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나키즘이란 무엇인가?(허정균번역)
머리말
현대문명은, 잠재적인 3개의 파멸적 위기를 배고 있다.
(1) 사회적 붕괴의 위기
자세하게 말하면 빈곤, 노숙자, 범죄, 폭력, 소외, 마약이나 알코올의 남용, 사회적 고립, 정치에의 무관심, 인간성의 상실, 자조·상호 부조적인 커뮤니티 구조의 쇠퇴 등이 진행되고 있는 것.
(2) 지구 환경을 파괴하는 위기
모든 생명이 의존하고 있는 섬세한 생태계의 파괴가 진행되고 있는 것.
(3) 대량 살륙 병기가 확산하는 위기
특히 핵병기의 확산이 진행되고 있는 것.
미디어의 주류를 이루는 논조나, 경제의 전문가·정치가등의 전통적인 의견에서는, 「이러한 위기는, 각각 개별의 요인을 가지는 별개의 문제이다. 그러니까 다른 문제와는 구별해 각각 대처하면 좋다」라고 한다. 하지만, 이 전통적인 방법이 잘되지 않는 것은 명백하다. 문제는 지금도 자꾸자꾸 악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신속히 적절한 대처를 하지 않으면 파멸적인 전쟁, 생태 환경의 궤멸, 도시의 붕괴 등의 대재앙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아나키즘은 이러한 위기를 포괄적으로 이해하는 방법을 제시한다. 그것들에 공통되는 근본 원인을 찾으면 되 것이다. 이 근본 원인은자본주의나 공산주의를 막론하고 문명사회의 주된 조직 모두가 가지는 hierarchy 권력에 있다. 따라서 무정부주의자의 분석은 「현대의 주된 사회조직은, 모두 hierarchy의 형태이다」라고 하는 사실로부터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된다.
회사·관청·군·정당·종교 단체·대학 등은 피라미드 구조의 정점에 권력이 집중하도록 조직되고 있다. 이러한, hierarchy에 내재 하는 권력 관계가 개인이나 사회·문화에 대해서 얼마나 나쁜 영향을 주는가를 지금부터말하고자 한다. 이 FAQ의 전반(섹션 A-E)에서는 hierarchy적인 권력과 그 해독에 대해 무정부주의자에 의한 상세한 분석을 보여준다.
여기서 주의할 것은,'아나키즘은 단순한 부정적·파괴적인 현대문명비판이다'라고 생각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일례를 들면, 아나키즘은 자유로운 사회를 제안하고 있다. 에마 골드맨은 「무정부주의자의 과제」에서 불러야 할 일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오늘 우리가 직면하는 문제는 다른 사람과 함께 있으면서 얼마나 자기 자신이 되는가 하는 것, 전인류라는 공감을 깊게 느끼면서, 게다가 자신의 개성을 잃지 않고 유지하려면 어떻게 하면 좋은지, 라고 하는 것이다. 」[Red Emma Speaks, pp. 158-159]
바꿔 말하면, '타인을 희생하지 않고 개인의 잠재적인 개성을 개화시키는 것 같은 사회는 어떻게 하면 창조할 수 있는지' 라고 하는 것이다. 탑 다운에 의해 지배되는 중앙집권적 hierarchy 구조에서는 이것을 실현할 수 없다. 벤저민 탁카를 인용하면 인간성에 관련되는 문제는 개인이나 개인의 자발적 연합에 의해 운영되는 사회를 구상해야 하는 것이다. [Ben Tucker, Anarchist Reader, p. 149].
FAQ의 후반(섹션 I, J)에서는 이와 같이 「보텀 업」방식으로 사회를 조직하는 아나키즘의 적극적인 제안에 대해 말한다. 아나키즘의 건설적인 진수에 대해서는 FAQ의 전반에 있어도 볼 수가 있을 것이다. 마르크스주의와 우익 「리버타리아니즘」은 사회 문제에 대한 잘못된 해결책을 제기하고 있다. 그러한 해결책에 대한 무정부주의자로부터의 비판(각각 섹션 F와 섹션 H)에서 아나키즘의 건설적인 핵심을 볼 수가 있다.
크리포드 하퍼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좋은 생각은 항상 심플하지만 아나키즘도 제대로 생각하면 매우 심플하다. 인간은 명령되어 사는 것보다 권력으로부터 자유롭게 살 수 있을 때가 베스트다. 」[Anarchy: A Graphic Guide, p.vii]
개성을 최대한으로 살리기 위해, 즉 사회의 자유를 추구하기 위해서 무정부주의자는 「사람들을 억압하는 것 같은 모든 조직」의 해체를 바라고 있는 것이다.
모든 무정부주의자는 자유로운 사회를 요구하고 있다. 그것은 자유로운 인간성의 성장 앞에서 강압적인 정치 조직·사회조직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게 되는 사회인 것이다. [Rudolf Rocker, Anarcho-Syndicalism, p. 16]
조직의 억압적인 성격은 그 hierarchy 구조에 유래한다고 하는 것을 지금부터 살펴보자.
아나키즘은 사회·경제·정치의 이론인 것이지 이데올로기는 아니다. 이 차이는 매우 중요하다. 기본적으로 이론은 「당신이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만, 이데올로기는 「당신이 생각에 소유된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아나키즘은 하나의 결정된 사상이다. 그러나, 항상 진화·유동하는 정황에 대해서 유연하며 새로운 데이터에 비추어 유연하게 수정이나 변경이 된다. 사회가 발전하거나 변화하거나 하면, 아나키즘도 또 발전해 변화하는 것이다.
그에 반해 이데올로기는 사람들이 도그마에 신앙하고 있는 경직된 일련의 사상이며, 언제나 현실을 무시하거나 올바르다고 여기도록 강요한다. 이데올로기에 맞도록「현실」을 바꾸거나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침대의 크기에 무리하게 사람의 신장을 맞추는 것 같은 경직성이 압제나 모순의 근원이다. 이것은 레닌주의에서도, 오브젝티즘에서도, 「리버타리아니즘」에서도, 어떤 종류의 이데올로기에서라도 모두 같다. 독트린의 이름 아래 진정한 개인을 파괴한다. 그러나 그것은 지배 엘리트의 이익에는 대체로 부응하게 되어 있다. 미하일 바쿠닌은 말한다.
지금까지의 인류의 역사에서는 많은 궁핍한 사람들이 냉혹한 추상 개념의 이름 아래에서 희생되어 왔다. 즉, 신·국가 권력·민족의 영광·역사적 권리·사법권·정치적 자유·공공의 복지 등이 그래서 있다. [God and the State, p. 59]
도그마는 경직되어 움직이지 않는 것이며 죽어 있는 것 같은 것이다. 종교적인 도그마에서도 비종교적인 도그마에서도, 그것들은 대체로, 죽은 「예언자」의 실적이지만, 제자들이 우상에 제사 지내는 돌처럼 불변인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 무정부주의자는, 살아 있는 것이 죽은 것을 매장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럼으로써 살아 있는 사람이 보다 나은 삶을 살 수가 있다. 죽은 사람의 일은 살아 있는 사람이 결정해야 하며 그 역은 아니다. 이데올로기는 비판적인 생각에 대한 네메시스(복수의 여신)이다. 그것은 스스로 생각하는 것의 「무거운 짐」으로부터 우리를 해방해 주는 것인양 「정답」이나, 법칙·원칙으로 이루어진 한 권의 경전을 준다.
이 FAQ를 만들어「정답」이나 새로운 「경전」을 주려는 의도는 우리에게는 없다. 우리는 과거부터 현재까지의 아나키즘에 대해 설명할 것이며 그 현재의 형태에 초점을 맞추어 지금 왜 우리가 무정부주의자가 되었는지를 설명할 뿐(만큼)이다. 이 FAQ는 당신 자신 스스가 분석하고 생각해 주도록 하는 것이 목적인 것이다. 만약, 당신이 새로운 이데올로기를 찾고 있다면 미안하지만 아나키즘은 당신에게 적합하지 않다.
무정부주의자가 현실적이고 실제적으로 되려고 노력하고 있다고 해도 「전문가」나 「권위」가 「올바르다」라고 말하면, 그것을 무비판에 받아들여 버린다. 그러면 언제까지나 노예인 채다. 바쿠닌은 쓰고 있다.
사람은 자기의 신념에 따라 자신의 깊은 확신으로부터 행동하며 이야기할 때가 가장 강하다. 따라서 주위의 상황이 어떻더라도 자신이 무슨 말을 해야 하며 무엇을 이루어야할 것인가를 알고 있다. 비록 넘어지는 일이 있어도 자기 자신이나 자신의 주장을 부끄러워할 것은 없다. 」[Albert Meltzer, I couldn't Paint Golden Angels, p. 2로 인용]
바쿠닌이 말하고 있는 것은 독립한 정신의 강인함 즉 자유가 주는 강함이다. 우리는 타인이 말하는 것을 믿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생각해 자기 자신으로 행동하는 것을 추천한다!
마지막으로, 말할 필요도 없는 것이지만 이것이 아나키즘의 모두는 아니다. 여기에 씌어 있는 것에 동의 하지 않는 무정부주의자도 많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독자가 스스로 생각해 주기를 기대하고 쓴 것이다. 우리는 아나키즘의 기본적인 생각이나 그 생각을 응용해 우리가 분석한 것을 나타내고 싶다고 생각하는 데 지나지 않다. 그렇지만, 응용의 방법에 대해 여기저기 동의 할 수 없는 곳이 있다고 해도 우리가 표명하고 있는 생각의 핵심은 모든 무정부주의자가 찬동 해 주는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다.
A. 1 아나키즘이란 무엇인가?
아나키즘이란, 무정부 상태, 즉 「지배자나 군주의 없는 상태」를 목표로 하는 정치사상 [P-J Proudhon, What is Property, p. 264], 바꿔 말하면, 「개인이 평등한 입장에서 자유롭게 협력하는 사회」의 창조를 목표로 하는 정치사상이다. 아나키즘은, 국가에 의한 지배든 자본가에 의한 지배든, hierarchy 지배의 모든 형태에 반대한다. 그것은 불필요할 뿐(만큼)은 아니고, 개인이나 개성에 있어 유해하다.
무정부주의자, L=수잔=브라운의 말:
아나키즘은, 일반적으로는 「폭력적인 반국가 운동」이라고 이해되고 있다. 하지만, 아나키즘은 단순한 「정부 권력에의 반대」라고 하는 의미를 넘은 깊은 뉘앙스를 가지고 있다. 무정부주의자는, 「사회에는 권력이나 지배가 필요하다」라고 하는 생각에 반대인 것이다. 그리고 그 대신에 협동적이며 반hierarchy적인 사회·경제·정치의 조직 형태를 제창하는 것이다. [The Politics of Individualism, p106]
그러나 「아나키즘」이나 「무정부 상태」가 가장 오해 받고 있는 정치사상인 것은 틀림없다. 일반적으로 이러한 말은 카오스나 무질서의 의미로 사용되고 있고, 그 때문에 당연히 무정부주의자도 카오스나 「약육강식의 법칙」에의 회귀를 목표로 하고 있는 것이라고도 생각되고 있다.
이러한 오해의 프로세스는, 역사적으로도 예가 없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면 한사람에 의한 지배(전제 지배)가 필요하다고 생각되고 있었던 시대나 나라가 있었다. 그곳에서는 「공화 주의」나 「민주주의」라고 하는 말이 확실히 「무정부 상태」라고 하는 말과 같이 「무질서」나 「혼란」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사용되어 왔다. 기득권이 있어 현상을 유지하고 싶은 사람들은 「현재의 시스템에 반대해도 잘되는 것은 없다. 새로운 사회의 형태는 카오스가 되게 되어 있다」라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거기에 붙여 엔리코=마라테스타는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정부의 지배는 필요하고 무정부상태는 무질서와 혼란을 끌어 일으킬 뿐이다' 라고 모두가 생각하고 있으니까 무정부를 의미하는 무정부 상태가 무질서하게 들리는 것은 당연하며 무리가 없는 것이다. [Anarchy, p12]
무정부주의자들은 「무정부 상태」에 대한 이러한 상식을 바꾸고 싶어 한다. 사람들에게 정부나 hierarchy적인 사회 관계가 유해하고 불필요한 것을 알아 주었으면 한 것이다.
생각을 바꾸자. 정부의 통치는 불필요할 뿐만 아니라 매우 유해하다라고 말하는 것, 무정부 상태라는 말은 무정부를 의미하지만 그것이 누구에 있어서도 가치가 있는 말이 된다고 하는 것을 사람들에게 깨닫게 하자. 그것은, 자연스러운 질서, 개인의 필요와 전원의 이익의 일치, 완전한 단결 속에서의 완전한 자유를 의미한다. [상게서, pp. 12-13]
이 FAQ는, 무정부 상태의 의미나 아나키즘에 대해 일반적으로 보급되어 있는 잘못한 생각을 바꾸는 프로세스의 일부인 것이다.
A. 1.1 「무정부 상태」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무정부 상태」라고 하는 말은, 「그리스어」로 「not」나 「without」를 의미하는 접두사 'a', 「지배자」 「지도자」 「장」 「책임자」 「지휘관」을 의미하는 「archos」를 합성한 말이다. 표토르 크로포트킨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무정부 상태는 「권력에 반대한다」라고 하는 의미의 그리스어에서 유래한다. 」 [Anarchism, p. 284]
그리스어로 anarchos와 anarchia는 「정부를 가지지 않는 것」혹은 「정부가 없는 상태」를 의미한다고 받아 들여지는 것이 많다. 아나키즘의 엄밀한 원래의 의미는, 단지 「정부가 없다」라고 하는 것 만이 아니다. An-archy는 「지배자가 없다」혹은 좀 더 일반적으로 「권력이 없다」라고 하는 의미이며, 이 의미로 무정부주의자는 이 말을 계속 사용해 왔다. 예를 들면, 크로포트킨은 아나키즘은 「자본 뿐만이 아니라, 자본주의 권력의 기반인 법률·권력·국가를 공격한다」라고 주장하고 있다.[상게서, p. 150]. 무정부주의자에게 있어서 무정부 상태는 「반드시 일반적으로 생각되고 있는 것 같은 질서가 없다고 하는 의미는 아니고 지배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Benjamin Tucker, Instead of a Book, p. 13]. 데이비드 웨이크는 다음과 같이 능숙하게 정리하고 있는 것이다.
아나키즘은 모든 권력·군주·지배·hierarchy를 부정하며 그것들을 해소하려고 하는 사회·정치사상을 집계한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무정부주의자의 비판은 확실히 정부(국가)에의 비판이 중심이 되지만 단순한 반국가주의는 아닌 것이다. [Reinventing Anarchy, p. 139]
따라서 아나키즘은 단순한 반정부나 반국가의 운동이라고 하는 것보다, 주로 hierarchy에 반대하는 운동인 것이다. 왜냐하면 hierarchy가 권력을 구성하는 구체적인 조직 형태이기 때문이다. 국가는 hierarchy의 최고 형태이니까 무정부주의자가 반국가인 것은 당연하지만, 반국가만으로는 아나키즘의 정의로서는 불충분하다. 이것은 진정한 무정부주의자는 국가 만이 아니고 hierarchy의 모든 형태에 반대한다고 하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브라이언 모리스를 인용하자.
