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왕이면 무슨 소용?
▲유동근 목사(온누리선교교회). |
왜 이렇게 가난하고 지혜로운 소년을 왕과 비교했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솔로몬은 여기서 가난하고 지혜로운 소년과 늙고 둔하여 간함을 받을 줄 모르는 왕과 비교했다. 이런 대단한 왕보다 가난하지만 지혜로운 소년이 낫다는 것이다. 여기서 왕이 왜 문제가 있는가? 조언자를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 “간함을 받을 줄 모르는 왕”이라고 했다. 둔하다는 말이다. 다른 사람의 조언을 잘 못 듣는 사람이 둔한 것이고 미련한 것이다. 그러나 지혜로운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다른 사람들의 충고와 조언을 지혜롭게 잘 듣고 자기 것으로 만들 줄 아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왕이면 무슨 소용이냐는 것이다. 좋은 조언을 해도 둔해서 듣지 않는 왕이라면, 어리고 가난하더라도 다른 사람들의 말을 잘 들을 줄 아는 지혜로운 사람이 낫다.
14 저는 그 나라에서 나면서 가난한 자로서 옥에서 나와서 왕이 되었음이니라
이 부분은 해석하기 참 어렵다. ‘저는’이라고 한 사람은 누구인가? 이것은 아마도 늙은 왕이 원래 나면서 가난한 자였다는 뜻인 것 같다. 그 사람이 감옥에 있다가 나와서 왕이 된 것이다. 그는 그렇게 어릴 때 고생도 하고 감옥살이도 했지만, 후에 왕이 되어서는 고집이 센 사람이 됐다. 다른 사람의 조언을 듣지 않는 정도까지 됐다.
15 내가 본즉 해 아래서 다니는 인생들이 왕의 버금으로 대신하여 일어난 소년과 함께 있으매 16 저희 치리를 받는 백성들이 무수하였을지라도 후에 오는 자들은 저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니 이것도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
“왕이 버금으로 대신하여 일어난 소년”. 이는 아마도 13절에서 말한 가난하여도 지혜로운 소년인 것 같다. 이 소년이 결국은 나이 들고 둔한 왕 뒤를 이어 왕이 된 것 같다.
“저희 치리를 받는 백성들이 무수하였을지라도 후에 오는 자들은 저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니”. 그런데 그 늙은 왕이 왕위를 내려놓고 소년이 왕이 되었을 때 전의 왕의 치리를 받던 백성이 무수하였지만 이전 왕을 기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무슨 말인가? 예를 들어 우리나라의 제5공화국 시절 대통령이 있었다. 다음 6공화국에서 다른 분이 대통령이 됐다. 5공 정권은 실질적인 권력을 갖고 국민들을 치리했다. 그러나 그들이 지나갔을 때 많은 백성들이 그들을 기뻐하지 않았다. 새로 세워진 정권에 마음이 향하기 때문이다. 경호실 사람들, 군인들, 많은 사람들이 전 대통령의 치리를 받았기 때문에 그가 여전히 대통령일 때처럼 대할 것 같지만, 일단 그만두고 새로운 대통령이 선출됐을 때는 이전 대통령에게 ‘우리가 당신을 언제 보았는가? 당신이 뭐냐?’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현재 내가 대통령이다, 내가 회장이다 하면서 너무 좋아하지 말라는 것이다. 얼마 후 전임 대통령이 되고 전임 회장이 되면 사람들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아는 척도 별로 하지 않는다. 후에 오는 자들은 전임자들을 기뻐하지 않는다. 이것도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과 같다고 말한다.
만약 이런 사실을 모른다면, 자신이 지금 많은 사람을 치리하고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니까 그것에 속아 기뻐하며 모든 힘을 다 들여 열심히 일할 것 아닌가? 하지만 나중에 보니 함께하던 사람들의 태도가 다 바뀐다. 이처럼 모든 것을 직접 다 겪어보지 않아도 그 본질을 알려주는 것이 바로 지혜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전도서 말씀을 통해서 해 아래 수고하는 모든 일들이 얼마나 헛된 것인지를 알려주시고, 그 본질이 얼마나 헛되며 그 가운데 경쟁으로 말미암아 행하는 것이 얼마나 헛된 것인지를 알려주시니 감사합니다. 우리가 참되게 이런 진리를 깨닫고 우리의 온 맘과 온 뜻을 하나님께 행하고 참 진리로 행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보혜사 성령께서 도와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12두 배 지혜로워지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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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도서 5장에서는 신앙생활에서의 주의할 점들, 특히 교회생활과 봉사에 있어서 주의해야 할 점들을 전도자는 가르치고 있다.
“하나님의 전에 들어갈 때에”. 이것은 오늘날 말로 말하면 교회생활, 곧 하나님을 섬기는 생활이다. “네 발을 삼갈지어다”. 그럴 때에 발을 삼가라고 했다. 삼간다는 것은 조심하여 지키는 것이다.
“가까이 하여 말씀을 듣는 것이 우매자의 제사 드리는 것보다 나으니”. 사무엘상 15장 22절의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는 말씀이 떠오른다. 즉 하나님 앞과 하나님의 집인 교회 앞에 나와서 교회생활 안에 참여할 때 첫번째로 성도들이 알아야 할 것은, 깨닫지도 못한 채 무엇을 드리고 이것저것 하면서 뛰어다니는 것보다 말씀을 듣는 것이 낫다는 것이다. “가까이 하여 말씀을 듣는 것이 우매자의 제사 드리는 것보다 나으니”. 나와 함께 신앙생활을 오래 하시는 분들은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은 말씀이다. 무엇을 하려고 하지 말고 ‘먼저 들으라’는 것이다. 이것저것 하지 말고 말씀을 가까이 하고 잘 들어야 한다. 나는 이런 종류의 말씀을 정말 많이 말했다.
물론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단지 듣는 것만이 아니라 순종하는 것을 포함한다. 말씀을 청종하라는 것이다. 출애굽기 3장에서 하나님께 호렙산에서 나타나셔서 모세를 불러 보내시려고 할 때 하신 말씀이 있다. ‘이리로 가까이 하지 말라. 너의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하나님이 계시는 곳은 거룩한 곳이다. 그러므로 여기저기 다니면서 신고 다니는 그 신을 벗으라고 하신 것이다.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는 범사에 조심해야 한다는 뜻이다.
‘세상에서 일하는 방식’이 이 세상의 신발이라 할 수 있다. 회사생활 하는 방식으로 교회생활을 하면 안 된다. 회사에서 일하는 방식으로 교회에서 일하면 안 된다. 아내가 집에서 내무부 장관처럼 할 수 있지만, 그런 식으로 교회에서 행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남편이 집에서 마음대로 하고 자녀들을 호령하는 것처럼 교회에서 그렇게 행할 수 없다. 친구들과 자유롭게 지내듯이 하나님의 집에서 행할 수 없다.
교회는 하나님의 집이고 거룩하신 하나님이 계시는 곳이기 때문에 이곳에서는 ‘나는 그래도 뭔가를 할 수 있다. 내가 이렇게 제사드릴 수 있다. 이렇게 봉사하면 되지 않는가?’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회사에서 경리를 하는 것처럼 교회에서 재정 봉사하면 되는 것이 아니다. 동창회에서 십시일반 돈을 걷어서 비품을 사는 것처럼 교회도 그렇게 비품을 사면 되는 것이 아니다. 세상에서 일하며 다니던 발로 교회에서 무엇인가 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 그것은 우매자의 제사다. 그런 사람들은 자기들이 잘못된 제사를 드리고 있어도 그렇다고 깨닫지도 못하면서 그렇게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전부터 성도들에게 무언가를 자꾸 하려고 하지 말고 일단 말씀을 들으라고 말해왔다. 그러다 보면 나중에 깨닫고 하나님의 법도를 알게 되면 자연히 어떻게 할 줄 알게 된다. 그러지 않고 신발을 벗지 않은 채 마음대로 행하면 많은 오류와 실수를 범하게 될 것이다.
2 너는 하나님 앞에서 함부로 입을 열지 말며 급한 마음으로 말을 내지 말라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너는 땅에 있음이니라 그런즉 마땅히 말을 적게 할 것이라
“너는 하나님 앞에서 함부로 입을 열지 말며 급한 마음으로 말을 내지 말라”. 하나님을 섬기는 교회 안에 들어와서 말을 너무 빨리, 많이 하지 말라는 것이다. 빨리 말하면 다 잘못 말하는 것이다. 많이 말하면 실수가 많다. 많이 듣지 않고 말씀을 많이 배우지 않고 말을 많이 하게 되면 그 말은 필경 다 실수다. 여기에도 교회온 지 얼마 안 된 분들이 있다. 그런 분들일수록 뭔가를 말하면 ‘이 교회는 어떻다, 이 교회의 사역자는 어떻다, 봉사가 어떻다, 교회 분위기가 어떻다, 설교가 어떻다’고 하는데, 그 모든 말들은 거의 다 실수다.
그들은 어떻게 그렇게 담대하게 말할 수 있는가? 지금까지 그들은 나름대로 여기저기 많은 교회에 다녀봤다. 거기서 얻은 경험이 있고, 생겨난 관념이 있다. 아무래도 사람은 자기 경험의 눈과 귀로 듣고 보게 된다. 따라서 정확한 판단을 하기 어렵다. 그러하기에 사람이 뭔가 말을 하려면 어디서든지 좀 오래 있어봐야 한다. 최소한 4-5년은 있어야 한다. 그런 연후에 어떻다고 한 마디 할 수 있다. 그러나 아마도 그때쯤 되면 별로 할 말이 없게 된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입에서 급히 말을 내지 않는 것이다. 그것이 입술의 죄와 실수를 줄이는 비결이다.
