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예술이 지고의 예술인 까닭
농산 정충락(본회자문위원)선생님의 글
1. 서예의 매력
필자의 경우 거의 모든 글에 등장시키는 단골용어로 "글씨 잘 쓰고 못 쓰는 것은 팔자 소관" 이라는 화두어가 있다. 이 화두어에 대한 생각은 평소 일상생활 중에서 잠시도 뇌리에서 지워본 적이 없다.
흔히 붓글씨라고 하는 서예술은 인간들이 생활하는데 있어서 어떠한 활력소가 되는 것이며, 그 영향력은 과연 어디서 나오는 것인가. 이러한 질문에 대하여 경우에 따라서는 설명이 달라질 수도 있겠지만, 그 중에서 가장 분명하게 안내를 할 수 있겠지만 무엇보다 우선하여 써놓은 글씨에서 나타나는 형태적인 인상에 의하여 개인적인 미적 사상을 읽을 수가 있음을 말할 수 있는데, 이것은 개인의 미적인 의식에 의하여 꾸며진 외적인 형상의 전개에 대한 견해의 피력을 가장 먼저 꼽을 수가 있다는 설명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단순하게 붓으로만 서사한 필경사 형식의 정도와 학문으로 무장된 소양과의 조화로써 엮어낸 글을, 미적인 조건을 확실하게 갖춘, 정상적인 작품으로 환원시키고 있는, 그렇게 함으로써 예술품을 만들어 냈다고 하는 작가의 성취감에 따라 관자들로 하여금 기쁨을 누리게 하는, 그리고 작가 자신의 미술을 통한 생활의 흔적을 남기고자 하는 목적에 부응하여 나름의 분위기가 연출되는 것이다 하고 하는, 다소 긴 해석을 할 수가 있다.
그 다음에 완성된 그 작품을 어떠한 곳, 평소의 생활과 관계가 있는 어떠한 공간에다 적당한 장식을 함으로써,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제대로 된 서예문화향수를 할 수 있게 하는 분위기로 자연스러운 사고의 이동을 하게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분위기로 인하여 전개되어야 하는 목적한 바의 달성은, 글씨를 쓰는 작가에 따라서, 형성되어 있는 내용의 정도와 작품의 내용이 지니고 있는 격으로 나타나는 결과가 전혀 서로 다르게 나타나게 마련이다. 이는 글씨를 쓴 사람의 인간적인 분위기와 함께 개인이 지니고 있는 능력에 따라서 시작의 계획과 성취도의 균형을 긍정적으로 연출해 내기 위하여 대개의 작가들은 결과에 연연하지 않고, 자신의 정황에 맞는 재료를 준비하여 시간과 돈과 정성을 하나로 모아서 예술이라는 무형의 자산에 투자를 하게 된다. 그러한 형이상학적인 분위기의 조성에 따라서 이 나라의 붓글씨 문화는 한 눈금씩 그 수준의 격을 보다 높은 곳으로 오를 수 있도록 조율이 되고 있는 것이다.