무정부 상태라는 말은 희랍어에 유래해 본질적으로는 「지배자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무정부주의자는 모든 정부 형태나 강제적 권력, 모든 hierarchy나 지배의 형태를 거절하는 사람들이다. 따라서 멕시코의 무정부주의자 흐로레스 메이곤은 국가·자본·교회의 「사악한 삼위일체」라고 부른 것에 반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무정부주의자는 자본주의와 국가에 반대할 뿐만 아니라 모든 종교, 권력 형태에도 반대인 것이다. 그러나 무정부주의자는 동시에 여러가지 수단을 사용해 무정부 상태 상태를 확립하려 하기도 하고 늘어뜨리려고 하기도 한다. 무정부 상태 상태란 억압적 제제도가 없는 분권형 사회, 자발적 관계의 연합을 통해서 조직된 사회인 것이다. ["Anthropology and Anarchism," pp. 35-41, Anarchy: A Journal of Desire Armed, no. 45, p. 38]
이러한 문맥으로 「hierarchy」에 언급하는 것은 최근의 경향이다. 푸르동·바쿠닌·크로포트킨등의 고전적 무정부주의자들은 이 말을 그다지 사용하지 않았다.(그들은 대부분 「권력」(Authority)이라는 말을 이용했지만, 이것은 「권력주의·권위주의」(Authoritarian)를 단축한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hierarchy에 반대해 힘의 불평등이나 개인의 특권에 반대하는 철학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들의 저작물을 읽으면 곧바로 알 수 있다. 바쿠닌은 「공」권력을 공격해 「자연스러운 영향」을 옹호했으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동료를 억압하지 않으려 하는가? 그렇다면 분명하게 아무도 권력(power)을 가져서는 안된다. [The Political Philosophy of Bakunin: Scientific Anarchism, p. 271]
제프 드라한(Jeff Draughn)은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반hierarchy라고 하는 광범위한 개념은 지금까지 혁명 운동(project)에서는 항상 겉에는 나오지 않았다. 최근에야 처음으로 자세하게 연구되되고 사용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어의 「무정부 상태」의 어원에도 이 의미를 볼 수 있는 것은 분명하다. 」 [Between Anarchism and Libertarianism: Defining a New Movement]
'무정부주의자는 hierarchy에 반대하지만 국가나 정부는 반대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강조하고 싶다. hierarchy에는 정치적 관계만이 아니고, 권력적인 경제 관계나 사회 관계, 특히 사유재산과 임금노동에 관계하는 것도 포함된다. 이것은 푸르동의 다음과 같은 주장에도 볼 수 있다.
「자본은 정치 분야에 있어서의 정부와 닮아 있다. 자본주의의 경제사상·정부나 권력의 정책·교회의 신학 사상은 완전히 같은 사상이며, 여러가지 형태로 연결되고 있다. 그 어느 하나를 공격하는 것은 그것들 모두를 공격하는 것과 같다. 자본이 노동에 대해서 실시하는 것·국가가 자유롭게 대하고 하는 것·교회가 영혼에 대해서 실시하는 것, 이 절대주의의 삼위일체는 철학적으로 뿐만이 아니고 실천적으로도 유해하다. 민중을 억압하는 가장 유효한 수단은 민중의 육체·의사·이성을 동시에 노예화하는 것이다. 」 [Max Nettlau에 의한 인용, A Short History of Anarchism, pp. 43-44]
에마=골드 맨은 다음과 같이 자본주의에 반대하고 있다.
자본주의는 「인간이 자신의 노동을 팔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하는 의미이다. 즉 「그 사람의 의향과 판단은 주인의 의사에 종속된다」라고 하는 의미이다. [Red Emma Speaks, p. 50].
40년전 바쿠닌은 다음과 같이 논하며 같은 것을 지적하고 있다.
현행 시스템하에서는 자본가에 의해 「노동자는 자기의 인격과 자유를 일정시간 매각하고 있다. 」 [상게서, p. 187]
따라서 「무정부 상태」는 단순한 「무정부」 만이 아니고 모든 형태의 권력적 조직이나 hierarchy가 존재하지 않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크로포트킨의 말을 들어보자.
「사회에 있어서의 아나키즘의 기원은 hierarchy 조직이나 권위주의적 사회 개념에의 비판, 그리고, 인류의 진보 운동으로 보여지는 제경향의 분석에 있다. 」 [Kropotokin's Revolutionary Pamphlets, p. 158]
마라테스타에 있어서 아나키즘은 「사회적 불공정에 대한 도덕적 반항 속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사회적 병리의 원인」은, 「자본주의적 재산과 국가」라고 생각된다. 억압되고 있는 사람들이 「국가와 재산 쌍방을 전복하려고 했다」라며「아나키즘은 그 때에 태어났던 것이다. 」라고 말한 것이다. [Errico Malatesta: His Life and Ideas, p. 19]
즉, '무정부 상태는 순수하게 반국가이다'라는 주장은 아나키즘을 오해하고 있는 것이다. 브라이언 모리스는 다음과 같이 논하고 있다. 「고전적 무정부주의자의 저작을 음미하면 완전히 명백하게 되지만 '단지 국가에 반대한다' 라는 주장은 한번도 없었던 것이다. 아나키즘은 모든 형태의 권력·착취에 항상 도전해 국가에 대해서 뿐만이 아니고 자본주의와 종교에도 똑같이 비판적이었던 것이다. 」 [상게서, p. 40]
무정부 상태는 카오스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고, 무정부주의자는 카오스나 무질서를 희구하고 있는 것은 아닌, 이라고 하는 것을 분명히 말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지 않고, 우리는, 개인의 자유와 자발적인 협력에 근거하는 사회를 만들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다. 바꿔 말하면, 권력으로부터의 탑 다운에 의해 지게하는 무질서하지 않고, 보텀 업에 의한 질서를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A. 1.2 「아나키즘」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크로포트킨을 인용하면 아나키즘은 「정부가 없는 사회주의 시스템」이다. [Kropotokin's Revolutionary Pamphlets, p. 46]. 바꿔 말하면 「사람에 의한 사람의 착취와 억압의 폐지, 즉 사유재산(자본주의)과 정부의 폐절이다. 」[Errico Malatesta, "Towards Anarchism," p. 75]
그러므로 아나키즘은 정치적·경제적·사회적인 hierarchy가 없는 사회의 창조를 목표로 하는 정치사상이다. 지배자가 없는 「무정부 상태」는 실현 가능하고 그것은 「개인의 자유」와「사회의 평등」을 최대로 하는 사회시스템이다. 자유와 평등이라고 하는 골은 「서로 서로 자립하는 것 」이라고 무정부주의자는 생각하고 있다. 또, 바쿠닌의 유명한 금언에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사회주의 없는 자유는 특권이며 불공정하다. 또 자유로운 사회주의는 노예 제도와 폭정이다. [The Political Philosophy of Bakunin, p. 269]
인간 사회의 역사가 이 점을 증명하고 있다. 평등한 자유는 강한 사람만의 자유이고 자유로운 평등은, 노예 제도를 정당화 하는 구실 이외의 무엇도 아니다.
한마디로 아나키즘이라고 해도 거기에는 여러가지 타입이 있지만 (개인주의적 아나키즘으로부터 공산주의적 아나키즘까지, 섹션 A. 3에 상술) 그 핵심에는 2개의 공통점이 있다. 정부에의 반대와 자본주의에의 반대가 그것이다. 개인주의적 무정부주의자 벤저민 탁카는 말한다. 무정부주의자는 「국가의 폐지와 부당한 이득의 폐지를 주장한다. 사람에 따라 다른 사람의 지배도, 사람에 따라 다른 사람의 착취도 그만두지 않으면 안 된다. 」 [Eunice Schuster, Native American Anarchism, p. 140으로 인용] 무정부주의자는 모두, 이윤·이자·지가 집세를 부당한 이득(즉 착취)으로 간주하고 있어 정부나 국가처럼 그것을 만들어 내는 상황에 반대하고 있다.
L 수잔 브라운은 보다 넓은 의미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아나키즘 안에 있는 연대의 정신은 hierarchy와 지배에 대한 전반적인 비판이며, 개인의 자유를 위해 기꺼이 싸우는 의지의 현상이다. 」 [The Politics of Individualism, p. 108]
국가나 자본가의 권력에 복종 당하고 있어서는, 사람은 결코 자유롭게는 될 수 없으면 무정부주의자는 생각하고 있다. 보르테린 데 쿠라이아는 이하와 같이 요약하고 있다.
아나키즘은 다음과 같은 사회의 가능성을 가르쳐 준다. 생활필수품이 만약에 만명에게 줄 수 있다면 정신과 육체의 완전한 발달의 기회가 만명에게 줄 수 있는 상태가 계속되는 사회이다. 현재는 부의 생산과 분배의 조직이 불평등하게 되어 있지만, 이것은 최종적으로 완전하게 파괴되지 않으면 안되며, 개개인에게 노동의 자유를 보증하는 시스템으로 옮겨지지 않으면 안 된다. 노동의 자유는 노동의 산물의 10분의 1을 세금으로 헌상하게 되는 한 없다. 노동의 자유는 생산 자원과 생산수단으로 자유롭게 접하는 것을 보증하는 것이다. 맹목적 복종을 멈추고 불만을 말하자. 무의식의 불만을 멈추고 의식적으로 불만을 가지자. 아나키즘은 억압의 의식을 눈에 띄게 드러내 보다 좋은 사회를 요구하는 소망을 야기하여 자본주의와 국가에 대해 끝없 전쟁이 필요하다고 하는 감각을 분기시키려고 하고 있는 것이다. [Anarchy! An Anthology of Emma Goldman's Mother Earth, pp. 23-4]
따라서 아나키즘은 무정부 상태, 즉 「지배자가 없다」라고 하는 원칙에 근거한 사회의 건설을 제창하는 정치사상인 것이다. 그 때문에 「사회주의자와 같이 무정부주의자도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토지·자본·기계의 사적 소유의 시대는 끝났다. 사적 소유는 사라지는 운명에 있다. 생산에 필요한 수단은 사회의 공유재산이 되어 생산자의 손에 의해 운용되지 않으면 안 된다. 정부의 기능은 최소한으로 축소하는 것이 사회의 정치 조직으로서 바람직한 본연의 자세이다. 사회의 최종 목적은 정부의 기능을 제로로 가지고 가는 것, 즉 정부가 없는 사회, 무정부 상태까지 가는 것이다. 」[Peter Kropotokin, 상게서, p. 46]
따라서 아나키즘은 현재의 사회를 분석·비판하는 동시에 새로운 사회에 대한 비젼, 현재의 사회를 부정하여 인간의 욕구를 최대한 보증하는 사회 비젼의 가능성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욕구를 만족시킬 수 있는 것은 인간에게 있어 가장 기본적인 자유·평등·연대이다. 이것들에 대해서는 섹션 A. 2로 논한다.
아나키즘은 비판적인 분석을 한다. 바쿠닌은 「파괴에의 충동은 창조에의 충동이다」라고 지적하고 있다. 지금의 사회의 나쁜 점을 이해하지 않고 보다 좋은 사회의 건설은 할 수 없는 것이다.
A. 1.3 아나키즘은 왜 리버타리안 사회주의라고도 불리는지?
「아나키즘」이라고 하는 말에는 네가티브적인 의미가 있으므로 적극적이고 건설적인 면을 강조하기 위해서 지금까지 많은 무정부주의자가 다른 말을 이용해 왔다. 가장 자주 사용되었던 것이 「자유 사회주의」 「자유 공산주의」 「리버타리안 사회주의」 「리버타리안 공산주의」였다. 아나키즘과 리버타리안 사회주의·리버타리안 공산주의는 무정부주의자에게 있어서는 사실상 같은 의미이다.
「아메리칸 헤리테이지 사전」을 살펴보자.
리버타리안: 사고와 행동의 자유를 믿는 사람, 자유로운 의지를 믿는 사람.
사회주의 : 생산자가 정치 권력과 생산·유통 수단의 양쪽 모두를 소유하는 사회시스템.
위의 2개의 정의를 합치면 다음과 같이 된다:
리버타리안 사회주의: 사고와 행동의 자유·자유로운 의지를 믿어 생산자가 정치 권력과 생산·유통 수단의 양쪽 모두를 소유하는 사회시스템.
(사전은 정치사상에는 무지하다라는 평소의 코멘트를 해야 하겠지만, 여기에서는 사전을 사용해, 「리바타리안」은 「자유시장」자본주의를 의미하지 않고 「사회주의」는 국가 소유를 의미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을 나타낸다. 다른 사전에서는 다른 정의를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특히 사회주의에 대해서는... 사전에 의한 정의에 대해 정치적으로 큰 의미가 없는 말들은 여기서 할 생각은 없다. 하고 싶은 사람은 자유롭게 말하시라. )
그런데 , 미국에서 「자유주의당」이 만들어진 이래, 「리버타리안 사회주의」라고 하는 말은 모순되고 있다 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대부분인 것 같다. 많은 자유주의 당원들은 무정부주의자는 「자유주의 사상」에 「사회주의」라고 하는 「반자유론자」사상을 묶어 「사회주의」사상을 받아들이고 쉽게 하려고 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즉, 무정부주의자가 「정당한 소유자」로부터 「리버타리안」의 간판을 훔치려 하고 있다고 말하고 싶은 것 같다.
공연한 트집은 아닌 것 같다. 무정부주의자는 스스로의 사상을 표현하기 위해서 1850년대부터 「리버타리안」이라고 하는 말을 계속 사용하고 있다. 1858년부터 1861년까지 혁명적 무정부주의자 죠셉 데잔크는 뉴욕에서 「르 리베르테이르, 사회운동 저널」을 발행하고 있었다. 한편 「리버타리안 공산주의」라고 하는 말의 사용은 1880년 11월에 프랑스의 무정부주의자 회의가 이 말을 채용했을 때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가 있다. [Max Nettlau, A Short History of Anarchism, p. 75 and p. 145].
「리바타리안」이라고 하는 말이 한층 더 자주 사용되게 된 것은 반무정부주의자의 법률을 회피하기 위해, 그리고 「무정부 상태」라고 하는 말의 부정적인 이미지를 피하기 위해서 1890년대의 프랑스에서 사용되고 나서부터이다(예를 들면 1895년에 세바스찬 폴과 르이즈 밋시르는 프랑스에서 르 리베르테르지를 발간했다). 그 이후로, 특히 미국 이외에서는 리바타리안은 무정부주의자의 사상이나 행동과 항상 연결시켜 사용되었다. 최근의 미국의 예를 들면, 1954년 7월에 아나르코 신디칼리즘을 견지하는 리바타리안 연맹이 결성되어 1965년까지 존속하고 있었다. 그에 대해 「자유주의」당이 등장한 것은 1970년대 초두이며 그것은 무정부주의자가 자신의 정치사상을 말하기 위해서 처음으로 그 말을 사용하고 나서 100년 이상 후( 「리버타리안 공산주의」가 채용되고 나서 90년 정도 후 )이다. 말을 「훔쳤다」 것은 무정부주의자는 아니고 그쪽의 당의 일부이다. 다음 섹션 B에서 「자유주의적 자본주의」라고 하는 사상이 얼마나 모순되고 있는지를 밝히고자 한다.
섹션 I에서는 「리버타리안 사회주의」의 소유 시스템만이 개인의 자유를 최대로 하는 것을 설명한다. 말할 필요도 없지만 현재 「사회주의」라고 불리고 있는 국가 소유는 무정부주의자에게 있어서는 사회주의의 그 어느 것도 아니다. 섹션 H에서 다루는 국가의 「사회주의」는 자본주의의 일변종이며, 사회주의적인 내용을 조금도 가지지 않는 대용품인 것을 자세하게 말하고자 한다.
