言/간직하나人

잔 다르크

oldhabit 2009. 2. 25. 20:27

잔 다르크
 
 
(영)Saint Joan of Arc. 별칭은 오를레앙의 처녀(La Pucelle d'Orléans).

1412경 프랑스 바르 동레미~1431. 5. 30 루앙.

1920년 5월 16일에 성인으로 추증되었으며 축일은 5월 30일.

백년전쟁(1337~1453) 때 조국을 위기에서 구한 프랑스의 국가영웅.
[개요]

잔 다르크, 필사본 <La Vie des femmes celebres>(1505)에 ...
농촌 출신의 소녀로서 성령의 부름을 받았다고 주장하면서 군대를 이끌고 오를레앙에서 중요한 승리를 거둠으로써 프랑스를 정복하려던 잉글랜드의 시도를 좌절시켰다. 출정하고 1년 뒤 사로잡혀 잉글랜드군 및 그들과 손을 잡은 프랑스 진영에 의해 이단으로 화형당했으나 이후 프랑스 최고의 국가영웅이 되었다. 그녀의 활약은 프랑스 국민의식의 각성에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다.

잔 다르크는 1412년경 바르 공작령과 로렌 공작령의 경계의 동레미에서 소작농의 딸로 태어났다. 그녀는 대천사 미카엘, 성 카테리나, 성 마르가리타의 '음성'을 듣고 발루아 왕조의 프랑스에서 잉글랜드 세력 및 그들과 동맹한 부르고뉴를 축출해야 한다는 사명의식을 느꼈다고 한다. 당시 잔은 신앙이 매우 독실하고, 성인들과 직접 교류하는 능력이 있음을 주장하며, 교회라는 제도의 틀을 넘어 하느님이 자신의 안에 내재하고 있다는 개인적 체험을 내세우는 등 예언자로서의 여러 특성을 보여주었다. 거기에다 흔들림 없는 상식과 놀랄 만한 정신적·육체적 용기를 갖추어, 이후 특히 프랑스가 위기에 처했을 때 국민들을 결속시키는 구심점이 되었다.


[잔 다르크의 사명]

당시 프랑스는 발루아 왕조의 왕 샤를 6세의 아들이며 왕위계승자인 왕세자 샤를과 랭커스터가 출신의 잉글랜드 왕 헨리 6세가 프랑스 왕위를 놓고 다투는 격전장이었다. 헨리의 군대는 부르고뉴 공작 필리프(선량공)와 동맹을 맺고 프랑스 북부의 거의 전역을 점령하고 있었다. 전통적으로 왕위 즉위식을 올리던 랭스가 계속 적의 수중에 있었기 때문에 왕세자 샤를은 부왕 샤를 6세 사후 6년이 지난 1427년말에도 정식으로 왕관을 쓰지 않았고, 이 때문에 그의 왕위주장 명분은 거의 현실성이 없게 되었다. 왕세자 즉위식을 올리지 않은 한 프랑스 왕위주장의 정당성은 언제든지 도전받을 수 있었다.

