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당에 관하여
들어가며
와당은 고대 건축재료의 하나로서 석가래의 머릿부분이나 처마를 보호하기 위해 처음 만들어졌다. 재질은 주로 진흙성분을 가진 회도흙으로 만들어졌으며 뒤에 석조각이 이루어졌고, 다시 동이나 철 그리고 청기와까지 발전을 했다. 와당의 면에는 도안, 화상, 문자등의 많은 장식을 했는데, 이것은 실용과 예술이 유기적으로 통일된 것으로 지금 사람들이 고대 정치, 경제, 문화를 연구할 수 있는 중요한 소스를 제공해 주고 있다.
고고자료에 따르면 가장 먼저 발견된 와당은 협서(陜西) 주원(周原)유적지에서 발견된 서주(西周) 중만기(中晩期)시기의 것으로 소면(素面)와당과 중환문(重環紋)의 도안(圖案)이 장식된 와당 이렇게 양종이 있는데 반원형(半圓形)을 하고 있다.
전국(戰國)시기는 역사상 대변혁의 시기로 사회경제가 번영하고, 공예가 장족의 발전을 하였다.
각 제후국의 중요 도시는 진일보하게 발전하여 궁실(宮室)건축에 이미 많은 와재(瓦材)가 사용되어서 와당의 제조 뿐 아니라 와당의 제재(題材)가 아주 많이 발전했으며, 분명한 지역 특색도 나타났다.
낙양 주왕성(周王城)의 주요 와당은 소면(素面)반와당과 동물문와당, 그리고 간혹 운문와당이 있었고, 조국(趙國)은 소면원형와당이 위주였지만 소량의 삼록(三鹿)과 변형된 운문와당이 있었다. 초국(楚國) 초기는 소면반와당이 위주였고, 중기이후는 운문반원와당이 나타났다. 제국(齊國)은 수목쌍수권(樹木雙獸卷)운문반와당과 소면반와당이 보이며, 연국(燕國)은 도철(饕餮)문과 산운문와당이 많고, 노국(魯國)은 운문와당이, 진국(秦國)은 하나의 동물도안 예로 록(鹿), 표(豹), 섬여(蟾蜍-두꺼비)등이 있었지만 중만기(中晩期)의 진(秦) 감양성(咸陽城), 지양성(芷陽城) 유적지에서는 하나의 동물문양의 와당은 적어지고, 십자형의 격계와 운문도안중 문자를 포함한 것 등이 보이나 그것의 자형은 도안에 가깝고, 이후에 문자와당은 점점 더 단아해져 갔다.
진(秦)이 육국(六國)을 통일한 이후 와당예술은 새로운 사실예술의 모양을 지니게 되었다. 이시기의 도안와당은 소용돌이문양이 많아 진이 물을 숭상했던 것과 관계가 있어 보인다. 화상(畵像)와당은 수(樹), 엽(葉), 마(馬), 어(魚), 청연(蜻蜒), 주조(朱鳥)등의 도안이 많았으며, 조기 진인이 수렵에서 농업생활로 변해 가는 것을 반영해 주고 있다.
한대는 중국역사상 봉건사회가 가장 번성한 시기로 남북이 교류하고 변강(邊疆)과 내지(內地)의 왕래가 빈번했으며, 정치도 안정되고 경제도 번영하였다. 여기에 힘입어 문화예술도 상당히 발전을 하게 되어 와당도 상당히 많이 변했는데, 가장 큰 특징은 구체적인 사물을 표현하던 것이 점점 추상적인 사의(寫意)의 형태로 변해 간다는 것이다. 농・목업생활을 반영하던 것이 사신(四神)와당이 성행하게 되고, 도안문양의 와당도 역시 운문과 기하학적 문양의 와당으로 변해가고 문자와당의 글자수도 한자에서 여러 자까지 나타나고, 사구(詞句)가 풍부해지며, 장법포국(章法布局)도 각기 달라져 와당의 전성시기를 이룬다.
