書/슬기로운門

서체의 변천

oldhabit 2008. 5. 24. 13:26

Ⅲ.  한글 書體의  變遷過程
    

   한글서예의 기점으로 삼을 수 있는 시기는 다양하다. 본 소고에서는 한글서예의 기점을 訓民正音頒布 때부터1)로 보고 고찰해 보고자 한다. 왜냐하면 寫本이라면 말할 것도 없지만 刻本이나 活字本에 있어서도 그 취향이 약간 다를 뿐 음미하는 맛은 마찬가지이고 대부분 각본이나 활자본에 새겨진 자체가 누군가의 肉筆에 의한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2)이다. 훈민정음은 앞으로 사용할 문자를 만들어 널리 알리기 위한 방법으로 목판인쇄를 이용했을 따름일 뿐 15세기 중엽인 당시에는 이미 붓으로 한문이 쓰여졌다.  글씨에는 書法이 존재했으며 새 문자에 필법이 배제될 수 없었을 것3)이다.  

  한글서체도 시대에 따라 사회적 환경에 따라 변화하게 되는데 그 내면에는 실용성의 추구가 깔려있다. 또한 필사하는 도구가 붓이므로 자연적으로 서법의 원리를 따라 한문서체와 비슷한 변천과정을 거치게 된다. 이에 한글서체의 변천과정을 시대별로 살펴보고자 한다.

 


1. 創製期 (세종-세조)

 


  한글은 한자와는 달리 意圖에 의해 창조된 것이다 그러므로 훈민정음은 한문서체가 소전으로 통일하여 하나의 양식을 갖출 수 있게 된 것과 비교될 수 있다. 한문에서는 전서만 서체로서의 양식을 갖추는데 시간이 걸렸을 뿐 나머지 醴, 楷. 行, 草書의 성립과 완성은 秦漢에서 東晋에 이르는 기간으로서 조선왕조에 비해 그다지 긴 세월이 아니었다.  민주정신을 배경으로 해서 훈민정음이 창제되었으나 실제 민중생활에는 실용화가 되지 못하고 다만 불경언해 등 간행사업에만 이용되던 것이 조선조 초기의 실정이었다.4)

  훈민정음창제의 기원은 古篆起源說이 가장 유력한데 古篆을 모방한 이유는 篆書의 엄격한 결구와 조형감각이 제왕의 권위와 위엄을 상징하기에 알맞고 秦의  小篆으로의 문자통일이 갖는 상징적인 의미와도 상통한다고 보여지기 때문5)이었다.

  창제기 서체상의 특징은 <훈민정음해례본>, <용비어천가>, <석보상절, <동국정운> 등에서 그 근원을 찾을 수 있다.  

  天地人 三才로 대표되는 ㅣㅡ 이  훈민정음 반포 3년 후 世宗 31년 간행된 월인천강지곡에서 점이 획으로 원필이던 획이 방필로 변하고, 世祖년간 부터는 필사화의 기운이 보이기 시작한다. 글자의 특징은 簡潔하고 형태는 長方形으로 안정감이 있고 字間行間이 일정하며 점과 획의 굵기 변화가 없다. 

 


2. 過渡期 (성종-현종)

 


  이 시기는 창제시기의 서체에서 궁체가 체계적으로 형성되기 까지의 기간을 가리키는데, 정착화 되어있지는 않지만 다양한 서풍을 느낄 수 있는 자료가 많이 눈에 띄이며 서체로 발전할 수 있는 過渡期적인 국한문혼서궁체로의 변천과정을 느낄 수 있는 御筆 등에서 다양한 맛을 느낄 수 있다. 실용화로의 過渡期라고 볼 수 있다.

  成宗조(1469-94)는 활발한 諺解사업으로 어느 시기보다도 많은 서적이 간행되었는데 한글의 사용이 활발해 지면서 창제기의 서체에서 벗어나 붓글씨다운 서체로 변모하게 된다. 또한 일상화된 한글 사용은 창제당시의 제한을 무너뜨리면서 音韻체계에서 造型체계로의 변화를 보이기 시작한다.  한글로 여성교육이 시작6)되었으며 16세기에는 사대부들 사이에 時調와 歌辭文學이 유행되어 한글의 쓰임은 더욱 활발해졌고 木版本이나 肉筆에서 국한문 혼서가 많이 나타나고 있다. 

  또한 壬辰丙亂 후 국민들의 주체의식이 살아나 한글로 쓴 간행물이 늘어나게 되었으며 가사나 시조에 머물렀던 문학작품이 소설을 쓰는 사람이 많아지게 되고 이것을 한글로 많이 써서 읽혀지게 되었다. 즉 平民문학이 활발하게 전개 되었다.7) 또한 평민들 사이에 널리 읽혀지자 영리를 목적으로 坊刻本의 출판이 성행하게 된다.

