잘 준수하도록 신의 율법을 늘어놓아 이야기한다.
그리하여 우리들은 굴종의 습관이라고 하는 것을 말로는 익히 잘 알고 있다고 하지마는 노예적이면서 동시에 강권적인 종교적 성벽(性癖)은 이 굴종의 습관에 의하여 다음 세대 사람들의 사상이 보수(保守)하고 지지(支持)하여 가는 것이다. 노예적이며 동시에 강권적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이 양자가 항상 서로 제휴하고 있는 까닭이다.
이러한 수면기의 막간에는 도덕과 같은 것은 아주 논의도 되지 않는다. 종교적 제의와 법률적 위선이 대용으로 된다. 민중은 비판도 하지 않는다. 그들은 다만 무의식적으로 그저 습관과 무관심에 끌려간다. 그들은 기성의 도덕에 대하여는 이것을 옹호하는 일도 이것을 반대하는 일도 조금도 괘념(掛念)하지 않는다. 그들은 다만 그들의 행동이 자기들의 직업과 일치하게 되도록 외관을 장식하기에만 열중하고 있다. 이와 같이 하여 사회의 도덕적 평면은 점차로 저하하여 가는 것이다. 사람들은 퇴폐기의 로마의 도덕이나 구제도의 도덕이나 혹은 중산계급 우월기의 종말의 도덕에 도달하는 것이다.
모든 인간에 있어서 선하다, 위대하다, 관용하다, 혹은 독립적이라고 하는 것은 대개 조금씩 곰팡이가 피어서 내버려둔 주머니칼 모양으로 동녹이 쓸고 만다. 허위가 덕행으로 되고 평범이 의무로 되어진다. 자기를 부유하게 하고 자기의 기회를 붙잡아 가지고 사물의 여하를 막론하고 자기의 지혜와 열심과 정력을 다한다고 하는 것이 부유계급의 표어가 되어 있다. 다음에 지배계급과 법관, 승려와 좀 유복한 계급의 타락이 격심하여 짐에 따라 사람들의 반항을 환기하게 되어 마침내 진자(侲子)는 다른 방향으로 동요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점차 청년은 자기를 해방한다. 그들은 그 편견을 내던져버리고 비판을 하기 시작한다. 사상은 최초 소수자들 사이에 어렴풋이 눈이 떠지는 것이다. 그러나 부지불식간에 각성은 대다수에까지 파급되어 간다. 이와 같이 하여 충동은 일어나지고 반항과 혁명이 이에 따라 일어나는 것이다.
그래서 그때마다 도덕의 문제가 재연된다. “어째서 나는 이 위선적 도덕의 원리에 따르지 않으면 아니 되는가?”하고 종교적 공포로부터 해방된 두뇌는 스스로 묻게 되는 것이다. “어째서 도덕이라는 것은 의무로서 속박하지 않으면 아니 되는가?”
다음에 민중은 모든 기회에서 봉착하지만 그들 자신으로는 설명하지 못하고 남아 있는 도덕적 감정에 대하여 생각해보기 시작한다. 그래서 그들은 도덕이 인간성에 한하여서만 있는 특권이라고 믿고 있는 한, 즉 그들이 그들을 이해하기 위하여 동물이나 식물이나 암석에 이르기까지 더듬어 가보지 않는 한에는, 그들은 도덕을 설명할 수는 결코 없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그 해답을 그 시대의 과학에 추구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에 우리가 감히 말할 수 있다면 전통적 도덕이라고 할까, 아니 차라리 도덕의 본거(本據) 그것을 봉쇄하고 있는 위선의 근저가 동요할 것 같으면 동요할수록 더욱 더욱 사회의 도덕적 평면이 앙양하는 것이다. 그 중에서도 민중이 도덕을 비판하고 부정하고 있을 때 바로 이러한 때야말로 도덕적 감정이 가장 진보하는 것이다. 도덕이 성장하고 앙양되어 정련되는 것은 바로 이때다.
이러한 일이 18세기에 일어났다. 즉 1623년에 이르러 그 저작 『꿀벌 이야기』와 그것에 첨부한 주해를 가지고 영국을 매도한 저명의 작가 맨드빌(Mandeville)은 도덕의 미명하에 알려지고 있는 사회적 위선을 대담하게 공격하였다. 그는 소위 도덕이라는 것이 얼마나 위선적인 가면에 불과하다는 것과 또는 우리가 그 시대의 도덕법전에 의하여 통제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정욕이 얼마나 반대로 이 법전의 통제 그것으로 인하여 오히려 더욱 더 악한 방면으로 나가고 있는가를 교시하였다. 그는 푸리에(Foulier)와 같이 정욕에 대하여 자유의 천지를 주장하였다. 이 자유의 천지가 없이는 정욕은 잔악한 행위로 타락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렇지만 그의 시대에 있어서의 동물학적 지식의 결핍 즉 동물의 도덕을 무시하였던 점에서 그는 자기깐에 유누(遺漏)없이 도덕적 관념의 기원을 양친과 지배계급과의 재미있는 아첨하는 이야기를 가지고 설명하였다.
얼마 후에는 스코틀랜드의 철학자 및 백과전서가들에 의하여 도덕적 관념에 대한 맹렬한 비평이 나오기 시작하게 된 것은 세인의 주지하는 바이다. 또 우리들은 1790년경의 자유사회주의자들의 주장을 기억하고 다시 또 우리들은 법률 준수자들 사이에도 또 애국자들 사이에도 심지어는 “지상존재자(至上存在者)”(신)에 대한 의무나 도덕적 비준에 대하여 현혹하고 있는 쟈코방(Jacobin)당이나 큐이요(Cuyau)와 같이 의무도 도덕적 비준도 일체 부정하는 하바아트(Hebertistes)파의 무신론자들 사이에도 도덕적 정감의 더욱 더 높은 발전이 나타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나는 어째서 도덕적이 아니면 아니 되나?”―이것이 12세기의 유리주의자(唯理主義者)나 16세기의 철학자나 18세기의 철학자와 혁명가들이 직면했던 문제이었다. 그 후대에 와서 이 문제는 영국의 공리주의자 벤담(Bentham)과 밀(Mill)들 사이에 또 뷰히네르(Buchner)와 같은 독일의 유물론자들 사이에 다시 또 1860년으로부터 1917년까지의 러시아의 허무주의자들 사이에 그리고 자유사회주의 윤리학(사회도덕과학)의 유명한 청년창설자―유감스럽게도 너무 일찍이 요절한 큐이요―에게 다시 되돌아온 것이다. 최후로 이것은 금일의 청년 자유사회주의자들이 직면한 문제인 것이다.
아! 좋다!
20년전 러시아 청년들은 이 문제로 인하여 열정적으로 떠들어댄 일이 있었다. 한 젊은 허무주의자1)가 그 친구에게 찾아와서 말하기를 “나는 부도덕한 사람이다” 라고 하면서 그는 그 친구에게 하등의 평온한 생각을 주지 못하던 사상을 행동으로 나타냈다. “나는 부도덕자가 되겠다. 그런데 어째서 부도덕이 되어서는 아니 되는가?” 그것은 성서(聖書)의 의지인 까닭인가. 그러나 성서라고 하는 것은 바빌로니아인이나 헤브라이인의 전통을 모아 놓은 것에 불과한 것이다. 그것뿐 아니라 바스크(Basque)인의 시나 몽고인의 신화를 지금도 아직 수집하고 있지만, 그것과 동일한 것이다. 그러면 나는 동양의 반개인종(半開人種)의 정신상태로 까지 후퇴하지 않으면 아니 되는가?
나는 칸트2)가 지상명령에 대하여 즉 자기 자신이 존재하고 있는 그것의 심저(深底)로부터 나에게 주어져온 그 신비적인 명령에 대하여 말씀하였고 나에게 도덕적이 되라고 경고하였다고 하여서 그 까닭으로 나는 도덕적이 되지 않으면 아니 되는가? 그러나 무슨 까닭으로 이 “지상명령”이 가끔 나에게 술을 마시라고 명령할 수 있는 어떤 다른 명령보다도 큰 권위를 나의 행동상에 미치지 않으면 안 되는가? 이것은 우리의 무지를 은폐하기 위하여 발명되어진 “섭리”라든가 “운명”이라고 말하는 그 어구와 같이 언어 이외의 다른 아무 것도 아닌 어구에 불과한 것이다.
“혹은 하천 독류에 떨어진 지나가던 사람을 구하기 위하여 하천으로 뛰어들어 내가 빠져 죽는 편이 그 사람이 빠져 죽는 것을 내가 보고서 모르는 척하고 있는 것보다 훨씬 행복스럽다”고 나에게 믿도록 설복하는 벤담3) 덕택으로 나는 도덕적이 아니어서는 아니 되는가?
“혹은 또 이와 같이 교육되었기 때문에 나는 도덕적이 아니면 아니 되는가? 나의 모친이 나에게 도덕을 교훈하였던 까닭으로 그대로 하지 않으면 아니 되는가? 그렇다면 우리들의 모친 우리들의 인자하시고 순박하지마는 무식하신 모친이 이와 같은 허풍선이 사례를 얼마든지 교훈하여 주셨다고 말하는 그러한 이유만으로 나는 교회에 거서 무릎을 꿇고 여왕을 찬미하고 재판관 앞에 머리를 수그리는 것일까?”
“나는 편견을 받아가진―그 누구 모양으로 나는 그러한 편견으로부터 자기를 해탈시켜야 하겠다. 가령 부도덕이라고 하는 것이 아주 혐오할 일이라 할지라도 나는 억지로 나 자신을 부도덕으로 나가게 하겠다. 흡사히 내가 어린아이인 것이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유치한 노릇을 하지 않도록 자기로서 억지의 노력을 하던 것과 같이.”
“종교에 의하여 남용되던 무기를 싹둑 꺾어 버리는 것은 부도덕일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감행하겠다. 가령 그것이 도덕이라고 하는 미명이 씌워진 어구의 이름을 가지고 우리의 머리 위에 덮어씌운 위선에 대하여 방어하는 것에 불과한 것이라 할지라도.”
이러한 모양으로 러시아의 청년은 그들이 구세계의 편견과 결연히 손을 끊은 때에 생각하기를 그리고 강권이 얼마나 존경되어져 있다손 치더라도 어떠한 강권의 앞일지라도 무릎을 꿇지 않고 이성에 의하여 확립되어져 있지 않는 한에는 어떠한 원칙일지라도 인정하지 않는 까닭에 이 허무주의 아니 자유사회주의의 기치를 들고나서는 것이었다.
다시 한 마디 더 부과하지 않으면 안될 일이 있다. 그것은 그들의 선조들의 교훈을 쓰레기통 속에 던져버리고 일절 도덕의 체계를 불살라 버린 뒤에 허무주의의 청년들은 그들의 선조가 “복음”이라던가 “양심”이라던가 “지상명령”이라던가 혹은 공리주의자의 “승인된 편익”(L'interet bien Conpels)이라던가 하는 것들의 통제하에 실행하여 온 도덕보다도 무한히 탁월한 도덕적 습관의 핵심을 그들의 한가운데 전개한 것이다. 그러나 “무슨 까닭으로 나는 도덕적이 되지 않으면 아니 되는가?”하는 질문에 대답하기 전에 우리는 이 문제가 여기에서 적당하게 제기되어 있는가 않은가를 고찰하고 인간의 행동의 동기를 분석하여 보자.
2
인간은 각종각양의 방식을 가지고 행동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지도하는 것은 무엇인가 하는 것을 우리의 선조가 설명하려고 할 때에 그들은 대단히 단순한 방식을 가지고 설명하였던 것이다. 오늘날에 와서도 이 설명을 하는데 카톨릭교의 어떠한 우상이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사람이 나서 자기의 길을 자기가 걸어 나가고 있지만 그러나 조금도 느끼는 바가 없이 자기의 왼편 어깨에 악마를 얹어놓고 오른편 어깨에 천사를 메고서 걷고 있다. 악마가 그로 하여금 악을 하라고 독촉할 것 같으면 천사는 그로 하여금 그것을 못하도록 만류하려고 한다. 그래서 만약 천사가 이겨서 그 사람이 덕을 떠나지 않고 나갈 것 같으면 다른 3명의 천사가 그를 떠메고서 천당으로 데려간다. 이 모양으로 무슨 일이나 감탄할 만큼 잘 꾸며대서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이야기를 많이 알고 있는 러시아의 나이 많은 유모들은 애기의 셔츠칼라 단추를 빼지 않고서 어린 애기를 침상에 결코 눕히지 말라 턱밑의 따뜻한 곳에는 호위의 천사가 잘 수 있도록 열어 놓아두지 않으면 아니 된다. 그렇지 않으면 악마는 애기가 자고 있는 틈이라도 애기를 들볶아댈 것이라고 여러분에게 타이를 것이다.
이러한 터무니없는 개념은 지금은 벌써 과거지사가 되어 가고 있다. 그러나 그런 옛 이야기는 없어질는지 모르나 그 근본적 관념은 여전히 존속하고 있다.
상당히 교양을 받고 있는 사람들은 벌써 악마를 믿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의 관념은 유모의 그것에 비하여 그리 많이 합리적으로 되어 있지 못한 까닭에 그들은 철학의 명목을 가지고 채색을 한 학구적 술어하에 악마와 천사를 가장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오늘날에 와서 “악마”라고는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육(肉)”이라던가 “정욕”이라고 말하고 있다. “천사”는 “양심” 또는 “영혼”이라고 하는 말로 바꿔놓아지고 “창조신의 사상의 반영”이라던가 또는 석공이 말하는 것처럼 “대건축사(大建築師)”라고 하는 말로 대용하고 있다. 그러나 인간의 행동은 두 개의 서로 적대하는 요소간의 투쟁의 결과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므로 이들 두 개의 요소 중의 하나―영혼 또는 양심―이 다른 요소―육 또는 정욕―에 대하여 우승하는 정도에 정비례하여 인간은 도덕적이 되는 것이라고 항상 생각해 왔다.
영국의 철학자, 그 후에 백과전서가4)들이 이들 원시적인 관념에 반대하고서 악마도 천사도 인간의 행동에는 하등의 관계가 없는 것이다. 인간의 행위는 선이건 악이건 유용하건 유해하건 간에 모두가 단일한 동기 즉 쾌락의 욕구로부터 발생한 것이라고 주장하기 시작한 때 우리의 증조부들께서 놀랐던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모든 종교적 결사, 그 중에도 바리새5)의 다수 종파들은 “부도덕한”자들이라고 부르짖었다. 그들은 사상가들에게 갖은 욕설을 퍼부었다. 그들은 이 사상가들을 종교의 난적(亂賊)이라고 규정하였다. 그리고 후대 세기가 점점 진전함에 따라 마찬가지 사상이 벤담, 존 스튜어트 밀6), 체르니 체프스키(Tcherny Chevsky)7)와 기타 다수한 사람들에 의하여 재차 채용되었을 때, 또 그들의 사상가가 이기주의, 즉 쾌락에 대한 욕구가 우리 인간의 행동의 참으로 모든 동기가 되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입증하기 시작한 때 저주는 배가하였다. 저자(著者)는 언론억압 모의(謀議)에 의하여 금지되고 저자는 악인으로 취급되었다.
그러나 그들이 주장한 이론으로부터 그래도 더욱 진실한 무엇이 있을 수 있는가?
여기에 어떤 사람이 있어서 어린아이에게서 최후 한 조각의 빵을 탈취하여 먹었다고 하자. 온 세상 사람들은 이 남자녀석은 무서운 이기주의자이며 또 이 남자녀석은 단지 자기애에만 끌리는 욕심쟁이라고 지칭하는데 일치하리라.
그러나 여기에 별개의 한 사람이 또 있어서 그 사람은 온 세상 사람들이 보고서 유덕(有德)한 사람이라고 다들 일치하게 칭찬한다고 하자. 그는 자기의 최후 한 조각의 빵을 기한(飢寒)에 쓰러지는 사람에게 내어주고 헐벗은 사람에게 입히기 위하여 단 한 벌밖에 없는 코트를 벗어주었다고 하자. 그런데 도덕론자들은 그 종교적 망상에 집착하여 즉시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이 사람은 그 이웃에 대한 사랑이 자기부정의 점까지 도달한 것이다. 이 사람은 이기주의자의 그것과는 전연 다른 감정에 끌려가고 있다고 하리라. 그러나 조금 반성하여 볼 것 같으면 우리는 이 양자 행동의 인도(人道)에 대한 결과에는 얼마만한 큰 상위가 있다 할지라도 그 동기는 오히려 동일하다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그 동기는 즉 쾌락의 탐구이다.
