言/사는이치知

책 - 모형속을 걷다

oldhabit 2010. 10. 12. 21:25

 

경복궁에만 가도 울화가 치민다"
이일훈, 불편함의 미학을 말하다 /<모형속을 걷다> 이일훈 지음, 솔, 2005

 

함석헌 선생의 스승이셨던 다석 유영모 선생의 인간적 됨됨이를 보여주는 일화는 많다. 그 중의 하나. 유영모 선생은 서울에서 인천까지 걸어 다니셨던 모양이다. 우리 중의 누가 그런 모험을 감행할까. 체력도 문제겠지만 시간도 문제겠다. 그러나 유영모 선생은 기꺼이 그런 불편을 감수하셨다. 오히려 그런 불편함 속에서 기계적 매카니즘에 묶이지 않은 대자유의 삶을 사셨는지도 모르겠다.

기술이 삶의 편익을 증진시킨다는 사실은 삼척동자도 다 안다. 차가 있으니 발이 편하고, 식기세척기가 있으니 손이 편하다. 몇 천 자리 계산도 알아서 척척 해주는 컴퓨터가 있으니 머리가 편하다. '삼분카레'니 '삼분짜장'이니 하는 인스턴트 식품들, 캔만 따면 당장 먹을 수 있는 통조림, 세탁은 물론 다림질까지 척척해주고 심지어는 양말까지도 빨아주고 개켜주는 세탁소……. 이제는 돈만 있으면 홀아비들도 궁색함과는 안녕이다.

불편함을 훈장처럼 껴안고 사는 사람들

그러나 불편함을 무슨 훈장처럼 껴안고 사는 사람들도 있다. 산악인들은 말한다. 불편함을 감수해야 했던 고통의 크기가 그가 차지할 수 있는 영광의 크기라고. 그들은 가장 험난한 시즌과 가장 험난한 코스를 택해서 에베레스트에 오른 자에게만 최고의 알피니스트라는 칭호를 준다. 헬리콥터를 탔다고? 첨단의 장비를 빌렸다고? 그대는 실격이다. 실격의 이유는 간단하다, 결과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분투의 과정이 중요한 것!.

사랑의 행위는 또 어떤가. 사랑의 행위는 엎치락뒤치락하는 그 비효율성에 있는 것이 아닐까. 영화 <데몰리션맨>에서 볼 수 있는 사이버섹스를 생각해보시라. 체액과 타액을 교환하지 않는 간편하고 산뜻한 사랑의 행위가 과연 사랑의 본질에 부합하는 것일까. 사랑의 시간은 루즈타임과 연장전을 요구하는 법이다. <데몰리션맨>에서처럼 후다닥 기계적으로 성급하게 해치우는 사랑의 행위는 위생적이고 효율적일지는 몰라도 사랑의 심리학에 얼마나 부합하는지는 다시 생각해볼 일이다.

어쨌든 편리와 효율은 기술개발로 이득을 보는 자들에게는 최고의 미덕일지 몰라도 피와 살이 도는 우리네 선남선녀들에게까지 능사일 수는 없다는 말이다. 바로 이 점을 도드라지게 역설하는 건축가가 있다.

인천시 만석동에 위치한 저소득층 어린이 보금자리 '기찻길 옆 공부방'을 설계한 이일훈이 바로 그다. 저소득층 맞벌이 부부, 결손가정의 아이들을 돌보는 신앙공동체인 '기찻길 옆 공부방'의 이름을 그대로 붙인 이 건물은 1998년말 만석동에 지어졌다. 건축주의 빠듯한 예산 때문에 일반 다세대주택보다도 적은 공사비로 지어진 연건평 45평짜리 이 작은 건물은 건축계의 젊은 비평가들로부터 찬사를 이끌어 낸다.

