言/오래묵을詩

발자국외 9개의 시

oldhabit 2008. 9. 8. 18:13

그녀의 입술은 따스하고 당신의 것은 차거든

                                               

                                         - 최정례-


그러니, 제발 날 놓아줘,
당신을 더 이상 사랑하지 않거든, 그러니 제발,


저지방 우유, 고등어, 클리넥스, 고무장갑을 싣고
트렁크를 꽝 내리닫는데…
부드럽기 그지없는 목소리로 플리즈 릴리즈 미가 흘러나오네
건너편에 세워둔 차 안에서 개 한 마리 차창을 긁으며 울부짖네


이 나라는 다알리아가 쟁반만 해, 벚꽃도 주먹만 해
지지도 않고
한 달이고 두 달이고 피어만 있다고
은영이가 전화했을 때


느닷없이 옆 차가 다가와 내 차를 꽝 박네
운전수가 튀어나와
아줌마, 내가 이렇게 돌고 있는데
거기서 튀어나오면 어떻게 해
그래도 노래는 멈출 줄을 모르네


쇼핑 카트를 반환하러 간 사람, 동전을 뺀다고 가서는 오지를 않네
은영이는 전화를 끊지를 않네


내가 도는데 아저씨가 갑자기 핸들을 꺾었잖아요
듣지도 않고 남자는 재빨리 흰 스프레이를 꺼내
바닥에 죽죽죽 금을 긋네


십 분이 지나고 이십 분이 지나도 쇼핑센터를 빠져나가는 차들
스피커에선 또 그 노래
이런 삶은 낭비야, 이건 죄악이야,
날 놓아줘, 부탁해, 제발 다시 사랑할 수 있게 날 놓아줘


그 나물에 그 밥
쟁반만 한 다알리아에 주먹만 한 벚꽃
그 노래에 그 타령
지난번에도 산 것을 또 사서 실었네


옆 차가 내 차를 박았단 말이야 소리쳐도
은영이는 전화를 끊지를 않네
훌쩍이면서
여기는 블루베리가 공짜야 공원에 가면
바께쓰로 하나 가득 따 담을 수 있어
블루베리 힐에 놀러가서 블루베리 케익을 만들자구


플리즈 릴리즈 미, 널 더 이상 사랑하지 않거든
그녀의 입술은 따스하고 당신의 것은 차거든
그러니 제발, 날 놔줘. 다시 사랑할 수 있게 놓아 달란 말이야

 

 

           

 

                  레바논 감정

                                             

                              - 최정례 -

 

 

 

수박은 가게에 쌓여서도 익지요
익다 못해 늙지요
검은 줄무늬에 갇혀
수박은
속은 타서 붉고 씨는 검고
말은 안 하지요 결국 못하지요
그걸
레바논 감정이라 할까 봐요

나귀가 수박을 싣고 갔어요
방울을 절렁이며 타클라마칸 사막 오아시스
백양나무 가로수 사이로 거긴 아직도
나귀가 교통수단이지요
시장엔 은반지 금반지 세공사들이
무언가 되고 싶어 엎드려 있지요

될 수 없는 무엇이 되고 싶어
그들은 거기서 나는 여기서 죽지요
그들은 거기서 살았고 나는 여기서 살았지요
살았던가요, 나? 사막에서?
레바논에서?

폭탄 구멍 뚫린 집들을 배경으로
베일 쓴 여자들이 지나가지요
퀭한 눈을 번득이며 오락가락 갈매기처럼
그게 바로 나였는지도 모르지요

내가 쓴 편지가 갈가리 찢겨져
답장 대신 돌아왔을때
꿈이 현실 같아서
그때는 현실이 아니라고 우겼는데
그것도 레바논 감정이라 할까요?

세상의 모든 애인은 옛애인이 되지요*
옛애인은 다 금의환향하고 옛애인은 번쩍이는 차를 타고
옛애인은 레바논으로 가 왕이 되지요
레바논으로 가 외국어로 떠들고 또 결혼을 하지요

옛애인은 아빠가 되고 옛애인은 씨익 웃지요
검은 입술에 하얀 이빨
옛애인들은 왜 죽지 않는 걸까요
죽어도 왜 흐르지 않는 걸까요

사막 건너에서 바람처럼 불어오지요
잊을 만하면 바람은 구름을 불러 띄우지요
구름은 뜨고 구름은 흐르고 구름은 붉게 울지요
얼굴을 감싸쥐고 징징거리다
눈을 흘기고 결국

오늘은 종일 비가 왔어요
그걸 레바논 감정이라 할까 봐요
그걸 레바논 구름이라 할까 봐요
떴다 내리는
그걸 레바논이라 합시다 그럽시다


* 박정대의 시 「이 세상의 애인은 모두가 옛 애인이지요」 중에서

 