만약에 최후 한 매의 셔츠를 벗어준 사람이 그 셔츠를 벗어주는 데서 하등의 쾌락도 느끼지 않았다면 그 사람은 그러한 짓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만약 그 사람이 어린아이로부터 빵을 탈취하는 데에 쾌락을 느꼈다면 그 사람은 그러한 짓을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짓은 실제 그 사람에게는 불쾌천만한 짓이었을 것이다. 그는 주는 데서 쾌락을 느끼는 까닭에 주는 것이다.
만약에 일반이 공통으로 사용하는 의의를 가진 어휘를 새로운 의미로 사용하여서 혼란을 일으키는 불편이 없다고 하면 이 두 가지 경우에 있어서 이 사람들은 이기주의라는 충동하에 행동한 것이라고 말할 수가 있을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상상을 자극하는 형식에서 그것을 표현하는데 의하여 사상을 명석하게 하고 관념을 정확하게 하는 동시에 이들 두 가지 행동은 두 가지 상이한 동기를 가지고 있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신화를 타파하기 위하여 실상은 전술(前述)과 같은 말을 한 것일 것이다. 그들은 쾌락의 추구 또는 그것과 맞먹는 고통의 회피라고 하는 동일한 동기를 갖고 있는 것이다.
가장 잔인한 악당, 즉 35,000인의 파리인을 학살한 지론드당의 한 사람이나 또는 주색에 탐하여 전가족을 몰살한 암살범을 예로 들어보자. 그들은 그 순간 영예 또는 금전에 대한 욕망이 모든 다른 욕망에 비하여 우월하였기 때문에 그러한 일을 실행하였던 것이다. 연민의 정이나 또는 동정심까지도 이 한 가지 욕망 이 한 가지 갈망에 의하여 그 순간 그만 사라지고만 것이다. 그들은 거의 자동적으로 그들의 본성의 요구를 만족케 하도록 행동한 것이다. 또는 이러한 강렬한 격정을 일으킬 일은 별문제로 치고 자기의 친구에게 사기치고 누구에게서든지 맥주값을 구하려고 할 때마다 거짓말을 하고 또는 아마 까닭없이 허풍치는 것이 좋아서 거짓말을 하고 또는 교활한 까닭에 남을 항시 속이는 비열한 남자를 예로 들어보라. 또 자기의 처나 애첩에게 보석패물을 사서 주기 위하여 노동자를 학대하는 고용주를 예로 들어보자. 그 외에 여러분의 마음대로 어떠한 악한이라도 예로 들어보라. 그자들도 역시 충동에 끌려서 행한 것밖에 아니다. 그자들은 욕망의 만족을 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자들은 자기에게 곤고(困苦)를 피하려는 요구의 만족을 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전생애를 피압추자(被壓追者)의 해방을 위하여 희생을 바치다가 급기야는 단두대에 올라간 러시아의 허무주의자와 같은 사람들과 이러한 상기의 악한들과 비교하여 말하는 것부터 우리는 수치로 생각하는 바이다. 이들 두 개인의 생활의 결과는 인도(人道)에 대하여 거대한 차이가 있다. 그 까닭으로 우리는 일방에 대하여는 존경과 숭배를 바치도록 느끼지만 타방에 대하여는 천시하고 배척하고 싶은 느낌을 갖게 되는 것이다. 그렇지마는 만약 여러분이 이러한 순교자, 지금 막 처형을 하게 된 부인과 이야기를 하여 본다면 그녀가 방금 교수대로 걸어가며 최후의 시간이 일초 일초 가까워 오는 그때일지라도 그녀는 자기의 생이나 사가 노동자로부터 도취(盜取)한 금전으로 생활하는 비열한 악한의 호화스러운 생활과 교환하기는 진저리나게 싫다고 말할 것이다. 그녀의 생활에서 즉 괴물과 같은 권력과 투쟁하는 데에서 그녀는 자기의 최고의 환희를 통절히 느끼는 것이다. 투쟁이외의 일체 즉 자본벌(資本閥)의 추악한 환락도 비루한 곤고도 그녀에게 있어서는 조소할만한 것이며 번뇌할만한 것이며, 또 연민할만한 것으로 보이는 것이다. “여러분은 살고 있어도 생명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며 먹기만 하는 밥버러지에 불과한 것이다”라고 그녀는 대답하리라. “나는 지금 죽어도 영혼이 살아 있다”고 하리라.
우리는 물론 우리의 생활의 대부분을 점하고 있는 무의식의 거대한 계열 즉 기계적 행위에 불과한 모든 행위에 대하여는 지금 여기에는 말하기를 그만 두기로 하고 인간의 사려있는 의식적 행위에 대하여서 우선 말하는 바이다. 인간은 그 사려있는 의식적 행위에서 항상 자기에게 쾌락을 주는 것을 구하고 있다.
어떤 사람은 아주 대단히 술을 잘 마신다. 그리해서 자기의 신경계통으로는 도저히 얻을 수 없는 신경의 흥분을 술에서 구하는 까닭에 매일 매일 금수 상태에까지 자신을 저하시키고 만다. 또 다른 한 사람은 술을 도무지 마시지 않는다. 가령 술이 유쾌하다는 것은 알지만 술을 마시는 것보다도 다른 좋은 쾌락을 맛볼 수 있는 까닭에 자기의 사상을 신선히 지니고 자기의 정력을 풍부하게 지니고 싶은 까닭에 아무런 주류도 마시지 아니한다. 그러나 정교한 요리 메뉴판을 한번 보고서 자기가 가장 즐겨하는 것을 충분히 먹기 위하여 즐기는 음식일지라도 거부하는 유복한 생활을 하고 있는 재판관과 같은 사람이 아니라면 그는 어떻게 행동을 할 것일까?
인간은 어떠한 행동을 하든지 간에 그것은 쾌락을 구하거나 또는 고통을 피하려는 것이다.
어떤 부인이 초면의 내방객에게 주기 위하여 자기의 최후의 한 조각 빵을 내놓을 때, 또 자기도 기선 갑판 위에서 떨고 있기는 하지만 추위에 고통하고 있는 다른 부인에게 입히기 위하여 자기의 한 겹의 남루한 의복을 벗어 줄 때, 그 부인은 자기가 떨고 굶주림을 느끼는 것보다도 다른 주린 사람이나 추위에 떨고 있는 여자를 보는 편이 훨씬 더 고통스러운 까닭에 그렇게 하는 것이다. 그 부인은 고통을 회피한 것이며 그 고통에 대하여는 다만 그것을 느낀 그 사람만이 그 느낀 아픔의 정도를 알고 있는 것이다. 큐이요8)가 인용한 이야기의 오스트레일리아인이 자기가 아직 친족의 피살을 복수하지 못하고 있다는 관념하에 그 고민으로 쇠약하여 갈 때, 또 그가 자기의 비겁을 통탄하는 데에서 수척해지고 창백해져서 복수행위를 감행하기까지는 생기가 돌아서지 않을 때, 그는 자기를 포로하고 있는 감정으로부터 해방하고 쾌락의 최고인 내적 평화를 회복하기 위하여 이러한 행위를 하고 때로는 영웅적인 행위를 하는 것이다.
원숭이의 한 무리가 사냥꾼에게 사살되어 쓰러진 자기들의 한 동료를 보고서 그 사냥꾼의 천막을 포위하고 총으로 위협됨에도 불구하고 그 동료의 시체를 요구할 때, 그리고 마침내 그 떼거리들 중의 장로라고 할만한 놈이 기세당당하게 천막 안으로 들어와서 우선 사냥꾼을 위협하고 그 다음에는 애원을 하다가 최후에는 애처롭게 읍소(泣訴)하기를 마지아니하다가 사냥꾼이 감동되어 그 시체를 내버려줄 것 같으면 그것을 신음하며 호읍(呼泣)하던 무리가 삼림 속으로 운반하여 갈 때, 그 원숭이들은 제 한 몸뚱이의 안전을 고려하기보다도 훨씬 강한 동료에 대한 연민의 정에 휩쓸리고 있는 것이다. 이 감정은 그들에게 있어서는 모든 다른 감정에 비하여 우월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이 그 동료란 놈이 생명을 회복할 수 있는지 없는지를 확실히 알지 못하는 동안은 그들에게 있어서는 그 생활은 활기를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다. 이 감정은 미물금수로 하여금 이 감정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하여 갖은 짓을 다 해보지 않으면 안될 만큼 고통스럽게 되는 것이다.
인간이라고 칭하는 저 사악한 짐승같은 것이 불을 질러놓은 화재 밑에 불구덩이가 된 개미집 속으로 개미가 수천 마리씩 덤벼들어서 그들의 유충을 구출하려다가 죽어갈 때, 그들은 역시 그들의 자손을 구출하려는 열망에서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인간중의 허다한 부인들이 그 자녀에게 베풀고 있는 주의보다도 훨씬 심심한 주의를 가지고 양육해 온 그들의 유충을 운반해 가져가려고 갖은 방법을 다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곤충이 너무 강렬한 열선을 피하여 미온한 광선을 찾아갈 때, 또는 식물이 그 꽃잎을 태양 편으로 방향을 돌리기도 하고 또는 야음(夜陰)이 접어드는데 따라 그 잎을 오므려 모을 때, 이들의 생물은 역시 고통을 피하여 쾌락을 구하는 요구에 따르고 있는 것으로서 이 점은 개미도 원숭이도 오스트레일리아인도 순교하는 기독교도도 또는 자유사회주의자도 다 동일하다.
쾌락을 구하고 고통을 피하는 것은 유기계(有機界)의 행동의 한 순서(혹은 세인은 법칙이라고도 한다)이다. 유쾌를 탐구하는 일이 없이 생활 자체는 불가능하리라. 유기조직은 붕괴하고 생활은 정지되고 말리라.
이와 같이 인간의 행동과 행위의 계통이 어떠하였던지 인간은 그 천성의 열망에 복종하는 데에서 자기가 하는 일을 행하는 것이다. 가장 나쁜 행동일지라도 무관심한 행동이나 가장 마음을 끄는 행동이나 똑같이 그러한 행위를 하는 개인의 요구에 대하여 일체 똑같이 지도되는 것이다. 자기가 할 수 있는대로 자기로 하여금 행동케 하여라. 그는 그 행동에 있어서 쾌락을 발견하고 혹은 고통을 피하고 또는 피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까닭에 이런 행동 저런 행동을 하는 것이다.
여기에 우리는 십분 확립된 사실을 갖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우리는 이기주의설이라고 칭하는 것의 진수를 파악하고 있다.
매우 좋다. 그러나 이 발전적 결론에 도달하고서 우리는 무엇인가 개량됨이 있는가?
확실히 그렇다. 우리는 진리를 정복한 것이다. 모든 편견의 근저에 가로놓여 있는 한 개의 편견을 타파하여 놓은 것이다. 모든 유물론적 철학은 그 인간에 대한 관계에 있어서는 이 결론 중에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개인의 행동은 모두 무관심하다고 어떤 사람들은 조급하게 결론을 내리나 그러나 그것이 될 것인가? 이것이 지금 우리가 검토하지 않으면 안될 문제이다.
3
우리는 인간의 행동은(인간의 사려있는 의식적 행동을 말함이다. 무의식적인 습관에 대하여는 후장에서 논술코자 한다.) 일체 동일한 기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검토하였다. 도덕적이라고 명칭되는 행위, 부도덕이라고 명칭되는 행위, 대단히 존경할 헌신과 비열한 배신, 인심을 끌만한 행위와 배척할만한 행위, 이런 것 일체는 공통의 근원으로부터 출발하고 모든 것이 개인 천성의 어떤 요구에 응답하여 행하여지는 것이다. 모든 행위는 그 목적으로서 쾌락의 추구와 고통회피의 염원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전장에서 이 점을 검토하였으나 그것은 이 견해를 지지하기 위하여 제공할 수 있는 다수사실을 심히 간략하게 종괄(綜括)하였음에 불과하다.
이 설명이 종교적 원리에 지금도 아직 침염(浸染)되어 있는 자들로 하여금 얼마나 절규되고 있는지는 용이하게 알 수 있는 일이다. 그것은 초자연을 용납할 하등의 여지도 없다. 그것은 영혼불멸의 관념을 포기한다. 만약 인간이 자기천성의 요구에 따라서 행동하는 것뿐이라고 하면, 만약 인간이 일로 치면 『의식이 있는 자동기(自動機)』에 불과한 것이라고 하면 불후의 영혼이라는 것은 어떻게 될 것인가? 너무나 불소(不少)한 쾌락을 갖고 너무나 많은 고민을 가지고 있는 인간들이나 다른 세상에서 어떠한 종류의 대상을 받을 것을 몽상하는 사람들의 최후은닉처적인 영혼불멸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편견 속에서 자라나고 또 너무도 자주 민중을 기만하던 과학에 대하여 거의 신뢰를 하지 않고 있는 민중의 사상보다도 오히려 감정에 의하여 유도되고 있는 민중은 그들의 최후희망을 그들로부터 탈취하여가는 그런 설명을 거부한다.
그러나 전세기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의 혁명가들이 처음으로 인간의 행위의 자연과학적 설명(상관이 없다면 이기주의설이라고 말해도 좋다)에 대하여 들을 적마다 이상에서 말한바 청년허무주의자와 동일한 결론을 그것으로부터 끌어내고 그리고 열심히 『도덕을 타파하라』고 부르짖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러한 혁명가들에 대하여 우리는 무엇이라고 말해야 좋을 것인가?
또 인간은 자기의 천성의 요구에 응하여 각양의 행동을 하는데 불과하다고 하는 말을 듣고서 그것을 믿는 사람들 이 인간의 행동은 일절 선악 무차별한 것이다. 선도 악도 이미 존재하지 않는다. 자기의 생명을 내던져버리기까지 해서 물에 빠져 죽게 되는 사람을 구출하는 것이나 혹은 또 자기가 방관시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사람을 익사케 하는 것이나 양자 공히 똑같은 가치의 두 행위이다. 인류의 자유를 위하여 활동한 후 교수대 위의 이슬로 쓰러지는 순교자나 자기의 친구에게서 물건을 도적해 오는 비열한 무뢰한이나 양자가 똑같은 동일한 인간이다―양자가 다 같이 자기를 기쁘게 하기를 원하는 까닭에―라고 결론을 내리기에 바쁘다. 그러나 이러한 사람들에게 대하여 나는 어떠하다고 말하면 좋을까?
만약 그들이 더욱 진일보하여 좋은 향내도 나쁜 냄새도 구별이 있을 수 없다. 장미화는 방향(芳香)이요 얼초(蘖草)는 악취라고 말할 수도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양자가 공히 분자의 진동인 것밖에 다를 것이 없는 까닭이다. 또 씀바귀의 쓴맛이나 수밀도(水蜜桃)의 감미나 다 같이 분자의 진동일 뿐인 까닭에 좋은 맛 나쁜 맛의 구별이 있을 리가 없다. 육체에 있어서도 미추(美醜)의 구별도 없을 것이며, 현우(賢愚)의 구별도 있을 리가 없다. 왜냐하면 미추, 현우는 역시 유기체의 세포 내에 작용하는 화학적 물리학적인 진동의 결과에 불과한 까닭이다라고 이론을 붙여 말한다면―만약에 그들이 이와 같이 억설(臆說)을 한다면 그들은 미쳤다고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광인의 논리를 가지고 횡설수설하는 것이라고 우리는 치지도외(置之度外)하리라.
그러나 그들은 그러한 논리를 위하지 않을 것이니 우리는 무엇이라 결론을 내려야 좋을 것인가?
우리의 대답은 단순하다. 그 저서 『꿀벌 이야기』에서 1724년에 그와 같이 논술한 만데뷰와 1860년 내지 70년경 러시아의 허무주의자와 또 오늘날의 어떤 파리 청년 아나키스트 등이 이와 같이 논하는 것은 그들이 순전히 무의식적으로 지금도 아직 편견 즉 기독교적 교육의 편견의 와중에서 움직일 수밖에 없는 까닭이다. 얼마나 무신론적이며 얼마나 유물론적이며 또 얼마나 자유사회주의자답게 그들은 자기를 믿고 있었지만 그들은 여전히 교회의 신부나 불교의 개조(開祖) 등이 논술하던 것과 마찬가지로 논의를 하고 있는 것이다.
