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천상병의 시세계 ◑
- 극빈의 생애, 순수의 노래
Ⅰ.서론
하루치의 막걸리와 담배만 있으면 스스로 행복하다고 서슴없이 외쳤던 시인, 천상 병(1930-1993)은 생전에도 기이한 일화를 바탕으로 세인의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사람들은 그의 시세계보다 그의 생애에 더 많은 관심을 가졌으며, 그의 사후에도 각종 언론매체나 연극 등을 통해서 꾸준히 회자되어왔다.
그러한 생애에 가려 40년의 긴 시력에도 불구하고 시세계에 대한 연구업적이 그리 활발한 편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가 작고한 93년 이후부터 활발한 연구가 이루어지 고 있고, 최근에는 그의 시세계를 보다 다양한 각도에서 연구한 업적을 볼 수 있었 다.
이자영은 천상병의 시세계를 크게 공간지향성과 시간지향성으로 나누고, 공간지 향성에서는 '하늘’과‘새’를 시간지향성에서는 ‘과거 회상적 의지’‘현실 만 족적 삶’'미래 지향적 의지’로 세분하여 작품분석을 하고 있다.
김희정은 그의 전기시에 대한 집중적인 연구를 한 바 있다. 김희정은 그 동안의 연구 업적에서는 처음으로 발견할 수 있는 시의 구체적인 형식과 구조미를 연구했 다. 전기시에서 단순서술형어미를 비롯하여‘의문형어미’들이 주가 되고 있는 반 면에, 후기시들은 ‘감탄형 어미’와 기도문적인 어미들이 빈번하게 출현하고 있음 을 지적했다. 또한 한 행이 4음보를 크게 벗어나지 않으며, 최소한의 문장으로 화자 의 ‘근원적 슬픔’과 ‘존재론적 고독을 ’서정적인 명징함과 슬픈 투명성으로 그 려내고 있다고 보고 있다.
천상병은 세속적 명리를 떨쳐버리고 순수한 시를 쓴 시인이다. 이 땅에는 가난한 시인도 많고 가난한 일반인도 많지만 천상병처럼 그 가난을 직업처럼 생각하며 순 응하며 살아가는 사람도 드물 것이다. 이는 천상병 특유의 아이처럼 순수한 기질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본고에서는 이러한 천상병의 전반적인 시세계의 특성을 살펴보고, 천상병 시에서 가장 많은 연구가 이루어진 ‘새’의 상징성에 대해서 논의해보고자 한다.
Ⅱ. 시세계의 특성
1. 가난과 초월의식
천상병의 시는 처음부터 줄곧 가난의 정조가 깊게 베여있다. 그 스스로가 돈에 대한 관념이 없는 사람이라고 지칭하듯 그는 가난을 운명처럼 받아들이고 생활하 고 있다. 그가 단지 가난한 일상만을 문제삼았다면 그건 개인의 진부한 넋두리나 한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가난을 담담하게 바라보고 초월 하려는 의지로 반전시키고 있어 시를 읽는 사람들을 자못 엄숙하게 만들곤 한다. 즉 가난으로 얼룩진 슬픔과 절망을 넘어 관조해버리는 성숙한 내면의식을 보여주는 것이다.
아버지 어머니는
고향산소에 있고
외톨박이 나는
서울에 있고
형과 누이들은
부산에 있는데,
여비가 없으니
가지 못한다.
저승 가는 데도
여비가 든다면
나는 영영
가지도 못하나?
생각노니, 아,
인생은 얼마나 깊은 것인가.
-<소릉조>
“여비가 없으니”고향에도 못 가는 가난의 쓸쓸함과 절망감이 애통하게 묻어난 다. 그러나 이 시에서 그의 가난은 그저 넋두리에 그치는 것이 아닌 “저승 가는 데도 여비가 없다면 나는 영영 가지도 못하나?”라고 독자를 반문하는 해학과 여유 를 보여준다. 가난하기 때문에 어쩌면 저승에도 못 갈 수 있다는 가난한 자의 행복 을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이는 눈물겹도록 따뜻하고 비장한 그의 초월의식을 느끼 게 한다.
오늘 아침을 다소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한 잔 커피와 갑 속의 두둑한 담배,
해장을 하고도 버스값이 남았다는 것.
