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동근 목사는
대전고, 충남대·대학원
Pacific Theological Seminary(Th.M, D.D)
온누리선교교회 담임목사, 美 퍼시픽 신학교 교수
국제선교신학원(IMC) 학장
現 대한예수교장로회 합신연합총회 총회장
Fuller Theological Seminary D.Min GM Course
저서: 모세오경, 마태복음, 요한복음, 로마서, 서신서, 요한계시록 등 강해서(총 20권)
저자는 1991년부터 몇몇 동역자들과 함께 몽골, 중국, 베트남, 캄보디아, 인도, 네팔, 미얀마, 에디오피아, 잠비아, 이태리, 헝가리, 불가리아, 핀란드, 프랑스, 독일 등 해외 선교를 주로 해온 선교사이며 복음전도자다. 위에서 소개되는 선교일기는 이 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쓴 글이다. 지금도 매년 저자와 그 일행은 일년에 한 번 이상 세워진 교회들을 순방하며 진리의 말씀을 공급하고, 교회들을 굳게 세우며 전도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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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도서를 피상적으로 읽으면 단지 젊은이들에게 인생이 헛됨을 알려주는 정도로 이해하게 된다. 그러나 그 깊이를 알게 되면 왜 이러한 책이 성경에 포함돼 있는지, 왜 이 책을 지혜서라고 하는지, 왜 솔로몬을 지혜의 왕이라고 하는지 잘 알게 된다. 늙은 후에 이 책을 읽는 것은 너무 늦다. 나는 요즘 젊은이들이 자꾸만 자살하고 삶의 의미를 모른채 이리 저리 방황하는 것을 보는데 이럴 때 이런 책이 얼마나 도움이 될지를 생각해 본다.
아무쪼록 이 책이 세상에 나와서 많은 이들에게 인생이 얼마나 공허하고 덧없는 것을 알게 하는데 도움을 줘 참되신 주님을 찾게 되기를, 성경의 귀중함과 성경만이 진리(전 12:10)임을 이해하는 데 조금이라도 기여할 수 있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2008. 10. 20.
저자 유동근
전도서 1장
1 다윗의 아들 예루살렘 왕 전도자의 말씀이라 2 전도자가 가로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전도서>라는 이 책의 원래 명칭은 전도서가 아니라 <집회를 소집한 사람>이다. 히브리어로는 ‘코헬렛트’이며 ‘집회를 소집한 사람’, 혹은 ‘소집자’라는 뜻이다. 이 책에서 저자는 자신이 솔로몬이라고 말하지 않지만 1절의 ‘다윗의 아들’이나 ‘예루살렘 왕’, ‘지혜를 많이 얻었다’는 표현을 볼 때 솔로몬이 틀림없다고 확정한다. 솔로몬은 많은 실패를 체험하고 나서 인생의 후반부에 하나님 앞에서 오랫동안 화평을 잃고 실패한 체험을 회상하며, 이 전도서를 쓸 때는 자신의 이름인 ‘평강의 왕’ 즉 ‘솔로몬’이라는 이름을 사용하지 않고 다만 집회를 소집한 사람이라고 제목을 붙인 것이다. ‘전도자’란 소집한 사람이라는 뜻이다. 그는 사람들을 소집해서 그의 체험, 곧 실패한 경험을 들려주고자 했다. 그래서 전도서라는 성경이 존재하게 된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전도서가 왜 성경에 포함돼야 하는지 의심한다. 왜냐하면 이 책 속에는 사람의 불평이 들어 있고 염세적인 관념과 숙명론적인 내용이 들어 있어 성경의 여러 책들과 모순되는 점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전도서를 정경 안에 넣으면 안 된다는 사람들이 있었다. 전도서에는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도 많고 또 읽기도 어려운 부분이 많다. 하지만 잘 읽으면, 또 이해할 수 있는 열쇠를 갖는다면 그런 문제들을 해결하기가 어렵지는 않다.
전도서의 중점은 해 아래서 세상적인 학문, 지식, 부, 오락, 향락, 명성, 지위 등 많은 것들을 얻는다 해도 하나님이 계시지 않으면 허무하고 공허함을 말해주는 것이다. 왜 하나님은 솔로몬을 선택해서 전도서를 쓰게 하셨는가? 솔로몬은 절대자로서 왕의 체험을 했고, 부귀영화를 누렸고 또 심오한 지혜를 가졌고 그 지혜를 의지해서 하나님의 백성을 다스렸지만, 후반부에 자신의 정욕을 이기지 못하고 하나님을 배반하고 사치스러운 생활을 추구하면서 많은 부패를 겪었다. 결과적으로 세상의 모든 헛된 체험을 한 뒤에 그는 모든 것이 공허하다는 한 권의 책을 쓰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전도서다.
전도서를 쓸 수 있는 가장 훌륭한 자격을 가진 사람은 솔로몬밖에 없다. 그는 모든 부귀영화를 누렸고, 최고의 지혜를 가졌다. 그리고 인간으로서 누릴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누렸다. 그렇지만 결국 나중에 그 모든 것이 허무하다는 것을 체험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에게 인생이 무엇인가를 솔로몬보다 잘 알려줄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런데 전도서 뒤에 있는 책은 아가서이다. 인생은 너무나 공허하다고 말한 것이 전도서라면 아가서는 하나님을 가까이 받아들인 성도들이 주님으로 인해 즐거움을 찾았을 때의 ‘노래 중의 노래’다. 결국 솔로몬은 인생의 허무함을 말하는 전도서를 썼을 뿐 아니라 아가서를 써서 주님을 만났을 때 얼마나 기쁘고 만족한 생활을 할 수 있는가를 기록했다. 솔로몬은 잠언과 전도서, 아가서의 저자다.
“전도자가 가로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2절)”. 그는 헛되다는 말을 계속한다. 헛되고 헛되며 모든 것이 헛되다고 했다. 이 ‘헛되다’라는 말은 히브리어로는 ‘하벨’인데 원문에는 ‘불다’는 뜻이 있다. 아담이 가인을 낳고 흥분하여 ‘얻었다’는 뜻의 이름을 지었지만 그는 기대했던 뱀의 머리를 깰 자(창 3:15)가 아니었다. 그래서 그후 얻은 둘째아들은 헛되다는 의미의 아벨이라고 지었던 것이다. 어떤 성경 해석자는 이 하벨 또는 아벨이라는 말을 어린 아이가 불어서 만드는 비눗방울 같은 공기방울로 비유했다. 이 세상의 모든 허영, 재물, 죄의 즐거움, 정욕, 쾌락 등은 다 비눗방울처럼, 무지개처럼 처음에는 아름답고 사랑스러워 보이지만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지고 허무한 것이 돼 버린다는 뜻이다.
3 사람이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자기에게 무엇이 유익한고
사람들은 해 아래서 많은 수고를 한다. 살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한다. 사람들은 인생에서 나름대로 유익한 일들을 한다고 열심이다. 그런데 결국 그렇게 해 아래서 수고를 했는데, 그런 수고가 자신에게 무엇이 유익하냐는 것이다. 그래서 전도서는 하나님 없이 행한 인간의 모든 생활이나 활동이 다 유익하지 않다고 말한다. ‘유익하다’는 말은 히브리어로 ‘남는 것’을 의미하는데, 인생이 수고하고 열심히 살아도 나중에 끝날 때 보니까 남는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4 한 세대는 가고 한 세대는 오되 땅은 영원히 있도다
사람들은 땅 위에서 영원히 살 것처럼 그렇게 산다. 욕심을 마음껏 부리면서 산다. 그런데 결국 그런 사람들도 다 사라지는 것이다. 한 세대는 가고 또 한 세대가 오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 땅은 계속 그대로 있다. 이것은 땅이 영원히 지속된다는 뜻은 아니다. 성경적으로 이 땅도 다 불타버리고 끝나는 날이 있다. 그러나 사람의 인생과 비교할 때 사람들은 한 세대가 가고 한 세대는 오면서 계속 바뀌지만, 땅은 그대로라는 것이다. 우리가 고등학교 다닐 때 읊었던 시조처럼 말이다. ‘오백년 도읍지를 필마로 돌아드니 산천은 의구하되 인걸은 간데없네 어즈버 태평년월이 꿈이런가 하노라.’ 이것도 같은 말이다. 산천은 그대로인데 사람들은 없어진 것이다.
5 해는 떴다가 지며 그 떴던 곳으로 빨리 돌아가고 6 바람은 남으로 불다가 북으로 돌이키며 이리 돌며 저리 돌아 불던 곳으로 돌아가고 7 모든 강물은 다 바다로 흐르되 바다를 채우지 못하며 어느 곳으로 흐르든지 그리로 연하여 흐르느니라
인생의 무상함을 이렇게 여러 가지로 표현했다. 해가 뜨고 지는 것, 바람이 부는 것, 그리고 모든 강물 등 이 자연계가 그대로 존재하면서 흘러가는 것을 들어서 말했다.
8 만물의 피곤함을 사람이 말로 다 할 수 없나니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고 귀는 들어도 차지 아니하는도다
“만물의 피곤함을 사람이 말로 다 할 수 없나니”. 솔로몬의 눈에 이 만물은 다 피곤하게 보인다.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고 귀는 들어도 차지 아니하는도다”. 우리나라 옛 노래에도 이와 비슷한 것이 있다. ‘노세 노세 젊어서 노세 늙어지면 못노나니 화무는 십일홍이요 달도 차면 기우느니라.’ 나는 일반 사람들보다 많은 나라를 다녀봤다. 그래서 나는 비교적 아름다운 곳이라는 곳을 많이 봤다. 물론 관광을 하러 다닌 것은 아니고 교회를 위해 말씀을 전하고 복음을 전하기 위해 갔지만, 예를 들어 프랑스에 가면 그 나라의 성도들이 에펠탑, 박물관 등에 데리고 가기 때문에 아름다운 곳을 가 볼 기회가 많았다. 말레이시아를 갔을 때 보았던 아름다운 곳이 기억이 나고, 스리랑카에서도 ‘벤또따’라는 아주 아름다운 곳에 가 보았다. 이 세상에는 정말 아름다운 곳이 많다. 그렇게 아름다운 곳을 가게 되면 제일 먼저 아내가 생각이 난다. 아내를 데리고 왔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생각하게 된다.
그런데 기묘한 것이 한 가지가 있는데, 하룻밤을 지나고 다시 보면 눈이 완전히 달라지기라도 한 것처럼 기이하게 ‘여기가 뭐가 그렇게 좋다고 생각을 했을까’ 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아름답던 경관들이 금방 빛이 바래고 좋게 느껴지지 않는다. 하루 이틀만 지나면 그렇다. 그러므로 눈은 아무리 보아도 족함이 없다. 또 가장 아름다운 음악이나 노래도 마찬가지다. 몇번 듣고 나면 다음에는 그렇게 좋지 않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이 처음 볼 때, 처음 들을 때는 조금 좋지만 계속될 때 별로 좋은 것이 없다. 그래서 여기서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고 귀는 들어도 차지 아니하는도다” 라고 한 것인데 이는 우리의 체험에서도 사실이다.
9 이미 있던 것이 후에 다시 있겠고 이미 한 일을 후에 다시 할지라 해 아래는 새 것이 없나니 10 무엇을 가리켜 이르기를 보라 이것이 새 것이라 할 것이 있으랴 오래 전 세대에도 이미 있었느니라
이 땅에는 새로운 것이 없다는 말이다. 이미 있던 것이 그 후에 다시 있는 것이다. 예를 들면 현재는 촛불집회 등으로 우리나라의 정치 상황이 좀 어렵다. 그러면 이러한 상황이 옛날에는 없었는가? 그렇지 않다. 이는 6·10항쟁 때나 박종철·이한열 같은 사람들이 죽었을 때 있었던 일들과 비슷한 현상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일이 근세에만 있는가? 아니다. 통치 형태가 달라서 그렇지 왕정 시대 때 일어났던 홍경래의 난, 이괄의 난, 전봉준의 난 등이 다 비슷한 성격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백성들이 봉기를 하는 것은 미화시켜서 그렇지 다 같은 성질을 갖고 있다. 이러한 것들은 옛날에도 있었고 지금도 있다. 사람들은 새로운 어떤 일이 일어났다고 하지만 사실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모든 것은 다 이미 있었던 것이 후에 다시 있는 것이고 이미 한 일을 후에 다시 하는 것이다. 그래서 ‘해 아래는 새 것이 없다’고 하는 것이다.
