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어
정호승
바다를 떠나 너의 손을 잡는다
사람의 손에게 이렇게
따뜻함을 느껴본 것이 그 얼마만인가
거친 폭포를 뛰어넘어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고통이 없었다면
나는 단지 한 마리 물고기에 불과했을 것이다
누구나 먼 곳에 있는 사람을 사랑하기는 쉽지 않다
누구나 가난한 사람을 사랑하기는 쉽지 않다
그동안 바다는 너의 기다림 때문에 항상 깊었다
이제 나는 너에게 가장 가까이 다가가 산란을 하고
죽음이 기다리는 강으로 간다
울지 마라
인생을 눈물로 가득 채우지 마라
사랑하기 때문에 죽음은 아름답다
오늘 내가 꾼 꿈은 네가 꾼 꿈의 그림자일 뿐
너를 사랑하고 죽으러 가는 한낮
숨은 별들이 고개를 내밀고 총총히 우리를 내려다본다
이제 곧 마른 강바닥에 나의 은빛 시체가 떠오르리라
배고픈 별빛들이 오랜만에 나를 포식하고
웃음을 터뜨리며 밤을 밝히리라.
[신춘문예 평론 당선작]
별빛을 벼리는 대장간의 푸른 불꽃:정호승論-1
1. 시(詩), 이미지의 대장간
정호승(鄭浩承, 1950∼ )은 우리 시대의 대표적인 서정시인 중 하나이다. 첫 시집 ‘슬픔이 기쁨에게’(1976)에서 최근의 ‘풀 잎에도 상처가 있다’(2002)에 이르기까지 그는 대중적 호소력이 강한 서정시를 활발히 선보여왔다. 하지만 그에 대한 기존의 평 가는 대단히 제한적인 범위에서 이루어져왔다. 그를 70, 80년대 ‘민중시인’의 계보에 편입시켜 취급하려는 태도가 그것이다. 하 지만 이러한 태도는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와 같이 주어진 잣대에 들어맞지 않는 작품들을 희생시키기 쉽다. 그리하여 정호 승 시의 진정한 뿌리, 그 근원적 상상력은 부각되고 확대되기보 다 오히려 축소되고 단순화된다.
정호승 시의 본령을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타성적인 주제비 평에서 벗어나 이미지들의 궤적을 충실히 따라가려는 태도가 필 요하다. 그리하여 이미지들의 이합집산을 관장하는 시적 상상력 의 원리를 발견해야 한다. 정호승 시에 등장하는 단골 이미지는 별, 눈, 뿌리, 칼 등이다. 형태상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모두 ‘대지(大地)’의 이미지로 환원될 수 있다. 정호승 시에 나 타나는 이들 이미지는 ‘흙’이라는 원관념을 변용한 보조관념들 인 것이다. 흙의 영상은 우리에게 견고함과 내밀함의 느낌을 전 해준다. 이러한 촉감을 통해 자연의 힘에 대항하려는 인간의 의 지를 추동한다. 그런 점에서 ‘흙’에 관한 상상력은, 바슐라르 의말처럼, ‘반항의 상상력’이자 ‘노동의 상상력’이다.
흙의 몽상 속에서 시인은 견고한 광석의 이미지들을 깎고 다듬어 현실에 응전하는 무기로 벼린다. 그때 시는 언어의 대장간이요, 시인은 언어의 대장장이가 된다. 정호승의 시는 이렇게 대지의 힘과 대결하는 대장장이의 망치소리 속에서 태어난다. 따라서 우 리는 정호승 시의 변화무쌍한 이미지 다발에 질서를 부여하는 ? ⊙뗌?힘을 ‘대장간의 상상력’으로 규정할 수 있다. 이러한 전 제에 입각해 그의 시에서 대지의 질료적 이미지가 어떻게 굴절되 고 변용되는지 살펴보기로 하자. 정호승의 시세계를 지배하는 상 상력의 본적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2. 용해, 딱딱함과 연함의 변증법
정호승 시에 가장 빈번하게 등장하는 이미지는 ‘별’이다. 그의 시집에는 온통 별이라는 단어가 사금파리처럼 자욱하게 뿌려져 있다. 등단작 ‘첨성대’(1973)부터가 별을 소재로 삼고 있다.