“너는 하나님 앞에서 함부로 입을 열지 말며”. 1절은 발을 조심하라고 했다. 함부로 일하는 것도 조심하라고 했다. 하나님의 전에 들어갈 때는 함부로 발을 딛는 것도 조심하라고 했다. 그리고 2절에서는 하나님의 전에서 함부로 입을 여는 것도 조심하라고 했다.
“급한 마음으로 말을 내지 말라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너는 땅에 있음이니라”. 그 말하는 것이 하늘에서 바라본 하나님의 눈으로 바라보고 하나님의 마음으로 깨닫고 생각하고 말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사람의 생각이라는 말이다. 적어도 뭔가 말하려면 하늘에 올라가서 하나님의 마음을 체크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의 눈으로 한 번 쳐다본 후에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실수가 적을 것이다. 그러나 땅에서 땅의 안목과 생각으로 말하면 다 틀린다. “그런즉 마땅히 말을 적게 할 것이라”. 그러다 보면 할 말이 별로 없게 된다. 그래서 말을 적게 하라는 것이다.
3 일이 많으면 꿈이 생기고 말이 많으면 우매자의 소리가 나타나느니라
“일이 많으면 꿈이 생기고”. 꿈은 별 것 아니라고 한다. 꿈은 그저 낮에 있었던 여러 일들이 잔상으로 남아 떠오르는 것 뿐이다. 그러므로 일이 많으면 꿈만 많아지게 된다.
“말이 많으면 우매자의 소리가 나타나느니라”. 말을 많이 하는 사람은 결국 우매자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자기가 똑똑한 것을 증명하기 위해 말을 많이 한다고 생각하는데, 말을 많이 하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이다.
18세기 영국의 시인 알렉산더 포프는 “사람의 말은 나뭇잎과 같아서 잎이 가장 무성한 곳에서 의미라는 열매를 많이 보게 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했다. 잎사귀가 많으면 거기에는 열매가 없다는 것이다. 말이 많으면 거기에는 의미라는 것이 없다는 뜻이다. 의미있고 가치있는 말을 하는 사람은 말을 적게 하는 사람이다. 당신이 평소에 하는 말의 양을 반만 줄인다고 가정해 보라! 당신은 배나 지혜로운 사람이 될 수 있다.
*13말 많은 자들에게
4 네가 하나님께 서원하였거든 갚기를 더디게 말라 하나님은 우매자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서원한 것을 갚으라 5 서원하고 갚지 아니하는 것보다 서원하지 아니하는 것이 나으니
“네가 하나님께 서원하였거든 갚기를 더디게 말라”. 서원이란 ‘내가 무엇을 하겠다’고 하나님께 약속한 것을 말한다. 가령 결혼하지 않은 청년들이 ‘결혼하지 않고 내 일생을 주님께 드리겠다’는 것도 서원이다. 그러다 시간이 좀 지나면 ‘아, 내가 잘못 서원했다, 결혼해야겠다’고 번복한다는 것이다. 대부분 급히 말하고, 말을 많이 하는 사람에게서 서원의 실수도 있다. 말을 천천히, 아껴서 하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도 서원을 쉽게 내지 않는다. 하지만 급하게 말하는 사람일수록 하나님 앞에서 서원도 빨리 한다.
“서원하고 갚지 아니하는 것보다 서원하지 아니하는 것이 나으니”. 이것은 말할 필요가 없다. 서원하고 갚지 않는 것보다는 차라리 서원하지 않는 것이 낫다.
6 네 입으로 네 육체를 범죄케 말라 사자 앞에서 내가 서원한 것이 실수라고 말하지 말라 어찌 하나님으로 네 말소리를 진노하사 네 손으로 한 것을 멸하시게 하랴
“네 입으로 네 육체를 범죄케 하지 말라” 결국 서원을 잘못하고 지키지 않는 것은 자기 육체에 죄를 짓는 것이다.
“사자 앞에서 내가 서원한 것이 실수라고 말하지 말라”. 여기서 ‘사자’(使者)라면 하나님의 종이나 제사장이 될 것이다. 그들 앞에서 서원을 해놓고 ‘제가 그때 서원한 것은 실수였습니다. 미안합니다’라고 하지 말라는 얘기다. 어떤 사람은 헌금을 많이 드리겠다고 해놓고 집에서 생각해보니 돈이 아까워진다. 또 어떤 사람은 ‘제가 어디로든 가겠습니다. 하나님이 보내시면 아프리카라도 가겠습니다’라고 서원한다. 우리는 단순하고 순진하기에 정말 그런가 싶어서 그에게 아프리카로 떠나라고 했더니 그때부터 고민을 하기 시작한다. 그러더니 어느 날 심각한 얼굴로 나에게 교제하러 왔다. 그때 말했던 것은 아차 실수였다고. 하나님은 성도들이 이렇게 해서는 안 된다고 하신다.
“어찌 하나님으로 네 말소리를 진노하사 네 손으로 한 것을 멸하시게 하랴”. 약속한 것을 쉽게 깨는 사람이 있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에게 진노하신다고 한다. 그 말소리에 진노하시고 그 손으로 한 것을 멸하신다고 하신다. 그런 사람에게는 당신의 일에 대해 파멸시킨다. 신약에도 서원에 대한 말씀이 있다. 주님도 말씀하셨다. 맹세에 대한 말씀이 마태복음 5장에 있다. 하늘로도 맹세하지 말고 땅으로도 맹세하지 말라고 했다. 맹세하고 지키지 않는 것은 좋지 않다. 그것에 대해 하나님은 진노하시고 그 손으로 하신 것을 파멸하신다고 했다. 그러므로 그렇게 하는 것은 정말로 지혜롭지 않은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을 심히 노하게 하는 것임을 반드시 알기 바란다. 이것이 일종의 하나님의 법도이기 때문이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말씀을 아는 것과 모르는 것과의 차이를 알아야 한다. 무엇이든 다 은혜라 생각하고 하나님은 무엇이든 다 용서하신다고 생각하며 아무렇게나 행해도 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는 법도가 있다. 하나님은 축복하실 자를 축복하신다. 저주할 자를 저주하신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하나님의 눈에 들게, 마음에 맞게 행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배워야 한다. 이 구절도 역시 하나님의 법도이다. 급하게 말하지 말아야 한다. 급하게 서원하지도 말아야 한다. 그리고 서원한 것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
7 꿈이 많으면 헛된 것이 많고 말이 많아도 그러하니 오직 너는 하나님을 경외할지니라
“꿈이 많으면 헛된 것이 많고”. 경외한다는 것은 두려워한다는 것이다. 어떤 사역자들은 ‘꿈을 꾸십시오. 꾸는 대로 이루어집니다’라고 한다. 하지만 여기서 솔로몬은 그 반대로 이야기한다. 꿈을 많이 꾸는 사람은 허풍이 많다. 사역자들 가운데도 ‘됩니다. 이것도 되고 저것도 됩니다’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말을 들을 때는 참 좋지만 나중에 보면 되는 것이 별로 없다. 그것이 바로 헛된 것이다. 꿈이 많으면 헛된 것이 많게 된다.
사람에게는 허풍을 좋아하는 속성이 있다. 성실하게 일하기 싫어하는 반면 결과는 빨리 잘 되기를 바란다. 그러므로 허풍기가 있는 사람들은 공허한 말이라도 잘된다고 하는 말을 듣기 좋아한다.
“말이 많아도 그러하니”. 말이 많아도 헛된 것이 많다는 뜻이다. 하나님 말씀의 사역자는 성경 말씀을 가르쳐야 한다. 왜 사람들에게 뜬구름 잡는 소리를 해서 헛된 것을 바라보게 하는 것인가? 그렇게 하면 안 된다. 마틴 루터가 한 말이 있다. “참된 신앙이란 그리스도께 무엇을 이뤄달라고 요청하는 것이 아니고 그분의 처분대로 순종하는 것이다”. 무엇을 이뤄달라고 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처분대로 순종하는 것이 진짜 좋은 믿음이라는 뜻이다. 사람들에게 ‘된다 된다’ 말하지만 결국 되지 않으면 엄청 실망하고 시험든다. 된다더니 왜 안 되는가? 낫는다더니 왜 안 낫는가? 부자가 된다더니 왜 안 되는가? 라고 묻는다. 범사에 하나님의 뜻과 처분이 중요하다. 그러므로 말을 많이 하지 말고 꿈을 많이 꾸지 말아야 한다. 그것은 다 헛된 것이다.
“오직 너는 하나님을 경외할지니라”. 꿈만 꾸지 말고, 그렇게 말만 하지 말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라고 한다. 하나님의 처분을 그저 순종하라는 것이다.
8 너는 어느 도에서든지 빈민을 학대하는 것과 공의를 박멸하는 것을 볼지라도 그것을 이상히 여기지 말라 높은 자보다 더 높은 자가 감찰하고 그들보다 더 높은 자들이 있음이니라
“빈민을 학대하는 것과 공의를 박멸하는 것을 볼지라도 그것을 이상히 여기지 말라”. 세상은 다 이렇다는 것이다. 권력을 잡은 사람이 인민을 학대하고 공의를 멸한다. 그것을 이상히 여기지 말라는 것이다. 다 그렇기 때문이다. 오늘도 북한에서는 인민을 학대하고 공의를 박멸한다. “그들보다 더 높은 자들이 있음이니라”. 그러나 김정일보다 더 높은 분이 계신다.