‘무엇을 가리켜 이르기를 보라 이것이 새 것이라 할 것이 있으랴 오래 전 세대에도 이미 있었느니라’. 오래 전 세대에도 이미 있었다. 즉 조선 시대에도 있었다. 아니 고려 시대나 삼국 시대에도 있었다. 우리가 잘 몰라서 그렇지 고조선 시대에도 이미 있었을 것이다. 사람 사는 곳에 있는 일 가운데 새로운 일이란 없는 것이다. 3500년 전에 쓰여진 모세오경 시대나 그 이후 열왕 시대나 연구해 보면 다 오늘날과 진배없는 일들이 일어나곤 했다.
11 이전 세대를 기억함이 없으니 장래 세대도 그 후 세대가 기억함이 없으리라
세월이 흐르고 나면 기억되는 것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얼마나 공허한 것이냐고 말하고 있다. 지금 우리 교회도 예배당을 계약해놓고 너무나 좋아하고 있다. 그런데 이것도 세월이 지나고 나면 ‘그것이 무엇인가? 그 일은 그저 작은 일일 뿐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돼 버린다는 것이다. 지금 우리 가운데서는 ‘이래서 가슴이 아프고, 저래서 마음이 아프다’는 일이 있지만 그것도 세월이 지나고 나면 아무 것도 아니다. 우리 세대에 살면서 있었던 많은 일들은 다 잊혀지는 것이다. ‘그 사람들이 이 땅에 존재하기는 했는가? 우리는 그들을 모른다’고 할 정도로 다 없어져버리고 마는 것이다. 그러니 얼마나 공허한가? 그래서 이 전도서를 다 읽고 해석하고 나면 ‘그냥 실컷 울어버릴까? 우리는 왜 이런 공허한 인생을 살아야 하지?’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12 나 전도자는 예루살렘에서 이스라엘 왕이 되어 13 마음을 다하며 지혜를 써서 하늘 아래서 행하는 모든 일을 궁구하며 살핀즉 이는 괴로운 것이니 하나님이 인생들에게 주사 수고하게 하신 것이라
하나님이 주신 지혜로 여러 가지를 살펴보니 인생들이 수고하는 모든 것이 괴롭다는 것이다. 자신이 궁구하고 살피며 ‘인생이 도대체 무엇인가?’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다 괴로운 것이다. 그래서 결국 보니까 하나님이 인생들에게 수고를 주신 것뿐이라는 것이다.
14 내가 해 아래서 행하는 모든 일을 본즉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 15 구부러진 것을 곧게 할 수 없고 이지러진 것을 셀 수 없도다
여기서는 ‘해 아래서 행하는’이라는 말이 많이 나온다. 해 아래서의 모든 일이 바람을 잡는 것 같다고 했다. ‘구부러진 것을 곧게 할 수 없고 이지러진 것을 셀 수 없도다’. 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말이다. 참 허무한 일 중 하나는 정말 고쳐졌으면 좋겠는데 안 고쳐지는 일이다. 예를 들어 어떤 집사님을 볼 때 ‘이 집사님은 어떤 성격을 좀 고치셨으면 좋겠는데…’라고 많은 사람이 너무나 뻔히 알고 있는데 정작 고치지 못한다. 그냥 그렇게 살고 마는 것이다. 그러므로 ‘구부러진 것을 곧게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예전에 우리 어머니가 나이가 드셔서 골다공증이 있으셨는데 어느날 힘이 없어 넘어졌다가 뼈가 부러지셨다. 그러면 그 뼈를 제대로 맞추어야 하는데 그만 굽게 맞춰졌다. 손목이 구부러진 것이다. 병원에 가서 다시 제대로 맞추려면 아프니까 안 하고 계시길래, ‘어머니 이걸 반듯하게 고치셔야죠’하니까 어머님이 하시는 말씀이 ‘살면 얼마나 산다고 그냥 이렇게 살다가 죽으련다’ 하시더니 진짜 그렇게 가셨다. 많은 사람들의 성품이 구부러졌다. 그런데 그런 성격을 죽어도 못 고친다. 많은 사람들이 못된 성격인 줄을 알면서도 그냥 그렇게 살다가 죽는 것이다.
16 내가 마음 가운데 말하여 이르기를 내가 큰 지혜를 많이 얻었으므로 나보다 먼저 예루살렘에 있던 자보다 낫다 하였나니 곧 내 마음이 지혜와 지식을 많이 만나 보았음이로다 17 내가 다시 지혜를 알고자 하며 미친 것과 미련한 것을 알고자 하여 마음을 썼으나 이것도 바람을 잡으려는 것인 줄을 깨달았도다
‘미친 것이 과연 무엇일까?’에 대해서 생각을 많이 했다는 것이다. 또 ‘미련한 것은 도대체 무엇일까? 왜 저 사람들은 이렇게 미련할까?’에 대해서 생각했다는 것이다. 솔로몬은 매우 지혜롭다. 그런데 이 땅에는 미련한 사람들이 있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미련한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연구했다. 하지만 그것도 역시 헛되고 바람을 잡는 것 같더라는 것이다. 무엇을 하려고 그러한 것을 연구하고 생각했던가? 다 공허한 것이라고 결론을 내리고 있다.
18 지혜가 많으면 번뇌도 많으니 지식을 더하는 자는 근심을 더하느니라
지혜가 많은 것도 소용이 없고 번뇌가 있을 뿐이다. 지식이 많아지니까 근심만 많아지는 것이다. 그래서 전도서를 읽어보면 지혜도 있을 필요가 없고 지식도 있을 필요가 없고 수고도 할 필요가 없으며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다는 염세주의적인 생각을 갖게 된다. 그래서 이 전도서가 성경에 포함돼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 말씀을 하나님 안에서 살펴볼 때 이것이 인간적인 실패의 체험에서 나온 것이지만, 이러한 것도 하나님의 말씀 속에 포함돼야 한다. 욥기에도 하나님이 하시지 않은 많은 말들이 들어 있다. 그런데 욥기가 왜 성경에 들어가야 하는가? 사람의 진면목이 그대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없는 사람은 이것밖에 안 된다. 하나님 없이 살면 이렇게 공허한 것이다. 하나님이 없는 지혜는 이렇게 무익한 것이다. 모든 것이 다 헛된 것이다’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다.
이 땅에서 가장 부귀영화를 많이 누리고 지혜를 얻었던 솔로몬 왕은 결국 모든 것을 누려본 후에 좋았는가? 그렇게 좋지 않았다는 것이다. 모든 것이 헛되다는 것이다. 오늘날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이 왜 그렇게 애를 쓰면서 돈을 벌려고 하는가? 잘 살아보려고 그러는 것이다. 왜 그렇게 공부를 많이 하는가? 지혜와 지식을 더 얻어 보려고 하는 것이다. 남들이 칭송하는 명성을 얻어 보려고 하는 것이다. 하지만 솔로몬보다 더 부귀영화를 누린 사람이 어디 있는가? 솔로몬만큼 지혜를 얻은 사람이 어디 있는가? 그처럼 최고의 부귀영화를 누리고 지혜를 얻었던 왕이 인생 말미에 가서 보니까 인간이란 아무것도 아니더라는 것이다. 헛되고 헛되다는 것을 이야기해 준 것이다. 여러분은 인생이 헛되다는 것을 알았는가? 다 살아본 후에 헛되다고 한다면 당신은 전도서의 도움, 성경의 도움을 얻지 못한 사람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전도서를 읽을 때에 어떤 마음을 갖게 되는가? 모든 것을 다 경험을 해 보아야 그것이 헛됨을 아는 것은 아니다. 소위 ‘간접 경험’이라는 것이 있다. 책이란 그런 것이다. 나도 책을 쓰는 사람으로서 사람들이 내 책을 많이 읽기를 바란다. 내 책을 읽을 때 여러분이 유익한 것은 내 견해 속에는 내가 인생을 살면서 실패한 경험이 많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많은 젊은이들이 나의 그런 경험을 통해서 도움을 얻으므로 꼭 그런 실패를 거치지 않아도 그 결과를 알게 하여 똑같은 실패의 길을 가지 않도록 해주려는 것이다. 한 가지 한 가지를 직접 겪으면 큰 피해를 당하고 상처를 많이 당할 일도 이러한 ‘간접 경험’을 통해서 잘 통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언젠가 결혼식에서 주례를 했었는데 내 친구 중에 이혼한 친구 한 명이 주례 설교를 다 듣고 난 후에 ‘내가 결혼 초기에 친구의 이런 설교를 들었다면 나는 이혼하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
전도서의 모든 말씀들은 인생을 살아보니 허무하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솔로몬은 왜 전도서를 기록했는가? 그는 너무나 허무하게 인생을 산 것이다. 온갖 체험을 다 해보고 나서 결국 인생이 허무하다는 것을 알려주고자 한 것이다. 그러므로 전도서를 읽을 때 우리는 ‘아, 부귀를 누려도 인생의 마지막에 헛되다고 하는구나, 영화를 누려도 헛되다고 하는구나’라는 것을 깊이 느끼게 된다. 이를 먼저 깨달은 선각자가 말해 줄 때에 ‘아, 인생이란 별것이 아니구나, 다 지나가는 바람을 잡는 것과 같구나’ 하고 깨닫게 되는 것이다. 이것을 젊었을 때부터 안다면 그런 헛된 일에 정열을 쏟지 않을 수 있게 된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만족을 주는 것은 무엇인가? 전도서의 다음 책은 아가서이다. 전도서는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고 사랑하는 길, 그것만이 우리에게 만족과 기쁨을 준다는 것을 안내해 주는 책인 것이다.
여러분은 전도서 1장을 통해 인생 자체는 허무한 것이기에 주님이 없는 인생은 헛된 것이며, 주님 없이 수고하는 모든 수고는 다 바람을 잡는 것과 같다는 것을 이해하기 바란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참 우리의 만족으로 주어지신 분인 것을 알고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을 가까이 하고 주님과 함께 사는 여러분이 되기 바란다.
*3솔로몬이 말하는 ‘웃음’
전도서 1장에서 솔로몬은 인생의 의미를 어떻게 찾고자 했는가? 지혜를 궁구함으로서다. 그가 지혜를 얻었는가? 많이 얻었다.
전 1:16 내가 마음 가운데 말하여 이르기를 내가 큰 지혜를 많이 얻었으므로 나보다 먼저 예루살렘에 있던 자보다 낫다 하였나니 곧 내 마음이 지혜와 지식을 많이 만나 보았음이로다
지혜와 지식에 대해서 자신은 만족할 만큼 얻었다고 말했다.
17 내가 다시 지혜를 알고자 하며 미친 것과 미련한 것을 알고자 하여 마음을 썼으나 이것도 바람을 잡으려는 것인 줄을 깨달았도다
그런데 18절을 보면 “지혜가 많으면 번뇌도 많으니 지식을 더하는 자는 근심을 더하느니라”고 했다.
1장에서 솔로몬은 지혜와 지식을 많이 얻었지만 그것으로는 인생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는 것을 말했다. 지적인 추구로 인해 인생의 성취감을 얻지 못한 솔로몬은 이제 2장에서 쾌락으로 나아가고 있다.
2:1 나는 내 마음에 이르기를 자, 내가 시험적으로 너를 즐겁게 하리니 너는 낙을 누리라 하였으나 본즉 이것도 헛되도다
지혜와 지식으로는 인생의 만족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솔로몬은 1장 마지막에 이렇게 말한다.
1:18 지혜가 많으면 번뇌도 많으니 지식을 더하는 자는 근심을 더하느니라
아무것도 모르고 무식하면 근심할 일도 별로 없는데, 너무 많이 알다보니 근심이 많아졌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혜와 지식을 많이 얻은들 그것이 자신의 인생에 그렇게 큰 의미가 없이 헛되다는 것이 1장이다.
그래서 솔로몬은 쾌락으로 나아갔다. ‘즐겁게 살아보자’고 한 것이다. 그래서 자기의 혼(마음)에게 ‘너를 즐겁게 해줄 테니 너는 낙을 한 번 누려보라, 즐겁게 살아보라’ 하면서 쾌락 쪽으로 눈을 돌렸다. 그런데 결론은 이것도 헛되다는 것이다.
2 내가 웃음을 논하여 이르기를 미친 것이라 하였고 희락을 논하여 이르기를 저가 무엇을 하는가 하였노라
낙을 누린다는 것은 무엇을 얻기 위한 것인가? 웃음, 희락이다. 인생의 기쁨, 웃을 일을 많이 만들어 내는 것, 즐거움을 많이 창조해 내자고 하는 것이 쾌락이다. 그래서 솔로몬은 쾌락을 추구해보았는데 마음껏 쾌락을 누려보니 그것도 헛되더라는 것이다.
