言/사모하는惠

사순절의 묵상

oldhabit 2009. 2. 26. 20:34

예수님과 함께하는 ‘마흔 날, 마흔 밤’

 

사순절에서 부활절까지 이어지는 절기는 교회력에 있어서 대강절에서 성탄절까지 이어지는 절기와 함께 신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절기 중의 하나이다. 사순절이라는 말은 ‘봄’을 뜻하는 "Lent"로 불려지기도 한다. 봄에 이 절기를 지키기 때문이다. 이 절기는 성도들이 신앙을 성장시키고 회개함으로 부활절을 위해 준비하는 시기이다. 이 절기는 특히 주님의 수난과 죽음에 초점이 맞추어지는 때이다. 사순절은 특별한 회개일인 속죄일인 재의 수요일(Ash Wednesday, 2월 25일)에서 시작되어 성금요일(Good Friday, 4월 10일)의 슬픔과 비극 가운데 끝난다. 사순(四旬)이라는 말은 40일을 뜻하는 한자말이다. 올 해 사순절은 2월 25일부터 4월 11일까지 주일을 제외한 40일 기간이다.

사순절은 자기 근신과 금식의 기간 즉, 영적 훈련의 기간이다. 사순절은 예수님과 함께 고난과 죽음으로 향해가는 순례로 이것에는 자기부인이 포함된다. 사순절에는 자신이 죽는 것을 배워야 한다.

이번 사순절에는 다음 사항을 실천해 보자

1) 매일 정해진 시간에 성경을 읽는다.

2) 매일 기도와 묵상의 시간을 갖는다

3) 가능한 범위 내에서 금식을 한다.

기호식품(커피, 초콜렛, 담배, 술), 군것질, 오락을 삼간다.

4) 예수님의 고난을 기억하고, 우리 주변에 아픔을 당하는 이웃과 친구를 찾아보고, 그들을 찾아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돕고, 복음을 전한다.

 첫째날

주님, 주께서 나를 샅샅이 살펴보셨으니, 나를 환히 알고 계십니다.(시139:1)

묵상할 성경 말씀: 시편 139편

첫 날부터 넷째 날까지 우리는 하나님은 누구이시며, 무엇을 행하시며, 사람은 무엇이며 어떻게 응답해야 하는지를 묵상합니다. 오늘은 시편 139편을 읽으며 하나님의 가까우심과 함께 계심과 사랑하심을 느껴 보십시오.

시편 139편은 4단락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1-6, 7-12, 13-18, 19-24

첫째 단락에서 하나님의 현존(現存)과 전지(全知, 모든 것을 아심)는 인간의 행동반경과 그 육체에 이르기까지 온통 인간을 감싸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분은 내가 내 자신에 가까운 것보다 더 가까이 계시며, 일상생활의 모든 활동의 핵심부에서 나에게 존재와 의욕, 그리고 행동을 허락하고 계신 분입니다.

둘째 단락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어느 곳에나 계시는 분임을 알 수 있습니다. 전 우주 공간에 하나님의 손길이 닿지 않는 곳이 없으며, 그래서 우리는 그분으로부터 피하여 달아날 곳도 없습니다.

셋째 단락에서 우리는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만일 주님이 무엇을 미워하셨더면, 당신은 어느 것도 창조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지혜서11:21-12:2) 어머니가 사랑으로 자녀를 출생시키듯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으로 창조하셨습니다. 우리는 사랑으로 살아가야 할 사랑의 존재로 태어난 것입니다.

넷째 단락은 시인의 기도입니다. 나와 함께 계시고, 어느 곳에나 계시고, 나를 지으신 하나님께, 내가 제대로 길을 가고 있는지를 살피시어 영원한 길로 인도해 달라고 간청하는 기도이다.

 

하나님 나를 샅샅이 살펴보시고, 내 마음을 알아주십시오.

나를 철저히 시험해 보시고, 내가 걱정하는 바를 알아주십시오.

내가 고통받을 길을 가고 있지나 않은지 나를 살펴보시고,

영원한 길로 나를 인도하여 주십시오.

둘째날

주, 우리의 하나님, 주의 이름이 온 땅에서 어찌 그리 위엄이 넘치는지요.(시8:1)

묵상할 성경 말씀: 시편 8편

하나님은 어디에나 현존하십니다. 하늘과 달, 태양과 별들에도, 깊은 바다 속과 동물들의 무리와 겨울에 소복소복 내리는 눈 속에도 그분은 계십니다. 대자연의 이 모든 요소들은 하나님의 찬란한 영광, 그분의 뒤따를 수 없는 부드러움을 우리에게 상기시킵니다. 모든 것 안에서 모든 것인 그분, 따라서 그분은 존재하는 모든 것 안에 당신의 현존의 흔적을 남기시는 분입니다. 돌풍의 힘센 바람을 만날 때도 나는 능하신 하나님을 체험합니다. 가을 날 아침마다 내리는 서리도 나에게는 하나님의 자상한 사랑과 보살피심을 느끼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 이유로 시편 8편의 시인은 자기 시의 처음과 끝에서 하나님의 찬란한 영광에 대한 놀라움과 동시에 기쁨의 환성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에게는 창조된 이 세계가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자리인 것입니다.

“주 우리의 하나님,

주의 이름이 온 땅에서 어찌 그리 위엄이 넘치는 지요.”

그런데 시인은 5절에서 우주와 그 삼라만상 가운데 사람이 절정이요 으뜸가는 존재란 것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시인은 4절에서 사람이 얼마나 부족한 존재인지를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부족한 사람들에게 당신이 창조한 온 피조세계를 맡기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젖먹이와 어린이들의 찬송을 통하여 원수들을 부끄럽게 하시는 분이십니다.(2절)

주께서 손수 만드신 저 하늘과

주께서 친히 달아 놓으신 저 달과 별들을 봅니다.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이렇게까지 생각해 주시며

사람의 아들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이렇게까지 돌보아 주십니까?

 셋째날

복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들어서지 아니하며(시1:1)

묵상할 성경 말씀: 시편 1편

시편 1편은 인간의 자유가 선택할 수 있는 두 갈래의 길, 곧 삶과 죽음, 지혜로움과 어리석음, 성공과 실패를 첨예하게 대립시키고 있습니다. 지혜로운 인간은 말할 것도 없이 삶을 선택하여, 어리석음과 사람을 죽음과 실패로 인도하는 우상숭배의 길을 배척합니다.

복된 사람은 죄인들이 살아가는 방식을 따라서 살아가지 않고 오직 성경이 말하는 대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복된 사람은 언제나 물이 풍부하게 흐르는 시냇가에 굳건히 뿌리내린 거목과 비교되고 있습니다. 아무리 가물어도 나무의 잎사귀가 시들지 않아서 결국 풍성한 열매를 맺습니다. 흔히 나무는 수직선의 형상을 표상하고 있습니다. 아래에는 뿌리가, 위에는 열매가 달린 과실수가 그 의인의 모습입니다. 복된 사람이 이렇게 될 수 있었던 것은 성경을 밤낮으로 묵상하여 그 결과로 지혜를 얻었기 때문입니다. 그 거목의 뿌리가 하나님의 말씀이었기에 그런 거목과 같은 사람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악인의 모습은 복된 사람의 모습과 정반대의 모습입니다. 악인들의 모습은 바람에 이리저리 흩날리는 곡식알의 ‘겨’에 비유되고 있습니다. 곡식의 알맹이가 아닌 겨는 시냇물 곁에 심어진 나무와는 정반대로 바람에 흩날리는 성분을 지녔고, 움직임도 수직적이 아니라 수평적인 방향입니다. 겨는 곡식알이 아니므로 뿌리를 내릴 수도 없습니다. 겨의 성분은 열매를 맺지 못하는 죽음을 표상합니다. 결국 악한 자들이 성공할 가능성이란 전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을 참된 사람되게 하는 도구입니다. 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알아가는 사람이 복된 사람입니다.

 

복있는 사람은 주의 율법을 즐거워하며

밤낮으로 율법을 묵상하는 사람이다.

넷째날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셔서,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엡1:4)

묵상할 성경 말씀: 에베소서1:3-14

세계와 그 가운데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 그리고 지금도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 피조물을 통해, 성경을 통해 말씀하시는 하나님, 그분은 왜 이런 일을 하고 계십니까? 그것은 모든 사람들이 예외없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시려는 은총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우리를 통해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의 이 사랑의 계획은 인류 역사의 세세대대로 이어지며 이룩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 계획을 통해 보이는 존재들과 보이지 않는 존재들을 모두 사랑 안에 일치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계획은 하나님의 말씀과 우리 마음 안에 있는 성령을 통하여 우리 각자 안에 실현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에베소서 1장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의 영적인 눈을 열어주시고, 우리의 운명이 예외적으로 위대하고 영원하며, 또 우리의 희망은 그 끝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시고 있습니다. 이 하나님에게 우리가 어떻게 응답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모든 지혜와 총명을 넘치게 주셔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미리 세우신 기뻐하시는 뜻을 따라,

하나님의 신비한 뜻을 우리에게 알려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경륜은 때가 차면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을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시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자기 뜻대로 행하시는 하나님께서,

자기의 계획을 따라 예정하셔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상속자로 삼으셨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 맨 먼저 소망을 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그리스도 안에서 진리의 말씀,

곧 여러분을 구원하는 복음을 듣고 그리스도를 믿었음으로

약속하신 성령의 인치심을 받았습니다.

