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카시[Sir Desmond Charles Otto MacCarthy]
본문
1877. 5. 20 잉글랜드 데번 플리머스~1952. 6. 8 케임브리지셔 케임브리지.
영국의 언론인.
〈뉴 스테이츠먼 New Statesman〉에 '상냥한 매'(Affable Hawk)라는 제목의 칼럼을 1주일에 1번씩 9년간에 걸쳐 쓰면서 박학다식함과 예리한 판단, 문학에 대한 뛰어난 안목 등으로 이름을 떨쳤다.
매카시는 자유기고가로서 처음으로 언론계에 발을 디뎠으며 그뒤 얼마 지나지 않아 〈뉴 쿼털리 New Quarterly〉(1907~10)와 〈아이 위트니스 Eye Witness〉(1911~13, 나중에 〈뉴 위트니스 New Witness〉라는 이름으로 바뀜)에서 편집자로 일했다. 1913년 그는 클리퍼드 샤프의 요청에 응해 〈뉴 스테이츠먼〉의 드라마 평론 담당자가 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에는 프랑스군에 소속된 적십자대원으로 복무했다(이에 관해서는 후에 발간된 〈체험 Experiences[1935]〉에 자세히 나와 있음). 그후에도 그는 계속 〈뉴 스테이츠먼〉에서 드라마 평론가(1913~44), 문학부문 편집자(1920~27), 주간 칼럼니스트(1920~29)로 일했고 1928년에는 〈선데이 타임스 Sunday Times〉의 수석 문학 평론가가 되었다. 그리고 5년 동안 〈라이프 앤 레터스 Life and letters〉의 편집장 직을 역임했다.
"비평은 조물주의 위대한 만물사(萬物史)의 일부이다"는 믿음을 지닌 매카시는 순수한 문학적인 비평방법 보다 전기적(傳記的)인 비평방법을 구사하면서 가장 탁월한 비평솜씨를 보여주었다. 그는 문학의 리얼리티에 대한 새로운 시각들에 개방적 태도를 보여주었고 알려지지 않은 새로운 작가들(그 당시에 아직 이름이 없었던 입센과 체호프 등을 포함)을 자주 독자들에게 소개했으며 또 젊은 평론가들을 후원해 주었다. 그는 영국방송회사(BBC)에서 문학에 관한 프로그램의 진행을 맡기도 했다. 7권으로 된 그의 선집에는 〈인물들 Portraits〉(1931)·〈드라마 Drama〉(1940)·〈쇼 Shaw〉(1951) 등이 포함되어 있다. 매카시는 1951년에 나이트 작위를 수여받았다
*매카시즘(McCarthyism)
1950년대 미국에서 일어난 반공사상(反共思想). 50년 2월 미국 공화당 상원의원 조지프 레이먼드 매카시가 국무부의 진보적 성향을 띤 100여명에 대해 추방을 요구했으며 많은 지도층 인사를 공산주의자로 몰아 공격했다.
동서냉전이 강화되는 가운데 미국사회를 휩쓸었던 이 초보수적(超保守的)인 정치적 흐름을 당시 상원 국내치안분과위원장이었던 그의 이름을 따서 ‘매카시 선풍’이라 부른다.
2차대전이 종결되고 미국과 소련간의 연합국 동맹이 분열되면서 사회주의 진영과 식민지 민족해방운동 세력의 급속한 성장에 직면해 체제보존의 위기를 절감한 지배층의 보수강경 분파가 전시 총동원체제로부터 전후(戰後)체제로 순조롭게 체제를 재편성하고 헤게모니의 기반을 다지고자 의도적으로 일으켰던 이 ‘공산주의자 사냥’은 미국 국내외로부터 심지어 당 안에서도 격렬한 비판에 부닥쳐 국제관계에서의 긴장완화와 더불어 점차 스러졌고 매카시는 54년 분과위원장직에서 해임됐다.
