言/오래묵을詩

비누

oldhabit 2008. 9. 8. 18:00

           비누


                     -임영조-

 

이 시대의 희한한 성자(聖子)
친수성(親水性) 체질인 그는
성품이 워낙 미끄럽고 쾌활해
누구와도 군말 없이 친했다.

 

아무런 대가도 없이 온몸을 풀어 우리 죄를 사하듯
더러운 손을 씻어 주었다.
밖에서 묻혀 오는 온갖 불순을
잊고싶은 기억을 지워 주었다.

 

그는 성직(聖職)도 잊고 거리로 나와
냄새 나는 주인을 성토하거나
얼룩진 과거를 청산하라고
외치지도 않았다. 다만
우리들의 가장 부끄러운 곳
숨겨 온 약점 말없이 닦아 줄 뿐
비밀은 결코 발설하지 않았다.

 

살면 살수록 때가 타는 세상에
뒤끝이 깨끗한 소모(消耗)는
언제나 아름답고 아쉽듯
헌신적인 보혈로 생을 마치는
이 시대의 희한한 성자

 

나는 오늘
그에게 안수(按手)를 받듯
손발을 씻고 세수를 하고
속죄하는 기분으로 몸을 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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