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상기도란 무엇인가?
관상기도는 이교의 명상기도와 같은것으로 비 성경적인 기도방식입니다. 자신의 생각을 비우고 하나님을 응시하여 무아지경에 이르면 하나님을 만나 하나가 될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관상기도를 통하여 자신의 마음을 비울때 찾아오는 존재가 하나님인지 사탄인지 모른다는데 있습니다.
관상기도는 성경에서 가르치는 성령 충만과는 반대되는 개념입니다. 기도는 성경말씀을 묵상하고 성령으로써 자기자신을 채우는 작업입니다. 그래서 성령의 인도하심을받아 하나님을 만나는것입니다. 관상기도라는 그릇된 이교의 기도로써 마음을 비우면 사탄이 찾아올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성령충만을 받아 성령의 전신갑주를 입으라고 가르칩니다.
-----------------------------
관상기도는 형식상으로 보면 ① 거룩한 성경읽기 단계 ② 읽은 것 묵상단계 ③ 묵상한 것을 놓고 기도하는 단계로 나눠진다. 여기까지는 보통 QT와 거의 같아서 분별이 어렵다. 그러나 문제는 4단계에 설정된 관상기도의 단계이다.
관상은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 같아 보이지만 실제는 불교나 천주교, 여타 동양종교의 명상 기도법이 가미된 것이다. 다 같으나 마치 이단(異端)처럼 끝이 다른 것이다. 바른 교회라 하면 보다 성경적이고 복음적인 기도, 믿음의 기도를 배워 하여야 할 것이다.
관상(觀想)이란 ‘하나님을 향한 영혼의 응시이며, 생각과 말과 감정을 뛰어 넘어 우리의 모든 인식 활동을 활짝 열어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라고 한다. 여기에는 인간의 수행과 노력, 지력이나 어떤 사람의 뛰어난 안목으로 해탈의 경지에 이르려는 불교 사상, 이성주의, 과학주의 사상(복음이 아닌 인본주의 사상) 등이 끼여 있다. 마치 인도 명상가들의 모습과 그 옛날 중국이나 한국의 도사들 모습같지 아니한가?
그렇기 때문에 성경적 신앙의 세계관 속에 독소같은 불순물로써 접목할 수 없는 요소가 되어 하나님께서 신구약 성경을 막론하고 가장 싫어하시는 종교혼합주의(religious syncretism)로 급 비화 될 수 있어 위험하지 않을 수 없다 할 것이다. 물론 우리 개혁주의 교회들은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66권 말씀의 든든한 초석 위에서 영혼과 육을 통하여 하나님을 다양하게 느끼도록 해야 할 것이다.
관상가들이 관상기도를 통하여 체험하게 되는 경험은 타 종교, 곧 힌두교의 요가를 통한 명상법이나 불교의 명상수련, 단 수련원의 뇌 호흡, 마음 수련원의 자기를 비우는 명상 수련법 등을 통해 어떤 종교적 절정을 경험했다는 주장과 별로 다를 바 없다.
타 종교인들은 명상을 통해 우주와 자신이 하나 되는 경험을 했다고 말한다. 그래서 자기에게서 벗어나 신의 경지에 이르러 신과 자신이 하나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관상가들이 말하는 객체와 주체가 일치되는 신비체험은 그들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명상수련을 통해 궁극에는 인간이 신이 되는 정점에까지 이를 수 있다고 말하는 이교도들의 주장과 다를 바 없지 않다.
성경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종들이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에 의해 인간이 경험할 수 없는 신비체험을 했던 경우를 보게 된다. 이사야 선지자(사 6장), 에스겔 선지자(겔 1:1; 40:1), 다니엘 선지자(단 10:5-17), 자신이 몸 밖에 있었는지 몸 안에 있었는지 모를 정도의 상태에서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갔던 사도 바울(고후 12:1-5), 인자같은 이 앞에 엎드려져 죽은 자 같이 되었던 사도 요한(계 1:9-20) 등이 있다.
그러나 선지자 이사야, 에스겔, 다니엘이나 사도 바울이나 사도 요한의 체험은 자기들이 원했기 때문에, 그리고 관상기도라고 하는 자기 수련 기도방법을 통해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그들이 신비한 경험을 했던 것은 하나님께서 택하신 종들에게 알리시고, 그 종들을 통해 당신의 뜻을 자기 백성들에게 전하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주권에 의한 사건이었다.
성경은 하나님의 종들이 경험한 이런 신비한 체험에 대해 하나님과 하나가 되었다거나, 객체와 주체가 하나가 되었다고 말하지 않으며 그런 정황조차도 나타내고 있지 않다. 오히려 그들은 창조주이신 거룩하신 하나님의 가히 이를 수 없는 영광 앞에 피조물 된 하나의 객체로서 두려움으로 주님을 뵈었다.