잉글랜드­부르고뉴 연합세력과 샤를 세력의 접경에 있던 잔의 고향 동레미의 사람들은 부르고뉴의 위협 앞에 거의 자신들의 고향을 포기한 상태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잔은 1428년 5월 '음성'의 인도를 받아, 왕세자에게 충성하고 있는 가장 가까운 거점인 보쿨뢰르로 가서 그곳 사령관에게 왕세자 군대에 가담하도록 허락해줄 것을 요청했다. 처음에 사령관은 16세 소녀의 초월적 능력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나 1429년 1월 재차 방문한 잔의 굳은 마음과 신앙심에 설득되어 왕세자가 있던 시농으로 가는 것을 허락했다. 같은 해 2월 13일 잔은 남자의 복장으로 6명의 무장한 군인의 호위를 받으며 출발했으며, 적의 영토를 가로질러 11일 뒤 시농에 도착했다. 잔은 도착 즉시 샤를이 머무르고 있는 성에 갔다. 샤를은 그녀를 받아들여야 할 것인지를 확신하지 못했고 측근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분분했지만, 이틀 뒤 접견을 허락했다. 샤를은 신하들 속에서 모습을 감추고 있었지만 잔은 그에게 곧바로 가서 자신이 잉글랜드군과 싸우기를 원하며 랭스에게 즉위식을 올리게 해주겠다고 말했다. 왕세자의 명령으로 즉시 교회당군에 의해 심문이 이루어졌다. 샤를의 친척인 알랑송 공작도 그 심문에 참석했는데 그는 잔에게 호의를 보였다. 3주 뒤에는 푸아티에에서도 저명한 신학자들의 질의문답이 있었다. 이러한 심문은 1417년 교회의 대분열이 막을 내린 뒤에도 여전히 존재했던 이단에 대한 두려움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잔은 성직자들에게 자신의 사명을 증명할 곳은 푸아티에가 아니라 오를레앙이라고 말하고 3월 22일에는 잉글랜드군에게 보내는 도전장을 받아쓰게 했다. 성직자들은 당시 잉글랜드군에게 수개월 간 포위되어 절망적인 상황에 있던 오를레앙의 구출에 그녀가 도움이 될 것이라는 조언을 올렸고 샤를도 그것을 받아들였다. 잔은 시농으로 돌아왔고 샤를은 4월중에 투르에서 잔에게 약간의 군속을 붙여주었다. 장 돌롱이 시종으로 따랐고, 오빠 장과 피에르도 그녀를 따랐다. 그녀는 심판일의 예수를 그린 기장과 예수의 이름이 새겨진 기를 들었다. 칼은 어디에서 구할 것이냐는 질문에 그녀는 생트카트린드피에르부아 교회에 있을 것이라고 답했고 실제로 그곳에서 칼이 발견되었다.

1429년 4월 27일 블루아에서 수백 명의 군대가 소집되어 오를레앙으로 향했다. 오를레앙은 1428년 10월 12일 이래로 잉글랜드 요새에 의해 완전 포위되어 있었다. 4월 29일 잔과 프랑스군 사령관 라 이르가 보급품을 가지고 갔을 때 잔은 증원군이 올 때까지 행동을 자제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오를레앙 포위전). 5월 4일 저녁 잔은 쉬고 있다가 영감을 받은 듯 갑자기 벌떡 일어나 잉글랜드군을 공격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나서 무장을 갖춘 뒤 도시의 동쪽에 있는 잉글랜드군 요새로 서둘러 향했다. 당시 그곳에는 교전이 벌어지고 있었으나 그녀는 그 사실에 대해 들은 적이 없었다. 잔의 도착은 프랑스군의 사기를 높여주었고 마침내 프랑스군은 요새를 탈환하는 데 성공했다. 다음날 잔은 또다른 도전장을 잉글랜드군에게 보냈다. 5월 6일 아침 그녀는 강의 남쪽 둑으로 건너가 다른 요새를 향해 진격했다. 이에 잉글랜드군은 그 근방의 더 강력한 요새를 방어하기 위해 철수했다. 그러나 잔과 라 이르는 잉글랜드군을 공격해 그 요새마저 삽시간에 빼앗았다. 5월 7일 새벽 프랑스군은 레투렐 요새로 진군했다. 잔은 부상을 입었지만 곧바로 전투에 복귀했고, 그녀의 이러한 본보기에 자극되어 프랑스 지휘관들은 쉬지 않는 공격을 퍼부어 마침내 잉글랜드군의 항복을 받아냈다. 다음날 잉글랜드군은 퇴각하려는 듯 보였지만 일요일이기 때문에 잔은 추격을 허락하지 않았다. 5월 9일 잔은 오를레앙을 떠나 투르에서 샤를을 만났다. 그녀는 왕세자에게 랭스로 서둘러 가서 대관식을 올릴 것을 촉구했다. 보다 신중한 태도를 취한 샤를의 참모 몇몇은 이와는 달리 노르망디의 정복을 조언했다. 샤를은 잠시 머뭇거렸지만 결국은 잔의 끈질긴 요구에 기울었다. 그러나 우선 루아르 강변의 여러 마을에 있는 잉글랜드군을 소탕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잔은 프랑스군 중장인 그녀의 친구 알랑송 공작을 만났고, 함께 이동해 도시 하나와 중요한 다리 하나를 손에 넣었다. 그런 다음 그들은 보장시를 공격했다. 잉글랜드군은 공격을 받고 성 안으로 후퇴했다. 이어 잔은 샤를 및 그 측근 조르주 드 라 트레무아유의 반대와, 알랑송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프랑스 궁정에서 의심을 받고 있던 프랑스 사령관 리슈몽을 받아들였다. 잔은 충성서약을 하게 한 뒤 그의 도움을 받았으며 얼마 후 프랑스군은 보장시 성을 함락하는 데 성공했다.