“내가 웃음을 논하여 이르기를 미친 것이라 하였고”. 솔로몬은 웃음에 대하여 논하기를 ‘미친 짓’이라고 했다. 많이 웃으며 사는 인생이 가치있고 행복하겠는가? 전도자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요즘에도 많이 웃으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데 그렇게 많이 웃는 것으로 인생이 즐겁게 되는가? 솔로몬의 경험에 의하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 많이 웃어봤자 별 것 아니라는 결론에 이르게 됐다.
빌리 그래함이라는 목사님이 <행복의 비결>이라는 책을 썼는데 그 내용 중에 이런 것이 있다. 어떤 사람이 심한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었다. 우울증 환자는 보통 저녁에 증상이 심한데 이 환자는 그 정도가 너무 심했다. 아침에 잠에서 깨기만 하면 마음이 산란하고 우울하고 날이 갈수록 더 악화돼 더는 이렇게 살 수 없을 것 같아서 병원을 찾았다.
그 환자를 진찰한 정신과 의사는 아무리 상담해도 길이 없어 그 지방의 한 극장에서 공연하는 쇼를 추천해 줬다. 그 쇼의 주인공이 이태리 사람인데 너무나 재미있어서 밤마다 관객들을 요절복통하게 만든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우울한 사람에게 즐거움을 주는 그런 쇼를 가서 볼 것을 추천해 줬다. 그렇게 한바탕 웃고 나면 당신의 우울한 고통을 감소하는데 효과가 있을 것이라고 말해줬다. 그러자 그 말을 들은 환자는 얼굴이 일그러지면서 중얼거리기를 ‘내가 바로 그 이태리 광대입니다’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 우울증 환자인 광대는 남을 웃길 수는 있었지만 정작 자신은 너무나 고통스러운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 사람에게 ‘웃는 것이 좋은 것인가?’ 라고 묻는다면 아마 솔로몬처럼 ‘웃는 것은 미친 짓’이라고 말할 것이다. 인생의 웃음도 별 의미가 없다는 것이 솔로몬의 말이다. 오늘날 우리 나라에도 인기 연예인들의 자살이 많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그들은 많은 사람들에게 즐거움과 쾌락을 선물하였지만 정작 자기 자신은 그 정상의 자리에 있을 때부터 심각한 우울증을 겪는 자들이 많다고 한다. 이는 참으로 주님이 없는 웃음과 쾌락이 헛됨을 증명한다.
“희락을 논하여 이르기를 저가 무엇을 하는가 하였노라”. 희락은 무엇인가? 의미가 없는 것이다. 그러한 희락은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다는 것이다. 즐거움이 이루는 것이 있는가? 아무것도 없다. 즐거움이 무언가 의미있는 가치를 생산해내는 것이 아닐진대 사람은 깊은 속에서 그 웃음과 즐거움이 헛되다고 말하게 되는 것이다. 진실로 사람은 하나님을 얻고 누릴 때만이 참 즐거움이 있게 되는 존재이다. 그 외의 즐거움은 다 헛되다는 말이다.
3 내 마음이 궁구하기를 내가 어떻게 하여야 내 마음에 지혜로 다스림을 받으면서 술로 내 육신을 즐겁게 할까 또 어떻게 하여야 어리석음을 취하여서 천하 인생의 종신토록 생활함에 어떤 것이 쾌락인지 알까 하여
“내 마음이 궁구하기를 내가 어떻게 하여야 내 마음에 지혜로 다스림을 받으면서 술로 내 육신을 즐겁게 할까”. 그 다음에 솔로몬이 생각한 것은 좋은 술로 마음을 즐겁게 해보려고 한 것이다. 하나님이 없는 인생에서 가장 육신을 즐겁게 할 수 있는 것은 술 외에 없다고 본 것이다. 그렇지만 술로 육신을 즐겁게 하려다 자칫 인생을 망치는 수가 있다. 잘못하면 술에 인 박이거나 중독될 수 있기 때문에 그러한 술의 다스림과 제재를 받지 않는 비결을 배우지 않으면 안 된다. 솔로몬은 그 적절한 한도 내에서 좋은 술을 마시면서 쾌락을 추구해보고자 했던 것이다. 솔로몬 왕은 즐거운 것을 추구하는 데 있어서 웃음에서 술로 나아갔다. 미주가(美酒家), 즉 많이 마셔도 뒤끝이 깨끗하고 산뜻하고 좋은 술을 마셔가면서 기분 좋게 쾌락을 추구해보았다는 것이다.
“또 어떻게 하여야 어리석음을 취하여서 천하 인생의 종신토록 생활함에 어떤 것이 쾌락인지 알까 하여”. 솔로몬은 지혜로운 방식으로 술을 마셔보았지만 이제는 꼭 지혜로운 방식만이 쾌락을 주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여 약간 어리석은 방식 비슷한 것을 취하여 쾌락을 추구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래서 어리석음을 취해서 천하 인생의 종신토록 생활함에 어떤 것이 쾌락일까 생각하다 보니 4절로 넘어간다.
4 나의 사업을 크게 하였노라 내가 나를 위하여 집들을 지으며 포도원을 심으며 5 여러 동산과 과원을 만들고 그 가운데 각종 과목을 심었으며 6 수목을 기르는 삼림에 물주기 위하여 못을 팠으며
“나의 사업을 크게 하였노라”. 술 같은 것은 일시적인 것이므로 오랫동안 즐겁게 살려면 사업 같은 일을 벌여서 즐겁게 하려고 했던 것이다.
“내가 나를 위하여 집들을 지으며”. 멋있는 집을 잘 지어서 살면 즐겁지 않겠는가?
“포도원을 심으며 여러 동산과 과원을 만들고 그 가운데 각종 과목을 심었으며”. 이러한 일을 좋아하는 부녀들이 많이 있다. 닭장 같은 아파트에서 살지 않고 단독주택에 살면서 정원도 만들고 화원도 만들고 각종 과목도 심는 것이다.
“수목을 기르는 삼림에 물주기 위하여 못을 팠으며” 정원도 가꾸고 수목을 기르는 삼림에 물도 주고, 못을 파서 잉어나 물고기도 기르면서 살면 상당히 큰 즐거움과 쾌락이 있을 것이 아닌가? 솔로몬은 돈이 많은 왕이니 못할 일이 있었겠는가? 그가 이렇게 다 해 보았다는 것이다.
7 노비는 사기도 하였고 집에서 나게도 하였으며 나보다 먼저 예루살렘에 있던 모든 자보다도 소와 양떼의 소유를 많게 하였으며
그 다음에는 노비다. 여러분은 노예, 종들을 부려본 적이 없을 것이다. 사람이 종들을 두고 섬김을 받아보면 그것이 굉장히 누림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예전에 인도에서 선교를 하던 선교사들이 있었는데, 인도에서는 돈을 조금만 주면 하녀들과 종들을 많이 둘 수 있다. 그러면 그들이 모든 일을 다 알아서 해주는데, 그럴 때 기분이 매우 좋다는 것이다. 내가 어렸을 때는 양반, 상놈이 아직 있을 때였는데, 우리 아버님 같은 분들은 어떤 집을 방문하게 되면 조심스럽게 ‘누구 계십니까?’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문밖에 서서 뒷짐을 지고 서서 ‘이리 오너라’ 하고 큰 소리를 지르셨다.
사람들이 존경받고 섬김을 받다 보면 그 맛도 괜찮다는 것을 알게 된다. 솔로몬이 노비를 사 보기도 하고 데려다가 섬기게 해 보니까 종종 말썽을 부리는 경우도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아예 노비를 집에서 나도록 한 것이다. 출생할 때부터 아예 노예가 되도록 해서 그 섬김을 받았던 것이다. 그러한 노비들은 매우 충성스럽고 문제를 일으키지 않고 자신의 마음을 기쁘게 했다.
“나보다 먼저 예루살렘에 있던 모든 자보다도 소와 양떼의 소유를 많게 하였으며”. 그리고 소떼와 양떼의 소유를 많게 하였다. 당시에는 이러한 것이 부(富)의 표시였다. 소떼가 많고 양떼가 많은 것이 부의 축적에 대한 바로미터였던 것이다. 오늘날로 말하자면 은행 잔고가 수백억, 수천억이 되는 사람이 은행에 가면 지점장이 달려나와 마중 나오는 격이다. 그런데 그때는 양떼와 소떼가 부의 표시였다. 열지어 서 있는 붉은 소들과 양들로 인해서 든든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솔로몬은 이렇게 자신의 소유를 많게 했다.
8 은금과 왕들의 보배와 여러 도의 보배를 쌓고 또 노래하는 남녀와 인생들의 기뻐하는 처와 첩들을 많이 두었노라
“은금과 왕들의 보배와 여러 도의 보배를 쌓고”. 여러 나라 왕들로부터 오는 보물들, 금은 보화를 가져다가 진열장 같은 곳에 진열해 놓았다. 각 지방의 특산물과 보물들을 다 가져다 놓았다.
“노래하는 남녀와 인생들의 기뻐하는 처와 첩들을 많이 두었노라”. 노래 잘하는 사람을 다 뽑아서 오늘은 부드러운 불란서 샹송, 내일은 멋있는 이태리 칸초네를 부르도록 한 것이다. 좋은 노래를 들으면 귀에 쏙 들어온다. 또 아름다운 여자라는 여자는 다 데려다가 처첩을 삼았는데, 부인이 700명이고 첩이 300명으로 도합 1000명이었다. 캄보디아에 갔더니 시아누크 전 국왕은 한 도에 시찰을 가면 가장 아름다운 여인 한 명을 부인으로 데려온다고 했다. 그는 지금 시대에도 그렇게 많은 후궁들을 거느리고 있었다. 하지만 솔로몬은 1000명이나 되는 처첩을 거느렸으니 그런 왕들과도 비교할 수가 없다.
*4어디까지가 헛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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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내가 이같이 창성하여 나보다 먼저 예루살렘에 있던 모든 자보다 지나고 내 지혜도 내게 여전하여
“나보다 먼저 예루살렘에 있던 모든 자보다 지나고”. 솔로몬은 지나간 모든 왕들보다 훨씬 뛰어난 명성을 가진 왕이 됐다. “내 지혜도 내게 여전하여”. 또한 솔로몬은 지혜의 왕이었다.
10 무엇이든지 내 마음이 즐거워하는 것을 내가 막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나의 모든 수고를 내 마음이 기뻐하였음이라 이것이 나의 모든 수고로 말미암아 얻은 분복이로다
“무엇이든지 내 마음이 즐거워하는 것을 내가 막지 아니하였으니”. 좋아하는 일은 다 한 것이다. 예를 들면 ‘오늘은 어디를 가야겠으니 캐딜락을 가져와라, 그거 타고 가야겠다. 에쿠스를 가져와라, 이번에는 벤츠를 가져와 봐라, 아니다. BMW가 낫겠다’ 등 자기가 원하는 것은 다 하는 것이다. 여러분이 좋아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이 무엇이든 솔로몬 왕은 자기 눈이 원하는 모든 것을 막지 않았다고 했다. 어떤 삶을 살고 싶든지 어떤 사람과 살아보고 싶든지 자신이 원하는 것을 다 했다는 말이다.
“이는 나의 모든 수고를 내 마음이 기뻐하였음이라”. 그러나 이렇게 하기 위해 솔로몬은 그래도 수고를 했다고 한다. 노력을 해서 그렇게 누릴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나의 모든 수고로 말미암아 얻은 분복이로다”. 그러므로 솔로몬은 왕의 지위를 이용하여 권력으로 불로소득한 것이 아니라 자기도 무엇인가 노력을 해서 얻었음을 말하고 있다.
11 그 후에 본즉 내 손으로 한 모든 일과 수고한 모든 수고가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며 해 아래서 무익한 것이로다
그런데 내 손으로 한 모든 일과 수고한 모든 수고가 다 헛되다고 했다. 이렇게 수고한 사람이 다 헛되다고 말을 하면 정말 헛된 것이다. 1장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전도서는 솔로몬이라는 사람이 한 말이다. 하나님이 하신 말씀이 아니다. 솔로몬이 인생을 경험하고 그 인생에서 느낀 허무함을 탄식하며 노래한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 속에 들어 있는 이유는 이 책의 이름인 ‘전도서’가 설명해 준다. 하나님은 인간이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영화와 부귀와 지혜를 누린 사람 하나를 들어서 “너 그 맛이 어떤지 한 번 이야기해 보아라, 다 해보니까 어떤지 말해보아라” 하신 것이다. 그래서 솔로몬이 그 모든 것을 다 이야기한 것이다. 그것을 통해 사람이 무엇을 하든지 해 아래서 한 일은 다 공허한 것이고 하나님만이 참이고 의미가 있다는 것을 알게 해주려고 기록된 성경이 전도서라는 말이다.