오늘 아침을 다소 서럽다고 생각는 것은
잔돈 몇 푼에 조금도 부족이 없어도
내일 아침 일도 걱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가난은 내 직업이지만
비쳐오는 이 햇빛에 떳떳할 수가 있는 것은
이 햇빛에도 예금통장은 없을 테니까...
나의 과거와 미래
사랑하는 내 아들딸들아,
내 무덤가 무성한 풀섶으로 때론 와선
괴로웠음 그런대로 산 인생 여기 잠들다, 라고
씽씽 바람 불어라........
-<나의 가난은> 전문
그는 진정 가난으로부터 자유로워진 자이다. 하루하루 한 잔의 커피와 담배와 버 스 값만 해결되면 행복해하는 초연한 모습으로 살아간다. 가난은 내일 일을 걱정해 야 하는 불편한 것이기도 하지만, “이 햇빛에도 예금통장은 없을 테니까”라고 말 하며, 무한한 자연과 햇빛 앞에서는 부자도 가난한 자도 평등한 것이어서 그의 가 난은 떳떳한 것이라고 자위한다. 이는 물질만능주의 시대에 부의 축적에 애쓰는 사 람들의 가슴을 뜨끔하게 해줄 풍자적인 의미가 아닐 수 없다. 또한 마지막 연 <내 무덤가 무성한 풀섶으로 때론 와선/괴로웠음 그런대로 산 인생 여기 잠들다, 라고/ 씽씽 바람 불어라.......>라는 표현에서는 삶의 비장함과 엄숙함을 느낄 수 있고, 이 는 가난으로부터 진정 해방된 그의 초월의식을 엿볼 수 있는 것이다.
점심을 얻어먹고 배부른 내가
배고팠던 나에게 편지를 쓴다.
옛날에도 더러 있었던 일,
그다지 섭섭하진 않겠지?
때론 호사로운 적도 없지 않았다.
그걸 잊지 말아주기 바란다.
내일을 믿다가
이십년!
배부른 내가
그걸 잊을까 걱정이 되어서
나는
자네한테 편지를 쓴다네
-<편지>전문
점심을 얻어먹고 배부른 내가 배고팠던 지난날의 내게 쓴 편지형식의 시다. 여 기서‘배부른’의 상황은 분명 예전보다 나아진 상황일 테고, 화자는 혹시나 배고 팠던 기억을 잊을까봐 스스로에게 걱정이 된다고 한다. 한 그릇 점심을 배불리 먹 은 것에서도 지난날의 배고팠던 자신을 반추해보고 미안해하기까지 하는 그의 겸허 한 자세가 코끝을 찡하게 만든다.
이렇듯 그는 자신의 삶을 아주 솔직하게 그려내고 있다. 거기엔 뿌리 깊은 가난으 로부터 그가 겪어야 하는 생생한 일상의 모습이 있고, 인생과 삶을 바라보는 깊은 성찰을 보여준다. 이는 곧 그의 빈곤에 대한 관조적인 자세와 초월의지에서 가능한 것이었다.
이러한 무욕의 삶은 후기시인 1980년대 초의 <나의 가난함>으로도 일관되고 있 다.
나는 볼품없이 가난하지만
인간의 삶에는 부족하지 않다.
내 형제들 셋은 부산에서 잘 살지만
형제들 신세는 딱 질색이다.
(중략)
이렇게 가난해도
나는 가장 행복을 맛본다.
돈과 행복은 상관없다.
부자는 바늘귀를 통과해야 한다.
-<나의 가난함> 가운데서
위시는 성경에서 인용한 시구인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는 것보다 부자가 하늘 나라에 들어가기는 더 어려운 일’이라는 그의 산문을 통해서도 알 수 있는데, 가 난에 얽매이지 않으려는 그의 의지를 엿볼 수 있다. 즉 물질적인 가난함이 오히려 정신적인 풍요로움을 안겨주어 행복하다고 말한다. 이는 철저히 무욕의 삶을 실천 했던 그의 가난에 대한 초월의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2. 외로움과 소외감의 정서
천상병 시에서 만날 수 있는 또 다른 정서는 외로움과 소외감이다. 김재홍은 천 상병의 시가 소외의식을 기저로 하면서 외로움과 슬픔의 정서를 드러내고 나아가 수직 상상력의 방향성을 지니는 주요한 특성을 지닌다고 한다.