행복을 강요하는 부드러운 협박, 광고

   
<행복이 가득한 집>류의 잡지를 뒤적이다 보면 은근히 부아가 난다. 그런 유의 잡지들이 말하는 행복은 광고가 말하는 행복의 모습과 닮은 꼴이다. 물질의 소비만이 행복을 보장해준다. 행복을 원한다면 일단 구입해라. 광고는 은근히 우리 무의식을 강제한다. '부드러운 협박'이다. 여기에 손들면 끝장이다. 일단 일벌레가 돼야 하고, 할 말은 꾹꾹 가슴 속에 쟁여놓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 물질이 보장해주는 안락함에 동참하려면 있는 성깔 다 죽이고 고분고분해져야지 다른 도리가 있겠는가. 그런데 이일훈은 좀 불편해지자고 말한다. '빈자의 미학'을 역설하는 건축가 승효상도 반갑지만 '불편의 미학'을 말하는 이일훈 또한 반갑기 그지없다.

승효상은 '빈자의 미학'을 말하지만 그의 건축에선 어쩐지 돈 냄새가 난다. 지나치게 세련되어 보이는 것도 어쩐지 마뜩찮다. '빈자의 미학'. 논리로 보면 버릴 게 없지만 속내를 보면 왠지 찜찜하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이일훈의 건축에서는 승효상적인 세련미는 덜해 보일지 모르지만 우리네 건축의 주류적 마인드를 흠집 내는 어떤 거칠고 속 깊은 배포가 느껴진다. 그 '거침'과 '질박함'이 이일훈의 미학이다. 건축미학하면 흔히 가진 자들의 몫이었지 않았는가. 그러나 이일훈은 '기찻길 옆 공부방'에서 소규모 서민 공공건물에 철학과 미학을 스며들게 한다. <모형 속을 걷다>(솔)의 거의 모든 페이지가 그런 철학과 미학을 말하는 데 바쳐진다.

건축으로 표현되는 졸부의 치졸함

이일훈은 동물의 집짓기를 예로 들면서 우회적으로 인간의 건축을 비판한다. 길지만 그의 육성을 들어보자.

"집에 대해서 부리는 과도한 욕심, 갖고도 더 가지려 하는 욕심, 살지도 않으면서 여러 채를 갖고 싶어 하는 욕심, 여기저기 경치 좋은 곳에 별장 짓고 살고 싶은 욕심, 더 크게 더 높게 더 화려하게 짓고 싶은 욕심, 결국 그런 욕심은 치장과 장식으로 나타난다. 장식도 일종의 기능이긴 하지만 필요 이상의 과도함은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보기 위해서가 아닌 보여주기 위한 것, 보여주기의 속뜻은 우월감을 나타내고픈 속내이다. 종종 그것이 건축으로 표현되면 역겨운 졸부의 치졸함으로 나타난다. 과잉/과도가 낳는 그 우스꽝스러움."

바로 그 우스꽝스러움이 '세계 제일'이니 '동양 최대'니 하는 화려한 수사로 나타나는 것이 아닌가. 바로 그 우스꽝스러움이 대리석으로 발림이 된 '무늬만 르네상스풍'인 국적불명의 건축물들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닌가. 보여주기 위해서 지어진 건축물에 침묵과 겸손이 깃들 여지는 없다. 엄청난 규모로 지어진 교회의 건축물에 신비가 깃들 여지는 없다. 신비가 없는 곳에 침묵이 있을 리 없다. 이 시대의 건축은 이 시대의 종교를 닮아간다. 그리고 이 시대의 종교는 이 시대의 화두인 자본을 열심히 따라간다. 침묵이 사라진 곳에 여지없이 번쩍거림의 광택과 소음이 들어선다.

자비의 수도원

이일훈이 설계했다는 '자비의 침묵' 수도원은 그가 말하는 '불편의 미학'을 눈으로 볼 수 있는 공간으로 구현해준다. 우리는 흔히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통로는 넓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일훈의 생각은 다르다. 어떻게 다른가. '자비의 침묵' 수도원의 통로를 설계한 이일훈의 말이다.