참으로 멋진 한 폭의 글씨를 써내기 위하여 쏟아 붓는 정열은, 보통의 설명으로서는 쉽게 납득할 수가 없을 정도이기는 하지만, 기왕에 서예를 시작한 서예인 이라면 따로 설명이 없다해도 이 정도에서 충분히 이해가 되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2. 생각의 형상화
붓글씨는 다른 예술과 분명하게 다르다. 그 이유는 근원적으로 표현하고자 하는 대상을 자연의 형상에서 부분적으로 취하는 것이 아니고, 글씨를 쓰는 작가의 정신속에 내재하고 있는 사상(생각)을 지면위에 형상화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글이 지니고 있는 내용이야 자연과의 무언중 대화에서 思惟한 것을 비유나 은유로 알맞은 내용을 도입할 수도 있겠지만, 글씨의 경우는 다른 예술에 비하여 확실하게 다르다. 이는 약속된 부호를 이용하여, 글씨를 쓰는 사람의 서사하는 기술과 함께 운필을 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감정의 조형화에서, 그리고 글이 지니고 있는 내용에 따라서 상당부분 다르게 나타날 수가 있음이며, 이러한 현상도 작가의 심상이 각기 다르고 더욱이 예술의 발단이 안에서부터 바깥으로 나타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와는 다른 것이 그림의 경우인데 그리고자 하는 대상의 조형물(자연물 포함)이 구상의 경우는 작가의 반대편인 바깥에 있고, 추상의 경우는 안팎이 뒤엉킨 상태의 것을 형상적으로 정리(?)를 하는 것이라 할 수가 있을 것이다. 따라서 붓글씨의 경우는 그 어떤 경우라 하더라도 변함없이 그 출발점은 역시 내면 세계에서 발로하게 마련이다. 그러한 내면 세계의 조형사상을 외적인 형상으로 표현하는 것은, 그것이 쓰고 싶다고 해서 시작하면서부터 당장 이루어지는 것은 절대로 아니다. 응당 이를 표현할 수 있는 기초적인 수련기간의 필수적으로 있어 주어야만 한다. 더 구체적으로 설명을 한다면, 당연히 수련기간 동안에는 상당한 기간에 걸쳐서 기존의 글씨, 다시 말해서 법첩으로 규정한 것을 앞에 놓고 베껴 쓰는 과정을 필연적으로 거치게 마련이다.
그리고 난 다음에야 비로소 자신의 개성이 확보된 글씨조형을 서사하게 되는 데, 붓글씨 예술을 말함에 있어서 실제적인 핵이라고 설명 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부분이다. 이것이야말로 무슨 말로서도 설명을 할 수 없는 현실적인 작품 그 자체. 다시 말해서 붓글씨가 지니고 있는 꼴(형상), 그 모양(서체), 그 자체가 누구든 원래 시작부터 목적했던 바의 도착점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부분의 이해가 글씨를 쓰는 경우에 따라서 여간 까다로운 것이 아니다. 그것은 어떠한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든, 또한 어떠한 과정을 거치든 끝내는 작가자신의 정신 세계의 이상을 문자로 호칭되는 부호와 문방구를 사용하여, 가능한 정도에 맞도록 형상화하는 것으로 귀결을 지워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비록 이러한 과정상의 복잡한 사정이 얽혀 있기는 하지만, 일반적으로는 형상으로 표현된 작품을 통하여 제작을 한 사람의 심성을 대체적으로 읽을 수가 있다. 따라서 이 부분이 다른 어떤 설명을 하는 것보다 알기 쉽고, 또한 구체적이고도 실질적인 설명이라고 할 수가 있을 것이다.
3. 이해와 표현의 충돌
많은 서예가 지망생들이 자신의 작품이라고 내세우고 있는 작품을 통하여 운필을 하고 있는 붓의 흔적을 살펴보고 있노라면, 임서를 함으로써 겨우 확보된 초보에 지나지 않는 서사 능력을 가지고, 마치 확실하게 제대로 정리가 된 자신의 개성이 확보된 붓글씨 실력으로 착각하는 것에서부터 복잡한 문제가 생겨나기 시작한다. 그 임서의 능력이 비록 유명법첩의 경우라 하더라도 어쩔 수 없이 임서의 범주에 속할 수밖에 없는 것인데, 지도하는 코치가 써 준 어줍잖은(?) 체본을 베껴 쓴 것을 가지고, 그것으로 마치 자신이 만들어낸 새로운 창작품인양 착각을 한 채 설치고 있는 것은 모르고 하는 행동이니 별개로 치도록 하자. 그러나 법첩을 보고 쓴 어줍잖은 체본을 가지고 세상에 둘도 없는 작품이라 착각을 하고는 여과 없이 있는 그대로를 수용하고 있으니, 그로 인해 스스로는 안내역을 맡은 코치의 아류로 흐른다는 것을 전혀 자각하지 못하고 있는 것에서 문제는 더욱 나쁘게 발전한다.