그 후로도 골드워터 공화당 대통령후보로 대표되는 보수주의의 흐름은 간헐적으로 지속돼 ‘신(新)매카시즘’이라 불리고 있다.
내용출처 : 본인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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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반하장표 매카시즘 - [김영희 칼럼] 이땅에 매카시즘의 망령인가
미디어 2006/04/18 21:22
김영희 중앙일보 대기자가 (부사장급이래나 뭐래나^^) 왈
자기와 같은? 친미주의자들?이 지금 현정부에 의해
딴것도 아니고 '매카시즘'적인 매도의 희생자가 되고 있다고 떠들고 있다.
어이가 없어서 하품도 안나온다^^
이런글이 통하리라고 실제로 믿고? 기명칼럼으로 쓸수있다는것은
쓰는사람이나 그런 신문을 읽는사람이나 정신이 오락가락 하는 것은 매한가지다.
한번 보자.
*[김영희 칼럼] 이땅에 매카시즘의 망령인가
유럽에 공산주의라는 유령이 떠돌고 있다는 말로 시작되는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공산당 선언'(1848)의 수사법(修辭法)을 빌려 "지금 한국 땅에 매카시즘의 유령이 떠돌고 있는가"라고 묻고 싶다. 냉전시대이던 1950년대 초 미국의 진보적인 관리.언론인.연예인들이 극우 정치인 조셉 매카시 상원의원의 비밀청문회에서 공산주의 동조자로 낙인 찍혀 인격살인을 당한 사건이 악명 높은 매카시 선풍이다.
==> 하나만 지적하면서 넘어가자...^^ 매카시즘은 멀쩡한사람을 빨갱이로 몰아서 정적을 무력화시키는 것이다. 그 매카시즘을 말하기위해 마르크스와 엥겔스를 끌어들인다. 100% 아메바독자용 말장난이고, 이런 유치한 어법 그 자체로 정신분열적 매카시즘의 증세를 이미 스스로 드러내보이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이 말한 "미국인보다 더 친미적인 한국인들", 조기숙 청와대 홍보수석비서관이 말한 영어 잘하는 한국인들이 주위의 눈치를 살피면서 할 말 제대로 못하고 지내야 하는 분위기는 한국판 매카시즘 냄새를 풍긴다. 매카시즘 냄새는 두 갈래로 난다. 하나는 정부(아직은 청와대가)가 주도하는 친미파(로 의심받는) 지식인 길들이기요, 다른 하나는 한.일 갈등에서 일본 입장을 조금이라고 두둔한다 싶은 사람에 대한 네티즌들의 온라인 응징이다.
==> 매카시즘을 정의하는 일차적인 요소는 용공매도이다. 그게 아니면 매카시즘이 아니다. 그러니 김대기자가 붙이고자 하는 딱지로는 아마 경우에 따라서는 포퓰리즘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오히려 타당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복잡하게 따져보게되는 딱지로는 성에 안찼을지도 모르겠다. 매카시즘..그 얼마나 단순명쾌화끈한 딱지인가??? 그러니까 이 단락, 아니 이 글 전체의 어법 자체가 적반하장이랄까, 똥뀐넘이 성낸달까, 정신분열적 매카시즘을 몸소 온몸으로 보여주는것이 될 수 밖에 없다.
그외에 사소하게는 그냥 <친미파>가 아니라 <미국사람보다도 더 친미적인 친미파>의 문제이며, 또 <일본을 조금이라도 두둔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일본인보다도 더 일본을 두둔하는 사람들>을 말하는 것이다. 두개는 전혀 다른것인만큼 엄연히 구별되어야 한다. 그러나 김대기자는 의도적으로 둘을 전혀 구별하지않고 뒤섞어놓는다.