다섯째날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눅5:8)

묵상할 성경 말씀: 누가복음5:1-11

넷째 날까지 우리는 하나님의 현존과 그분의 계획하심에 관한 말씀을 묵상하였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에 관한 묵상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 자신에 관하여 묵상하도록 만듭니다. 우리들을 알아가는 것은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과 분리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현존은 우리를 회개로 인도합니다. 오늘부터 며칠 간은 하나님의 현존 앞에 우리의 모습을 비추어 보며 죄악으로 얼룩진 우리의 모습을 묵상하게 됩니다.

죄악이란 원래 자기 의지로만 자기 존재를 실현하고자 하는 고집, 하나님과 이웃들 앞에서 사랑의 관계 안에 자신을 두기를 거부하는 것, 모든 의존의 거절, ‘나’라는 존재의 고독속에 안주하려는 아집입니다. 이냐시오라는 분은 죄란 “우리 주 창조주 하나님께 존경과 순종하기위해 우리의 자유의지를 사용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죄란 개인적인 것만은 아닙니다. 그것은 나를 비롯한 모든 사람들이 공유하고 있는 근본적인 분열의 상태입니다. 나는 두 갈래로 분열되어 있는데, 하나는 나를 ‘높은 곳’으로 부르고 있는 사랑과 빛의 경향이요, 다른 하나는 나를 낮은 곳으로 유인하고 있는 ‘내 나쁜 마음’의 경향입니다. 내 마음의 선택을 따라 나는 내가 원하는 대로의 사람이 되어버립니다. 그러므로 내가 죄를 조금지었다, 많이 지었다, 다른 사람들보다는 낫다는 차원의 죄를 말하는 것입니다.

죄란 망각이나 나약함이 아니라 오히려 살고 사랑하는 것을 거부하는 것, 세상을 거꾸로 뒤집어 엎어 버리는 일종의 존재론적인 난폭한 무질서입니다. 인류의 역사는 애매모호한 욕망, 우리를 옭아매는 두려움, 우리 자신만을 찾는 이기주의, 방향감각을 잃어버린 우리의 본능들, 무질서한 우리의 생각들로 얼룩져 있습니다. ‘나’만이라는 이기주의의 중력에 눌려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만나는 순간 나는 내 존재의 뿌리 속에 있는 심각한 죄악의 상태를 발견합니다. 오늘 본문속의 베드로처럼 말입니다.

여섯째날

하나님께 속한 자는 그의 말씀을 듣나니, 너희가 듣지 아니함은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였음이라.(요8:47)

묵상할 성경 말씀: 요한복음8:21-47

우리는 지금 둘째 단계의 둘째 날을 맞고 있습니다. 이 둘째 단계에서 우리는 우리가 사랑의 결핍 속에 있다는 것을 깨달음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제안된 구원을 받아들이도록 우리 자신을 촉구하는 데 있습니다. 이 악의 심장부로 내려가는 중에 나는 다른 이들을 판단하지 않아야 합니다. 내가 알고자 노력하는 것은 나의 구체적인 악이며, 내가 전혀 의식하지 못하고 있는 ‘내 자신에 대한 부끄러움과 당황함’입니다. 그리스도 그 분이 내 안에서 그 의식을 일깨우고 있으며, 그리스도 자신도 그 안에 갇히게 함으로써 나를 그 부끄러움과 당황함에서 구출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8장은 우리를 죄의 본질 가까이로 데려갑니다. 아들에 의해 해방된 하나님의 자녀들과 자기네 아비의 욕망을 성취시키는 악마의 자식들을 대립시키어 투명함, 진리, 관계, 생명, 아버지의 뜻을 항상 따름, 사랑안에서의 자유로움 앞에, 자아 폐쇄, 타자의 인정 거부, 관계의 부재, 거짓말, 고독과 분열을 세워 놓고 있습니다. 한 존재가 진실되고 자유롭기 위해서는 자신을 존재케 하는 ‘관계’를 마음 속으로 인정해야 합니다. 아버지 앞에 계신 아들처럼 우리도 존재를 선물로 준 모든 이, 혹은 그 존재에 참여케 하는 모든 이들과 함께 관계를 맺고 있을 때, 우리의 삶을 완성시킬 수 있습니다.

이제 죄는 그 깊은 본질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것은 존재하게 하고 사랑안에 그 존재를 머물게 하는 ‘관계의 거부’입니다. 마음의 경향이 죄를 결정합니다. “너는 네 자신이 닮고자 결정한 자의 아들이 되는 것이다.” “네가 만일 아들의 말씀을 받아들이면 너는 그 때 진리를 알게 되고 또 진리는 너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네가 만일 너의 특권들, 가령 그것이 하나님의 자녀요,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특권일지라도 그것들 안에 네 자신을 폐쇄시킨다면, 그와 같은 너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너의 욕망은 자기 자신 안에 그리고 죽음 안에 스스로를 폐쇄시키는 악마의 아들이 되는 것이다.”

 일곱째날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3;23)

묵상할 성경 말씀: 로마서7:7-25

로마서 1장부터 11장까지의 내용은 이방인의 죄와 유대인들의 죄를 잘 묘사해 주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사랑을 향하는 그 마음을, 자기자신에게로 바꾸어 버리는 이 죄는 온 인류에게로 퍼져있습니다. 창조 속에서 창조주를 알아보지 못하는 이방인은 자기의 이익만을 위해 모든 것을 바꾸어 버리고, 또 유대인은 하나님의 약속과 율법을 선물로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선물을 자기의 영광으로 돌리며, 자기를 다른 이들보다 우월한 존재로 믿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온 세상이 하나님앞에서 죄있다고 인정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악과 죽음 속에 갇혀 있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자기 혼자의 힘으로 그 생지옥에서 탈출하려고 하면 오히려 내적인 분열을 더욱 체험할 것입니다. 사람은 자기가 원하는 선을 행할 수 없고 자기가 원하지 않는 악을 일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유대인 혹은 이방인 모두에게 구원과 생명이 주워지고 의로워지는 것은 우리의 의로움이 되어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것에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그분 안에서만 하나님은 모든 분리의 벽을 무너뜨리고 미움을 죽임으로써(에베소서2장) 모든 사람들에게 자비를 베풀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에 의해 길게 묘사된 로마서1-11장의 이 죄의 역사는 인류의 역사이자 또 우리의 개인적인 역사이기도 합니다. 내 안에 어떤 때에는 이방인 존재하고 어떤 때는 유대인이 존재하고 있어, 내 속의 유대인은 하나님의 선물에 집착하여 그것으로 충분한 양 거만을 떨고 있는가 하면, 내 속의 이방인은 자아를 왕으로 삼고 결국 죽음의 노에가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우리 속에 있는 이러한 죄의 모습들을 심각하게 바라보며 묵상해 봅시다. ‘행복하여라 지금 우리는 사람들이여, 그들은 위로를 받으리니’. 죽음을 낳는 세상의 슬픔과는 달리 그 눈물은 ‘하나님에 의한 슬픔이며’ 하나님은 그 슬픔을 통하여 우리에게 회개를 일으키시기 때문입니다.(고후7:10)

여덟째날

하늘에서는 회개할 필요없는 아흔 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을 두고 기뻐할 것이다(눅15:7)

묵상할 성경 말씀: 누가복음15장

기뻐하며 살찐 송아지를 잡아 풍성한 음식을 장만하여 먹고 마시고 담소하는 즐거운 잔칫집의 분위기는 누가15장 전체를 감싸고 있는 기본요소입니다. 누가복음 15장의 중심주제가 되는 잔치는 예수님으로 하여금 세 개의 비유를 이야기하게 하는 동기가 되고 있습니다. 잔치를 벌이게 되는 동기는 잃었던 양 한 마리, 잃었던 은전 한 닢, 잃어버린 작은 아들을 되찾았다는 것입니다. 상실과 회복, 그리고 축제와 환희라는 주제 덕분에 누가복음 15장은 스스로 죄인이라고 고백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언제나 희망을 주고 있습니다.

어제 읽었던 로마서의 말씀에 비추어 오늘의 본문을 이해해 볼 수 있습니다. 작은 아들의 죄는 자유를 행사하여 유산의 몫을 한꺼번에 차지하는 이방인의 죄입니다. 그는 나의 몫으로 돌아오는 것은 깡그리 나의 차지라고 주장합니다. 그는 언제나 자신만을 위해 행동하기 때문에 결국 유산의 탕진으로 치닫고 맙니다. 그가 이 탕진에서 빠져 나오기 위해서는, 그에게 모든 것을 주는 분인 아버지를 인정해야 했습니다. “그제서야 그는 제정신이 들어 말했습니다. 내 아버지의 그 많은 품꾼들은 빵이 남아도는데 나는 여기서 굶어 죽게 되었구나. 일어나 아버지에게로 돌아가서 말씀드려야지....” 작은 아들의 자유는 다시 사랑으로 자신을 개방하고 있습니다.