「리버타리안」이라고 하는 말이 아나키즘에서 유래하고 있는 것을 생각하면, 우리의 사상과 대부분 공유하는 부분이 없는 이데올로기에 이 말을 도둑맞아 기뻐하고 있는 무정부주의자는 대부분 없다. 미국에서는 머레이 북친이 말하고 있듯이 「 「리버타리안」이라고 하는 말 그 자체는 확실히 문제가 되고 있다. 특히 「순수 자본주의」나 「자유 무역」이라는 전투적 운동을 수반하는 반권력주의 이데올로기와 외관상 같게 보이고 있는 것이다. 자유주의 운동이 이 말을 만든 것은 아니다. 19 세기의 아나키즘 운동으로부터 훔쳤던 것이다. 따라서 이 말은 반권력주의자에 의해 재생되지 않으면 안 된다. 반권력주의자는 돈벌이와 자유를 동일시 하고 있는 개인적 이기주의자를 대변하는 것이 아니라 지배되고 있는 사람들 전체를 대변하려고 하고 있는 것이다. 」즉, 미국의 무정부주의자는 자유시장과 우익에 의해 변질된 전통을 취해서는 안된다.[The Modern Crisis, pp. 154-5]. 그래서 우리는 자신들의 사상을 리버타리안 사회주의라고 계속 부르는 것이다.
A. 1.4 무정부주의자는 사회주의자인가?
그렇다. 어떤 종류의 아나키즘도 모두 자본주의에 반대이다. 자본주의가 「지배와 착취」를 기본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섹션 B, C참조). 「인간은 노예주가 없으면 일할 수 없다고 하는 생각」에 무정부주의자는 반대한다. 무정부주의자의 사회에서는 「실제의 노동자는 자신들의 규율을 가져 사물은 언제·어디서·어떻게 되어야할 것인가를 결정된다」라고 생각한다. 그럼으로써 노동자들은 「자본주의에 있어서의 심한 노예 상태」로부터 해방되는 것이다. [Voltairine de Cleyre, Anarchism, p. 32 and p. 34]
(여기서 강조하건대 무정부주의자는 봉건주의·소비에트형「사회주의」--국가자본주의라고 부르는 것이 좋지만--·노예 제도라고 하는 지배와 착취에 근거한 모든 경제 형태에 반대이다. 여기서 자본주의를 집중적으로 논하는 것은 그것이 현재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임에 지나지 않는다. )
푸르동·바쿠닌등의 사회적 무정부주의자와 같이 벤저민 탁카와 같은 개인주의자들도 '우리들은 「사회주의자」'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 이유에 대해, 크로포트킨은 고전적 에세이「근대 과학과 아나키즘」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사회주의가 폭넓고 포괄적인 의미에서 '자본에 의한 노동의 착취를 폐절 하는 시도'라고 이해되고 있던 때에 무정부주의자는 그 시대의 사회주의자와 함께 손을 잡고 행진하고 있었다. 」[Evolution and Environment, p. 81]
탁카의 말을 인용하면, '사회주의의 근저에는 노동자는 자신의 노동을 소유하는 입장에 있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는 주장이 있는데 「2개의 사회주의 학파, 즉 국가 사회주의도 아나키즘도」어느쪽이나 이 주장을 인정하고 있다. [The Anarchist Reader, p. 144] 즉, 「사회주의자」라고 하는 말의 원래의 의미에는, 「자신이 만든 것은 자신의 물건이다, 라고 하는 개인의 권리를 신봉하는 사람들」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Lance Klafta, "Ayn Rand and Perversion of Libertarianism," in Anarchy: A Journal of Desire Armed, no. 34] 착취(나 고리대금)에 대한 반대는 진정한 무정부주의자라면 모두가 공유하고 있는 것이어서 무정부주의자는 사회주의의 깃발 아래에 몸을 두고 있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회주의자에 있어 「자신의 노동의 과실을 확실히 도둑맞지 않게 하는 유일한 방법은 노동의 수단을 소유하는 것이다. 」[Peter Kropotkin, The Conquest of Bread, p. 145] 그 이유는 예를 들면 푸르동은 노동자 협동조합을 지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었다. 「협동조합에 있는 모든 사람은 그 사업의 소유물을 전면적으로 공유한다. 」왜냐하면, 「경영에 참가한다」일로 「집단의 힘으로 만들어진 것(즉, 잉여)이 소수 경영자의 이익의 원천이 되지 않게 된다. 전노동자의 소유가 되는 것이다. 」[The General Idea of the Revolution, p. 222 and p. 223] 즉, 진정한 사회주의자는 자본에 의한 노동의 착취를 끝내는 것을 바랄 뿐만 아니라, 생산자가 생산수단을 소유해 관리하는(강조하지만 이것은 서비스 제공을 하고 있는 직장도 포함된다) 사회를 바라는 것이다. 무정부주의자와 다른 사회주의 집단과는, 생산자가 이것을 실시하는 수단에 대해 견해가 차이가 나지만, 이 소망은 공통이다. 무정부주의자는 관리는 노동자가 직접 행하며 소유는 노동자 협회나 컴뮨의 어느 쪽인지가 실시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하고 있다(아나키즘의 종류에 대해서는, 섹션 A. 3을 참조).
한편 무정부주의자는 자본주의를 착취적임과 동시에 권위주의라고 해서 거절한다. 자본주의 아래에서 노동자는 생산 과정 안에서 자기 자신을 스스로 통치하고 있지 않고, 자신의 노동의 산물에 대한 관리도 하고 있지 않다. 이러한 정황은 모든 사람에게 평등하고 자유로운 기초를 두지 않으며 비착취적으로 될 가능성도 없다. 그래서 무정부주의자는 반대하는 것이다. 이 관점은 푸르동(탁카와 바쿠닌을 자극했다)의 저작에서 잘 볼 수가 있다.
그는 아나키즘에 대해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있다. 아나키즘에서는 「모든 장소에서 자본주의와 소유(proprietary)에 의한 착취가 끝나 임금 시스템이 폐절 된다. 」왜냐하면 「노동자는 단지 고용되는지, 참가할것인지 어느 쪽 하나이다. 처음의 경우 노동자는 예속되어 착취당한다. 복종적인 사회에서 지위가 바뀌는 것은 불가능하다. 제2의 경우 노동자는 인간·시민으로서의 자신의 존엄을 회복해 생산 조직을 결성한다. 노동자는 이전에는 노예 이외의 누구도 아니었다. 주저 해서는 안 된다. 우리에게 선택사항 같은 건 없는 것이다. 노동자 사이에 「조직」을 만들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그것이 없으면 노동자는 지배되는 쪽으로 관계가 계속되어 주인과 임금 노동자라고 하는 2개의 카스트를 보증하게 된다. 자유롭고 민주적인 사회에 있어 이 카스트는 불쾌하다. 」[상게서, p. 233 and pp. 215-216]
따라서, 무정부주의자는 모두 반자본주의자이다( 「노동이 낳는 부를 노동이 소유한다면 자본주의는 없어질 것이다」 [Alexander Berkman, What is Anarchism?, p. 44]). 예를 들면, 가장 자유주의의 영향을 많이 받은 무정부주의자 벤저민 탁카는 자신의 사상을 「아나키스틱 사회주의」라고 불러 자본주의를 「고리대금, 이자·집세·이윤의 수취인」에 근거한 시스템이라고 비난한다. 자본주의가 아닌 아나키즘 사회에서는 「노동이 자연스러운 임금과 모든 생산물을 획득하므로」자본가는 불필요한 귀찮은 존재가 된다고 탁카는 생각했다. 그 경제는 소비조합·직공·농민 사이의 생산물의 자유 교환과 인민 상호은행을 기초로 하고 있다. 에고이스트의 제일인자 막스슈티르너조차 자본주의와 그 「유령들(spooks)」를 경멸하고 있다. 슈티르너에 의하면, 사유재산·경쟁·노동의 분업 등의 관념은 유령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니까 무정부주의자는 자신들을 어떤 종류의 사회주의자, 리바타리안 사회주의자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개인주의적 무정부주의자 죠셉 A 라버디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탁카와 바크닌도 되풀이하여 말하고 있다)
아나키즘은 사회주의는 아니라고 말해지고 있지만 이것은 실수이다. 아나키즘은 자유의지에 근거하는 사회주의(Voluntary Socialism) 인 것인다. 사회주의에는 2 종류가 있다. 강권적(archistic) 사회주의와 무강권적(anarchistic) 사회주의, 권력주의적 사회주의와 리바타리안 사회주의, 국가사회주의와 자유 사회주의이다. 어떤 사회 개량에 대한 제안도 개인에 대한 압력이나 외부 의지의 힘을 늘릴까 줄일까의 어딘가에 있게 된다. 늘리는 것이 강권적(archistic), 줄이는 것이 무강권적(anarchistic)이다. [Anarchism: What It Is and It Is Not]
라버디는 몇번이고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모든 무정부주의자는 사회주의자이지만, 모든 사회주의자가 무정부주의자인 것은 아니다. 」따라서, 다니엘 게린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는 것이다. 「아나키즘은 실제로 사회주의와 동의어다. 무정부주의자는 가장 먼저 사회주의자이며, 그 목적은 인간에 의한 인간의 착취를 폐절하는 것이다. 」[Anarchism, p. 12]
이 코멘트는 사회파이든 개인주의파이든 아나키즘 운동사를 통해서 몇번이나 반복되고 있다. 실제 헤이 마켓의 희생자 아돌프 피셔도 라버디와 대부분 같은 말을 사용하면서 같은 사실을 표현하고 있다. 「모든 무정부주의자는 사회주의자이지만 모든 사회주의자는 반드시 무정부주의자는 아니다. 」동시에 아나키즘 운동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인정하고 있다. 운동은 「2개의 파벌로 나누어져 있다. 공산주의 무정부주의자와 푸르동이나 중산계급의 무정부주의자이다. 」[The Autobiographies of the Haymarket Martyrs, p. 81]
사회적 무정부주의자와 개인주의적 무정부주의자 사이에서는 많은 문제로 의견을 달리하고 있다. 예를 들어 자유시장(free market)이 자유(lieberty)를 최대로 확보해주는 최고의 수단인가 하는 점이다. 그러나 자본주의에 반하는 무정부주의자의 사회에서는 임금 노동을 부정하는 협동 노동(associated labour)에 근거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점에서는 일치하고 있다. 협동 노동만이 노동 시간 중의 개인에 대한 압력이나 외부 의지의 힘을 줄인다. 그러한 노동의 자주 관리가 진정한 사회주의의 이상의 모습인 것이다. 이 관점은 죠셉 라버디가 다음과 같이 논하고 있음에서도 볼 수가 있다. 노동조합은 「조직을 만드는 것으로 자유를 획득하는 좋은 예이다. 」그리고, 「조합이 없으면 노동자는 조합이 있을 때보다 쉽게 고용주의 노예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Different Phases of the Labour Question]
시간의 흐름과 함께 말은 변화한다. 오늘 「사회주의」라고 말하면 자유와 「본래의 사회주의의 이상」을 부정하는 국가 사회주의를 의미하는 것이 되어 버렸다. 놈 촘스키가 이 문제에 대해 하는 말에 무정부주의자라면 누구나가 동감일 것이다.
만약 좌익이 Bolsheviki를 포함하는 것이라고 해석된다면 나는 좌익과는 단호히 결별하겠다. Lenin은 사회주의의 최대의 적의 한사람이었던 것이다. [Marxism, Anarchism, and Alternative Futures, p. 779]
아나키즘은, 마르크스주의·사회민주주의·레닌주의에 계속 반대해 왔다. Lenin가 권력을 잡는 것보다 아득한 이전에, 바쿠닌은 「붉은 관료 정치」의 위험에 대해 마르크스의 제자들에게 경고하고 있다. 만약 마르크스의 국가적 사회주의 사상이 실현되다면 그것은 「모든 전제 정부 중에서 최악의 것」이 될 것이다 라고.
그러나 무정부주의자는(기본적으로는) 사회주의자이므로 마르크스주의와 공통의 생각도 몇 개가 있다. (레닌주의와 공통된 것은 전혀 없다) 바쿠닌과 탁카는 마르크스의 자본주의에 대한 분석·비판이나 노동 가치설을 인정하고 있다. (섹션 C참조) 마르크스 자신은 막스 슈티르너의 저작 <유일자와 그 소유>에 큰 영향을 받고 있었다. 마르크스의 국가의 사회주의에 대한 훌륭한 비판이 그 책에는 쓰여져 있는 것이다.
마르크스주의자의 운동안에도 사회적 무정부주의자의 견해(그 중에서도 특히 아나르코신디칼리스트)와 닮은 요소가 존재한다. 예를 들면, 안톤 파네크크, 로자 룩셈부르크, 폴 마틱 등은, Lenin과는 완전히 이질이다. 컬 코르슈 등은 스페인의 아나키즘 혁명에 대해 쓰고 있다. 마르크스로부터 Lenin까지 많은 연속되는 연결이 있지만 마르크스로부터 리버타리안적인 마르크스주의자에게로의 연속적 연결도 있다. 이러한 리버타리안적 마르크스주의자는 Lenin과 볼셰비즘을 어렵게 비판하고 있어 그 사상은 평등자의 자유 연합을 요구한 아나키즘의 소망에 가까운 것이다.
이상에서 본 것처럼 아나키즘은 기본적으로 사회주의이다. 다만 오늘 일반적인 의미로 사용되는 「사회주의」(즉 국가 통제의 사회주의)과는 정면으로부터 대립하는 사회주의인 것이다. 무정부주의자는 많은 사람들이 「사회주의」라고 하는 말에 관련시키고 있는 「계획경제」대신에, 개인·노동 현장·공동체간의 연합과 협력을 제창해 국가 자본주의의 변종인 「국가」사회주의에 반대한다. 국가 사회주의에서는 「모든 사람이 임금 수급자가 되며 국가만이 임금 지불자가 된다. 」[Benjamin Tucker, The Individualist Anarchists, p. 81]
따라서 무정부주의자는 "거대한 사회당내의 사회민주주의 당파가 현재 사회주의를 자본가로서의 국가라고 하는 생각에 환원시키려고 하고 있다"며 마르크스주의를 거절하는 것이다. [Peter Kropotkin, The Great French Revolution, vol. 1, p. 31]. 마르크스주의가 「중앙 지령형 경제」·국가 사회주의나 국가 자본주의를 사회주의와 동일시 하고 있는 것에 대해 무정부주의자의 반론은, 섹션 H로 논한다.
국가 사회주의자와의 이러한 차이 때문에, 그리고 혼란을 피하기 위해, 대부분의 무정부주의자는 자신을 단지 「무정부주의자」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다. 무정부주의자가 사회주의자인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미국의 이른바 「자유주의자」우익의 출현과 함께 자본주의 찬동자 중에 자기 자신을 「무정부주의자」라고 부르게 된 사람들이 있다. 이 때문에, 여기서 이 점을 자세하게 논했던 것이다. 역사적으로도 아나키즘은 반자본주의 즉 사회주의인 것에서 만나볼 수 있으며 이것은 모든 무정부주의자가 동의하고 있다는 점을 강조해 두고 싶다(왜 「아나르코」자본주의가 아나키즘이 아닌 것인지에 관한 논의는, 섹션 F를 참조해 주었으면 한다).
A. 1.5 아나키즘은 어디에서 태어났는가?
아나키즘은 어디에서 태어났는가. 거기에 대답하려면 , 러시아 혁명(섹션 A. 5.4 참조)에서 마흐노주의 운동에 참가한 사람들이 만든 「리버타리안 공산주의자의 조직강령」을 인용하는 것이 가장 좋을 것이다.