우리는 지금 문화혁명 수준의 변혁을 겪고 있어 사회 구석구석에서 가치의 전도(顚倒)가 진행된다. 용공과 친북 대신 용미(容美)와 친미가 청산 대상으로 지목된 것이 그런 변화의 하나다. 지난 반세기 동안 용공.친북으로 낙인 찍힌 사람들은 큰 고통 속에 살았다. 그런 암울한 터널을 빠져나와서 당도한 데가 영어 잘하고 미국에 친구를 가진 사람들이 기죽어 살고, 독도와 과거사 문제에서 일본의 대응이 한국보다 한 수 위라고 말한 가수가 10여 년 하던 방송 출연을 못하고, 일제 식민통치의 결과에 대한 평가를 달리한 교수가 곤욕을 치르는 시대인가.
==> 매카시즘을 설명하기위해 얼토당토않은 맑스-엥겔스를 들먹거리면서 정신분열적으로 매카시즘적인 행태로 글을 시작한데 이어 또다른 매카시즘적인 어법이 등장한다. 즉 변혁은 변혁인데 '문화혁명 수준의 변혁'이라는 것이다. 왜 프랑스혁명이나 미국혁명 수준의 변혁이 아니라 문화혁명이 아니면 안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러시아 공산혁명이라고 하면 더 폼나지 않았을까? 그리하여 가치의 전도가 진행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지껏 보았듯이 정신분열적 가치전도를 몸으로 보여주고 있는것은 이 글을 쓰고 있는 대기자랍시는 사람 본인이다. 즉 물구나무서있는 사람은 딴사람이 아닌 필자라는 뜻이다. 그리고는 제대로 선 사람들을 보고 뒤집어져있다고 하는 것이다.
매카시즘을 설명하려 맑스를 끌어오면서, 변혁을 설명하려 문화혁명을 끌어오는 그런 정신분열적 이중성으로, 이제 용공친북으로 낙인찍힌 사람들에게 동정적인척 한다. 정신분열증세는 점점더 악성으로 변해간다. 잡넘의 경우 영어로 의사소통하는데 큰 불편이 없고 미국친구도 있지만 기죽어산다는것은 금시초문이며 잡넘의 친구들도 대개 그러하다. 그리고 조영남이가 딴말은 다 잘했는데 일본의 독도문제대응이 한국보다 한수위라고 말한것 그것 하나때문에 방송출연을 못하게 되었나? 일제식민통치 같은 문제에 대해 사람들이 가진 상식적 생각과 상반된 평가를 하면서 곤욕을 치르는게 억울하면 비정상아닌가? 대통령조차도 '국정을 위태롭게 할 가능성을 예방하기위해'(박상천의 말) 탄핵까지 당하는 '곤욕'을 치르지 않았나?
386이 장악한 한국은 전반적으로 북한에 너그럽고 미국에 비판적이다. 정부의 대북정책과 대미정책의 방향도 그쪽에 맞춰져 있다. 북한을 포용하는 정책에 찬성과 비판이 있듯이 한.미 관계의 조정도 찬반토론을 거쳐서 그 방향과 수위를 조정해야 한다. 독도와 역사교과서에 대한 정부의 대응에 대해서도 의견을 달리할 수 있어야 한다. 정부정책에 대한 일사불란한 지지는 독재국가에서나 가능한 것임을 노 대통령과 조기숙 홍보수석이 모를 리 없다.
==> 우선 386이 한국을 장악해서가 아니라, 김대기자가 자신의 위치를 모르고 있는 것이다. 지금의 30-40대는 김대기자가 30-40대일때와는 다르다. 김대기자는 자유의벗을 읽고 검정물감을 들인 군복을 입고 리버티뉴스를 보면서 한국이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라고 배우고 믿으면서 청년기를 보냈지만, 지금의 3-40대는 리영희선생을 읽고 광주항쟁을 겪으면서 남한정부의 매판성과 한계를 내피가 아닌 타인의 피를 통해 뼈저리게 깨달았다는 수치심을 가슴에 품고 기억하는 세대이다.