실로 “행동은 만약 그 행동이 육에 대한 영의 승리를 표현하는 것이면 그것은 선이며 만약 육이 영에 대한 승리를 표현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악이요. 만약에 그 행동이 이 양자 중에 어느 편의 승리도 아닐 것 같으면 그것은 선악 무차별일 것이다. ‘우리는 다만 이에 의하여서만 행동이 선인지 혹은 악인지를 판단할 수 있다’”라고 함은 이런 존경하는 장로님의 말씀일 것이요, 그리고 우리 어린 친구들이 기독교나 불교의 교부들을 모방하여 역시 “이에 의하여서만 우리는 행동이 선인지 악인지를 판단할 수가 있다”고 반복하여 말하는 것일 것이다.
교회의 교부들은 말한다. “보라, 금수들을. 그것들은 불멸의 영혼을 갖지 못할 것이다. 그것들의 행동은 단지 그들의 천성의 요구에 응하여 행할 것뿐이다. 이것이 금수들 사이에는 선인 행동도 악인 행동도 없는 일절이 무차별하다는 이유다. 그리고 금수들에게는 천국도 지옥도 없으며, 응보도 없으며 형벌도 없다는 이유다”라고. 그리고 우리 어린 친구들은 어거스틴(St. Augustine)이나 석가모니 등의 중언복언(重言復言)하는 어구를 채용하여 “인간은 금수에 불과하다. 그 행위는 단지 천성의 요구에 응하여 행하여지는 것뿐이다. 이것이 인간들 사이에는 선한 행위도 악한 행위도 있을 수 없는 이유다. 일절은 선악 무차별이다”라고 말한다.
이성에 역행하는 것은 무엇이냐고 말하면 그것은 지금도 아직 형벌과 응보라는 이 저주할 관념이다. 또 그것은 만약에 행위가 초자연적 영감으로부터 발원한 것이라고 하면 그것은 선이요 만약 초자연적 기원이 결여하여 있다면 그것은 선악 무차별하다고 하는 종교적 교육, 종교적 교훈의 배리적(背理的) 유물이다. 다시 또 그것은 오른편 어깨 위의 천사와 왼편 어깨 위의 악마의 전설에 대하여 “악마도 천사도 다 쫓아버려라. 그리하면 사람의 행위를 판단하는 다른 표준을 우리는 알지 못하는 까닭에 이러 이러한 행위가 선인지 악인지 나는 그것을 여러분에게 일러줄 수가 없게 되는 것이다”라고 큰 소리로 조소하는 사람들 사이에서까지 아직도 존재하고 있는 똑같은 구(舊)관념이다.
악마와 천사를 어깨에 얹어놓고 있는 목사가 상주(常主)로 존재하고 있어서 모든 유물론적인 덧칠도 그것을 은폐하기에는 부족하다. 그러나 이보다 더욱 나쁜 일은 재판관이 갑에게 대한 태형의 선고와 을에 대한 법적 응보를 가지고 상주적으로 존재하고 있는 것으로 자유사회주의의 원리를 가지고서 말할지라도 형벌과 응보와의 관념을 근절하기에는 그다지 충분치 못한 바가 있는 것이다.
그렇다. 그런데 우리는 목사도 재판관도 필요치 않다. 우리는 단순히 얼초는 악취가 나는가? 독사는 나를 무는가? 거짓말쟁이는 나에게 사기치는가? 그리고 식물 파충류와 인류는 각각 그 천성의 요구에 따라 살고 있는 것인가? 라고 말할 것뿐이다. 좋다. 그러면 나는 나로서 악취의 식물이나 독을 가지고 남을 죽이는 독사나 동물보다도 더욱 유해한 인간이 나를 증오하는 나의 천성의 요구에 응종(應從)하는 것뿐이다. 그래서 나는 그 결과 내가 아직 지기(知己)가 될 광영(光榮)을 갖지 못한 악마나 내가 독사보다도 더 증오하는 재판관에게 의논하거나 하지 않고서 행동할 것이다. 나와 나의 반감을 공통히 갖고 있는 사람들은 똑같이 모두 우리들의 천성의 요구에 응종하는 것이다. 양자 어느 편에 이론이 있는가? 따라서 어느 편에 힘이 있는가를 검토하여 보자.
이것이 우리가 지금 여기에서 검토하려고 하는 바이며 성 어거스틴이 선악의 판별을 하는데 특별히 다른 기초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고 하면 더욱더 유효한 다른 기초를 동물계가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이 연구 그 자체에 의하여 발견하리라. 일반 동물계에서는 곤충으로부터 인류에 이르기까지 무엇이 선이며 무엇이 악인가를 성경이나 철학에 문의하지 않고서 완전히 알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고 하면 그 원인은 그것들의 천성의 요구 중에 있는 것이다. 즉 ‘종족보존과 따라서 각개인의 최대가능성의 행복에 있는 것이다’.
4
모세교(유대교), 불교, 기독교 및 회교 등의 신학자들은 선과 악을 구별하기 위하여 신의 영감에 의뢰하였던 것이다. 그들은 인간은 야만이거나 문명이거나 무학(無學)이거나 유식이거나 사악하거나 친절하거나 정직하거나 교활하거나 자기는 선한 행위를 하고 있는가, 악한 행위를 하고 있는가를 항상 알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이 일반적 사실에 대한 설명을 발견하지 못한 까닭에 그들은 그것은 신의 영감에 의한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형이상학적 철학자들은 자기들의 입장으로부터 양심이라든가 신비적인 ‘명령’이라든가에 대하여 우리들에게 설명을 한다. 그래서 결국 그것은 문구가 다른 것 외에 종교가와 하등의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사회를 형성하여 생활하는 동물도 역시 인간과 똑같이 선과 악을 구별할 수가 있다는 대단히 단순하고도 더욱 대단히 현저한 사실을 어떻게 평가해야 할 것인가를 알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동물들의 선악 개념은 인간의 그것과 동일성질의 것이다. 각종 동물류 중의 가장 잘 발달해온 대표―어류, 곤충, 조류, 포유류―중에도 그 개념은 동일한 것이다.
18세기의 사상가는 이 점에 주목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얼마 되지 않아서 다시 망각해 버렸다. 그러므로 지금 와서 이 사실의 전(全)의의를 제창하는 것은 우리들의 책임이요 역할이다.
개미의 연구 관찰자로서 그를 도저히 추종할 수 없는 포렐(Forel)은 꿀을 먹어 밥통을 잘 배불린 개미가 배고픈 다른 개미를 만났을 때에 후자 즉 배고픈 개미는 즉시 전자 즉 배부른 개미에게 먹을 것을 요구한다. 그래서 이 작은 곤충들 사이에는 주린 동료가 자기와 같이 배를 채울 수 있도록 꿀을 토해 내놓는 것이 배부른 개미의 의무인 것이다. 자기가 자기 차례에 돌아온 몫을 가진 때에 같은 개미굴에 사는 다른 동료 개미에게 먹이를 나누어주기를 거절하는 것은 정당한 일인지 부당한 일인지는 개미들에게 물어 보라. 그들은 틀림없는 확신을 가지고 그것은 극히 나쁜 일이라고 대답하리라. 이러한 이기적인 개미는 다른 종족의 적보다도 한층 가혹한 취급을 받으리라. 만약에 이러한 일이 두 개 다른 종족간의 전쟁 중에 일어나는 일이 있다면 개미들은 그 이기적인 동료를 처치하기 위하여 전투를 중지할 것이다. 이 사실은 실험에 의하여 입증한 것으로써 어떠한 의혹도 용납되지 않는다.
또 무슨 빵조각이나 쌀 같은 것이 떨어져 있어서 모두 와서 식물을 서로 나누어 먹을 수 있을 때에 그 작은 사회전체에 통고하지 않고서 혼자만 알고 먹는다는 것이 정당한지 아닌지를 여러분의 정원에 살고 있는 참새들에게 물어 보라. 지푸라기를 절도한 새가 자기가 사방에서 탐색하여 모으기가 귀찮다고 해서 인접한 딴 새집에서 다른 새가 주워 모은 지푸라기를 절취하는 것이 정당한 행위인지 아닌지를 울타리에 앉은 참새들에게 물어보라. 그 참새는 그놈은 대단히 나쁜 놈이라고 대답하고서 절도새에게 날라 모여와서 그놈을 쪼아 자빠뜨릴 것이다.
혹은 같은 집단에서 사는 한 모르못트가 다른 모르못트에게 대하여 자기의 지하 저장소에 접근하기를 거절하는 것은 그 모르못트 집단에게 있어서 정당한 일인지 아닌지를 물어 보라. 그들은 그것은 대단히 나쁜 일이라고 대답하고서 그 인색한 놈과 모든 방법을 다하여 싸움을 하리라.
최후로 동일종족의 일원이 부재중에 그 사람의 천막에 있는 식물을 다른 일원이 먹는 것은 정당한지 아닌지를 원시인 예컨데 쥬크제(Tchoukche)인에게 물어 보라. 그는 만약에 그 사람이 자기로서 자기의 식료(食料)를 구해 얻을 수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일을 하였다면 그것은 대단히 나쁜 일이라고 대답하리라. 다른 면에 있어서 만약에 그 사람이 쇠약하였다던가 혹은 궁핍하여 있었다면 그 사람은 식물을 발견한 장소에서 식사를 취하여도 좋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환경에는 그 사람은 자기의 모자나 혹은 칼 또는 매듭을 맺은 노끈이라도 좋으니까 그것을 그 장소에 놓아두고 가야 한다. 그것은 부재의 동족 엽수(獵帥)가 귀가하여서 친구가 다녀간 것으로 도둑이 들어왔던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도록 하여두면 좋은 것이다. 이러한 용심(用心)이 천막부근에 약탈자가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불안으로부터 동료를 구하는 것이 될 것이다.
이것이 유사한 수천의 사실이 인용될 수 있다. 또 선악의 개념은 인간들 사이에 있어서도 또 다른 동물들 사이에 있어서도 얼마나 동일한 형태라는 것을 제시하기 위하여 수많은 서적이 저술될 수 있는 것이다.
개미, 새, 모르못트, 원시인은 칸트의 저서를 읽은 일도 없었으며 교회의 교부나 모세의 서적같은 것도 읽은 일이 없는 것이다. 그렇지만 모두 선악에 대하여 동일한 관념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만약에 제군이 이 관념의 밑바닥에 무엇이 흐르고 있는지를 잠시 반성하여 볼 것 같으면 여러분은 개미, 모르못트 및 기독교도 혹은 무신론의 도덕학자들 사이에 선이라고 생각되고 있는 것은 종족보존에 ‘유용’한 일인 것이며, 또 악이라고 생각되고 있는 것은 종족보존에 유해한 일인 것임을 즉시 알게 되리라. 벤담이나 밀이 발표한 바와 같이 선이라는 것은 개인에 대해서가 아니라 전종족에 대하여 선량한 것을 일컬음이다.
선악의 관념은 이와 같이 종교나 신비적 양심과는 하등 아무 관계도 없는 것이다. 그것은 동물의 종족보존상에 자연적 요구인 것이다. 그러므로 종교의 시조, 철학자 및 도덕학자가 우리에게 신의 실재나 형이상학적 실재에 대하여 이야기할 때 그들은 한 마리 한 마리의 개미, 한 마리 한 마리의 참새가 그 조그만 사회에 있어서 실행하고 있는 일을 개작하고 있음에 불과한 것이다.
이것은 사회에 있어서 유용한가? 그러면 그것은 선이다. 그것은 유해한가? 그러면 그것은 악이다.
이 관념은 하등 동물들 사이에서는 극도로 제한되어 있을는지도 모른다. 또 일층 진보한 동물들 사이에서는 광범위하게 실행되고 있을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진수는 항상 동일한 것이다.
개미들 사이에서는 그것은 개미굴 이상에는 확대하여 있지 않다. 그 모든 사회적 습관, 그 모든 선행의 규칙은 그 한 개미굴 중의 개개원에게만 통용할 수 있는 것으로서 다른 개미굴에는 적용할 수 있는 것으로서 다른 개미굴에는 적용할 수 없는 것이다. 한 개의 개미굴은 다른 개미굴을 동일종족에 속하여 있다고 생각하고 있지 않을 것이다. 단 어떤 예외인 사정 밑에서 공통의 재해가 양자상에 떨어질 때는 별문제이다. 마찬가지로 파리의 룩셈부르크(Luxembourg) 공원의 참새는 자기들끼리 상호간에 놀랄 만한 양식으로 상호부조를 하지만 룩셈부르크 공원으로 감히 모험하고 간 몽그(Monge) 거리로부터 날라온 참새와는 죽음을 무릅쓰고 싸우리라. 그러므로 야만인들은 타부락의 야만인들을 자기네 부락의 풍습을 적용하지 않는 사람들이라고 보고 있다. 그 사람에게는 물건을 팔아도 관계치 않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판다고 하는 것은 언제나 사는 사람으로부터 다소간이고 도둑질한다는 것이다. 사는 사람이거나 파는 사람이거나 어느 편이거나 간에 하나는 언제나 ‘팔려지고’있는 것이다. 쥬크제인은 자기와 같은 부락사람에게 물건을 파는 것을 죄악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같은 부락사람에게 대하여는 하등의 토의를 하지 않고 주고 받는 것이다. 그러므로 문명인은 마침내 그들과 더욱이 가장 단순한 파포(Papouas)인과의 관계, 즉 최초 언듯봐서는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운 상호관계이지만 그러나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이해할 때 그는 그들의 연대성의 원리를 전인류에게 그리고 동물에게까지도 점차 확대시키리라. 관념은 확대한다. 그러나 그 근저의 진수는 동일한 것이다.
다른 면에 있어서 선악의 개념은 이미 받아가진 지성 또는 지식의 정도에 따른 것이다. 그것에 관하여 불가변의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원시인은 그 연로한 양친이 사회의 무거운 짐으로 되었을 경우에―주로 아주 대단히 무거운 짐처럼 되었을 경우에―이 연로한 양친을 잡아먹는 것을 대단히 정당한 일 즉 인종적 입장으로 보아서 유리한 일―처럼 생각하고 있을는지도 모른다. 또 원시인은 각가족에게 두 세 명의 자식을 보육할 뿐으로 그 이상 새로 출생하는 자식은 살해하여 버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모친은 자식이 3세가 되기까지 젖을 먹이며 기르는 그 자식의 신상(身上)에 모친의 애정이 더욱 더 충분히 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은 사회를 위하여 유리하다고 생각하였을는지도 모른다.
현대에 와서는 관념이 변하여졌다. 뿐만 아니라 생존 지지(支持)의 수단이 벌써 석기시대의 그것과 같은 것은 아니다. 문명인은 두 개의 악, 즉 연로한 어버이를 잡아먹을까, 그렇지 않으면 만인의 불충분한 영양을 취하여 가지고 졸지(猝地)에 연로한 어버이나 연소한 자식이나 쌍방이 다 같이 살아갈 수가 없게까지 될 것인가. 이 양자의 악 중에서 어느 하나를 택하지 않으면 안되는 그러한 야만인의 가족 형편에 놓여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당시 존재하여 있던 사정에 있어서 미개인은 그것으로 십분 정확히 사고하여낸 것이라는 것을 우리가 이해하기 전에 우리의 심경으로는 거의 상상도 할 수 없는 그러한 시대에 우리 자신을 바꿔 놓지 않으면 안된다. 실로 선교사가 오세아니아사람들에게 그들의 연로한 친족이나 그들의 적을 잡아먹는 것을 폐지하도록 교양한 이후 그들이 괴혈병의 참사를 입어 희생이 되어 있는 것을 우리는 보지 못하는가?9)
사고의 방식은 변화할 수 있다. 인종에 있어서 무엇이 유용한지 또 무엇이 유해한지를 평가하는 관념은 변화한다. 그러나 근저는 동일한 것이다. 그러므로 만약에 우리가 동물계의 모든 철학을 한마디 말로 종괄하려면 우리는 개미, 새, 모르못트, 인간이 다 같이 한 가지 점에서 일치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기독교도는 말하기를 “사람들은 너희가 하고자 원치 않는 것을 ‘타인에게 행하지 말라’”고 한다. 그리고 거기에 부언하기를 “그리하면 너희들은 지옥으로 보내질 것이다”라고 한다.10)
전동물계의 관찰로부터 발생한 도덕은 다음 말로 종괄할 수가 있다. 즉 “동일한 경우에 있어서 너희들이 남에게 원하는 바를 너도 타인에게 행하라.”
