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남준이란 시인이 이런 시를 쓴 적이 있다.
생각만 해도 가슴이 미어져가는 것
그는 모르는지
길 끝까지 간다
가는데 갔는데
기다려본 사람만이 그 그리움을 안다
무너져 내려본 사람만이 이 절망을 안다
저문 외길에서 사내는 운다
소주도 없이 잊혀진 사내가 운다
-저문 외길에서
나는 어떤 그리움과 절망을 알고 있는 것일까. 간절히 기다릴 무엇을 가져본 적이 있던가, 아님 숨소리마저 내기 힘들 정도로 무너져 내려본 경험이 있던가. 간절함이 없었다면 절망도 없을 텐데, 내가 그런 대로 목숨을 부지하고 있는 것은 그만큼 내 목숨을 가볍게 여기는 탓이 아닐까. 간절한 염(念)이 없는 목숨은 이미 목숨이 아니라 믿는 까닭이다. 신앙은 전폭적이요 전인적인 투신을 요구한다는데, 나는 내 신앙을 점검해 봐야 하는 게 아닌가. 대충 어디쯤에서 둥지를 트는 게 아니라, 길끝까지 가야 하는 게 아닌가. 그 길끝에서 기다림만큼의 절망을 얻고 아파하고 눈물 흘려야 하는 게 아닌가. 그래야 더는 절망할 이유가 없어지는 게 아닌가. 항상 주춤거리는 생애는 고달프기만 하고 쟁쟁한 진리와는 상관이 없다.
그 사람, 박남준은 나무를 태우며 생애가 주는 쓸쓸했을 외로움마저 오히려 따듯하게 감싸 안을 줄 알았다. ‘한 나무가 있었네’라는 시편이다.
쉬지 않고 계율처럼 깨어나 흐르는 물소리와 저 아래로부터 일어나 온 산을 감싼 구름으로 두어 발 한세상이 자욱해질 무렵 죽어 쓰러진 나무등걸 모아 불 지핀다. 맵다. 상처처럼 일어나는 연기. 산중 나무 한 그루 태어나 숨 거두기까지 한 생각 그랬겠다 쓸쓸했을 지난날의 외로움이 울먹울먹 피어나서 이렇게 눈물나게 하는 것인지. 타오르며 전해오는 푸른 나무의 옛날. 불꽃, 참 따듯한 그리움
곳곳에서 자신의 전생(前生)을 읽어내는 사람은 복되다. 나의 생애 속에서 다른 이들의 생애를 읽어내고, 다른 이들의 생애 속에서 나의 생애를 발견하는 능력이 애쓴다고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해도, 피부호흡을 하듯이 우리 몸의 창문 하나를 세심하게 열어두면, 저들이 알아서 소통하지 않을까. 내가 나를 놓으면, 이천년전 예수의 몸과 내 몸이 서로 소통하고, 새벽이면 어김없이 논둑길 밟아 나가는 아랫마을 노인장의 흙빛 얼굴과 내 얼굴이 소통하고, 우리 아기와 내 눈빛이 서로 소통하지 않을까. 그늘이 많은 만큼 윤곽이 선명해지고, 삶이 고단한 만큼 진하고 무겁게 와 닿으며, 말이 없을수록 몸이 먼저 일어나서 서로에게로 걸어 들어가지 않을까. 내 영혼의 파장이 가장 적절한 골짜기를 스스로 찾아들지 않을까. 내 열망이 깊은 곳에 그 열망을 함께 나누려는 영혼이 찾아들지 않을까. 그 간절함과 그리움의 넋 뒤로 숨어 들어올 자가 궁금하다. 그러면 이제 우리 영혼의 그늘도 참 따듯해지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