9 땅의 이익은 뭇 사람을 위하여 있나니 왕도 밭의 소산을 받느니라
“땅의 이익은 뭇 사람을 위하여 있나니”. 땅은 모든 사람에게 유익을 준다는 뜻이다. “왕도 밭의 소산을 받느니라”. 그러한 높은 자리에 있는 왕도 밭의 소산을 받는다.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덕을 보고 산다. 그들보다 더 높은 곳에 권력자가 계시면 백성들이나 왕이나 다 동일하게 밭의 소산을 먹고 사는 것이 아닌가? 그러므로 우리는 북한에 대해 너무 염려할 것 없다. 하나님이 다 보고 계시기 때문이다. 다만 우리는 기도할 필요가 있다. 북한의 불쌍한 인민들, 굶어죽은 불쌍한 영혼들, 구원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복음도 제대로 영접하지 못하고 죽어가는 수많은 영혼들을 위해 우리는 기도해야 한다. 더 높으신 분에게 기도해야 한다.
*14인간의 진정한 행복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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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은 돈을 상징한다. 그러므로 돈을 사랑하는 자라고 해도 된다. 돈으로는 만족함이 없다. 나는 돈을 많이 번 사람들과 대화를 해 봤다. 어떤 사람은 10억을 목표로 돈을 번다고 했다. 그런데 10억을 벌어본 사람이 말하기를 10억을 벌고 나면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아 더 벌고 싶다는 것이다. 20억을 벌고 나면 30억을 벌고 싶다. 욕심이 차지 않는다. 만족함이 없다. 많이 벌어 놓으면 그 때부터 공허함이 밀려온다. 많이 얻어 놨는데 속이 그렇게 허무하고 공허하게 느껴질 수가 없다.
11 재산이 더하면 먹는 자도 더하나니 그 소유주가 눈으로 보는 외에 무엇이 유익하랴
재산이 많아지면 먹는 사람도 많아진다는 것이다. 부자가 되고 사업을 크게 하면 결국 그 사람 휘하에 고용인들이 많기 때문에 먹는 사람만 많아진다는 말이다. 그것이 무엇이 유익하냐는 것이다. 재산이 없으면 자기만 먹는데 재산이 많으니까 많은 사람이 먹는다. 자기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이 먹는데 뭐가 유익한가? 돈이 많다고 위장이 두 개, 세 개로 늘어나는 것도 아니고, 몸이 여러 개라서 이 집에서 자면서 동시에 저 집에서 살 수도 없다.
12 노동자는 먹는 것이 많든지 적든지 잠을 달게 자거니와 부자는 배부름으로 자지 못하느니라
성경에서는 손으로 일을 하는 것을 가장 신성한 직업으로 생각한다. 창세기에서 하나님이 타락한 인간에게 정하신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사우나에서 흘리는 땀과는 다르다. 일을 하면서 흘리는 땀은 신성하다. 노동자는 먹는 것이 많든 적든 잠을 달게 잔다고 했다. 그러나 부자는 먹기는 잘 먹고 움직이지 않기 때문에 배불러서 자지 못한다. 소화도 안 된다. 3500년 전에도 지금과 똑 같은 상황이 벌어졌다.
직업 중에서는 손으로 일하고 노동을 하는 것이 제일 좋다. 그렇게 손으로 일을 하지 않으니 사람들은 머리를 써서 힘을 크게 들이지 않고 남의 돈을 자신의 호주머니로 이동시키려 한다. 그렇게 부자가 되긴 했는데 잠이 오지 않는다. 하나님의 정하신 원칙을 어겨서 좋을 게 없다.
13 내가 해 아래서 큰 폐단되는 것을 보았나니 곧 소유주가 재물을 자기에게 해 되도록 지키는 것이라
이제 재물을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이 그것을 지키려다 보니 자기에게 해가 된다. 병이 든다. 앞서도 이야기했듯 캐나다에서 호텔 사업을 하며 돈을 엄청나게 많이 번 사람이 내 앞에서 걱정을 했다. 돈을 많이 벌었지만 이것을 어떻게 지켜야할지 너무 걱정된다는 것이었다. 그러더니 얼마 후에 간암이 걸리고 죽게 됐다. 재물을 많이 갖고서 그것을 지키려니 해가 됐다.
“내가 해 아래서 큰 폐단되는 것을 보았나니 곧 소유주가 재물을 자기에게 해 되도록 지키는 것이라”. 그러므로 이 땅에 사는 동안에는 가난한 사람이 복이 있다. 손으로 일하는 사람이 복이다.
전도서를 보게 되면 모든 인생에 대한 가치관이 정확해진다. 지금까지 우리가 알고 있던 가치관과 인생관이 하나님의 눈으로 볼 때 다 바뀌게 된다.
14 그 재물이 재난을 인하여 패하나니 비록 아들은 낳았으나 그 손에 아무 것도 없느니라 15 저가 모태에서 벌거벗고 나왔은즉 그 나온 대로 돌아가고 수고하여 얻은 것을 아무것도 손에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바울도 디모데서에서 적신으로 왔기에 적신으로 돌아간다고 말했다. 아무리 수고해서 얻은 것이라 해도 갈 때는 아무것도 가져가지 못한다. 알렉산더 대왕은 자신이 죽게 되면 관 양옆에 구멍을 뚫어 놓으라고 했다. 자신의 시체를 관에 넣을 때 그 구멍으로 양손을 내놓아서 사람들로 하여금 빈손으로 간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했던 것이다.
16 이것도 폐단이라 어떻게 왔든지 그대로 가리니 바람을 잡으려는 수고가 저에게 무엇이 유익하랴
이처럼 온 대로 가는데 아무리 수고한들 무슨 소용이냐는 것이다.
17 일평생을 어두운 데서 먹으며 번뇌와 병과 분노가 저에게 있느니라
재물을 갖고 있는 사람들, 재물 때문에 지키려 애를 쓰고 고민하는 사람들은 어두운 데서 먹고 번뇌와 병과 분노가 있게 마련이다. 그러나 가난한 사람은 어두운 데 다닐 필요가 없다. 그들에게는 번뇌가 있을 리 없다. 병과 분노도 없다.
18 사람이 하나님의 주신 바 그 일평생에 먹고 마시며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 중에서 낙을 누리는 것이 선하고 아름다움을 내가 보았나니 이것이 그의 분복이로다
그러므로 그렇게 욕심껏 벌고 수고하지 말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대로 일평생 먹고 마시고 낙을 누리는 것이 선하고 아름다우며 분복이라고 했다. ‘분복’이란 ‘보상’이라는 뜻이다.
전도서의 사상을 다시 한 번 말한다면, 우리 인간이 누릴 수 있는 낙은 작은 것에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 주신 대로 먹고 마시는 가운데서의 즐거움, 그리고 하나님이 허락하신 그 일을 수고하는 것에서 누리는 즐거움, 그렇게 낙을 누리면서 사는 것이 최고다. 이는 세상 사람들의 생각과는 다르다. 세상 사람들은 돈이 많고 재물이 많아야 행복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모든 것을 다 누려본 솔로몬은 아니라고 말한다. 돈 많은 사람을 보니 그것을 지키느라 병들고 괴로워하고 번뇌가 많고 어둠 속에서 헤매고 다닌다는 것이다. 결코 좋지 않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주신 적은 음식을 먹고 마시고 수고하며 사는 삶이 여러분 인생의 가장 큰 낙이다. 부자들은 너무 잘 먹고 움직이지 않으니 소화도 되지 않고 잠도 오지 않고 병든다. 그것은 낙이 아니다. 솔로몬의 말은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주신 일을 하며 열심히 수고하고 주신 음식을 먹고 마실 때 그것이 여러분의 인생에서 가장 큰 즐거움이라는 것이다. 다른 데서 즐거움과 쾌락을 찾으려는 사람은 다 잘못된 것이라는 말이다.
19 어떤 사람에게든지 하나님이 재물과 부요를 주사 능히 누리게 하시며 분복을 받아 수고함으로 즐거워하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선물이라
하나님은 어떤 사람에게든지 재물과 부요를 주신다고 했다. 하나님은 주시는 분이시다. 이는 디모데전서에도 있다. ‘네가 이 세대에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딤전 6:17)’. 하나님은 우리에게 후히 주시고 누리게 하신다고 했다. ‘우리가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딤전 6:7-8)’. 이런 말씀들이 다 전도서에 있는 솔로몬의 사상과 일치한다.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필요한 것을 주신다.
예수님은 솔로몬의 입은 옷과 들의 백합화를 비교해서 말씀하셨다. 들의 풀을 누가 자라게 하시는가? 주님이 자라게 하신다. 공중 나는 새도 주님이 먹이신다. 주님이 공급하신다. 여러분이 정상적인 신자라면 주님께서 공급하신다. 나는 때로 어떤 성도를 볼 때 ‘저 분은 도대체 어떻게 사는가’ 하고 걱정이 되기도 한다. 그런데도 굶었다는 소리를 들은 적이 없다. 하나님이 다 먹이신다.
19절을 다시 읽어보자. “어떤 사람에게든지 하나님이 재물과 부요를 주사 능히 누리게 하시며 분복을 받아 수고함으로 즐거워하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선물이라”. 수고하는 것도 분복이라는 것이다. 일을 하게 하심으로 즐거워하게 하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주시는 일을 하는 것은 사람에게 있어 즐거움이다. 여러분이 매일 먹고 마시고 일하는 것은 다 하나님의 선물이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일할 때 ‘나는 왜 이런 일을 하는가’ 하지 말라. 그것이 다 선물이기에 ‘하나님, 일할 수 있게 하시니 감사합니다’라고 해야 한다.