반대로 로마서에서 보는 것처럼 나무랄 데 없는 유대인 큰 아들은 이 사랑에 마음의 문을 꼭꼭 닫아버립니다. 그는 자신의 옳음을 핑계로 권리를 요구하고 또 동시에 제 동생을 저버리고 있습니다. 그는 ‘나에게 속한 모든 것이 네 것이다’라는 아버지의 말씀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죄에서 빠져 나오는 것은 잘못의 횟수가 얼마나 빈번하였던가를 불문하고, 끊임없이 사랑으로 자기 삶의 방향을 돌려 거기서 모든 선의 원천을 찾는 것을 의미합니다.

탕자건, 나무랄데 없는 큰 아들이건, ‘모든 피조물 중의 첫 아들’인 예수님의 의로움을 인정할 때 비로소 의롭게 될 수 있습니다.

아홉째날

하나님의 아들 구세주 예수여, 죄인인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묵상할 기도문: 위의 기도문

동방정교회에는 다음과 같은 기도문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구세주 예수여, 죄인인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이 기도문은 모든 것을 내포하고 있어, 우리가 살아가는 일생 동안 무한히 반복하더라도 그 진리를 알 수 없을 것입니다. 오늘 온 종일토록 이 기도문을 반복하며 묵상해 봅시다.

때때로 우리의 죄에 대한 느낌들은 가짜일 수 있습니다. 많은 이들이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매우 불쌍한 죄인이며, 나는 내가 지은 죄에 대한 죄책감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사실은 그와 정반대일 수 있습니다. 기도 중에 원통함, 실망, 죄책감, 타자와의 비교, 불건전한 슬픔 등이 생기면 그것들은 분명히 성령으로부터 오지 않는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의 흔적을 지닌 느낌들은 용기와 부드러움, 하나님으로부터 사랑받고 있다는 느낌, 사랑을 향해 좀더 자신을 개방하고 싶은 욕망 등입니다.

마찬가지로 이 느낌을 낳고 또 동반하게 하는 지식은 자신 혹은 이웃들에 대한 분석의 결과로 얻어지지 않습니다. 이 지식은 모든 비교를 제거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존재의 심층부로 내려가게 하는데, 거기서 우리는 스스로 선행을 할 수 없다는 것과, 동시에 모든 완전한 것으로 불리움 받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깊은 구렁 속에서 나는 주님께 부르짖고 있나이다.”(시편130). 내가 부르짖었더니, “주님은 나를 사랑하시어 나를 구원해 주셨습니다.(시편18:20)

자신의 죄에 대한 묵상을 묵상하며 다음과 같은 단계를 밟아보십시오 우선 “십자가에 못 박히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눈앞에 모시고 그분께 물어보십시오. 어떻게 주님은 창조주이시면서 사람이 되셨으며, 어떻게 영원한 삶에서 현세적인 죽음에 이르러 내 죄들을 위해 그렇게 죽으셨는지.” 다음에 내 자신에게 눈을 돌려서 “나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무엇을 하였는가, 무엇을 하고 있는가, 또 그리스도를 위하여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생각해 보십시오.

 열째날

아, 하나님 내 속에 깨끗한 마음을 새로 지어주시고 내안에 정직한 영을 새 영을 넣어 주십시오(시51:10)

묵상할 성경 말씀: 시편51편

이제 우리는 셋째 단계로 접어들었습니다 자신의 죄에 대한 묵상을 이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함으로 더욱 깊이 해 보는 것입니다. 내가 살고 있는 죄악 속에 예수님은 함께 계십니다. 우리가 인류의 가장 깊은 죄악속으로 내려갈지라도 예수님은 거기에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가장 깊은 악의 구렁, 지옥 속에서 구원의 차원을 발견합니다. 이것은 지옥보다 더 강한 사랑의 차원입니다. 나의 가장 깊은 곳에서 자비의 원천을 만납니다. 아토스라는 분은 말했습니다. “지옥 속에 의식적으로 머물라. 그러나 결코 절망해서는 안된다. 예수님은 거기서 나를 위하여, 모든 이를 위해 세상의 죄를 짊어지시는 어린 양, 구세주로 계신다. 그분은 또 나를 형제애로 인도하신다.”

바로 이 만남을 통하여 친교가 가능해집니다. 나는 그분께 내 존재를 드리고 또 그분은 당신의 존재를 나에게 주십니다. 나는 그분앞에 나의 모든 죄와 인류의 죄를 고백할 수 있습니다. 죄가 많은 곳에서는 예수님의 은총이 더 풍성하게 내리는 법입니다.(롬5)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하는 가운데 가장 깊은 곳, “내 나쁜 마음의 심연으로 내려가 보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 구렁텅이로 내려감은 우리에게 실망을 안겨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를 정화시켜 줍니다. 그 내려감은 사랑에 의해 이끌려 다시 올라오게 됩니다. 자기 안에서 악에 대한 저항감을 느끼고 고통스럽지만 자신을 변화시켜가게 됩니다. 나는 악을 폭발케 하면서 악에서 빠져 나옵니다. 나는 인류와 세상의 심장부인 그리스도 안에서 나를 다시 발견합니다. “나를 주님의 면전에서 내치지 마옵소서. 주님만이 나의 생명이십니다. 구원은 당신 안에서만 찾을 수 있습니다.”

오늘 하루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나의 가장 깊은 곳, 악한 생각이 가득한 곳, 더러운 생각이 가득한 곳으로 깊이 내려가봅시다. 거기서 예수님을 발견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도우시는 은총을 발견합시다.

열한째날

이 여자는 그 많은 죄를 사함받았다. 그것은 그가 많이 사랑하였기 때문이다.(눅7:47)

묵상할 성경말씀: 누가복음7:36-50

자기 자신의 가장 깊은 곳으로 내려간다는 것은, 많은 사람들에게 자기 자신을 칼로 난도질하듯이 분석하는 것을 의미할 위험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고독하게 남아있을 뿐입니다. 시몬이 식사에 불청객으로 온 그 여인은 하늘의 하나님께서 비밀스럽게 보시는 그 깊은 곳으로 내려갔습니다. 거기서 예수님은 여인을 인정했고, 또 예수님에 의해 인정받았습니다.

여인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또 자기 자신을 아무것으로도 고발하지 않습니다. 그녀의 행위가 모든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더욱이 도성의 모든 사람들이 그녀를 알고 있고, 또 바리새파 사람 시몬은 그 누구보다도 그 여인의 죄상을 낱낱이 열거할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시몬은 율법과 죄의 수량 그리고 개인적인 정당화라고 하는 것들 안에 갇혀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사랑의 영역밖에 홀로 남아있었습니다. 그에게는 다른 존재가 필요없는 것입니다. 그는 자기 자신으로 충분한 것입니다. 천상천하(天上天下) 유아독존(唯我獨尊)

하지만 자기 자신의 가장 깊은 곳으로 내려갑니다. 거기서 그녀는 스스로가 죄인이고 또 사랑받고 있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이제 더 이상 그녀에게 분석이나 수량, 죄의 많고 적음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예수님 앞에서 흘리는 그녀의 눈물로 충분합니다. 예수님은 그 사랑의 눈물을 받아주셨습니다. 그녀는 자기의 죄들, 수많은 죄를 예수님에게 넘겨버립니다. 사랑이란 친교요 다른 존재를 인정하는 욕구이기 때문에 분리의 모든 벽을 허물어 버립니다.

오늘 하루, 말이 아닌 눈물로 기도하며 나의 깊은 곳까지 내려가 봅시다. 거기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예수님을 만나봅시다. 거기서 예수님이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어봅시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거라.”

 

열두째날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눅19:10)

묵상할 성경말씀: 누가복음19:1-10

오늘 말씀의 묵상을 통해서 우리는 예수님을 만나 구원의 기쁨과 ‘가난의 정신’을 갖게 되는 은총을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의 이야기는 예수님을 모르던 삭개오가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고자 힘쓰고, 그래서 예수님이 누구인지 알고 결국 구원에 이르렀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을 만난 삭개오는 얼른 나무에서 얼른 내려와 기뻐하며 예수를 모셔들였습니다. 예수님을 만남으로 인하여 삭개오는 많은 변화를 경험합니다. 그것이 그를 기쁘게 하기에 충분한 것입니다. 그는 로마의 앞잡이에서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돈을 모으는 자에서 자기 돈을 나누어주는 사람으로, 나무 위에 있다가 아래로 내려오는 사람으로 변화되었으며, 예수님을 사람으로 알다가 구세주로 알게 되었습니다.

오늘의 이야기 속에서 많은 군중들과 삭개오를 비교해 볼 수 있습니다. 군중들은 삭개오를 비난하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아마도 삭개오에 의해 많은 피해를 보고 가난해진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군중들도 역시 예수님을 간절히 보기를 원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삭개오의 집으로 가는 예수님을 보고 불평하였습니다. 그들은 오만과 고집에 휩싸여 예수님을 제대로 알 수 없었던 것입니다. 삭개오는 자신의 재산의 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고 4배의 손해배상을 해주는 것으로보아, 군중들은 부자가 되고 삭개오는 가난한 자가 됩니다. 군중들은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지 못했지만, 삭개오는 예수님이 구주라고 깨닫게 됩니다.(9절)

경제적인 차원에서 볼 때 처음에 부자인 삭개오는 가난한 자로 변하고 반대로 군중은 처음에는 가난하였지만 부자가 됩니다. 군중은 예수가 지나가는 것을 보았을 뿐이지만, 삭개오는 그의 집에 예수님을 모시고 함께 먹고 자게 됩니다. 삭개오는 신바람나고 기쁨에 가득찬 인물이었지만 군중은 불평과 슬픔에 젖어 있는 무리들입니다.