이것은 우리에게 무엇을 주는가? 우리가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한 지혜를 주는 것이다. “아, 나의 인생이 결국은 다 헛된 것이란 말인가” 하고 말이다. 아직도 그것들(세상의 쾌락, 명예, 권력, 부귀 등)이 대단한 줄로 알고 쫓아다니는 사람들은 미련한 사람들이다. 그래서 이러한 말씀을 통해서 지혜를 얻으라는 것이다. 성경은 우리에게 구원에 이르게 하는 지혜를 주는 책이다. 꼭 솔로몬처럼 직접 겪어보아야 아는 것이 아니다(사실 많은 사람들이 솔로몬만큼 겪지도 못한다). 솔로몬이 1000가지를 누렸다면 그 중의 0.1퍼센트 정도를 누려보려고 애쓰다가 “아이고, 헛되구나” 하면서 인생을 마감하는 것이다. 그것이 어리석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이러한 말씀을 주셔서 겪어보지 않아도 모든 것이 헛됨을 깨닫도록 하신 것이다. 솔로몬은 누구에게 부담이 많은가? ‘젊은이들’이요, ‘아들’이다. 잠언에도 아들에게 하는 말이 많다. “아들아, 내가 인생을 살아보니까 다 헛된 것이다. 너는 그런 것을 탐닉하지 말아라. 아무것도 아니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다. 그러면 “아버지, 알겠습니다. 절대로 그렇게 하지 않겠습니다”라고 해야 지혜로운 아들인데 “아닙니다. 나도 한번 아버지처럼 다 해봐야겠습니다” 하는 사람은 어리석은 아들이다. 결론은 똑같기 때문이다.
“그 후에 본즉 내 손으로 한 모든 일과 수고한 모든 수고가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며 해 아래서 무익한 것이로다”.
12 내가 돌이켜 지혜와 망령됨과 어리석음을 보았나니 왕의 뒤에 오는 자는 무슨 일을 행할꼬 행한지 오랜 일일 뿐이리라 13 내가 보건대 지혜가 우매보다 뛰어남이 빛이 어두움보다 뛰어남 같도다 14 지혜자는 눈이 밝고 우매자는 어두움에 다니거니와 이들의 당하는 일이 일반인 줄을 내가 깨닫고 15 심중에 이르기를 우매자의 당한 것을 나도 당하리니 내가 어찌하여 지혜가 더하였던고 이에 내가 심중에 이르기를 이것도 헛되도다
1장에서도 이미 이야기한 것처럼 지혜를 많이 얻는 것도 헛되다고 한다. 지혜가 우매한 것보다 나은 것은 빛이 어두움보다 나은 것과 같다. 그러므로 지혜가 있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어떤 일을 하기 전에 일을 하는 과정과 결과를 미리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어리석은 사람은 그 모든 것을 모르면서 무조건 될 것이라고 생각해서 열심히 하는 사람이다.
내가 예전에 한 단체를 떠날 때 ‘여기에서는 아무리 일해도 소득이 없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그들 가운데 하나님의 생명이 자라지 않기 때문이다. 그곳 사람들은 진리에 대해 지식으로만 알기 원하지 결코 순종하려 들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미 관념과 사고가 한쪽으로 강하게 굳어져 있었다. 나는 그것을 알고 더 이상 그곳에서 사역을 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하루 이틀 생각한 것이 아니라 몇년을 생각한 후에 새로 시작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런데 내가 나온 그때부터 거기서 사역을 시작해보려고 열심을 내는 사람들이 있는 것을 보았다.
나는 젊을 때 직장에서 어떤 회사가 부도가 나는 것을 봤다. 큰 유통회사였다. 그런데 지혜로운 어떤 회사의 사장님은 벌써 부도난 회사의 정보를 입수하고 일찍 그 사장을 접촉해 자기 물건을 다 빼고 돈 받을 것도 다 챙겨놓고, 내가 일하던 회사에 와서 한 잠을 자고 나가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그 사람이 말하기를 그 부도난 회사에서 돈을 다 챙겨서 나오는데 자기 한 경쟁사는 오히려 물건을 그 망한 유통회사에 납품하려고 한 차를 싣고 가더라는 것이었다. 이처럼 지혜가 있는 사람이 있고 어리석은 사람이 있다. 그래서 나는 속으로 ‘사람이 참 여러 가지다’라고 생각했다.
지혜가 있다는 것은 일의 결국을 안다는 이야기다. 지혜로운 사람은 무조건 어떤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과정과 결국을 알면서 일을 한다. 그런데 우매하다는 것은 그쪽으로 가면 꽉 막힌 곳이고 출구가 없는데도 그리로 차를 몰고 가는 것을 말한다.
“심중에 이르기를 우매자의 당한 것을 나도 당하리니 내가 어찌하여 지혜가 더하였던고 이에 내가 심중에 이르기를 이것도 헛되도다(15절)”. 그런데 솔로몬은 여기서 지혜있는 사람도 나중에 가서는 우매자가 당한 것과 똑같은 일을 당하니 지혜가 있는 것도 별것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다. 나중에 세월이 오래 지나고 나서 보니 그때 지혜롭게 행한 회사도 망하고 그 어리석게 행한 회사도 망했다. 오랜 후에 보니 그거나 저거나 다 마찬가지가 되더라는 것이다.
16 지혜자나 우매자나 영원토록 기억함을 얻지 못하나니 후일에는 다 잊어버린 지 오랠 것임이라 오호라 지혜자의 죽음이 우매자의 죽음과 일반이로다
또 솔로몬이 말하기를 인생을 지혜롭게 살았지만 결국은 다 죽는다는 것이다. 죽은 다음에는 다 잊어버리더라는 것이다. 살아있을 때는 사람들이 이름도 기억해 주고 의미있게 느껴지지만, 그가 죽고 나서는 그에 대한 말도 없어지고 ‘그런 사람이 과연 존재했었는가’ 할 정도로 다 잊어버린다. 지혜롭게 산 것이나 어리석게 산 것이나 별로 차이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솔로몬은 ‘지혜자의 죽음이 우매자의 죽음과 일반’이라고 이야기한다.
17 이러므로 내가 사는 것을 한하였노니 이는 해 아래서 하는 일이 내게 괴로움이요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임이로다
“내가 사는 것을 한하였노니”는 영어로는 사는 것을 미워했다(I hated life)는 뜻이다(So I hated life, because the work that is done under the sun was grievous to me).
“이는 해 아래서 하는 일이 내게 괴로움이요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임이로다”. 그래서 이 전도자는 사는 것이 한탄스럽다고 했다. 해 아래서 하는 모든 일이 괴로움 뿐이고 헛되고 바람잡는 것 뿐이다. 하나님이 없는 인생은 무엇을 하든지 헛되고 괴로움 뿐이라는 말이다. 이것은 체험으로 말한 것이니 믿을만 하다. 하나님은 이러한 헛된 인생에 대해서 그분이 직접 영감을 내리시어 말씀하시지 않고 솔로몬 같은 지혜와 부귀의 왕을 들어서 체험케 한 후에 간증식으로 말하게 한 것이다. 이것이 성경 중 하나가 되게 하셨다. 하나님이 직접 ‘인생은 허무한 것이다. 지식도 쾌락도 부귀도 다 헛된 것이니 그런 줄 알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솔로몬 같은 사람을 들어서 그렇게 말하게 하신 것이 매우 재미있다. 우리는 하나님이 사람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이런 성경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하나님은 이러한 전도자를 사용하시어 사람들로 인생의 결국과 허무를 알게 하도록 도우신 것이다
*5어느 은퇴한 목사의 회한
18 내가 해 아래서 나의 수고한 모든 수고를 한하였노니 이는 내 뒤를 이을 자에게 끼치게 됨이라
“내가 해 아래서 나의 수고한 모든 수고를 한하였노니”. 이 표현 역시 미워했다(hate)는 뜻이다. 지혜로운 사람이나 어리석은 사람이나 차이가 없는 것은 첫째로는 다 죽으며 나중에는 ‘그런 사람이 있었는가?’ 하고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잊혀진다는 것이다. 아무 차이가 없다는 말이다. 둘째는 그렇게 일생토록 수고한 것이 다 남의 것이 되더라는 것이다.
“이는 내 뒤를 이을 자에게 끼치게 됨이라”. 다 물려주어야 한다. 나는 대단히 큰 교회를 이룩한 목사님이 은퇴하는 광경을 보았다. 물려받는 사람은 ‘내가 어떻게 이렇게 엄청난 것을 물려받게 되었는가?’ 하는 태도가 역력했다. 반면에 물려주는 사람은 ‘홀가분하다’는 태도였다. 그분이 만일 그것을 이루기 위해 수고도 하지 않은 사람에게 모든 것을 물려주고 떠날 것을 미리 실감나게 알았다면 그렇게 열을 내며 일을 하였을까? 아마도 그렇게까지 하지 않은 부분들이 있었을 것이다.
19 그 사람이 지혜자일지, 우매자일지야 누가 알랴마는 내가 해 아래서 내 지혜를 나타내어 수고한 모든 결과를 저가 다 관리하리니 이것도 헛되도다
솔로몬이 지혜롭게 관리해서 모아 놓은 많은 재물과 모든 것을 엉뚱한 사람에게 다 주게 되니 이것이 완전히 허무하더라는 것이다. 결국 남이 다 관리하게 되기 때문이다.
20 이러므로 내가 해 아래서 수고한 모든 수고에 대하여 도리어 마음으로 실망케 하였도다
그러므로 나중에 가서는 실망만 생기는 것이다. 다 남의 것이 되어버리는데 그렇게 열심히 가꾸어놓고 키워놓고 만들어놓아서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것이다.
21 어떤 사람은 그 지혜와 지식과 재주를 써서 수고하였어도 그 얻은 것을 수고하지 아니한 자에게 업으로 끼치리니 이것도 헛된 것이라 큰 해로다
매우 큰 교회를 다른 사람에게 물려준 한 목사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자. 엄청나게 수고해서 크게 이뤄놓은 교회를 ‘어떻게 내가 이 엄청난 것을 이어받게 되었나? 이것이 어떻게 된 일인가?’ 라면서 어리둥절해하는 사람에게 주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헛되다는 것이다. 누가 헛되다고 하는가? 나중에 가서는 그 일을 이룩한 사람이 자신의 모든 일이 헛되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오늘이라도 늦지 않으니 이런 말씀을 듣고 ‘아, 헛된 것이구나, 이런 이야기가 다 성경에 있었네, 그럴줄 알았으면 뭘하려고 그렇게 열을 내며 일을 했을까’ 하고 깨달으면 좋은 것이다. 여러분은 어떤가? 이런 말씀을 젊은 시절에 일찍 들었다면 앞으로 그런 헛된 일을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그런 헛된 꿈을 꿀 필요가 없다. 주님이 인도하시는 대로 순종하면서, 무엇이든지 욕심으로 하지 말고 작은 발걸음 한 걸음씩 순종하며 가면 된다. 지나고 나면 다 헛되기 때문이다.
전도서는 참으로 하나님께서 피조물인 당신의 자녀들을 사랑하셔서, 인생을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지혜를 알려주는 책이다. 일찍 들으면 들을수록 여러분은 인생을 세이브하게 된다. 반면에 성경을 멸시하는 사람마다 크게 후회를 하게 될 것이다. 성경의 내용은 다 똑같은 말만 반복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전도서 1장을 들은 사람은 2장도 들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나중에 후회하게 된다. 이러한 말씀을 매우 귀하게 여길 줄 알아야 한다. 대가를 지불해서 듣는 사람은 축복을 받을 것이다. 이러한 말씀에는 매우 값진 교훈, 인생의 문제의 해결책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22 사람이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와 마음에 애쓰는 것으로 소득이 무엇이랴 23 일평생에 근심하며 수고하는 것이 슬픔뿐이라 그 마음이 밤에도 쉬지 못하나니 이것도 헛되도다
일평생 근심하고 수고해봤자 무슨 소용이 있는가? 슬픔 뿐이며 그 마음이 밤에도 쉬지 못한다.