20 저는 그 생명의 날을 깊이 관념치 아니하리니 이는 하나님이 저의 마음의 기뻐하는 것으로 응하심이라
“저는 그 생명의 날을 깊이 관념치 아니하리니”. 여기서 ‘저는’은 누구인가? 18, 19절처럼 사는 사람이다. 이런 일이나 먹고 마심이나 누리는 모든 것을 하나님이 주시는 대로 하는 사람을 말한다. 이런 사람은 생명의 날을 깊이 관념치 않는다. ‘내가 도대체 몇 살까지 살 것인가? 나는 오래 살아야 할텐데’라는 걱정과 염려의 생각을 하지 않는다. 하루하루 감사하며 살고 하루하루 삶이 즐겁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하나님이 주셨다고 믿으며 앞날을 걱정하지 않고 날마다 기쁘게 하루하루를 살아갈 수 있다.
그러나 진시황과 같이 호의호식하며 재물과 부귀가 가득한 사람들은 생명의 날을 깊이 관념하여 불로초와 불사약을 찾아다니다 일찍 죽었다. 오늘도 가난하고 낮은 자들이 아니라 부귀를 누리며 호화롭게 사는 이들이 왜 자살하는가? 그들은 오히려 생명의 날을 너무 깊이 관념하기 때문에 그렇게 된다.
*15죽으면 그만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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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해 아래서 한 가지 폐단 있는 것을 보았나니”. 여기서 ‘폐단’은 영어로는 ‘악(evil)’이며, ‘모순’이라 해도 된다. 무엇이 한 가지 악이요 폐단인가? “이는 사람에게 중한 것이라”. 일단 내용을 이야기하기 전에 사람에게 중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중한 것’이란 히브리어로는 ‘공통적이다, 넓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해 아래 인간 세상사에는 한 가지 모순, 폐단이 있는데 그것이 공통적이고 많다는 뜻이 된다.
2 어떤 사람은 그 심령의 모든 소원에 부족함이 없어 재물과 부요와 존귀를 하나님께 받았으나 능히 누리게 하심을 얻지 못하였으므로 다른 사람이 누리나니 이것도 헛되어 악한 병이로다
“어떤 사람은 그 심령의 모든 소원에 부족함이 없어 재물과 부요와 존귀를 하나님께 받았으나”. 솔로몬은 재물이나 부요나 존귀는 하나님이 주신다고 봤던 것이다. “능히 누리게 하심을 얻지 못하였으므로”. 왜 누리지 못했는가? 죽었기에 그렇다. 솔로몬이 봤더니 그런 사람이 있었다. 애를 써 해 아래서 수고하고 힘을 들여 재물을 얻고 부요와 존귀를 얻었는데, 좀 살만하니까 죽은 것이다. 세상에는 그런 경우가 있다. 돈도 벌만큼 애써 벌었고, 열심히 공부해 학위도 따고, 이제 뭔가 살아볼만한 상황이 도달했는데, 그때 죽어버린 것이다. 그 모든 것을 누리지 못하는 것을 보면서 솔로몬은 모순이라고 생각했다.
“다른 사람이 누리나니”. 힘을 써서 벌어놓은 재물을 결국은 아무 수고도 하지 않은 어떤 다른 사람이 차지해서 누리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솔로몬은 이것을 폐단이라 말한 것이다. “이것도 헛되어 악한 병이로다”. 병은 영어로 ‘affliction’이라고 했으니 이는 ‘고통’이라는 뜻이다.
3 사람이 비록 일백 자녀를 낳고 또 장수하여 사는 날이 많을지라도 그 심령에 낙이 족하지 못하고 또 그 몸이 매장되지 못하면 나는 이르기를 낙태된 자가 저보다 낫다 하노니
인간의 축복은 자녀가 많은 것이다. 자녀가 많은 사람을 복되다고 한다. 사사 시대에는 70명을 낳은 사람이 있다. 아들 딸 합치면 100명도 될 것이다. 그렇게 자녀를 많이 낳은 사람을 복이 있다고 한다.
“사람이 비록 일백 자녀를 낳고 또 장수하여 사는 날이 많을지라도 그 심령에 낙이 족하지 못하고 또 그 몸이 매장되지 못하면”. 자녀를 많이 낳고 또 장수하고 사는 날이 많을 지라도 그 심령에 낙이 족하지 못할 수 있다. 오래 살긴 사는데 재미없이 사는 수가 있다는 것이다. 고민스러운 일만 잔뜩 생긴다. 그런 상황에서 자식이 많고 장수하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것이다. 죽을 때 매장되지 못하는 수도 있다고 한다. 자식이 많으면 죽을 때 장례를 잘 치러야 할 텐데, 심지어 매장도 시켜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게 죽는 경우도 있다는 것이다. 솔로몬은 이것을 폐단이며 모순이라고 봤다.
4 낙태된 자는 헛되이 왔다가 어두운 중에 가매 그 이름이 어두움에 덮이니 5 햇빛을 보지 못하고 알지 못하나 이가 저보다 평안함이라
어려울 것 없는 구절이다. 낙태된 자는 왔다가 숨만 조금 쉬고 간 것이다. 어두운 중에 갔다는 것이다. 이런 사람은 햇빛을 보지 못하고 갔다. 그렇게 죽은 아이가 차라리 평안하다고 솔로몬은 말한다. 길게 살면서 재미도 없고 고민과 고통 가운데 괴롭게 인생을 살다 갈 바에는 차라리 낙태된 자가 더 낫다고 솔로몬은 말하고 있다.
6 저가 비록 천년의 갑절을 산다 할지라도 낙을 누리지 못하면 마침내 다 한 곳으로 돌아가는 것뿐이 아니냐
“저가 비록 천 년의 갑절을 산다 할지라도”. 천 년의 갑절, 즉 2천년을 장수한들 낙을 누리지 못하면 무슨 소용이냐고 말한다. 사람이 창조될 때는 천 년 이상 살 수 있는 존재로 지어졌다고 봐야 한다. 따라서 창세기 족장 시대에는 9백 살 이상 산 사람들이 많다.
“마침내 다 한 곳으로 돌아가는 것 뿐이 아니냐”. 낙태된 아이나 1천년, 2천년 오래 살다 간 사람이나 다 그렇게 간다. 그러니 자녀를 1백명 낳고 장수를 누린 사람이 다 한 곳으로 돌아가는데 무슨 이득이 있느냐는 것이다.
7 사람의 수고는 다 그 입을 위함이나 그 식욕은 차지 아니하느니라
사람이 왜 이렇게 수고하는가? 간단하게 답을 내렸다. 먹고 살려고 수고한다는 것이다.
“사람의 수고는 다 그 입을 위함이나 그 식욕은 차지 아니하느니라”. 아무리 수고해서 먹어도 먹고 나면 또 배고프다. 식욕은 차지 않는다. 지금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가? 그렇게 수고를 하고 애를 써도 결국은 입을 위한 것인데 그 입은 아무리 먹어도 차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차피 그 입을 만족시키지 못할 바에야 입으로 들어가기 위한 그 수고를 뭐하러 그렇게 열심이 하느냐는 말이다
*16하나님 없이 살아보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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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로운 사람이 어리석은 사람보다 나은 것이 무엇인가? “인생 앞에서 행할 줄 아는 가난한 자”. 가난하면서도 뭔가 할 줄 아는 사람들이 있다는 말이다. 가난하면서도 어떻게 해야 할 줄은 다 아는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이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돈이 한 푼도 없을 수 있다. 말도 할 줄 알고 처신도 할 줄 아는데 돈이 없는 사람이 있고, 우매하고 미련하지만 돈이 많을 수도 있다. 그러므로 그런 지혜자가 우매자보다 나은 것이 무엇이냐고 말한다.
9 눈으로 보는 것이 심령의 공상보다 나으나 이것도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
“눈으로 보는 것이 심령의 공상보다 나으나”. 심령의 공상은 다른 말로 하면 ‘욕망의 배회’, 혹은 ‘혼적인 욕망’이라는 뜻이다. 이것은 무슨 의미인가?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눈으로 보이는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뭔가를 더 얻기 원하는 욕망으로 배회한다는 말이다. 자기가 갖고 있고 누릴 수 있는 것, 그 보이는 것만 가지고 만족하면 좋은데 그것은 보이지 않고 자기가 갖지 못한 것을 갖고 싶어서 욕심을 내다 보니 생각이 배회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여러분에게 하나님이 단독주택 전세 한 칸을 할당하셨으면 거기서 살면 되는데, 그의 생각은 계속 아파트 몇 평짜리를 배회한다면, 그것이 욕망의 배회다. 사람이 자기에게 주신 것만 보면 되는데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는다는 얘기다.
그러면 어떤 편이 더 나은가? 눈으로 보는 것에 만족하는 사람이 심령에 공상하는 사람보다 낫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그것이나 저것이나 다 헛되다고 말한다. “이것도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
10 이미 있는 무엇이든지 오래 전부터 그 이름이 칭한 바 되었으며 사람이 무엇인지도 이미 안 바 되었나니 자기보다 강한 자와 능히 다툴 수 없느니라
“이미 있는 무엇이든지 오래 전부터 그 이름이 칭한 바 되었으며”. 이 시대 사람들이 뭔가 노력해서 성취하고 이름을 얻고 해냈을 때 굉장히 자랑스러워하고 신기해 하지만, 오래 전부터 그런 이름은 이미 있어왔다. 반복일 뿐이라는 뜻이다.