노동자의 노예화가 낳은 계급 투쟁, 그리고 노동자의 자유에의 열망. 이것들이 아나키즘 사상을 낳았다. 아나키즘은, 계급 원리와 국가 원리에 근거하는 사회시스템을 모두 부정해, 그 시스템을 노동자가 자주 관리하는 자유로운 비국가주의 사회로 옮겨놓는 사상이다.
따라서, 아나키즘은 지식인이나 철학자의 추상적 생각으로부터는 태어난 것은 아니다. 노동자에 의한 자본주의와의 직접 투쟁으로부터, 노동자의 요구와 필요물로부터, 자유와 평등에의 열망으로부터 태어났던 것이다. 노동자 대중의 생활과 투쟁이 영웅적인 시대에, 이 열망은 특히 생기에 넘쳤다.
걸출한 아나키즘 사상가 바쿠닌이나 크로포트킨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아나키즘 사상을 발명한 것은 아니다. 그들은 대중 가운데서 아나키즘 사상을 찾아 자신의 장점인 사고와 지식을 사용해 그 사상을 적 넓히는 도움을 준 것 뿐이다. [pp. 15-16]
무정부주의자 운동 일반이 그렇지만 마흐노주의자도 노동자 계급의 대중운동이며 1917년부터 1921년간 우크라이나에서 적군(공산당)과 백군(짜리즘/자본주의) 쌍방의 권위주의 세력에 저항했다. 「전통적으로, 아나키즘의 주된 지지자는 노동자·농민이었다」라고 피터 마셜은 쓰고 있다. [Demanding the Impossible, p. 652]
아나키즘은 자유를 요구해 투쟁하는 가운데, 그리고, 그 투쟁에 의해 만들어졌다. 예를 들면, 크로포트킨에 있어 「아나키즘은 일상 투쟁에 기원을 가지고 있었다」그리고 「무엇인가 큰 실천적 교훈으로 영향을 받을 때에 아나키즘 운동은 새로워졌다. 아나키즘의 기원은 생활 그 자체의 가르침에 있었던 것이다. 」[Evolution and Environment, p. 58 and p. 57]
푸르동에 있어, 그 상호주의 사상은 "여러가지 노동자 조직의 현재의 실천, 혁명적 실천에 있어 「이러한 조직은 파리와 리용에서 자발적으로 형성되어 크레디트 조직과 노동 조직이 완전히 같은 의미다"라고 표현되고 있다.[No Gods, No Masters, vol. 1, pp. 59-60]
실제, 어느 역사가가 가리키고 있는 「푸르동의 연합적 이상과 리용의 상호주의자의 프로그램과는 매우 잘 닮았으며」에 있어서 「(사상에) 현저한 일치」를 볼 수 있다. 「프르돈이 자신의 건설적 프로그램을 정합성을 가져 명언할 수가 있던 것은, 리용의 실크 노동자의 실례가 있었기 때문은 아닐까. 그가 지지한 사회주의의 이상은 이미 이러한 노동자에 의해 어느 정도까지 현실의 것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K. Steven Vincent, Pierre-Joseph Proudhon and the Rise of French Republican Socialism, p. 164]
즉, 아나키즘은 자유를 요구한 투쟁과 인간적 생활, 살고·사랑하며·즐기는 시간이 있는 생활을 보내고 싶다고 하는 소망 등에서 생기는 것이다. 생활로부터 동떨어져 사회를 내려다 보는 상아탑에서 자신의 선악 개념에 근거해 판단을 내리는 소수의 사람들이 만들어 낸 것은 아닌 것이다. 오히려 권위·억압·착취에 대한 노동자 계급의 투쟁과 저항의 산물이었던 것이다. 알버트 메르트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아나키즘 그 자체의 이론가같은 건 없었다. 아나키즘이, 아나키즘 철학의 여러가지 측면을 논하는 많은 이론가를 낳았던 것이다. 아나키즘은 행동 안에서 성립하는 신조로 지속된다. 지적 사상을 실천한다고 하는 것이 아니다. 자주 있는 것이지만, 부르조아 작가는 노동자와 농민이 이미 실천으로 완수하고 있는 것에 참가해 기록한다. 그리고, 부르조아 역사가는 이 작가를 지도자라고 본다. 게다가 그 후의 부르조아 저술가들이, (이 부르조아 역사가를 인용해) 이것은 노동자 계급은 부르조아 지도자를 요구하고 있는 것을 증명하는 하나의 실례라고 하고 있다. [Anarchism: Arguments for and against, p. 18]
크로포트킨의 눈에는, 「아나키즘은 그 기원을, 대중의 창조적·건설적 활동에서 찾고 있다. 그것은 과거 인간의 모든 사회 기관안에 실현되고 있던 것 것과 같은 것에서 만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여러가지 사회적 기관의 외부에서, 세력의 대표자들에 대한 반역안에서 실현되고 있던 것 것과 같다. 외부 세력의 대표자들은, 이러한 기관에 손을 걸어 자신들에게 형편이 좋게 이용했기 때문이다. 」 좀 더 최근에는, 「사회주의 일반을 낳은 것과 같은 비판적·혁명적 항의 행동이 무정부 상태를 낳았다. 」아나키즘은, 타형태의 사회주의와는 달라 「그 모독의 팔을 자본주의로만 주지 않고, 자본주의의 지주인 법률·권위·국가에 대해서도 주는 것이다. 」무정부주의자 저작자가 가진 것은 사회 일반이 가지는 여러가지 진화 경향의 분석 뿐만이 아니라, 투쟁을 실시하고 있는 노동자 계급의 경험으로부터 도출된 「(아나키즘) 원리의 일반적 표현과 그 교의의 이론적·과학적 기반을 성립시킨다」것이었다. [상게서, p. 19 and p. 57]
하지만, 사회에 있어서의 여러가지 아나키즘적 경향과 조직이란, 푸르동이 1840년에 펜을 들어 자신은 무정부주의자라고 선언하기 전부터 존재하고 있었다. 특정의 정치 이론으로서의 아나키즘은 자본주의의 발흥과 함께 태어났다(아나키즘은 「18 세기 말에 자본과 국가를 전복한다고 하는 이중의 도전에 착수했다」[Peter Marshall, 상게서, p. 4]). 그러나, 무정부주의자 저작자는 여러가지 리버타리안 경향에 관해서 역사를 분석하고 있다.
예를 들면, 크로포트킨은 「어느시대라도, 무정부주의자와 국가주의자가 있었다」라고 논하고 있는 [상게서, p. 16]. 「상호부조론 Mutual Aid」과 그 외의 저작에서 크로포트킨은 지금까지의 여러가지 사회가 가지고 있던 리바타리안적 측면을 분석해, 아나키즘 조직이나 아나키즘의 측면을 (어느 정도까지) 능숙하게 실천하고 있던 사회에 대해 언급하고 있었다. 그는, 「공식의」아나키즘 운동이 창조되기 이전의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 여러가지 실례가 아나키즘적 사상 경향을 가지고 있는 것을 확인하고 다음과 같이 논했다.
석기시대라고 하는 최고의 시대부터 인간은 동료 가운데 몇사람이 사적 권한을 획득할 수 있게 되면 여러가지 폐해가 생기는 것을 깨닫고 있었다. 그 결과 사람들은 원시적 씨족·촌락 커뮤니티·중세 길드·최종적으로는 중세의 자유 도시 안에 여러가지 제도를 만들어 내고 자신들을 정복하러 온 타관 사람이나 같은 일족 중에서 사적 권력을 확립하려는 사람들이 생활과 재산을 침해했을 경우에 저항할 수 있도록 했던 것이다. [Anarchism, pp. 158-9]
크로포트킨은, 노동자 계급 민중의 투쟁을 이러한 옛 민중 조직 형태와 같다고 보았다. 「노동자의 단결은 소수자의 권력이 증가하는 것에 맞서는 민중 저항의 결과였다. 이 경우는 자본가에 대한 저항이었던 것이다. 」씨족·촌락 커뮤니티등도 그렇고, 1793년의 「프랑스 혁명중의 파리 「지구」·모든 대도시·많은 소규모 「컴뮨」에서 독립적으로, 자유롭게 연합한 활동」도 그랬다. [상게서, p. 159]
정치 이론으로서의 아나키즘은 자본주의와 근대국가에 대한 노동자 계급의 투쟁과 활동의 표현이지만, 아나키즘 사상은 인류의 역사를 통해서 인간 행동안에 표현되어 왔다. 예를 들면, 북미 등에 있는 많은 원주민족은, 특정의 정치 이론으로서의 아나키즘이 존재하지 않는 수천 년 전부터 아나키즘을 실천해 왔다. 아나키즘적인 여러가지 경향과 조직은 모두 대혁명에 존재하고 있었다. 몇개의 구체적인 예를 들면, 미국 혁명중의 뉴잉글랜드 지방의 타운 미팅·프랑스 혁명의 파리 「지구」·러시아 혁명의 노동자 평의회와 공장 위원회가 그것이다(자세하게는, 머레이 북친, The Third Revolution 를 참조). 이것은 당연한 일인 것이다. 이미 논한 것처럼, 아나키즘이 권위에 대한 저항의 산물이라고 하면, 권위를 가지는 사회는 어떠한 것이든 권위에 대한 저항을 일으켜 여러가지 아나키즘적 경향을 낳는다.(그리고 물론, 권위가 없는 사회는 아나키즘적으로 되지 않을 수 없다)
바꾸어 말하면, 아나키즘은, 억압과 착취에 대한 투쟁의 표현이며, 현행 시스템의 잘못에 관한 노동자의 경험과 분석의 일반화이며, 보다 좋은 미래를 향한 희망과 꿈의 표현인 것이다. 이 투쟁은, 그것이 아나키즘으로 불리게 되기 전부터 존재하고 있었지만, 역사적인 아나키즘 운동(즉, 자신들의 사상을 아나키즘이라고 불러, 아나키즘 사회를 목표로 하는 그룹)은 본질적으로, 자본주의와 국가에 반대해, 억압과 착취에 반대해, 자유롭고 평등한 개개인으로부터 되는 자유 사회를 요구한 노동자 계급 투쟁의 산물인 것이다.
아나키즘이란 무엇인가?
법학부 박홍규
오늘 우리 인류가 직면한 최대의 문제는 전 지구적인 자연환경의 파괴, 자본주의 선진국에 의한 제3세계 생활환경의 파괴, 세계적인 차별과 억압, 빈곤과 폭력의 재생산 등이다. 국가는 시민의 자유를 침해하고, 시민의 자치를 거부하며, 시민이 더불어 사는 자연을 파괴한다. 국가 운영의 관료 주도, 식량 관리부터 에너지까지 모든 일상생활의 국가 관리, 산업계의 소나기 수출 방식, 교육에서부터 생활 방식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회 조직의 집단 우선 및 질서유지의 원리 등등 그야말로 국가 때문에 피로하고, 국가 때문에 비효율이 극대화된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여기서 국가 규제를 완화하고 기업이 자유롭게 경제활동을 할 수 있게 해야 한다는 소위 신자유주의가 등장한다. 그러나 기업은 국가 이상으로 문제이다. 그것은 극소수의 자본가가 대다수의 노동자를 지배하는 또 하나의 지배 체제와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특히 재벌이 그렇다.
이제는 더 이상 그러한 망동을 허용해서는 안 된다. 지금이야말로 ‘자유․평등․인권․복지․개인․여성’, ‘자치․민족․전통․문화․예술․교육․지방’, ‘자연․전원․환경․생태’ 등에 대한 관심을 높여야 한다. 곧 자유․자치․자연의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
그것은 국가권력 만능주의, 거대 도시주의, 과학․기술․기계 만능주의, 과도 전문주의, 무한 경쟁주의, 성장 제일주의, 이기적 개인주의, 상업적 물질주의, 천민 자본주의, 거대 생산주의, 과잉 소비주의, 세계 자본주의 등으로 인한 인간과 사회 및 자연의 파괴에 대한 비판에서 비롯된다. 그리고 평등하고 자유로운, 공동체적인, 지역 자치적인, 정신적인, 이타적인, 생태적인 새로운 삶의 방식을 폭넓게 모색해야 한다.
요컨대 우리 자신과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의 사회와 문명에 대한 근본적인 이의 신청을 해야 한다. 그것은 바로 자유․자치․자연에 대한 새로운 가치관의 요구라고 요약할 수 있다. 혼미한 이 시대를 새로운 대안 추구의 위기가 아니라 호기로 삼아야 한다. 이 책은 바로 그러한 새로운 대안을 모색하기 위한 하나의 시도이다.
자유․자치․자연에 대한 관심과 비판 및 모색을 여러 종교나 철학, 문학이나 사상 등에서 구하는 입장이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으나, 나는 그 어떤 입장보다도 명백히 선구적이었던 하나의 사상인 아나키즘으로부터 그 뿌리를 찾고, 그것을 비판적으로 검토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으로부터 새로운 사상을 발전시키려는 작업을 하기는커녕 그것에 대한 무관심만이 지배하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아니 무관심이 아니라 무시, 천시, 홀대라고 하는 편이 정확할 것이다. 이 책은 그러한 무지로 인한 우리의 지적 오류를 수정하고, 황량하기 짝이 없는 우리의 지적 공백을 메우며, 우리의 편향된 지적 불균형을 바로잡기 위한 작업이다.
흔히 아나키즘은 무정부주의라고 번역되며, 정치권력이나 정부의 지배를 부정하고, 절대적 자유가 보장되는 사회를 이상으로 삼는 극단적인 정치 이데올로기로 이해된다. 그러나 그보다 더욱 일반적인 이미지, 곧 정부가 없는 무질서한 혼돈 상태를 뜻하는 무정부 상태 또는 아나키 상태란 말에서 아나키즘에 대한 매우 부정적인 이미지가 형성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과연 정부가 없으면 무질서와 혼돈만이 지배하는가 라는 의문을 던져 볼 필요가 있다.
예컨대 세계사에 나타난 여러 혁명적 상태, 또는 우리 역사상의 4.19나 5.18의 시절에는 과연 그러한 무질서와 혼돈만이 지배했는가? 특히 최근의 5.18에서는 시민들이 자유롭게 자치적으로 질서를 형성했다는 사실이 그 모든 기록에서 나타나고 있는데, 그렇다면 정부가 없다고 해도 반드시 무질서하지만은 않다고 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나는 정부가 있어야만 반드시 질서가 보장된다고 하는 속설은 시민의 자치 능력을 무시하는, 참으로 인간을 불신하고 정부를 절대화하는 발상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정부를 무조건 부정하는 것은 환상에 불과하다. 설령 혁명적 상태가 보다 인간적인 사회였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항상 그렇게 살 수는 없다. 따라서 국가의 전횡을 규제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제도를 모색하는 것이 필요하다. 제도 없이 순수한 인간성만으로 우리는 살 수 없다.
나는 이 책에서 정부가 없는 무정부만을 주장하는 아나키즘을 그대로 답습하지는 않는다. 도리어 최소한의 정부가 최대한의 시민 자치를 보장하는 것을 아나키즘으로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을 하는 것은 위에서 말한, 인간을 불신하고 정부를 절대화하는 사고와 제도가 우리에게는 너무나도 뿌리 깊이 박혀 있기 때문이다. 그것도 이 세상의 그 어떤 나라에서보다도 우리나라에서 극심하기 때문이다.