그리고 거기에 다음과 같이 부언한다. “이것은 단순히 ‘충고’라는 것을 알아라. 그렇지만 이 충고는 사회를 형성하고 사는 모든 동물들의 긴 세월이 흐르는 동안에 얻은 경험의 성과인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도 포함한 사회적 동물의 대군중들 사이에는 이 원칙상에서 행동하는 것이 습관적으로 되어 있다. 진실로 이것이 없었다면 사회는 존재할 수가 없었을 것이고, 각인종은 자기들이 싸워나가지 않으면 안될 자연의 장애물을 정복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사회적 동물과 인간의 사회를 관찰함에 의하여 발생하는 것은 확실히 이것이 대단히 단순한 원리인가? 또 그것은 통용할 수 있는 것인가? 그리고 어떻게 하여서 이 원리가 습관으로 변하였으며, 부단히 발달을 하는 것인가? 이것이 지금 우리가 검토하려고 하는 문제이다.
5
선악의 관념은 인간성 그 자체 내에 존재한다. 인간은 지적 발전이 어떠한 단계에 도달하여있던지 간에, 또 얼마만한 정도의 관념이 편견과 개인적 이해의 생각에 의하여 애매하게 되어 있다 할지라도 자기가 생활하고 있는 사회에 대하여 유용한 것을 일반으로 선이라고 고찰하고 거기에 대하여 유해한 것을 악이라고 고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거의 그것이 감정과 구별될 수 없을 만큼 그렇게 막연한 이 개념은 도대체 어디로부터 오는 것일까? 인류에 대하여 결코 반성하여본 일이 없는 기만인(幾萬人)이 존재하고 있다. 그들은 대부분 부족 또는 종족만을 알고 있으며 민족을 거의 알지 못하고 인류라는데 가서는 더구나 더 알지 못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람들이 인류라는데 대하여 유용한 것을 선이라고 생각하고 있다고 어떻게 말할 수 있겠는가? 또 그들의 좁은 이기적인 이해심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부족들과의 연대성의 감정에까지도 도달하고 있는 것은 어떻게 해서 있을 수 있는 것일까?
이 사실은 언제 어느 시대에서나 대단히 사상가들의 두뇌를 점령하고 있던 문제로써 지금도 아직 그것은 그들의 두뇌를 계속 점령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하여 나의 견해를 표시할 차례가 되었다. 그러나 사실의 설명은 변할지라도 사실 자체를 부정하기 곤란한 점에 있어서는 여전히 조금도 변함이 없다고 하는 것을 말할 즈음에 논술하여 두기로 한다. 그런데 나의 설명이 진실한 것이 아니라 할지라도 또 그것이 불완전하다 할지라도 사실은 그 인류에 미치는 결과와 함께 여전히 있는 것이다. 우리는 태양의 주위를 공전하는 혹성의 기원을 충분히 설명할 수는 없다. 그러나 혹성은 변함이 없이 공전을 계속하고 그 중의 한 개는 우리들을 그것과 함께 공간(空間)에 운행해 주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미 종교적 설명에 대하여 말하였다. 만약 인간이 선악을 판별한다 할지라도 이 관념을 인간들에게 불어넣는 것은 신이다라고 신학자들은 말을 한다. 유용하다던가 말하는 것은 인간들에 있어서 토구(討究)할 문제가 아니다. 인간은 다만 그 창조주의 명령에 따르고 있기만 하면 좋은 것이다. 우리는 야만인의 무지와 공포의 성과인 이 설명에 그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지나쳐 보아두자.
또 다른 자(예컨데 토마스 홉스)는 이 사실을 ‘법률’에 의하여 설명하려고 한다. 즉 인간들 중에 정사선악(正邪善惡)의 생각을 발전시켜 놓은 자는 법률임에 틀림없다고 독자 여러분은 자기 혼자서 이 설명을 판단할 수 있을는지 모른다. 법률은 인간의 천성이 복종을 거절하는 그 착취를 일삼는 소수자에게 유용한 각종의 명령을 인간이 수락하는 도덕적 계율 속에 끌어넣기 위하여 인간의 사회적 감정을 단순히 이용하였음에 불과하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고 있다. 법률은 정의의 생각을 발전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그것을 역용(逆用)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것도 지나쳐 보아두자.
또 우리는 공리주의자의 설명에 그쳐두지도 말자. 인간은 자기의 이해관념으로부터 도덕적으로 행동을 하는 것이라고 그들은 생각하리라. 그래서 전인류들 사이의 연대감이 그 기원은 무엇이 되었든지 현재도 계속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잊어버리고 있다. 공리주의적 설명에도 어떠한 진리는 있다. 그러나 그것은 전면적인 진리는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시 더 전진하여 보자.
우리가 도덕적 감정의 기원을 추론하는데 대하여 일부분에 있어서 확실히 도움되는 것은 역시 19세기의 사상가이다.
종교적 편견에 의하여 침묵 중에 재워지고 또 확실히 반종교적인 사상가들 사이에서까지도 거의 알지 못하고 있던 『도덕적 감정의 이론』이라고 하는 명저에서 아담 스미스(Adam Smith)가 도덕적 감정의 진정한 기원에 관한 연구에 비로소 손을 댄 것이다. 그는 그것을 신비적 종교적 감정 중에서 구하지 않았다. 그는 그것을 단순히 동정(同情)이라는 생각 중에서 발견하였던 것이다.
여러분은 어린 아이를 때리는 사람을 본다. 여러분은 맞는 아이가 아파할 것을 알리라. 여러분의 상상은 아이 신상에 가해진 고통을 여러분 자신이 역시 고민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 가련한 고민 그대로 안색이 여러분에게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에 여러분이 겁쟁이가 아니라면 여러분은 아이를 때리고 있는 맹수같은 자에 달려들어 그 아이를 그 자에게서 구해내리라.
이 예증은 그 자체에서 거의 일체의 도덕적 감정을 설명한다. 여러분의 상상이 강력하면 강력할수록 여러분은 생물들이 고통을 당할 때 그것들이 느끼는 바를 더욱더 잘 여러분 자신의 생각 속에 그려볼 수가 있을 것이고 마침내 여러분의 도덕적 감정은 첨예화하고 미묘하게 될 것이다. 여러분이 다른 사람의 처지에 여러분 자신을 바꿔놓도록 마음이 끌리면 끌릴수록 더욱더 여러분은 그 사람 신상에 떨어진 고통, 그 사람에게 뒤집어씌운 모욕, 그 사람을 희생하도록 한 부정의를 통감하고 마침내 여러분은 여러분이 그 고통, 그 모욕, 그 부정의를 방지할 수 있도록 행동화하도록 촉진을 하게 되리라. 그래서 여러분이 경우에 따라 환경에 따라 또는 여러분 자신의 사상과 상상과의 예민성에 따라 여러분의 사상과 상상이 촉진하는대로 행동하도록 관습되어 있으면 있을수록 더욱 더 도덕적 감정은 여러분들 사이에 성장하고 더욱 더 그것이 습관적으로 되리라.
이상이 아담 스미스가 풍부한 예증을 열거하여 전개한 바이다. 그가 이 책을 저작할 때는 아직 연소하였을 때였다. 이 책은 경제학에 관한 그의 노년시대의 저작에 비하면 훨씬 우수한 것이다. 종교적 편견으로부터 해방된 그는 도덕성의 설명을 인간천성의 물리적 사실에서 탐구하였다. 그러나 어용신학이나 비어용신학의 편견 이것이 이 논문으로 하여금 1세기간이나 검정책 뚜껑 속에 간직해 둘 수밖에 없었던 소이(所以)이었다.
아담 스미스11)의 오직 한 가지 오류는 이 동일한 동정의 생각은 그 습관적 계급에 있어서 인간들 사이에 존재하는 것과 같이 동물들 사이에도 존재한다는 것을 이해하고 있지 못하였던 것이다.
다윈이 말사스로부터 아무 것도 채용하지 않았던 것을 잊어버린 다윈학도들 중의 속화(俗化)된 자들은 그야말로 모르지만 연대성의 감정은 사회를 형성하고 생활하는 모든 동물들의 주요한 특징이라는 것은 명확한 사실이다. 독수리는 새를 탐식(貪食)하고 이리는 모르못트를 탐식한다. 그러나 독수리거나 이리거나 다 각각 사이(飼餌)를 사냥할 때에 있어서는 상호부조를 한다. 참새도 모르못트도 다만 영리하지 못한 것만이 포획되는 것으로 맹수 맹조에 대하여 대단히 유효 적절하게 그들 자신들의 결합을 하고 있는 것이다. 모든 동물사회에 있어서 연대성은 지배계급이 우리들을 업신여기는데 가장 적용할 수 있는 모든 방법으로 그 공덕을 칭송하는 저 생존경쟁설보다도 훨씬 대단한 중요성을 가진 자연법칙이다.
우리가 동물계를 연구하여 생존경쟁은 재해가 있는 경우와 침범하는 적에 대하여 각생물들이 지지하는 것이라는 것을 우리 자신에게 설명하려고 할 때, 연대성과 평등의 원칙이 동물사회에 발달하여 있다면 있을수록 또 적에 대한 투쟁으로부터 승리하여 진출할 기회를 많이 갖게 되는 것이라고 하는 것을 우리는 깨달아 아는 바이다. 사회의 각성원이 타성원 각자와의 연대성을 느끼는 것이 철저하면 철저할수록 모든 진보의 주요한 요인이 되는 두 가지 성질 즉 한 편에는 용기, 다른 편에는 자유스러운 개인발의가 그들 모든 성원중에 더욱 더 완전히 발전하는 것이다. 그리고 반대로 동물사회 또는 동물의 소집단이 이 연대성의 감정을 상실하면 상실할수록―그것은 극도의 결핍이거나 극도의 풍부이거나의 결과로써 일어날 수 있는―더욱 더 진보의 두 가지 요인, 즉 용기와 개인발의가 멸살(滅殺)된다. 마침내 그것들은 소실되어서 패퇴에 빠지고 그 적의 앞에 도괴(倒壞)되고 마는 것이다. 상호신뢰가 없다면 투쟁은 불가능하고 용기도 발의도 연대성도 없어진다. ―그래서 아무런 승산은 없는 것이다. 패배는 확실하다.
그러나 이 문제는 다음날 재론하기로 한다. 우리는 얼마나 동물계와 인간계에 있어서 상호부조가 진보의 법칙이요, 또 얼마나 상호부조가 그것으로부터 생기는 용기나 개인발의와 함께 그것을 실행할 수 있는 가장 많은 소질을 가지고 있는 종족에게 승리를 확보케 하는가를 허다한 실례를 가지고 증명할 수가 있다. 지금은 사실을 열거하기만 하면 족하다. 독자 여러분은 지금 우리가 제기한 이 문제에 있어서 상호부조성이 중요하다는 것을 자기로서 평가할 수가 있으리라.
거기에서 우리는 지구상에 출현한 동물생활의 창조초로부터 차차 연속하여온 기백만년간 이 연대성의 감정이 작용하여 왔다는 것을 상정하자. 나는 어떻게 이 감정이 점차로 습관으로 되고 유전에 의하여서 가장 미소한 유기체로부터 그 자손―곤충류, 조류, 파충류, 포유류, 인간―에게로 계승되어 왔다는 것을 상정하자. 그래서 우리는 동물에 있어서는 식물(食物)이나 혹은 그것을 소화하는 기관과 같이 필요불가결한 도덕적 감정의 기원을 이해하게 되리라.
이 이상 태고로 소급하여 올라가서 단순한 미생물의 군거로부터 시발한 복잡한 동물에 대하여 말하지 않을지라도 도덕적 감정의 기원은 이것쯤으로 좋은 것이다. 우리는 이 대문제를 수페이지의 한계 안에 압축하기 위하여 극히 간략히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거기에 대하여 아무런 신비적인 것 아무런 감상적인 것이 없음을 표시하기 위하여 이미 충분히 논술하여두었다. 개체와 종족과의 이 연대성이 없이는 동물계는 결코 발달하지 못하였을 것이며 또 그 현재의 완전에까지 도달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지구상의 가장 진보하였다는 생물도 지금도 아직 수중에 유영하고 있는 미세한 점과 같은 것의 하나로 되어 있을 것이요, 현미경하에 놓고 볼지라도 거의 식별할 수 없을 만한 그러한 것으로 되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존재까지라도 가지고 있었을까? 왜냐하면 세포자체의 초기 군단(群團)은 투쟁에 있어서 연합의 일례인 까닭은 아니었을까?
6
이와 같이 동물계를 편견이 없이 관찰하는데 의하여 대개 사회가 존재하는 곳에는 어디에서나 이 원칙을 발견할 수 있다고 하는 결론에 우리는 도달한다. 이 원칙이라는 것은 즉 ‘동일 경우하에 있어서는 네가 대우받고 싶다고 원하는 바와 같이 타인을 대우하라’고 말하는 바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동물계의 진화를 세밀히 연구할 때, 우리는 전술의 원칙, 즉 한마디 말로 번역할 것 같으면 ‘연대성’은 개인적 이익을 획득하기 위하여 개인들 사이에 행하여지는 투쟁으로부터 결과하는 모든 순응작용보다 훨씬 무한히 대단한 역할을 동물계의 발전상에 연출하여 왔다고 하는 것을 발견한다.
인간사회에 있어서는 더욱 대단한 정도의 연대성이 발견되게끔 되어 있음이 명백하다. 동물의 계급에 있어서 최고의 지위를 점하고 있는 원숭이의 사회에서도 연대성을 실행하고 있는 경탄할만한 실례를 제공하고 있다. 그리고 인간은 이 방향으로 향하여 더욱 일보를 나가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그리고 이것만이 자연이 그 도정상에 퍼부워놓은 온갖 장애물들 사이에 생존하면서 인간들로 하여금 그 약소한 종족을 보존케 하고 그 지능을 발전시키는 일을 가능케 하였던 것이다.
지금도 아직 석기시대 정도에 있는 원시사회에 대한 주도한 관찰은 얼마나 대단한 정도에까지 동일사회의 성원이 그들 사이에 연대성을 실행하고 있는가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 실천적 연대성이 결코 정지하지 않고 역사상 최악의 시대에서일지라도 정지하지 않았던 소이이다. 지배, 노예제도, 착취 등 일시적 사정이 이 원칙을 부인케 한 때일지라도 오히려 그것은 허다한 사람들의 사상의 심저에 횡재(橫在)하여 가지고 악제도에 대하여 강경한 반발을 가져오도록, 즉 혁명을 초래하도록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만약에 그것이 그렇지 않았더라면 사회는 사멸하고 말았으리라.
동물이나 인간의 대다수에 있어서는 이 감정은 습득한 습관, 즉 행동에 있어서는 부단히 망각되었을 때일지라도 마음 속에는 항상 현존하고 있는 원칙으로 되어 있는 것이요, 또 그렇게 되어 있지 않으면 아니 되게 되는 것이다.
우리 사람들 사이에 이야기되어 있는 것은 동물계의 전(全)진화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런데 이 진화는 오랜 전부터 대단히 장구한 세월을 두고 계속하여 왔다. 그것은 수억 년으로 셀 수 있는 것이다.
가령 우리가 그것으로부터 벗어나려고 애를 쓸지라도 그것은 불가능한 것이다. 도덕적 감정으로부터 벗어나기보다는 사지를 네 발로 삼아 기어다니는 습관을 가지려는 편이 도리어 인간에게 용이하리라, 동물진화의 과정에서는 도덕적 감정이 발생한 편이 인간의 직립자세의 발생보다도 선행하였던 것이다.
도덕의식은 후각이나 촉각과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구비되어 있는 자연적 기능이다.
법률이나 종교도 역시 이 원칙을 선전해 오기는 하였지만 그들은 단순히 자기들 자신의 명령과 정복자, 착취자, 승려 등의 이익을 위한 법률명령을 장식하려는 데에서 이 원칙을 절취하였음에 불과한 것이다. 일반적으로 승인된 정의인 연대성의 이 원칙이 없이 그들은 어떻게 인심을 포착할 수가 있을 것인가?
그들은 제각기 이 원칙을 의복으로 삼아 자기들을 은폐하고 있다. 강자에 대하여 약자를 보호하는 보호자로서의 자세로 분장하여 그 지위를 유리하게 하는 강권도 마찬가지다.
법률이나 종교나 강권을 내던져버림에 의하여 인류는 자기네들로부터 빼앗아갔던 도덕적 원칙의 파악을 회복할 수가 있다. 그것을 비판할 수 있기 위하여 회복하라. 그리고 승려와 재판관과 지배자들이 도덕적 원칙을 오손(汚損)하고 지금도 아직 오손하면서 있는 그 간음행위로부터 도덕적 원칙을 깨끗이 해놓으라.