1429년 6월 18일 프랑스군과 잉글랜드군은 파테에서 전투를 벌였다. 잔은 병사들에게 샤를이 그날 최대의 승리를 거둘 것이라고 약속했다. 잔의 말 그대로 완벽한 승리가 이루어졌다. 잉글랜드군은 패주했고 무적이라는 명성이 프랑스군에게 뒤따랐다. 잔과 사령관들은 여세를 몰아 대담한 파리 공격에 착수하는 대신 당시 라 트레무아유와 함께 쉴리쉬르루아르에 있던 샤를과 합류하기 위해 되돌아갔다. 잔은 다시 한번 샤를에게 랭스로 신속하게 진군할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그는 주저했다. 루아르 강을 따라 여러 도시를 지나는 동안 잔은 샤를을 수행하면서 시간을 끌 것을 주장하는 측근들의 조언과 그의 주저함을 물리치고 결단을 내릴 것을 요구했다. 그녀는 랭스 공격의 위험과 어려움을 모르지는 않았지만 그것을 대수롭지 않은 것으로 돌렸고, 마침내 샤를을 설득하는 데 성공했다.

군대가 집결하기 시작한 지앵에서 잔은 편지 2통을 썼는데, 하나는 샤를에 대한 충성을 끝까지 버리지 않고 있던 투르네 주민에게 보내는 권고이고, 다른 하나는 부르고뉴 공작 필리프에 대한 도전장이었다. 6월 29일 그녀는 샤를과 함께 랭스로 출발했다. 트루아에 도착하기 전에 잔은 그 도시 주민에게 투항하면 용서해주겠다는 내용의 글을 보냈다. 그들은 잔을 탐색하기 위해 설교사인 수도승 리샤르를 보냈다. 그가 그녀의 사명에 깊은 감명을 받고 돌아왔지만 도시 주민들은 잉글랜드-부르고뉴 연합 편에 계속 남기로 결정했다. 샤를은 회의를 열었고 잔은 공격을 제의했다. 다음날 아침 잔은 공격을 개시했고 트루아는 곧바로 강화를 요구했다. 이어 샤를의 군대는 샬롱으로 진군했다. 샬롱의 주민들은 저항을 결의했지만 주교백작은 성문열쇠를 샤를에게 넘겨주었다. 7월 16일 프랑스군은 랭스에 도착했고, 랭스는 성문을 열었다. 1429년 7월 17일 대관식이 거행되었다. 잔은 제단으로부터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기를 들고 서서 행사를 참관했다. 식이 끝난 뒤 그녀는 샤를 앞에 무릎을 끓고 처음으로 자신의 주군이 되어줄 것을 요청했다. 같은 날 그녀는 부르고뉴 공작 앞으로 강화와 국왕요새로부터의 철수를 권고하는 서한을 보냈다.