서사를 안내하는 코치가 법첩을 살펴보고 임서한 체본의 모양새는, 그 코치가 해석하는 방법과 운필에서 발휘되는 서사 능력에 따라서 알게 모르게 발생되게 되는 원본과의 편차가 당연히 생겨나게 마련이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가장 올바른 것으로 알고 그대로 본을 따라서 임서를 하게 되면 거기에서 생겨나는 오류의 편차는 실로 엄청나게 클 수밖에 없다.
법첩이라고 하는 범본이 제시하고 있는 형상적인 의미의 내용과 중간에 놓인 코치의 다리를 한 번 거치고 난 다음에 임서를 하게 되는 실작(實作)은 상당부문 서로가 엉뚱한 쪽으로 갈라서지 않는다면 이게 오히려 더 이상한 것이다. 당연히 범본이 지니고 있는 원래의 형상적인 의미와는 상당부분 다를 수밖에 없다.
본고에서는 그렇게 베껴(임서) 쓴 사람을 탓하려는 것이 아니다. 다만 그처럼 형상이 다르게 나타나고 있어도 누구라 책임지려 하지 않는 지도자 쪽을 탓하고 있는 것이다.
붓글씨를 오랫동안 써 온 사람 중에서도 더러는 "임서도 창작"이라고 한다. 이것이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임서를 가지고 창작품으로 평가해야 하는 기준은 과연 어느 정도의 선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인가 법첩의 형상을 그 나름대로 충분하게 익혀서 수용을 하고 나면, 모르긴 해도 쓴 사람이 지니고 있는 정도(程度)에 맞는 자운(自運)의 글씨꼴을 펼치게 되는 분위기를 연출하게 된다.
이러한 연서과정을 통해서 일어나는 변이현상은 어떤 이유로도 강제할 수가 없는 것이며, 당연히 붓글씨를 쓰고 있는 사람의 자의에 의하여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고 이렇게 변이 되어야 하는 것이 무엇보다 가장 바람직한 현상인 것은 두 말할 여지도 없다.
4. 바른 붓글씨는 어떤 것인가
무엇보다 먼저 어떤 경우에 처하더라도 남의 작품을 베끼는 것은 삼가야 한다. 베낀다는 것은 이유 없이 무조건 저급의 표절이다.
예술을 함에 있어서 표절이라고 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배제해야 한다. 법첩이 아닌 체본은 어떤 경우의 것이라도 그려내지 말아야 한다. 서예술이란 남의 것을 베끼는 것이 아니다. 오직 작가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생각을 옮겨다 쓰는 평면예술이다. 그러함에도 남의 것을 베끼고, 또 그려대고 있는 것을 두고 결코 예술이라 할 수는 없는 것이다.
본고의 모두(冒頭)에서 언급한대로 "글씨 잘 쓰고 못 쓰는 것이 팔자 소관" 이라는 것을 아직까지 기억하고 있는 독자라면 굳이 베껴야 할 이유가 어디에 있을 것인가를 이해할 것이다. 이 경우에 대개는 베끼고 있는 것을 쓰고 있는 것이라고 착각하는 것에서 문제는 매우 복잡하게 전개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러한 현상은 일선에서 지도하고 있는 코치들�의 피할 수 없는 책임이다. 쓰는 것과 그리는 것은 따로 설명을 하지 않더라도 절대로 같은 것이 아니다.
지금의 시대적인 상황은 서예가를 하나의 직업으로 수용이 되고 있지만, 얼마 전인 앞 시대까지만 하더라도 그것은 학자가 지니고 있는 철저한 하나의 교양이었으며, 글을 읽는 선비라면 필수적으로 갖추고 있어야 할 덕목가운데 하나였다.