 


    길게 누운 화살표

                                

 

                     -최 정 례-

 

네 비행기 날아가고

 

지금쯤 구름 속에 있겠다
바다 위에 떴겠다
드디어 땅바닥에 닿았겠다

 

그러나 생각 않기로 한다
대신 네 호흡인 구름에게

 

푸른 사과와 붉은 사과가 있다고 전한다
좌판에 푸른 사과와 붉은 사과가
서로의 볼을 맞대고 있다고

 

내 앞에 트럭이 지나간다고
굵은 대파가 책처럼 높다랗게 쌓였고 밧줄에 묶였고
뿌리는 뿌리끼리 푸른 잎은 잎끼리
서로가 서로를 꽉 채우고 빈틈 하나 없이 저렇게
묶여 실려간다고

 

허공 속의 공책에
사과를 사과나무를
다 마셔버리고 싶다고 쓴다


사과나무 한 채를 다 마시고
지금쯤은 구름 속인지 바다 위인지 땅바닥인지

 

길바닥에 누운 화살표에게 묻는다

 

좌로 꺾인 화살표 따라간다고 쓴다
희망은 난폭해서
날마다 쫓기며 가보게 한다고

 

 

 

       웅덩이 호텔 캘리포니아

                                                                                  

                           -최정례-

 

 

호텔 켈리포니아
한동안 그 노래에 갇혀 흥얼거렸지
콜라타꽃 향기, 희미한 불빛, 내 머리를 만져주듯
한 여자 문 앞에 서 있었고
그 순간 멀리서 종소리도 울려왔고

어찌어찌 여기까지 왔는가
대전역쯤의 플랫폼인 줄 알았는가
호텔 캘리포니아인 줄 알았는가
장마 뒤 길바닥 고인 물에 올챙이

햇빛을 총알처럼 되쏘는 그 속을
미친 듯 휘젓고 다니다가
“배추요, 무우요, 양파요.”
행상의 바퀴가 고인 물 튀기며 지나갈 때
잠시 혼절한 그�

찬란한 웅덩이, 잠깐의 호텔 캘리포니아
구름 뒤에 천둥소리 아득하게 떨어지고
어떤 춤은 기억되고 어떤 춤을 잊혀지는
웅덩이 호텔 캘리포니아에서
누군가 떨구고 간 너
혼자서 듣고 있지
“어서 오세요. 당신은 이곳의 포로
언제든 떠날 수 있다지만 결코 떠나지 못할걸요.”

한낮의 허공으로 솟구치는
“배추요, 무우요, 양파요오”
그 소리 잊지 못할걸요
햇빛에 웅덩이 날아가 버리도록


 

        개구리 메뚜기 말똥구리야
                                                                              

                            -최정례-

 

 

너 개구리야
그 힘으로
콩 튀듯 팥 튀듯 메뚜기야
네 사랑의 힘으로 말똥구리야
우리 말똥을 굴리며
엎어지며 고꾸라지며 가자
저 들판을 지붕을 건너
개구리 메뚜기 말똥구리야
대문 걸어 잠그고 두문불출한다 해도
느닷없이 따귀 맞고 쌍욕은 듣게 된다
빚 갚고 갚으며
철조망에 싹이 나고 잎이 날 때까지
꽃 피고 꽃 지고
주렁주렁 수박덩이가 매달릴 때까지
복사씨도 살구씨도 미쳐 날뛸 때까지*
가자
말똥을 굴리며 굴리며

으으 개구리 메뚜기야 말똥구리야

세간에 세간에 출세간에
그 너머로 우리
말똥을 소똥을 굴리며 가자

 

 

         아라베스크
                                                                             

                           -최정례-

 

 

그는 내 이름을 끊으려 했다고
끊겠다고 했어요

그가 공사장에서
콘크리트 바닥을 해머로 내리치는 걸 봤어요
드릴로 구멍을 파고 불칼로 쇠를 잘랐어요
그는 느닷없이 소리를 지르고 쌍욕을 해댔어요

그러다가도
날아가는 작은 새를 보고
그것은 참새가 아니라 방울새라고 했어요

나는 그게 방울새인 줄 처음 알았어요

 


                                                                    쇳대

                                                                                                                                       

 

                                                                                   -최정례-

 

 

 

이미 져버린 모란꽃 대신 모란꽃이라고 우기면서 보고 싶은, 작년에도 피었던 그 자리에 작약꽃이 피었다. 이 만화방창의 화창한 골목을 지나

 

방에 들어오자마자 쓰러져 잤는데 갑자가 요란하게 울리는 전화, 느닷없이 누군가가 거기 남경반점 아닌가요? 남경반점 맞지요? 아니라고 아니라고 했는데도

 