1429년 7월 20일 국왕 샤를 7세에 즉위한 왕세자는 랭스를 떠났고, 군대는 1개월 동안 샹파뉴와 일 드 프랑스 전역에서 행진을 벌였다. 8월 2일 왕은 프로뱅에서 루아르로 퇴각하기로 결정했는데, 이러한 결정은 파리공격 계획의 전면포기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적의 손에 들어갈지도 모르는 국왕편의 도시들은 다소 놀람을 표시했다. 잔은 샤를의 결정에 반대하면서 8월 5일 랭스 시민들을 안심시키는 서한을 썼다. 그녀는 그 편지를 통해, 당시 파리를 점령하고 있던 부르고뉴 공작과 2주일간의 화약을 맺었으며, 그 기간이 지나면 그가 파리를 국왕에게 넘겨 줄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8월 6일 잉글랜드군은 프랑스군이 브레이에서 센 강을 건너는 것을 막았는데, 샤를의 파리 공격을 원했던 잔과 사령관들에게는 매우 기쁜 일이었다. 잔은 프랑스 어느 곳에서든 환호를 받았다. 15세기 연대기 작가에 따르면 당시 잔은 프랑스인들의 우상이 되었다고 한다. 그녀는 자신의 사명이 완수되었다고 스스로 생각했다. 8월 14일 프랑스군과 잉글랜드군은 상리스 근처에서 다시 한번 대치했다. 이번에는 소규모 접전만 몇 차례 일어났을 뿐이었다. 잔이 잉글랜드군의 참호 앞에 나가 공공연히 도전을 제기하기도 했지만 어느 편도 전투를 시작하려 하지 않았다. 한편 콩피에뉴·보베·상리스 등 파리 북쪽에 있는 도시들이 프랑스 왕에게 항복했다. 그 직후인 8월 28일에는 센 강 이북의 전역을 대상으로 4개월의 휴전 기간을 갖자는 데 부르고뉴와 합의했다. 그러나 잔은 점점 초조해졌다. 그녀에게는 파리 함락이 매우 중요했다. 8월 26일 잔이 알랑송과 함께 파리 북쪽 교외 생드니로 접근하자 파리 시민들은 방어망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9월 7일 샤를이 도착했고 9월 8일 생오노레와 생드니 중간지점에서 공격이 시작되었다. 잔은 공격군 맨 앞에 서서 파리 주민들에게 파리를 '프랑스의 국왕'에게 넘겨줄 것을 요구했다. 부상에도 불구하고 잔은 군사들을 계속 독려했지만, 결국 공격을 포기해야 했다. 다음날 그녀는 알랑송과 함께 공격을 재개했지만 왕실회의에서는 퇴각을 명령했다.

샤를 7세는 루아르로 물러났고 잔도 그를 따라갔다. 9월 22일 프랑스군은 지앵에 도착한 뒤 해체되었고, 알랑송을 비롯한 지휘관들은 귀향했다. 이제 왕의 곁에는 잔만 남았다. 후에 알랑송은 노르망디 공격을 계획하고 왕에게 잔의 합류를 요청했지만, 라 트레무아유를 비롯한 신하들은 알랑송을 만류했다. 잔은 왕과 함께 부르주로 갔다. 거기서 그녀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선행과 온정을 베풀었는데 이것은 오랫동안 사람들의 기억에 남았다. 10월에 그녀는 생피에르르무티에로 갔다. 거기서 얼마 안 되는 병력을 이끌고 용감한 공격을 감행해 그 도시를 점령했다. 그 다음에는 라샤리테쉬르루아르를 포위했다. 도중에 탄약이 떨어져 이웃의 여러 도시에 원조를 요청했지만 물자가 너무 늦게 도착해 1개월 뒤 철수해야 했다.

이어 잔은 루아르 강변의 여러 도시에서 겨울을 나고 있던 왕과 재회했다. 1429년 12월말 국왕 샤를은 잔과 그녀의 부모·오빠를 귀족에 임명하는 특허장을 내렸다. 1430년초 부르고뉴 공작은 브리와 샹파뉴를 위협하기 시작했다. 랭스의 주민들은 불안해했으나 잔은 3월에 그 도시에 대한 왕의 관심과, 자신이 그곳의 방어를 맡겠다는 약속을 제시함으로써 안심시켰다. 부르고뉴 공작이 콩피에뉴 공격에 착수하자 주민들은 도시의 수호를 결의했다. 3월말에서 4월초경에 잔은 왕을 떠나 오빠 피에르, 시종인 장 돌롱, 그리고 무장병사 몇 명만을 대동하고 콩피에뉴 원조길에 올랐다. 4월 중순 그녀는 믈룅에 도착했고, 그 도시 주민들은 그녀의 출현에 힘입어 샤를 7세에 대한 지지를 선포했다. 1430년 5월 14일 잔은 콩피에뉴에 도착하여 랭스 대주교 르노 드 샤르트르와, 왕의 친척인 방돔 백작 루이 1세 드 부르봉을 만났다. 그녀는 그들과 함께 수아송으로 갔으나 그곳 주민들은 입성을 저지했다. 르노와 방돔은 마른 강과 센 강의 남쪽으로 되돌아가기로 했지만 잔은 그들과 함께 가기를 거부하고, 콩피에뉴의 '좋은 친구들'에게 돌아가는 길을 택했다.