오늘 하루, 삭개오가 만난 예수님을 만나고 묵상하며 우리들의 삶속에서도 삭개오가 누렸던 기쁨과 가난의 정신을 이루어봅시다.

 열셋째날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 오너라(막8:34)

묵상할 성경말씀: 마가복음9:34-38

이제 우리는 네 번째 단계로 접어듭니다. 오늘부터는 「회개에서 사명으로」으로 나아가는 단계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우리를 당신의 사명으로 인도하시기 위함입니다. 「주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말과 「너는 와서 나를 따르라」는 말은 불가분의 관계입니다. 우리는 우선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그리스도의 사역에 참여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부터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름심을 묵상하고 그 분 삶의 신비들을 묵상함으로써, 우리는 하나님의 이 계획에 가장 잘 부응할 수 있는 방식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부르심은 예외없이 모든 사람의 문제입니다. 모든 사람은 자기 삶의 일치를 이루기 위하여 발견해야 할 소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특히 그리스도에게로 가야하는 모든 그리스도인은 자기 자신이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해가야 한다는 것과 그리스도께서 오실때까지 그분의 나라를 위해서 일해야 한다는 것을 자신이 이루어야 할 소명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소명이란 어떤 업적보다 인격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자기 삶의 의미를 발견하는 것은 자기 삶의 중심인 사랑을 발견하는 때입니다. 그리스도와의 삶에서도 똑같습니다. 인격적인 예수와 함께하지 않는 한, 그분을 위해 시작한 사업이 아무리 대단한 것이라고 해도 실패의 쓴 잔을 마실 수 있고, 또 인간적 성공으로 그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이것 혹은 저것을 하고 싶다”고 말하기에 앞서 “그분 곧 그리스도는 나에게 누구이신가?”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보는 것이 더 적절할 것입니다.

소명이란 언제나 전진하는 법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 소명에 충실하겠다는 이유로 그 발견의 때로 되돌아가기를 원하지만, 소명이라는 잃어버리지 않아야 할 보물이 아니라 오히려 발전시켜야 할 하나의 삶입니다. “주님의 부르심에 대하여 귀머거리가 되지 말고 오히려 그분의 지극히 거룩한 뜻을 이루는데 부지런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

열넷째날

마음을 다하고 지혜를 다하고 힘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자기 몸같이 사랑(막12:33)

묵상할 성경말씀: 마가복음12:28-34

부르심을 받는 사람은 두갈래 방향으로 동시에 부르심을 받습니다. 하나는 수평적인 방향으로, 다른 하나는 수직적인 방향입니다.

수평적인 부르심이라는 사람으로의 부르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참 인간으로의 부르심,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간으로의 부르심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증진시켜야 할 이 인간적인 것이라는 무엇입니까? 사람을 향상시킨다는 욕망속에서 사람들은 흔히 우리에게 거짓 신들, 우상들을 만들어 냅니다. 우리는 인간을 자기 욕망들과 거짓스러운 발전, 그리고 노예화하는 기술에 떠넘김으로써 비인간화합니다. 이때 인간은 자신이 어떻게 생겨났는지를 더 이상 모르게 됩니다.

인간은 자기의 연구, 실현, 그리고 정복을 통해 자유와 상호인정 속에서 사랑의 힘에 자신을 개방할 때 오직 인간답게 됩니다. 사랑은 우리를 역사를 움직이는 힘이요, 또 우리가 우리 자신이 되는 것도 오직 그 사랑의 역동성을 통해서입니다. 인간이 자기 본연의 인간이 되는 것은 헌신, 봉사, 철저한 자기 희생 등으로 표현되는 모든 사랑의 응답의 깊이를 발견함으로써만 가능한 것입니다.

두 번째 부르심은 그리스도 안에서 실현된 것을 우리 각자 안에서도 실현할 것을 촉구하는 부르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에베소서 4장에서 사도 바울이 말한 것처럼, 모든 것을 높은 곳으로 인도하기 위해 가장 깊은 곳으로 내려가셨습니다. 그분은 죽음까지를 포함해서 모든 것을 사랑안에서 사신 후에 십자가를 통해 이 업적을 이룩하셨습니다. 이것이 가장 큰 봉사입니다. “그 봉사는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자기 생명을 선물로 내 주는 것입니다.” 고통과 영광 안에서 당신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실현한 것을, 그분은 당신을 믿는 사람들 안에서 계속 실현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 목적을 위해 제자들을 모으셨고, 교회를 이루셨습니다.

오늘 하루 이 두 부르심의 깊은 의미를 묵상하며 살아갑시다. 사랑이란 두 글자가 이 묵상을 도와줄 것입니다.

열다섯째날

모세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모욕을 이집트의 재물보다 더 값진 것으로 여겼습니다(히11:26)

묵상할 성경말씀: 히브리서11장

하나님의 이러한 부르심에 우리는 어떻게 응답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의 응답은 예수 그리스도의 방식을 따라야 합니다. 주님의 방식은 끝까지 사랑하고, 우리에게 자신을 넘겨준 ‘종’(엡5:2)의 방식입니다. 이 방식은 그분과 함께 우리 안에 있는 자아 추구, 자기 사랑의 모든 것을 공격하도록 촉구합니다. 나를 위하여는 아무것도 남겨 놓지 않으면서, 내 존재를 오로지 그리스도께 드리며 살기로 다짐하게 하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부르심에 우리는 우리 자신을 드림으로, 헌신함으로 응답하는 것입니다. 이 헌신은 나의 깊은 곳, 아버지께서 비밀스럽게 나를 보시는 그곳, 내가 그분과 함께 홀로 있는 곳에서 출발하고 있습니다. 나는 많은 것들을 하기 위해서, 혹은 내 주위의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어떤 모순에 찬 비난이나 멸시를 받더라도 그분과 함께 있기 위하여 그분만이 원하는 것을 수락합니다. 나는 무슨 일이 닥치든 언제나 만족합니다. “하나님, 주님만을 원하옵니다. 좋은 일이건 나쁜 일이건 간에 나는 당신을 받아들이옵니다.”

그렇게 해 나갈 때 나는 그분과 함께 있는 그 깊은 곳에서 갑자기 온 우주가 나의 동반자임을 발견합니다. 나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듣고, 또 그분의 도우심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믿은 이 ‘구름처럼 허다한 증인들’과 함께, 아브라함처럼 어디로 가고 있는지 모르면서 길을 떠난 그 모든 사람들과 함께 이 헌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분을 위해 모든 것을 잃어버리면서, 그분 안에서 모든 것을 얻습니다. “누구든지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으면, 그 목숨을 얻는다.”(마16:25)

오늘 하루 “하나님께 나를 드린다는 것이 무엇이며, 하나님께 드릴만한 나의 모습을 이루기 위하여 내가 어떻게 해야 할까?”를 깊이 묵상하며 지내봅시다.

 열여섯째날

나의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마20:22)

묵상할 성경말씀: 마태복음20:20-28

오늘 우리는 우리의 헌신을 어떻게 지속할 수 있는가를 묵상합니다. 어떻게 내 헌신을 보장할 수 있을까 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가끔씩 세배대의 아들들의 어머니처럼 말합니다. “주님의 오른편과 왼편에 앉게 해 주십시오.” 이 어머니는 자신과 아들들이 예수님께 행한 것들, 업적들을 의식하며 말하고 있습니다. 그에 상응하는 상을 달라는 요구입니다. 예수님은 이 어머니의 부탁을 한 마디로 거절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그 부탁을 계기로 그들에게 새로운 깨달음을 주십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마시는 잔을 각자가 마실 것을 요구하고 그리고, 각자 자신을 드릴 것을 요구하고 계십니다. 이는 사람들에게 구원을 주기 위해 종으로서 헌신한 예수님에게 요구되었던 잔이었습니다. 그 잔이 우리들 각자에게도 요구되는 것입니다. “너희들 가운데는 권위를 힘으로 행사하는 사람들이 있어서는 안된다. 나는 너희들 가운데 섬기는 자로 있다. 너희들 가운데서 누가 첫째요 누가 꼴찌인가를 말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

“우리는 그 잔을 마실 수 있습니다.”라고 사도들은 응답합니다. 과연 그들은 자기네가 말하고 있는 것을 이해하고 있을까요? 물론 그렇지 않습니다. 다만 그들은 그분의 잔이 무엇인지를 알고, 자기네가 그분과 함께 그 잔을 마실 것이라는 것을 아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그분은 이러저러한 형식의 봉사가 아니라, 그들 자신을 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은 이런 식으로 우리가 응답할 것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자신을 봉헌하는 데 두려움을 갖는다면, 그것은 우리가 주님보다는 자신을 더 많이 생각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를 개방시켜주는 사랑을 구해야 합니다. “나는 주님의 은총으로 나 자신을 드립니다.” 주님의 은총은 우리를 끊임없이 헌신하도록 돕는 힘입니다. 그리고 그분이 우리에게 기대하는 것은 우리들의 업적이 아니라, 오늘의 있는 모습 그대로의 마음을 드리는 것입니다.