"복도가 넓으면 지나는 걸음걸이가 빠르고 빠름은 사람끼리의 예의를 소홀히 여기게 만든다. 서로 간섭 없이 스쳐갈 수 있는 넓은 복도는 언뜻 여유로울 것 같지만 따지고 보면 인간관계에서는 외면/소외를 조장하는 악덕의 동선이다. 서로 마주치면 한 사람이 비켜서야만 둘 다 지나갈 수 있도록 복도를 아주 좁게 만들자."

좁은 복도에서 서로 마주치면 후배가 양보하면서 비껴 설 것이고 바로 그 비켜서는 데서 예의와 공경이 묻어난다는 것이다. 서로 먼저 가라고 양보하는 사이에 겸손이 배는 것이니, 겸손을 미덕으로 지키는 수도원에서는 좁은 통로가 알맞춤이라는 말이다. 모든 복도를 좁게 하자는 것이 아니다. '불편의 미학'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건축에서의 공간설계는 그 건축물이 상징하는 정신까지를 포괄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의 일상적 삶이 공간의 효율성을 지향하는 것까지야 타박할 수는 없다. 그러나 종교는 일상적 삶을 초월하는 데에 그 속깊은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닌가. 초월의 의미를 간단히 방기해버리는 우리의 건축문화에 대한 그의 일갈은 아프게 음미해볼 만하다.

아무리 노자연하고 공자연해도 자본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구복이 웬수'이고 보니 그런 건축가도 없다. 그는 ""냉혹한 자본주의 현실 속에서 사회적 기능과 미학적 성취를 동시에 이루는 건축가들은 존경받을 만하다.""라고 말한다. 주판알을 퉁기다 보면 이념이 뒷전이 되어야 하는 현실이다. 자재비와 인건비도 제때 지급해주지 못하는 판에 철학이니 미학이니 따지는 것도 한심하다. 이일훈도 여느 건축가처럼 현실을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경박한 도시에 신중한 건축 드물고 기품 있는 공간 속에 비로소 기품 있는 생활이 따른다.""라고 주장하는 그가 돈이 되는 만큼만 대충 지을 사람은 아니다.

   
▲건축가 이일훈씨(사진/한상봉)

집은 작을수록 공간을 나누고, 한 가족일수록 적당히 떨어져 살아야 한다

동선(動線)은 짧아야 한다, 집은 한 덩어리로 지어야 한다, 공용면적은 최소화해야 한다는 규범화된 건축양식을 그는 거부한다. '조금 편하자고 많은 것들을 잃어버릴 수는 없기 때문'이다. '불편하게 살기'의 철학이 그가 말하는 '채나눔'의 논리다. 채나눔'은 이일훈이 일관되게 고집해온 건축형태다. ""집은 작을수록 공간을 나누고, 한 가족일수록 적당히 떨어져 살아야 한다.""라는 게 그의 지론이다.

공간이 좁다고 집을 한 덩어리로 만들면 햇빛이 한쪽에서만 들어와 집 전체가 어두워지지만, 채를 나누면 나눠진 면은 모두 남향이 되어 채광과 통풍, 환기효과를 극대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아파트 같은 거실 중심의 획일적인 실내구조는 친부모라 해도 두 세대가 함께 살기에는 불편함이 따르는데 비해 채 나눔을 한 집에서는 사적인 공간을 침해받지 않고 동선이 길어져 가족 간의 충돌을 줄일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는 주장이다. 바로 그런 주장의 연장선상에 그가 설계했다는 자비의 침묵 수도원, 도피안사 향적당, 천주교 우수영공소 등의 종교용 건축물과 BK메디텍 본사 및 공장, 문학과지성사 사옥, 나루터 공동체, 기찻길 옆 공부방 등이 있다.

