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넬 넘버 5."
짓궂은 기자가 마릴린 먼로에게 밤에 잘 때 무슨 옷을 입고 자는지 질문을 하자, 그녀는 서슴없이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한 여인의 삶이 세계여성들의 몸에서 영원한 향수로 남아 있으며, 세계의 유명 스타들은 그녀가 만든 옷을 입기 위해 몸부림칠 정도였습니다. 샤넬라인이라고 무릎을 살짝 가리는 치마길이, 유행과 나이에 상관없이 누구에게든 잘 어울리고 또 가장 아름답게 보이는 선이라고 코코 샤넬은 주장한 패션과 향수의 여왕. 코코 샤넬(1883~1971,본명 가브리엘 샤넬 Gabrielle Chanel)
그러나 명성과는 달리 그녀의 어린 시절은 매우 가난하고 불행했다고 합니다. 여섯 살 때 어머니가 죽자 그녀의 아버지 알베르 샤넬은 오베르뉴의 이모에게 샤넬을 맡기고는 미국으로 떠나 버렸고, 당시 이모의 집은 가난해서 삯바느질을 하며 근근히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샤넬은 학교에 갈 나이가 되어도 학교 문턱에도 가지 못하고, 열여섯의 나이에 비시 성당의 신부에게 맡겨집니다. 그녀의 나이 스무 살때, 낮에는 양재 보조로, 밤엔 뮤직홀에서 코코라는 가수로 일했습니다.
이 때 얻은 애칭으로 그녀는 죽을 때까지 코코 샤넬로 불리게 됩니다. 그녀는 연예생활을 본격적으로 하기 위해 비시로 옮겨갔지만 냉대와 무관심 속에 좌절하게 됩니다. 그때 물랭 시절에 사귄 에티엔 발장을 만나게 되고, 샤넬은 말을 좋아하는 에티엔 발장의 집에 머무르며 기수 수업을 받습니다. 이때 샤넬은 남성용 승마 바지와 조끼, 풀오버 스웨터 등을 여성용으로 개조하는 기지를 발휘하게 됩니다. 그때만 해도 치렁처렁한 레이스 치마에 호화로운 모자가 유행하던 시절에 샤넬의 심플한 디자인은 예기치 못한 행운을 불러왔습니다.
그녀의 나이 스무 여섯되는 어느 날, 그녀는 우연히 파티에 참석하다가 천눈에 반한 남자를 무작정 따라나서고 동거에 들어갑니다. 그녀는 일생 동안 많은 남자들을 만났지만 정작 자신이 사랑한 사람은 두 사람밖에 없었다고 고백했는데, 그가 바로 그 중 한 사람인 보이 카펠이었습니다. 보이 카펠은 그녀에게 일과 교양의 기초를 가르치고,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사생아를 지극정성으로 뒷바라지하고 그녀를 위하여 모자샵 운영의 제의한 것입니다. 그녀가 처음 만든 모자는 당시 유행과는 거리가 먼 차양이 짧은 모자였지만, 이는 인기를 얻어 날개 돋친 듯 팔려 나갑니다.
다음엔 양장점에서 저지라는 소재로 새로운 드레스를 만들어 큰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당시 저지는 내의로밖에 사용하지 않던 소재였지만, 저지를 사용함으로써 샤넬은 장식과다의 패션에 시달리고 있던 여자들의 육체를 해방시킨 것입니다. 그리고 유명한 '샤넬 블랙'을 탄생시킵니다. 그녀는 검은색이 여성을 아름답게 보이게 하고, 하얀색을 가장 우월한 색으로 생각했습니다. 샤넬의 단순한 블랙과 화이트는 곧바로 충격적인 반응을 불러일으키게 됩니다. "진정한 디자이너라면 지나치게 기발한 착상은 피하려고 할 것이다. 나는 지금까지 평균적인 여성을 위하여 옷을 만들어 왔다. 그로 말미암아 뛰어나게 아름다운 몇몇 여성들이 사장된다 하더라도 말이다."