할머님 눈물로 첨성대가 되었다./ (…) /소나기 오듯 흘리신 할 머니 눈물로/ 밤이면 나는 홀로 첨성대가 되었다.// (…) //싸락 눈 같은 별들이 싸락싸락 내려와/ 첨성대 우물 속에 퐁당퐁당 빠 지고/ 나는 홀로 첨성대를 빙빙 돌면서/ 첨성대에 떨어지는 별을 주웠다.// (…) //지게에 별을 지고 머슴은 떠나가고/ 할머닌 소반에 새벽별 가득 이고/ 인두로 누빈 베동정 같은/ 반월성 고갯 길을 걸어오신다.// (…) //오늘밤 어머니도 첨성댈 낳고/ 나는 수놓은 할머니의 첨성대가 되었다./ 할머니 눈물의 화강암이 되 었다.
‘첨성대’는 정호승 시의 호적부(戶籍簿)와도 같은 작품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 시의 별 이미지에서 그의 시세계를 특징짓는 대지 이미지의 원형을 엿볼 수 있다. 무엇보다 별은 하나의 빛나 는 ‘결정체(結晶體)’이다. 결정체는 액체의 질료가 시간의 힘 에 의해 내부로 딱딱하게 응축됨으로써 탄생한다. 그래서 결정체 는 견고함, 즉 강도(强度)를 가진다. 그러나 이 시에서 별은 딱딱 하지 않고 부드럽다. ‘싸락눈 같은 별들이 싸락싸락’ 내려온다 는 화자의 진술을 보라. 원관념으로서의 별은 싸락눈이라는 보조 관념의 도움을 받아 부드럽고 연한 결정체로 묘사된다. 별은 액 체에서 고체로 응고되는 과정의 젤라틴과도 같은 물렁물렁한 결 정체를 환기시킨다.
부드러움과 견고함이 공존하는 별 이미지의 양면성은 시 전체의 구조와도 긴밀하게 연결된다. ‘첨성대’를 지배하는 구조적 원 리는 딱딱함과 연함의 길항작용이다. 시에서 별은 ‘소나기 오듯 흘리신 할머니 눈물’이자 ‘싸락눈’이다. 그리고 첨성대는 이 눈물의 결정체인 별이 퐁당퐁당 빠지는 ‘우물’로 묘사된다. 여기서 별과 첨성대는 각각 부드러움과 딱딱함의 성질을 드러내며 대척관계를 형성하고 있는 듯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관계는 결 구에 이르러 와해되고 전도된다. 별은 마치 낙과(落果)처럼 소반 에 담겨 식탁으로 운반되고, 할머니와 어머니의 뱃속을 통해 눈 물의 화강암으로 환생한다. 부드러운 별은 화강암으로 전화함으 로써 딱딱한 성질을 획득한다. 그리하여 첨성대는 추락한 별의 화 신(化身)이 된다.
별은 할머니에 의해 눈물로 녹여지고 화강암으로 굳혀지면서 첨 성대로 변용된다. 부드럽고 포근한 별은 단단하고 차가운 암석으 로 응결되어, 다시 추락하는 별을 담는 주형(鑄型)이 된다. 이처 럼 정호승의 시에서 별은 부드러우면서도 견고한 결정체라는 양 면성을 갖는다. 그렇다면 별에 이러한 양면성을 부여하는 동인( 動因)은 무엇인가. 그것은 할머니의 눈물, 즉 슬픔이다. 다시, 그 렇다면 이 슬픔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가. 시에 따르면, 그 슬 픔의 기원은 별의 ‘추락’에 있다. 별의 낙하는 곧 천상적인 가 치, 혹은 희망의 유실을 의미한다. 이 희망의 유실로 인해 슬픔 이 생성되지만, 이 슬픔은 다시 단단하게 응결되어 희망을 관측 하는 역설적 도구로 기능하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슬픔의 결정체’로서의 별은 정호승 시에 있어 상상력 의 원형질을 이루며 ‘꿀’이나 ‘뿌리’ 등 다양한 이미지로 변 용되어 나타난다.