이 책은 아나키즘과 함께 페미니즘과 에콜로지를 다루었다. 보통 여성주의나 여권주의로 번역되는 페미니즘은 여성의 정치적․사회적․법적인 모든 자유와 권리의 확장을 주장하는 주의로 이해되나, 그보다 더욱 폭넓은 개념이 되기도 한다. 여하튼 그것에도 여러 가지의 견해가 있으나, 이 책에서는 아나키즘과 에콜로지를 포함하는 페미니즘을 주장한다. 흔히 환경주의 또는 생태주의로 번역되는 에콜로지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이와 같이 이 책에서 주장하는 페미니즘과 에콜로지도 아나키즘과 직․간접적으로 연관된다는 점에서 이 책에서는 그것들을 넓은 의미의 아나키즘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이 책의 부제목인 자유․자치․자연과 연관하여 보면 페미니즘은 자유와, 아나키즘은 자치와, 그리고 에콜로지는 자연과 더욱 깊게 연관된다. 물론 이러한 관련은 상대적인 것에 불과하고, 그 셋을 잇는 중심 고리는 역시 아나키즘이다. 따라서 이 책의 중심은 어디까지나 아나키즘이다.
이 책이 이러한 입장을 취하는 이유는 특히 최근 우리나라에서의 페미니즘과 에콜로지에 관한 논의가 아나키즘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듯이 설명되고 있기 때문이다. 즉 페미니즘은 여성 권리 운동, 에콜로지는 환경보호 운동으로만 이해되고 있고, 그것들은 어디까지나 현존 자본주의 체제를 당연히 전제하는 것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이 책은 사회주의에 대한 비판이기는 하나, 동시에 새로운 사회주의를 지향한다. 새로운 사회주의란 종래의 맑스 엥겔스식의 정통 사회주의를 비판하는 것이나, 그렇다고 하여 사회주의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새로운 형태를 모색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 비판의 초점은 종래의 사회주의가 지닌 국가주의, 산업주의, 계급주의 등에 맞추어져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책은 그러한 부류의 페미니즘과 에콜로지를 부정하고, 현존 자본주의 질서는 물론 사회주의 질서도 부정하는 시민 자치의 아나키즘을 전제로 한다. 아나키즘을 전제하지 않는 페미니즘이나 에콜로지 또는 사회주의는 문제가 많을 뿐만 아니라 그 목표하는 바를 제대로 이룰 수 없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 이 책의 근본 취지이다.
결국 이 책은 근본적인 방향감각을 상실하고 방황하고 있는 우리의 페미니즘과 에콜로지, 아나키즘과 사회주의를 본래의 제자리로 되돌리려고 하는 작업이다. 다시 말하자면 그 모두를 통합하는 작업이다. 나는 그것을 자유․자치․자연이라고 부른다. 굳이 그것을 하나로 부르자면 (삼민주의식으로) 삼자주의三自主義라고 할 수도 있겠다.
자유․자치․자연에 대한 관심과 비판 및 모색은 그 어느 것이든 독립된 문제가 아니라 서로 연관되는 하나의 전체로 생각해야 하는 것들이다. 흔히 말하는 삼위일체식으로 말이다. 그것을 통합하는 것은 아나키즘이다. 곧 자본주의냐, 사회주의냐 아니면 다른 제3의 길인 아나키즘이냐 하는 문제와 직결된다는 것이다.
더욱 간단하게 말하면 국가주의냐 시민주의 또는 인간주의냐 하는 것이다. 나는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를 모두 국가주의로 보고, 시민주의․반국가주의의 아나키즘을 그것에 대응시킬 수 있다고 믿는다. 그리고 후자야말로 우리가 나아가야 할 길, 새로운 사회주의라고 믿는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아나키즘이 이미 지난 세기에 퇴색한 잡가쯤으로 치부되고 있다. 참으로 그 무지가 놀라울 따름이다.
게다가 자유․자치․자연에 대한 기존의 관심과 비판 및 모색도 그러한 기본적인 방향에서 벗어나 있다. 예컨대 환경․생태 문제는 기술주의적인 또는 그것에 반대되는 원시주의적인 방법으로 해결될 수 없으나 오늘날 우리가 주변에서 보는 것은 대체로 그 두 가지일 뿐이다. 전자는 명백하게 국가주의에 입각하여 생태 문제 해결에 더욱 기본적인 반국가주의에 반하고, 후자는 국가를 철저히 방관하여 결국은 국가주의를 방치한다.
성차별을 비롯한 인권이나 교육, 문화나 예술 등에 대한 생각들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그 어느 것이나 국가에 의해서는 해결될 수 없다. 아나키즘과 같이 국가의 역할을 부정하거나 그것을 최소한으로 줄여서 인간의 자유․공동체의 자치․자연의 균형을 회복하는 방향을 모색하지 않으면 어떤 분야의 모색도 실패로 끝난다. 페미니즘도 에콜로지도 마찬가지이다.
요컨대 국가와의 대결이 급선무라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국가권력을 제한하여 인간의 자유를 회복하고(아울러 페미니즘이 주장하듯이 남녀의 실질적인 평등과 해방을 확보하고), 지역공동체의 자치를 모색하여 자연스러운 삶을 누리며, 자연을 회복하려고 하는(이는 에콜로지가 주장하는 바이다) 아나키즘을 검토하여 새로운 사회주의를 수립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나는 이제야말로 국가라고 하는 것이 과연 우리에게 무엇인지를 심각하게 고민해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국가 때문에 살고 죽는가, 국가에 의해 살고 죽는가, 국가가 우리의 삶과 죽음을 결정해야 하는가? 우리의 생각도 행동도 국가 없이는 불가능한가? 언제까지 국가가 명령하는 대로 생각하고 행동해야 하는가? 우리는 진실로 인간으로서 자유롭게 생각하고 행동하며, 주인으로서 자치하고, 자연과 더불어 인간답게 살 수는 없는 것인가?
I. 들어가는 말
아나키즘이라는 화두가 다시 대두되고 있다. 서울, 대구, 부산에 분산되어 존재하던 아나키즘학회가 하나로 통합되고 신문지상에서도 간혹 아나키즘이라는 단어를 찾아볼 수 있다. 1970년에 발표된 월프(Robert Paul Wolff)의 {In defense of anarchism}이라는 책이 뒤늦게 번역되고, {동아시아의 아나키즘}이라는 책이 출간되게 된 것도 이런 흐름과 무관하지 않다.
승자의 기록만을 전해주는 역사 속에서 아나키즘은 잊혀져 왔다. 러시아 혁명 이후 잔인하게 숙청되고 크론슈타트에서 학살되었던 아나키스트들의 삶을, 프랑코의 파시즘에 맞서 자율적으로 전선으로 떠났던 전사들을 우리는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 관동대지진 때 억울한 누명을 쓰고 "내 육체야 자네들 맘대로 죽이려거든 죽이라, 그러나 나의 정신이야 어찌할 수 있겠는가"라는 말을 남기고 역사에서 사라져간 朴烈과 金子文子도 우리는 기억하지 못한다.
좋은 일이다. 역사 속에서 잊혀졌던 사상이 새롭게 조명을 받고 그 가치를 되찾는 것은. 승자의 기록만을 전달하는 역사가 아니라 그 역사를 함께 꾸려온 다양한 목소리를 되살릴 필요가 있다. 특히 소련의 붕괴 이후 대안의 부재 속에 체계 속으로 포섭될 것인가, 철저히 배제 당할 것인가라는 극단적인 선택의 기로에 선 사람들에게 아나키즘은 또 다른 시사점을 제시해 줄 수 있다(유럽을 휩쓴 68년 5월혁명에서 아나키즘이 재등장하게 된 것도 바로 이런 극단적인 선택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현재 불고 있는 아나키즘에 대한 관심은 하나의 새로운 대안보다는 현실 그 자체에 대한 회의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하지만 현재 진행되는 흐름은 아나키즘이 가진 다양하고 격정적인 특성과 달리 너무 편향되어 있다. 누가 뭐라던 아나키스트를 자처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그런 흐름을 두손들고 환영할 생각은 없다. 지식인들의 냄비근성이 싫어서 그렇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아나키즘이 상품화되어 내용없는 기표로 떠도는게 싫어서 그렇다고 해야 할까, 그것도 아니라면 아나키즘을 부드럽게 다듬어서 분노와 정신을 빼버리고 이론만을 다루는 것이 싫어서일까?
어찌보면 이 글은 2가지 목적을 가지고 있다. 하나의 목적은 아나키즘을 거론하는 사람들이 빼먹고 있는 아나키즘의 정신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아나키즘의 흑색깃발을 들고나섰던 것은 고상한 이데올로기를 위해서가 아니라 동의하지 않은 권력의 폭압을 견딜 수 없어서였다. 아나키즘은 권력을 장악하기 위한 운동이 아니라 권력에 대한 저주로 가득찬 사상이다. 또한 스스로 자율적인 삶을 구성하려 하고 그렇게 할 수 있다는 자부심으로 가득찬 사상이다.
다른 목적은 아나키즘의 현대적 의미는 무엇일까라는 고민이다. 同床異夢으로 죽은 자식의 불알을 만지는 것이 불쾌하지만 죽은 개 취급하는 것도 불만이기 때문이다. 단, 아나키즘은 고정화된 이데올로기나 도그마가 아니다. 단순히 아나키즘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아나키즘을 발전시킬 가능성을 모색해야 한다. 그것이 아나키즘을 살리는 길이자 그 의미를 복원시키는 길이다. 그래서 아나키즘과 모더니티 비판을 연결시키고 근대적인 공간에 대한 반발로서 푸리에의 주거공동체가 가지는 의미를 되짚어 보려 한다.
물론 아나키스트를 자처하는 인간의 불만 섞인 목소리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목소리를 져버리지 않는 것도 아나키즘을 추구하는 사람의 몫이라 생각하고 자유롭게 생각을 펼쳐보려 한다.
II. 권력에 대한 저주와 문화적 투쟁으로의 전환
"이상이라는 것은 우리가 그 이상을 갖고 있는 사상을 위해 죽을 수 있을 때 생겨나는 것이며, 정치라는 것은 우리가 그 사상으로 삶을 영위할 수 있을 때 존재한다" - 샤를르 페귀(라공, 1992)
아나키즘의 역사는 권력에 대한 저주의 역사이자 패배의 역사이다. 패배의 역사를 기록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간단하다. 혁명 후에도 권력을 장악하려 하지 않았고 그 권력을 끊임없이 저주했기 때문이다. 특히 아나키스트들은 '자유로운 공동체, 자주인'이라는 이상을 위해 싸웠기 때문에 권력이 요구하는 관료주의적, 권위주의적 요소를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게다가 끊임없는 反혁명의 위협은 아나키스트들이 경쟁자(볼셰비키)와 손을 잡도록 만들었다(적어도 아나키스트들은 권력의 장악이 아니라 혁명을 목표로 삼았기 때문에 반혁명에는 가장 극렬하게 저항했다). 하지만 아나키스트들의 피로 세워진 공화국에는 항상 그들의 경쟁자들이 권력을 장악했다.
또한 그 권력에 대한 극도의 저주로 합리적인 비판과 선전만이 아니라 테러, 실행에 의한 선전(propaganda by deed)까지 정당화했던 사람들이 역사의 주역으로 등장하기는 힘든 법이다(만만한 사람들이 험한 일을 수행하고 교활한 사람들이 그 성과를 차지하는 것은 누구나 인정하는 역사의 비극적인 단면이 아닌가?)
아나키즘은 한번의 혁명으로 완벽한 유토피아를 건설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아나키즘이 추구한 사회는 잘못이 있으면 언제라도 수정이 가능한 사회이다. 다시 말해 인간에게 부자유스러운 것은 언제라도 때려부술 수 있는 방법을 사회구조로서 내장하고 있는 사회이며, 특정권력을 가진 사람이 없기 때문에 그러한 것이 쉽게 이루어질 수 있는 사회이다(玉川信明, 1991, 118-119).
또한 아나키즘은 한 개인이나 몇몇 집단의 자유로 사회적 자유가 보장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아나키즘이 요구한 것은 그 사회 속에 숨쉬고 있는 모든 사람들의 자유였다. 바쿠닌은 '한 민족의 자유'와 '단 한 명의 개인적 자유'에 대한 훼손도 '나의 권리와 인간성에 대한 침해'로 받아들이고, '지상의 한 인간이라도 노예상태에 있다는 것'이 '모든 사람의 자유에 대한 부정'을 의미한다고 하였다(이종훈, 1996, 119). 개인의 자유 속에는 전체의 자유가 숨쉬고 있다. 아나키즘은 개인의 이름으로 체제에 도전하지만 그 개인의 이름 속에는 해방을 열망하는 전체가 숨쉬고 있다. 바로 이 점에서 아나키즘은 서구의 개인주의와 차별성을 가지고 그 때문에 근대적인 위계질서, 중앙집권화와 양립할 수 없다.
그런데 분명히 현대의 상황은 19세기와 다르다. 푸코는 현대의 권력관계가 국가로 집중되지 않기 때문에 '왕의 머리를 베어야 한다'는 환상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주장한다(푸코, 1996). 즉 현대의 권력관계는 사회 속에 편재해 있고 수동적 복종이 아니라 자발적 복종을 낳고 있다. 따라서 단순히 사회체제의 변화만으로는 일상의 변화를 동반하지 못한다. 이렇게 변화되지 않는 일상은 르페브르의 말처럼 '혁명의 방호벽'으로 존재한다(르페브르, 1992). 따라서 필요한 것은 단순한 국가-시민사회라는 이분법적 모델이 아니라 문화적 투쟁으로서의 아나키즘이다.
하지만 여전히 김성국은 국가-시민사회라는 이분법적 모델을 합리화하기 위해 아나키즘을 도입한다. 김성국은 '反국가주의적 관점에서 시민사회의 역할 정립'을 주장하고, 국가란 기껏해야 필요악이기 때문에 '적으면 적을수록 좋고', 시민사회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라는 입장을 지니고 있다. 왜냐하면 "국가는 인간을 강제에 의하여 경쟁시키고, 위계서열화하는 반면, 시민사회란 의사소통적 정감에 의하여 자발적 협동과 자치적 연대로 인간을 이끌어 나가고자 하기 때문이다"(김성국, 2000). 그는 아나키즘의 反국가적 정서와 하버마스의 시민사회 개념에 의지하면서 신사회운동의 재급진화를 주장하지만 그 재급진화가 시작되어야 할 지점을 정확하게 짚어내지 못하고 있다. 어찌 보면 김성국이 주장하는 것은 국가와 시민사회 관계의 역전 모델, 즉 "최소국가를 지향, 지역국가 혹은 지방국가의 개념"(김성국, 1996, 35)이고, "창조의 원동력으로서 새로운 시민권력의 형성"(김성국, 1996, 40)이다.
하지만 지역국가, 지방국가라는 개념이 아나키즘과 일치할 수 있는 것인가, 시민권력의 형성이 아나키즘과 일치하는가, 국가적이지 않은 것은 모두 시민적인 것인가라는 문제가 남아있다. 또한 국가-시민사회 도식은 신자유주의적 세계질서 속에서 강화되어가는 자본의 힘을 비판해 낼 수 없다. 역사적으로 아나키즘은 국가의 억압적 질서만이 아니라 자본의 착취에 대해서도 강하게 저항했다.
더 심각한 점은 김성국의 주장은 좋은 얘기를 반복할 뿐 실제로 한국사회 속에서 어떻게 그것을 수행할 수 있는가라는 실천적인 고민이 빠져 있다. 시민사회에 내재해 있는 순응적인 일상의 장치를, 한국사회에 뿌리내린 가부장제와 연고주의를 김성국은 어떻게 극복해 나갈 수 있는가? 솔직히 아나키즘 학회에 속한 교수들은 아나키즘이 중시한 교육에서 먼저 변화를 일으켜야 한다. 그것이 아나키즘이 주장하는 직접행동의 논리에 부합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고 있는지 의문이다. 그 교수들은 자신의 조교나 학생들에게 어떤 평가를 받고 있을까?