24 사람이 먹고 마시며 수고하는 가운데서 심령으로 낙을 누리게 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나니 내가 이것도 본즉 하나님의 손에서 나는 것이로다 25 먹고 즐거워하는 일에 누가 나보다 승하랴
“먹고 즐거워하는 일에 누가 나보다 승하랴”.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는 일에 누가 솔로몬보다 낫겠는가? 누가 솔로몬보다 즐거운 인생을 살겠는가? 그런데 솔로몬이 하는 말을 들어보자. 사람이 먹고 마시며 수고하는 가운데서 심령으로 낙을 누리게 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는데, 이것도 본즉 하나님의 손에서 나는 것이라고 했다. 하나님이 주셔야 우리가 기쁨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만이 참 기쁨이다.
결국 인생이 누릴 수 있는 기쁨과 누림은 매우 단순하고 작은 일 가운데 있다. ‘주님, 이렇게 먹을 수 있으니 감사합니다. 주님, 내가 이렇게 걸을 수 있으니 감사합니다.’ 이렇게 작은 것에 감사할 수 있는 마음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실 때만 느낄 수 있다. 이렇게 마음이 낮아진 곳, 비워진 곳에서 하나님은 우리의 삶의 누림이 되시고 기쁨이 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할 때면 언제든지, 얼마든지 기뻐하고 낙을 누릴 수 있다. 이것을 솔로몬이 깨달은 것이다.
26 하나님이 그 기뻐하시는 자에게는 지혜와 지식과 희락을 주시나 죄인에게는 노고를 주시고 저로 모아 쌓게 하사 하나님을 기뻐하는 자에게 주게 하시나니 이것도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사람, 즉 그 마음이 오직 하나님을 향하고 하나님 한 분만을 사랑하고 섬기고 하나님께만 영광 돌리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지혜와 지식과 희락을 주신다는 이야기다. 참으로 그렇다. 그러나 죄인에게는 노고를 주시고 저로 모아서 쌓게 하셔서 하나님이 기뻐하는 자에게 주게 하신다. 나쁜 사람은 수고만 잔뜩하지만 결국 하나님은 그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엉뚱한 사람에게 주게 하신다는 말씀이다.
*6천하에 범사가 기한이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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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전도서의 말씀들은 우리가 인생을 사는데 지혜를 준다. 이 말씀을 모르면 우리는 인생에서 필요한 지혜를 얻지 못한다. 인생을 다 산 뒤에 죽음이 가까웠을 때 이 같은 지혜서를 공부한다면 그것은 너무 늦은 것이다. 오늘 여러분이 이런 말씀을 읽고 인생을 가치 있게 살 때 여러분의 인생은 복된 인생이 될 것이다.
전도서 3장을 보기에 앞서 우선 시편 90편 모세의 기도를 살펴보자. 10절, “우리의 년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년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12절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의 마음을 얻게 하소서”. 14절, “아침에 주의 인자로 우리를 만족케 하사 우리 평생에 즐겁고 기쁘게 하소서”. 즐겁고 기쁘게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우리 인생이 즐겁고 기쁘려면 주님의 지혜의 말씀을 깨달을 수 있어야 한다. 지혜의 말씀은 이렇게 헛된 인생 가운데 모든 것이 때가 있음을 아는 것이다. 때를 모르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이다. 자기 때를 모르고 나서는 사람은 망하거나 죽음을 당하게 된다고 한다. 지혜와 때를 아는 것은 매우 관계가 있다. 욕심으로 눈이 가려지면 때를 분별하지 못하고 나서다가 낭패를 당하게 된다. 이러한 말씀을 배경으로 전도서 3장을 살펴보자.
3:1 천하에 범사가 기한이 있고 모든 목적이 이룰 때가 있나니
범사에 기한이 있고 목적이 이루어질 때가 있다고 말하고 있다. 범사에 때가 있다는 것을 아는 것만으로도 지혜를 얻게 되는 것이다. 어리석은 사람들은 때라는 것이 있는 줄을 모르고 나서다가 죽는 것이다.
2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
사람은 날 때가 있고, 또 죽을 때가 있다. 곡식은 심을 때가 있고 또 심은 것을 뽑을 때도 있다. 이러한 일은 계속 반복적으로 일어나는 현상이다.
3 죽일 때가 있고 치료시킬 때가 있으며 헐 때가 있고 세울 때가 있으며
누가 죽인다는 말인가? 이것은 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사람 편에서 말하는 것이다. 사람들로 하여금 치명상을 입을 정도로 어려운 상황 가운데 집어넣으실 때도 있고 커다란 죽음의 질병을 허락하실 때도 있다. 그럴 때 사람 편에서는 죽을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나는 이번에 죽을 것이다’라고 생각하지만 하나님은 긍휼히 여기셔서 치료하실 때가 있다. 지혜란 무엇인가? 어려운 상황에서 그러한 힘든 상황만 계속될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라는 말이다. 반드시 해결될 날이 있다는 말이다. 집을 헐 때가 있지만 세울 때도 있다. 그러나 어리석은 사람의 마음은 어떠한가? 병이 들면 죽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집이 헐리면 이제 끝장이라고 생각하고 낙담한다. 사업이 망한 사람도 마찬가지다. 망하면 끝이라고 보지만 다시 일어날 수가 얼마든지 있다. 헐렸지만 다시 세워질 때가 오는 것이다.
4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슬퍼할 때가 있고 춤출 때가 있으며
울 때가 있지만 웃을 때도 있다. 사람이 살다 보면 슬플 때가 있다. 슬플 때 생각하면 항상 슬플 것 같고 그러면 도저히 살 수 없을 것 같다. 견딜 수 없는 슬픈 일이 생기고 답답하고 우울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지혜자가 가르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슬플 때가 있고 울 때가 있지만 또 웃을 때도 있다는 말이며, 조금 시간이 지나면 다시 웃을 때가 온다는 것이다. 슬퍼할 때는 슬퍼해야 하지만 춤출 때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혜자는 성도들이 어렵고 괴롭더라도 항상 울면서 살 것처럼 낙심하지 말라고 가르친다. 조금 있으면 춤을 출 때가 또 오기 때문이다. 슬프고 울 때는 곧 돌아올 웃을 때, 춤출 때를 생각하면 그렇게까지 낙담하고 슬퍼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 춤을 추는 사람과 웃는 사람은 어떤 교훈을 얻어야 하는가? 슬픈 일도 오고 눈물흘릴 날도 올 것이니 늘 웃을 것처럼 생각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것을 가르쳐주시는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 땅을 살 때 지혜롭게 살라는 것이다.
고린도전서 7장을 보자. “우는 자들은 울지 않는 자 같이 하며 기쁜 자들은 기쁘지 않은 자 같이 하며 매매하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 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은 다 쓰지 못하는 자 같이 하라 이 세상의 형적은 지나감이니라(30-31절)”. 우는 자들은 울지 않는 자 같이 하고 기쁜 자들은 기쁘지 않은 자 같이 하라는 것이다. 계속 변하고 또 변하는 하나님의 섭리를 모르는 사람들은 기쁠 때는 자기의 인생에는 오직 기쁜 일만 있을 것처럼 너무 기뻐한다. 반대로 슬플 때는 자신의 인생에 슬픔밖에 없는 것처럼 슬퍼한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인은 그렇게 사는 것이 아니라고 가르치고 있으며 솔로몬도 그렇게 사는 것이 아니라고 가르쳐주고 있다.
5 돌을 던져 버릴 때가 있고 돌을 거둘 때가 있으며 안을 때가 있고 안는 일을 멀리 할 때가 있으며
“돌을 던져 버릴 때가 있고 돌을 거둘 때가 있으며”. 돌 뿐만 아니라 물건이든 사람이든 일이든 던져버릴 때가 있다. 던져야 할 때는 던져야 하는데 지혜가 없는 사람은 돌을 거둬야 할 때 오히려 던져버린다. 버려야 할 때인데 거두는 사람도 있다.
“안을 때가 있고 안는 일을 멀리 할 때가 있으며”. 어떤 때에 어떤 사람은 안아야 한다. 어떤 경우는 안는 일을 멀리 해야 할 때가 있다. 이것도 다 사실은 지혜에 속한 것이다. 지혜로운 사람은 안아야 할 때 안고 멀리 해야 할 때는 멀리 한다. 이러한 때를 아는 것이 지혜라는 말이다.
6 찾을 때가 있고 잃을 때가 있으며 지킬 때가 있고 버릴 때가 있으며
어떤 때는 반드시 찾아야 할 때가 있다. 또 어떤 때는 아무리 귀하게 보이는 것이라 하더라도 과감하게 잃어버려야 할 때가 있다. 그런 때는 미련없이 잃어버려야 한다. 지킬 때가 있고 버릴 때가 있다. 우리는 양심을 걸고, 또 목숨을 걸고 우리의 믿음과 진리를 지켜야 할 때가 있다. 하지만 버려야 할 때는 또 버려야 한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들을 버리도록 요구받을 때, 우리의 권리를 포기하고 버려야 할 바로 그때 버리지 않으면 어리석은 사람이 되는 것이다.
7 찢을 때가 있고 꿰맬 때가 있으며 잠잠할 때가 있고 말할 때가 있으며
찢어지는 때, 즉 나누어지는 때가 있다. 요즘에 우리 총회가 나누어지는 아픔을 당했다. 그런데 찢어지면 항상 찢어지는가? 그렇지 않다. 꿰맬 때도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경험이 있기 때문에 서로 찢어지는 때 교제를 지혜롭게 했다. 그럴 때 경험이 없는 사람들은 찢어지는 것에만 마음이 상한다. 그러나 지혜의 말씀을 배운 사람들인 우리는 ‘지금은 우리가 이렇게 찢어지지만 언젠가 또 꿰매어질 때가 있겠지요’ 하면서 웃으면서 헤어졌다. 지혜로 훈계를 받은 사람들은 다툼이 적을 수 밖에 없다. 범사에 찢을 때가 있고 꿰맬 때가 있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또 잠잠할 때가 있고 말해야 할 때가 있다. 어떤 때 우리는 말을 하지 않아야 할 때가 있다. 그럴 때 말하게 되면 상황을 악화시키기도 하고 사람들에게 어려움을 야기하기도 한다. 또한 마땅히 말을 해야 할 때는 말을 해야 한다. 이러한 것을 가려서 하는 것이 지혜자의 실행이다. 그러므로 성령이 충만해야만, 늘 성령의 인도를 따라야만 때에 맞게 행할 수 있는 것이다.
8 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으며 전쟁할 때가 있고 평화할 때가 있느니라
“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으며”. 어떤 때에는 마땅히 사랑해야 할 때가 있다. 사실 우리는 누구든지 사랑해야 한다. 하지만 미워해야 할 때도 있다. 주님은 ‘너희 부모나 형제나 자매나 자신까지도 미워하지 아니하면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한다’고 하셨다. 미워해야 할 때는 마땅히 미워해야 한다. 미워해야 할 때 사랑하고, 또 사랑해야 하는데 미워한다면 그것은 다 지혜가 없는 것이다.
“전쟁할 때가 있고 평화할 때가 있느니라”. 전쟁이 일어났다, 하지만 영원히 지속되는 전쟁은 없다. 또 다시 평화가 오게 된다.
*7어느 부자의 고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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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절까지의 말씀은 모두 범사에 때가 있다는 것이다. 때를 알아서 잘 맞춰 행하면 참 좋을텐데, 전도자는 그렇게 때를 잘 맞춰 일을 해도 무슨 이익이 있느냐고 묻는다. 물론 인생의 지혜는 때를 잘 아는 것이고 그렇게 사는 것이 지혜로운 삶이지만, 그렇게 지혜를 다해 때를 알아서 일을 잘해도 무슨 소용이 있냐는 것이다. 그러니 때를 잘 알아서 사는 자도 자랑할 것이 없다는 뜻이다.
10 하나님이 인생들에게 노고를 주사 애쓰게 하신 것을 내가 보았노라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이 정하신 ‘인생의 바퀴’처럼 돌아간다. 웃다가 또 울다가, 기쁘다가 또 슬프다가, 심었다가 또 거두고, 살다가 죽는 일이 계속되는 가운데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노고를 주시고 애쓰게 하신 것을 보았다는 것이다.
11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의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
하나님은 모든 만물을 다 아름답게 지으셨다고 한다. 창세기 1장에 보면 하나님이 만물을 지으실 때마다 좋다고 하셨다. 사실 우리가 모든 일을 대할 때 좋지 않은 것이 없다. 그러나 낳는 일, 죽는 일, 심는 일, 뽑는 일, 우는 일, 웃는 일 등 우리 가운데 일어난 모든 일들이 한 면에서는 인생의 노고이다. 솔로몬은 이 모든 일에 무슨 낙이 있냐고 했다. 그러나 또 한 면에서는 하나님이 모든 일을 아름답게 하셨다고 했다. 우리가 모든 일을 대할 때 그 진상을 보면 아름답지 않은 것이 없다. 깊이있게 모든 일을 살피면 다 아름답고 좋은 것이다.