그리고, 사회경제가 발전함에 따라 황가궁전군(皇家宮殿群)에서만 사용하던 와당이 민간에서도 대량으로 사용하게 된다.
위진남북조 시기는 불교의 전래로 연화(蓮花)문, 수면(獸面)문 와당이 점점 많아지고, 운문도안은 간단하게 변화하며 없어져 간다. 진대(秦代)때 이미 출현한 연화문와당은 불교의 부흥과 함께 발전하여 연화문이 복잡해지고 주위에도 장식성이 강해져 연주(聯珠)문 등이 등장한다.
위진수당(魏晉隋唐)시기에서 송대(宋代)까지는 장식제재(裝飾題材)로서 와당이 성행하고 요금(遼金)시기에는 다시 수면문(獸面紋)이 재등장하는데 이것이 중국 고대와당예술의 마지막 빛이 된다.
와당예술은 한 대에 가장 성행하여 그 이후로는 점점 쇠퇴되며, 지금 그 연구도 진,한 대의 특정시기로 국한되어 있다.
와당예술도 다른 예술과 마찬가지로 처음엔 실용으로 시작해서 점점 예술성으로 가며, 그런 가운데 다음과 같은 몇가지 분류를 나누어 볼 수 있다.
1.화상(畵像)와당
앞에서도 잠깐 언급을 했듯이 화상와당은 동물문과 식물문, 그리고 방실(房室)건축문 등이 있다.
동물문와당 : 화와(畵瓦)에 동물의 제재(題材)와 조형의 발전으로 분석할 수 있으며 크게 선진, 진대, 한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선진 시기의 동물문와당은 지방의 특색을 많이 가지고 있다. 연국(燕國)의 도철(饕餮), 쌍용문(雙龍紋), 제국(齊國)의 수목쌍수문(樹木雙獸紋)등은 모두 전형적인 의의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와당의 도상(圖像)중에 기봉(夔鳳)등 도등(圖騰)형상이 나타나면서 조기(早期) 인류가 가지고 있던 의식형태 위에 자연의 신비역량의 경외(敬畏)현상이 반영되었다.
진대(秦代) 와당 중 록문(鹿紋)이 10여종, 그리고 분록(奔鹿), 와록(臥鹿), 쌍록(雙鹿)등 대다수는 전국(戰國)진대(秦代)의 물건들이고 모두 진(秦) 도옹성(都雍城)유적지에서 발견되었다.
진국(秦國) 화상와당 중 전형적인 것으로 쌍견(雙犬), 봉조(鳳鳥), 군수(群獸)등 제재(題材) 대부분이 선민들의 수렵생활과 상관이 있고, 그 외 봉상현성(鳳翔縣城) 남진(南秦) 대정궁(大鄭宮)유적지에서 출토된 수문(獸紋)와당, 서안(西安) 북교(北郊) 서가만(徐家灣)에서 출토된 표문(豹紋)와당 등은 모두 다 동시기의 동물문와당 중의 정품(精品)이다.
선진(先秦)시대의 동물와당은 대부분 현실생활 중 항상 볼 수 있었던 동물들이 대다수이며, 부조(浮彫)의 기법으로 만들어졌다.
진대(秦代)의 동물와당은 전국(戰國)의 풍격을 그대로 계승하면서 더욱 발전시켰다. 진대(秦代) 화상와당은 이미 선진(先秦)와당의 형식을 더욱 규정지었으며, 사록(四鹿), 삼학(三鶴), 사어(四魚), 쌍조(雙鳥)(혹은 쌍봉조양(雙鳳朝陽)이라고도 함)등 그 구도가 균형대칭(均衡對稱)의 방법을 썼고, 어떤 것은 와면(瓦面)에 격계(格界)를 두기도 했다. 이시기의 와당은 전국(戰國)의 진(秦)의 풍격을 답습했으며, 와당의 변(邊)에 가는 현선(弦線)으로 원을 그려 놓기도 했다. 동물도 단형(單形)으로 그리던 것을 쌍형(雙形), 삼형(三形), 사형(四形), 심지어 다형(多形)으로 그리게 되고 부조(浮彫)의 기초 위에 점, 선이 운용되었다. 양문단선각화(陽紋單線刻畵)가 위주였고 동시에 동물의 눈과 이빨 등의 부분은 점을 위주로 해서 운용되었다. 와면상의 화상의 배열도 격계선을 추가하는 것 이외에 사방연속, 팔방연속 대칭과 산점연철(散點連綴)등의 방법을 사용하였다. 또한 구도의 어울림을 위해 과장과 간단화도 하였다. 이렇듯 이 시기의 동물문와당은 전국 진(秦)시대의 질박한 기운을 보존했으며, 또 사실에 의거한 변화와 생동의 풍격을 만들어 냈지만 수랑은 이전보다 많이 감소 하였다.