그러면 시인의 이러한 외로움이나 소외의식은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50년대 이 후 이 땅에 태풍처럼 밀어닥친 외국 문학 사조의 영향으로....(중략)... 순정한 서정 시들은 맹물같이 무미하대서 무시당하기 일쑤였던 것이다. 그리고 천상병은 그의 산문집을 통해 유년시절은 비교적 부유하고 평탄하게 보냈다고 회고했다. 이렇게 볼 때 천상병 시에서의 외로움과 소외의식은 그의 문학에 대한 갈증과 행복했던 유 년의 회상에서 파생된 현실과의 괴리감에서 나온 것이 아닐까 한다.
산등성 외따론 데,
애기 들국화.
바람도 없는데
괜히 몸을 뒤누인다.
가을은
다시 올테지.
다시 올까?
나와 네 외로운 마음이,
지금처럼
순하게 겹친 이 순간이-
-<들국화>
환한 달빛 속에서
갈대와 나는
나란히 소리 없이 서 있었다.
불어오는 바람 속에서
안타까움을 달래며
서로 애터지게 바라보았다.
환한 달빛 속에서
갈대와 나는 눈물에 젖어 있었다.
-<갈대>
들국화나 갈대는 다같이 외로움 또는 슬픔의 객관적 상관물에 해당된다. <들국 화>에서 화자가 지칭한 ‘외따론’곳은 그야말로 소외의 공간이다. 바람도 불지 않 는 아주 적막한 곳이어서 괜히 몸을 뒤척여보는 얘기 들국화, 이는 곧 외로움의 정 조이기도 하다. 각각 외로운 처지인 들국화와 화자의 마음이 하나일 수 있는 가을 이 다시 올까? 반문함으로써 더 비극적인 정조를 자아낸다.
<갈대>의 공간 또한 달빛만 환하게 비치는 외로운 밤이다. 갈대와 화자는 서로의 그 외로움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다. 타인의 눈 속에서 자신의 외로움을 들여다보 는 한층 더 깊어진 외로움의 정조가 베여있다.
지금은 다 뭣들을 하고 있을까?
지금은 얼마나 출세를 했을까?
지금은 어디를 걷고 있을까?
점심을 먹고 있을까?
지금은 이사관이 됐을까?
지금은 가로수 밑을 걷고 있을까?
나는 지금 걷고 있지만,
굶주려서 배에서 무슨 소리가 나지마는
그들은 다 무엇들을 하고 있을까?
-<동창>
사실, 이 시대에 직업이 시인인 시인은 거의 없다. 그것은 이상인(理想人)으로서 의 시인은 존재할 수 있지만 생활인으로서의 시인은 존재할 수 없다는 뜻이다. 문단의 많은 문우들이 그를 천재시인으로 회자했듯 누구보다도 명석한 두뇌와 이지 적이었던 그가 별다른 직업도 없이 하루를 연명해나가는 걱정을 해야 하는 처지에 서 떠올려보는 '동창생각' 은 그 무엇보다도 깊은 소외감이었을 것이다. '굶주려서 배에서 무슨 소리'가 날 지경인 그의 소외된 현실을 볼 수 있다.
비가 내린다 비가 내린다
우수를 씹고 있는 나는
돌아가신 분들을 생각한다
비는 슬픔의 강물이다
내 젊은 날의 뉘우침이며
하느님의 보살피심을
친구들의 슬픈 이야기가
새삼스레 생각나누나
교회에 혼가 가서 기도할까나
-<비>
위의 시가 1975년에 발표된 것으로 보아 시인이 말하는 ‘친구들의 슬픈 이야기’ 는 이전에 타계한 신동엽과 김관식을 지칭하는 듯 하다. 비를 바라보며 시인은 먼저 작고한 친구들을 떠올린다. 친구들이 떠난‘슬픔의 강물 ’같은 빗속에 혼자 남은 시인의 그 공간 또한 소외된 외로운 공간이다.
이처럼 그의 시세계의 또 다른 특징으로 볼 수 있는 외로움과 소외의식은 <들국 화>, <갈대>, <비>와 같은 객관적 상관물을 통해 토로하기도 하고, <동창>에서와 같이 가난으로 비롯된 것이기도 하다.
