言/간직하나人

나도향

oldhabit 2008. 5. 24. 14:36

나는 그믐달을 몹시 사랑한다.
   그믐달은 요염(妖艶)하여 감히 손을 댈 수가 없고, 말을 붙일 수도 없이 깜찍하게 예쁜 계집 같은 달인 동시에, 가슴이 저리고 쓰리도록 가련한 달이다.

   서산 위에 잠깐 나타났다 숨어 버리는 초승달은, 세상을 후려 삼키려는 독부(毒婦)가 아니면, 철모르는 처녀 같은 달이지마는, 그믐달은 세상의 갖은 풍상(風霜)을 다 겪고, 나중에는 그 무슨 원한을 품고서 애처롭게 쓰러지는 원부(怨婦)와 같은 애절한 맛이 있다.

   보름에 둥근 달은 모든 영화와 숭배를 받는 여왕과 같은 달이지마는, 그믐달은 애인을 잃고 쫓겨남을 당한 공주와 같은 달이다.

   초승달이나 보름달은 보는 이가 많지마는, 그믐달은 보는 이가 적어 그만큼 외로운 달이다.

   객창한등에 정든 임 그리워 잠 못 들어 하는 분이나, 못 견디게 쓰린 가슴을 움켜잡는 무슨 한(恨) 있는 사람이 아니면 그 달을 보아 주는 이가 별로 없을 것이다.

   그는 고요한 꿈나라에서 평화롭게 잠든 세상을 저주하며, 홀로 머리를 풀어뜨리고 우는 청상과수(靑孀寡守)와도 같은 달이다. 내 눈에는 초승달 빛은 따뜻한 황금빛에 날카로운 쇳소리가 나는 듯하고, 보름달은 쳐다보면 하얀 얼굴이 언제든지 웃는 듯하지마는, 그믐달은 공중에서 번듯하는 비수(匕首)와 같이 푸른빛이 있어 보인다.

   내가 한 있는 사람이 되어서 그러한지는 모르지만, 내가 그 달을 많이 보고 또 보기를 원하지마는, 그 달은 한 있는 사람만 보아주는 것이 아니라, 늦게 돌아가는 술주정꾼과 노름하다 오줌 누러 나온 사람도 보고, 어떤 때는 도둑놈도 보는 것이다.

   어떻든지, 그믐달은 가장 정(情) 있는 사람이 보거나 또는 가장 한(恨) 있는 사람이 보아주고, 또 가장 무정한 사람이 보는 동시에 가장 무서운 사람들이 많이 보아준다.

   내가 만일 여자로 태어날 수 있다 하면, 그믐달 같은 여자로 태어나고 싶다.

 


-나도향의 그믐달, 조선문단 1925년-

<‘소리 내어 읽고 싶은 우리 문장’ 中, 장하늘 지음, 다산초당 펴냄>

 


나도향, 도향(稻香)은 그의 호이고, 본명은 경손이다.

1926년 8월 타계, 향년 24세 사인은 급성 폐렴.

이글은 타계 일년 전(1925년), 그의 나이 23세 때의 글이다.

스물셋에 이런 글을.. 그의 천재적 文才를 엿볼 수 있으니,

그의 요절은 그의 표현처럼 애절한 일이다.

그의 운명을 예감한 듯한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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