[체포·재판·처형]

돌아가는 길에 잔은 부르고뉴군의 지휘관인 룩셈부르크의 존이 콩피에뉴를 포위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녀는 길을 재촉해서 어둠을 이용해 콩피에뉴로 갔다. 다음날인 5월 23일 오후 잔은 돌격대를 이끌고 부르고뉴군과 맞붙어 그들을 재차 격퇴했다. 그러나 잉글랜드군 증원부대에 밀려 결국 후퇴해야 했다. 부대가 우아즈 강을 넘는 동안 그녀는 가장 뒤에 남아 후위를 방어하다가 말에서 떨어졌고 다시 말에 오르지 못했다. 결국 잔은 사로잡혀 피에르 및 장 돌롱과 함께 마르니로 이송되었고 거기서 부르고뉴 공작 앞으로 갔다. 르노 드 샤르트르는 잔의 체포소식을 랭스 주민들에게 전하면서 그녀가 조언을 모두 물리치고 제멋대로 행동했다고 비난했다. 그무렵 부르고뉴 공작과의 협상을 추진하고 있던 국왕 샤를도 그녀를 구할 시도를 하지 않았다. 룩셈부르크의 존은 잔과 장 돌롱을 베르망두아에 있는 자신의 성으로 보냈으며, 그녀가 탈출하여 콩피에뉴로 돌아가려는 시도를 하자 보다 멀리 떨어져 있는 성으로 옮겼다. 그곳의 대우는 좋았으나 콩피에뉴가 곤경에 처해 있다는 소식이 갈수록 그녀를 괴롭혔다. 탈출욕망이 너무나 커서 탑 꼭대기에서 해자로 뛰어내려 정신을 잃은 적도 있었다. 크게 다치지는 않았으며, 회복되자 부르고뉴 공작 편에 있는 마을인 아라스로 옮겨졌다.

파리에는 5월 25일에 그녀의 체포소식이 도착했다. 그 다음날 잉글랜드 편이던 파리대학교는 부르고뉴 공작에게 재판을 위해 잔을 종교재판장이나 그녀가 체포된 도시인 보베의 주교 피에르 코숑에게 넘길 것을 요청했다. 대학당국은 같은 내용의 편지를 룩셈부르크의 존에게도 보냈다. 7월 14일 보베 주교는 부르고뉴 공작에게 가서 잉글랜드 국왕과 자신의 이름으로 1만 프랑에 잔을 넘겨줄 것을 요청했다. 부르고뉴 공작은 이 요구사항을 룩셈부르크의 존에게 전달했으며, 마침내 1431년 1월 3일 잔은 주교에게 넘겨졌다. 재판장소는 루앙으로 결정되었고, 잔은 루앙 주둔 잉글랜드군 사령관인 워릭 백작이 점령하고 있던 부브뢰일 성의 탑으로 이송되었다. 잔이 잉글랜드 국왕에 대해 반기를 들었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었지만, 신앙과 관련된 문제를 주관하던 파리대학교가 이단 재판을 주장했기 때문에 잔은 교회법정에 서게 되었다. 당시 여러 신학자들이 규정한 정통의 기준에서 본다면 그녀의 신앙은 정통주의에 엄격히 부합되는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악의 세력과 영적인 전쟁을 벌이고 있음을 자처하는 지상의 그리스도 교회의 동료도 아니었고, 음성이나 예언을 통해 하느님과 직접적인 교류를 가지는 능력이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교회의 위계질서를 위협한 존재였다. 거기에다 그녀를 재판에 회부한다면 마녀나 적어도 이단의 도움으로 샤를 7세가 즉위한 셈이 되어 프랑스 왕의 권위를 실추시킬 것이라는 점도 고려되었다. 보베 주교 코숑과 프랑스의 장 르메트르가 재판관으로 정해졌다.