그러한 것이 "새로운 시대에 걸맞은 교육의 실시"라고 하는 국가의 교육방침으로 인한 한자교육의 퇴영현상과 함께 상당한 그 기간동안 방기되고 있었던 것이 결국 오늘날의 이러한 정황으로 주저앉게된 것이다.
漢(한)문자는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그렇게 단순한 부호가 아니다. 한문자의 수용은 그 문자가 지니고 있는 내적인 의미와 함께 외적인 형상으로 나타나는 형태적인 의미를 동시에 수용하게 함으로써 보다 확실한 자기 철학을 확보할 수 있게 되고 또한 그것을 예술로 표현할 수가 있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철학적인 배경의 내재를 전제로 한 후에 붓글씨라고 하는 모양으로 형상화하는 것이어야만 올바른 서예작품이라고 할 수가 있다는 것은 다른 설명이 필요하지 않다.
그런데 현실은 어떠한가. 漢(한)자를 모르면 알려는 노력은 하지 않고, 그냥 남의 것을 보이는 대로 쉽게 그려내기에 날밤을 새고 있다.
서예란 그렇게 쉽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처럼 간단하다면 누구라도 쉽게 서예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서예는 아무나 할 수 있지만 서예가는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다. 구태여 어렵사리 공부를 하고 있으면서 자신의 것은 제쳐두고 겨우 남의 것을 베끼고 있는 것에만 힘을 쏟고 있다면, 결국 예술가는커녕 남의 아류(亞流)인 필경사 이외의 아무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에는 실기(失期)한 뒤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바른 것인가. 그것은 매우 간단하다. 우선은 자신의 생각을 체본을 떠나서 무리하지 말고 얌전하게 써내기만 하면 된다. 이렇게 쉬운 것인데도 자기 자신은 현실적으로 무엇을 하고있는지를 모르고 있는 형편이니, 이야말로 심하게 말한다면 더도 없는 국가적인 낭비, 바로 그 자체라고 할 수가 있을 것이다.
5. 서예는 인격을 펼치는 마음의 기술.
글씨를 쓰는 데에도 재주가 필요하다. 그러나 재주 하나만을 가지고 서예술가연(書藝術家然)해서는 안된다. 세상에는 별난 재주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 조사를 해보면 아무런 재주가 없는 사람보다 재주 있는 사람이 그 숫자는 훨씬 더 많다. 그러한 모든 사람이 재주가 있다 하여 하나 같이 예술가 일 수는 없다. 이것은 상식 밖의 상식이다.
무릇 서예술에는 그것을 창조해 내는 행위자(작가)의 특별난 예술 정신이 깊이 박혀 있어야만 한다. 작가의 능력에 따라서 정도의 차이는 다소 있겠지만, 예술을 말하는데 에는 별의별 많은 조건이 중요한 것이 눈에는 결코 보이지 않는 바로 작가 정신이다. 그 정신을 놓고 예술의 본질이라 한다면 누구도 틀렸다고 하지는 않을 것이다.
물리적으로 보이지 않으니 이해가 어렵기는 하지만 그러한 예술의 본질이, 가슴으로 읽어낼 수 있는 보이지 않는 작가의 예술 정신이 작품 안에 들어있어야만 비로소 올바른 예술이라고 할 수가 있는 것이다. 붓글씨 예술의 경우 표현하고 있는 형상과 밀착된 그 예술 정신의 확실한 증명은 다른 데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바로 글에 있다는 것을 확실하게 알아야만 한다. 그러므로 서예가의 기본 정신은 당연히 자신이 적어내는 글만을 우선하여 수용을 하는 것에 있다. 동시에 당연히 남의 글을 베껴대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실히 아는 데에 있다. 이 문제만 깨닫고 나면 서예술의 본질론(本質論)에 대해서는 50%이상 이해를 하게 되는 것이며, 서예가의 기본적인 소양을 심저(心底)에 깔고있다는 것으로 이해를 할 수가 있다.