문제는 이것이다. 30-40대는 자신의 한계와 아울러 김대기자세대의 한계를 깨우쳐 이미 알고있다. 그러나 김대기자세대는 자기자신을 모르는것은 물론, 3-40대가 자신들을 속속들이 알고 있다는 사실도 전혀 모른다. 그런데 이러한 결과는 김대기자세대가 추구해온 것이기도 하다. 자식들에게는 보다나은 교육과 보다나은 세상을 주자는것 말이다. 김대기자가 정상적인 수준의 책임감을 지닌 지식인이라면, 이러한 희망은 <내자식>차원에서 <다음세대>로 확장되어야 한다는것을 최소한 머리로는 알 것이다.
언론이 한.미동맹을 흔들어 불안을 조성하는 방법으로 신문 부수를 늘리는 안보장사를 한다는 조기숙 홍보수석의 주장은 책임전가요, 의도적인 도발이다. 그녀는 안보를 정권 유지 수단으로 삼던 과거의 권위주의 정권과 오늘의 언론을 착각하고 있는 모양이다. 한.미동맹을 흔들어 신문 부수를 늘리기에는 한국 독자들의 수준이 너무 높다. 미국 정부와 연구소 사람들이 한국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책임이 영어 잘하는 한국인들에 있다는 말은 사실의 왜곡이다. 한국을 연구하고 한국에 대한 정책에 참여하는 미국인들이 한국에 대한 인식 형성에 영어 잘하는 친미적인 한국인들의 말에만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누구보다도 그녀 자신이 더 잘 알 것이다.
==> 조기숙홍보수석의 안보장사 표현은 공직자로서 지나친 것으로 판단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 다음의 말은 전혀 말이 안된다. 과거의 권위주의정권하의 보수언론과 오늘의 보수언론이 어떻게 다르나? 예전에는 찍소리 못하고 있었지만 지금은 정권의 입장이 달라진대다 민주적이기까지 하니 마음껏 원없이 반감을 표시하고 있다고? 맘놓고 반감을 표시하고 탄핵도 부추긴것이니까 옛날처럼 안보를 사익추구에 활용한것이 아니다. 그래서 '안보장사'란 말은 억울하다, 이말인가?
혹 당신의 '안보'는 '미국만 있으면 다른것은 전혀 필요없는 안보'는 아닌가? 혹 당신의 '미국인보다 더 친미적인 친미'의 근거를 항상 그런 '안보'로 부터 찾아왔던것은 아닌가? 그런 정신분열적 친미가 정말 안보의 유일무이한 수단인지의 여부를 민주적이고 합리적으로 논증함이 없이, 오히려 모든 국민이 스스로 그 문제를 객관적으로 생각해 보려는 노력을 본의아니게라도 방해한 적은 없는지 의심하고 점검해 본 적은 없는가?
나머지부분에서 역시 계속 '미국인보다 더 친미적인 한국인'을 '영어잘하고 친미적인 한국인'으로 바꿔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해둔다. 야바위꾼도 아니고, 명색이 기자라면 최소한 이런식으로 말해서는 안된다는 것도.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생명은 다양성에 있다. 다양한 생각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없는 사회는 역동성을 잃고 침체에 빠진다. 일사불란한 획일주의는 민주주의의 적이다. 노 대통령과 조기숙 홍보수석은 일본 아사히(朝日)신문의 와카미야 요시부미 논설주간이 쓴 두 개의 칼럼을 읽어 봤는지 궁금하다. 그는 독도를 한국에 양보하자고 제의하는 칼럼에 이어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의 야스쿠니(靖國) 신사 참배는 독일의 전후 반성과 비교해 하수(下手)라고 지적하는 칼럼을 썼다. 와카미야의 처지는 대통령과 그의 홍보비서관에게 국가이익을 고려하지 않는 친미주의자로 지탄받는 한국의 학자와 언론인들, 네티즌들에게 몰매를 맞고 방송프로에서 쫓겨난 유명 가수와 극명하게 대조된다.