요즘 우리 총회에 아주 어려운 일이 발생했다. 오늘은 그런 가운데 모여 여러 가지를 매듭지은 날인데, 놀랍게도 나의 느낌은 ‘참 아름답다’였다. 사람이 어떻게 보느냐에 달린 것 같고 또 감상하기에 달린 것 같다. 어떤 눈으로 보는가에 따라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을 아름답게 볼 수 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눈을 가지고 본다면 모든 것이 다 아름다울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눈 이외에 다른 눈을 가지고 보면 아름답지 않을 것이다.
또 사람 속에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이 있다. 이 땅의 모든 것은 헛되다. 태어났지만 또 죽어야 한다. 공허한 일들 뿐이다. 그런데 그 속에서 사람에게는 기묘하게도 영원의 세계를 사모하는 마음이 있다. 사람은 영원한 하나님이 자신의 형상대로 지으셨으므로, 또 영원하신 당신의 생기를 불어넣으셨으므로 그 속에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이 있다.
그렇지만 우리가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이 있을지라도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은 측량할 수 없다.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것이다. 우리가 모든 것을 다 알게 되면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을 것이며 의지하지도 않을 것이다. 일의 시종을 모르기 때문에 항상 하나님을 바라보고 기다리며 믿고 의지하지 않으면 안 된다. 장래 모든 일이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르기 때문이다.
12 사람이 사는 동안에 기뻐하며 선을 행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는 줄을 내가 알았고
이것은 결론적인 이야기다. 모든 일이 돌고 돌아서 헛된 인생을 살지만, 살 동안 기뻐하라는 것이다. 무엇이든지 다 아름답게 보고 기뻐하라고 한다. 기뻐하며 선을 행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다고 한다. 여러분 인생을 가장 가치있게 사는 방법은 무엇인가? 솔로몬이 인생을 결산하면서 내린 결론은 ‘하루 하루를 기쁨으로 사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기쁨을 너무 큰 것에서 찾지 말아야 한다. ‘내가 걸을 수 있어 감사합니다. 호흡할 수 있어 감사합니다. 예배에 참석하고, 기도할 수 있어 감사합니다.’ 이렇게 할 수 있는가? “그것이 뭐가 그렇게 감사합니까? 모두 당연한 것 아닙니까?”라고 물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참 마음이 겸손하고 낮으며 이 세상에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고, 전부 왔다 갈 뿐 덧없고 허무한 것을 안다면 내가 존재하는 그 자체가 감사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 자체로 기뻐할 수 있다. 이것이 진정 겸손하고 낮은 마음이어서 하나님을 가까이 할 수 있는 상태이기에 좋은 것이고 기쁜 것이다.
솔로몬은 사람이 사는 동안에 기뻐하라고 말한다. 사람들은 기쁜 일이 있어야 기쁘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저 기뻐한다. 하나님은 사람이 사는 동안 기뻐하라고 하셨다. 빌립보서에서 사도 바울도 그냥 기뻐하라고 말한다. ‘사랑하는 자들아,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한 번 기뻐하라고 하면 듣고 잊어버릴까봐서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고 하고 있다.
이런 찬송이 있다.
주 예수 은혜 사랑을 우리가 생각할 때
우리 영은 주의 얼굴 맞대고 보기 원해
주는 우리 생명 능력 방패 반석 노래
아무리 생각하여도 우리는 즐거워
사랑의 주를 따르도록 우리를 지키소서
당신의 영광의 형상 뵙는 그 날까지
주는 우리 생명 능력 방패 반석 노래
아무리 생각하여도 우리는 즐거워
우리 인생은 아무리 생각해도 즐겁다. 즐겁지 않으려고 아무리 생각해도 즐겁다는 것이다.
우리가 이 땅에 사는 동안 가장 가치있는 일이 무엇인가? 솔로몬은 선을 행하는 것이라고 답한다. 주위에 있는 사람들을 사랑해 주고 한 마디라도 그들에게 유익한 말을 해주며, 은혜를 끼치는 말을 해주고 도와주고 위로해 주고 힘을 주는 것이다. 이렇게 남을 기쁘게 하고 도와주며 유익을 주는 삶, 즉 선을 행하는 삶이 가장 가치있다는 것을 알았다는 것이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자신만을 위해 사는 것은 가치가 없는 삶이다. 많은 사람들의 유익을 위해 사는 삶이 가치있다. 바울은 진정 그런 삶을 살았다.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나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하라(고전 10:33)’. 이런 삶이 여러분의 인생을 가장 가치있고 보람되며 허비하지 않는 인생을 만들어 줄 것이다.
13 사람마다 먹고 마시는 것과 수고함으로 낙을 누리는 것이 하나님의 선물인 줄을 또한 알았도다
인생을 다 산 사람이 결론적으로 하는 말이다. 솔로몬은 엄청난 부귀영화를 누리고 재물과 쾌락을 누린 사람인데, 인생을 다 산 다음 결국 깨달은 것이 ‘매일 먹고 마시고 조금 수고해서 낙을 누리는 것이 선물이구나’라는 것이다. 우리 인생의 기쁨은 뭔가 대단한 것이 아니고, 아침을 먹을 때 ‘내가 이렇게 먹을 수 있다는 것이 기쁘구나’, 한 잔의 주스를 마시면서 ‘이렇게 마실 수 있다는 것이 감사한 일이구나’ 하는 것이다. 이런 것이 그렇게 기쁘더라는 것이다. 솔로몬은 ‘조금 수고해서 약간의 낙을 누리는 것이 좋은 것이로구나. 하나님이 나에게 주시는 인생의 축복과 누림이구나’ 하는 결론을 내렸다.
이러한 말씀을 듣는 것은 너무나 중요한 일이다. 왜냐하면 우리 인생을 복되게 하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나아진 것이 없어도 우리의 누림과 체험에서 행복해지게 되기 때문이다. 작은 것에서부터 큰 기쁨을 갖게 되는 것이다. 그럴 때 우리는 ‘나는 요새 너무 기뻐요’라고 말하게 된다. 나아진 것이 있는가? 없다. 그대로다. 그런데 자신의 느낌부터 너무 달라진 것이다. 인생이 너무 행복하다고 느끼게 된 것이다. 이런 변화를 수억 원과 비교할 수 있는가?
나는 어떤 돈이 많은 분을 아는데, 그 돈을 벌어 놓고는 그것을 어떻게 지킬까 하면서 너무나 불안해하는 것을 봤다. 본인 입으로 이 돈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 불안하다고 하는 말을 들었다. 나는 그렇게 많은 돈이 없고 그렇게 큰 돈을 벌어본 적도 없어서 그런 불안감을 느껴보지 못했다. 나는 가진 것이 많이 없어 항상 ‘새와 같이 즐겁다’.
그렇게 인생을 기쁘게 살면 되지 많이 갖고 근심하면서 살면 무슨 소용인가? 솔로몬은 그 어떤 사람보다도 더 많은 물질을 갖고 살아봤다. 그런 다음 결론을 내린 것이 삼시 세 끼 밥 먹을 때 ‘이렇게 먹는 것이 감사한 것이구나, 마시는 것이 감사한 것이구나’ 하면 된다는 것이다. 그는 이렇게 결론을 내려 주었다. 여러분도 감사하며 살기를 바란다.
*8사람이 짐승과 다른 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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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은 영원하다. 더할 수도 없고 덜할 수도 없다는 것은 하나님의 일이 완전하다는 뜻이다. 사람이 더하거나 뺄 수 없으며 사람의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이 인간사다.
“하나님이 이같이 행하심은 사람으로 그 앞에서 경외하게 하려 하심인 줄을 내가 알았도다”. 여러분이 아무리 원해도 안 되는 일이 있다. 또 여러분이 아무리 그렇게 되지 않기를 바라지만, 결국 그렇게 되는 일도 있다. 왜 그럴까? 만사는 하나님 손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우리 마음에 ‘왜 일이 이렇게 됐을까요, 그렇게 안 됐으면 좋았을텐데’라고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마음에 달린 일이다. 하나님 뜻대로 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세월이 오래 지난 후에 ‘아, 내 의지와 내 뜻, 내 원함대로는 안 되는구나.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대로 되는구나’ 하는 것을 느끼게 되면서 하나님을 경외하게 된다.
15 이제 있는 것이 옛적에 있었고 장래에 있을 것도 옛적에 있었나니 하나님은 이미 지난 것을 다시 찾으시느니라
“이제 있는 것이 옛적에 있었고 장래에 있을 것도 옛적에 있었나니”. 이 모든 말씀이 경험자들의 전도이며 지혜의 말이다. ‘이 세상에 이런 일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렇게 재수 없고 이렇게 억울하다니…. 세상에 이런 일이 어디 있는가’ 하고 말하지 말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제 있는 것이 옛적에도 있었고 장래에 또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보다 더 억울한 일도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미 지난 것을 다시 찾으시느니라”. 이미 지났지만 하나님이 다시 있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세상에 나만 당하는 억울한 일은 하나도 없다. 또 어떤 사람은 ‘이 세상에 나보다 더 운수좋은 사람은 없다, 복이 터졌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도 마찬가지다. 옛날에도 그런 사람이 있었고 앞으로도 있을 것이다. 나만 있는 일이라야 신기하고 대복이 터진 일인데, 그런 일은 과거부터 많고 흔한 일이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는 의미 있는 일이 없다. 다 옛날에도 있었던 것이고 앞으로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하나님 외에는 대단한 의미를 두고 살지 말라는 뜻이다. 하나님 외에 인생에서 벌어지는 일은 그렇게 의미있는 일이 없음을 알려준다.
16 내가 해 아래서 또 보건대 재판하는 곳에 악이 있고 공의를 행하는 곳에도 악이 있도다
이 세상에서, 이 해 아래에서는 아무리 공정하게 재판을 한다 해도 거기엔 악이 있다. 공의를 행한다는 사람들 속에도 악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나치게 ‘내가 옳다, 너는 틀리다’고 하지 말라는 한다. 공의를 행한다는 당신은 지금 해 아래 있는가, 아니면 천당에 있는가? 해 아래 있다면 당신이 공의를 행한다는 그 속에도 악이 있다. 그러므로 너무 자기가 한 일이 옳다고 자랑하지 말라는 것이다.
나도 나름대로 진리를 따라 행하려는 사람이고 의를 따라 살려는 사람이다. 그럼에도 나는 오늘도 어떤 분과 만나 이렇게 말했다. ‘내가 올바르게 한다고 하지만 어찌 해 아래서 하는 우리 행사 속에 죄가 없겠으며 악이 없겠습니까? 어찌 나는 완전히 옳고 당신은 완전히 틀렸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다 하나님 앞에 회개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나는 그렇게 잘 하지 못했다. 옳지 않았다. 물론 나는 일부러 옳지 않은 것을 행하려는 사람은 아니지만, 해 아래 있는 이상 옳게 하려는 속에도 악이 들어 있는 법이다. 그러므로 지나치게 ‘나는 옳고 당신이 틀리다’고 말하면 안 된다. 이러한 것을 알면 싸움의 50% 이상이 줄어든다.
17 내가 심중에 이르기를 의인과 악인을 하나님이 심판하시리니 이는 모든 목적과 모든 일이 이룰 때가 있음이라 하였으며 18 내가 심중에 이르기를 인생의 일에 대하여 하나님이 저희를 시험하시리니 저희로 자기가 짐승보다 다름이 없는 줄을 깨닫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노라
“내가 심중에 이르기를 의인과 악인을 하나님이 심판하시리니”. 하나님은 의인과 악인을 심판하신다. 결국 사람이 옳다 그르다 심판하는 것은 별로 의미가 없다. 하나님이 심판하실 때에서야 공의의 심판이 온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4장에서는 아무도 판단하지 말라고 했다. 주의 날, 주님이 심판하실 때 각 사람에게 칭찬이 있을 것이라 했다(고전 4:5). 주님이 판단하시는 것만이 정확하다. 사람의 심판은 정확하지 않다. 전도서 마지막 장 마지막 절은 심판에 대해 말하며 끝내고 있다.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간에 심판하시리라(전 12:14)”. 세상의 모든 은밀한 것들, 은밀히 행한 것들이 주님 오실 때에는 다 심판받을 것이다.