앞에서 얘기했듯이 단순히 국가에 대한 시민사회의 우위라는 측면에서만 접근하면 현대사회의 미시적 권력장치를 제대로 파악할 수 없다. 사회에 편재되어 있는, 일상을 누르고 있는 권위의 힘을 타파하기 위해서는 이분법적인 도식에서 벗어나 자발적 복종을 낳는 순응 메카니즘을 분석해 들어가야 한다. 따라서 아나키즘의 전선은 국가에 대해서가 아니라 심리적, 경제적, 사회적 순응을 낳는 일상에서 그어져야 할 것이다.
결국 아나키즘은 근대적인 권력을 장악하기 위한 혁명운동이 될 수 없다. 현대적 의미에서 볼 때, 지속적인 패배의 역사를 벗어나기 위한 아나키즘의 방향은 일상 속에서 지속적으로 주입되는 합리화된 논리에 저항하는 문화적 투쟁이다. 이 문화적 투쟁은 모더니티 속에 잠재되어 있는, 기계화되고 제도화된 영역이 봉인해온 잠재력을 끌어내는 것이다. 그 진행방식은 란다우어가 주장했듯이 계몽주의적 합리성이 초래한 과학주의적, 물질주의적인 편리함과 풍요로움에 질식한 인간성의 회복(김경일, 2001, 2)일 수도 있고, 크로포트킨이 주장했듯이 사회를 총체적으로 재구조화하는 사회혁명(Avrich, 1988, 66)일 수도 있다그렇다면 문화적 투쟁으로서 새로운 아나키즘은 어떠한 모습을 가질 수 있을까?
III. 모더니티에 대한 도전
아나키를 두려워하고 아나키즘을 '무정부주의'라고 부르는 사람들은 모더니티에 잠재되어 있는 힘에 대한 두려움을 드러내는 것이다. 아나키즘은 모더니티가 억눌러 왔던 자율에 대한 욕망을 분출시킨다. 아나키즘은 평등하고 자율적으로 조화된 사회를 주장한다. 즉 어느 누구에게 부나 권력을 집중시키는 것이나 인간에 의한 자연의 착취를 원하지 않는다. 이렇게 순수하고 완전한 평등을 바랬기 때문에 아나키즘은 이상으로, 공상으로 치부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나키즘은 미래에 대한 뚜렷한 청사진을 가지고 출발하는 운동이 아니기 때문에 유토피아주의와는 다른 것이다.
아나키즘은 모더니티의 성과를 무시하지 않으면서 그 성과를 인간의 행복과 자유, 평등, 우애에 부여하려 한다. 즉 아나키즘은 근대적 기획 위에서 부정적 근대성을 비판한다. 김경복은 아나키즘의 속성이 부정적 근대성, 즉 타자를 물화의 길로 치닫게 하는 '기술적 근대성'에 반대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아나키즘은 타자를 자기의 보존을 위한 도구로 사용하는 관점이나 행동에 대해 반대하고, 모든 사람이 이성과 양식에 따라 자발과 평등의 호혜로운 원칙 위에서 사회를 구성할 것이라고 믿는다. 근대성을 비판하는 개념으로서 아나키즘이 내세우는 前근대성은 바로 기술적 근대성이 갖는 도구성에 대한 반감의 표현이다. 그리고 이 반감의 구체적 실례들은 중세적 질서로 대표되는 공동체주의다(김경복, 1999, 188∼202). 그렇다면 아나키즘이 억압적 모더니티를 비판하기 위해 내세우는 기준들은 무엇일까?
1)본능과 상호부조의 부활
아나키즘은 근대적인 합리성 자체를 부인하지 않는다. 아나키즘이 비판한 것은 인간이 배제된 도식적인 역사발전법칙과 개인의 본능적인 자유에 대한 이성적인 거부였다. 아나키즘에서 개인은 스스로의 운명을 구성하고, 그들의 삶은 추상적인 사회학적 공식의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에 맞춰질 수 없다. 또한 인간은 혁명적 열정, 즉 자유를 향한 충동, 평등을 향한 열정, 반란을 위한 신성한 본능을 소유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바쿠닌의 사회주의는 맑스의 과학적 사회주의와 달리 '순전히 본능적'이었다(Avrich, 1988, 6). "파괴의 충동은 창조적인 충동(the urge to destroy is a creative urge)"이고 해방된 충동은 새로운 사회를 구성할 것이다. 바쿠닌은 사회적인 구속이 없어지면 사람들이 자율적으로 자신들의 사회원리를 구성할 것이라고 믿었다.
이런 새로운 사회원리가 가능한 것은 이기적인 욕망의 추구, 이기적인 합리성이 아니라 긴 진화의 과정에서 발전되어온 상호부조라는 본능적인 인간연대에 기반하기 때문이다. 크로포트킨은 인간을 '태생적인 본능과 교육의 산물'(크로포트킨, 1993, 244)로 본다. 오랜 진화과정을 거쳐왔기 때문에 상호부조의 본능은 근대국가체제 하에서도 쉽게 사라지지 않고 미래의 대안이 된다. 하지만 상호부조하는 본능이 존재한다고 갈등이 소멸하는 것은 아니다. 크로포트킨은 인간의 자연적인 본능이 대체로 협동적이지만 경쟁과 과시가 없어질 수는 없다고 인정한다. 그렇기에 인간의 임무는 그런 감정들을 막고 조화와 상호연민을 향한 욕망을 권장하는 것이다(Avrich, 1988, 59). 바로 이런 점에서 교육이 중요해진다.
2)필요의 원리와 산업의 재편
크로포트킨에 따르면, 공황은 과잉생산 때문이 아니라 강요된 빈곤으로 인한 과소소비와 비생산적인 일로 노동력이 낭비되기 때문이다. 상호부조의 논리에 기반하면 최소의 에너지 소비로 최대한의 행복과 즐거움, 종의 지속과 발전을 보증하는 습관과 성격을 발달시킬 수 있다(크로포트킨, 1993, 6∼31). 그리고 사회적 부의 생산에서 개인의 역할을 측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자연자원은 한 개인이 아니라 전체 인류에게 주어진 자산이고 모든 사람이 공동으로 이용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것에서 생산되는 부 역시 전체 인류의 공동유산이다(폴 애브리치a, 1989, 43). '능력에 따른 노동, 필요에 따른 분배', 이것이 크로포트킨의 경제원리이다. 그는 생산력이 발전되면 부족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지기 때문에 필요이상을 요구하지 않을 것이라고 본다.
그렇다면 문제는 생산력이다. 아나키즘에서 생산력의 발전은 상호부조의 논리에 기반한 산업재편을 요구한다. 크로포트킨은 근대의 산업체제가 강요하는 농업과 공업의 분리, 능률본위의 분업제도,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의 분리를 거부하고, 농업과 공업의 일체화, 산업의 분산화,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의 통합화 등을 주장한다. 노동자가 임금노예제에서 해방되고 유쾌한 환경에서 작업을 수행할 수 있을 때, 무기와 사치품의 생산이 사회적으로 유용한 작업을 위해 폐지될 때, 모든 이의 필요는 충족될 것이다(Avrich, 1988, 64).
아나키즘은 근대의 과학기술에 우려의 시선을 보내지만 그 유용성을 인정한다. 바쿠닌은 과학자와 기술전문가가 그들의 지식으로 타인을 지배할 수 있다고 경고하지만 '과학에 대항한 반란이 아니라 과학의 지배에 대항하는 삶의 반란'을 설파했다(Avrich, 1988, 15). 크로포트킨 역시 근대 과학의 타당성을 인정한다. 특히 크로포트킨은 최신기술을 도입하면 작은 생산단위로 전력을 분배할 수 있고 도시와 시골의 이점을 결합시킨 '전원도시(garden city)'를 발전시킬 수 있다고 보았다. 근대의 과학기술은 시골로 전력을 도입해서 생산력을 높이고 새로운 빠른 소통수단을 제공해 작은 공동체의 기술수준을 상승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Avrich, 1988, 64∼72).
3) 자유주의적 개인관 비판
구승회는 '자유 자본주의'라는 개념을 사용하면서 아나키즘의 사회원리를 '다원주의'라고 부르려 한다(구승회, 1996, 179). 하지만 다원주의는 서구의 개인주의에 기반해 있다. 다원주의는 제한된 자원과 전문화된 이익에 의한 권리침해를 막기 위해 관료의 선출과 민주적 절차를 내세운다. 그러나 다양성과 다원주의는 다른 개념이기 때문에 아나키즘의 논리는 다원주의의 논리와 완전히 다르다.
아나키즘은 근대의 개인주의 사상을 거부한다. 사적인 영역으로 축소되어가는 개인은 인간의 본질적인 특성, 즉 공동체에의 적극적 참여를 통한 자아의 실현이라는 특성을 상실한다. 상호주의에 입각한 사회에서 시민은 단순한 유권자가 아니라, 자신의 이해관계에 따라 자유롭게 직업조직, 이익조직 혹은 그 외의 단체들을 결성하고, 그 속에서 자신들의 이해와 견해를 표출한다. 따라서 각 단체의 대표들은 의회 민주주의에서와 같은 대표가 아니라 대리인이다(김경일, 2001, 14).
또한 방영준은 자주인적 개인을 강조하는 아나키즘의 정의관이 아이러니컬하게도 자본주의의 비판에서 자본주의의 모태인 고전적 자유주의로 회귀하는 경향을 보인다는 점을 지적한다(방영준, 1996, 64∼65). 하지만 이것 역시 잘못된 주장이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아나키즘의 개인 속에는 이미 사회가 내재되어 있다. 따라서 아나키즘 사회는 단순한 개인의 총합이 아니다. 왜냐하면 공동체 구성원리로서의 평등은 모든 개인이 그 능력에 있어 동일하다는 것이 아니라 개개인이 그 자신의 특수함을 가지는 존재를 의미한다. 개개인은 그 능력과 이해가 다르기 때문에 유일한 존재이고, 이 유일성으로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 동등한 권리를 주장하게 된다. 자신과 다른 특성에 대한 상호인정은 공동체 형성에 있어서의 기초가 되고, 사회는 동일한 구성원들의 결사체가 아니라 다양한 특성을 가지고 평등하고 자유롭게 행위하는 개인들로 구성된다(김경일, 2001, 15).
4)폭력의 인정
아나키즘은 민중의 이익을 반영하지 않고 문제의 진리 여부를 사람의 수로 결정하는 의회주의를 반대한다. 아나키즘은 대표가 아니라 직접적인 행동을 중시한다. 바쿠닌이 혁명의 도구로서 테러를 인정함으로써 아나키즘은 폭력과 무질서, 공포라는 수식어를 몰고 다녔다. 하지만 아나키즘은 무분별한 테러주의가 아니다. 크로포트킨에 따르면, 고귀한 동기(noble motives)를 가진 테러는 임의적인 테러와 달리 저항수단이 될 수 있다. 다만 크로포트킨은 봉기가 '최소 인원의 희생과 상처'로 치러질 수 있는 온건한 것이 되기를 열렬히 희망했다(폴 애브리치a, 1989, 40).
분명히 크로포트킨은 무차별적인 테러리즘이 운동의 참된 지지자를 탈도덕화하고 일반대중의 시각에서 아나키즘을 불신하게 만든다고 비판했다(Avrich, 1988, 68). 란다우어 역시 테러의 사용이 아나키즘을 폭동과 무법, 심지어 범법행위로 인식하게 되는 부정적 결과를 초래했다고 비판한다(김경일, 2001, 18). 하지만 이런 비폭력주의자들은 테러리스트들의 폭력이 있었기에 보호받을 수 있었다. 비폭력을 주장하던 란다우어가 군대의 개머리판에 맞아 죽었다는 사실, 그 자신은 폭력 앞에 무참하게 학살되었다는 아이러니는 최소한의 수단으로, 방어의 수단으로 폭력의 사용을 인정하고 있다.
또한 아나키즘이 주장하는 폭력은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것이다. 이 폭력에는 추상적인 대의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에게 닥쳐온 폭력에 물러서지 말고 맞서라는 적극적인 의미가 부여되어 있다. 그리고 아나키즘의 폭력성에 대한 평가는 조금 왜곡된 면이 있다. 스페인 내전 때 발생한 파괴와 처형은 아나키스트 조직이 아니라 소규모 광신자 그룹에 의해 행해진 것이다(우드코크, 1994, 164∼165).
5)평등하고 자율적인 교육
직접적으로 가해오는 압제의 힘과 맞서기 위해 폭력의 사용을 인정했지만 아나키즘이 실제로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교육이었다. 테러를 인정했던 바쿠닌조차도 "우리는 평등을 원한다. 그리고 평등을 원하기 때문에 우리는 모든 사람에게 평등한 포괄적 교육을 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이종훈, 1996, 135). 즉 새로운 사회를 위해서는 스스로를 고양시키는 교육이 필요하다. 아나키즘에서 지식인이 갖는 역할은 바로 이 교육에서 중요해진다.
아나키즘의 교육원리는 표준화된 아이들을 양산하는 근대적 교육원리와 완전히 다르다. 박홍규는 아나키즘의 자유교육 원리를 4가지로 정리한다. ①자발성, 자주성, 주체성의 원리: 출석이 강제되지 않기 때문에 교사들은 더 많은 수업준비와 활동준비를 해야 한다. 아이들은 여러 활동 중에서 기호와 능력에 맞는 학습계획을 스스로 세우고 교사도 그것에 적극 참여한다. 또한 아이들은 학습성과의 평가에도 참여한다. ②개성과 개인차의 중시: 개인차는 당연한 것으로 인정되고 통일적·획일적인 기준으로 비교하거나 경쟁시키는 것은 금지된다. 따라서 자유학교에는 학년제, 학급제도 없다. 다른 나이의 아이들이 함께 배우고 모든 아이들은 나름의 학습계획을 갖는다. 따라서 자유교육학교는 대부분 작은 학교이다. ③교육과 생활의 통일: 교육은 책이 아니라 스스로의 활동이나 직접 체험에 의해 이루어진다. 요리, 농사, 사육, 여행, 인쇄, 토목, 견학 등이 수업의 주내용이다. 그런 수업을 준비하기 위해 교사는 지역사회와 협조해야 한다. 아이들을 데리고 여러 곳을 보여주고 여러 사람들을 만나게 하고 배우게 한다. 이것은 지역에서 배우며 지역에 열린 학교이다. 자유학교에서는 놀이도 중시된다. 놀이를 통한 감정해방은 자기주장과 협력의 필요성 및 유용성을 스스로 익히게 한다. ④민주주의와 공동생활의 참가: 교사는 공포의 대상이 아니다. 교사와 학생은 서로 이름을 부르고 교사간의 상하관계도 없다. 부모도 함께 참여하고 부모나 주민을 위한 야간학교도 열린다(박홍규, 1996, 240∼243).
이런 생각은 단순히 이상으로 그치지 않는다. 잘 알려진 대안학교 섬머힐도 아나키스트가 설립한 것이다. 그리고 한국에서도 이미 많은 대안학교와 육아공동체운동에서 이런 교육방식을 채택하고 있다.