  열일곱째날

나의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마20:22)

묵상할 성경말씀: 요한일서2:15-17

이제 우리는 다섯 번째 단계로 접어듭니다. 이제부터는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온전히 드린 후에 우리들의 삶에 주어지는 다양한 상황들을 어떻게 식별하고 판단할 것인지를 묵상합니다. 가장 기본적으로는 우리들을 부르신 하나님의 방식에 우리 자신을 조화시키려고 노력하면서, 그 방식을 우리 자신의 삶의 선택들에 적용시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신 방식이 있습니다. 그것은 “너는 가난한 자가 되어라, 다시 어린이가 되어라, 네 자신을 너의 것으로 여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 길 위에서 예수님을 따르지 않으면 선택에 있어 실패할 것입니다. 오늘은 유혹에 관한 말씀을 묵상해 봅시다.

우리들은 삶의 과정에서 여러 가지 유혹을 만나게 됩니다. 유혹은 소유하고, 또 그 소유물에 집착하는 것, 사람들로부터 받은 영광, 일시적인 성공, 모든 형태의 권력에 집착하는 자아 의지에서 생겨납니다. 유혹을 받을 때 자아는 ‘자기의 소유’로서 집착하게 되는 어떤 것과 연결되는데, 그것은 육체의 건강과 아름다움, 돈, 성공, 이루어 놓은 업적, 완벽성 등입니다. 자기를 모든 것의 중심으로 삼는 그는, 자기가 원하는 사물과 스스로를 동일시함으로써 그 사물 자체를 절대화시키게 됩니다. 그리고 그 절대화된 사물을 위하여 모든 것을 배척해 버립니다. 신앙까지도 말입니다.

이 유혹은 우리 모두를 걸고 넘어지려고 합니다. 우리는 모든 것, 우리의 덕행들, 우리의 업적들, 어떤 일에서든지 나의 권리를 찾고 주장하려고 합니다. 이 거대한 욕심은 우리가 속한 학교, 가정, 심지어는 교회 안에서도 쉽게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이 유혹은 내 안에 선한 무엇인가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합니다.

우리가 언제나 극복해야 할 유혹은 자기의 권력과 부, 자랑(각자는 어느 모로 보나 어떤 부와 능력과 자랑거리를 가지고 있다)만이 아니라 영적인 힘과 부를 자기만을 위해 사용하려는 그런 유혹입니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를 깊이 묵상해 봅시다.

   

열여덟째날

너희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다.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이다(눅6:20)

묵상할 성경말씀: 누가복음6:20-26

참된 행복이 가난한 사람에게 주어진 것은 하나님의 구원이 우리 가운데 있다는 징표입니다. 그 누구도 자신의 공로 때문에, 자신의 가진 것 때문에 구원되는 것이 아닙니다. 너희들은 돈이 없지만 와서 구원의 열매를 먹으라는 이사야의 초대가 이것을 증언합니다(이사야55장). 가난한 이들은 내세울 것이 아무것도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을 부르시면서 그들 안에 당신의 사랑을 나타내고 계십니다. 예수님이 만나 위로하고, 구원을 선포한 사람들은 바로 그러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들은 우리의 영혼이 가난해지도록 애써야 합니다. 천국으로 들어가는 문은 좁기 때문입니다(눅13:23-24). 하나님의 선택을 받았지만 자기가 남들보다 훌륭하다고 믿지 않는 사람만이 그 좁은 문을 통과합니다. “같이 일하는 네 동료보다 네가 더 훌륭하다고 믿는 너는 누구냐?”(마18:23-35). 궁핍함 속에 있는 가난한 이는 우리의 마음을 보편적인 사랑으로 개방시킵니다. 하나님의 모든 선을 자기 자신만을 위해 간직하는 사람은 남의 불행에 눈을 감고 또 마음을 완고하게 가집니다. 남보다 자기가 더 훌륭하다고 믿는 바리새파 사람들은 바로 그렇게 처신하면서 가난한 과부의 헌금을 인정하지 않습니다(눅16).

예수님이 우리에게 권고하는 청빈(가난함)정신은 금욕적인 청빈, 철학자나 현자의 가난 정신이 아닙니다. 이 정신은 자기가 받은 선물들 그 자체에 대해 자유로운 마음을 갖는 태도이며, 또 이웃의 사랑의 필요에 언제나 자기의 모든 것을 내 줄 수 있는 그런 마음의 자세입니다. 이런 마음의 소유자는 모든 것을 하나님에게서 받았음으로 자기의 것이라고 권리를 주장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여, 죄인인 제 마음을 가난한 이의 마음으로 바꾸어주소서. 그때 저는 주님의 사랑을 받게 되겠나이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만이 옳은 판단을 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오늘 하루 이 가난의 정신을 묵상하며 보냅시다.

 열아홉째날

내게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런 이로움이 없습니다(고전13:3)

묵상할 성경말씀:고린도전서12:31-13:13

“이제 내가 가장 좋은 길을 여러분에게 보여 드리겠습니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내게 사랑이 없으면, 울리는 징이나 요란한 꽹과리가 될 뿐입니다.”(고전12:31-13:1)

내가 여러 가지 일을 할 수 있고, 내가 여러 가지를 알 수 있다고 할지라도 나에게 여전히 문제가 되는 것은 사랑의 결핍입니다. 내가 전부를 가졌을 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없는 것입니다. 사랑의 결핍은 나를 그리스도인도 아닌, 인간도 아닌,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전락시켜 버리는 것입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친절합니다. 바울은 사랑에는 하지 않아야 할 여덟 개의 행동방침이 있음을 말합니다. 사랑은 무엇보다 4-6절에 나오는 것과 행동들을 하지 않을 수 있는 능력입니다. “시기하지 않으며, 뽐내지 않으며, 교만하지 않으며, 무례하지 않으며, 자기의 이익을 구하지 않으며, 성을 내지 않으며, 원한을 품지 않으며, 불의를 기뻐하지 않습니다.”

그런 후에 다섯가지의 해야 할 다섯 가지 행동방침을 말하고 있습니다. “진리와 함께 기뻐하며, 모든 것을 덮어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딥니다.”

8-13절에서는 모든 것이 다 사라질 때에도 사랑은 여전히 남아있는 것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어린 시절이 지나고 어른이 되면 많은 것들이 어리석은 것으로 여겨져 버리는 것처럼, 사랑 이외의 모든 것들은 부분적이요, 유치한 것으로 판단되어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의 의미를 깊이 묵상하며 오늘 하루를 보냅시다. 사랑은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그 어떤 은총의 선물보다 더 뛰어난 무한히 위대한 하나의 길’임에 틀림없습니다.

 스무째날

여러분은 이런 태도를 가지십시오. 그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태도입니다(빌2:5)

묵상할 성경말씀:빌립보서2:1-18

예수님이 우리 가운데서 원하시는 것이 있다면 어떤 성공의 열매들이 아니라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인격의 성공입니다. 사도바울은 이것을 위해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같은 사랑을 품고 살아야 한다고 부탁합니다. 이것은 예수님과 같은 태도를 가진 사람들이 추구하는 성공입니다. 이 성공은 사랑 자체이신 하나님의 완벽성과 우리를 비슷하게 만들어 줍니다. “하늘의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같이 여러분도 완전해야 합니다.”(마5:43-48)

이 성공의 관건이 되는 길은 예수님의 방식을 따르는 것입니다. 그분은 하나님과 동등한 분이셨지만, 당신이 가지고 있는 권리나 자리에 연연하지 않으셨습니다. 자기를 비우는 이 자기 비하의 방식은 자신을 사랑으로 알리고 그 사랑을 퍼뜨리려는 하나님의 방식입니다. 하나님은 인간들과 함께 노는 분이 아니라, 친히 인간이 되십니다. 그분은 사랑한다고 말씀하시지 않고, 사랑이라고 주장하는 바를 실현하십니다. 바로 이것이 그분을 십자가로 인도한 것입니다. 그분은 사랑에 자기 자신을 굴종시키십니다. 그분에게 사랑은 생명보다 더 귀하기 때문입니다(시63:3).

그런 이유로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아들을 그 인간성 안에서 영광스럽게 하시고, 또 그 인간성 안에서 당신 자신을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을 통해서 당신을 드러내고 계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마음을 가지고 살아갈 때, 예수님의 자기 비하의 사랑의 행위를 닮아가며 살아갈 때, 우리들은 우리 앞에 주어지는 상황들을 옳게 판단하고, 우리의 입장을 옳게 결정할 것입니다.

“하늘의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같이, 여러분도 완전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이런 태도를 가지십시오. 그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태도입니다.” 예수님이 보여주신 태도를 따라서 우리들은 하나님과같이 완전한 존재에게 가까이 나아갈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의 의미를 깊이 묵상하며 오늘 하루를 보냅시다.

 스물한째날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도 잃지 않을 것이다.(눅21:18)

묵상할 성경말씀:누가복음21:8-19

우리에게 어려움과 박해가 닥칠 때는 우리는 어떻게 분별하여 대처해 나가야겠습니까? 오늘 말씀을 통하여 예수님을 신뢰하는 것의 중요성을 묵상해 보기 바랍니다.