그러나 교회와 법률이 도덕적 원칙을 이용하였다는 이유로 도덕적 원칙을 부정한다는 것은 “코란에 매일 목욕하라고 교훈하였다고 하여서 나는 목욕을 하지 않겠다. 위생가 모세가 헤브라이인에게 돼지고기를 먹지 말라고 금하였다고 하여서 나는 돼지고기를 탐식하겠다. 샤리앗트(코란의 보유(補遺))가 삼년간 경작하지 않고서 내버렸던 토지는 일체 공동체의 소유로 될 것을 요구하였다고 하여서 나는 토지의 공유에 반대하겠다”고 호언하는 것과 같은 일로서 동일히 불합리한 것일 것이다.
아나키즘의 근본원칙은 자기가 대우받고자 원하는 것과 같이 타인을 대우하라고 하는 것이 원칙 외에 즉 평등으로서의 이 원칙 그것 이외에 무엇이 있을 것인가? 또 누구나 그것을 실행하지 않고서 어떻게 자기를 아나키스트로서 믿을 수 있을 것인가?
우리는 남에게 지배됨을 원치 않는다. 그러므로 그 사실 그 자체에 의하여 나는 아무 사람에게 대하여도 지배하기를 원치 않는다고 선언하는 것이 아닐까? 우리는 기만됨을 원치 않는다. 우리는 항상 진실 외에는 아무 말도 듣고 싶지 않다. 그러므로 이 사실 그것에 의하여 우리는 아무 사람에게도 기만하고 싶지 않다. 우리는 항상 진실을 말하고 진실 외에는 아무 것도 이야기하지 않으며 전(全)진리를 이야기하는 것을 약속한다고 선언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우리는 우리의 노동의 성과를 우리로부터 절도 당하고 싶지 않다. 그러므로 이 사실 그 자체에 의하여 우리는 다른 사람의 노동의 성과를 존중한다고 선언하는 것이 아닐까?
실로 어떠한 권리에 의하여 우리는 자기의 경우에는 어떠한 방식을 가지고 취급되기를 요구하지만 타인을 취급할 경우에는 전연 그와 반대의 다른 방식을 가지고서 대하기로 결정할 수가 있을 것인가? 우리의 평등의 생각은 이러한 관념에는 반항한다. 상호관계에 있어서 평등은 그로부터 생기는 연대성과 함께 생존경쟁에 있어서 동물계의 가장 유력한 무기이다. 그러므로 평등이라 함은 공평이라는 말이다.
우리 자신에게 나는 아나키스트다라고 공언하는 데 의하여 우리는 우리가 그런 대우는 받고 싶지 않다고 사전에 이미 공언하고 있는 바이다. 또 우리는 우리들 중의 어떠한 자가 그의 힘이나 교지(巧智)나 능력을 사용함에 당하여 우리에게 반대하고서 그러한 지능을 사용케 하는 것은 곤란케 될 그러한 방식을 가지고 사용하기를 용인하는 그런 불평등을 이미 관용하지 않을 것이라고 공언하고 있는 바이다. 공평과 동의어인 만사에 있어 평등 이것이 행위 그 자체에 있어서 아나키즘이다. 우리가 투쟁을 선언하는 것은 법률과 종교와 강권과의 추상적 삼위일체에 대하여서 뿐만 아니다. 아나키스트로 되는데 의하여 우리는 법률, 종교, 강권의 일체 나의 심중에 주입해 놓은 바의 그 허위와 교지(巧智)와 통치와 타락과 악행과―한마디로 불평등―의 대파란에 대하여 투쟁을 선언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들의 행동의 방식에 대하여 그들의 사고의 방식에 대하여 투쟁을 선언한다. 지배되는 자, 기만당하는 자, 통지 당하는 자, 매음시켜지는 자 등이 그 중에 다른 사람보다도 우선하여 우리의 평등의 관념은 상해 당하였던 것이다. 우리가 이미 매음하지 않고 통치하지 않고, 기만하지 않고, 남자가 여자도 지배하지 않는다고 결심하게 된 것은 평등이라는 이름에서이다.
“그러나 만약에 자네가 대우받고 싶은 그대로 항상 남을 대우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자네가 생각한다면 사정의 여하를 불구하고 자네는 어떠한 권리를 가지로 폭력을 사용하는 것인가? 여하한 권리를 가지고 자네는 자네네 국가에 침입하여온 야만인이거나 문명인에 대하여 대포를 겨눌 것인가? 여하한 권리를 가지고 자네는 통치자를 축출할 것인가? 여하한 권리를 가지고서 폭군뿐만 아니라 독사 한 마리일지라도 죽일 것인가?”라고 아마 따지는 말을 들을는지도 모른다―가끔 와서 이렇게 묻는 자도 있다.
여하한 권리? 법률에서 채용하여온 이러한 말 한마디로 여러분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여러분은 내가 이러한 일을 하여서 행동을 잘 하였다고 내가 자신하고 있는지 여부를 알고 싶은가? 내가 존중하는 사람들은 내가 잘 하였다고 생각할 것인지 여부를 알고 싶은가? 이것이 여러분의 묻는 바인가? 만약 그렇다면 대답은 간단하다.
그렇다. 확실히! 만약에 우리가 우리에게 아무런 유해한 일도 하지 않았던 미얀마인이나 소오르인을 침략하러 갔었다고 하면 우리 자신은 ?맹한 야수와 같이 살해될 것을 원하지 않으면 안되는 까닭에 우리는 우리의 자식이나 친구에게 “만약 내가 침략자에게 가담하여 있었다면 나를 죽여다오”라고 말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그렇다 확실히! 만약 우리가 우리의 원칙을 거짓말로 ??하여 가지고 선조로부터 전해온 유산을 가지고 타인을 통치하기 위하여 사용하려고 점유하였다면 우리는 추방되어야 할 것을 원하지 않으면 안되는 까닭에.
그렇다. 확실히! 만약에 본심으로부터 사람이 유해한 인간이 된다면 그 사람을 죽여달라고 미리 요구할 것인 까닭에. 만약 그가 폐위된 폭군의 지위에 있다고 한다면 총검을 그의 심장에 쏘아 박아달라고 애걸할 것인 까닭에.
처자를 가진 백 사람 중에 구십 구 사람까지는 만약 자기 자신이 미쳤다고 하는 것을 본정신이 들어 감지한다면 애지중지하는 처자에 대하여 어느 때 어디서 그들에게 위해를 가할까 보아서 공?하는 나머지 그는 자살하려고 기도할 것이다. 선량한 마음의 소유자가 자기의 친애하는 사람들에게 대하여 자기 자신이 위험물로 되어 지고 있다는 것을 느낄 때는 그가 그렇게 되기 전에 죽기를 원하는 것이다.
어느날 일쿠스크에서 한 사람의 네덜란드인 의사와 사진사가 광견에게 물렸다. 사진사는 그 상처를 작열한 철로 지져 버렸으나 의사는 단지 자기의 상처에 부식제를 발라두었을 뿐이었다. 그는 나이도 젊었고 외양도 아름다웠으며 원기가 창일(漲溢)하였었다. 그는 민중운동에도 헌신하였기 때문에 정부로부터 처벌되어 기결감에 투옥되었다가 최근에 막 출옥한 때였었다. 박학다재하고 그 중 지성에 탁월하였던 그는 경이적인 치료방법을 사용하였다. 그래서 환자들은 그를 숭배하였다.
육주일 후에 그는 개에게 물린 팔이 퉁퉁 부어 올라온 것을 발견하였다. 의사인 그는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잘 못보았을 리가 없었다. 공수병(恐水病)이 속발한다는 것을 무심히 보았을 리가 없었다. 그는 급급히 그와 한가지로 의사로서 유형을 받고 있는 한 친구에게 달려와서 “스토리키니네를 조금 다오! 얼른 자네 부탁하네! 이 내 팔뚝을 봐라. 이것이 무엇인지 아는가? 한 시간도 채 못지나서 나는 미친 자가 되는 것이다. 나는 자네에게도 다른 친구들에게도 달려들어서 막 물어댈 것이다. 어서 주게나! 스토리키니네를 조금! 나는 죽지 않으면 안된다!”라고 부르짖었다.
그는 자기가 위험스럽게 되어졌다는 것을 느끼자 죽여달라고 부탁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 친구는 주저하였다. 그는 공수병에 대하여 어떠한 조치를 취하려고 하였다. 용감한 일부인의 조력을 구하여 가지고 그는 시작하였다. ―그러나 두 시간 후에 그 청년의사는 친구와 부인에게 달려들어서 입으로 거품을 내뿜으면서 물려고 덤벼들었다. 그러다가 또다시 그는 본정신이 들었다. 다시 스토리키니네를 달라고 애걸하였다. 그러나 공수병의 발작은 다시 일어났다. 무서운 경련중에 사망하고 말았다.
이러한 류의 사실을 얼마든지 많이 우리는 우리 자신의 경험 중에서 인용할 수가 있다. 양심있는 사람은 자기가 타인에 대하여 죄악의 원인이 되는 것보다는 차라리 죽기를 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이 독사나 폭군을 죽인 때 자기 자신은 잘 하였다고 하는 의식을 느끼는 소이연(所以然)이며 자기가 존경하는 사람들에게 대한 상찬(賞讚)이 자기 진정(眞情)에서 우러나오는 소이이다.
페로브스카야12)와 그 동료들이 러시아의 황제를 죽였다. 전인류는 유혈의 참극에 반대함에도 불구하고 일찍이 농노의 해방13)을 허락한 사람에게 대하여 동정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그렇게 한 것과 같이 그들이 그렇게 권리를 인정하였던 것이다. 무슨 까닭인가? 그 행동이 일반에게 유용하다고 인정하였던 까닭은 아니다. 세 사람 중의 두 사람까지는 그것이 유용하였던가 여부를 지금도 아직 의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것이 아니라 전세계의 모든 황금을 갖다준대도 페로브스카야와 그 동지들은 자기들이 폭군이 되기를 수긍하지 않을 것을 느꼈던 까닭이다. 이 활극에 대하여는 하등의 아는 바가 없는 사람들까지도 이것이 혈기왕성한 청년의 허장객기가 아니라는 것과 궁중간신배적 음모가 아니라는 것과 또 권세를 잡으려는 기도가 아니었다는 것을 확인하고 있다. 그것은 자기를 희생해서까지 죽음에 이르기까지 폭군을 증오한 까닭이다.
“이들의 남자와 여자들은 죽일 권리를 획득하고 있던 것이다”라고 말들을 하였다. 흡사히 루이스 밋셀14)에 대하여 “그녀는 강탈할 권리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라고 말들을 하고 혹은 또 좁쌀빵으로 생활을 하면서 게다가 기시네푸가(家)의 재보(財寶) 일 이만을 탈취함에 있어 총검을 단단히 들고서 재보를 지키고 있는 호위병에게 일체 책임을 지우지 않게 하기 위하여 그들 자신이 위험을 무릅쓰고 될 수 있는대로 모든 준비를 다한 테러리스트 동지들에 대하여 이야기할 때 “그들은 도취할 권리를 가지고 있다”고 말을 하던 것과 같이.
방한(防寒)에 대하여 행사하였다거나, 혹은 십자가의 그늘 밑에서 행사하였다거나, 인류는 폭력을 사용할 권리를 획득한 사람들의 두상에 폭력을 가할 권리를 부정한 일이 없었다. 그러나 만약 그러한 행동이 인심에 심각한 인상을 갖게 한다면 ‘그 권리는 획득되지 않으면 안된다’. 그것이 없다고 하면 이러한 행동은 그것이 유용하거나 안하거나에 불구하고 단순한 야수적 사실로 되고 말 것이며 사상의 진보에 있어서 하등의 중요성을 갖지 못하는 것이다. 민중은 그 중에 폭력의 교체환치하여서 단지 한 통치자에 교대하여 다른 통치자로서 환치하는 외에 아무 것도 보지 못하리라.
7
우리는 지금까지 의식적인 사려가 있는 행동 목적을 가지고 하는 행동에 대하여 논술하여 왔다. 그러나 우리의 의식적 생활과 병립하여 그보다 훨씬 광범한 무의식적 생활을 우리는 영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무의식적 생활의 관념을 파악하고 그것이 우리들의 존재에 있어서 연출하는 거대한 역할을 이해하기 위하여는 어제 밤에 잃어 버린 것을 알고 있는 단추를 무심코 끼울려고 할 때 자기가 뻔히 다른 데 옮겨 놓은 물건을 무심코 집으려고 손을 내밀기도 한다. 어떻게 우리는 매일 아침 의복을 입는지를 주의하여 보면 잘 알 것이다.
무의식행위는 우리가 타인과의 관계에서 사분의 삼을 차지하고 있다. 우리의 지껄이는 말씨, 미소를 하는 모양, 눈썹을 찌푸리는 시늉 내지는 논쟁이 벌어졌을 때 열중하거나 냉담하거나 하는 그 태도 등은 무목적 무의식한 것으로서 우리의 조상뿐만 아니라, 우리 인간 이전의 조상으로부터 유전해 받아 온 습관의 결과이거나(성낸 인간과 성낸 짐승과의 사이에 그 표정이 유사한 것을 좀 주의하여 보라) 그렇지 않으면 의식적이건 무의식이건 습득한 것이다.
우리가 타인에게 대한 행동의 양식은 이렇게 습관적으로 되는 경향이 있다. 가장 도덕적인 습관을 습득한 사람은 악마가 자기에게 악을 행하도록 촉진할지라도 지옥의 고통과 천당의 환락을 상기함에 의하여 비로소 자기가 악을 행하기를 정지할 수 있다고 거짓말을 일삼는 소위 선량한 기독교도보다는 확실히 우량(優良)하리라. 자기가 대우받고 싶은대로 타인을 대우하는 것은 인간에게도 모든 사회적 동물에게도 다 마찬가지로 단순한 습관으로 되어 있다. 그런 까닭에 어떤 사람이거나 이러이러한 사정하에서는 어떻게 자기는 행동하지 않으면 안되는가를 자기에게 반문할 것조차 일반적으로 없는 것이다. 그 사람이 주저할 일이 있고 그의 뇌수(腦髓)의 각종 부분 사이에 투쟁이 일어나는 일이 있다고 하면―왜냐하면 뇌수는 매우 복잡한 기관으로써 그 모든 각종의 부분은 어느 정도까지 독립하여 동작하는 까닭이다―그것은 사정이 예외적인 것으로 어떠한 복잡한 경우이거나 혹은 강렬한 정열하에 있을 때에 한한 것이다. 이러한 일이 생길 때는 그 사람은 상상함에 있어 자기를 자신에게 반대하고 나오는 사람과 처지를 바꾸어서 자기가 이러한 방식으로써 취급되고 싶은가 않은가를 자문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 사람이 자기로 인하여 장차 품위와 이익을 손상당하게 되어 있는 사람과 자기와를 귀일(歸一)하기가 가능하면 가능할수록 더욱 그 사람의 결의는 도덕적으로 될 것이다. 어떠한 한 사람의 친구가 들어와서 “자네를 그 사람의 위치에 바꾸어 놓고서 상상해 보아라. 그 사람이 자네에게서 대우받는 것과 같이 자네가 그 사람에게서 대우받는데 의하여 자네는 번뇌할 작정인가?”라고 묻는다고 치자. 그렇다면 그것으로 중분하다.
이와 같이 우리가 어물어물할 때 평등의 원칙에 호소할 뿐이며 백중 구십 구의 경우는 습관에 의하여 도덕적으로 행동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가 논술하여 온 모든 것에 있어서 우리는 아직 무슨 일이나 훈계할 작정으로 한 말이 없었다는 것은 명료하다. 우리는 다만 동물계나 인류들 사이에 일어나는 사실의 양식을 제시하였음에 불과한 것이다.
이전은 교회가 인간을 도덕화하기 위하여 지옥을 끌어내다가 인간을 협박하여 왔던 것이다. 그래서 교회는 반대로 인간을 부도덕화하는 데에 성공하였다. 재판관은 그들이 사회로부터 절취하여 온 사회적 원칙이라는 명의하에서 연옥과 태형과 교수대를 가지고 위협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재판관은 목사 장로 등과 동시에 지구상으로부터 소멸하여 버릴 수 있다는 사상 그것은 모든 색채의 강권주의자들로 하여금 사회의 재화가 왔다고 부르짖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재판관과 그 자들의 선고와를 항쟁하기를 두려워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모든 종류의 비유, 도덕에 대한 의무까지도 폐기한다. 우리는 “자네는 자네가 원하는 바를 하여라. 자네가 원하는대로 행동하라.”고 말하기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인류의 대다수는 그 교양의 정도와 그들이 현행하고 있는 궤도로부터 자기를 해방하는 완전성의 정도에 비례하여 사회에 유용한 방향으로 향하여 항상 행동하고 행위를 하는 것이라는 것을 우리는 확신하고 있는 까닭이다. 흡사히 자식들은 인류라고 칭하는 족속에 속하고 있는 부친으로부터 출생하였다는 단순한 이유로 자식은 이 다음 두 발로 보행할 것이며 네 발로 보행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미리 확신하고 있는 것과 동일한 일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은 충고를 하는 일이다. 그래서 충고를 함과 동시에 우리는 “이 충고는 만약에 자네 자신의 경험과 관찰이 이 충고에 순종할 가치가 있다는 것을 자네 자신에게 인정되지 못한다면 아무 가치도 없는 것이라.”고 부언하여 둔다.