한대는 봉건사회의 전성기로서 경제가 번성했고, 궁전의 규모는 진대의 기초 위에 더욱 웅위장관(雄偉壯觀)으로 변했다.
한 대의 화상와당 중 가장 유행한 것은 바로 사방을 상징하는 청룡, 백호, 주작, 현무의 사방신(四方神)일 것이다. 지금까지 보여진 사신(四神)와당은 크게 두종류로 나눌 수 있다.
그 하나는 와심(瓦心)에 와주(瓦柱)가 장식되어 있는 것으로 장중숙목(莊重肅穆)한 풍격을 가지고 있으며, 대부분 왕망(王莽)시기의 구묘(九廟)유적지에서 출토되었으며, 왕망때 건설된 구묘는 서한 궁전의 건재(建材)를 많이 사용했기 때문에 와당도 당연히 서한 궁전건축의 것을 활용했다. 이러한 사신와당은 도안이 아주 규칙적이며, 모두 왼쪽을 바라보고 있다.
나머지 한 종류는 와면(瓦面)에 와주(瓦柱)가 없고 사신의 조형이 더욱 자유분방하며 표현기법도 더욱 세부적이고 섬세해져서 모습도 서로 같은 것이 없다. 특별한 것은 장양궁(長楊宮)유적지에서 출토된 사신와당으로 청용와당 이외에 모두가 오른쪽을 바라보고 있다.
많이 보이는 단신(單身)의 사신와당 이외에 한(漢) 장안성(長安城)유적지에서 또 다른 사신도안의 와당들이 발견되었는데 사신이 사방으로 배열되어 있는 것이다. 그 외 낙양에서 출토된 동주(東周) 사신반와당(현무와당은 보이지 않음)은 백호의 하반신만 있는 것도 있고, 주작의 상반부만 있는 것으로 보아 사신와당이 적어도 동주시기에 출현했다고 볼 수 있다. 사신와당은 삼국시기까지 활용이 되었다. 서안시(西安市) 문물관리국(文物管理局)이 소장하고 있는 당심(當心)에 섬여(蟾蜍-두꺼비)가 장식되어 있는 와당에는 좌우로 용호(龍虎)도안이 있고, 용호 모두다 당심(當心)을 등지고 있으며 조형이 아주 아름답고 세공방법 또한 아주 정교하여 한 대 화상와당의 정품(精品)으로 손꼽히고 있다.
마형(馬形)와당이 가장 많이 출토된 곳은 노국(魯國)의 땅이며, 두 마리의 말이 수목(樹木)의 양측에 배치되어 있는 것, 또는 사람이 탄 두 마리의 말이 서로 노니는 모습 등은 이미 생동감이 있어 정태(情態)를 갖추고 있다.
총자도조문(塚字饕鳥紋)와당은 ‘총(塚)’자를 장식하고 그 밑에 도조(饕鳥)가 있는 모양이다. 도조는 독수리의 머리 부분을 묘사해 놓은 것으로 이것은 능묘를 지키고자 하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한대 화상와당의 수량은 이전에 비해 아주 작지만 제재(題材)와 조형, 예술표현수단 등은 이미 아주 성숙한 완숙미를 보여주고 있다. 한대의 동물문와당은 일반적으로 크며, 대부분이 원형의 와주(瓦柱)가 있고, 도상형식도 하나인 것과 여러 것이 같이 있는 것 두 종류가 있으며, 제재도 현실과 신화 두 종류가 있다. 기법으로는 선진(先秦)의 평면부조(平面浮彫)를 계승하면서 진대(秦代)의 철(凸)의 선질이 있는 동시에 점점 더 입체부조의 표현형식으로 발전해 갔다. 교묘하게 점, 선, 면을 이용하여 종합적인 기법으로 승화시켜 현실주의와 낭만주의를 서로 잘 결합시킨 성공적인 전범(典範)이라 할 수 있다.