“내가 심중에 이르기를 인생의 일에 대하여 하나님이 저희를 시험하시리니”. 하나님은 시험하시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왜 인생에게 많은 시험을 주시는가? “저희로 자기가 짐승보다 다름이 없는 줄을 깨닫게 하려 하심이라”. 인생이 아무것도 아니며 짐승보다 나을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다. ‘동물의 왕국’이라는 프로그램을 보면 어떤 경우에는 차라리 동물들이 인간보다 단순하고 깨끗하다. 인간들의 세상이 훨씬 더 골치아프다. 짐승들은 약육강식의 세계이지만 새끼를 낳고 먹여 살리는 모습을 보면 자식을 낳고도 뻔뻔하게 이혼하고 도망가는 사람들보다 1백 배 낫다. 물론 이 인생은 거듭나지 않은 옛 창조 안의 인생을 가리킨다. 그리스도 안의 새 창조 안에서는 이러한 일이 없다. 그 내용이 그리스도이기 때문이다(고전 1:30).
결국은 하나님이 인간을 경성케 하려고 시험을 하시고 3장에 나오는 이러한 많은 일을 주신다는 말씀이다. 낳고 죽고, 심고 뽑고, 죽이고 치료하고, 헐고 세우고, 울고 웃는 모든 시험을 왜 주시는가? 모두 다 사람으로 하여금 ‘우리가 짐승보다 나을 것이 없구나. 조금만 좋으면 좋아하고, 조금만 싫으면 잡아먹으려고 대드니 아, 짐승보다 나을 것이 없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다. 이런 인생으로는 희망이 없다는 말이다.
19 인생에게 임하는 일이 짐승에게도 임하나니 이 둘에게 임하는 일이 일반이라 다 동일한 호흡이 있어서 이의 죽음 같이 저도 죽으니 사람이 짐승보다 뛰어남이 없음은 모든 것이 헛됨이로다
“다 동일한 호흡이 있어서”. 짐승도 숨을 쉬고 사람도 숨을 쉬니 똑같다는 말이다. “이의 죽음 같이 저도 죽으니”. 짐승도 죽고 사람인 우리도 죽으니 결국 똑같다.
20 다 흙으로 말미암았으므로 다 흙으로 돌아가나니 다 한 곳으로 가거니와
짐승이나 사람이나 다 똑같이 다 흙으로 돌아간다. 그렇게 허무한 인생 가운데서 최고의 가치는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요 거듭나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일이다.
21 인생의 혼은 위로 올라가고 짐승의 혼은 아래 곧 땅으로 내려가는 줄을 누가 알랴
다만 다른 점은 이것이다. 사람과 짐승의 단 한 가지 차이가 있다면 사람의 혼(영)은 위로 올라간다. 주신 분에게로 가는 것이다. 여기서 ‘혼’이라는 단어는 히브리어로 ‘루하’(영)인데, 흠정역성경은 이 ‘루하’를 영으로 보고 사람만이 아니라 짐승도 영이 있다고 번역했다. 그러나 짐승은 사람에게 있는 영이 없다. 우주 가운데는 하늘과 땅과 사람 안의 영이 가장 중요한 하나님 창조의 항목이다(슥 12:1). 이 구절에서 혼이라는 말은 ‘영’ 이라기보다는 ‘생기, 호흡’이라고 번역해야 맞다. 짐승의 ‘호흡’ 또는 ‘생기’라고 번역할 수도 있겠다. 영어로 ‘spirit(영)’이라고 번역하는 것은 틀렸다. 짐승은 하나님을 접할 수 있는 기관으로서의 영이 없다. 사람만이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는 영이 있는 것이다.
“인생의 혼(영)은 위로 올라가고”. 사람은 영이 있어 죽으면 사람의 영은 결국 하나님께로 가고 짐승의 혼(생기)은 아래로, 즉 땅으로 내려간다. 이것이 바로 사람과 짐승의 차이다. 사람이 귀한 것은 그 사람의 영이 하나님과 교제하고 사귀고 동행하고 예배하는 데 있다. 그것이 짐승과의 차이점이다. 그런데도 사람이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고, 하나님을 동행하지 않고, 하나님의 영과 교통하면서 살지 않는다면 짐승과 똑같다는 것이다.
22 그러므로 내 소견에는 사람이 자기 일에 즐거워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나니 이는 그의 분복이라 그 신후사를 보게 하려고 저를 도로 데리고 올 자가 누구이랴
“그러므로 내 소견에는”. 전도자 솔로몬의 이야기다. “사람이 자기 일에 즐거워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나니”. 3장의 결론이다. 매일의 일상생활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작은 일들, 그 일을 즐거워하는 것이 최고라고 말한다. 여러분, 작은 일을 맡았다면 그 일을 하면서 ‘아, 이것이 나의 가장 큰 즐거움이구나’라고 생각하기 바란다.
나는 정말 그렇게 살고자 한다. 나는 아침에 사무실에 출근하면서 기쁘다. 그리고 책을 들고서 집으로 퇴근할 때(사무실과 집은 매우 가까운 거리다) 정말 기쁘다. 심방하고 성도들과 교제하고 예배하고 말씀 전하고 함께 집회하는 이러한 것이 나의 인생이며 나의 즐거움이다. 이것 외에는 큰 즐거움이 없다. 여러분도 그렇게 살기를 바란다. ‘크고 위대한 일이 오지 않으면 나는 즐겁지 않을 것이야’라고 하지 말고 지금부터라도 여러분이 맡은 작은 일, 즉 아이들의 밥을 해주는 것, 조금 벌어서 아이들 용돈을 주는 일 등을 하면서 기뻐하기 바란다. 이런 일을 할 수 있으니 얼마나 기쁘고 즐거운가! 이것이 하나님과 함께하는 일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주의 성령과 연합함으로 하기 때문에 우리는 짐승과 다른 것이다.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서 주님과 하나되어서 하는 작은 일 한 가지 한 가지에서 우리는 너무나 큰 즐거움을 찾는 것이다. 나는 지금 여러분에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즐거움과 기쁨을 선물로 가져다 드리고 싶다. 앞으로는 여러분 모두 이 말씀대로 즐겁게 살기 바란다.
*9솔로몬이 말하는 ‘경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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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으로 권력을 가진 사람은 사람들을 학대하면서도 그들의 고통을 모르기 십상이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사람인 솔로몬은 왕이면서도 학대받는 자들의 아픔을 헤아릴 수 있는 사람이었다.
“내가 돌이켜 해 아래서 행하는 모든 학대를 보았도다 오호라 학대받는 자가 눈물을 흘리되 저희에게 위로자가 없도다”. 학대를 당하면서 아파하는데, 그러한 자를 위로하는 자가 없었다고 한다. 위로하는 자라도 있으면 학대받는 사람들은 마음에 힘이 되기도 하고, 또 그런 학대를 견디면서 이길 수 있는 은혜를 얻을 수 있을텐데 그렇게 위로할 수 있는 사람도 없다는 것이다.
“저희를 학대하는 자의 손에는 권세가 있으나 저희에게는 위로자가 없도다”. 학대하는 자들은 그 손에 권세가 있는 자들이다. 그러므로 약자들은 소위 큰 힘·권세·대세 등에 의해 압제를 당하고 학대를 당하는데, 그럴 때 슬퍼하는 사람 편에 서서 그들을 위로하게 되면 그도 역시 사람들의 눈총을 받고 학대를 받기 때문에 함부로 위로해 줄 수도 없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곤경 밑에서 학대받는 사람들은 외롭기 짝이 없어진다. 이런 모든 상황을 솔로몬이 본 것이다.
2 그러므로 나는 살아 있는 산 자보다 죽은 지 오랜 죽은 자를 복되다 하였으며
그러므로 솔로몬은 그렇게 살아서 권력에 의해 학대를 당하는 사람들의 고통을 보면서 ‘살아 있기 때문에 고통을 당하는구나. 차라리 죽은 자들이 더 행복하지 않은가’ 라고 생각했다. 죽은 자들은 학대당할 필요가 없다. 오래 전에 죽었기 때문에 그런 고통을 당하는 자들보다 죽은 자들이 더 행복하지 않느냐고 생각한 것이다.
오늘날 우리나라에는 이런 일이 적지만, 거슬러 올라가면 고려 시대나 조선 시대, 근세 유신 시대, 또 그 이전에도 순수하고 착한 사람들이 끌려가 심한 고문과 고통을 당하는 경우가 있었다. 다른 많은 나라들에서도 탄압받고 고통당하는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다.
우리가 선교하는 나라인 캄보디아는 수많은 사람들이 폴 포트 정권 아래서 죽어야 했다. 수년간 감옥에 끌려가서 고통을 당했다. 그들이 그럴만한 죄를 지었기 때문이 아니다. 프놈펜의 한 고등학교 전체를 감옥으로 만들어 교실마다 민간인들을 잡아서 가둬두고 고문했다. 10여년 전 갈 때만 해도 감옥에 있던 인분이 아직 사라지지 않은 상태였다. 갖가지 고문 도구도 그대로 있었다. 그 방에서 생활하고, 배설하고, 많은 고통을 당하고, 대부분 다 죽임당했다. 처음 그곳을 보았을 때는 눈물이 나왔다. 너무 가련하고 불쌍했기 때문이다. 그처럼 권력을 잡았던 사람들에게 학대당하는 모습을 보면 그들보다 오래 전에 죽었던 사람이 행복하지 않은가 하는 생각을 가질 수 있다.
솔로몬 왕이 이러한 묵상을 하는 것이 귀하다는 것은 그가 왕이면서도 권세에 취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학대받는 자의 편에서 그들의 아픔을 헤아릴 수 있었다는 점을 귀하게 볼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교만한 것, 부자가 돼 마음이 부유한 것, 높은 위치에 있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를 알 수 있다. 또 참으로 겸손하고 낮은 마음으로 모든 사태를 바라볼 수 있는 것, 사람과 정황과 많은 것들을 헤아릴 수 있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가를 알 수 있다. 나는 하나님의 마음과 가장 일치할 수 있는 지점은 결국 가장 낮은 곳에서 모든 상황을 바라보는 것이라고 믿는다. 하나님은 가장 높은 데 계시지만, 가장 마음이 낮은 자들과 함께하시는 분이시다.
3 이 둘보다도 출생하지 아니하여 해 아래서 행하는 악을 보지 못한 자가 더욱 낫다 하였노라
죽은 자들보다, 탄압 아래 학대받는 사람들보다, 오래 전에 죽은 자들보다도 더 복된 자들은 아예 출생하지 않은 자들이라고 말한다. 해 아래서 행하는 악을 보지 못한 자가 더욱 낫다고 했다. 솔로몬은 생각이 여기까지 이르렀다. 아예 나지 않았더라면 좋았다는 것이다. 욥도 그런 고백을 한 적이 있다. ‘내가 출생하지 않았더라면 이렇게 고난을 당하지 않았을텐데 왜 어머니는 나를 낳았는가’ 라고 했다.
4 내가 또 본즉 사람이 모든 수고와 여러 가지 교묘한 일로 인하여 이웃에게 시기를 받으니 이것도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
전도서의 주제는 공허하다는 것이다. 모든 것이 공허하다. “사람이 모든 수고와 여러 가지 교묘한 일로 인하여 이웃에게 시기를 받으니”. 시기를 받는다는 말을 어떤 성경에는 ‘경쟁의 결과’라고 번역했다. 이 땅에서 사람들은 여러 가지 교묘하고 지혜로운 일을 하려고 많은 수고를 한다. 그러한 성취를 위해 수고하는 것을 볼 때 그것이 결국은 경쟁의 결과임을 알았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바티칸에는 정말 놀라운 예술 작품들이 많다. 바티칸 대성당의 총감독이 미켈란젤로였다. 또 한 명은 라파엘이었다. 그들은 분야가 달랐지만 얼마나 경쟁적으로 자기의 기술을 발휘했는지, 두 사람이 서로 말도 하지 않고 지냈다고 한다. 좋게 해석한다면 그런 경쟁자가 없고 이겨 보려는 마음이 없었다면 그렇게 빼어난 작품은 나올 가능성이 없었다. 사람은 나서 서울로 보내고 말은 제주도로 보내라는 말이 있다. 왜 사람은 서울로 보내야 할까? 시골에 있으면 경쟁이 없기 때문에 발전하지 않는다. 조금 공부 잘 하면 자기가 최고인 줄 알고 더 이상 공부하지 않는다. 하지만 서울로 올라오면 수많은 경쟁자가 있기 때문에 만만치 않음을 느끼고 더욱 갈고 닦는 일을 하게 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사역자들을 시골 교회에만 있게 하지 말라는 말도 한다. 그러면 성경도 열심히 읽지 않고 느슨해지며 게을러지기 때문이다. 시골의 생활 방식이 그렇다. 성도들은 논이나 밭에서 일하다가 함께 모여서 예배드리기 때문에, 특별히 말씀을 많이 준비하지 않고 전해도 다들 좋다고 하고 은혜 받았다고 한다. 그런데 도시에서 그렇게 사역을 하다가는 쫓겨나기 십상이다. 일반 성도들도 이리 저리 성경공부 하러 다니기 때문에 눈과 귀가 다 높아져 있다. 따라서 도회지에서 사역을 해 봐야 경쟁적으로 발전하기 때문에 사역자를 시골에다만 묶어두지 말라고 하는 것이다.