우리는 한 청년이 몸을 구부리고 가슴과 폐를 웅크리고 있는 것을 볼 것 같으면 우리는 그에게 단정하게 자세를 바르게 하고 머리를 들고 가슴을 쭉 펴도록 충고할 것이다. 우리는 그에게 폐를 압축하지 말고 심호흡을 하도록 충고를 한다. 왜냐하면 이것은 폐결핵에 대한 그의 최선의 예방이 되는 까닭이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그가 폐의 기능을 이해하고 자기로서 최선이라고 생각되는 자세를 택할 수 있도록 그에게 생리학을 가르친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일을 우리는 도덕의 경우에서도 할 수가 있다. 우리는 다만 충고할 권리를 가지고 있을 뿐으로 그리고 이에 대하여 “그것이 자네에게 있어서 선이라고 생각될 것 같으면 그것에 순종하여 행하여라.”고 부언할 것뿐이다.
그러나 사람은 각자가 최선이라고 생각하는대로 행동할 권리를 가지고 있는 것이라고 치고, 또 누구든지 범할 수 있는 비사회적 행동에 대하여 어떠한 방식으로서라도 사회는 공공연히 그 사람을 벌할 권리가 없는 것이라고 치고, 그러나 우리는 우리에게 있어서 선이라고 보이는 것을 사랑하고 우리에게 있어서 악이라고 보이는 것을 미워할 자격을 기각하는 것은 아니다. 사랑하라. 그리고 미워하라. 그것은 어떻게 미워해야 할지를 알고 있는 사람만이 어떻게 사랑해야 할지를 아는 까닭이다. 우리는 이 자격을 보유한다. 그리고 이것만이 동물들의 모든 사회에 있어서의 도덕적 감정을 기대하고 또 발전케 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까닭에 그것은 인류에게 있어서도 더욱 더 중요한 것일 것이다.
우리는 다만 한 가지 일을 원할 뿐이다. 그것은 현재사회에 있어서 이런 두 개 감정의 자유 발전을 조애(阻碍)하는 일체의 것, 우리의 판단을 사도(邪道)로 유도하는 모든 것―제왕, 교회, 착취 및 재판관, 승려, 지주, 통치자―를 배제하는 일이다.
무뢰한이 가장 빈곤한 가장 처참한 부인들을 모조리 살육하고 있는 것을 보고 있는 오늘날 우리의 제1 감정은 증오 그것이다.
만약에 이러한 악한이 주막집 숙박료를 내달라고 요구하는 주인노파를 살해한 그날 우리가 그 악한을 노상에서 만났다면 그 남자보다도 그 주막집 노파의 머리에 탄환을 쏘아대는 것이 좋지나 않을까 생각해 볼 필요도 없이 대뜸 그 악한의 대가리에 탄환을 쏘아댈 것이 틀림없다.
그러나 그 남자를 여기까지 이르도록 만들어 논 모든 가증가악(可憎可惡)한 일을 우리가 상기할 때 또 그 남자가 음란한 서적으로 인하여 부랑해진 환상이나 되지 못한 서적으로부터 암시를 받은 사상의 영향으로 인하여 암흑한 중에 그들이 방황하고 있는 사실을 생각할 때 우리의 감정은 분열한다. 그래서 만약 다른 날에 무뢰한이 모든 무뢰한을 일괄 통합한 것보다도 훨씬 많은 남자나 여자나 아동을 냉연히 살해하여 온 재판관의 수중에 있다는 사실을 우리가 들었다면 또 만약에 이 남자가 이러한 생각을 가진 광열병자중의 한 사람의 수중에 있는 것을 우리가 보았다면 그때 무뢰한에 대한 우리의 모든 증오는 소실되리라. 그것은 비겁한 위선적인 사회와 그 승인된 소위 대표자들에 대한 증오로 변해지리라. 악행이 법률이라는 명칭하에 행하여질 때 그 장원(長遠)한 계열의 앞에는 무뢰한의 모든 악행은 소실하는 것이다. 우리가 미워하는 바는 이것들이다.
오늘날에 있어서는 우리의 감정은 부단히 이와같이 분열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모든 것이 많았거나 적었거나 간에 의식적으로 무의식적으로 현사회의 방조자라는 것을 느낀다. 우리는 구태여 미워하지 않는다. 그러면 사랑이라도 하고 있는가? 통치와 굴종 위에다가 기초를 두고 존립한 사회에서는 인간의 성질은 퇴폐한다.
그러나 굴종이 소실될 때 우리는 우리의 권리를 회복하게 되리라. 그때 우리는 지금 인용한 바와 같은 복잡한 경우세서일지라도 우리의 감정중에 미워하고 또 사랑할 힘을 느끼게 되리라.
우리의 일상생활에 있어서 우리는 우리의 동정과 반감과의 감정에 대하여 이미 자유의 경지를 시여(示與)하였다. 우리는 부단히 그렇게 하고 있다. 우리는 모두가 도덕력을 사랑하고 우리는 모두가 도덕적으로 박약한 것과 비겁한 것을 증오한다. 끊임없이 우리의 저서와 언론은 비겁에 대하여 기만에 대하여 음모에 대하여 도덕적 용기의 결핍에 대하여 느끼는 바 증오를 표시하여 왔다. 우리는 세속적 교육의 감화를 받아 왔기 때문에 평등관계가 우리들 사이에 수립되는 날에는 소멸되어 버리리라는 그 허위의 외관하에 우리의 부자유를 은폐하려고 한다. 그러나 그때일지라도 우리는 우리의 혐악의 생각을 배반한 것을 느끼는 바이다.
선악의 개념을 일정한 수준에 보유하고 그것을 상호간에 상통케하는 데에는 이 생각만으로 충분하다. 이 생각은 벌써 사회에 재판관도 목사도 승려도 없어지게 된 때 도덕적 원칙이 그 의무적 성질을 사실하고 단순히 상호간평등의 관계로써 생각하게 될 때 더욱 더 유력하게 되리라.
그뿐 아니라 그러한 관계가 수립되어지는데 비례하여 더욱 고도의 도덕적 관념이 사회에 앙양되리라. 우리가 지금 분석하려고 하는 것은 이 개념이다.
8
이상 우리가 논술하여 온 분석은 다만 평등의 단순한 원칙을 제시하였음에 불과하다. 우리는 자신이 대우받고 싶다고 생각한 바와 다른 방식으로 타인을 대우할 권리가 있다고 억단하는 사람들에게 대하여 또 자신은 기만되고 통치당하고 학대받는 것을 원치 않으면서 그러나 타인에게 대하여는 이러한 행위를 하고 있는 사람들에 대하여 반항하고 또 반항하도록 타인을 유도하고 왔었다. 허위와 야수적 행위와 증오해야 할 것이라고 우리가 논술하여 온 이유는 그것들이 도덕의 법전에 의하여 상찬되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이러한 행위는 만인평등심에 위배되는 까닭이요, 만인에게 대하여 평등은 공허한 한 구절의 언사만은 아닌 까닭이다. 그중에도 그것은 그 사상과 행동과의 방식에 있어서 진실한 아나키스트인 사람들에게 위반하는 까닭이다.
만약 이 단순한 자연스러운 명백한 원칙 이외에는 아무 것도 생활에 대하여 일반적으로 적용되지 않는다고 하면 대단히 고귀한 도덕 모든 도덕론자들이 교육하여 온 일체를 포함하는 바 도덕이 그 결과로서 생겨나리라.
평등의 원칙은 도덕의 교훈을 종괄한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그 이상의 무엇을 포함하고 있다. 이보다 이상의 무엇이라는 것은 즉 개인을 존중하는 일이다. 우리의 도덕인 평등을 선언함에 의하여 아나키즘을 선언하는데 의하여 우리는 도덕론자가 항상 주장하는 바를 자신들에게 다 인수하여 놓은 한 권리 즉 어떤 이상의 명칭하에서 개인을 절단하는 권리를 상정하기를 거절하는 것이다. 우리는 절대로 이 권리를 용인치 않으며 우리 자신에게 대하여도 또 다른 어떠한 사람에게 대하여도 우리는 개인의 충분하고도 완전한 자유를 승인한다. 우리는 개인에게 대하여 풍부한 생존과 그의 능력의 모든 자유발전을 원한다. 우리는 개인들에게 아무 것도 부과하고 싶지 않다. 그러므로 우리는 종교적 도덕에 반대하고 푸리에15)가 설정한 원칙에 되돌아가는 것이다. 그때 푸리에는 말하기를 “사람들로 하여금 절대로 자유롭게 하여라. 그들을 절단하지 말라. 오늘날까지 종교가 너무도 많이 갔다가 다녀온 것과 같이. 그들을 자기들이 하는대로 그대로 내버려두어라. 그들의 격정 그것까지도 두려워하지 말라. ‘자유사회’에서는 격정은 결코 위험한 것이 아니다.”라고.
만약 여러분이 여러분의 자유에 대하여 기권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면 또 만약 여러분이 타인으로 하여금 여러분을 노예로 만드는 것을 용인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면 또 만약에 아무개라 하는 자의 자의 광폭한 비사회적인 격정에 대하여 여러분도 똑같이 여러분의 강력한 사회적 격정을 가지고 대항케 한다면 그렇다면 여러분은 자유를 두려워 할 아무 것 것도 갖지 않을 것이다.16)
우리는 어떠한 이상의 명칭하에서일지라도 개인을 절단하는 관념을 부정한다. 우리가 자신에 대하여 적당한 모든 것은 우리에게 있어서 선으로 보이거나 악으로 보이건 간에 그것에 대하여 우리는 동정이나 반감을 기탄없이 표현할 것이다. 어떤 사람이 그의 친구를 기만하였다고 하자. 그렇게 하는 것은 그의 버릇이요. 또 그의 성격이다. 과연 그렇다. 그러나 거짓말쟁이를 경멸하는 것도 역시 우리의 성격이며 또 버릇이다. 그러므로 이것이 우리의 성격인 까닭에 우리는 기탄없이 하겠다. 경멸하겠다. 지금도 가끔 있는 일이지만 그러한 놈에게 달려가서 그놈을 우리의 품에 안아 주거나 또는 그놈과 친절하게 악수하거나 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맹렬히 그 자에게 대하여 우리의 적극적인 격정을 가지고 대항하리라.
이것이 우리가 행사할 권리를 가지고 있는 전부이다. 이것이 사회에 있어서 평등의 원칙을 유지하기 위하여 우리가 하지 않으면 안될 의무의 전부이다. 그것이 평등의 원칙의 실행인 것이다.
그러나 살인범이나 자녀유괴한에게 대하여는 어떠한가? 단순히 피의 갈증으로 인하여 사람을 죽이는 살인자는 극히 희소하다. 이러한 인간은 치료를 요하는 환자이며 회피해야 할 광인이다. 유괴한에 관하여는 우리는 먼저 그것에 관하여 사회가 아동의 감정을 사도(邪道)로 유혹도발하고 있지나 않은가를 고찰하여 보자. 그러면 우리는 방탕아들을 조금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으리라.
이해하지 않으면 안될 일은 일체 이러한 일은 도덕적 폐퇴의 대근원인 자본주의, 종교, 사법, 정부가 생존을 소실하기까지는 완전히 소청(掃淸)될 수가 없다고 언명하는 바이다. 그러나 그 대부분은 오늘부터라도 실행해 나갈 수가 있는 것이다. 그것은 이미 실행단계에 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사회가 이 평등의 원칙밖에는 알지 못한다면 또 만약 각 사람사람이 단지 장사꾼의 공평만을 실행하고 종일 자기가 타인에게서 수득(受得)하는 이상의 아무 물건도 타인에게 주지 않으려고 고심하고 있게 된다면 사회는 자멸하게 되리라. 평등의 원칙 그것이 우리 관계에서 소멸하리라. 왜냐하면 만약 그것이 지지되게 될 형편이라면 단순한 공평이라는 것보다도 더욱 더 웅대하고도 더욱 애정적이며 또 더욱 생기발랄한 무엇이 부단히 생활 이면의 근저가 되지 않으면 안되는 까닭이다.
그러므로 정의보다 위대한 것이 여기에 있다.
오늘에 이르기까지 인류는 온정과 지성과 선의에 충일(充溢)하고 그 감정과 지성과 활력을 하등의 보상도 요구하지 않고서 인류봉사에 바친 위대한 인물이 결핍해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이러한 정신과 감정과 또는 선의의 풍부는 모든 면에서 적당한 형태를 갖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내 주변에 있는 우매한 자의 주장에 반대해서 스스로 진(眞)이요, 정(正)이라고 믿는 일에 향하여 탐구의 걸음에 내디디기 위하여 자기의 정력을 경주할 수 있도록 일체의 다른 쾌락을 거부하고서 진리를 따라나가는 열렬한 추구자 중에도 있다. 그것은 날마다의 자기의 식사까지도 버리고 세계의 양상을 일변해야 할 사명이 있다는 것을 자신하는 발명을 추구하면서도 그에게 시중을 드는 한 부인이 자기 자식에게 대하듯이 그를 봉양하려고 가져 온 빵에는 거의 손도 대지 않고서 생활하는 발명가 중에도 있다. 그것은 예술이나 과학의 환락도 가정생활까지도 그것들이 만인에게서 공존공영공동향유하게 될 수 없는 한에 이것이 도리어 고통꺼리라고 생각하고 세계의 후생(厚生)을 위하여는 불행도 박해도 우습게 생각하면서 활동하는 열렬한 혁명가들 중에도 있다. 그것은 침략의 흉폭을 듣고서 문자 그대로 애국심의 영웅담에 의하여 의용대에 그 이름을 등록하고 풍설(風雪)과 기아 중에 용감히 진군하여 마침내 쏟아지는 탄환 밑에 쓰러져가는 청년 중에도 있다. 그것은 그 유소(幼少)한 동포와 한가지로 성뢰로 향하여 달리고 빗발같이 쏟아지는 포탄 중에 엄연히 서서 “코뮨 만세”라고 절규하면서 서거한 저 기민한 지성의 소지자, 혐오와 동지를 훌륭히 구별 선택할 힘을 가진 파리의 무의무탁한 유랑아 중에도 있다. 그것은 악을 목격하고서 그결과가 자기에게 어떻게 될 것인가를 자문할 여가도 없이 반항하고서 다른 모든 사람들은 등을 굽힐지라도 자기만은 직립하고 서서 부정의를 폭로하고 공장의 비열한 전제공장주, 감독의 대폭군인 통치자에게 낙인을 찍어 놓은 사람 중에도 있다. 최후도 만약 우리가 우리들의 산눈을 뜨게 할 수고를 한다면 그리고 인간생활의 그 근저에 횡존(橫存)하고 그들이 받는 통치와 압제에도 불구하고 각양각종의 방식으로 그 자신을 전개할 수가 잇게 만들어 놓은 것은 무엇이었던가를 주목한다면 모든 무수한 봉사적 행위 즉 너무 저명하지 않고 따라서 널리 알려져 있지 않은 또 거의 항상 보답도 없는 무수한 봉사적 행위가 부단히 관찰될 수가 있는 것으로서 (특히 부인들 사이에) 이러한 행위 중에도 그것이 있는 것이다.
이러한 남자와 여자들 중의 어떤 사람은 매몰되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은 큰 장면내부에 있어 배후역을 한 사람도 있다. 그러나 그들이 인류의 진보를 창조하는 것이다. 그래서 인류는 그것을 알고 있다. 이런 것이 인류가 이러한 사람들을 존경을 가지고 포옹하고 신화를 가지고 포장한 소이이다. 그것은 그들을 친미한다. 그들을 옛이야기와 시가와 비사의 주인공으로 만들기도 한다. 그것은 우리의 많은 사람들에게 결핍되어 있는 바 용기와 선과 사랑과 헌신적 정신을 상찬하는 것이다. 그것은 그들의 기억을 청소년들에게 전한다. 그것은 가정과 친구와의 좁은 범위 내에서만 활동하던 사람들을 상기도 시킨다. 그리고 그들의 기억을 가정전설로써 존중한다.