그녀는 계속 대중적인 옷을 만들어 가는데, 긴 치마를 잘라 무릎까지 올렸고, 긴 차양이 달린 모자는 단순하게 고쳤습니다. 샤넬은 짧은 스커트가 여자의 다리를 가장 아름답게 보이게 한다고 생각하고, 스커트의 길이를 짧게 하여 긴 스커트 밑에 숨겨졌던 여자의 다리를 해방시켰습니다. 또 두 손을 다 써야 하는 활동적인 여성을 위하여 숄더백도 만들고, 언제 어디서나 입을 수 있는 셔츠도 만들고. 그녀가 만든 이미테이션의 진주 목걸이도 폭발적인 인기를 얻게 됩니다. 이렇게 샤넬이 패션계를 움직이며 유행을 창조할 당시는 부르주아 시대와 결별하고 민주주의를 준비하는 시대였으며, 여기에 그녀의 실질적이고 대중적인 패션이 힘을 얻음으로써 날로 급성장을 한 것이라고 보입니다.
1912년 시작한 샤넬의 가게는 불과 여섯 명의 종업원으로 시작되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종업원의 수가 3,500명에 이르게 됩니다.
그리고 향수 샤넬 넘버 19 덕택에 그녀는 성공한 여자라는 영예와 함께 최고의 부자가 되었습니다. 샤넬 향수는 처음에 천연 재료를 사용하였으나, 후에는 합성에 의해 향을 내는 원료를 사용함으로써 향수를 대중화하는 데 기여한 것입니다. 당시의 샤넬의 인기는 폭발적으로 그녀가 머리를 자르면 너도 나도 미장원으로 달려가 머리를 자르고, 그녀가 자동차를 검은색으로 바꾸면 금세 까만 자동차가 유행되기도 하였습니다.
2차 세계대전후 71세의 나이로 1954년 파리로 돌아와 부티크를 열고, 그곳에서 유명한 장식끈을 단 트위드 투피스가 만들어졌고, 이 투피스의 성공으로 회사는 다시 일어서게 됩니다.
또 미국에서 발표한 칼라를 떼고 둥근 목선에 테두리를 댄 샤넬 투피스는 전세계로 퍼져 나가 지금도 여성 정장의 고전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그녀는 그때부터 약간 엄숙한 복장을 진주 목걸이와 팔찌로 장식하였으며, 그녀의 마스코트인 동백꽃이 그녀가 만드는 모든 상의 안쪽에 브로치로 부착되었습니다. 내게는 친구가 없다.
"내 성공의 비결은 끊임없이 노력하고 맹렬하게 일하는 데 있다."
"돈이 없으면 사람은 아무 가치도 없다." 실제로 그녀는 손이 붓고 굳어질 정도로 필사적으로 일을 했으며, 언제나 만족을 못하고 자신에게 화를 냈다고 합니다. 그것은 남보다 불행한 출생의 열등감에서 오는 것이었고, 미국에 간 아버지는 그녀에게 다시 돌아오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숙모 이야기도 꾸며낸 말이었다고 합니다. 그녀는 어릴적부터 새하얀 옷, 하얀 방, 그리고 흰 커튼에 둘러싸여 사는 독특한 매력을 가진 여자가 되기를 원했고, 자기를 버린 아버지, 아니 아버지 같은 남자들 모두에게 복수하고 싶었을지도 모릅니다. 보이 카펠과 그녀는 둘다 재능있고 야심도 넘치는등 많이 닮았고, 10년 가까이 사랑을 나누었으나 결국 결혼에는 이르지 못했습니다. 1911년 가을, 카펠은 그녀와 결혼하겠다는 말을 하기 위해 칸느로 향하다가, 칸느를 얼마 안 남겨 놓고 낭떠러지로 미끄러져 저 세상으로 떠나고 맙니다. 이 사고 소식을 들은 샤넬은 엄청난 충격 속에서 한동안 빠져나오지 못했고, 더 이상 살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땅을 치면서 통곡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다는 충격 속에서도 일에 열중하면서 차츰 카펠의 사고를 잊게 되었다고 합니다. 모이 카펠이 죽은 이듬해인 1912년 그녀는 러시아의 로마노프 왕조 알베르트 2세의 손자인 드미트리를 만나는데, 그는 그녀가 자서전에서 밝힌, 진심으로 사랑했던 두 사람 중의 한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드미트리는 샤넬보다 11년 연하로, 파리에서 망명 생활을 하고 있는 중이었으며, 그의 가슴에 안기면 재스미니 향내가 났다고 합니다. 드미트리는 '샤넬 No. 5'를 낳게 한 장본인으로, 샤넬 넘버 5는 사향노루의 분비물로 만든 샤넬 최초의 향수였습니다. 그러나 둘의 관계는 오랫동안 지속되지 못하고 헤어지게 됩니다. 드미트리와 헤어진 샤넬은 영국 제일의 부자인 웨스트민스터공과 사귀게 되는데, 그러나 그는 그녀를 자신의 품에 잡아 두려는 다소 권위적인 남자였습니다.
