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 흘러도 세상은 여전히 혼탁하고
채만식 「탁류」의 군산
식민지 현실 비판한 세태소설 |
당초 옥구현에 속한 작은 포구에 불과했던 군산이 근대적인 항구도시로 급성장하게 된 배경에는 ‘쌀’이 있었다. 호남평야에서 거두어들인 쌀을 반출해가기 위해 일제는 이곳에 철길과 신작로, 그리고 항만을 건설했다. 이른바 전군가도와 군산내항의 폐선구역이 그 생생한 증거. 군산의 ‘발전’은 곧 착취의 심화를 의미했고, 그 착취의 중심적 공간은 소설 「탁류」의 배경과 일치한다.
「탁류」는 초봉이라는 여인의 기구한 삶의 역정과 아버지 정주사의 몰락 과정을 통해 식민지 시대 한국사회의 비참한 모습들을 그려낸다. 여기에 고태수, 장형보, 박승재, 박제호 등의 다양한 인간군상들을 얽어 놓아 그 비참함의 앞과 뒤를 직·간접적으로 밝혀낸다. 지금의 증시와 같은, 현물없이 종이 딱지만을 가지고 쌀의 시세로 투기하는 미두장에 대한 생생한 묘사, 그리고 조선은행의 업무에 대한 정확한 서술은 그 자체만으로도 식민지 수탈체제에 대한 고발로 읽힌다.
하지만 일제시대라는 시공간을 전제하지 않는다면 「탁류」는 자칫 평범한 세태소설의 범위에서만 읽힐 수 있다. 일제를 향한 분노도, 직접적인 저항의지도 소설에는 드러나 있지 않은 것이다. 왜일까.
당대의 상황을 비판적으로 서술할 수 없을 때 작가는 ‘투항’하거나 ‘투쟁’하거나 혹은 ‘순수’를 외치며 작품 속으로 망명한다. 일제하 국권 상실 시기의 이름 있는 작가들은 거개가 이 셋 중 하나를 선택했다. 말하자면 작가들은 서정주이거나 임화이거나 김영랑이었던 것이다.
대중의 호응과 일제검열이라는 두 관문 |
채만식은, 그러나 이들 세 유형과는 다르게, 사회모순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행간의 의미망에 숨기고, 상대적으로 덜 부각되는 인물을 통해 어지러운 세태를 은연중에 들추어 낸다. 비판의 대상으로부터 역공을 당하기 직전까지만 이야기를 몰고 가는 이 방식은 다시 판소리 풍의 유장한 ‘풍자’의 옷을 입는다. 능청을 떨고 에둘러 나가면서 인물들의 행동이나 운명, 또는 상징적인 대화를 빌어 식민지 현실을 비판하는 것이다. 그의 작품은 반일조직의 교양문건이 아니라, 대중으로부터 호응도 얻어야 하고, 일제의 검열도 통과해야 할 공공연한 신문 연재물이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탁류」는 당대 상황에 대한 비판적인 안목을 제공해 줄뿐만 아니라, 소설 고유의 ‘읽는 맛’도 함께 준다. “세상이 어려울수록 문학은 행복하다”는 어느 평론가의 말처럼 두세 겹의 장벽(그는 가난하기까지 했다)을 뚫고 작품을 써야 하다 보니 그만큼 텍스트가 풍부해진 것이다. 제목 ‘탁류’부터가 참으로 복합적인 상징어이지 않겠는가.
오늘날에도 유효한 상징 ‘탁류’ |
이 상징은 오늘날에 와서도 여전히 유효하다는 점을 우리는 2002년 ‘개복동 윤락가 화재사건’에서 뼈아프게 확인할 수 있었다. 「탁류」의 무대이기도 한 개복동에서 15명의 여종업원이 화재참사로 목숨을 잃은 이 사건의 희생자들은 험한 세상과 포악한 남성들에게 착취당한 초봉이와 다를 바가 없었다. 그네들을 쇠창살에 감금했던 악덕포주들이 「탁류」의 악인, 장형보로 되살아난 느낌이다. 21세기 벽두의 군산일지라도 식민지시대와 다름없이 ‘탁류’의 물살에 여전히 휩쓸리고 있는 모습이다.
군산의 가장 높은 언덕배기라 할 수 있는 월명공원에는 ‘백릉채만식선생문학기념비’가 세워져 있어 이 모든 ‘군산들’을 내려다보고 있다. 또 금강 하구둑에는 채만식의 문학을 기리는 기념관과 공원이 조성되어 있어 생전의 영욕을 증언하고 있다. 하지만 세상은 그 시절보다 오히려 더 탁한 듯, 그 기구하고 혼란한 ‘인생’들의 사연은 나라 곳곳에서 끊임없이 반복되고 있다. “예서부터 실마리가 풀린다”던 이야기가 여즉 매듭을 짓지 못하고 있는 모양이다. 그런데 지금은 그나마 내 일인 양 증언해 줄 채만식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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