식물문와당 : 식물문와당은 수량이나 종류에서 동물문와당보다 현저히 작다. 그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전국시기가 될 것이고 기법 또한 사실적이고, 자연계에서 볼 수 있는 흔한 수목(樹木), 꽃, 잎 등을 대상으로 묘사했다. 그 중 전국(戰國) 제국(齊國)의 수목문과 진의 연화문, 화뢰문(花蕾紋), 잎문양 등이 비교적 전형으로 불리워 진다.
진・한 이후 식물문와당의 종류는 급격히 적어지나, 위진남북조(魏晉南北朝) 시기에 다시 연화문와당이 등장하고 당송(唐宋)이후엔 식물문와당이 주류를 이룬다.
2. 도안(圖案)와당
예술의 원류는 생활에 있고, 또 그것이 생활의 수준을 한단계 업 그레이드 시키고 있다. 와당문의 장식도 이러하여 구체적인 것에서 추상적인 것으로 변해 갔었고 도안와당의 출현은 인간생활에 있어서 자연적인 것에서 가공적인 것으로의 전환을 말하며, 간결한 선만을 이용한 것에 대칭, 중첩 등을 가미하여 형식미관을 표현할 뿐만 아니라 주제를 표현하는 지혜의 결정체이자 정신문명의 진일보한 표현이였다.
고고자료에 의하면 최초의 도안와당은 서주(西周) 중만기(中晩期)의 중환문(重環汶)반와당으로 청동기상의 문양을 활용하고 있으며 이러한 풍격은 전국이래 통일 진의 시기까지 계속 계승된다. 규문(葵紋)와당은 전국 초기에 처음 보이며 진대(秦代)에 와서는 특색이 있는 도안 문양으로 자리를 잡게 된다. 규문 이후에는 운문이 유행하게 되니 서한(西漢) 초기는 운문이 자리를 굳히게 된다. 운문은 춘추전국시기에 이미 출현을 하며 진・한 시기엔 도안와당의 주도적인 지위를 확립한다. 요즘 보이는 운문도안은 십 여 종이 넘으며 기본적인 구도가 흡사하나 천편일률적인 것은 아니다. 이런 운문와당의 문양의 변화는 그 분포된 지역과 특색에도 관련이 있다. 한 초기의 운문와당은 격계가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중만기(中晩期) 이후는 운문도안과 격계에 서로 공간이 생기며 당심(當心)엔 일반적으로 와주(瓦柱)가 있고, 와주 주위에는 연주문(聯珠紋)이 있으며 도안의 선은 비교적 가늘며, 와당의 가장자리는 비교적 넓고 두터웠다.
동식물변형문(動植物變形紋) : 진의 도함양(都咸陽)에서 출토된 권운문(卷雲紋), 선문(蟬紋), 화엽문(禾葉紋) 등과 임동(臨潼) 진시황릉 안에서 출토된 운호기용문(雲虎夔龍紋)와당이 대표적인 것이다. 이것들은 모두 사실의 기초 위에 세련되고 합당한 간단화를 시켰으며, 원형의 와당면 안에 도안을 전환시켜 완전한 도형결구를 만들어 냈고, 대칭(對稱), 균제(均齊), 평형(平衡) 등도 이루어 냈다. 이외에 전국(戰國) 제고성(齊故城)에서 출토된 수목변형문(樹木變形紋) 등도 있다.