==> 두가지를 지적하겠다. 하나는 '미국인보다도 더 친미적인 친미파'을 단순한 '친미파'로 바꿔쳐온 앞서의 왜곡의 계속인데, 우리사회는 조선일보나 중앙일보같은 찌라시도 마음놓고 헛소리를 해도 멀쩡할 만큼 다양한 생각이 가능하다. 친미건 반미건 누구나 자우이다. 그러나 한국국민으로서 미국과 힌국의 이익이 충돌할 때에는 국익자체에 문제가 있어 개인적 양심과 충돌하는것이 아닌 한, 한국의 이익을 우선해야 한다는 것은 자명하다. 한국국민이 '한국의 이익'을 무시할 수 있는것은 헌법에 보장된 개인의 양심의 자유에 의한 것이지, 우리나라의 이익을 다른나라의 이익에 무반성적으로 종속시키기 위한 것은 아니다.
두번째로는 일본과 한국의 관계는 일본을 비판한 아사히신문의 입장-태도와 한국을 비판한 교수나 연예인의 입장-태도를 그대로 바꿔 생각할 수 있을 만큼 대칭적인 것이 전혀 아니다. 말하자면 강도와 피해자의 관계처럼 비대칭적인 것이며, 이 경우 강도가 하는 자기반성을 피해자에게 동일하게 요구할 수는 없는 것이다.
참여정부는 이름값을 못하는 것 같다. 국민을 널리 참여시키는 인클루전(Inclusion)의 정부가 아니라 코드 안 맞는 사람을 가려 제외시키는 익스클루전(Exclusion)의 정부같다. 한.미 관계에 문제가 있다면 그 원인의 큰 몫은 친미 지식인들보다는 부시 정부의 대북 강경노선과 노 대통령의 외교 스타일 및 외교부의 역할 위축에 있다. 한.미 관계에 문제가 없다면 지식인들에 대한 매카시즘적인 공격은 원인 무효가 되는 것이고.
김영희 국제문제 대기자
2005.04.28 20:21 입력
==> 참여정부가 그 슬로건처럼 시민의 자율적인 참여가 기대한 만큼 이루어지고 있지 못한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비판이 그러한 시민들의 자율적인 참여를 감정적-비이성적으로 방해하여온 사이비언론들의 입에서 나온다는것은 어불성설이다. 적반하장은 이런것을 두고 말한다. 그리고 김대기자의 영어실력을 통해 친미성을 자랑하려는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배제(exclusion)라는 딱지를 붙이기 위해 대칭적으로 끌어들인 내포(inclusion)라는 단어는 참여(participatory)와는 거리가 멀고 핀트도 안맞다. 만약 김대기자의 영어실력이 김대기자의 '미국인보다도 더한 친미성'의 결과라면, 미국인보다도 더 친미적이 될 수 있도록 더욱더 분발하여 절차탁마하기 바란다. 나머지말들의 무의미함은 더이상 말하지 않겠다.
*한겨레 신문
미국 상원이 50년 만에 공개한
4천여 쪽의 조지프 매카시 청문회 기록은 당시
공산주의자 색출이란 명목으로
‘마녀 사냥’이 어떻게 이뤄졌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주는 값진 자료다.
상원 조사소위원회 위원장이던 매카시는
1953~54년 약 500명을 대상으로 161회의 비공개 청문회를 열었다.
비공개로 한 이유는 자신이 지목한 증인들을
효과적으로 공격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증인을 공산주의자라고 몰아붙인 뒤
그렇지 않음을 입증하라고 요구했다.
증인이 ‘불리한 진술을 하지 않을 권리가 있다’는
헌법 5조를 내세우면 ‘5조 공산주의자’라는 딱지를 붙였다.
마녀 사냥에는 언론과 정치인도 동참했다.