너는 너의 단 하나 목숨과 바꾸는/ 무서운 바늘침을 가졌으나/ 나는 단 한번 내 목숨과 맞바꿀/ 쓰디쓴 사랑도 가지지 못한다./ / 하늘도 별도 잃지 않는/ 너는 지난 겨울 꽁꽁 언/ 별 속에 피 는 장미를 키우지만/ 나는 이 땅에/ 한 그루 꽃나무도 키워보지 못한다.// 복사꽃 살구꽃 찔레꽃이 지면 우는/ 너의 눈물은 이제 달디단 꿀이다./ 나의 눈물도 이제 너의 달디단 꿀이다.// 저녁 이 오면/ 너는 들녘에서 돌아와/ 모든 슬픔을 꿀로 만든다. (‘ 꿀벌’ 일부, 시집 ‘슬픔이 기쁨에게’ 중)
이 시에서 꿀은 ‘눈물’의 결정체이다. 그 눈물은 벌의 눈물이 며, 이것이 굳어져 꿀이 된다. 그렇다면 벌은 왜 눈물을 흘리는 가. 화자에 따르면 벌의 슬픔은 ‘복사꽃 살구꽃 찔레꽃’이 지 는 데서 비롯된다. 낙화(落花)는 사랑의 상실을 의미하는 은유이 다. 별마저 꽁꽁 얼게 만드는 겨울의 찬 입김은 꽃나무의 잎을 떨어뜨린다. 꽃은 식물의 성기(性器). 꽃나무는 이제 성기를 잃고 생식기능 또한 잃는다. 벌은 더이상 나무의 깊은 음부 속으로 자 신의 음경을, 바늘침을 꽂을 수 없다. 결국 벌이 슬픔의 눈물을 흘리는 것은 실연(失戀) 때문이다. 벌의 바늘침을 ‘목숨과 맞바 꿀 쓰디쓴 사랑’에 비유하는 시행이 이러한 의미를 함축한다. 요컨대 화자는 꽃을 찾는 벌의 생태를 이성간의 사랑에 비유하여 묘사한다. 그리고 그 사랑의 상실에서 오는 슬픔의 결정체가 곧 꿀에 다름아님을 말한다.
이 지점에서, 싸락눈처럼 부드러우면서도 화강암처럼 견고한 정 호승의 별 이미지는 연하면서도 농밀한 꿀의 이미지로 변주된다.
달콤한 꿀이 사실은 벌의 쓰디쓴 사랑의 결실임을 시인은 역설 적인 화법으로 말한다. 이처럼 꿀의 원형질은 사랑이지만, 사랑 은 슬픔의 촉매를 통해서야 비로소 꿀이라는 결정체로 화학변화 할수 있다. 사랑의 슬픔이 쌓이고 뭉쳐져 굳어짐으로써 꿀은 밀도( 密度)를 획득하는 것이다. 별과 눈에 이어 꿀의 이미지로 자리바 꿈하면서 정호승의 비극적 상상력은 강도(强度)와 밀도를 얻는다 .
정호승 시에서 별의 영상은 다시 ‘뿌리’의 이미지로 변주되어 나타난다. 이때 뿌리는 대지의 상상력이 갖는 속성을 보다 직접 적으로 드러낸다.