“사람이 무엇인지도 이미 안 바 되었나니”. 여기서 사람은 히브리어로 ‘아담’, 붉은 흙덩어리다. 사람이 아무리 무엇인가 성취하고 이르렀다 해도 하나님은 그것을 이미 다 아신다.
“자기보다 강한 자와 능히 다툴 수 없느니라”. 사람은 자기의 어떠함으로 만족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자기보다 더 나은 어떤 것이 되기 위해 계속 공상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여러분이 어떤 사람인지 이미 아신다. 사람이 자신의 주어진 지위에 머무르면 좋은데 그것에 불만을 품고 자꾸 뭔가를 공상한다면, 자기보다 ‘강한 자’, 즉 하나님과 다투는 사람이다. 인간의 무익함, 무용함, 우리 자신의 어떠함 등 모든 것은 이미 다 정해진 것이고, 거기서 특별한 것이 없다. 별다른 것이 없다. 사람은 그 상황에서 그냥 만족해야 한다. 그에 대해 불만을 품는 것 자체가 결국 하나님과 다투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강한 자와 다퉈 무엇을 어떻게 하겠는가. 우리 인생은 하나님이 정해주신 삶을 살아야 한다는 말이다.
11 헛된 것을 더하게 하는 많은 일이 있나니 사람에게 무엇이 유익하랴
사람이 도모하는 일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하지만 그런 모든 일은 다 헛된 것을 더하게 할 뿐이다. 재산을 모으거나 쾌락을 추구하거나 명예를 추구하는 것들은 모두 헛된 것을 더하게 하는 많은 일들일 뿐이다. 여러분도 나름대로 추구하는 바가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추구가 다 헛되다고 말한다. 헛된 것만 더 늘어날 뿐, 그것이 사람에게 무엇이 유익하냐는 것이다.
12 헛된 생명의 모든 날을 그림자 같이 보내는 일평생에 사람에게 무엇이 낙인지 누가 알며 그 신후에 해 아래서 무슨 일이 있을 것을 누가 능히 그에게 고하리요
“헛된 생명의 모든 날을 그림자 같이 보내는 일평생에 사람에게 무엇이 낙인지 누가 알며 그 신후에 해 아래서 무슨 일이 있을 것을 누가 능히 그에게 고하리요”. 우리 인생은 그림자같이 그저 우리의 생명을 보내는 것이다. 여기서 ‘신후’란 ‘사후’를 말한다.
지금 이런 말을 왜 하고 있는가? 사람은 무엇이든 헛된 것을 추구하며 일평생을 보낸다는 말이다. 헛된 생명의 모든 날을 그림자같이 보내며 무엇이 낙인지 알지 못한다. 또 사후에는 무슨 일이 생길지 아무것도 모른다. 이것은 결국 무엇인가? 허무한 세상에서 무엇이 자신에게 가장 좋은 것인지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으며, 또한 자기가 죽은 뒤 이 땅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아는 사람도 아무도 없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전도서의 주제란 ‘인생 자체란 헛된 것’이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면 다 헛되다. 인생에게 있어 삶이라는 자체가 다 헛된 것임을 확신시켜 주는 것이 전도서의 주제다. 따라서 아가서로 넘어가면서 ‘하나님만이, 주 예수만이 여러분에게 만족을 준다’는 사실을 이끌어주고자 하는 것이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오늘도 우리에게 전도서를 통해서 지혜의 말씀을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우리가 인생 가운데 다른 것을 위해서 달음질하지 않고 영원히 참되시고 실제이신 예수 그리스도, 우리 하나님 한 분만 찾고 주님만을 우리의 유일한 낙으로 삼고 주님과 함께 생활할 수 있도록 축복해주시기 바랍니다. 감사와 찬미를 드리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17아름다운 이름 남기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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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이름이 보배로운 기름보다 낫고”. 보배로운 기름이란 무엇일까? 값비싼 향유 같은 것이라 하겠다. 매우 귀하고 좋은 재산도 포함될 것이다. 그런 것보다 ‘이름’이 낫다는 말이다. ‘바울’ 같은 이름이라면 좋지 않은가? 사람에게 아무리 많은 재물이 있다 한들 그런 좋은 이름 하나를 갖는 것보다 귀하겠는가? 한국 속담에도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말이 있다. 나는 지금도 여러분이 사실 그 이름을 남기는 일을 하고 있다고 믿는다. 우리는 ‘아무개’ 하면 ‘아, 그 사람은 이런 사람’이라고 한다. 바울 같은 사람에게는 사람들이 욕된 이름도 붙였지만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은 사도 바울에게 아름다운 이름을 붙였다.
“죽는 날이 출생하는 날보다 나으며”. 이는 무슨 의미인가? 출생하는 날이 나쁘다는 말이 아니라 죽는 날이 그보다 낫다는 것이다. 출생하는 날은 나쁘고 죽는 날은 좋다는 뜻이 아니다. 죽는 날이 낫다는 것은 인생을 잘 살았을 때 이야기다. 좋은 이름, 아름다운 이름을 얻도록 살았을 때 이야기다. 예를 들어 D. L. 무디나 스펄전, 조지 뮬러, 마틴 루터, 요한 웨슬레 등은 태어날 때 수많은 아기들 중의 하나였을 뿐이다. 그들이 어떤 사람이 될지 몰랐다. 그러므로 그들이 태어난 순간보다는 성공적인 인생을 살고 모든 것을 다 마치고 운명할 때가 훨씬 좋은 것이다.
인생을 잘 살다 끝마치는 것이 죽음이다. 따라서 예수를 안 믿는 불신자들은 출생하는 것이나 죽는 것이나 똑같이 아무 의미도 없다. 하지만 예수를 믿고 주 안에서 잘 생활한 사람들에게는 출생한 것보다 죽음이 더 보배로운 것이다.
2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모든 사람의 결국이 이와 같이 됨이라 산 자가 이것에 유심하리로다
이 말씀은 여러분이 잘 알고 있다.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초상집에 가는 것에서 우리는 유익을 많이 얻는다. 가까운 사람의 죽음이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교훈하는 바가 크다. ‘아, 인생은 이렇게 살면 안 되겠구나. 이렇게 살아야겠구나. 이렇게 죽으면 그만인데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하나?’ 하면서 유익을 얻는다. 그러나 잔칫집에 가면 사람이 풀어지고 아무것도 얻는 것이 없다.
3 슬픔이 웃음보다 나음은 얼굴에 근심함으로 마음이 좋게 됨이니라
고난을 받으면 마음이 일시 기쁘지 않다. 슬프다. 늘 기쁜 것이 좋은 것 같고 늘 웃음이 있는 것이 좋은 것 같지만, 그런 사람은 발전이 없다. 주 안에서 고민이 있고 어려운 일을 당해서 고심하는 일이 많을 때 그것이 우리 인생에 가져다 주는 유익이 크다. 우리는 그런 과정을 통해 더 진지해지고 인생의 많은 것들을 깨닫게 된다. 무엇이 과연 의인지 진리인지 생명인지 더 깊이 느끼게 된다. 다른 사람에 대한 깊은 사랑은 무엇인지, 또 자기를 사랑하는 것은 어떤 것인지 알게 된다. 항상 웃기만 하는 사람은 이런 것들을 하나 하나 헤아릴 수 있는 경지에 이르지 못한다. 깊은 슬픔이 있을 때 그 속에서 우리에게 주는 유익은 더 큰 것이다.
“근심함으로 마음이 좋게 됨이니라”. 결국 근심은 우리에게 유익을 가져다 준다. 마음이 좋게 된다고 했다. 교회 생활 가운데서도 마음 아픈 사건들이 생긴다. 지체들로 인해 마음이 아프고 상처받고 시험이 들기도 한다. 병이 생기는 것도 같다. 그럴 때 많은 근심이 있고 어려운 마음을 피하기 어렵지만, 그런 마음이 결국 좋은 마음으로 바뀐다. 마음 아픈 사건이나 몸의 질병 등 많은 사건들이 괴로움을 줘 매우 안 좋은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그런 근심을 거쳐 여러분의 마음은 더 좋게 되는 것이다. 생명이 있는 사람은 그렇게 된다.
성도들은 교회 생활이 기뻐야지 왜 이렇게 어려운 때가 있느냐고 말한다. 어렵고 힘들고 시험이 들 때 우리 마음은 슬프고 괴롭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여러분의 마음은 더 깊어진다는 것을 알기 바란다. 사람에 대해, 일에 대해, 하나님에 대해, 말씀에 대해, 모든 것에서 더 깊은 생각을 갖게 된다. 하루종일 웃어보라. 1주일, 1달 동안 웃기만 하면서 근심스러운 일이 하나도 없으면 좋을 것 같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그러면 사람이 깊어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앞으로 어려운 일이 생기고 힘든 일이 생기면 ‘왜 이런가’ 하고 낙심하지 말고 이것이 여러분에게 주는 유익이 크다는 것으로 인해서 감사하기 바란다.
4 지혜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으되 우매자의 마음은 연락하는 집에 있느니라
이것은 2절의 연속이다. 지혜로운 사람의 마음은 불쌍한 사람들, 가난한 사람들, 병든 사람들, 병원에 있는 사람들, 영안실에 가 있는 사람들에게 먼저 가 있다. 반면 우매한 사람들은 ‘어디 가서 술 먹나, 어디 가서 놀까, 어디 가야 재미있나’만 생각한다. 그래서 어리석다.