왜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정교한 일을 위해 노력하는가? 정교한 일이라면 예술도 있고, 문학도 있고, 음악도 있고, 또는 자기가 추구하는 많은 기술도 있다. 글 쓰고 시 쓰는 것 등도 있다. 그런 것들을 성취하려고 열심히 수고하는 것을 솔로몬이 보았더니, 그것은 경쟁의 결과임을 확인했다는 것이다. 경쟁심 때문에 그렇게 열심히 하는 것을 알게 됐다. 그리고서 솔로몬이 하는 말은 ‘그것도 헛된 것’이라고 한다.
여러분이 이러한 지혜의 말씀을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은 차이가 있다. 일생토록 힘겹게 수고하고 에너지를 다 소모하고 나서, ‘내가 왜 이렇게 수고하지?’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때 알고 보니 결국 얄팍한 경쟁심 때문이었음을 알게 되면 허탈해진다. 왜 이렇게 돈을 벌려고 했던가? 어디 가서 친구나 이웃이 잘 사는 것을 보고 왔다. 그러면 ‘내가 어떻게 해서든지 저 사람보다 잘 살아야지’ 하는 마음에 그렇게 애를 써서 돈을 번다. 언젠가 자기 친구가 에쿠스를 타고, BMW를 타는 것을 보고는 어떻게든 그 친구를 따라잡으려고 그때부터 죽을 힘을 다해 일을 한다. 세상 많은 사람들이 애를 쓰고 수고하고 열심히 하는 이유는 결국 경쟁의 결과이며, 지혜자는 우리에게 그것도 모두 헛된 것이라고 말을 해 준다.
이런 진리를 아는 것과 모르는 것, 깨닫는 것과 못 깨닫는 것에는 차이가 있는가? 많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했다. 모든 진리는 우리로 하여금 헛된 것에 힘을 다 쓰고 낭비하지 않도록 해 준다. 우리가 참으로 하나님을 섬겨야 할 때, 정말 주님께 드려야 할 때 아직도 속에서 경쟁 심리가 빠져나가지 않음으로 하나님을 섬기지 못하고 계속 헛되게 엉뚱한 일에 수고한다면 얼마나 손해이겠는가? 그렇게 되면 정작 주님이 시키시는 일을 받들어 할 수가 없다. 아직도 다른 사람을 이겨보려고 하는 경쟁 심리에 불이 붙어서 주님의 음성을 참되게 듣지 못하기 때문이다. 경쟁심에 도취돼 주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못한다. 어떻게 해서든지 모든 힘과 시간을 다해 경쟁 상대를 이겨야 하기 때문이다. 세월이 흘러 나이가 많아지고 노인이 되고 이도 다 빠지고 힘이 빠지고 나서 전도서를 읽어 보니 ‘아, 내가 경쟁심에 불타서 그렇게 많은 세월을 낭비했구나’라고 뒤늦게 깨닫게 되는 것이다
*10솔로몬이 말하는 ‘게으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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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매자는 미련한 자, 영어로는 바보(fool)이다. 그런 우매자는 자기 손을 거두고 자기 살을 먹는다고 한다. 자기 자신을 소모하는 사람이 바로 게으른 사람이다. 게으른 사람은 결국 자기를 축내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6 한 손에만 가득하고 평온함이 두 손에 가득하고 수고하며 바람을 잡으려는 것보다 나으니라
자기의 소유한 것이 한 손에만 가득하고 평안하면 된다는 것이다. 나아가 두 손에 가득하고 수고하는 것보다 한 손에만 가득하고 평온한 것보다 낫다고 한다. 두 손에 가득 잡으려다 보니 수고를 많이 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바람을 잡는 것이라는 뜻이다. 이것은 욕심으로 일하는 것을 말한다. 한 손만 채우면 마음이 평온할 수 있는데, 두 손을 채우려니까 욕심이 한없게 된다. 그러다 보니 수고가 지나치게 된다. 그렇게 한다고 두 손이 다 채워지는가 하면, 채워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바람을 잡는 것이라고 했다.
쉬운 예를 들어보자. 아파트 한 채에서 살면 되는데 누가 두 채를 가졌다는 말을 듣고 두 채를 사 보려고 수고하고 애를 쓴다. 그러나 결국 수고만 많이 했지 두 채는 생기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냥 한 채만 구입해 편안하게 살며 평온하게 지내는 일이 두 채를 향해 계속 수고하며 애를 쓰다가 두 채를 가져보지도 못하고 죽는 것보다는 낫다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입을 것과 먹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라고 했다. 우리가 가진 것을 그저 족한 줄로 알면 될텐데, 더 욕심을 부려서 얻으려 하고 두 손을 가득 채우려 할 때 결국 얻어지지 않고 수고만 지나치게 하게 되니 그것은 어리석다.
7 내가 또 돌이켜 해 아래서 헛된 것을 보았도다 8 어떤 사람은 아들도 없고 형제도 없으니 아무도 없이 홀로 있으나 수고하기를 마지 아니하며 부를 눈에 족하게 여기지 아니하면서도 이르기를 내가 누구를 위하여 수고하고 내 심령으로 낙을 누리지 못하게 하는고 하나니 이것도 헛되어 무익한 노고로다
“어떤 사람은…아무도 없이 홀로 있으나 수고하기를 마지 아니하며 부를 눈에 족하게 여기지 아니하면서”. 솔로몬이 주목해서 본 한 사람이 누구인가? 자식도 없고 형제도 없는 사람이다. 아무도 없이 혼자 된 사람이 돈을 벌기 위해 그렇게 일을 열심히 하더라고 한다. 돈을 많이 벌고 부가 축적이 되었는데도 계속 일을 한다.
“이르기를 내가 누구를 위하여 수고하고 내 심령으로 낙을 누리지 못하게 하는고”. 그런 사람이 속으로 할 수 있는 말이다. 어느 정도 벌어놨으면 쉬면서 기쁨을 누려야 할텐데, 혼자 살면서도 계속 돈을 더 벌려고 일만 한다. 솔로몬이 그런 사람을 봤다. 혼자서 끊임없이 부를 추구하면서 일하다가 죽을 날이 되면 죽는 것이다. “이것도 헛되어 무익한 노고로다”. 그것도 헛되다는 것이다.
9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음은 저희가 수고함으로 좋은 상을 얻을 것임이라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음은”. 이제 솔로몬이 묵상하고 또 생각해낸 것이 이것이다. 고립된 것, 혼자 있는 것은 참으로 위험하다. 왜 그렇게 헛되고 어리석은 방식으로 사는가? 그것은 그 사람이 혼자이기 때문이라고 솔로몬은 생각했다. 그래서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낫다고 했다. “저희가 수고함으로 좋은 상을 얻을 것임이라”. 두 사람이 수고할 때 좋은 상을 얻을 수 있는 결과를 가져온다고 했다.
10 혹시 저희가 넘어지면 하나가 그 동무를 붙들어 일으키려니와
“혹시 저희가 넘어지면 하나가 그 동무를 붙들어 일으키려니와”. 둘이 있으면 한 사람이 넘어져도 친구가 일으켜준다. 그러나 혼자 있다가 넘어지면 도울 사람이 없다.
“홀로 있어 넘어지고 붙들어 일으킬 자가 없는 자에게는 화가 있으리라”. 홀아비나 과부나 혼자 살다가 병이 들거나 심장에 이상이 생겨 갑자기 쓰러지면 누구도 도와줄 자가 없다. 그러므로 둘이 함께 살지 왜 혼자 사느냐고 말하고 있다.
11 두 사람이 함께 누우면 따뜻하거니와 한 사람이면 어찌 따뜻하랴
히말라야에 등반했던 두 사람이 너무 추워서 어떻게 할 수가 없을 때 둘이 꼭 붙어 자서 살았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또 한 사람이 쓰러졌는데 한 사람이 들쳐업고 그 먼 길을 내려왔다고 한다. 그들이 혹독하게 추운 날씨에도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업힌 사람의 체온 때문에 업고 내려온 사람도 따뜻했기 때문이었다. 혼자 있는 것은 좋은 삶이 아니다. 너무나 힘든 일이다.
12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능히 당하나니 삼겹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한 사람이 싸우면 패하지만 두 사람이면 능히 당할 수 있다. 여자들도 밤에 혼자 다니면 안 된다. 혹 나쁜 사람들이 덤빌 때 두 사람이면 여자라도 위기를 모면할 수 있다. 그러나 혼자면 길이 없다.
“삼겹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 삽겹줄이란 세 줄로 꼬아서 만든 줄이다. 각각 따로 있는 줄 세 개보다 세 줄을 함께 묶을 때 더 강하고 끊어지지 않는다. 우리는 여기서 지혜를 배울 수 있다. 오늘날 신앙생활 하는 성도들도 혼자 있는 것은 지혜롭지 않다는 것이다. 늘 지체들과 함께 연결되어서 생활하는 것이 좋은 것이다. 그런데 ‘나홀로주의’ 같은 독립적인 성품이 있다.
뭐든지 혼자 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 그런 성품은 위험하다. 지혜자인 솔로몬은 혼자가 좋지 않다는 것을 역설하고 있는 것이다. 누가 공격해도 막을 수 없고, 추운 날씨에도 추위를 이길 수 없다. 혹시 넘어져도 일으켜 줄 자도 없다. 그러므로 한 사람보다는 두 사람, 두 사람보다는 세 사람이 함께하는 것이 지혜로운 사람이고 길을 잘 걸어가는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성품이 좋은 사람을 찾아보려면 그 사람이 학교 다닐 때 친구들 관계가 어떠했는가를 보는 것이 좋은 방법이다. 여러분이 앞으로 사위, 며느리감을 구할 때 사람이 어떤가를 봐야할 때가 있다. 그럴 때 과연 그 사람이 성격이 좋은 사람인가를 보려면 친구들이 많이 있는가를 보면 된다. 늘 혼자 고독하게 왔다갔다 하는 사람은 성격이 좋은 사람이 아니다. 더불어 살 수 있는 사람이 좋은 사람이다. 여러 사람이 함께 지낼 수 있는 사람이 좋은 사람이다.
그런데 몸으로는 함께 지내고 함께 이야기를 하더라도 중심에서 사람들과 연결이 없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사람들은 나중에 어떤 시험을 당하거나 실족했을 때 일으켜줄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평소에 깊은 내면에서 신뢰와 연결을 가진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면 그렇게 생활하는 것이 좋은가? 좋지 않다. 적어도 서로 연결된 몇몇 지체가 있어야 한다. 많은 사람들 가운데 신앙생활을 하더라도 주위에 마음을 같이 할 수 있는, 마음 중심 속에서 서로 연결되고 신뢰하는 몇몇 지체들이 없다면 그런 사람들은 많은 사람들 속에 있어도 여전히 혼자다.
나는 총회장으로서 총회를 이끌고 있는데 참 쉽지 않음을 느낀다. 내가 이렇게 말하면 사람들은 왜 총회에 속해서 그런 어려운 일을 당하느냐고 하는 사람들도 있다. 물론 총회로 인한 어려움이 많다. 그렇지만 그 가운데 속해서 함께 있는 것이 모든 귀찮은 것을 털어버리고 나 홀로 있는 것보다 낫다. 힘들게 여러 사람과 함께하는 것이 쉽게 홀로 사는 것보다 훨씬 더 위험하다. 좋지 않다고 생각되더라도 많은 사람들과 함께하는 것이 순수하고 좋은 사람인 나 혼자 좋은 길을 간다고 하는 것보다 훨씬 안전하다는 것을 알기 바란다.
“삼겹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 여러분의 신앙도 혼자 있으면 일겹줄밖에 안 된다. 그런 사람은 끊어지기 쉽다. 그러나 적어도 두세 사람, 서너 사람이 함께 중심에서 연결되고 함께 교제하고 신뢰하는 사람들은 삽겹줄, 오겹줄이기 때문에 끊어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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