3. 문자(文字)와당
문자와당은 와당의 장식성의 발전의 대변혁 단계로 볼 수 있으며 와당예술 발전의 또 다른 하나의 큰 획이라고 볼 수 있다. 문자로서 와당을 장식하는 것으로 인간의 사상과 의식이 예술형식 중에 가장 직접적으로 표현되어 진 것으로 볼 수 있으며 또 그 당시 문자가 사회에 이미 보편적으로 보급되어졌다는 것을 증명해 주기도 한다.
문자와당을 왜 쓰기 시작했는가에 대해서는 아직도 많은 의견이 있다. 어떤 이는 와당의 목적 자체가 건축물의 실용성, 장식성에 있고 또 문자와당중에 초기의 것들이 궁전의 명칭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봐 궁전의 이름을 알리는 목적으로 쓰여졌다고 하고, 또 다른 이는 이미 그 시대에도 미의식의 작용으로 문양이나 그림이 아닌 문자미(文字美)의 의식이 있었다고 하는 설, 그리고 문자와당이 많이 등장하는 시기엔 이미 글자의 보급이 보편화되어 일반인들도 와당에 글자를 장식 할 정도의 능력이 있었다는 설 등도 있지만 지금까지 정확한 정설이라고 확실히 밝혀진 것은 아직 없다.
와당이 최초로 궁전의 명칭을 사용한 것은 전국시기에서 볼 수 있다. “우양천세(羽陽千歲)”, “우양천추(羽陽千秋)” 등 문자와당은 전국 진 무공(武公)때의 우양궁(羽陽宮)에 사용된 와당이다. 또 “연궁(年宮)” 와당은 진 혜공(惠公)때 만들어진 기년궁(祈年宮)에 사용된 와당이다. 고고자료들을 볼 때 전국과 진대의 중요 건축유적, 예로 협서옹성(陜西雍城), 이현연하도(易縣燕下都), 임치제고성(臨淄齊故城), 한단조고성(邯鄲趙故城), 낙양동주왕성(洛陽東周王城), 강릉초기남성(江陵楚紀南城)과 진 함양성(咸陽城), 진시황릉(秦始皇陵) 등 전국 진대 문화층에 균일하게 문자와당이 발견되고 있다. 오늘날 출토되어 나오는 문자와당들을 보면 서한의 시기를 넘어서는 것이 없다. 전해지고 있는 “우양천추(羽陽千秋)”, “란지궁당(蘭池宮當)” 등의 와당은 모두 한대의 유물들이다.
문자와당은 종류도 많고 내용도 광범위하여 한대의 사상과 관념, 그리고 사회습관을 엿볼수 있다.
문자와당은 내용에 근거해 궁전(宮殿), 관서(官署), 능묘(陵墓), 사당(祠堂), 기사(記事), 길어(吉語) 등으로 분류할 수 있다.
궁전류(宮殿類) : 주로 궁전 등 건축명칭 등을 적어 넣은 와당을 말한다. “기년궁당(蘄年宮當)”, “란지궁당(蘭池宮當)”, “감림(甘林)”, “황산(黃山)”, “성산(成山)” 등이 이러한 문자와당이다.
관서류(官署類) : 관서는 한대 중앙집권제를 강화하면서 만든 관찰 기구이다. 많은 문자와당이 이 관서와 관계가 있다. “공(空)”,“좌공(左空)”,“우공(右空)”,“도사공와(都司空瓦)”,“종정관당(宗正官當)”등이 이러한 문자와당이다.
능묘류(陵墓類) : 한대에는 순장이 유행하여 황가(皇家)뿐 아니라 관호족(官豪族)들도 큰 능원, 묘총을 만들었다. 한 대의 많은 문자와당들은 능묘에 사용된 것들이다. “제원(齊園)”, “제원궁당(齊園宮當)”, “제일궁당(齊一宮當)”, 총상대당(塚上大當), 총(塚), 총상(塚上) 등이 이러한 문자와당이다.