한복엔 고무신이 어울린다

일전에 아스카 문화의 중심지라는 나라현으로 일본여행을 다녀온 적이 있다. 그곳에서의 문화적 충격을 나는 어떤 일간지에 다음과 같이 소개한 적이 있다.

"울긋불긋한 도시의 간판들은 한 명의 손님이라도 더 끌기 위해 안달이다. 행인들이 어떤 미적 취향을 가지고 있느냐는 관심 밖이다. 오직 강렬한 빛깔로 행인들의 시각을 사로잡겠다는 의지 하나로 도시의 간판은 번쩍거린다. 관광지라고 해도 사정은 다르지 않다. 일상의 소음으로부터 벗어나 한적한 여유를 누리고 싶다는 소망은 관광지의 입구에서부터 여지없이 깨어진다. 노래방, 음식점, 모텔과 각종 위락시설들이 끊임없이 소음을 생산해낸다.

침묵은 자기 자신과 마주하는 시간이고, 여행은 침묵을 찾으러 가는 시간이다. 소리도 침묵하고 빛도 침묵하는 곳에서 우리는 비로소 '나'를 생각한다. 그러나 번쩍거리는 간판으로 눈은 고역이고, 호객의 외침으로 귀 또한 고역이다.

백 번 양보해서 장삿속이니 어쩔 수 없다고 치자. 더 큰 문제는 시설물들이 주는 시각적 공해다. 시멘트를 나무처럼 보이게 하여 글씨를 판 안내문은 조악하기 이를 데 없고, 사찰 입구의 유럽식 가로등도 우리네 한심한 미의식을 증명해 준다. 새로 건축한 건물들은 주변건물들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튀는 느낌을 준다.

일전에 일본 나라현의 동대사(東大寺)를 다녀온 적이 있다. 커피를 마실까 해서 동대사 입구에 있는 자동판매기를 보니 나무로 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거참, 신기하군 하는 생각이 들어 가까이 가서 보니 자동판매기의 표면을 나무로 덧내어 놓았다. 자동판매기의 생뚱맞은 빛깔이 사찰의 고색창연함과 어울리지 않는다는 미학적 판단에서 비롯된 발상이었다. 배울 건 배워야 하지 않겠는가.

한복에 하이힐을 신을 수는 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한복엔 고무신이 어울린다고 생각하는 것이 우리네 미학적 판단이다. 미학은 학자들의 학술적 연구를 위해서 필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네 쾌적한 감각을 위해서 먼저 필요한 것이 아닐까."

<모형 속을 걷다>에서 만난 이일훈의 이런 구절이 아마도 그가 '우리편'임을 확신하게 했을 것이다.

"시간의 흔적을 거부할수록 빛나는 것은 소위 보석이나 귀금속 종류이다. 그것들은 녹슬면 안 되고 퇴색하면 가짜이지만 건축 배료는 시간이 지나 갈수록 퇴락하고 변형되며 상해가는 것이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그래서 노후된 건축물을 고치고 새로 짓는 것이다. 오히려 시간 따라 변해가는 그 푸석함을 즐기는 것이 건축의 참 맛을 아는 것이다."

그의 시선을 빌어 우리네 건축을 보라. 경복궁에만 가도 울화가 치민다. 이일훈의 책, <모형 속을 걷다>를 읽는 것은 즐거운 일이지만 그의 책을 빌어 우리네 건축물을 보는 일은 울화가 치미는 일이다. 그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건축물은 무너지지도 않고 우뚝 서있다. 시각적 폭력도 이만저만이 아니다. 그것은 자연과 하나가 되려는 선인들의 미학이 아니다. 어떡해서든 자본을 증식시키고야 말겠다는 자본의 확장 논리다. 그 자본의 제국주의적 논리 앞에 '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논리는 현실을 몰라도 한참 모르는 얼빠진 인문주의자의 넋두리에 불과하다는 빈축을 언제까지 사야 하는 것일까. 언제까지 우리의 풍경은 '자본의 풍경'이 되어야 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