5 사람이 지혜자의 책망을 듣는 것이 우매자의 노래를 듣는 것보다 나으니라
우매자의 노래란 악인의 거짓된 위로를 말한다. 지혜자의 책망이 우매자의 잠시 해주는 달콤한 속삭임보다 낫다. 그러나 사람들이 책망을 싫어하다보니 어리석은 사람들의 노래(속삭임)를 듣게 된다.
6 우매자의 웃음소리는 솥 밑에서 가시나무의 타는 소리 같으니 이것도 헛되니라
솥밑에서 타는 가시나무 소리는 타닥 타닥 하면서 고른 소리가 나지 않고 또 금새 사라진다. 이는 건전하지 못한 기쁨을 말한다. 참 기쁨은 진정 기쁠 때 기뻐하는 것인데 많은 사람들의 기쁨은 우매자의 웃음소리로 기뻐한다.
7 탐학이 지혜자를 우매하게 하고 뇌물이 사람의 명철을 망케 하느니라
“탐학이 지혜자를 우매하게 하고”. ‘탐학’에는 ‘탐욕’이라는 말도 있고 ‘압제’한다는 뜻도 있다. 먼저 탐욕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지혜자라 할지라도 욕심을 품으면 미련하게 된다. 욕심이 잉태하면 죄를 낳는다. 어떤 사람들은 욕심이 죄인 줄 모른다. 죄가 장성하면 사망을 낳는다. 욕심이 사람 속에 들어오게 되면 그때부터 사람이 미련하게 된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 가장 맑고 투명하고 지혜로운가? 욕심이 없는 사람이다. 명예를 얻으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 있다. 어떤 지위를 마음에 두고 있는 한 그 사람은 어리석어지고 그때부터 분별력이 떨어지기 시작한다. 물욕도 마찬가지고 명예욕, 권력욕도 마찬가지다. 욕심을 품게 되면 그때부터 사리분별이 없어진다.
탐학을 ‘압제, 학대’라고 번역하면 학대가 지혜자를 우매하게 한다는 말이다. 지혜로운 사람이라 할지라도 지속해서 너무 억눌림을 당하면 우매하게 된다고 해석할 수 있다. 사람을 너무 억누르지 말아야 한다. 여러분은 자녀를 너무 학대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면 아이들이 바보가 돼 버린다.
또 뇌물이 명철을 없어지게 한다. “뇌물이 사람의 명철을 망케 하느니라”. 사람이 뇌물을 받게 되면 그때부터 명철한 것이 없어진다. 눈이 어두워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18불평불만은 왜 생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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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의 끝이 시작보다 낫고”. 시작도 좋지만 끝이 더 좋다는 뜻이다. 어떤 일이라도 시작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매사에 끝이 더 중요하다. 일을 시작만 하고 끝맺지 못하는 사람은 별로 좋은 사람이 아니다. 어떤 사람이 훌륭한가? 시작하면 반드시 끝을 맺는 사람이다. 어떤 사람은 일을 과감하게 벌릴 줄 알지만, 그 일을 잘 지켜나가고 발전시켜서 합당하게 결말을 가져오는 것을 하지 못한다.
당신은 일을 잘 벌리는 사람이 역량이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일을 잘 끝맺는 사람이 훌륭한 사람이다. 흔히 사람이 어떤지를 보려면 헤어질 때 보라는 말이 있다. 만날 때는 다 좋다. 그러나 헤어질 때 합당한 예절로 헤어지기란 쉽지 않다. 당신은 지혜를 얻고 싶은가? 사람을 아는 것도 일종의 큰 지혜다. 어떤 사람이 진정 좋은 사람인 줄 아는가? 일을 끝맺는 것을 보라! 거기서 큰 분별이 있게 된다.
“참는 마음이 교만한 마음보다 나으니”. 끝을 맺는 사람은 주로 참는 사람이다. 오래 참을 수 있는 사람이 끝을 맺는다. 일을 시작하고 벌려놓은 채 끝맺지 못하는 사람은 참는 마음이 부족한 경우다. 그러므로 참는 사람은 겸손한 사람이라는 뜻도 된다. 참는 마음이 교만한 마음보다 낫다고 했다. 교만한 마음은 겸손한 마음과 대비되는데 여기서는 교만한 마음 대 참는 마음이라고 했다. 사람들이 왜 중도에 다 포기하는가? 대개 참지 못하기 때문이며, 참지 못하는 이유는 겸손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어떤 일이든 끝까지 마무리하고 성취하는 사람들은 다 겸손한 사람들이다. 교만한 사람은 자기의 교만한 마음이 상처를 받을 때 발끈하면서 일을 끝내버리고, 사람들의 심중과 일의 진상을 참되게 읽지 못하기 때문에 가다가 실패하는 것이다.
9 급한 마음으로 노를 발하지 말라 노는 우매자의 품에 머무름이니라
“급한 마음으로 노를 발하지 말라”. 어떤 사람의 인격이 훌륭한가를 보려면 그가 화를 잘 내는지 보면 된다. 또 무엇에 화를 내는지 보면 된다. 어느 때에도 화를 내지 않고 인내할 수 있는 사람은 정말 훌륭한 사람이다. 너댓 가지에서는 화를 안 내는데 여섯번째, 일곱번째에 가서는 화를 내는 사람이 있다. 그것은 그 부분에서 그 사람의 교만이 처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분노는 그 뿌리가 교만에 있다. 왜 노를 발하는가? 그 사람 속에 교만의 부분이 만져졌기 때문이다. 결국 어떤 일을 마무리하지 못하는 이유는 대부분 급한 마음으로 노를 발하기 시작해서 깨지기 때문이다. 그것은 교만이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노는 우매자의 품에 머무름이니라”. 급한 마음으로 노를 발하는 사람은 우매한 사람이다. 어떤 분노할 상황이 올 때 급히 분내는 사람은 자신을 우매한 자로 만든다. 그러므로 속에서 분이 나더라도 분을 내지 말고 기다려야 한다. 많은 시간을 기다리다 보면 거기에 지혜가 부족했던 점이 떠오르게 된다. 일주일만 기다려 보라. 그러면 내가 그 당시 제정신이 아니었음을 알게 된다. 어떤 경우라도 분을 낼 필요가 없다. 시간이 조금만 지나면 나중에 거기에 해결 대책이 있었고, 나의 실수가 있었고, 나의 교만이 있었음을 알게 된다.
10 옛날이 오늘보다 나은 것이 어찜이냐 하지 말라 이렇게 묻는 것이 지혜가 아니니라
“옛날이 오늘보다 나은 것이 어찜이냐 하지 말라”. 이것은 과거 지향적인 사람들을 두고 하는 말이다. 뭐든지 옛날이 좋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과거에 미련이 많다. 영적으로도 마찬가지다. ‘그때 내 신앙생활과 당시 교회생활이 좋았는데…’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는 우매한 사람이다. 나는 ‘미련이 많은 사람이 미련한 사람’이라고 말하고 싶다. 현재에 충실한 사람이 정말 충실한 사람이다. 물론 과거 좋은 것이 있었겠지만 그런 것은 생각하지 말라. 현재를 위해 생각하라. 현재가 나의 실제이고 여기서부터 미래를 향해 나아가려 하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이다.
과거에 미련을 갖고 과거가 좋았다고 생각하고 거기서 나오지 못하는 사람은 그 생각만큼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여러분은 이 말씀을 통해 지혜를 많이 얻었는가? 미련을 버리겠는가? 바울은 뒤에 것을 잃어버리고 앞을 향하여 나아갔다고 말한다. 그는 과거 좋은 것이 많았지만 배설물로 여기고 현재 일과 미래를 향해 나아간 것이다. 과거의 모든 미련을 버리고 뒤엣 것을 잊어버리고 앞을 향해 전진하는 여러분이 되기 바란다.
11 지혜는 유업 같이 아름답고 햇빛을 보는 자에게 유익하도다
11절부터 마지막 절까지는 지혜를 상당히 높이는 말씀이다. 여기서 지혜는 이 세상 지혜가 아니라 하나님을 아는 영적인 지혜다. 지혜의 근본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지혜는 하나님을 아는 지혜이며, 그런 지혜가 가장 고상하고 귀한 것임을 말하고 있다.
“지혜는 유업 같이 아름답고”. 유업은 어떤 사람이 영구히 소유할 수 있는 재산이다. 지혜는 그런 유업같이 귀한 것이라고 말씀한다. “햇빛을 보는 자에게 유익하도다”. 지혜는 귀하고 아름다울 뿐 아니라 유익하다고 하신다. ‘햇빛을 보는 자’란 ‘살아 있는 자’라는 뜻이다. 이처럼 지혜는 살아 있는 자에게 참으로 유익하고 좋은 것이다.
12 지혜도 보호하는 것이 되고 돈도 보호하는 것이 되나 지식이 더욱 아름다움은 지혜는 지혜 얻은 자의 생명을 보존함이니라
“지혜도 보호하는 것이 되고 돈도 보호하는 것이 되나”. 유업을 한 마디로 말해서 ‘돈’이라고 표현했다.