우리는 기본적으로 유혹자들에 의해서도 그리고 박해자들에 의해서도 압도당해서는 안됩니다. 어려움들은 사방에서 우리들에게 들이닥칠 것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우리를 어렵게 만들 것이며, 친구들과 부모들까지도 우리에게 어려움을 안겨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성령을 통해 우리에게 주어질 지혜에 신뢰를 두어야 합니다. 우리의 머리카락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의 힘은 바로 우리의 변함없이 신뢰하는 마음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에 신뢰를 두는 사람들은 “배우지 못한 교양없는 사람들”(행4:13)일지라도 자기네가 한 대답의 힘에 놀라고, 또 “그분의 이름을 위해 모욕을 당하는 기쁨”(행5:41)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에 미친 사람들의 지혜(고전1-4장)인 이 신뢰는 그리스도의 제자들에게 요구되는 기본적인 태도입니다. 이 신뢰는 제자들에게 자유와 기쁨 그리고 아버지께 대한 지식의 비밀을 알게 해줍니다.

불안함과 두려움은 우리들로 하여금 바른 판단을 하지 못하도록 합니다. 자유롭지 못하게 합니다. 우리 아버지인 하나님에 대한 변치 않는 신뢰, 세상을 이기었노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변치 않는 신실함, 이것이 없다면 우리들은 항상 불안한 가운데서 이리 저리로 흔들리며, 우왕좌왕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 하루를 보내며 우리들은 예수님 안에서 평화를 누리며 살아가고 있는지를 묵상해 봅시다. 나는 근심과 두려움에 휩싸여, 나의 모든 여건들과 내 주변 사람들의 눈치를 보며, 무서워하며 살아가고 있지 않은지를 돌아봅시다. 그리고 “그러나 너희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을 것이다.”라는 말씀을 깊이 묵상해 봅시다.

스물둘째날

보십시오, 우리는 우리에게 속한 것들을 버리고서 선생님을 따라왔습니다.(눅18:28)

묵상할 성경말씀:누가복음18:18-30

오늘부터 우리는 여섯째 단계로 접어듭니다. 이 단계는 보다 더 구체적으로 우리들의 선택이 하나님의 뜻에 맞도록 하는 훈련을 하는 단계입니다.

베드로는 이런 다짐을 주님께 한 적이 있었습니다. “모두가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절대로 버리지 않겠습니다. 내가 선생님과 함께 죽은 한이 있더라도, 절대로 선생님을 모른다고 하지 않겠습니다.”(막14:29-31) 베드로는 자신있게 이 말씀을 드렸으나 잘못 생각한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부인하였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의 계획의 위대함이 베드로의 잘못을 덮어주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나는 어떤 태도로 그런 말씀을 드려야겠습니까? 어떻게 하면 나의 선의에 찬 선택이 항상 하나님의 계획에 충실하다는 것을 보장받을 수 있겠습니까?

오늘 본문 속에 나오는 부자 청년과 베드로의 이야기를 통하여 좋은 선택을 하기 위한 기본적인 마음 자세에 관하여 묵상할 수 있습니다. 청년의 선택을 방해한 것이 있는데 그것은 그의 재산이었습니다. 그 청년은 재산을 소유한다기 보다는 오히려 재산에 의해 소유당했습니다. 그래서 그것이 그를 슬프게 하였습니다. 그는 사랑하는 데에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우리를 얽어매는 이 재산은 수단에 불과한데 그것을 절대적인 무엇으로 삼고 있을 때가 많이 있습니다. 믿은 이들의 아버지인 아브라함은 그의 유일한 아들을 바쳐야 했을 때, 두려움이나 이해타산에서가 아니라 확신을 가치고 바쳤습니다(히11:17-19).

이에 비해 베드로는 말했습니다. “저희는 제 것들을 버리고 선생님을 따랐습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떠난 것이라곤 작은 집 한 채, 배 한 척, 그리고 그물. 이것들은 부자의 많은 재산에 비하면 너무나 초라한 것입니다. 예수님에게는 양이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존재하는 것과 소유하는 것에서부터 떠나려는 마음의 질이 중요한 것입니다. 내가 떠나야 할 것, 버려야 할 것을 묵상하며 하루를 보냅시다.

 스물셋째날

좋은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고, 나쁜 열매는 나쁜 열매는 맺는다(마7:17)

묵상할 성경말씀:마태복음7:15-20

선택은 내려진 결단보다는 그 선택을 위한 준비와 그 사람의 품성이 더욱 중요합니다. 결단은 그것을 내리는 사람의 됨됨이를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영적 건축물을 지을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어떻게 기초를 다지느냐 하는 것입니다.

참다운 선택을 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누구인가를 알아내는 일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결단 내리기를 원하지는 그럴 수 없을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책에서 읽은 것을 그대로 말하고, 혹은 주위 사람들로부터 귀동냥한 것을 그래도 내놓고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엇보다 먼저 우리 자신을 꿰뚫어보는 것을 수락해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면 우리는 여러 가지 이유들의 쳇바퀴 속에서 맴돌 뿐 결코 그 쳇바퀴 속에서 빠져 나오지 못합니다. 그 이유들이 우리 자신을 표현해 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참다운 선택을 하기 위해서는 인간적 성숙성이 필요합니다. 인간적인 성숙함을 고려하지 않고 선택하는 요령만 배운다면 그것은 모래 위에 지은 집과 다를 바 없는 것입니다.

좋은 선택을 위해서 확인할 것이 있다면 나의 삶이 성령의 빛에 의해 인도함을 받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내가 무엇을 선택하기에 앞서, 성령에 의해 인도된 예수님처럼, 내 안에서 주님의 뜻을 느끼도록 작용하시는 성령의 활동에 의존하고 있느냐? 내가 그런 사람이 되어 있느냐 하는 것이 무엇을 선택하느냐 보다 훨씬 중요한 것입니다.

어떤 나무이냐에 따라 그 나무의 열매가 결정됩니다. 사과 나무에 배를 걸어둔다고 해서, 사과나무가 배나무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 하루를 어떻게 하면 잘 선택하여 보낼까를 걱정하기 보다는, 나는 어떤 나무인가를 묵상하며 하루를 보냅시다. 나는 온전한 선택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 있는가를 묵상해 봅시다.

스물넷째날

그가 이루신 놀라운 일을 기억하여라, 그 이적을 기억하고, 내리신 판단을 기억하라(시105:5)

묵상할 성경말씀:시편105편

모든 사람에게 있어 어떤 상황에 대한 선택이 동일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할 일이 너무 많아서 조용히 앉아서 반성할 시간이 없으니, 전문가들인 당신네들이 우리가 좀 더 밝게 볼 수 있도록, 간단한 몇가지 방법을 알려 주십시오.”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아내는 데에는 자신의 시간과 자신의 노력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러한 노력 중에서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자기와 당시의 백성인 인류 안에서 이룩하신 경이로운 일들에 대한 기억을, 삶의 여정을 통해서 점차로 발전시켜 나가게 됩니다. 기억의 중요성은 여러 시편들을 통하여 뼈저리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중에 대표적인 시가 오늘의 말씀입니다. 이런 시편을 읽으면서 기도하면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행하신 일들을 기억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알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각자의 일생의 중대한 시기들을 다시 기억해 봄으로써 거기서 일관된 몇가지 흐름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큰 흐름이 그 시기들을 묶고, 또 그 흐름이 흘러가는 방향은 하나님이 우리를 인도하시는 목적지를 발견하도록 하는 하나의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내가 받은 은혜들을 나의 기억 속에 떠올려라.” 하나님에 대한 이러한 인식을 통해서 하는 묵상은 “모든 일에 있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는 것”으로 우리를 인도합니다.

나의 삶을 돌아보며 하나님의 손길을 느낄 수 있을 때 나의 앞길도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확신하며 나아갈 수 있습니다. 오늘은 여러분들의 지난 날들을 곰곰히 돌아보며, 하나님이 나의 삶에 언제 간섭하셨으며, 어떻게 인도하셨는지를 깊이 묵상하며 보냅시다. 이러한 기억 속에서 새로운 희망이 솟아나는 법입니다.

스물다섯째날

이제 사는 것은 내가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갈2:20)

묵상할 성경말씀:갈라디아서2:20

좋은 선택을 위해선 결국 나 자신을 나 밖에서 볼 수 있는 눈이 필요합니다. 내 안에 머물러 있으려고 하는 것은 나 자신안에 갇혀 있는 꼴입니다. 옛 수도사들은 “각자는 영성적인 모든 일들에 있어서, 자기에 대한 사랑, 자기의 의지와 자기에게 고유한 이익들에서 빠져나오는 정도에 따라 발전하게 되리라”고 말하였습니다.

자기 자신을 진실로 사랑하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으로부터 탈출해야 하며 그것을 통해 어떤 분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나는 나 자신에게서 벗어날 수 있습니까? 가장 먼저는 타자(다른 존재)에 대한 체험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여 사람이 되신 그 타자와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나를 사랑하여 사람이 되신 분께서 내 안에 새로운 생명과 의미를 불러 일으킬 것입니다.

“나를 위해 사람이 되신 주님께 대한 지식을 간청하십시오, 그분을 더 잘 사랑하고 따르기 위해서...” 이는 결국 나 자신이 자기 중심주의에서 벗어나야 함을 알려 줍니다. 이는 영원한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내 자신이 정복되는 것을 허락해야 하는 것을 의미합나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 안으로 침투할 때, 그분은 우리 안에서 거룩한 욕망을 일깨웁니다. 우리는 우리 안에서 내가 아닌 새로운 주체를 발견하게 됩니다.