샤넬은 한 남자에 속해 살아가느니 자신의 영역을 펼치며 삶을 꾸려 나가겠다고 과감히 그와의 결별을 선언합니다. 그밖에도 그녀는 세상에 이름이 알려진 남자들과 수없이 많은 교제를 했습니다. 피카소,장콕토, 스트라빈스키 등등... 유명한 시인들, 화가들, 세상의 유명한 남자들과 염문을 뿔리던 그녀가 프랑스에서 처음으로 결혼한다는 소문이 나돌았습니다. 많은 남자들과 연인 관계를 유지했지만 단 한 번도 결혼식을 올리지 않은 여자가 뒤늦게 연하의 남자 일리브와 결혼을 한다는 소식에 많은 사람들은 의아해했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별장에서 애인인 일리브가 테니스를 치다 갑자기 경련을 일으키며 쓰러지더니 그대로 숨을 거두고 말면서 그녀는 또다시 고독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제 2차세계대전이 일어나자 파리의 가게를 닫아 버리고 13년 동안 침묵을 지키고 두문불출하던 그녀에게 또 다른 소식이 들려 왔습니다.
60이 된 샤넬에게 서른 살밖에 안 된 젊은 연인이 생겼다는 것입니다. 그녀가 사랑한 젊고 미남인 이 사람은 독일 정보기관원으로, 그녀는 애인과 함께 사랑의 도피를 하기 위해 스위스로 가려 했으나 뜻대로 되질 않았습니다. 이제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죽기 전까지 일에 매달리는 것밖에 없었습니다.
끝없는 창조와 정열을 바쳐 일을 하는 것. 그것만이 그녀의 아름다운 모습이며 진정 그녀가 사랑하는 모습이었습니다. 그녀는 죽기 전날 밤도 일을 하다가 이튿날(1971년 1월 10일), 오랫동안 살아온 파리의 리츠 호텔에서 숨을 거두는데 그녀의 나이 여든일곱이었습니다. 장례식의 꽃은 온통 그녀가 좋아했던 흰색뿐이었는데, 단 한사람 루키노 비스콘티만이 빨강 장미를 바쳤다고 합니다. 루키노도 그녀를 사랑한 사람 중의 하나였습니다. 그녀가 죽자, 디오르 회사 뉴욕 지점의 디자이너 가스통 베르틀로가 4시즌 동안 샤넬 회사의 콜렉션을 주도했습니다.
그 후에는 발렌시아가 회사에서 베르틀로의 동료였던 라몬 에스파르자가, 그 다음에는 샤넬과 매우 밀접하게 일했던 아틀리에의 두 재봉 담당자가 애스파르자의 뒤를 이었는데, 이들은 샤넬의 스타일을 매우 충실하게 이어나갔다고 합니다. 디자이너로 샤넬은 현대 여성사에 굴직한 족적을 남겼습니다.
일하는 여성을 위한 옷이라는 패션철학으로 여성의 실루엣과 편안함을 고려해 자유롭고 간편한 복장을 창출한 것으로, 여성의 몸을 가두고 혹사하던 복식으로부터 여성을 해방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겠습니다. 샤넬 룩이 한 세기를 성공적으로 대표하게 된 데는 두가지 이유가 있다고 봅니다.
첫 번째는, 이 시대에 사물에 대한 견해를 크게 변화시킨 혁신적인 모더니스트 이론과 샤넬 스타일 사이의 유사성입니다.
'덜함이 더함이다.( Less is More)'라는 이론과 샤넬의 심플한 디자인은 절묘하게 맞아떨어졌다 것입니다. 두 번째는, 그녀의 진보적 태도입니다. 샤넬은 디자이너라는 보잘 것 없던 지위에 정면 도전한 선구자적 인물로, 스스로 모델이 되어 자신의 욕구와 침착한 논리를 믹스한 디자인을 전개하면서 자신만의 독특한 스타일을 인상적으로 부각시키는데 성공했다고 봅니다. |
출처 : 빈 가슴으로 살 걸 그랬습니다!
글쓴이 : 노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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