매카시가 일부 내용을 과장·왜곡해 기자들에게 얘기하면
확인도 않고 그대로 보도했다.
매카시가 1950년 “미국 정부에 수천명의 공산주의자가 침투해 있다”며
‘반공 선풍’을 불러일으킨 이후 52년 선거에서
상·하원을 모두 장악하는 등 톡톡히 덕을 본 공화당 쪽 정치인들은
이런 행태를 은근히 조장했다.
증인 가운데 나중에 유죄 판결을 받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지만
이미 수십명이 일자리를 잃고 한 사람은 자살한 뒤였다.
냉전 시기에 정치적 반대파를 탄압하는 모델이 됐던 매카시즘은
지금도 여러 나라에서 모습을 바꿔 나타나고 있다.
미국에서 9·11 동시테러 이후 내부 감시를 강화하기 위해 제정된
애국자법과 외국인 등록제 등이 그런 비판을 받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최근 열린 고영구 국가정보원장에 대한
국회 인사청문회에서 고 국정원장과
참고인으로 나온 서동만 교수에게
색깔론으로 공격한 것 등이 같은 사례다.
기록의 공개를 주도한 수전 콜린스 상원의원은
“미국 역사의 부끄러운 부분에 새로운 빛을 비추는 문건”이라며
“미래 세대에게 교훈이 되길 바란다”고 밝혔다.
하지만 매카시의 사례를 반성거리로 삼아
역사가 바른 길을 벗어나지 않도록 하는 일까지
다음 세대로 넘겨서는 안 된다.
*매카시즘 McCarthyism
우선 맥카시 선풍 또는 맥카시 시대란 1947년부터 그가 사망한 1957년까지 미 상원의원이였던 죠세프 맥카시 (Joseph McCarthy)의 이름을 따른 것. 그는 매우 시위적이고 선동적이였던 사람 이였는데 자기 존재를 더욱 부각시킬 수 있는 "핫 이슈"를 찾던 그는 당시 나라밖으로는 체코슬로바키아 사태, 나라 안으로는 알져 히스라는 국무성 관리의 스파이 사건으로 잔뜩 공산주의에 대한 불안과 적개심에 쌓여있던 미국인들에게 안성맞춤인 반공을 이슈로 잡게 된다. 그는 1950년 한 유권자 모임에서 매우 극적으로 한 손에 서류를 흔들면서 "여기 공산주의 활동을 한 205명의 명단이 있고 이것은 국무장관의 손에 전해 졌는데도 이들은 아직 국무성에서 일하고 있다"는 위협적인 연설을 하므로써 그 후 수 많은 사람들을 심리적 테러로 몰고 갔던 그의 전쟁을 선포했다. 이 연설에서 보듯 그의 주요 표적은 국무성을 비롯한 미 행정부였고 결국 그는 군부까지 "쳐들어가" 몇몇 장군을 공산주의와 연루시키려다 TV에 공개방영된 공방전에서 참패하고 결국에는 상원에서 공식 불신임 표명을 받는 불미스러운 끝으로 그의 인생을 마쳤다.
이런 시대의 풍토를 피해자의 한 사람이였던 극작가 아서 밀러가 작품화 한 것이 <크루서블 (The Crucible)>이고 이것은 최근에 영화로 만들어 지기도 했다. 비록 시대가 바뀌고 내용은 마녀잡기(witch hunt)가 됐지만 이 연극은 맥카시즘과 맥카시즘에 대한 당시 사람들의 반응을 주제로 다룬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렇게 맥카시의 악명이 높긴 하지만 정작 헐리우드에 대한 마녀잡기는 맥카시 이전 이미 미국 하원 House Un-American Activities Commitee 에서 시작되었다. 1947년 1차 조사, 1951년에 2차 조사로 이 위원회는 공산당원이(였)거나 친공사상을 퍼뜨린다고 생각되는 모든영화 관련인들에 대한 조사를 실시했는데 이렇게 해서 실제 죄인으로 몰려 재판을 받게 된 사람은 단 한명도 없지만 (그것은 맥카시 조사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것은 간접적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더 이상 활동을 할 수 없게하는 감옥 아닌 감옥생활을 하게 했다. 겁이 난 스튜디오들이 이런 의심을 받게 된 사람들을 쓰기 꺼려했고 이런 현상은 갈수록 악순환으로 이어졌다.