이제는 나와 내 안에 있는 주체가 대화를 시작합니다. 처음에는 어린아이와 같이 유치한 대화가 되겠지만, 점점 성숙한 대화를 나누게 될 것입니다. 새로운 주체를 닮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나의 옛 자아의 모습은 점점 사라질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만 내 안에 사시는 그런 경험을 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 하루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에 의해 내가 얼마나 정복되었는지, 나는 그분과 어떤 대화를 나누며 살아가고 있는지를 깊이 묵상하며 하루를 보냅시다.

 스물여섯째날

내가 주와 선생이 되어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요13:14)

묵상할 성경말씀:요한복음13:1-17

이제 우리는 일곱 번째 단계에 이르렀습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선택에 관한 묵상을 해왔습니다. 우리들의 신앙생활이 깊어질수록 우리들은 우리 자신에게서 벗어나고,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삶을 살게 됩니다. 오늘부터는 우리를 위해 당신의 몸을 내어 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묵상하고 체험합니다.

오늘의 본문은 십자가에 죽으시기 전 날, 세족식을 행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창조주가 자기 피조물의 발 앞에 종처럼 구부리고 있으니, 그것은 피조물이 어떻게 사랑을 받고 있으며,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가를 한꺼번에 배우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각자의 발앞에 구부리고 계십니다. 베드로는 선생님의 이와같은 모습을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는 우리는 선생님이 그렇게 하도록 내버려 두어야 하니, 그것은 ‘나중에 이해하기 위해서’입니다. 이제부터 있을 스승의 이 놀라운 행동 때문에, 인간은 자기 자신도 자기 형제도 멸시해서는 안됩니다. “너희가 이 지극히 작은 내 형제들 가운데 하나에게 해 주었을때마다 나에게 해준 것이다.” 모든 사람은 나에게 예수님이 됩니다.

선생님이 가시는 지금 내가 비록 이 순간에는 그분을 따라갈 수 없지만, 그분을 다시 만나기 위해서, 나는 형제적 사랑의 새로운 계명을 받는 것입니다. 이 계명은 내가 그분께 속하고 또 그분은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것의 징표입니다(요13:33-35). 요한의 편지는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그 사랑속에 하나님이 계신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요일4:12). 베드로는 예수님의 발씻는 모습을 그냥 보고 있어야 했습니다. 그는 먼저 자기 선생님이 사랑의 길위로 걸어가도록 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분을 만든 것이 아니라 그분이 우리를 만드셨고, 그분이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오늘 하루 나의 발앞에 구부리어 나의 발을 씻기시는 예수님을 묵상하며 이 세족례의 비밀을 더욱 깊이 묵상해 봅시다.

 스물일곱째날

떡을 떼어 주시며 말씀하셨다. “이것은 너희를 위해서 주는 나의 몸이다(눅22:19)

묵상할 성경말씀:누가복음22:1-20

우리는 지금 일곱 번째 단계에서 그리스도와 일체가 되는 신비에 관하여 묵상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예수님과 제자들의 유월절 식사, 성찬식의 의미를 묵상함으로 그리스도와의 일체를 경험해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영원한 말씀이요, 하나님이십니다. 그 영원한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시간과 공간이라는 것에 한정된 인간의 세계에 들어오시는 사건을 이 성만찬의 신비를 통하여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성만찬의 기본적인 의미는 식사입니다. 그리고 그 식사의 음식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간속에서, 그리스도의 몸은, 영원한 생명을 향해 걷는 사람들의 음식입니다. 그분의 영원한 몸이 시간 안으로 들어오는 것은 시간의 끝에 이르기까지 우리를 인도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몸을 통해 자유롭게 당신의 사랑을 드러내십니다. “내가 고난을 받기 전에 여러분과 함께 이 유월절 음식을 나누기를 간절히 원했습니다. ....이는 여러분을 위하여 내어주는 내 몸입니다.” 예수님의 몸은 인간들을 향한 당신의 사랑을 표현하는 수단이요, 인간의 세계속에 당신을 잠입시키는 수단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몸의 행위를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고, 죽음을 통하여 당신의 몸을 우리에게 넘겨주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당신과 우리 사이에 사랑의 교환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 당신의 몸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예수님의 몸은 당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위해서 있습니다. 따라서 나의 몸도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그분을 위해서 있습니다. 남편과 아내가 사랑을 표현하기 위해 자기들 몸을 서로에게 주는 것에 비유될 수 있습니다.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예수님은 이 사랑의 교환 속에서 죽어 없어지는 우리의 몸에 당신의 영원함을 전해주십니다.

 스물여덟째날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요6:55)

묵상할 성경말씀:요한복음6:22-71

요한복음 6장에 대한 깊은 명상은 그리스도의 살과 피의 풍요로운 신비에 참여할 수 있게 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몸은 요셉이라는 한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몸이라기보다는 성령을 통하여 동정녀 마리아로부터 태어난 것입니다. 여기에 그리스도의 몸의 신비가 있습니다. 우리 사람들의 생명이라고 하는 것은 죽음으로 특징되는 생명입니다. 인간들이 전달하는 생명이라는 것, 인간이 낳는 생명은 결국 죽음을 맞게 됩니다. 이렇게 죽어 없어지는 세대들의 순환 속으로, 영원한 말씀이신 예수께서 육체를 취하여 나타난 것입니다. 우리의 육체와 비슷한 육체이지만, 이 육체는 우리에게 생명과 영원을 선물로 주십니다. “나의 살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 그 안에 성령이 살아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생명은 믿음 안에서 받은 것입니다. 인간이 하나님께 도달할 수 있는 길은 오직 육체를 입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입니다. 그러나 이 그리스도의 육체는 성령 안에서 믿을 때에만 아버지의 생명을 우리에게 전해주십니다. 육체는 소용이 없으나 영은 살아 움직이게 합니다.

이 육체는 믿는 이들에게 은총의 효과를 냅니다. 이 육체는 성령과 일치하기 위한 하나의 징표입니다. 아버지의 생명이 그들에게 전해지는 것입니다.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같이, 나를 먹는 이도 또한 나로 말미암아 살 것입니다.” 이리하여 그 사람 안에는 하나님의 신성이 침투되고, 그리스도 안에서 죽어없어지는 자기 존재의 변형이 발행합니다. 아버지의 생명이 그에게 주어졌고, 아들을 통해서 전달되었으며, 성령 안에서 그는 그 생명을 체험합니다.

하나님이 우리 육체 안에 거하시고 우리와 함께 사신다는 것은 신비입니다. 믿음이 없는 자들에게는 이것이 오히려 걸림돌이 될 뿐입니다. 오늘 하루를 보내며 이 신비를 깊이 묵상하며 우리 안에 거하시는 하나님을 체험해 봅시다.

 스물아홉째날

과부는 자기의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막12:44)

묵상할 성경말씀:마가복음12:38-44

우리는 이제 여덟 번째 단계에 이르렀습니다. 이제부터는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부활의 신비를 깊이 묵상하는 단계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부활을 통하여 우리들의 삶을 비추어 보게 될 것입니다.

마가복음에 따르면 예수님의 수난이야기는 14장에서 시작됩니다. 그리고 12장에서 예수님의 공생애가 끝이 납니다. 그 마지막 이야기가 바로 두렙돈을 바친 과부의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는 예수님의 공생애를 마무리하고, 예수님의 수난의 길로 문을 열어주는 이야기입니다.

두 렙돈의 과부의 헌금이 어느 부자의 헌금보다도 가치있다고 하는 예수님의 판단은 우리에게 큰 의미를 줍니다. 예수님에게 그 과부의 두 렙돈만 있으면,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마가복음 13장에서 성전의 파괴를 예언하십니다. 과부의 두렙돈은 새로운 성전의 기초를 마련할 수 있는 것입니다.

무엇이 이 과부의 헌금을 가치있게 만들었습니까? 이 과부는 비참한 상태에서도 자기의 모든 소유를 바쳤기 때문이고, 다른 사람들은 넘치는 가운데 얼마씩 헌금을 냈기 때문입니다. 헐벗고 굶주리며 마지막 한 끼니에 언제나 위협을 느끼는 사람은 항상 생명의 위협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가난한 과부가 두 렙돈을 바친 것은 그의 생존을 위태롭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과부는 바로 ‘자기의 생존’, ‘자기의 생명’을 바친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의 생존, 인간의 생명은 역설적으로 무한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여인의 모습은 당신의 생명을 바치시는 예수님을 조금 비추어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고난받으심을 통하여 그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하루 자신의 전부를 바치는 것에 관한 깊은 묵상을 통하여, 생명을 바치는 것의 힘을 느껴봅시다.

서른째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막14:36)

묵상할 성경말씀:마가복음14:32-41

오늘 우리가 묵상할 것은 겟세마네에서 예수님이 기도하시는 모습입니다. 겟세마네 동산의 공간을 전체적으로 살펴보면 두 장소가 있습니다. 제자들이 있는 곳이 있고, 다른 편에는 하나님 아버지가 계신 곳입니다. 예수님은 이 두 곳을 오가십니다.