3. 일상적 현실인식에의 후기시
천상병후기시의 특징이라면 시적 변용을 전혀 거치지 않은 일상적인 현실을 그대 로 담은 것과 순수한 동심을 노래한 것이다. 이러한 후기시를 읽으며 필자는 문득 시인이 시적 퇴행이 된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에 잠깐 빠지기도 했다. 이남호는 이러한 천상병의 후기시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우리는 천상병의 후기시들을 읽을 때 보통 때와는 다른 독법을 지녀야 한다. 다시 한번 말하여, 천상병은 시인 이전의 시인이고 그의 시들은 시 이전의 <시의 원료> 와 같은 것이다. 따라서 그것들은 과도한 단순성과 심한 어눌함을 보여준다. 그렇지 만 그것들은 순수한 원료이기 때문에 강한 에너지를 지니고 있으며, 또한 뮤즈의 노래이기 때문에 삶에 대한 단도직입적 통찰을 내포하고 있다.
①누가 나에게 집을 사주지 않겠는가? 하늘을 우러러 목터지게 외친다. 들려다 오 세계가 끝날 때까지...(중략)....나는 결혼식을 몇 주 전에 마쳤으니 어찌 이렇게 부르짖지 못하겠는가?
-<내집> 가운데서
②우리 집도 초가요 옆집도 초가야.
우리 집 주인은 서울 백성.
옆집 사람과는 인사한 적이 없다.
-<수락산하변5>-가운데서
③KBS 라디오의 희망음악은,
아침 9시 5분에서 10시까지인데
나는 매일같이 기어코 듣는다.
고전 음악의 올림픽이요 대제인
고전 음악 시간을 내가 듣는 것은,
진짜로 희망이 우러나는 까닭이다.
-<희망음악>가운데서
①에서는 아무런 시적인 변용도 없이 집에 대한 갈망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②는 시인의 거주지를 대상으로 쓴 시로 이는 ‘수락산변’의 연작시로 이어지게 된다. ③은 라디오의 고전 음악 프로에 대한 간단한 감상을 적고 있는 작품이다. 위의 작품들에서 특별한 시적 변용이나 상징성을 찾아 볼 수는 없다. 과연 시라고 말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을 가질 수도 있겠지만, 그러한 시적 장치를 배제한 시가 독자에게 파고드는 힘이 더 크게 다가온다. 이러한 그의 후기시는<가장 사실적인 사물들과 언어로써 정치와 자연의 의미를 전달하는 놀라운 솜씨를 보여준다>
집을 나서니
여섯 살짜리 꼬마가 놀고 있다.
‘요놈 요놈 요놈아’라고 했더니
대답이
‘아무 것도 안 사주면서 뭘’한다.
그래서 내가
‘자 가자
사탕 사줄께’라고 해서
가게로 가서
사탕을 한 봉지
사줬더니 좋아한다.
내 미래의 주인을
나는 이렇게 좋아한다.
-<요놈 요놈 요놈아>
우리 부부에게는 어린이가 없다.
그렇게도 소중한
어린이가 하나도 없다.
그래서 난
동네 어린이들을 좋아하고
사랑한다.
요놈! 요놈하면서
내가 부르면
어린이들은
환갑 나이의 날 보고
요놈! 요놈한다.
어린이들은
보면 볼수록 좋다.
잘 커서 큰일 해다오!
-<난 어린애가 좋다>
천상병 후기 시에 드러나는 특징중의 하나인 동심 지향성을 엿볼 수 있는 시편이 다. 환갑의 나이에도 어린이와 사탕 한 봉지로 친구가 되어 서슴없이 요놈이라 불 러대며 함께 어울릴 수 있다는 건, 그건 그만큼 시인이 맑고 천진하다는 것이다. 천상병 시에서 동심 지향성은 그대로 선 지향성의 표상이자 천진성의 시학에 원천 이 되며, 휴머니즘 정신의 실질적 기반이 된다. 이것은 현실도피나 패배의식에서 비 롯된 것이라기보다는 천상병 특유의 생래적 선 지향성과 휴머니즘의 자연스런 유도 라고 볼 수 있겠다. 이 외에도 그는 일상적인 소재들을 시에 많이 담았다. 아내, 장모님, 조카 영진, 아이들을 비롯한 주변인물과 똘똘이, 복실이 등의 강아지들이 다.
이처럼 천상병의 후기시는 전기시 와는 사뭇 다르게 변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친 근한 일상의 소재들을 바탕으로 시적 변용이나, 수사 또는 상징적 의미를 배제한 채 일상적인 관찰을 투명하게 표현해낸다.
출처 : 빈 가슴으로 살 걸 그랬습니다!
글쓴이 : 노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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