성경이 말씀하는 ‘하나 됨’은 관상가들이 말하는 하나 됨과는 다르다. 우리가 주님과 하나 되는 길은 주님 안에 있는 것, 즉 포도나무이신 주님께 붙어 있는 것이다. 곧 주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을 말한다.
우리가 주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길은 주님의 계명을 지킬 때이다(요 15:1-10). 그래서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안에 거하는 것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한다”(요15:10)고 말씀하셨다.
기록된 66권의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찾아오실 때마다 감사할 일이지 무엇 때문에 성경말씀을 제쳐두고 촛불을 밝혀 놓고 구도자의 심정으로 자기 스스로 애써서 하나님을 찾아가 만나려는 수련을 한다는 건지 이해할 수 없다.
성경 말씀까지 내려놓고 마음을 비우며 하나님을 만난다는 기막힌 세상(그래서 타종교에도 구원이 있다는 요설이 나오는 것이다)을 구현하겠다는 관상가들의 입장을 보면 무척 안타깝다.
좌선요가의 단계로 마음을 비우고 호흡, 즉 들숨에 성령님이 들어오고 날숨에 죄를 내보내고 하면서 어떤 경지에 이르러 하나님을 만난다고 하니 도대체 그 경지에서 만나는 실체가 무엇이란 말인가?
관상가들이 말하는 성령은 성경에서 증거하는 성령님이 아니며 그들이 어떤경지에서 만나는 것은 분명 성경적 하나님이 아니다. 왜냐하면 성령님은 그 어떤 기술이나 훈련으로 도를 닦아서 들어오고 나가는 분이 아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마음속에 하나님의 말씀을 채우지 아니하고 그 마음이 비어 있는 데는 성령님께서 계시지 않는다. 성령님이 분명히 안 계시니까 마음을 비우고 성령을 모신다는 소리가 나오는 것이 아닌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회개하여 죄 씻음 받고 성결케 된 자에게 성령님 이 계시고 주님의 자녀로 살면서 죄를 짓더라도 회개하여 주의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가 있는 것이다(히 4:16).
여타 종교에서 추구하는 것의 결국은 “나는 없다”라든지 “마음을 비운다”라는 상태이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자기 부인’의 상태는 ‘죄인’ 이라는 존재가 전제된다. 죄인중의 괴수인 ‘나’라는 존재가 전제되어 있는 것이다.
관상은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 같아 보이지만 실제는 불교나 천주교, 여타 동양종교의 명상 기도법이 가미된 것이다. 다 같으나 마치 이단(異端)처럼 끝이 다른 것이다. 바른 교회라 하면 보다 성경적이고 복음적인 기도, 믿음의 기도를 배워 하여야 할 것이다.
관상(觀想)이란 ‘하나님을 향한 영혼의 응시이며, 생각과 말과 감정을 뛰어 넘어 우리의 모든 인식 활동을 활짝 열어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라고 한다. 여기에는 인간의 수행과 노력, 지력이나 어떤 사람의 뛰어난 안목으로 해탈의 경지에 이르려는 불교 사상, 이성주의, 과학주의 사상(복음이 아닌 인본주의 사상) 등이 끼여 있다. 마치 인도 명상가들의 모습과 그 옛날 중국이나 한국의 도사들 모습같지 아니한가?
그렇기 때문에 성경적 신앙의 세계관 속에 독소같은 불순물로써 접목할 수 없는 요소가 되어 하나님께서 신구약 성경을 막론하고 가장 싫어하시는 종교혼합주의(religious syncretism)로 급 비화 될 수 있어 위험하지 않을 수 없다 할 것이다. 물론 우리 개혁주의 교회들은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66권 말씀의 든든한 초석 위에서 영혼과 육을 통하여 하나님을 다양하게 느끼도록 해야 할 것이다.
관상가들이 관상기도를 통하여 체험하게 되는 경험은 타 종교, 곧 힌두교의 요가를 통한 명상법이나 불교의 명상수련, 단 수련원의 뇌 호흡, 마음 수련원의 자기를 비우는 명상 수련법 등을 통해 어떤 종교적 절정을 경험했다는 주장과 별로 다를 바 없다.
타 종교인들은 명상을 통해 우주와 자신이 하나 되는 경험을 했다고 말한다. 그래서 자기에게서 벗어나 신의 경지에 이르러 신과 자신이 하나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관상가들이 말하는 객체와 주체가 일치되는 신비체험은 그들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명상수련을 통해 궁극에는 인간이 신이 되는 정점에까지 이를 수 있다고 말하는 이교도들의 주장과 다를 바 없지 않다.