우리가 쉽게 말하고 있는 서성(書聖), 동진(東晋)시대의 왕희지가 그 누구의 글을 베꼈다는 기록이 있던가. 베낄 형편에 있는 사람이라면 얼마든지 베껴도 되겠지만, 더러는 절대로 그래서는 안되는 입장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태연하게 베껴대고 있다. 그리고는 그것을 마치 다시없는 지고(至高)의 예술이라고 우겨대고 있으니 이 아니 우스운 일이던가. 베낄 형편에 있다라고 하는 것은, 자신의 것(글)도 만들어 가면서 남의 좋은 글을 동시에 수용하고 있다는 의미를 말하는 것이다.
지고의 예술, 서예술(書藝術)이란 그렇게 함부로, 마구잡이 식으로 자신의 생각과는 전혀 무관한 남의 것을 베껴서 펼쳐 놓는다 하여 결코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서예술이라고 하는 것은 앞의 설명에서도 알 수 있듯이 작품을 써 낸 작가의 심상이 함께 인격을 조형화 하여 펼쳐 놓은 것이기 때문이다.
6. 지고의 예술인 서예.
그렇게 많은 예술 가운데에서 하필이면 왜 붓글씨예술인 서예가 지고의 예술이어야 하는가. 그 이유는 다른 데에 있는 것이 아니다. 거기에는 앞에서도 이미 중언부언(重言復言)으로 설명한 것처럼 글씨를 쓴 사람의 인격이 그 자리에 고스란히 박혀있기 때문이다. 어떠한 것이 붓글씨 속에 형상화되어 있는 서자(書者)의 인격으로 설명을 할 수가 있겠는가. 그것은 다른 데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인격의 형상인 글을 맨 먼저 살펴야 하는 것이라고 설명할 수가 있다. 글이란 쓰는 사람의 양심이자 지식이며 교양이고, 사상이며 능력이고 힘이며 정신이다. 그래서 쓰여진 내용을 통하여 올바른 것이 동시에 글씨예술로 표현되었을 때에는 비록 문자적(文字的)인 형태를 매체(媒體)로 하지만, 그 뜻은 어떤 형식으로 나타나는 읽는 사람의 감정을 움직일 수 있도록 조율이 되어있는 것이다. 이 부분에서 읽는 사람의 감정을 제대로 움직이지 못한다면 좋은 예술품으로서의 참 값을 매길 수가 없다는 것으로 이해를 할 필요가 있다.
문제는 이러한 부분에 있다. 이러한 것을 확실하게 밝히지 않음으로써 생겨나는 문제점은 그 정도가 매우 심각하다. 그 문제점이란 다른 것이 아니다. 바로 남의 것을 베껴 쓴 것임에도 불구하고 엉뚱하게 작가의 개성미(個性美) 넘치는 예술품으로 둔갑하나 아무 소리 못하고 있는 현실을 살펴보고 있노라면 다른 설명이 필요하지 않다.
중국이 자랑하는 고전(古典)의 경우 왕발(王勃)의 등왕각서(?王閣序)나, 소식의 적벽부(赤壁賦)를 비롯하여 누실명(陋室銘) 등은 그 누구도 부인(否認)하기 어려운 세계적인 명문장이다. 우리나라의 경우도 이와 같은 것이 없는 것은 아니다. 다소 그 내용이 길기는 하지만, 조선시대의 김시습이 지은 금오신화(金鰲新話)라든가, 박지원이 경험한 중국 기행문인 열하일기(熱河日記), 그 보다 좀 짧은 것으로는 이제는 지난 세기가 되었지만 이은상이 고향을 생각하는 노래인 가고파 등은 하나같이 글을 지은 사람의 교양이요 정신이며 사상이고 능력의 산물(産物)인 그들 자신들의 보이지 않는 마음의 형상인 것이다.
