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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사슴에 관한 은유

oldhabit 2008. 5. 24. 12:20

젊은 사슴에 관한 은유

박범신 | 깊은강 | 2002.04.15 | 271p 

 


카프카와 집단화 증후군

 


 한 열흘 동유럽을 다녀왔다.

 잘츠부르크에선 모차르트의 음악을 들었고 비엔나의 숲을 걸을 땐 베토벤을 생각했으며 프라하의 유태인 거리에선 불우하게 살다 간 카프카의 영혼을 만났다. 특히 카프카의 부친이 책방을 하던 자리가 여전히 책방으로 남아 있는 것에 나는 큰 감동을 받았다. 부친의 강요에 못 이겨 법학을 공부해야 했던 카프카가 다녔던 학교도 그대로 남아 있었다.

 카프카는 1883년생이다.

 백 년도 더 된 그 옛날, 지구의 반대쪽에 있던 나라에서 태어난 젊은 카프카가 부모와 사회로부터 억압받고 강요당했던 사회적 삶의 밑그림이 지난 개발독재 시절 우리의 젊은이가 강요받았던 것과 어쩜 그리도 신통하게 닮았을까.

 아니 개발독재 시절로 끝난 게 아니다.

 지금도 너무 많은 우리의 부모들은 자식이 '법대'에 가서 판ㆍ검사가 되기를 바라지 않는가. 카프카는 평생 아버지의 억압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했다. 그는 학생 시절부터 문학을 꿈꾸었으나 아버지의 강요를 뿌리치지 못하고 법학사가 되었으며 죽을 때까지 보험협회에서 근무했다. 마술적 리얼리즘의 문법을 통해 현대 사회의 불안한 징후들을 절망적으로 그려낸 카프카의 소설 세계는 그의 불안했던 개인사적인 삶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부모는 언제나 안정적 삶을 가르친다.

 19세기 카프카의 아버지가 법학사가 되길 강요함으로써 자신의 삶을 불행하게 했듯, 21세기 동아시아의 우리나라 부모들도 카프카의 아버지로부터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가령 '서울법대'는 출세를 위한 직진 코스이고, 출세만 하면 행복하고 안정된 삶이 보장된다는 식의 고정관념 등이 그렇다. 개발독재 시절에 만들어낸 성장제일주의의 잘못된 신념이 조작해낸 행복의 조건이다.

 카프카는 법학사가 되었다.

 그러나 법학사로서 그는 결코 행복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자신의 삶이 자기 자신으로부터 극단적으로 유리되는 비극적 인식 속에서 중년조차 살지 못하고 죽었다. 안정된 삶이 곧 행복한 삶은 아니다. 사회 보편적 가치관이 '안정'이라고 표찰을 붙여주는 삶이란, 예상이 가능하다는 합리성은 확보하고 있을지 모르지만 감정의 해방은 없다. 감정의 해방이 없으니 자유로운 삶이랄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삶은 그에게 언제나 보편적인 '틀'이 되기 쉽고, 그러므로 '틀'이 되어버린 그의 삶은 그 자신의 삶이라기보다 오로지 사회적 존재로서의 삶일 뿐이다.

 유명한 『행복론』을 쓴 알랭의 말.

 행복이란 '스스로 만족하는 지점'에 있다고 했다. 스스로 만족한다는 것은 주체로서의 자유로운 선택이 전제돼야 할 것이다.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알고, 그 원하는 것을 스스로 구하고자 하는 자유로운 선택이 전제되지 않는다면 어떻게 행복한 만족을 얻을 수 있겠는가.

 문제는 개인의 자유이다.

 우리는 고통스런 과정을 통해 정치적인 민주화를 확보했지만, 요즘 뉴스를 접하다보면 개인의 자유는 별로 확보한 것이 없는 듯 보인다. 잦은 문제조차 해결을 위해선 일단 집단화해야 한다는 집단화 증후군에 걸려 있다. 정치가 패거리주의인 건 그렇다 치더라도 언론ㆍ문화ㆍ종교 따위도 끝없이 집단화하면서 기싸움, 기득권 확대에 혈안이다. 섣부른 개인의 목소리는 단번에 집단적으로 '왕따'당해 회생 불능 상태에 빠지기 일쑤이고, 패거리에 소속되지 않는 교제나 요구 또한 사상누각으로 무너지는 일이 다반사다. 친구를 사귀는 일조차 동창회다 무슨무슨 동호회다 패거리 과정을 밟아야 그 우정이 보호받는다. 더욱 절망적인 것은 '개인의 목소리'라고 가장한 발언도 속을 뒤집어보면 더욱 강고한 집단화의 속셈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이다. 어딘가 소속돼야 살아남는다는 불안감이 팽배하고 있다. 어떤 친구는 터놓고 무슨무슨 모임에 나오라면서, 그래야 자식 혼사 때 좌석이라도 채울 것 아니나며 민망한 듯 웃는다.

 소속된다는 건 안정감을 준다.

 그렇지만 소박한 모임일지라도 일단 집단화되고 나면, 집단 이데올로기가 생겨난다. 집단 이데올로기에 도전하는 개인은 심각한 타격을 입어야 한다. 한번 집단화되고 나면 그 집단은 개인의 굴복을 끝없이 요구하고, 집단은 곧잘 집단끼리 권력투쟁을 해야 하며, 그 사이에서 개인은 자기 정체성과 집단 이데올로기 사이의 심각한 균열을 만나 불안한 상태에 빠진다. 보라, 정치ㆍ언론ㆍ문화 권력들의 미친 듯한 이전투구 저질 싸움 때문에 거기에 소속되거나 관계 맺고 있는 우리 모두 지금 얼마나 불안한가.

 이래선 행복해질 수가 없다.

 우리 모두 카프카처럼 위대한 작가가 될 수 없듯 또한 카프카처럼 어둡고 불안하게 살 수도 없다. 행복한 삶을 위해서는 용기 있게, 광기의 집단화, 혹은 패거리 증후군에 우리 스스로 편입되길 거부해야 할 것이다. 진정한 민주주의는 패거리주의로부터 그 구성원 각자가 불안하지 않게, 자유로이 사고하고 행동할 수 있도록 보장해주는 체제이다. 그 체제는 법률이나 정치권력이 만들어주는 게 아니다. 타인의 자존을 존중하고 동시에 나의 자존을 드높이는 정신의 업그레이드를 통해 확보되는 체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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