챨리 채플린은 이래서 헐리우드를 떠난 제일 유명한 케이스의 하나이다. 그의 경우에는 영국국적이던 그가 여행차 유럽에 갔었는미국에서 입국허가를 안 주는 바람에 아주 돌아올 수도 없게 되 버렸다. 그는 이런 그 당시 상황을 <뉴욕의 왕 (A King in New York)>이라는 1957년 영화로 풍자해 주었다. 그후 그는 1972년 아키데미 시상식에서 그에게 특별상을 시상하기 위해 "모셔" 올 때 까지 미국에 일절 발을 들여놓지 않았다. 나치를 피해서 헐리우드로 가서 활동중이던 독일극작가 베르톨트 브레히트(Bertolt Brecht)도 하원에 출두했다가 그 싫은 경험 때문에 동독으로 영구 귀국해 버린 케이스가 되었다. 그러나 이렇게 피해를 입은 사람들은 대부분 우리가 익히 알고있는 이름들은 아닌데 그 이유는 이미 그들이 잊혀진 옛 인물들이여서도 그렇지만 무엇보다 이들의 60% 이상이 시나리오작가나 감독들이였기 때문에 일반에게는 별로 잘 알려진 인물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배우의 경우 스타급보다는 조연, 무명 배우들이 더 많았습니다 그러나 험프리 보가트 같은 스타도 "I Am No Communist"라는 기사를 한 잡지에 발표해서 그의 사상을 표백해야 할 정도로 이 시대는 험악했다.
작가들의 경우 다행히 이렇게 일단 낙인이 찍혀도 자기작품을 다른 사람이 쓴 양 가장해서 유통시킬 수 있었는데 이런 이 시대의 특이한 풍습을 묘사한 영화로 1976년 우디 알렌이 주연한 <프론트 (The Front)>가 있다. 이 영화에서 우디 알렌은 경마판 내기나 받아주고 먹고 사는 별 볼일 없는 친군데 부업으로 블랙리스트 당한 작가들의 작품을 자기가 쓴 듯 들고 다니며 작가 대행을 해 주는 프론트가 됩니다. 재미있는 사실은 이 블랙 코미디의 시나리오 작가 (월터 번스타인), 감독(마틴 릿), 그리고 출연진 다수 (그중 제일 유명한 사람이 지로 모스텔)가 모두 그 시절 실제 블랙리스트 당했던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그 외에도 좀 더 최근 예로 로버트 드 니로, 아넷 베닝 주연의 < Guilty by Suspicion> (1991) 이 있는데 이는 블랙리스트당한 한 감독이 겪는 갈등을 다룬 영화이다. <크루서블>의 마녀잡기에서도 그렇듯 블랙리스트에 일단 오르면 자기 사상이 온전하다는 선언만 해야할뿐 아니라 그 증명으로 다른 사람의 이름을 "불어야"하는 의무가 따르기 마련인데 이 영화의 로버트 드 니로 인물은 일을 해야하는 자신의 처지와 이랗게 친지를 배신해야되는 갈등사이에서 고민하는 내용이다. 그리고 또 "Memories" 노래로 널리 알려진 로버트 레드포드, 바브라 스트라이센드 주연의 <추억 (The Way We Were)> (1973) 에서도 이 시대 상황이 약간 언급된다.
http://www.cineseoul.com/cineseouldb/screendic_view.html?dictID=41&dtype=en&index=M&pos=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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