“지식이 더욱 아름다움은 지혜는 지혜 얻은 자의 생명을 보존함이니라”. 여기서 지혜와 지식은 같은 것을 뜻한다. 재물이 있으면 우리는 보호받는다. 먹을 것이 있어야 우리가 보호된다. 잠 잘 곳이 있어야 보호된다. 병원 갈 돈이 있어야 아파도 우리는 보호받을 수 있다. 이처럼 재물은 우리를 지켜준다.
그런데 재물만이 아니라 지혜도 우리를 지켜준다고 했다. 결국 어리석은 사람, 지혜 없는 사람은 자기를 지키지 못한다는 뜻이다. 특히 이 지혜는 영적인 지혜이므로, 이 지혜가 없으면 영원한 보장, 영원한 보호를 받지 못한다. 결국 참 지혜는 무엇인가? 하나님을 아는 것이요 진리를 아는 것이요 구원을 깨닫는 것이 바로 참 지혜다. 재물도 우리를 보호하고 지혜도 우리를 보호해주지만, 이 지혜는 우리의 생명을 영원히 보호해주는 것이기 때문에 사실 재물보다는 지혜가 더 귀한 것이라는 뜻이다.
13 하나님의 행하시는 일을 보라 하나님이 굽게 하신 것을 누가 능히 곧게 하겠느냐
지혜를 이야기하다가 이 말이 이어 나온다. “하나님이 굽게 하신 것을 누가 능히 곧게 하겠느냐”. 지혜로운 사람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인정하고 그 섭리를 순종한다는 것이다. 지혜롭지 않은 사람은 어떻게 하는가? ‘왜 곧게 펴야 할 것을 굽게 하시는가?’ 하면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불만을 품는다. 지혜가 없는 사람은 모든 것이 자기 뜻대로 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모든 사람이 자기 뜻대로 움직여주어야 한다고 믿으며 하나님도 그렇게 자기 뜻대로 해주셔야 한다고 믿는다. 자기 뜻대로 되지 않을 때 모든 것에 대해 불평 불만이 생기는 사람이 어리석은 사람이다.
그러나 지혜로운 사람은 하나님의 행정, 하나님의 역사에 대해 ‘아멘’ 하는 사람이다. 그는 ‘하나님이 굽게 하셨으면 누구라도 펼 수 없다, 하나님이 펴 놓으셨으면 누구라도 굽게 할 수 없다’고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사람이다. 이처럼 하나님 하신 일에 순응하는 그런 사람이 바로 지혜로운 사람이다.
14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생각하라 하나님이 이 두 가지를 병행하게 하사 사람으로 그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하나님이 어떤 때에는 형통한 날을 주신다.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는 것이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것이다.
“곤고한 날에는 생각하라”. 때로는 곤고한 날도 있다. 어려운 고난, 예기치 않는 환난이 닥친다. 육신의 질병이 생기고, 가정에 어려움과 분란이 생기고, 경제적으로 큰 문제가 생긴다. 이것이 다 곤고한 날이다. 그럴 때는 생각해 봐야 한다. ‘내 자신이 뭔가 잘못한 것이 없는가? 배워야 할 점은 없는가? 하나님이 나에게 말씀하시는 것은 없는가?’라고 생각해 봐야 한다.
굽게 하셨다는 것은 이런 곤고한 날을 주신 것이고 펴셨다는 것은 평탄한 날이라고 볼 수 있는데, 그런 모든 환경을 다 하나님이 주시는 것으로 생각하고 순응하는 것이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태도다. 또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지혜로운 사람이다.
“하나님이 이 두 가지를 병행하게 하사 사람으로 그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 하나님은 어떤 때는 굽은 것을 주시고 어떤 때에는 반듯한 것을 주신다. 어떤 때는 곤고함을 주시고 어떤 때는 평탄한 것을 주신다. 그렇게 섞어서 주시는 이유는 우리로 미래를 예측할 수 없도록 하시기 위함이다. 사람이 미래를 예측하는 것은 좋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미래를 예측할 수 있게 된다면 사람들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다. 어떻게 하면 미래를 자기 생각대로 바꿔볼까 머리를 쓰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사람이 한 치 앞을 바라볼 수 없도록 해 놓으신 것이다. 그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만을 믿고 의지하고 신뢰하고 바라보게 하시기 위함이시다
*19지나치게 의인 되지 말라?
▲ 유동근 목사(온누리선교교회). |
“내가 내 헛된 날에”. 솔로몬은 자기가 지혜를 연구하고 얻으려 하고 궁구했다. 사람의 인생 가운데 도대체 어떤 비밀이 있는지, 어떤 뜻이 들어 있는지 많이 연구했다. 그러나 그런 시간이 모두 헛되었다고 고백했다. 의로운 중에서 멸망하는 의인이 있고 악행 중에서 장수하는 악인이 있다는 것이다. 우리 생각은 어떤가? 악행을 하는 사람은 일찍 죽어야 한다. 착한 일을 하는 사람은 복을 받아서 오래 살아야 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굉장히 착하게 사는데 일찍 세상을 뜨는 사람이 있다. 굉장히 나쁜 사람인데 오래 장수하기도 한다. 솔로몬이 이 모든 것을 다 연구했지만 해답을 못 얻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16절에서 나름대로의 결론을 내린다.
16 지나치게 의인이 되지 말며 지나치게 지혜자도 되지 말라 어찌하여 스스로 패망케 하겠느냐
“지나치게 의인이 되지 말며 지나치게 지혜자도 되지 말라”. 지나치게 의인이 되면 일찍 죽더라는 것이다. 별 수 없다는 말이다. 지나치게 지혜자가 되지 말라고 했다. 너무 많이 아는 것도 좋은 것 같지 않다는 뜻이다. 음식은 이것을 먹어야 좋고, 저것을 먹어야 좋고, 무슨 비타민을 먹어야 하고…. 이런 것을 해박하게 잘 아는 박사가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보다 비쩍 말라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적당하게 알지 너무 많이 알려고 하지 말라는 것이다.
“어찌하여 스스로 패망케 하겠느냐”. 그렇게 너무 많이 알다 보니 오히려 패망하더라는 것이다. 너무 지혜롭고 너무 의로우면 패망하게 된다는 것이다.
17 지나치게 악인이 되지 말며 우매자도 되지 말라 어찌하여 기한 전에 죽으려느냐
지나치게 악인도 되지 말고 지나치게 우매자도 되지 말라고 했다. 지나치게 나쁜 짓을 하는 사람도 제 명을 못 살고 일찍 죽게 된다는 말이다.
“지나치게 악인이 되지 말며”라는 이 말은 잘못 해석하면 적당하게 죄도 지어가면서 적당하게 의롭기도 하고 너무 잘난 척하지 말고 너무 악한 일도 하지 말고 적당하게 살라는 말로 들린다. 그러나 여기서 솔로몬의 말이 전적으로 주님 말씀과 합한다고 볼 수는 없다. 전도서 자체가 사람의 생각이 많다. 인간사에 대한 사람으로서의 탐구이기 때문이다.
사실 참된 의인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우리는 지나친 의인이 되려고 할 것이 아니라 ‘의’ 자체를 구해야 한다. 의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자기가 나름대로 의를 찾아서 의로워지려 할 때 결국 인간적인 의가 돼 버리고 만다. 따라서 지금 솔로몬이 말하는 ‘지나친 의’는 다른 사람들이 저렇게 나쁜 마음을 먹고 살지만 나는 절대로 불의하지 않고 의롭게 살아보겠다고 하는 사람들의 ‘인간적인 의’를 말한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사람도 일찍 죽더라는 것이다. 또 너무나 나쁘게 사는 사람도 똑같이 일찍 죽더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간으로서 최고 지혜로웠던 솔로몬이 한 말이기에 이를 참고할 뿐이다. 나쁜 짓을 엄청나게 많이 하는 사람은 패망할 수 밖에 없다는 것도 사실은 진리다.
‘악인’과 ‘우매자’는 서로 연결돼 있다. 어떤 사람이 화를 잘 내는가? 이야기만 하면 싸우려고 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우매한 사람이다. 지혜로운 사람은 그렇게 싸우지 않는다. 상황을 다 이해하고 파악하기 때문이다. 역지사지도 할 줄 안다. 옆에서도 볼 줄 알고 앞에서도 볼 줄 알기에 싸우지 않는다. 하지만 성질을 잘 내고 남을 몰아붙이는 사람은 하나만 생각하고 자기 편에서만 생각하고 자기 잇속만 차리기 때문에 잘 싸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그도 자신이 잘못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처럼 우매한 것과 악인이 되는 것은 관계가 있다. 그나마 나중에라도 잘못한 것을 깨닫는 사람은 나은 편이다. 아주 우매한 사람은 성질을 내고 남들을 못살게 굴고 나쁜 짓을 하고도 끝까지 자기가 잘했다고 하는데, 이는 진짜 우매한 사람이다. 안타깝지만 그런 사람들도 많다.
18 너는 이것을 잡으며 저것을 놓지 마는 것이 좋으니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날 것임이니라
“너는 이것을 잡으며 저것을 놓지 마는 것이 좋으니”. 지금까지 말한 ‘너무 의인이 되지 말고 너무 악인이 되지도 말아라’는 말을 잡고 놓지 말라는 것이다. 즉 16절의 너무 의인이 되지 말라는 말씀은 잡고, 17절의 너무 악인이 되지 말라는 말씀은 놓지 말라는 것이다. 그것이 좋다. 성경에서 좋다면 그것이 진정 좋은 것이다. 이것이 많은 것을 연구한 솔로몬의 결론이다. 너무 지나치게 극단적으로 가지 말라고 한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길을 걸어가면서 언제나 두 극단(two extremes)이 있음을 본다. 어떤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이 가는 길은 다 잘못되고 자신들이 가는 길이 가장 옳다고 주장한다. 이것도 극단으로 치우친 사례다. 심지어 지나치게 옳게 가려고 의도하는 것조차 함정에 빠지게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나는 역대로 진리를 매우 사랑하는 몇몇 그리스도인 단체와 그 창시자를 잘 아는데 그들이 바로 이러한 함정에 빠진 경우라고 본다. 그들은 성경적으로 지나치게 옳은 것을 지향했다.