다산초당으로 올라가는 산길/ 지상에 드러낸 소나무의 뿌리를/ 무심코 힘껏 밟고 가다가 알았다/ 지하에 있는 뿌리가/ 더러는 슬픔 가운데 눈물을 달고/ 지상으로 힘껏 뿌리를 뻗는다는 것을/ 지상의 바람과 햇볕이 간혹/ 어머니처럼 다정하게 치맛자락을 거머쥐고/ 뿌리의 눈물을 훔쳐준다는 것을/(…)/어린 아들과 다 산초당으로 가는 산길을 오르며/ 나도 눈물을 달고/ 지상의 뿌리가 되어 눕는다/ 산을 움켜쥐고/ 지상의 뿌리가 가야 할/ 길이 되어 눕는다 (‘뿌리의 길’ 일부, 시집 ‘눈물이 나면 기차를 타라 ’ 중)
뿌리는 생명의 모태(母胎)이다. 나무를 지탱하면서 나무에 양분 을 공급한다. 그래서 뿌리는 부드러우면서도 억센 생명력을 가진 모성을 환기시킨다. 그런데 이 내밀한 나무 뿌리가 지표면 위에 드러나 있다. 지하의 뿌리가 지상으로 드러난 것은 무슨 연유에 서인가. 아마도 늙고 노쇠하여 더 이상 대지의 자양분을 수확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노동의 기능을 잃었기에 뿌리는 ‘슬픔의 눈물’을 달고 있다. 그럼에도 뿌리는 ‘산을 움켜쥐고 ’ 결코 놓지 않는다. 비록 노동의 기능은 잃었지만, 나무를 떠 받치는 버팀목으로서의 기능을 다하기 위해서이다. 이처럼 척박 한 환경 속에서도 삶의 끈을 놓지 않으려는 생명체의 절박한 안 간힘, 그것을 시인은 지상에 드러난 뿌리의 모습에서 읽고 있다.
나아가 시인은 소나무와 뿌리의 관계에서 어린 아들과 자신의 관 계를 읽는다. 그리하여 나무를 지탱하려는 늙은 뿌리의 안간힘과 같이 자신 또한 어린 아들의 미래를 위한 버팀목이 될 것을 다 짐하는 것이다. 이렇게 정호승의 시에서 뿌리는 단단하면서도 부 드러운 대지의 속성을 표현한다. 별이 ‘천상에 박힌 뿌리’라면 , 뿌리는 ‘지상에 박힌 별’이다. 그래서 별의 추락이 슬픔의 기원이 되듯, 뿌리의 돌출 또한 대지의 슬픔을 보여주는 표지가 된다. 슬픔은 부드러움의 마술적 힘을 통해 별과 뿌리를 더욱 견 고하게 단련시킨다. 이처럼 정호승의 시에서 대지의 상상력은 별 과 꿀과 뿌리의 이미지로 다채롭게 변용되면서 슬픔의 변증법적 용해(溶解)를 보여준다.
3. 연소, 밝음과 어두움의 변증법
별은 결정체이자, 동시에 ‘광원(光源)’이다. 별이 아름다운 것 은, 그것이 빛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호승의 시에서 별은 빛나 지 않는다. 빛의 상실로 인해 별은 슬픔의 정서를 더욱 심화시킨 다.
구두를 닦으며 별을 닦는다./ 구두통에 새벽별을 가득 따 담고/ 별을 잃은 사람들에게/ 하나씩 골고루 나눠 주기 위해/ 구두를 닦으며 별을 닦는다./하루 내 길바닥에 홀로 앉아서/ 사람들 발 아래 짓밟혀 나뒹구는/ 지난밤 별똥별도 주워서 담고/ 하늘 숨은 낮별도 꺼내 담는다/(…)/ 저녁별 가득 든 구두통 메고/ 겨울밤 골목길 걸어서 가면/ 사람들은 하나씩 별을 안고 돌아가고/ 발 자국에 고이는 별바람 소리 따라/ 가랑잎 같은 손만 굴러서 간다 . (‘구두 닦는 소년’ 일부, 시집 ‘서울의 예수’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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