사당류(祠堂類) : 사가(私家)에 소속된 사당건축물에 사용된 와당으로 “마씨전당(馬氏殿當)”, “마씨만년(馬氏萬年)”, “오씨사당(吳氏捨當)”, “마(馬)”, “이(李)”, “김(金)”등이 이런 문자와당이며, 이미 문자와당이 민간에 까지 광범위하게 퍼져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기사류(記事類) : 이 종류의 문자와당은 “한병천하(漢竝天下)”, “한겸천하(漢兼天下)”, “유한삼년대병천하(惟漢三年大竝天下)”등이 있고 모 종의 역사사건을 기록하고 있다.
길어류(吉語類) : 길어류의 와당은 종류도 많고 내용도 풍부하여 그 사용도 궁전, 관서등 광범위하게 사용되고 있다. “천추만세(千秋萬歲)”, “장락미앙(長樂未央)”, “연년익수(年年益壽)”, “장생무극(長生無極)”, “부귀(富貴)”, “억년무강(億年無疆)”등이 이런 문자와당이다.
한대 문자와당은 서법예술에 있어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와당문자는 특정한 공간 내에 사상과 내용을 표현하고 형식미와 장식미를 동시에 보여주며 포국(布局), 결구(結句)상 모두 교묘히 안배를 하는 등의 독특한 양식으로 서법예술을 보여주고 있다.
문자와당의 결구는 한자부터 수십 자에 이르기까지 그 포국과 배치등이 천차만별로 다르며, 이러한 것이 서법예술로 보여지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예를 들어 한자의 결구는 와면 (瓦面) 전체를 장악하면서 필획도 와당의 형태에 의지하며 만들어져 있고, 두자의 결구는 상하 혹은 좌우로 배치하여 그 아름다움을 극대화하며, 네자인 것은 격계를 두어 그 격계 안에 한자씩 배치를 하여 역시 교묘하게 와당의 형태와 맞추거나 아니면 아예 격계가 없이 자연스럽게 와당의 형태와 맞춘 것들이 있고, 다섯자인 것은 네자는 위에 상술한 것과 같이 하면서 한자만 와당의 와심속에 넣은 것 등이 있고, 여섯자에서 많게는 열자 이상인 것은 위에 상술한 원칙을 지키면서 세자씩 배열한다는 등 이렇게 서로가 서로를 소밀상동(疏密相同)하게 운용하고 있다.
또 어떤 문자와당은 식물문이나 동물문과 같이 이루어진 것들도 있는데 이것은 더욱더 장식성을 강조하고 있다.
한대는 예서가 성행했지만 와당문자는 대다수 무전(繆篆)과 소전(小篆)으로 씌여졌다. 이러한 와당문자는 선질의 변화와 강유(剛柔), 방원(方圓), 곡직(曲直) 등을 충분히 활용할 수가 있어 와당 속에 서법미와 장식미를 동시에 표현할 수 있었다.
문자와당중 아주 많은 것들이 결구나 공간상의 필요로 필획을 간략화하여 이것이 수의성(隨意性)을 가지고 있다. 어떤 것은 심지어 자(字) 그 자체도 감필(減筆)을 하여 판별하기 어려운 것도 있다.
한대 이후로는 와당예술이 쇠퇴의 길을 걸어 문자와당이 아주 적어졌으며, 수당(隋唐)에 와서는 불교의 영향으로 연화문와당이 유행을 했다. 그리고 동시에 불상(佛像)와당과 역사(力士)와당도 지금 출토가 되고 있다.
마치며
중국고대의 화려했던 궁전 등의 건축물이 시간이 흐름에 따라 지금은 그 흔적을 찾아보기가 힘들지만 아직까지 발견되고 있는 와당이 그 당시의 화려했던 건축물들을 대신 말해주고 있다. 이러한 와당은 건축의 실물(實物)자료일 뿐만 아니라 문물로서 또 고고학적, 문자학적, 그리고 금석(金石)서법, 조각회화, 공예미술 등 각 방면에 아주 높은 연구가치를 지니고 있어 중국 고대의 진귀한 문화예술의 유산(遺産)이자 보고(寶庫)이며, 당시의 정치, 경제, 문화방면의 연구에 있어서도 중요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