1431년 1월 13일부터 로렌을 비롯한 여러 곳에서 수집된 참고진술서가 보베 주교 일행 앞에서 낭독되었다. 이를 기초로 심문의 초안이 작성되었다. 잔은 2월 21일에 재판관 앞에 출두하라는 소환장을 받았다. 그녀는 재판에 앞서 미사에 참석하도록 허락해줄 것을 요청했지만 탑에서 뛰어내려 자살을 기도하는 등 죄가 무겁다는 이유로 거부되었다. 그녀는 진실만을 말하겠다는 서약을 하도록 명령받았고 그렇게 서약했다. 그러나 샤를과의 대화 내용은 결단코 밝히기를 거부했다. 잔은 코숑이 감옥을 벗어나는 것을 금지했다 하더라도 탈출 시도는 자유라고 주장했다. 이 때문에 감방 간수가 배치되고 사슬로 나무토막에 묶이게 되었으며, 때로는 족쇠가 채워지기도 했다. 2월 21일에서 3월 24일까지 거의 12번의 심문이 이루어졌고 매 심문 때마다 진실서약이 있었다. 그러나 잔은 재판관들이 국왕 샤를의 적이라는 이유로(그들이 거의 모두 같은 프랑스인이라해도) 모든 것을 말할 필요는 없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3월 24일 예비심문 보고서가 잔에게 낭독되었고, 그녀는 2가지 점만을 제외하고 모두 정확하다고 인정했다.

그로부터 하루 이틀 뒤 본재판이 시작되었는데 70가지에 달하는 죄목에 그녀가 답하는 데만 이틀이 걸렸다. 그 죄목들은 기본적으로 잔의 모든 태도와 행위가 신성모독의 혐의가 있다는 주장에서 나온 것이었다. 구체적으로는 스스로 신의 계시를 받았다고 공표한 점, 미래를 예언한 점, 편지에 예수와 마리아라는 서명을 함으로써 예수의 이름이 가지는 신비한 마력을 지니려고 한 점, 구원의 사명을 띠고 있다고 자처한 점, 남자의 복장을 한 점 등이었다. 아마도 가장 무거운 죄목은 하느님으로부터 직접 명령을 받았다고 하는 주장으로 이것은 하느님의 중계자를 자처하는 교회의 직능을 무시하는 발언이었다. 3월 31일 잔은 교회에 대한 복종문제 등 그녀가 회피했던 항목 몇 가지를 다시 질문받았다. 그녀의 입장에서는 자신을 심문하고 있는 법정에 복종하는 여부는 분명 교회에 대한 복종과 통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러한 질문은 하나의 테스트가 되는 셈이었다. 잔은 지상의 그리스도 교회가 오류를 저지를 수 없다는 것은 잘 알고 있지만 자신의 언행에 대해서는 오직 하느님과 성인만이 판단할 수 있다고 말하며 함정을 피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했다. 심문은 계속되었고, 조목은 70가지에서 12가지로 줄어들어 루앙과 파리에 있는 저명한 여러 신학자의 검토를 받도록 했다.