  궁중에서는 궁체의 틀이 잡혀지는 시기이기도 하다. 각종 御筆의 필적에서는 궁체로 체계가 잡혀가는 맥락과 필의를 보여주고 있다.

  <훈민정음언해본>, <여씨향약언해>, <선조어필>, <효종어필>, <명성왕후친필>, <인선왕후 친필> 등이 있다.

 


3. 定立期 (숙종-갑오경장전)

 


   한글서체의 隆盛期로 볼 수 있는 이 시기는  정자와 흘림에 걸쳐 전형적인 궁체가 자리잡히고, 일반 書簡文류 등 필사본이 성행했을 뿐 아니라 英正祖 시대에는 활발한 서적간행과 언해사업을 통해 전개된 활자개발과 서체변화가 주목된다. 영정조의 편찬사업에 힘입어 詩歌와 小說이 印刷되거나 筆寫되는 일이 많아졌다. 이 당시에 궁체로 필사된 소설류의 문헌이 장서각규장각국립도서관 등에 많이 소장되어 있다. 이러한 궁체류의 진본들은 예술작품으로 쓴 것이 아니고 실용에 따라 필사한 것이기 때문에 대부분 필사자와 필사연대가 명기되어 있지 않아 아쉬움이 많다.

  궁체는 국한문을 혼용하는 범위에서 벗어나 순국문의 위치에서 발전된 서체로  정자와 흘림으로 나뉘며 흘림에는 반흘림, 진흘림으로 구분되고 있다. 양식상으로는 謄書體와 書翰體로 나누어진다. 등서체는 소설류의 한글을 베껴 쓴 글씨체인데 배자자형필법 등이 규칙적이며 정돈된 느낌을 주는 글씨이다. 서한체는 편지글을 쓴 글씨체인데 등서체에 비하여 불규칙적으로 써서 자유분방하여 필자의 개성이 뚜렷이 나타난다. 8)

  궁체가 발달한 이유는 書札이 매일 드나들었고 책이 무수히 飜譯謄寫되었기 때문인데 즉 서찰의 왕래는 주로 왕실과 외척의 사이에 매일의 글월(大內간 候의 서찰), 특정한 날의 封書(봉서:직접 왕후께 드리는 서한)의 양종이다9).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중국의 원군이 오면서 많은 소설류가 그들에게 묻어서 들어오게 되는데 시간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궁 안에서 소설을 읽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그 많아진 양을 궁녀들은 필사해야만 했고 자연 궁체라는 글씨체는 다듬어져갔다.10) 왕조실록을 통해서 보면 언문의 사용은 궁중에서 더욱 활발하였고 정치문서에까지 참여하였다. 문화가 어느 한 계급의 독점물이 되었던 봉건사회였기 때문에 국문서예의 발달을 도맡아 온 것은 여류사회의 최상급인 王室의 內典이며 이를 중심으로 한 귀족사회의 여성들이 원동력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11)

  궁중글씨는 조선말기에 이르러 이름도 밝히지 않는 현상궁, 천상궁, 서기이씨 등에 의하여 꽃을 피웠으며 사후당 윤백영(1888-1986)은 궁중글씨를 작품화하고 해제가지 하여 현대화하는데 가교적 역할을 하였다.

  궁체에서 비로소 점획을 통하여 붓 쓰는 법이 드러나니 이는 필법이 두드러지게 발전된 것이다. 특히 세로획이 강조되며 “間架結構法”12) 의 원리에 따라 합리적인 조형미를 갖추도록 한 것이다.

   또 한편으로는 조선말기 사대부 집안에서나 일반인들은 불경 베끼기, 편지글쓰기, 소설 베끼기 등 언문으로 쓰는 일을 많이 하였는데 궁체와는 다른 맛을 풍긴다. 그 중 1800년대의 추사 김정희와 그의 모친 유씨부인 글씨, 부친인 김노경의 글씨등 추사집안의 한글편지글이 많이 전해져 오는데 궁체와는 필체가 전혀 다른 글씨체로 힘찬 서선글자간의 조화미는 궁체와 다른 풍을 보여준다.. 일반인들에게도 궁체가 아닌 글씨체의 다양한 글씨체가 성행하여 오늘날까지 많은 필사본이 전해지고 있다.13)

  <숙종어필>, <인현왕후 친필>, <순원왕후 친필>, <옥원듕회연>, <낙셩비룡>, <남계연담>, <서기이씨글씨>, <천상궁글씨>, <추사김정희편지글> 등이 있다. 

' > 슬기로운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지고의 예술인 까닭 -홍우기옮김-  (0) 2008.05.24
달 담은 샘 瓦堂  (0) 2008.05.24
서체의 명칭  (0) 2008.05.24
서예용어  (0) 2008.05.24
서예용품  (0) 2008.05.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