사람들은 옳은 것을 매우 좋아하는 특성이 있고 틀리기를 원치 않는 성질이 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들의 틀린 것을 보여주고 성경적으로 옳은 것을 말해주면 그것을 기뻐하면서 쉽게 진리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사람이란 그 자체가 타락했고 옳지 않은데 지나치게 옳은 것을 지향하다 보니 신앙적으로 이상과 현실 사이의 괴리 현상이 생겨나고 결국은 이중성과 위선적인 신앙을 모면할 수 없다. 그렇다면 인간은 어차피 타락한 죄인이니 차라리 부패를 지향해야 하는가? 사람들은 왜 부패한 것을 알면서도 부패하고 악한 쪽을 선택하는가? 그것이 겉으로 보기에 안전하다고 판단하기에 그렇게 한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여기에 합당한 균형이 있다. 주 예수님을 보자! 주님과 달리 바리새인들은 지나치게 옳게 되려 했다. 그러나 주님은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셨다. 그러면 주님은 진정 죄인이 되고 말았는가? 그렇지 않다. 그분은 우리의 눈으로 보기에 옳은 길을 간 것 같지 않지만 참되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길을 가셨다. 그것은 그 분이 죄인을 구원하러 오셨기에 그렇다. 우리는 한 가지는 잡고(지나치게 의인이 되지 말 것), 다른 한 가지는 놓지 말아야 한다(지나치게 악인이 되지 말 것).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날 것임이니라”. 이런 두 극단은 사실 사람들이 빠지기 쉬운 함정이다. 그래서 “벗어날 것임이니라”는 말이 있다. 감사하게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이런 위험에서 벗어난다는 은혜로운 말씀이다. 당신은 진정 하나님을 경외하는가? 그렇다면 당신은 그런 극단에 빠졌다가도 벗어나게 된다. 결론적으로 솔로몬은 지나치게 악인이 되지 않거나 지나치게 의인이 되지 않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럴 때 지나치게 의인이 되는 해나 악인이 되는 해에서 벗어날 수 있기에 하나님을 경외할 것을 권하고 있다.
*20비난의 말을 들었을 때
▲ 유동근 목사(온누리선교교회). |
지혜가 있다면 10명의 성읍 관원(유사)보다 낫다고 했다. 10명의 지도자보다 지혜가 있는 자가 더 낫고 능력이 있다는 말이다. 이처럼 솔로몬은 지혜를 가장 탁월한 것으로 추천한다.
20 선을 행하고 죄를 범치 아니하는 의인은 세상에 아주 없느니라
이 세상에 처음부터 끝까지 완전히 선만을 행하고 죄를 조금도 범하지 않는 의인은 없다고 한다. 누군가 정말 선인(善人)이고 의인이고 좋은 사람일 수도 있지만, 때로는 죄를 범할 수 있다.
성경은 모든 사람이 죄를 범했다고 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했다. 완벽한 사람은 없다는 뜻도 된다. 사람은 그 자체가 완전하지 않다는 뜻이다. 사람이 지나치게 완벽을 표준으로 내거는 자체가 모순의 시작이라는 말이다. 그러나 이것이 곧 진리의 표준을 낮춘다는 의미가 아니므로 우리는 조심해야 한다.
진리는 영원히 진리다. 그리고 우리는 그리스도의 완전하심과 같이 완전해지기를 사모해야 한다. 또 우리는 그렇게 될 수 있음도 알아야 한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우리는 사람의 불완전함을 망각하는 방식으로, 완전을 추구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들의 흠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그 사람은 참 나쁘다’고 하지 말라. 이 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하나도 없다.
21 무릇 사람의 말을 들으려고 마음을 두지 말라 염려컨대 네 종이 너를 저주하는 것을 들으리라
사람의 말을 듣는 것을 너무 마음에 두지 말라고 한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4장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다. “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 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 나도 나를 판단치 아니하노니 내가 자책할 아무 것도 깨닫지 못하나 그러나 이를 인하여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노라 다만 나를 판단하실 이는 주시니라(고전 4:3-4)”.
그런데 다른 사람이 자기에 대해 말하는 것에 굉장히 민감한 사람들이 있다. ‘누가 나를 뭐라고 했다고?’ 하며 흥분한다. 다른 사람들이 자신에 대해 무언가 말했을 때 좋은 말이면 좋아하지만, 안 좋은 쪽으로 비평하고 평가했다면 눈꼬리가 올라간다. 그런 말에 대해 아주 예민하다. 전도서에 의하면 그런 사람도 결국 어리석은 사람이다. 지혜로운 사람은 그런 사람들의 말에 별로 개의치 않는다.
“무릇 사람의 말을 들으려고 마음을 두지 말라”. 누가 나에 대해 뭐라고 하는지 너무 많이 생각하지 말라는 것이다. 자기에 대한 여론의 동향을 너무 주의깊게 들으려고 하지 않는 것이 좋다. 요즘 우리나라의 몇몇 인기 연예인들이 자살을 했는데, 그 이유 중 하나가 인터넷에서 사람들이 자기에 대해 쓴 말들을 듣고 흥분한 탓도 있다고 한다. 사람들의 말을 유의해 들으려 하는 사람들은 다 어리석은 사람으로 알면 된다. 그 말들은 들을 가치가 별로 없다.
여러분은 사람들의 속에 좋은 것이 많이 들어있다고 보는가? 혹은 나쁜 것이 많이 들어있다고 보는가? 성경에 의하면 사람의 속에는 선한 것이 없고 죄와 악이 속에 있다. 인터넷은 보지 않는 곳에서 쓰는 공간이므로 사람들 속에 있는 것이 여과없이 나올 수 있는 창구다. 나는 여러분이 사람들의 마음 속에 들어있는 더러운 악과 부패한 것들을 볼 필요가 없듯 인터넷에 올리는 악한 말들도 동일하게 유의할 필요가 없다고 믿는다.
“염려컨대 네 종이 너를 저주하는 것을 들으리라”. 그렇게 자꾸 남의 말을 들으려 하다보면 종들이 하는 나쁜 말을 듣게 되기 때문이다. 아랫사람은 어쨌든 윗사람을 저주하는 생각이 들게 마련이다. 부림을 당하다 보니 윗사람에게 서운한 마음을 갖게 된다. 상전은 아무래도 일을 시키다 보니 죄를 짓게 된다. 그런데도 자꾸 사람의 말을 들으려고 하다 보면 종이 자신에게 한 마디 저주하는 말을 듣게 되고, 그럴 때 굉장히 기분이 나빠진다. 그래서 다음 절에서는 ‘너도 때로는 그러하지 않느냐’고 말한다.
22 너도 가끔 사람을 저주한 것을 네 마음이 아느니라
사람이란 어떤 때에는 나쁜 사람들에 대해 저주하는 마음이 든다는 것이다. 밖으로 말하지 않고 마음으로만 지나가서 그렇지 나쁜 마음이 드는 경우가 있다. 그런데도 남의 말을 자꾸만 귀담아 들으려고 하는 사람은 그러다 한 마디를 듣고 며칠 밤을 고민하게 된다. 종은 자기가 피곤하고 속상하니까 그냥 내뱉는 말일 뿐인데 그 말을 마음에 두는 것이다.
그래서 솔로몬은 ‘너도 때로는 남을 저주하는 마음을 갖지 않느냐? 그러니 다른 사람의 말을 자꾸 들으려고 귀를 기울이지 말라’는 것이다. 이것이 지혜다. 남의 말을 다 들을 필요가 없다. 너무 귀담아 들을 필요가 없다. 여러분에 대해 평가하는 모든 말들을 다 듣고 마음에 담아둘 필요가 없다. 사실 그것들은 별 뜻도 없는 말이다. 그런데도 ‘그 사람이 나에 대해 그랬어?’라고 흥분하고 그 말에 많은 의미를 부여하면서 ‘두고보자’고 마음에 품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이다. 그것은 그 사람이 그때 기분이 나빠서 한 마디 잘못한 말이지 그렇게 중요한 말이 아니다. 그러므로 전도서의 말씀을 배우는 것은 여러분에게 참으로 유익하다. 이러한 우매함에 빠지지 않을 길을 배우게 되기 때문이다.
23 내가 이 모든 것을 지혜로 시험하며 스스로 이르기를 내가 지혜자가 되리라 하였으나 지혜가 나를 멀리하였도다
솔로몬은 모든 것을 지혜로 시험하며 ‘내가 지혜로운 사람이 돼야겠다’고 했지만 그것이 잘 되지 않더라고 고백한다. 지혜로워지려 하면 할수록, 연구하면 할수록, 알아보면 볼수록 지혜는 더 멀리 가는 것 같았다는 것이 그의 고백이다.
24 무릇 된 것이 멀고 깊고 깊도다 누가 능히 통달하랴
솔로몬은 왜 이런 말을 하는가? 사람은 다 가질 수 없다는 결론을 주고 있다. 그렇다면 전도서는 무엇을 예비하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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