떼로 몰려와 우겨대면서 북벌을 해야한다고 어쨌든 북벌을 하기 위해선 활쏘기 연습을 해야 한다고. 화약이 들어오고 조총이 발명되고 대포가 포탄을 퍼부어도 굳이 활쏘기 연습을 해야 한다고 우기던 그 고집불통의 왕때문에 참을 수 없어

 

망해버린 옛날 일이나 생각하고... 담뱃가게 할 때,한켠에 칸막이 해서 방을 어리고 온 식구가 거기 신문지 깔고 밥 먹을 때 엄마, 동생, 나, 아버지, 활쏘기만 하던 아버지, 차들이 지나면서 일으키는 먼지가 입 안에 버석거리고, 사방이 간판인 유리창이 흔들리고 누군가 와서 담배 주세요, 껌 주세요, 라면주세요, 그러면 숟가락 놓고 교대로 나가 돈통을 열고 거스름돈을 주고

 

그때 2층엔 남경반점이 있고 지하엔 마산집이 있고 계단 참을 내려가서 화장실 갈 땐 쇳대를 가지고 가서 토한 것들 보면서 진저리 치고 누군가 자꾸 와서 두드리고

 

이 끊어지지 않는 길고 질긴 끈... 늙고 점점 바보가 돼가는 엄마를 보러가야 하는데 엄마가 다리가 휘고 닳아서 잘 걷지도 못하면서 뭔가 자꾸 먹을 것을 해서 안기고, 냉동실을 가득 채우고, 떡을 하고 가스불에 엿을 곤다고 조청을 만들겠다고, 콩가루를 빻고

 

모란꽃이라고 우기면서 보려고 작약꽃을 심고 그 만화방창을 지나려는데 뒷방엔 엄마가 있고 북벌이 있고 활쏘기 연습만 하는 사람들, 미련한 남경반점이 있고, 숟가락이, 절걱거리는 화장실 쇳대가.


 

            

               늙은 여자

                                                                       

 

                             -최정례-

 

한때 아기였기 때문에 그녀는 늙었다
한때 종달새였고 풀잎이었기에
그녀는 이가 빠졌다
한때 연애를 하고
배꽃처럼 웃었기 때문에
더듬거리는
늙은 여자가 되었다
무너지는 지팡이가 되어
손을 덜덜 떨기 때문에
그녀는 한때 소녀였다
채송화처럼 종달새처럼
속삭였었다
쭈그렁 바가지
몇가닥 남은 허연 머리카락은
그래서 잊지 못한다
거기 놓였던 빨강 모자를
늑대를
뱃속에 쑤셔 넣은 돌멩이들을
그녀는 지독하게 목이 마르다
우물 바닥에 한없이 가라앉는다
일어설 수가 없다                                          
한때 배꽃이었고 종달새였다가 풀잎이었기에
그녀는 이제 늙은 여자다
징그러운
추악하기에 아름다운
늙은 주머니다


 

 

                       발자국

                                                                                      

                            -최정례-

 

 

 

무슨 새의 발자국이 눈 위에 총총총

몇 번 찍고 사라진 흔적 앞에

휘파람새

휘파람새를 본 적도 그 소리를 들은 적도 없는데

얼떨결에 그 이름 입에 담네

 

이해할 수 없는 단어들

백지 한가운데 흩뜨려놓다가 한줄기 휘파람따라

사라질 것 같네

 

이 계곡이 숨겨놓은 눈사태보다도

털짐승의 갑작스런 출몰보다도

발밑

얼어붙은 계곡 물의 깊이가 더 무섭네

 

휘황찬 상점의 유리에 비쳤던

순간의 그림자처럼

무슨 짐승이 날개를 친 흔적도 없이

앞뒤없이 백지 위에 발자국만 남겼나

 

 엄마, 위인전 읽다가 태어난 연도보다 죽은 연도를

몰라서 물음표가 되어 있으면 그 속으로 빨려드는 거

같애. 예를 들어 장영실(?~?), 이걸 보면 너무 무서워

서 확 넘겨버려. 아이가 말할 때

 

 어디선가 휘파람 한줄기 내려오면서 회오리 속으로

머리채를 잡아끄네

 

 

         비스듬히

                                        -최정례-


복숭아나무 똑바로 서 있는 거 못 봤다
꼭 비스듬히 서 있다
길가에서 길 안쪽으로 쓰러지는 척
구릉 아래쪽으로 기울어
몸 가누지 못하는 척

허공에 진분홍 풀어
지나가는 사람 걸어 넘어뜨리려고

안 속는다, 안 속아

몸은 이쪽에 머리는 저쪽에 풀어 두고
왜 서 있나
비틀비틀 무슨 생각하며 걸어 왔나

도화
길 밖으로 꽃잎 다 흘리고

안 속는다, 안 속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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