성경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종들이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에 의해 인간이 경험할 수 없는 신비체험을 했던 경우를 보게 된다. 이사야 선지자(사 6장), 에스겔 선지자(겔 1:1; 40:1), 다니엘 선지자(단 10:5-17), 자신이 몸 밖에 있었는지 몸 안에 있었는지 모를 정도의 상태에서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갔던 사도 바울(고후 12:1-5), 인자같은 이 앞에 엎드려져 죽은 자 같이 되었던 사도 요한(계 1:9-20) 등이 있다.
그러나 선지자 이사야, 에스겔, 다니엘이나 사도 바울이나 사도 요한의 체험은 자기들이 원했기 때문에, 그리고 관상기도라고 하는 자기 수련 기도방법을 통해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그들이 신비한 경험을 했던 것은 하나님께서 택하신 종들에게 알리시고, 그 종들을 통해 당신의 뜻을 자기 백성들에게 전하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주권에 의한 사건이었다.
성경은 하나님의 종들이 경험한 이런 신비한 체험에 대해 하나님과 하나가 되었다거나, 객체와 주체가 하나가 되었다고 말하지 않으며 그런 정황조차도 나타내고 있지 않다. 오히려 그들은 창조주이신 거룩하신 하나님의 가히 이를 수 없는 영광 앞에 피조물 된 하나의 객체로서 두려움으로 주님을 뵈었다.
성경이 말씀하는 ‘하나 됨’은 관상가들이 말하는 하나 됨과는 다르다. 우리가 주님과 하나 되는 길은 주님 안에 있는 것, 즉 포도나무이신 주님께 붙어 있는 것이다. 곧 주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을 말한다.
우리가 주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길은 주님의 계명을 지킬 때이다(요 15:1-10). 그래서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안에 거하는 것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한다”(요15:10)고 말씀하셨다.
기록된 66권의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찾아오실 때마다 감사할 일이지 무엇 때문에 성경말씀을 제쳐두고 촛불을 밝혀 놓고 구도자의 심정으로 자기 스스로 애써서 하나님을 찾아가 만나려는 수련을 한다는 건지 이해할 수 없다.
성경 말씀까지 내려놓고 마음을 비우며 하나님을 만난다는 기막힌 세상(그래서 타종교에도 구원이 있다는 요설이 나오는 것이다)을 구현하겠다는 관상가들의 입장을 보면 무척 안타깝다.
좌선요가의 단계로 마음을 비우고 호흡, 즉 들숨에 성령님이 들어오고 날숨에 죄를 내보내고 하면서 어떤 경지에 이르러 하나님을 만난다고 하니 도대체 그 경지에서 만나는 실체가 무엇이란 말인가?
관상가들이 말하는 성령은 성경에서 증거하는 성령님이 아니며 그들이 어떤경지에서 만나는 것은 분명 성경적 하나님이 아니다. 왜냐하면 성령님은 그 어떤 기술이나 훈련으로 도를 닦아서 들어오고 나가는 분이 아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마음속에 하나님의 말씀을 채우지 아니하고 그 마음이 비어 있는 데는 성령님께서 계시지 않는다. 성령님이 분명히 안 계시니까 마음을 비우고 성령을 모신다는 소리가 나오는 것이 아닌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회개하여 죄 씻음 받고 성결케 된 자에게 성령님 이 계시고 주님의 자녀로 살면서 죄를 짓더라도 회개하여 주의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가 있는 것이다(히 4:16).
여타 종교에서 추구하는 것의 결국은 “나는 없다”라든지 “마음을 비운다”라는 상태이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자기 부인’의 상태는 ‘죄인’ 이라는 존재가 전제된다. 죄인중의 괴수인 ‘나’라는 존재가 전제되어 있는 것이다.
빈 마음이나 ‘나’라는 존재가 없는 상태에서 성령이 임하는 것이 아니라, 회개한 죄인에게 성령이 임하신다. 이 또한 인간이 성령을 받을 수 있는 이유나 조건이나 방법이 아니라 주님이 미리 정하시고 홀로 행하신 결과일 뿐이다.
아울러 성경에서 하나님 앞에서 “잠잠하라”든지, “가만히 있어라”든지 하는 말씀은 말을 적게 하고 떠들지 말고 침묵하라는 의미가 아니라 철저한 ‘자기 부인’을 의미하는 것이다.
http://cafe.naver.com/anyquestion.cafe 평신도 이단대책협의회
'言 > 사모하는惠' 카테고리의 다른 글
^^ (0) | 2012.04.17 |
---|---|
너머서교회 (0) | 2012.04.06 |
The Prayer of Jabez (0) | 2012.04.03 |
교회는 작아야 한다 (0) | 2012.03.09 |
전도서강해11~20 (0) | 2011.05.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