한편 그녀는 옥중에서 병에 걸려 의사 2명으로부터 검진을 받았다. 4월 18일 코숑 일행이 방문해 교회에 복종할 것을 권유했다. 병이 깊어져 죽음이 가까워졌음을 확인한 잔은 고해성사와 성체성사를 부탁했고, 아울러 묻히는 자리에 축성식을 해달라는 요청을 올렸다. 그리고 계속되는 괴로운 심문에 대해서는 "나는 우리 주님에게 의지하며", "할말은 이미 다 했다"라는 대답만 되풀이했다. 법정은 보다 집요해져서 5월 9일 몇몇 조목에 분명히 답하지 않는다면 고문을 실시하겠다는 위협을 했다. 여기에 대해 잔은 비록 고문을 받아 죽는 한이 있더라도 달리 대답하지는 않을 것이며, 이후 자신이 하는 어떠한 자백도 강제에 의한 것이 될 것이라는 말을 덧붙였다. 이러한 불굴의 용기 앞에서 5월 12일 심문자들은 10:3으로 고문이 더이상 소용없으리라는 결정을 내렸다. 5월 23일 잔은 계속 고집을 부린다면 파리대학교가 그녀를 세속법정으로 넘기기로 결정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교회가 아닌 오직 세속법정에서만이 이단혐의자에게 사형선고를 내릴 수 있었다. 이제 더이상의 심문은 없는 듯했다. 5월 24일 잔은 4개월 만에 처음으로 감옥에서 나와 판결이 낭독될 생투앙 교회 묘지로 호송되었다. 거기서 먼저 신학자 한사람이 설교를 했는데, 그는 샤를 7세를 격렬히 공격했다. 잔은 분개해 설교를 막고 "그가 선한 그리스도교도 샤를을 비난할 권리가 없으며 비난은 자신에 한해야 한다"고 말했다. 설교가 끝난 뒤 그녀는 자신의 언행에 대한 모든 증거를 로마로 보낼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판사들은 이를 무시하고 그녀를 세속법정으로 보내도록 하는 판결문을 낭독했다. 이런 무서운 선고를 듣고 잔은 움찔하며 교회가 요구하는 것은 어떤 것이든 하겠다고 말했다. 준비된 신앙철회 문서가 앞에 놓이자 그녀는 잠시 주저했지만 "우리 주님이 원하는 바라면"이라는 말을 하며 서명했다. 그 다음에는 종신금고형, 또는 어떤 학자의 주장에 따르면 평소에 감옥으로 사용되었던 장소에 투옥되는 판결을 받았다. 어떻든 재판관들은 이전의 감옥으로 돌아갈 것을 요구했다. 부심문장인 장 르메트르가 잔에게 여성의 옷으로 갈아 입을 것을 명령했고 그녀는 이에 따랐다. 그러나 2, 3일 후 재판관들을 비롯한 몇몇 사람들이 그녀를 방문했을 때 잔이 또다시 남자복장을 하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잔은 자신의 자유의지에 따라 남자옷을 입었노라고 말했다. 그들은 몇 가지 질문을 했고, 거기에 대해 그녀는 자신의 신앙철회를 '배신행위'로 꾸짖는 성 카테리나와 성 마르가리타의 목소리를 들었다고 답했다. 그들은 이러한 자백이 이전의 타락 상태로 되돌아갔음을 뜻한다고 단정지었으며, 5월 29일 재판관들과 39명의 일행은 잔을 세속법정으로 넘기는 데 만장일치로 결의했다. 다음날인 1431년 5월 30일 아침 잔은 신앙고백을 하고 성사를 받을 수 있도록 허락받았는데, 이것은 타락한 이단자에게는 이례적인 특혜였다. 그녀는 2명의 도미니쿠스파 수도사를 대동하고 비외마르셰 광장으로 인도되었다. 거기서 다시 한 차례의 설교가 있었다. 그리고 그녀를 세속법정에 넘긴다는 판결, 즉 화형에 처한다는 판결이 담당 재판관과 주위의 많은 대중 앞에서 낭독되었다. 사형집행자가 그녀를 결박해 화형대로 끌고 갔고 이어 장작더미에 불을 붙였다. 도미니쿠스파 수도사 1명이 잔을 달래자 그녀는 그에게 십자가를 높이 들어 자신이 볼 수 있도록 해주고, 구원의 확신에 대한 소리를 크게 외쳐 화염 속에서도 들을 수 있도록 해 줄 것을 부탁했다. 잔은 최후까지 자신의 말은 하느님의 음성을 그대로 전한 것이며 하느님은 자기를 속이지 않았다는 믿음을 가졌다. 1456년에 있었던 명예회복 재판에 따르면 잔의 죽음을 목격한 사람 가운데 그녀의 구원을 의심한 사람은 거의 없었으며, 모두 그녀가 독실한 그리스도교도로 죽었다고 믿었다고 한다. 화형식이 있은 며칠 뒤 잉글랜드 국왕과 파리대학교는 잔의 처형을 공식적으로 발표했다. 거의 20년이 지난 1450년 샤를 7세는 루앙을 방문하여 당시 재판의 검토를 명했다. 그로부터 2년 후 추기경 사절 기욤 데스트르빌은 더욱 철저한 조사를 실시했다. 마침내 잔의 가족들의 탄원으로 교황 칼릭스투스 3세는 조사위원회의 설치를 명했다. 1455~56년에 진행된 이 조사의 결과로 1431년의 판결은 취소되었다. 1920년 교황 베네딕투스 15세는 잔을 성인으로 추증했고 축일이 정해졌다. 같은 해 6월 24일 프랑스 의회는 잔을 기리는 국가적 축제를 매년 5월의 2번째주 일요일에 거행하도록 하는 법령을 선포했다.


