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정호승-
그는 아무도 나를 사랑하지 않을 때
조용히 나의 창문을 두드리다 돌아간 사람이었다
그는 아무도 나를 위해 기도하지 않을 때
묵묵히 무릎을 꿇고
나를 위해 울며 기도하던 사람이었다
내가 내 더러운 운명의 길가에서 서성대다가
드디어 죽음의 순간을 맞이했을 때
그는 가만히 내 곁에 누워 나의 죽음이 된 사람이었다
아무도 나의 주검을 씻어주지 않고
뿔뿔이 흩어져 촛불을 끄고 돌아가버렸을 때
그는 고요히 바다가 되어 나를 씻어준 사람이었다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 자를 사랑하는
기다리기 전에 이미 나를 사랑하고
사랑하기 전에 이미 나를 기다린
한 인간을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사람을 희망하고, 그를 위해서 희망을 갖고 또 지금의 그의 삶에서 그의 행복을 바라며 또한 그가 자신만의 세계를 위해 자신의 날개를 활짝 펴는 것을 희망하는 것이라는 걸 내게 알게 한 ‘그는’ 누구일까? 내 정신의 모든 욕망을 일순간 만족시켜 버리고, “타인들과 공감하는 자”의 세계에 대한 ‘단순하고 완전한 기쁨’을 누리게 만든 나의 ‘그’는 정호승 시인의 ‘그’와 꽤 많이 닮은 것 같다.
[사랑하다 죽어 버려라]라는 자극적이고 심상치 않은 제목의 시집 속에 실린 이 시, “그는”의 시인 정호승은 “사랑의 시인”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첫 시집부터 20년 이상의 시간 차이를 두고 시를 쓰면서 그가 사랑이라는 문제를 지속적으로 시의 주제로 삼고 있기 때문에 그런 게 아닌가 한다. 심지어 어떤 시인은 그의 시를 전체적으로 사랑의 시로 읽는 것도 틀린 시 읽기는 아닐 것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의 自序에 따르면 그는 새벽 기도에 빠지지 않을 정도로 열심히 교회를 다니신 어머니의 영향으로 자연스럽게 예수라는 인물을 일찍 만나게 되었다고 한다. 그의 시가 기독교적 세계관을 바탕으로 삼고 있는 것도 그 영향이 크다고 시인 스스로가 자인하는 걸 보면, 사랑에 관한 그의 관심은 나의 ‘그’인 예수와 관계가 있을 것이라는 내 짐작도 그렇게 빗나간 추측이 아닐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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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이 땅에 태어난 이유를 물을 때마다, “사랑하는 법을 배우기 위해서지요.”라고 대답하는 피에르 신부님의 “유일한 신성모독은 사랑에 대한 모독뿐이다”라는 말이나, “우리가 심판받는 유일한 잣대는 사랑”이라는 말 모두 예수에게서 온 것임을 나는 안다. 내가 ‘그’가 누구인가를 알기 위해 오래도록 이 길 저 길을 찾아 헤매었지만 ‘그’가 내게 남겨놓은 유일한 흔적은 그 무엇보다도 사랑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의 사랑법은 우리들의 그것과는 사뭇 다르다. 내가 아는 ‘그’의 사랑법 혹은 그의 사랑의 본질은 우리들과는 달리 끝까지 품는 희망이다. 우리들이 불화와 어둠 가득한 우리들의 ‘세계’라 부르는 이곳에서 우리들이 품었던 우리들의 희망이란 얼마나 짧았던가. 불화와 부조리와 모순 그리고 혼란과 취약함의 세계 속에서 그것들을 꿋꿋이 견뎌내기 위해 얼마나 두려움 없이 그 속으로 뛰어들려 했던가.
아니, 그보다도 우리가 사는 이곳이 ‘그’가 함께 살고 있는 '그‘의 세계라는 것을 믿을 수는 있었던가.
이곳이 우리의 세계이며 동시에 ‘그’가 우리와 더불어 살고 있는 ‘그’의 세계라는 사실을 우리 스스로가 희망할 때, 그때야 비로소 우리는 ‘그’의 사랑법에 익숙해질 터이고 마침내 사람으로서 우리의 본래의 아름다움을 서로에게서 찾을 수 있으리라.
모두가 "뿔뿔히 흩어져 촛불을 끄고 돌아가버렸을 때," ‘그‘만은 어둠 속에 홀로 남아 희망의 등불을 밝혀들었다. 우리의 가슴도 그렇게 불밝혀져서 ‘그’의 사랑을 닮을 수 있도록 '그‘는 “기다리기 전에 이미 나를 사랑하고/ 사랑하기 전에 이미 나를 기다리”며 우리들의 세계 속에 들어와 사랑이 되어버렸다.
‘그’가 한 인간인 나를 사랑한다는 것, 나를 희망하고 나를 위해 희망한다는 것의 궁극적 의미는 내가 ‘그’의 사랑 안에 감싸여 ‘그’를 닮은 수많은 ‘나’를 사랑한다는 의미라는 걸 내게 알게 한 '그‘...
‘그’가 비천한 말구유에서 태어난 날을 기념하는 축제의 시간이 다가왔다. ‘그’의 사랑의 방식-희망과 사랑이 하나인-이 우리 안에서도 매순간 태어날 때, 그때 그의 탄생은 영원히 지속되리라.
“공허한 말에 만족치 말고 사랑하자. 그리하여 시간이 어둠에서 빠져나갈 때,
모든 사랑의 원천에 다가서는 우리의 마음은 타는 듯 뜨거우리라.”
필자 -최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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