IV. 공간의 정치와 차이를 양성하는 공동체
이상에서 논의했던 아나키즘의 대안적 모더니티는 새로운 공동체에 대한 논의로 구체화되고 집약될 수 있다. 특히 아나키즘은 '공간성의 정치'라는 문제에 주목했다. 아나키즘의 공동체는 단순한 지역 공동체가 아니라 높은 정도의 인격적 친밀, 정서적 깊이, 도덕적 처신, 및 사회적 응집, 시간적 연속성 등을 특징으로 하는 모든 형태의 사회관계를 포괄하는 용어이다(방영준, 1996, 65). 이 새로운 공동체는 중세의 정신(박애, 연민)과 근대의 성과(자유, 평등)를 결합시킨다. 그래서 아나키스트들은 도시를 중시한다.
아나키즘을 생태학적으로 복원시킨 북친은 새로운 정치문화를 창출하기 위한 자치도시주의(municipalism)와 경제의 자치도시화, 공동체간의 물질적 이익이 중첩되는 경제의 연방화를 요구한다. 이 자치도시주의는 자본주의, 시장, 생태파괴의 힘, 국가에 대항해서 정교한 권력관계의 장을 형성한다. 이런 장이 없다면 자치도시주의는 학문적 무기력증(cretinism)으로 전락하게 된다. 따라서 근대의 투쟁은 결코 공장이나 작업장으로 단순히 제한되지 않고 도시를 구성한다(Bookchin ?).
이런 크로포트킨과 북친의 견해를 수용해 구승회는 에코아나키즘이 '생활양식과 접목한 사회운동의 성격'으로 가야한다고 주장한다. 구승회는 중세 자유도시에서 비국가적인 중재와 조정의 예를 거론하면서 공동체 구성원 전체에 의한 의사결정과 전체에 의한 강요가 국가의 간섭에 의한 강요와는 다르다고 주장한다(구승회, 1996, 197). 하지만 현재의 한국사회에도 이런 서구적인 주장이 적실성을 가질까? 가부장제와 연고주의, 지역주의의 문제는? 진정 아나키스트적인 문제의식을 가진다면 차이를 거북해하고 무조건 억누르려하는 관습과 맞서 싸우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
이런 점에서 차이를 양성하는 공동체 모형을 제시한 푸리에의 논의가 흥미롭게 다가온다. 푸리에는 공간과 삶, 공동체의 문제를 치열하게 고민했다. 이진경은 노동자와 빈민의 주택문제를 그들의 삶과 생활의 문제로서 이해한 푸리에를 높게 평가한다. 이런 푸리에의 생각을 수용해 건설된 고댕의 파밀리스테르는 사적인 공간과 코뮨적인 공간이 병존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주었다. 파밀리스테르는 가족이나 사적인 공간에 대한 욕망을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코뮨적인 관계와 접속될 수 있는 공간적 배치를 만들어낸 셈이다(이진경, 2000, 291).
하지만 이진경의 글에는 왜 푸리에가 그런 공동체를 건설했는가에 대한 문제의식이 빠져 있다.
마르쿠제에 따르면, 푸리에는 노동에서 쾌락으로의 변형을 주장한 사상가이다. 푸리에는 '매력적인 노동(attractive labor)'라는 개념을 통해 리비도적 힘의 해방을 추구한다(Marcuse, 1966, 217). 푸리에는 단순히 노동에 대한 적절한 보상이 아니라 노동을 매력적으로 만들 수 있는 공동체를 구상했다. 푸리에에게 정념은 3가지 목적, ①윤택(luxe), 즉 오감(미각, 촉각, 시각, 청각, 후각)의 쾌락, ②집단 및 집단계열(우정, 야심, 애정, 부성애), ③정념이나 성격이나 천성의 메카니즘, 따라서 보편적 통일이라고 하는 3개 목적을 지향한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①과 ②를 조화시키는 ③의 목적이다. ③은 3개의 정념으로 구성된다. 이것은 a)밀모정념(cabaliste), b)전환정념(papillonne), c)복합정념(composite)이다. 푸리에에 따르면, 차이를 조화시키는 이 3개의 정념 중 어느 하나도 방해되어서는 안된다.
먼저, 밀모정념은 열중하는 정신으로 계산, 심사숙고를 강조하면서 복합정념과 대조를 이룬다(이 두 정념은 대조를 이루면서 산업계의 諸집단을 자극한다). 밀모정념은 유사한 종류의 집단 사이에 불화 또한 경쟁적 대항관계를 형성한다. 푸리에에게 인접집단 사이의 부조화는 자연의 일반법칙이다. 협동사회적 조화는 조화와 함께 부조화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전환정념은 주기적인 변화, 대조적인 상황, 상쾌한 사건 및 공상을 하게 하는 신기한 것에 대한 욕구이다. 협동사회에서 개인은 하루 사이에 7내지 8종류의 매력적 노동을 하며 다음 날에는 변화를 주어 전일의 집단과 다른 집단과 교체할 수 있다(이런 신속한 전환을 위해 각 건물은 연결되어 있다). 또한 전환정념은 같은 노동을 몇 달, 몇 해고 쉬지 않고 계속할 때 오는 건강의 해침을 방지한다.
복합정념은 조화를 낳는다. 노동에 몰입하려면 밀모정념만으론 부족하다. 두 개의 대조물, 즉 밀모정념의 심사숙고에 의한 격정과 낭만적인 복합정념의 맹목적인 격정을 동시에 작동시켜야 한다. 푸리에는 인간의 영혼이 동질성과 대조성의 화합 속에 존재한다고 본다. 이런 동질성과 대조성을 화합시키려면 연속적이고 근접한 뉘앙스에 따라 산업집단의 단계를 설정하고 각 집단이 인접집단과 부조화하고 반대측의 중심에 대항집단을 형성시켜야 한다. 이처럼 푸리에의 정념은 수동적 부문에서 5개의 감각 정념, 능동적 부문에서 4개의 혼 정념, 중립적 부문에서 3개의 기제적 정념으로 구성된다(푸리에, 1993, 398∼420). 푸리에의 공동체는 이 정념들이 그 차이를 최대한 활성화하도록 구상되었다.
쉽게 설명을 해보자. 푸리에는 요리와 어린이(어린이는 미래를 나타내는 희망이다)를 많이 거론한다. 먹는 것은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정념이다. 자신의 기호를 살리는 요리를 만들지 않는다면 공동체의 식사는 획일적으로 되고 정념을 상실한다. 반면 자신의 기호를 살리는 요리를 만든다면 정념은 부활하고 공동식사는 음식에 대한 다양한 욕구를 만족시킬 수 있다. 이런 공동체는 어린이에게 획일적이고 맛없는 검은 빵이 아니라 아이스크림이나 과자를 먹게 해주기 때문에 어린이들은 어릴 적부터 다양한 식사를 통해 자신들의 차이를 키워 나간다. 공동체는 개별 가정이 마련하기 힘든 다양한 음식을 마련해 줌으로써 다양한 차이를 양성하게 된다.
푸리에에게 차이는 장애가 아니라 원동력이다. 만일 부, 성격, 기호, 그리고 천성의 커다란 차이가 없다면 정념계열을 편성할 수 없다. 만약 이런 일련의 차이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정념을 협동화하기에 앞서 온갖 의미에서의 그것을 창출하고 확립하지 않으면 안된다(푸리에, 1993, 338). 바로 이점이 매우 중요하다. 푸리에는 단순히 차이를 거북해하지 않을 뿐 아니라 차이를 적극적으로 양성할 것을 주장하고 있다. 따라서 푸리에가 병영적인 공동체를 건설하려 했다는 비판은 정당하지 않다.
이진경은 이 집합공동체의 실패 원인을 두 가지 점에서 찾는다. 첫째, 코뮨적인 모델은 초기에 엄청난 자금을 필요로 한다. 이는 그날 그날을 사는 노동자나 빈민들에게 불가능한 요구였고 부르주아지는 이들을 포섭했다. 둘째, 노동조합을 중심으로 조직되었던 프롤레타리아 운동은 이 성공적인 실험을 밀고 나가지 못하고 오히려 비판했다. 결국 푸리에주의자들의 프로그램이나 고댕의 훌륭한 실험은 이 두 가지 강력한 세력의 틈새에서 자신의 영향력을 차단 당하고 제약 당할 수밖에 없었고, 이 모델은 새로운 운동과 결합하지 못한 채 고립되고 묻혀버리게 된다(이진경, 2000, 268∼269).
하지만 지금의 상황에서는 어떨까? 코뮨적인 공동체를 건설하는 비용은 기술발달과 함께 절감되고 있다. 아파트가 근대적인 주거공동체의 모형이자 집합주거단지의 성격을 띤 것이라면, 새로운 주거공동체의 모형을 통해 그것을 발전시킬 수 있다. 또한 현대에 와서 공동체의 의미는 다시 살아나고 있다. 곳곳에서 자신들의 공동체를 새롭게 재조직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 지역화폐운동도 그 하나의 흐름이다. 현재 전 세계적으로 약 1천 5백여 개의 단체에서 지역통화를 운영하고 있으며, 회원 수도 10만 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임현주, 1999).
분명 한계는 있다. '한 공동체의 변화가 전체 사회의 변화를 강제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아나키즘은 매우 당위적인 답변을 할 수밖에 없다. "각 공동체는 스스로 자신의 삶을 개척해야 한다. 억압의 힘과 맞서기 위해서라면 연대를 형성한다. 과정에서 그 이상의 결합은 결과를 왜곡시키기 마련이다. 한계는 존재한다. 하지만 그 한계가 새로운 가능성을 막을 수는 없다."
V. 나오는 말
분명히 아나키즘은 아직도 살아있다. 자신의 신념과 그 신념을 지키기 위해 끊임없는 단련을 요구하는 아나키즘은 현실적으로 패배(?)했지만 가슴 깊은 곳에 자유의지라는 이름으로 살아있다. 요즘 들어서 네트(net)와 아나키즘을 연관시키려는 시도가 나타나고 있다. 백욱인은 자신의 지식과 정보를 공유하려는 해커와 와레즈, 카피레프트를 주장하는 부류에 이르기까지 네트가 아나키즘과 친화력을 갖고 있다고 주장한다. 컴퓨터 네트워크는 고구마 뿌리처럼 얽힌 구근형 구조를 갖기 때문에 중심이 무의미하거나 힘을 쓸 수 없고, 줄기의 어느 부분에서나 힘이 뻗쳐 나갈 수 있고 그 영향은 신속하게 사방으로 번져간다는 점에서 아나키즘과 연관된다. 네트 사용자는 적극적 개입과 참여로 스스로 미디어의 내용과 형식을 창출하는 창조적 주체로 설 가능성을 갖고 있다. 바로 이점이 개인의 참여를 확대하고 주체성을 회복하는 민주주의의 초석으로 작용할 수 있는 지점이다(백욱인, 2000).
하지만 아나키즘은 철저한 '살붙이 공동체'이다. 인터넷 공동체는 가식적이고 허구적인 공동체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 '캘리포니아 이데올로기'(바브룩·카메론, 1996)는 그럴싸한 유토피아를 보여주지만 실제로는 현실의 싸움에 관여하지 않는다. 인터넷 공동체는 문화적인 자유를 줄 수는 있지만 자기충족적 개인이라는 자유주의의 이상을 수용한 것일 뿐이다. 교외의 한적하고 안전한 주택에서 자신들만의 격리를 즐기는 여피족들은 한번의 클릭으로 전세계 빈민아동을 위한 기금을 낼 수 있지만 정작 도심에 위치한 자신들의 이웃에는 무관심하다. 또한 가상현실이라는 추상개념에 의존하기보다는 과학기술의 중재적 영향력을 통해서가 직접적으로 자신의 힘으로 경험할 수 있는, 물리적 배치가 이웃간의 대화를 조장하는 그런 공동체로 회귀할 필요성이 있다(슬로카, 1996, 215∼216).
물론 참여를 위해 전자장치를 사용할 수는 있다. 하지만 그 과정이 참여의 주된 방식이 되어서는 안된다. 직접 부대끼지 않고서는 정확한 사실을 판단할 수 없다. 인터넷 세상에서 정보는 풍부한 자료를 전달하지만 그 자료가 중립적이라는 보장이 없다. 따라서 민주주의는 직접적인 대면민주주의(direct face-to-face democracy)에 기반해야 한다. 아나키즘은 거대한 사회가 아니라 나의 결정이 영향을 미칠 수 있는 한계 내에서의 공동체를 추구한다.
이런 생각은 매우 유토피아적으로 보일 수 있다. 여기에 르페브르의 얘기로 대신 답하려 한다. "오늘날 유토피아를 연구하는 목적은 무엇일까? 일상생활의 정복과, 일상의 재창조와 미학에서 소외되고, 정치학을 통해 분쇄되어 추상 속으로 함몰한, 가능한 것과 실재하는 것에서 잘려나간 힘들을 회복하는 것이 그 목적이다"(르페브르, 1999, 141∼142).
※참고문헌
Alan Carter, 2000, [Analytical Anarchism: Some Conceptual Foundations], Political Theory, Vol.28 No.2, April.
Herbert Marcuse, 1966, Eros and Civilization: A Philosophical Inquiry into Freud, Beacon Press.
Murray Bookchin, ?, [A Politics for the 21st Century: Speech to the Lisbon Conference on Libertarian Municipalism](http://www.web.net/~anarchos/people/bookchin.htm)
Murray Bookchin, ?, [Social Anarchism or Lifestyle Anarchism: An Unbridgeable Chasm](http://www.spunk.org/library/writers/bookchin/spoo1512/index.html).
Noam Chomsky, 1995, [Noam Chomsky on Anarchism, Marxism & Hope for the future](http://flag.blackened.net/revolt/rbr/noamrbr2.html)
Paul Avrich, 1988, Anarchist Portraits, Princeton University Press.
구승회, 1996, [아나키즘과 녹색경제의 패러다임], {아나키·환경·공동체}, 모색.
구승회, 2001, [인문학 데이트: 구승회], 한겨레 신문 2001년 4월 4일자.
김경복, 1999, {한국 아나키즘시와 생태학적 유토피아}, 다운샘.
김경일, 2001, [문화운동으로서의 아나키즘: 란다우어(G. Landauer)의 연방주의에 나타난 아나키즘의 이해], 2001년 3월 한국정치사상학회 월례토론회.
김성국, 1996, [서론: 왜 다시 아나키즘인가?: 신사회운동과의 관련성을 중심으로], 구승회·김성국 외 지음, {아나키·환경·공동체}, 모색.
김성국, 2000, [한국 시민사회의 구조적 불안정성과 시민권력 형성의 과제], 민주주의사회연구소 제1회 정례연구발표회.
리처드 바브룩·앤디 카메론, 1996, [캘리포니아 이데올로기], 홍성태 엮음, {사이버공간, 사이버문화}, 문화과학사.
마크 슬로카 저, 김인환 옮김, 1996, {사이버스페이스 전쟁}, 한국경제신문사
막스 네트라우 저, 하기락 역, 1993, {전세계 인민해방전선 전개}, 형설출판사.
미셀 라공 저, 이재형 역, 1992, {패배자의 회고록}, 예하.
미셸 푸코, 콜린 코든 편, 홍성민 옮김, 1993, {권력과 지식: 미셸 푸코와의 대담}, 나남.
박용현, 1999, [21세기 자유, 아나키즘: 국가권위를 타파하는 자유로운 연합과 부조의 공동체…당신도 아나키스트인가], 한겨레21 제279호.
박홍규, 1996, [아나키즘과 자유교육], {아나키·환경·공동체}, 모색.
방영준, 1996, [아나키즘의 이데올로기적 특징], {아나키·환경·공동체}, 모색.
백욱인, 2000, 이대학보 1161호, 2000년 9월 4일.
샤르르 푸리에, 김문창 역, 1993, {산업적 협동사회적 새 세계}, 형설출판사.