이러한 남자나 여자가 진정한 도덕 그 이름에 상부(相符)하는 유일의 도덕을 이루어놓는 것이다. 그 밖에 다른 것은 모든 관계상에서 단순한 평등에 불과하다. 그들의 용기가 없었다면 그들의 헌신이 없었다면 인류는 비열한 돈셈이나 하고 지나는 탁류 중에서 늙어빠지고 말았을 것이다. 미래의 도덕 즉 우리의 자손이 돈셈이라 하는 일을 폐지할 때, 그리고 모든 정력과 용기와 사랑을 가장 적용하는 일은 이러한 힘이 필요가 가장 강하게 느낀 경우에 그것을 적용하는 것이라고 하는 관념하에 성장할 때 거기에 출현할 그 도덕을 준비하는 사람들은 곧 이러한 남녀들이다.
이러한 용기 이러한 헌신은 어느 때든지 존재하였었다. 그것은 사회적 동물들 사이에도 발견된다. 그것은 가장 폐퇴한 시대에서일지라도 인간들 중에 발견된다.
그러므로 종교는 항상 그것을 유용하여 그들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유통화폐로 변하고 말았다. 만약 종교가 지금도 아직 생명이 붙어 있다면 그것은 확실히 그들이 이 헌신과 용기에 항상 호소하는 까닭이다. ―무지는 별문제로 치고 그리고 혁명가 특히 사회주의자들이 호소하는 것도 이것이다.
이것은 설명하려는 데에서 각종의 학파들의 도덕론자가 이전에 우리가 지적한 바와 같은 오류에 함입하고 있다. 모든 신비적인 힘에서도 또 영국의 공리주의학파에 의하여 묘한 형태로 상정된 장사꾼 식의 회계에서도 똑같이 독립하여 이러한 용기나 헌신의 진실한 기원을 지시한 것은 젊은 철학자로 무의식적으로 자유사회주의자이었던 기요(Guyau)이다. 칸트 파도 실증주의자도 또는 진화론적 철학자도 똑같이 실패한 이 점에서 이 자유사회주의의 철학자는 진로를 발견하였던 것이다.
용기와 헌신과 같은 이러한 성질의 기원은 자기 자신의 힘의 느낌이다라고 기요는 말하였다. ‘그것은 확대하는 것을 요구하는 창일(漲溢)한 생명이다’ “자기 속에 자기가 행동할 수 있는 성능이 있다는 것을 느끼는 것은 동시에 무엇을 행동하는 것이 자기의 의무인가를 의식하는 것이 된다.”
각인이 그 생활에 있어서 느끼는 바 그 의무에 관한 도덕적 감정, 즉 모든 종류의 신비주의로써 설명하려고 하든 의무에 관한 도덕적 감정은 그 자체를 행사하고 자기로 하여금 제공하도록 요구하는 바 생활의 과잉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은 힘의 의식이다.“라고 기요가 말하였다.
모든 축적된 힘은 그 선행되어 있던 장애에 대하여 압력을 창조한다. 행동하려고 하는 힘이 행동의 의무이다. 그러므로 지금까지 많은 말을 허비하고 많은 저서로 되어진 이 도덕의 “의무성”은 모두 ‘생활지지의 조건은 생활의 확대이다’라는 개념에 귀착하는 것이다.
“식물은 개화하는 일로부터 자기를 방어할 수가 없다. 때로는 개화하는 것은 사거(死去)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심려는 무용한 짓이다. 수액은 변함없이 빨아올린다”고 청년 아나키즘의 철학자는 결론을 내린다.
인간의 힘과 정력에 충일한 때도 역시 동일하다. 힘은 그의 체내에 축적한다. 그는 그의 생활을 확대한다. 그는 타산 없이 공급한다. 그렇지 않다면 그는 생존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만약에 그것도 꽃과 같이 꽃피는 때 죽지 않을 수 없게 된다고 할지라도 걱정할 것 없다. 수액은 빨아올린다. 만약 수액이 있다고만 하면.
강건하여라. 정서와 지적능력을 가지고 충일하여라. 그리하면 여러분은 여러분의 지성과 여러분의 애정과 여러분의 행동력을 타인들 사이에 광범하게 살포하게 되리라. 이것이 모든 도덕적 교훈이 동양의 금욕주의의 위선을 탈피하고서 도달할 경지이다.
9
인류가 진실한 도덕인에게서 상찬을 받게 되는 것은 그들로 하여금 아무런 보상을 바라지 않고서 그들의 지성과 그들의 감정과 그들의 행동을 제공하도록 그들을 촉진하는 그들의 정력과 생명의 충일 그것이다.
강대한 사상가 지적 생명이 창일하는 사람은 자연적으로 그의 사상을 살포하기를 요구한다. 만약에 사상이 타인에게 전파되지 않는다면 사색은 아무 쾌락도 없는 법이다. 자기가 고통을 인내해 가면서 어떠한 사상을 탐구한 후, 그것을 깊이 주의하여 은닉해 두었다가 이 다음 자기의 명의를 가지고 그것에 꼬리표를 붙이려는 사람은 극히 정신적으로 빈곤한 사람이다. 강력한 지성의 사람은 사상을 가지고 달려나가서 제 힘껏 그것을 살포하는 것이다. 만약에 그 사람이 그 사상을 다른 사람과 함께 향유하지 못하고 사방에 그것을 살포할 수 없다면 큰 불행이다. 왜냐하면 여기에 그의 생명이 있는 까닭이다.
이 점은 감정에 관하여도 동일하다. “우리는 우리 자신만으로는 충분치 못하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고뇌가 요구하는 이상의 눈물을 가지고 있다. 우리 자신의 존재가 정당화할 수 있는 이상의 환희의 수용력을 가지고 있다.”고 기요는 자연으로부터 파악한 상찬할 만한 두어 마디 말로써 도덕의 전(全)문제를 이와 같이 종괄하여 말하였다. 고독한 존재는 불행하다. 불안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존재는 자기의 사상과 감정을 타인과 함께 향유할 수 없는 까닭이다. 우리가 어떤 위대한 쾌락을 느낄 때 우리는 우리가 존재하고, 우리가 느끼고, 우리가 사랑하고, 우리가 생활하고, 우리가 분투하고, 우리가 투쟁하는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다고 원하는 것이다.
동시에 우리는 우리의 의지, 우리의 활동정력을 행사할 필요를 느낀다. 행동하고 활동하는 일은 인류의 대다수가 요구하는 바이다. 이러한 까닭에 불합리한 사정이 남녀로 하여금 유용할 일로부터 분리할 때는 그들은 해야 할 무엇인가를 고찰하고 그들의 활동정력의 영역을 확대하기 위하여 무슨 무용하고 의의 없는 의무까지도 발견하는 것이다. 그들은 이론과 종교와 “사회적 의무” 등을 발견한다. ―그들도 무엇이나 유용한 일을 하고 있다는 확신을 자신이 갖기 위하여 그들이 무용(無踊)을 할 때 그것은 자선을 위한 일이다. 그들이 사치한 의복을 만들기에 자기가 몰락할 때 그것은 귀족의 체면을 지키기 위함이다. 그들이 아무 것도 하지 않을 때 그것은 주의(主義)에 적합하다고 한다.
“우리는 동포를 부조하기를 요구하고 인류가 애를 써가면서 멋을 부리며 오던 마차에 손질을 좀 해달라고 요구한다. 아무리 하여도 우리는 그 주위를 떠들어대면서 빙빙 돌기만 하고 있다.”고 기요는 비유해 말하였다. 이 손질을 해달라는 요구는 대단히 큰 것으로서 그것은 아무리 저급한 동물이라도 모든 사회적 동물 사이에는 발견될만한 일이다. 연일 정치면에 있어서 소용없이 낭비되는 활동력의 거대한 양은 인류라는 마차에 조력하려는 의욕 아니 죽어도 그 주위에서 떠들어대기만 하고 서두르기만 하는 그 표현이 아니고 무엇일 것인가.
물론 이 “의지의 풍요” 즉 행동에 대한 갈망이 감정의 빈약과 ‘창조력이 없는 적성’에 의하여 수반할 때에는 나폴레옹 1세나 비스마르크와 같은 세계를 역행하도록 강행하려는 가면자(假面者)밖에는 아무 것도 생겨나지 않으리라. 한편, 충분히 발달한 감수성을 결한 정신적 풍요는 지식의 진보를 방해하는데 불과한 문학적 과학적 학구와 같은 그러한 불모의 결과를 초래하게 되리라. 최후로 위대한 지성에 의하여 인도되고 있지 못한 감수성은 자신이 모든 애정을 경주하는 남자의 어떠한 수성(獸性)을 만족시키기 위하여 일체를 희성(犧性)에 공하려고 하는 여자와 같은 그러한 인물을 생겨나게 하리라.
만약 생활이 진실로 풍요한 사람이 되려고 하면 그것은 동시에 지성에 있어서나 감정에 있어서나 또 의지에 있어서나 풍요하게 되지 않으면 안된다. 이와 같이 모든 방면에 있어서 풍요한 것이 진정한 생활이라는 것이며 명실상부한 유일한 것이다. 이러한 생활의 일순간을 위하여 그 일섬광이라도 파악한 사람은 불로장생의 생명을 맛보는 것이리라. 이러한 창일한 생활이 없다면 인간은 일찍부터 노쇠해 버리는 것이며 무능한 존재가 되어서 꽃이 피기도 전에 위축하고 마는 식물과 같은 것이 되는 것이다.
“생명없는 생활은 만년쇠퇴하도록 내버려두라”고 청년은 부르짖는다. 살아서 생명을 사방에 살포하기를 요구하는 수액에 충만한 진정한 청년은 부르짖는다. 대개 사회가 폐퇴에 돌입할 적마다 이러한 청년으로부터 나오는 돌격은 새로운 생활이 진흥할 여지를 조성하려고 구(舊)경험적, 정치적, 도덕적 형태를 파괴한다. 가령 한 사람이나 두 사람이 투쟁에 있어서 쓰러질지라도 아무 것도 아니다. 수액은 아직도 오르고 있다. 청춘에 있어서 산다는 일은 그 결과의 여하에 불구하고 꽃이 피는 일인 것이다! 그것은 그 결과를 생각하고 후회하지 않는다.
그러나 인류의 영웅시대에 대하여는 말하지 말고 일상생활만을 생각할지라도 자기의 이상과 일치하지 않고서 산다는 일이 생활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현대의 사람들은 이상을 조소한다는 것을 가끔 듣는다. 그런데 그것이 무슨 까닭인지를 이해하기는 용이하다. 이 이상이라는 말이 너무도 가끔 단순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기만하기 위하여 사용되어 왔기 때문에 그 반동이 일어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또 건전한 일이다. 우리도 역시 왕왕 이렇게 모욕되던 “이상”이라고 하는 말을 새 관념과 일치하는 더욱 새로운 말로써 대치해 놓기를 원하는 바이다.
그러나 말은 무엇이 되었던지 사실은 동일하다. 모든 인류는 그 이상을 가지고 있다. 비스마르크도 자기의 이상을 가지고 있다. ―아무리 기묘한 것이라고는 하지만―즉 피와 철과 정부라고 하는 이상이었다. 비속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자기의 이상을 가지고 있다. 가령 그것이 감벳다의 은의 욕장(浴場)과 쓰롬벳트를 요리하는 일이거나 쓰롬벳트와 욕장을 매수하기 위하여 지불해야 할 수많은 노예를 가지고 강제하는 그러한 귀찮음이 없는 일이라 할지라도.
그러나 그러한 것들 외에 더욱 숭고한 이상을 의식하고 온 사람들이 있다. 금수의 생활은 그를 만족시킬 수 없었다. 굴종, 허위, 악신앙, 음모, 인간관계의 불평등은 그에게 증오의 생각으로 충만케 하였다. 자신도 그 대신에 굴종하고 거짓말쟁이가 되고 음모가가 되고 타인의 신상에 권세를 부리는 주인공이 되는 것이 어떻게 그에게 될 수 있을 것인가? 그는 만약에 인간들 사이에 더욱 좋은 관계가 존재하여 있었던들 생활은 얼마나 더 훌륭히 좋은 것이 될 수 있었을까를 별견(瞥見)하고 있다. 그는 노상에서 만나는 사람들과 더욱더 좋은 관계를 수립하기에 성공할 힘을 자기 자신에게서 느끼고 있다. 그는 이상이라고 칭하고 있는바 그것을 의식하고 있는 것이다.
이 이상은 어디로부터 오는가? 어떻게 해서 그것은 일방으로는 유전에 의하여 타방에 있어서는 생활의 인상에 의하여 형성되는 것일까? 우리는 그것을 모른다. 최대한 우리는 우리 자신의 자서전에서나 다소간이나마 진실로 그 이야기를 고백할 수가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것은 현재 목전의 사실이다. ―가변적이며, 진보적이며, 항상 살아있기는 하지만 그러나 외계의 영향에 들어 내놓아져 있는 것이다. 그것은 활력의 최대다량, 생의 환락의 최대다량을 주워주는 그것에 대한 대부분 무의식적인 감정이다.
인생은 이 이상의 감정에 응답하는 조건에서만 신선하고 풍요하고 감각에 풍부한 것이다. 이 감정에 ‘거슬러서’ 행동할 것 같으면 여러분은 여러분의 생활이 그 자체상에 반발적으로 왜곡되어 오는 것을 느낄 것이다. 그것은 벌써 화합되지 못하는 그 생기를 잃고 있다. 여러분의 이상에 생생히 불충실하다면 여러분은 여러분의 의지와 여러분의 활동력을 마비하는데 의하여 종언을 고하리라. 여러분은 여러분이 이전에 알고 있던 생기와 결의의 발랄성을 벌써 회복하지 못하게 되리라. 여러분은 무기력한 사람이 되리라.
한번 여러분이 인간이라고 하는 것을 독립해서 활동하는 신경중추와 뇌중추의 합성물로써 바라볼 때는 거기에 하등의 신비하다는 것은 조금도 없는 것이다. 여러분 중에 경쟁하고 있는 각종의 감정들 사이를 준순(浚巡)할 것 같으면 여러분은 문득 유기체의 조화를 파괴하게 되리라. 그리고 여러분은 의지가 없는 병자가 되게 되리라. 여러분의 생활의 예리성은 감멸(減滅)되고 말리라. 여러분은 쓸데없이 타협을 요구하리라. 여러분의 행동이 여러분의 뇌수의 이상적 개념과 일치하고 있었을 시대의 여러분과 같은 벌써 여러분은 완전히 강력한 생기 발랄하였던 사람은 아니게 되리라.
10
그러므로 이것을 결론내기기 전에 우리는 ‘이타주의’와 ‘이기주의’라고 하는 이 두 개 용어 관하여 한 마디 하려고 한다. 이 두 개의 용어는 부단히 우리의 귓전을 울리는 영국의 학파가 만들어 낸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가 여기에 대하여 논술하지 않은 이유는 우리는 영국의 도덕학자들이 수립하려고 노력하던 이 구별을 두 개 용어 중에 볼 수가 없는 까닭이다.
우리가 “우리에게 하여 주기를 원하는 바와 같이 너도 타인에게 하라”고 말할 때 우리는 이것을 이타주의를 주장하고 있는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이기주의를 주장하고 있는 것인가? 차라리 우리를 더 한층 높은 처지를 취하여 가지고서 각개인의 행복은 자기의 주위의 모든 사람의 행복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모르긴 모르되 비교적 행복한 생활이 타인의 불행 위에 세워진 사회에서는 혹 수년간은 가능할는지 모르나 그러나 이러한 행복은 사상누각(砂上樓閣)과 같은 것이다. 그것은 영속할 수 없는 것이다. 가장 사세(些細)한 것일지라도 그것은 파종(破綜)될 것이 확실하다. 그것은 평등인의 사회에서 가능한 행복에 비교하면 실로 비참한 것이며 비열한 것일 것이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일반적인 선을 지향하고 나갈 때는 반드시 여러분은 선량한 행동을 하게 되리라고 말하는 바이다. ―우리가 이렇게 말할 때 우리는 이타주의를 선전하고 있는 것일까? 그렇지 않으면 이기주의를 선전하고 있는 것일까? 우리는 단지 사실을 진술하는 것뿐이다.