이러한 흔적을 남긴 사람들은 어쩌다 남의 것을 베낀다 해도 뉘라 뒤에서 흉을 보는 사람이 없다. 어째서 그런 것일까. 그들 모두는 구태여 남의 것을 베기지 않는다 해도 하나같이 훌륭한 자신만의 개성을 글로 나타낼 수 있는 넘치는 인격의 소유자들이기 때문에 그렇기는 해도 우리는 그들 모두를 훌륭한 서예가로 취급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자신의 생각을 있는 그대로 글씨로 써낸 것이 간헐적으로 나타나고 있는데, 그러한 것이야말로 다시없는 훌륭한 예술품으로서 값을 따지기가 매우 어려울 것이다.
그렇게 탄생하는 것이 바로 붓글씨 예술이다. 이러한 것들은 다시없는 작가의 개성이 확실한 정신세계의 꽃이니, 이러한 것을 두고 지고의 예술이라 하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다.
좀 더 쉽게 설명을 한다면, 아무리 훌륭한 음악이라 하더라도 그것을 듣는 사람이 형편에 따라서는 자칫 소음공해로 대접을 받는 경우가 생기기도 하겠지만, 붓글씨는 가령 글을 전혀 모르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함부로 다루지 않는다. 이러한 것에서도 서예술의 위대함은 바로 증명이 되는 것이다.
7. 말미에
앞에서 언급한 내용처럼 붓글씨에 있어서 결론은 자신의 글(文)이 바탕에서 버티어 주어야만 바른 붓글씨예술이지, 남의 것을 베 아무리 잘 베낀다 해도 그것은 어쩌면 훈련을 잘 받은 "한글 글씨 기술자에 지나지 않는다" 라는 것을 마음에 새겨둘 필요가 있다.
붓글씨를 씀에 있어서 기술은 꼭 필요하다. 따라서 기술이 결코 나쁘다는 것이 아니다. 다만 누구나 쓸 수 있는 기술에 의한 제품을 두고 지고의 예술이라 할 수가 없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일 뿐이다. 이 말은 예술과 기술의 구분을 제대로 할 수가 있기를 진심으로 바라고 있기 때문에 하는 말이다. 그럼으로 남의 것을 베끼거나 흉내내는 것은 가능한 생각도 하지 말아야하며, 무엇보다 우선하여 글을 통한 자신의 인격 도야에 온힘을 기울여야 한다.
그래도 지금은 자신이 지은 글을 들고 나오는 서예가들의 숫자가 점진적으로 불어나고 있다. 이는 지극히 바람직한 일이다. 그러나 아직도 자신의 글은 커녕 선문(選文)도 제대로 못하고 있는 얼치기가 비일비재하다. 글을 한다는 것은 지금까지의 설명처럼 자신을 닦고 자신의 흔적을 남기기 위한 귀중한 작업이다. 생각만 제대로 한다면 그것이 그렇게 어려운 것이 아닌데도 대게는 접근조차 하지 않으려 하고 있다. 이는 매우 서글픈 현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정황을 앞에 두고 개탄하지 않는 서예가라면 그 역시 같은 부류로 분류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우리 서예인 모두는 바람직한 붓글씨예술을 위하는 마음으로 충일(充溢)되어 있어야만 한다. 그러므로 올바른 연서(硏書)는 어떻게 하는 것이 가장 적절한 것인가에 대하여 끊임없이 구체적인 연구가 뒤따라야 주어야만 한다.
현실적으로 우리나라의 경우, 이 방면에 대한 기본적인 연구는 인근 국가의 그것과 비교의 여지가 없다는 것이 부끄럽기만 할 따름이다. 이제 그 현실을 타개하기 위하여 서예인 모두는 한 마음으로 뭉쳐야 할 것이다.
쓸데없는 감투욕에 휘말려서 주변을 어지럽게 하는 일이 없어야 한다. 오로지 서예인으로서의 능력 함양에만 몰두한다면 명예는 저절로 찾아들 것이다. 진실로 새로운 시대 한국 서예계의 뜻 있는 발전을 위하고, 지고의 예술인 붓글씨예술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다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