[성품과 평가]

역사에서 잔 다르크가 차지하는 위치는 확고하다. 아마도 프랑스 정치·군사의 역사에서 보다 인간용기의 역사에서 잔은 더욱 커다란 부분을 차지하고 있을 것이다. 그녀는 외국과의 전쟁보다는 프랑스의 내란에서 희생양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오를레앙의 구출은 분명 빛나는 승리이며 이로 인해 프랑스 북부의 일부가 샤를 7세 편에 섰다. 그러나 백년전쟁은 잔의 사후에도 22년간 더 진행되었으며, 발루아 왕조 재건의 기초가 된 것은 1435년 부르고뉴의 선량공 필리프가 잉글랜드와의 관계를 단절하고 샤를 7세와 강화를 맺은 사건이었다. 더구나 잔이 내세운 사명의 성격을 두고 역사가·신학자·심리학자 들은 계속 논란을 벌여왔다. 잔의 전투 행적, 그 지지자들과 적들의 동기와 행동 등 셀 수 없는 부분이 논란거리가 되어왔다. 예를 들면 잔이 보쿨뢰르·시농·푸아티에를 몇 번이나 방문했고 그 날짜는 각각 언제인가, 어떻게 그녀가 시농에서 가진 샤를과의 첫번째 만남에서 바로 그의 신임을 얻을 수 있었는가, 랭스에서의 즉위식 뒤 있었던 샤를의 순회는 개선행진이었는가 아니면 자신 없는 과시용 시위였나, 그녀의 재판관들이 '종심금고형'이라 했을 때 그 의미는 무엇인가, 그녀가 신앙을 철회한 뒤 다시 남자복장을 한 것은 자신의 뜻이나 '음성'에 의한 것인가 아니면 나중에 나온 이야기처럼 잉글랜드인 간수의 강요에 의한 것인가 등이다.

뒤의 세대들은 잔의 사명이 가지는 의미를 당시의 복잡한 상황과 관련해 파악하기보다는 자신들의 정치적·종교적 입장에 따라 왜곡하는 경향이 있었다. 서유럽에서 일어난 교회 대분열(1378~1417)의 여파와 공의회 운동 기간(1409~49)에 일어난 교황권 실추로 인해 신앙문제에 독자적인 판단을 내리기는 더욱 어려워졌다. 종교재판의 판결은 정치를 비롯한 여러 분야의 영향을 받기 쉬었으며, 당시 변론이 허용되지 않고 감금상태에서 심문을 받았던 피고는 잔 혼자만이 아니었다. 성인으로서 그녀가 차지하는 위치는 다소 의심의 여지가 있는 기적에 의해서가 아니라 혹독한 심문에서 그녀가 보여준 영웅적인 용기와, 자신의 음성이 하느님으로부터 나온 것이며 따라서 자기 입장이 정당하다고 믿는 심오한 확신에 의해 결정되었다. 어떻든 잔은 거의 프랑스 북부 출신인 재판인단에 의해 사형언도를 받은 프랑스 내부투쟁의 희생양으로서, 신조와 파벌을 초월해 국민 모두로부터 공감을 얻은 프랑스 국민의식의 상징이 되었다.
 

Y. Lanhers/M.G.A. Vale 글

 

 

멩이 생각 : 잔 다르크가 중요한 이유는 100년 전쟁과 프랑스의 통일 때문이 아니다. 그가 기독교의 하느님과 집적 대화를 하고 소명을 받았다는 것이다. 신과 인간의 유일한 중재자로서 교회의 권위를 흔들 정도로 10대 소작농 딸은 진실했다. 예수가 하느님의 아들이었듯, 잔다르크가 하느님의 딸임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다. 우리 모두가 하느님의 아들이고 딸이라는 사실을 속이고, 예수만을 신성화하고 숭배해 하느님과 인간의 직접 교섭을 차단하고 지배하는 권력으로 교회가 수천년 썩어왔다는 것을 의미한다. 잔 다르크를 통해 기독교를 다시 볼 때, 어쩌면 기독교의 진수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카페 '사랑산' 에서 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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