앙리 르페브르, 1992, 『현대세계의 일상성』, 세계일보.
앙리 르페브르, 이종민 옮김, 1999, {모더니티 입문}, 동문선.
에드워드 소자, 이무용 외 옮김, 1997, {공간과 비판사회이론}, 시각과 언어.
玉川信明, 이은순 옮김, 1991, 『아나키즘』, 오월.
이종훈, 1996, [바쿠닌의 자유관과 평등사회론], {아나키·환경·공동체}, 모색.
이진경, 2000, {근대적 주거공간의 탄생}, 소명출판.
임현주, 1999, [공동체탐구: 화폐질서에 반기 든 지역통화운동], 월간말 1999년 12월호.
죠지 우드코크 저, 최갑용 역, 1994, {아나키즘: 운동편}, 형설출판사.
크로포트킨 지음, 하기락 역, 1993, 『상호부조론』, 형설출판사.
폴 애브리치a, 편집부 옮김, 1989, {러시아 아나키스트 1905}, 예문.
폴 애브리치b, 편집부 옮김, 1989, {러시아 아나키스트 1917}, 예문.
글쓴이 : 대마왕
보통 아나키즘은 무정부주의(無政府主義), 즉 정부를 부정하는 불온하고 허황된 사상이라 얘기된다. 불온하다고 얘기하는 것은 무(無)라는 단어에서 느껴지듯이 뭔가 혼란과 무질서를 부추기는 느낌 때문이고, 허황되다고 하는 이유는 지금 현실에서 국가를 부정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에게 국가는 너무나 익숙한 것이어서 그것이 없는 상태를 상상하지 못한다. 그런 상상이 불가능한 것은 우리가 국가의 역사를 체계적으로 배우기 때문이다. 우리는 국사(國史)라는 공식과목을 통해 고조선부터 대한민국으로 이어지는 국가의 역사를 배운다. 더구나 잦은 외부의 침략에 시달렸고 특히 일본 식민지라는 비극을 겪으면서 우리에게 국가는 반드시 필요한 존재로 인식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국가 없는 역사를 상상하기가 힘들고, 우리 역사는 왕조와 국가들의 계보로 빼곡히 채워져 있다.
하지만 그렇게 불온하고 허황되기 때문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들도 있다. 사회를 변화시키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권력의 정점이라 할 국가를 바꾸지 않고 변화를 추구한다는 게 무의미해 보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진정한 새로움은 무에서 생길 수 있기 때문에 국가 없는 사회가 무한한 상상력을 자극하기도 한다. 그래서 아나키즘은 그 거부감만큼 강한 호소력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그리고 현실의 변화도 그 호소력을 높인다. 세계화(globalization)의 물결은 국가의 경계를 넘나들며 국가가 쉽게 다룰 수 없는 과제들을 실어 나른다. 지구온난화같은 환경문제나 초국적 기업같은 세력들은 한 국가의 노력만으로 결코 해결하거나 통제할 수 없는 어려운 과제를 제시하고 있다. 그리고 국가는 국방이나 외교처럼 큰 과제와 비교할 때 교육이나 사회복지와 같은 섬세한 과제들을 다루기에 너무 커졌다. 그러다보니 국가의 틀에 묶여 있던 지방들이 활성화되어 자체적으로 공동체를 구성하고 과제를 해결하면서 국가의 필요성을 감소시키고 있다. 그래서 국가는 큰 문제를 해결하기에 작고 작은 문제를 해결하기에 너무 크다는 비판을 받기 시작한다.
이런 상황에서 아나키즘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그런데 아나키즘을 삶의 신념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아나키즘을 단순히 ‘무정부주의’로 번역하기를 거부한다. 오히려 이들은 아나키즘을 ‘반강권주의(反强權主義)’라 번역한다. 왜냐하면 아나키즘은 국가만이 아니라 시장의 폭력에도 맞서고 여성을 억압하는 가부장제나 생태계를 파괴하는 개발주의도 반대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나키즘의 미래는 완전한 무질서가 아니라 공동체적인 질서 속에서 구현된다. 아나키스트는 모든 권위가 아니라 강압적이고 억압적인 권력을 거부하고 스스로 동의한 권위라면 전체의 결정을 자신의 결정처럼 따르려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나키즘을 무정부주의로만 받아들이는 건 아나키즘에 관한 오해이고 그 틀에만 가두면 사상의 다양성을 깨닫지 못한다.
사실 한국사회에서 아나키즘의 뿌리는 깊다. 아나키즘이라는 ‘서구의 사상’이 수입된 것은 1910년대 이후이지만, 아나키즘의 문제의식을 공유하는 사상이 이미 존재했기 때문이다. “천하에 남이란 없다”고 공언했던 묵가의 사상이 그런 사상이고, 무위(無爲)의 철학을 가졌던 도가의 사상도 마찬가지이다. 개화기 이후 한국의 지식인이나 노동자들이 아나키즘을 쉽게 받아들인 이유는 아나키즘의 매력에 끌렸기 때문만이 아니라 우리 속에 이미 그런 경향이 잠재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무릇 사람이란 서로 돕고 보살펴야 한다는 생각은 굳이 배우지 않아도 지켜야 하는 우리 사회 고유의 윤리였다.
하지만 지금 사회의 흐름은 그런 고유의 윤리를 배반하는 쪽으로 흘러가고 있다. 서로 돕고 보살펴야 한다는 얘기는 교과서에나 있을 뿐 현실은 다른 사람과 치열하게 경쟁하며 상대방을 밀어내야지만 내 삶을 지킬 수 있다는 정글의 법칙이 지배하고 있다. 돌봄이 아니라 경쟁력이 최고의 가치이고, 나보다 약한 사람을 배려하기보다 나보다 강한 사람에게 잘 보이는 것이 삶의 기준이 되었다. 우리는 함께 살고(共存) 함께 즐거운(共樂) 사회에서 점점 멀어져 가고 있다.
이 시점에서 아나키즘은 우리 시대에 몇 가지 핵심적인 물음을 던진다.
첫째, 자본주의 산업화나 한미FTA의 시대에 아나키즘은 ‘농민’이라는 존재에 관해 물음을 던진다. 아나키스트들이 꿈꿨던 사회는 모든 권력을 중앙으로 집중시킨 국가나 시장이 인간의 노동을 통제하는 사회도 아니다. 아나키스트들은 자급(自給)이 가능한 소규모 사회를 꿈꿨다. 그리고 그런 자급은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할 때에만 가능하다. 자급하지 못하는 공동체는 외부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고, 따라서 농업은 그런 자급의 가장 중요한 바탕이 된다.
농업은 단순히 1차 산업으로 분류될 수 없는 중요성을 가진다. 농업은 부가가치를 생산하는 산업이 아니라 생존의 조건이다. 자신의 먹거리를 스스로 생산하지 못한다면 먹거리를 수입해야 하고, 그럴 경우 만일 수입이 안 된다거나 수입품의 가격이 지나치게 높아지면 가난한 사람들은 먹지 못하게 되고 살아남을 수 없다. 먹거리를 자급하지 못하는 나라는 먹거리를 공급하는 나라의 요구에 따를 수밖에 없다.
이런 농업의 중요성은 단순히 ‘식량안보’의 문제로 제한되지 않는다. 농업은 자연과 함께 공존하는 삶을 인간에게 깨우쳐 준다. 다른 산업이 자원을 파내고 자원을 이용해서 생산을 한다면, 농업은 자연의 힘을 빌려 생산한다. 농약을 사용하지 않고 자연의 섭리를 따르는 유기농업은 자연을 파괴하지 않고 자원을 순환시켜서 자연을 살아있게 한다. 사람의 똥이 논밭의 거름이 되고 그곳에서 자란 농작물을 사람이 다시 먹고 똥을 싸듯이, 농업은 인간과 자연을 연결하고 자원을 순환시키는 시스템을 구성한다.
아나키즘은 이런 농업을 담당하는 농민들이 사회를 변화시키고 이끌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기계화, 산업화의 물결은 농업과 농민을 시대에 뒤떨어진 산업과 사람이라 밀어냈지만, 그 물결 뒤에 남은 건 파괴된 자연과 황폐해진 인간관계였다. 오히려 역사를 살펴보면 농경사회에서 인간의 삶은 더 풍요로웠다. 우리 역사를 봐도 농촌에서는 향약이나 두레같은 협동노동이 자연스레 이루어졌다. 그리고 마을의 일은 마을 주민들이 한 곳에 모여 의논해서 결정하는 ‘농민민주주의’가 자리를 잡았다.
아나키즘은 이런 고유의 지혜를 우리가 잃어가고 있는 건 아닌지 묻는다. 사람이 땅의 가치를 잊고 인간이 자연과의 공생관계를 끊을 때, 우리에게 무엇이 남을 것인지를 묻는다.
둘째, 세계화라는 시대의 흐름을 거스르며 아나키즘은 공동체의 ‘자치’를 강조한다. 다른 사람들이 내 삶에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결정들을 내린다면 나는 행복할까? 국가권력이 다른 목적으로 쓴다며 수십 년 동안 살아온 마을을 비워달라고 할 때, 나는 순순히 그 명령에 따라야 할까? 아나키즘은 중요한 결정들이 반드시 내 동의를 거쳐야 하고 내가 살아온 터전을 그 누구도 강제로 빼앗지 못한다고 주장한다.
누구나 그런 억압에 저항할 권리를 가지고 있고, 한 개인의 힘이 약하다면 한 마을이 뭉쳐서 그런 억압에 저항할 수 있다. 인도의 사상가 마하트마 간디(M. Gandhi)는 이런 자치의 원리를 ‘스와라지’라는 원리로 묶었다. 간디는 “진정한 민주주의는 중앙에 앉아 있는 스무명의 사람들에 의해 작동될 수 없다. 그것은 모든 마을의 주민들에게 의해 아래로부터 작동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어떤 이는 세계화의 시대에 자치를 강조하는 것이 불가능하게 여길지 모르겠다. 하지만 한 방울의 물이 모여 바다를 이루듯이 한 마을 없이 세계가 구성될 수 없다. 자율적이고 자급하는 공동체는 통제할 수도 없는 세계화의 물결을 막는 좋은 방파제가 될 수 있다. ‘아래로부터의 세계화’라는 표현이 등장하는 것은 이런 마을들이 서로 힘을 모아 국가나 자본이 주도하는 세계화의 흐름을 거스를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아나키즘은 이런 스스로 다스리는 공동체들이 늘어나야 좋은 사회가 구성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셋째, 폭력으로 가득 찬 세상에서 아나키즘은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물음을 던진다. 부당한 것에 눈을 감고 폭력을 감내하며 수동적으로 복종할 것인지, 아니면 내 몸을 던져서라도 저항하고 싸울 것인지. 아나키즘은 잘못된 결정이나 부당한 대우에 맞서 저항하고 싸울 때에만 나의 자치와 행복이 보장될 수 있다고 믿는다.
무정부주의라는 잘못된 낙인과 함께 아나키즘이 가장 많이 받는 오해는 테러리즘이라는 비난이다. 하지만 아나키즘은 무차별적인 테러를 찬양하지 않았다. 오히려 아나키즘은 사회의 정의와 모든 사람의 행복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으라고 권했다. 어느 한 가지 길만이 옳다고 주장하지 않고 각자의 삶 속에서 자신이 선택한 결정에 책임을 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폭력은 나쁜 것이지만 무조건 모든 폭력이 나쁘다고 주장할 수는 없다. 윤봉길 의사나 안중근 의사의 행동이 분명 폭력인데, 우리는 그 행동이 나빴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단지 나라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쳤기 때문이 아니라 그 행동은 그들의 신념을 표현하기 위한 수단이었고 그들은 그 행동에 당당히 책임을 졌기 때문이다. 내가 선택하고 결정했기 때문에 그 결정에 따른 책임을 떳떳하게 받아들이는 것을 무조건 비난할 수는 없다. 오히려 은밀하게 타협하고 거래하며 자신의 양심을 파는 것보다 그런 행동이 오히려 더 뜻 깊다. 아나키즘은 스스로 선택한 길이라면 어떤 고통을 감수하더라도 그 길을 지켜야 한다고 설득한다.
마지막으로 가장 근본적인 물음인데, 아나키즘은 ‘이 세상에서 나라는 존재는 어떤 의미인가?’라는 물음을 던진다. 우리는 세상의 모든 사물이 분리되어 있고 그래서 서로 살아남기 위해 경쟁해야 한다고 배운다. 하지만 아나키즘은 세상 만물이 서로 연결되어 있고 함께 협력할 때 더 잘 살아남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쌀 한 톨이 우주를 품고 있다는 동양의 사상은 모순되게도 절대적인 자유를 주장했던 아나키즘과 많은 공통점을 가진다.
아나키즘은 세상 만물 하나하나가 자신의 고유한 가치를 지닌다고 믿고 그 각각의 가치를 올곧이 실현하는 게 삶의 목적이라고 본다. 그런 가치는 자기 내면 속으로 깊이 들어갈 뿐 아니라 자신이 살고 있는 세계를 정확히 파악할 때 찾아질 수 있다. 그리고 그런 가치는 나 혼자의 노력으로 찾아질 수 있지만 다른 사람들의 도움을 받으며 찾아질 수도 있다. 아나키즘은 세상 만물이 서로의 가치를 실현하도록 도와야 한다고 본다.
그리고 지금 우리가 누리는 삶은 과거의 인류가 끊임없이 노력해 온 결과이다. 과학기술이나 문명의 발전은 특정 인종이나 민족만의 혜택이나 은총이 아니라 모든 인류의 공동유산이다. 그래서 아나키즘의 관점에서 보면 특허권이나 지적재산권은 터무니없는 폭력이다. 누가 어떤 발견이나 발명을 자신의 것이라 주장할 수 있단 말인가? 세상 만물은 모든 생명이 함께 누려야 하고, 지금 현재의 생명만이 아니라 미래의 생명도 누려야 하는 공동의 자산이다.
그래서 아나키즘이 강조하는 자유는 자유주의가 강조하는 자유와 다르다. 자유주의가 강조하는 자유는 단지 고립된 개인의 자유, 특히 개인이 무한한 소유를 누릴 자유일 뿐이다. 하지만 아나키즘이 강조하는 자유는 사회적 자유, 개인의 자율성이 사회적 관계에 의존한다는 자유이다. “지상에 단 한 사람이라도 자유롭지 않은 사람이 있다면 나는 자유롭지 않다”는 바쿠닌의 말처럼 아나키즘은 나만의 자유가 아니라 모두의 자유를 추구한다.
그래서 아나키즘에서 자유와 평등은 대립하지 않는다. 사회적인 평등은 모든 사람이 자유를 추구할 수 있게 하는 조건이고, 그런 자유는 다양한 관점의 충돌을 부르며 그 자율성이 더욱더 발전할 조건을 마련한다. 그리고 자유는 평등이 틀에 박힌 형태로 고정되지 않도록 끊임없이 평등의 조건을 변화시킨다. 아나키즘에서 자유와 평등은 서로 대립하지 않고 서로를 전제할 때에만 제 가치를 다할 수 있다. 그래서 아나키즘은 자유의 철학이면서 연대의 철학이고 개인의 자유를 통해 삶과 사회 전체의 변화를 추구한다.
아나키즘이 우리 시대에 던지는 질문은 결코 가볍지 않다. 아나키즘은 지금까지 인류가 걸어온 길을 근본적으로 되돌아보라고 요구한다. 그리고 그런 성찰에 힘입어 우리가 가지 않았던 다른 길을 선택하고 걸아가라고 말을 건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