그래서 여기에 우리는 기요의 말을 의역하여 보자. “강건하여라. 여러분의 모든 행동에 있어서 위대하라. 여러분의 생명을 모든 방면에 발전시키라. 정력에 있어서 될 수 있는 한 풍부하여라. 그리고 이 목적을 위하여 생물 중에서 가장 사회적인 또 사교적인 것이 되라. 만약 여러분이 충분하고도 완전한 풍요한 생활을 향락하기를 원한다면 항상 충분히 발달한 지성에 의하여 인도되어 투쟁하고 위험한 속으로 모험을 하여라―왜냐하면 위험은 그 자체의 큰 쾌락을 가지고 있는 까닭이다. 여러분의 역량을 투입하라. 그것을 타산 속에 붙여 생각하지 말고.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모든 역량을 여러분이 생각하기에 위대하고 선량하다고 느낀 모든 것들 속으로 투입하라. 그리하면 여러분은 행복의 최대량을 향락하게 되리라. 대중과 일체가 되라. 그리하면 생애에 있어서 여러분들에게 어떠한 일이 생길지라도 여러분은 여러분이 존중히 여기는 사람들의 심장이 여러분의 그것과 일체가 되어 고동됨을 느끼리라. 다른 면에 있어서 여러분의 비겁하게 여기는 사람들의 심장이 여러분과 보조를 맞추지 않는다 할지라도.” 우리가 이와 같이 말하 때 우리는 이타주의를 설명하고 있는 것일까? 그렇지 않으면 이기주의를 설명하고 있는 것일까?
투쟁하고 위험에 직면하고 구원하기 위하여 물 속에 뛰어드는 일 등은 인간에만 한한 일은 아니다. 고양이에게도 있다. 우리에게 역행하는 불평등을 종식시키기 위하여 보리밥덩이로 생활하는 일, 애정에 불타는 것과 같은 사람들과 우리 자신이 조화하는 것을 느끼는 일 또는 우리 자신이 그들에게 사랑을 받고 있음을 느끼는 일. 이런 사실은 뢰약(瀨弱)한 철학자들에게는 모르면 모르되 희성(犧性)을 의미하리라. 그러나 정력과 힘과 생기와 청춘에 충일한 남녀에게는 그것은 생명의 의식적 환락이다. 이것은 이기주의인가? 혹은 이타주의인가?
통칙적으로 이타주의적 감정과 이기주의적 감정의 사이에 예상되든 충돌상에 그 체계를 구축하고 있는 도덕론자들은 미혹하고 있는 것이다. 만약 이 충돌이 진실하다면 또 만약 개인의 이해가 실제로 사회의 그것과 충돌하고 있는 것이라면 인류는 결코 존재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또 동물의 어떠한 족속이라 할지라도 그 현재의 발달에까지 도달하지 못하였을 것이 확실하다. 만약 군체(群體)의 행복을 위하여 노작(勞作)하는 것이 모든 개미들에게 있어서 큰 쾌락이 아니었다고 하면 그 개미의 군체는 결코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 확실하다. 그러므로 개미는 현재의 상태―곤충류 중의 최고의 발달을 한 동물 즉 확대경 밑에서도 감별하기가 곤란할 만한 뇌수를 가지고 그리고서도 인간의 보통뇌수와 거의 한가지로 유력한 뇌수를 가진 동물―는 있을 수 없었을 것이다. 만약 조류가 그 이동함에 있어서 또 새끼를 양육하기 위하여는 조치(調治)한 용의(用意)에 있어서 또 맹조로부터 그들의 사회를 방어하기 위한 공동동작에 있어서 심심한 쾌락을 발견함이 없었더라면 조류는 지금 현실에 도달하여 있는 것 같은 발달상태에는 결코 도달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조류의 형은 진보하기는커녕 그 대신 퇴보하였을 것이다.
그러므로 스펜서가 각성원의 복지가 종족의 복지 중에 융화하리라는 시기를 미래에 전망함에 당하여 그는 한 가지 사실을 망각하였었다. 즉 ‘만약에 각개성원과 사회의 양자가 모든 시대에 있어서 귀일(歸一)하여 있지 않았더라면’ 진화는 동물계의 그만한 것까지도 결코 실현될 수가 없었다고 하는 사실이다.
각개성원의 복지와 종족의 그것이 확실히 일치하고 있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개체성원이 불소(不少)히 동물계에도 인류의 종족 중에도 존재하여 있었으며 또 지금도 아직 존재하고 있다. 그들은 강렬한 생활을 생활하는 것이 각개인의 목적인 동시에 생활의 최대강도는 최대의 사교성에서 또 자기와 타인가의 가장 완전한 귀일성에서 발견되는 것이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지성의 결함, 오성(悟性)의 결함에 불과한 것이다. 모든 시대에 있어서 유한한 지성의 사람들이 존재하여 있었다. 모든 시대에 있어서 우둔한 자도 있었다. 그러나 어떠한 역사의 시대에 있어서도 또 지질학적 시대에 있어서도 결코 개인의 이해와 사회의 이해가 충돌하였던 일은 없었다. 태고적부터 이 양자는 귀일해 있었다. 그러므로 이것을 가장 잘 이해하고 있던 사람들이 항상 완전한 생활을 향락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기주의와 이타주의의 구별은 우리의 견해로서는 배리(背理)이다. 인간이 그 이기주의와 이타주의의 두 개 감정간에 실현하고 있는바 그 타협(만약 우리가 공리주의를 믿는다면)에 대하여 우리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까닭은 여기에 있는 것이다. 이러한 타협은 자기 자신의 마음을 아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우리가 평등의 원칙과 일치하게 생활하기를 원할 때 생활현상에 있어서 실제로 일어나는 것은 도처에서 평등의 원칙이 유린되어 있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느끼는 바이다.
우리의 식물(食物)이나 우리의 침상이 아무리 변변치 아니한 것이라 할지라도 다리 밑에서 자는 사람이나 보리밥 한 덩이도 변변히 못 얻어먹는 허다한 사람에게 비하면 우리는 그야말로 로스차일드(로스차일드는 영국의 세계적 대부호이다)이다. 우리가 지적 예술적 쾌락을 누리는 정도가 아무리 근소할지라도 근육노동에 의하여 극도로 피로해 가지고 집에 돌아와서 예술이고 과학이고 쾌락을 느낄 수 없이 그런 것들의 고상한 환락은 애당초 알지도 못하고 살다가 죽고 마는 수백만의 사람들에게 비하면 우리는 오히려 로스차일드이다.
우리는 우리가 아직 평등의 원칙을 그 결론까지 실현하지 못하였다는 것을 느낀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사정과 타협을 하지 않으리라. 그뿐만 아니라 우리는 그것에 대하여 반역하는 바이다. 그러한 등등의 사정은 우리의 심경에 대단한 괴로움과 증오감으로 억색(抑塞)케 하는 바이다. 그러한 등등의 사정은 우리로 하여금 혁명가가 되게 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감정에 거슬리는 것들과 장사꾼의 에누리흥정을 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모든 타협을 배격한다. 그리고 이러한 사정에 대하여는 죽기까지 싸울 것을 맹세하는 바이다.
이 중에는 어떠한 타협도 있을 수 없다. 여기에 확신을 얻은 사람은 만사는 자연히 변하여 가는 것이라고 하는 희망을 품고서 조용히 재워주기를 원치 않는다.
지금이야말로 우리는 이 제목의 최종 결론에 도달하였다. 이미 논술한 바와 같이 도덕적 개념이 전연 변화할 시대가 있다. 어떤 사람은 자기가 지금까지 도덕적이라고 생각하고 있던 일이 가장 심각한 부도덕이라고 지각한다. 어떤 경우에는 근본적으로 부도덕인 것은 습관이며 존중되던 전통이다. 또 다른 경우에는 우리는 도덕조직이 한 계급의 이익을 위하여 구성되어 있음을 발견하다. 나는 그러한 도덕들을 내던져버리고 “혁명적 항쟁을 시작하라”고 부르짖어 외친다. 그리고 “혁명적”으로 행동하는 것이 의무도 되는 것이다.
이러한 시대는 비판의 시대인 까닭에 우리는 이러한 시대를 환영하자. 그러한 것은 사상이 사회에 움직이고 있는데 대한 착오없는 상징이다. 보다 더 높은 도덕이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도덕은 어떠한 것이었던가 하는 것에 대하여 우리는 인간과 동물의 연구를 기초로 하여 채택함에 의하여 원리가 이루어진 것이다.
우리는 오늘에 이르기까지도 대중이나 사상가들의 관념 속에 그 자체를 형성하고 있는 도덕의 종류를 고찰하여 보았다. 이 도덕은 하등의 명령을 발하지 않는다. 그것은 종교나 법률이나 또는 정부에 의하여 개인들이 서로 분리되는 것을 거부하는 것과 같이 추상적 관념에 따라서 개인들을 판에 박아놓다시피 하는 것을 절대로 거부하리라. 그것은 각 개인 개인에게 충분하고도 완전한 자유를 맡겨두는 것이다. 그것은 사실의 단순한 기록에 불과한 것이다. 즉 신학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이 신학은 인간에게 경고하리라. “만약에 자네가 자네네들 중에 힘을 의식하지 못한다면 만약 자네들의 정력이 강렬한 인상도 없고 심심한 환락도 없고 그렇다고 또 심각한 비애도 없는 무미단조한 생활을 하기에 족할 뿐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면 자네는 평등이라는 말뿐인 단순한 원칙에 그저 따라가기만 하면 그만이다. 평등의 관계에 있어서 자네는 자네네들의 박약한 정력에 알맞는 그만한 행복의 최다량을 아마 발견하리라.”
“그러나 만약에 자네가 자네들 중에 청춘다운 힘을 느낀다면 또 만약 자네네가 살려고 원한다면 더욱 또 만약에 자네네가 완전히 충실하고 창일하는 생활을 향락하려고 원한다면―즉 생물이 염원할 수 있는 최고의 쾌락을 알고 있다고 하면 강건하라, 위대하라, 자네가 하는 모든 것에 있어서 활력이 있으라.”
“자네의 주위에 생명의 씨를 뿌리라. 만약 자네가 기만하고 거짓말을 하고 모략을 하고 사기를 한다면 자네는 그것으로 인하여 자네 자신을 비열하게 만들고 위축하게 하고 자네 자신의 박약하다는 것을 미리 고백하고 자기 자신의 주인놈 보다도 악렬하다는 감을 느끼고 있는 아내에게 노예의 역할을 연출하고 있는 것이라는 데 주의하라. 만약에 그리하는 것이 자네를 기쁘게 하는 것이라면 그리해 보라. 그러나 인류는 자네를 야비한 모욕을 받을 만한 뢰약한 자라고 멸시를 하고서 거기에 해당한 대우를 자네에게 하리라. 자네 자신의 힘이 있다는 입증을 갖지 못한 까닭에 인류는 자네에게 대하여 불쌍한―다만 불쌍히 여길뿐인―놈이라고 치고 행동하리라. 이와 같이 자네가 자기 자신의 멋대로 자네의 정력을 마비할지라도 인류에게 죄를 돌리지 말라. 다른 면에 있어서 강건하라. 그리고 한번 자네가 부정의를 보고서 그것을 이러 이러한 것―생활에 있어서 불평등, 과학에 있어서 허위 또는 타인에게서 받은 고민―이라고 인정한다면 그 불공평, 그 허위 또는 부정의에 대하여 반항하기 위하여 분기하라.”
미주
1) 러시아의 허무주의는 중국의 노자장자의 허무주의와는 달라서 혁명적인 것으로 러시아의 초기사회운동의 핵심이 되어 있었다. 알렌산더 삐어크맨은 러시아의 자유사회주의자들의 일을 허무주의자라고 말하였다고 한다. (역자주)
2) 칸트는 18세기의 독일의 철학자로서 그가 말하는 “지상명령”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의 양심의 명령은 개인의 이익이라든가 편익이라든가의 방편이 아니라 1에 2를 더하면 3이 된다고 하는 것이 필연적이 되는 것과 같이 양심의 명령도 이성의 필연적 형식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3) 벤담은 18세기로부터 19세기에 걸쳐서 영국의 윤리학자로서 그의 학설을 공리주의라고 명칭하고 있다. 그의 학설에 의하면 선이라고 하는 것은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을 말하는 것으로서 인간은 행복을 구하는 곳에 도덕을 갖게 되는 것이다.
4) 백과전서가(百科全書家)는 프랑스의 철학자 듸테로를 주창자로 한 계몽운동가로서 지적 운동에 의햐여 민중의 해방을 획책하려고 하였던 것이다. 그들은 자유주의자로서 그 사업으로써 백과전서를 간행하였다. 이것이 프랑스의 인심에 절대한 영향을 끼쳐 프랑스 대혁명의 도화선으로 되었다.
5) 바리새는 유태의 종지(宗旨)의 하나로써 예수시대에 전성하였던 것이다. 극단의 형률(刑律)을 지키는 것을 특색으로 하고 도덕적 결벽을 주의로 삼았다. 금일에 와서는 위선자의 대명사가 되고 말았다.
6) 존 스튜어트 밀은 영국의 철학자요, 경제학자로서 벤담의 사상을 계승하여 공리설을 완성하였으나 벤담의 양적 공리주의에서 벗어나 질적 공리주의를 주창하였다. 경제학에 있어서는 스미스, 리칼도, 말서스를 종합하여 자본주의의 정통학파를 완성하였으나 만년에는 사회문제를 논하고 사회주의적 경향을 가졌다.
7) 체르니 체프스키는 러시아의 혁명적 사회주의자로 『귀족의 농민에게』라고 하는 격문을 발표하고 투옥되었다. 옥중에서 『무엇을 할 것인가』라고 하는 소설을 저작하였다. 유물론자로서 경제학자이었다. 윤리설은 역시 공리주의를 취하였다. 맑스는 그를 대단히 상찬하였다고 한다.
8) 큐요는 프랑스의 사상가였으며 윤리학, 미학, 종교학에 대하여 사회적 연구의 필요를 주장하고 생의 존재는 일절존재의 핵심이며, 개체의 생명은 사회적으로 확대하여 연대성의 본질을 구성한다고 주장하고 또 이것을 도덕, 예술, 종교에 공통한 원리로 하였다. 크로포트킨은 상당히 큐요의 설을 칭찬하고 있다. 그래서 그를 아나키스트의 철학자로고 평하였다.
9) 이것은 미클류 맥클레이(Miklukho McClay)가 말한 바이나 뒤의 관찰은 신빙할 수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10) 교조(敎祖)의 말에 “다른 사람이 너에게 해주기를 원하는 바를 다른 사람에게도 역시 그와 같이 하라.” 적극적 명령을 소극적 형태로 고쳐 말한 것이다. (마태복음 7장 12절)
11) 아담 스미스는 영국의 경제학자로서 특히 자본주의경제학자로서 유명하고 그의 저서 「국부론」은 널리 세상에 알려졌다. 그러나 그는 청년시대에 도덕철학자였으며 29세시에 글라스고 대학의 도덕철학교수로 있었다. 그의 논리학설에는 크로포트킨도 상당히 경복(敬服)하고 있었으나 그의 경제학에는 절대로 반대하였다. 어째서 스미스는 이와 같은 경제학자로 급변하였을까? 그것은 그가 대학교수를 사임하고 한 청년귀족의 보호를 받게끔 되었던 까닭이다.
12) 페로브스카야는 러시아의 여성 혁명가요, 귀족계급에서 출생한 허무주의자다.
13) 농노를 해방한 사람이라고 한 말은 러시아 황제 알렉산더 2세를 두고 한 말이다.
14) 프랑스의 아나키스트로서 여성의 몸으로 대단한 투쟁으로 인하여 여러 차례 투옥되었었다. 후에 런던에서 국제학교를 창립한 웅변가였다. “노동자의 여신”이라고까지 지칭받던 사람이었으며 「사회의 미생물」은 그의 명저서이다.
15) 푸리에는 프랑스의 초기사회사상가로서 공상적 사회주의자라고 지칭되고 있다. 그러나 그가 가상한 미래사회의 구상도(파란지라고 이름하는)에는 공상도 있고 수긍할 수 없는 점도 있다. 그러나 그 표현한 사상에는 자유사회주의와 자유연합주의에 흡사 상통하는 점이 있다. 어느 누구든지 내일을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그리고 내일을 생각하는 일 자체가 공상이 아닐 수 없고 공상이라면 공상가가 아닌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16) 이 근대작가 중 노르웨이의 입센이 그의 희곡 중에서 이 사상을 가장 잘 표현하고 있다.
'言 > 사는이치知' 카테고리의 다른 글
책-상상력에 권력을 (0) | 2010.05.14 |
---|---|
아나키즘의 현대적 조명 (0) | 2010.05.12 |
아나키즘? (0) | 2010.05.12 |
아나키즘anarchism (0) | 2010.05.12 |
책-입술(시집) (0) | 2010.02.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