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부러진다는 것 구부러진다는 것 -김정록- 잘 마른 핏빛 고추를 다듬는다 햇살을 차고 오를 것 같은 물고기에게서 반나절 넘게 꼭지를 떼어내다 보니 반듯한 꼭지가 없다, 몽땅 구부러져 있다 해바라기의 올곧은 열정이 해바라기의 목을 휘게 한다 그렇다, 고추도 햇살 쪽으로 몸을 디밀어 올린 것이다 그 끝없는 깡다.. 言/오래묵을詩 2009.11.04
일 잘 하는 사내 일 잘 하는 사내 -박경리- 다시 태어나면 무엇이 되고 싶은가 젊은 눈망울들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다시 태어나면 일 잘하는 사내를 만나 깊고 깊은 산골에서 농사짓고 살고 싶다 내 대답 돌아가는 길에 그들은 울었다고 전해 들었다 왜 울었을까 홀러 살다 홀로 남은 팔십노구의 외로운 처지 그것이 .. 言/오래묵을詩 2009.10.18
선운사 동백꽃 -di- 선운사 동백꽃 - 김용택 - 여자에게 버림받고 살얼음 낀 선운사 도랑물을 맨발로 건너며 발이 아리는 시린 물에 이 악물고 그까짓 사랑때문에 그까짓 여자때문에 다시는 울지말자 다시는 울지말자 눈물을 감추다가 동백꽃 붉게 터지는 선운사 뒤안에 가서 엉엉 울었다 innocence -Giovanni Marradi 연주- .. 言/오래묵을詩 2009.09.23
12월의 시 12월의 시 -강은교- 잔별 서넛 데리고 누가 집으로 돌아가고 있다. 처마끝마다 매달린 천근의 어둠을 보라, 어둠이 길을 무너뜨린다 길가에 쓰러져 있는 일년의 그림자도 지워버리고 그림자 슬피 우는마을마저 덮어 버린다 거기엔 아직 어린 새벽이 있으리라 어둠의 딸인 새벽과 그것의 젊은 어머니인 .. 言/오래묵을詩 2009.09.16
죄 죄 -김용택- 들자니 무겁고 놓자니 깨지겠고 무겁고 깨질 것 같은 그 독을 들고 아둥바둥 세상을 살았으니 산 죄 크다 내 독 깨뜨리지 않으려고 세상에 물 엎질러 착한 사람들 발등 적신 죄 더 크다 잘못했습니다. 言/오래묵을詩 2009.06.13
유월의 시 유월의 시 -김남조- 어쩌면 미소짓는 물여울처럼 부는 바람일까 보리가 익어가는 보리밭 언저리에 고마운 햇빛은 기름인양 하고 깊은 화평의 숨 쉬면서 저만치 트인 청청한 하늘이 성그런 물줄기 되어 마음에 빗발쳐 온다 보리가 익어가는 보리밭 또 보리밭은 미움이 서로 없는 사랑의 고을이라 바람.. 言/오래묵을詩 2009.06.12
어떤 마을 어떤 마을 -도종환- 사람들이 착하게 사는지 별들이 많이 떴다 개울물 맑게 흐르는 곳에 마을을 이루고 물바가지에 떠담던 접동새소리 별 그림자 그 물로 쌀을 씻어 밥짓는 냄새 나면 굴뚝 가까이 내려오던 밥티처럼 따스한 별들이 뜬 마을을 지난다 사람들이 순하게 사는지 별들이 참 많이 떴다 言/오래묵을詩 2009.05.07
꽃을 위한 서시 꽃을 위한 서시 -김춘수- 나는 시방 위험한 짐승이다. 나의 손이 닿으면 너는 미지의 까마득한 어둠이 된다. 존재의 흔들리는 가지 끝에서 너는 이름도 없이 피었다 진다. 눈시울에 젖어드는 이 무명의 어둠에 나는 한밤내 운다. 나의 울음은 차츰 아닌 밤 돌개바람이 되어 탑을 흔들다가 돌에까지 스미.. 言/오래묵을詩 2009.05.05
어느날 오후 풍경 어느날 오후 풍경 -윤동주- 창가에 햇살이 깊숙이 파고드는 오후 한 잔의 커피를 마시며 창밖을 바라본다 하늘에 구름 한 점 그림처럼 떠 있다 세월이 어찌나 빠르게 흐르는지 살아가면 갈수록 손에 잡히는 것보다 놓아 주어야 하는 것들이 많다 한가로운 오후 마음의 여유로움이 몰려와 눈물이 왈칵 .. 言/오래묵을詩 2009.03.25
이시카와 다쿠보쿠의 와카(단가)들 이시카와 다쿠보쿠의 와카들 동해바다의 자그마한 갯바위 하얀 백사장 나는 눈물에 젖어 게와 벗하였도다 새로 산 잉크 병마개 열고 나니 신선한 냄새 주린 뱃속 스미어 슬픔 자아내누나 내 굶주리던 어느 날 야윈 꼬리 흔들며 배고파 나 바라보는 개 얼굴 더 좋구나 책 사고 싶어, 책을 사고 싶어서, .. 言/오래묵을詩 2009.03.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