기도한다는 것은 어떤 사람 앞에 서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깨어 있다는 것도 말을 건네고 싶은 사람을 기다리며 그분께 정신을 쏟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아버지께 그렇게 하였으나, 제자들은 그렇지 못하였습니다. 그들은 “자고 있었고”, “눈이 무겁게 내리 감겨 있었으며”, “그분께 무슨 대답을 해야 할 지 몰랐다.” 이렇게 잠에 빠진 이상 정신이 살아 있을 수 없었다. 육체의 연약함과 무거움 때문이었다.

예수님은 자기 제자들의 태도와는 정반대로 아버지와의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기도 가운데 그분의 정신은 살아있었고, 그 어떤 유혹 앞에서도 강했다. 땅에 엎디어진 예수님의 몸안에서 ‘타락’과 ‘기도’, ‘육’과 ‘영’의 긴장은 놀라울 정도로 심하였다. 그분은 슬픔, 고뇌, 죄, 수난의 시간 때문에 땅 위로 엎드린 이 육체를 기도를 통해 다시 일으켜 세웠다. 그 시간은 예수가 곧 말씀하실 ‘마실 잔의 시간’이었다. 싸움은 예수님 자신 안에서 발생하였다. 육체의 무게와 아버지께 돌아가려는 정신간의 싸움이었고, 육체와 영혼의 연결점이 그 싸움의 중심이었다. 그분은 그 싸움이 힘들어 제자들에게 와서 도움을 청하지만 그들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두 번이 왔었지만, 헛일이었다. 예수님은 아버지께로 돌아가야만 했다.

마지막으로 제자들에게 돌아온 예수님은 어떻게 “이제 자고 쉬시오, 됐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었을까? 쉬라는 말은 예수님이 승리했다는 뜻이다. 원수의 유혹과 육체의 무게가 극복되었다는 뜻이다. 이제 예수님은 당신의 살과 피를 사람들에게 나누어줄 준비를 마친 것이다. 주체와 객체가 일치되고, 하나님의 뜻에 전적으로 일치한다.

서른한째날

예수께서 다시 아무 말씀도 아니하시니 빌라도가 기이히 여기더라(막15:5)

묵상할 성경말씀:마가복음15:1-20

오늘 우리가 묵상할 본문은 빌라도 앞에서 재판받으시는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이리저리로 끌려다니시고 있습니다. 재판을 받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면서도 예수님은 자신의 모습에 관하여 설명하시거나 변명하시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존재하기로 결정한대로 그대로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여러 고소하는 말들에 예수님은 침묵으로 일관하십니다. 살 수 있는 기회를 포기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권리와 힘의 관계속으로 들어가지 않으신 것입니다. 사실 재판받아야 할 사람과 재판하는 사람의 위치가 바뀌어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모습에 빌라도는 어쩔 줄 몰라하고 있습니다. 유월절에 죄인 하나를 풀어주는 규례를 따라서 예수님을 석방하려고 하지만 그의 시도는 성공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바라바라는 사람이 풀려나고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박힙니다. 죄인은 풀려나고 의인은 십자가에 죽게 됩니다. 거짓과 악은 승리하였고, 진리는 너무나 가볍게 십자가 나무위에 달립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 진리이신 예수님을 조롱하기 시작합니다.

진리가 승리하는 세상이라면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시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진리가 승리하는 세상이라면 예수님은 세상에 오실 이유도 없었을 것입니다. 거짓과 악, 그로 인한 죽음의 그림자가 있었기에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그 거짓과 악의 희생자가 되시고, 그 결과인 죽음까지 맛보시기 위하여, 그것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의 고통을 바라보시는 분이 아니라, 참여하시는 분이며, 구원하시는 분임을 알려주시기 위하여 오신 것입니다.

오늘 하루를 보내며, 죄악으로 가득찬 세상과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묵상하며, 죄인인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죄악으로 가득찬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묵상해 봅시다.

서른두째날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막15:34)

묵상할 성경말씀:마가복음15:21-41

오늘은 십자가에서 외롭게 죽어가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묵상해 봅시다. 십자가에 처형당하시는 예수님 주변에서 여러 사람들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죽이는 사람들, 예수님을 조롱하는 사람들, 지나가는 사람들, 그리고 멀리서 예수님을 바라보는 사람들, 그리고 어떤 이들, 우리들이 만약에 골고다에 있었다면, 우리들은 어떤 부류의 사람들에 속했다고 생각하십니까?

십자가에서 죽어가시는 예수님은 모든 이들로부터 격리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과 죽음의 자리에 함께 하고 있는 제자들은 없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도망쳤습니다. 단지 시몬이라는 사람만이 억지로 십자가를 메고 함께 갔을 뿐입니다.(시몬이 억지로 한 일이었지만, 이 일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마땅히 할 일이었습니다.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일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는 사람들에게 근본적으로 요구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아마도 함께 십자가에 달려있는 강도들과 같은 사람으로 오해받을 수 있는 장면입니다. 아무도 예수님 앞에서 예수님을 인정하는 사람들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하나님과도 분리되는 경험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을 세상의 구원을 위해 내어주시는 장면이기 때문입니다. 유월절 어린 양이 되어 사람들의 생명의 양식이 되기 위해서 당신의 몸을 내어주시는 모습이기도 합니다. 그렇기 떄문에 이 일을 누가 함께 할 수 있는 일은 아닙니다. 대신 할 수 있는 일도 아닙니다. 예수님 만이 하실 일이었습니다. 그분만이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입니다.

그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셔 새로운 생명을 얻은 우리들입니다. 비록 외로울 지라도, 모든 사람들로부터 버림받는 기분일지라도, 우리들의 몸을 다른 사람들을 위해 내어주는 일, 이 일이 우리들이 하나님의 아들, 딸이라는 것을 확인시켜 줄 것입니다.

 서른셋째날

막달라 마리아와 요세의 어머니 마리아가 예수 둔 곳을 보더라(막15:47)

묵상할 성경말씀:마가복음15:42-47

죽으시고 무덤에 묻히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묵상해 봅니다. 여러분들은 장례식을 본 적이 있습니까? 오늘의 본문은 바로 예수님의 장례식 장면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이 죽음의 모습을 본 한 백부장이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죽습니까? 하지만 백부장은 그러한 고백을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한 사람의 이방인의 입술을 통하여 당신의 아들의 정체를 밝히셨습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라고 외친 예수님의 질문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장례식에 참여한 사람들은 아리마대 사람 요셉과 여인들이었습니다. 이 여인들은 예수님의 죽음을 멀리서 바라보았던 사람들이기도 합니다. 이 여인들이 예수님의 죽어가는 모습을 보았을 뿐만 아니라, 무덤에 묻히는 것, 그리고 부활하시는 모습까지 보게 됩니다. 이 여인들로 인하여 예수님의 죽음과 매장과 부활이 오늘의 우리에게까지 전해질 수 있었습니다.

아리마대 사람 요셉은 예수님의 시체를 빌라도에게 요구합니다. 강도들과 함께 매장되었더라면, 튼튼한 바위 속이 아닌 다른 곳에 버려졌더라면, 예수님의 모습은 잊혀져 버렸을 지도 모릅니다. 예수님의 부활, 빈무덤의 기억도 잊지 않았을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내려진 예수님은 누구에게 주어집니까? 그분은 사람들의 기억 속으로 주어집니다.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 그분은 결코 죽음으로 사라지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을 감동적으로 만났던 사람들의 기억을 통하여 현존하십니다. 오늘의 우리들도 그 여인들이 본 것을 전해받아서,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을 묵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들의 기억을 통해 예수님은 다른 사람들 속에서도 현존하시게 됩니다.

오늘 하루 내 마음 속에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의 모습이 얼마나 깊이 간직되어 있는지 묵상해 봅시다. 십자가에 죽으신 그분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고 있는지 확인해 봅시다.

 서른넷째날

그가 살아나셨고 여기 계시지 아니하니라 보라 그를 두었던 곳이라(막16:6)

묵상할 성경말씀:마가복음16:1-8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을 묵상합니다.

새벽에 빛이 희미하게 떠오를 즈음에 여인들은 예수님의 무덤에 예수님의 시신에 향품을 바르기 위해 찾아갑니다. 이 여인들은 아직 어두운 밤에, 떠오르는 태양을 기대하고 있었을지 모릅니다. 예수님은 그 여인들 앞에 마치 떠오르는 태양과 같이 솟아 오르셨습니다. “거기 태양을 위해 그분은 바다 위에 장막을 세워주셨으니, 그리고 그분은 마치 신방을 나오는 신랑인 양, 어느 영웅처럼 자기의 길을 기뻐하며 달려가도다. 그의 출발점은 하늘의 이 끝에서 시작하여, 그 궤도는 다른 끝에 이르는도다. 그 무엇도 그 열기에서 벗어나지 못하는도다.”(시편19:4-6) 예수님은 어둔 무덤 속에 계시기 보다 이제는 온 세상이 피할 수 없도록 비추는 빛이 되신 것입니다.

여인들 앞에서 부활하신 분, 그분은 그 여인들이 알았고, 갈릴리에서부터 예루살렘에 이르기까지 지켜본 바로 그분이 십자가에서 죽었던 분이었습니다. 다른 어떤 사람이 부활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 부활하신 분은 이제는 어느 장소에 갇혀 계신 분이 아닙니다.

“그분은 더 이상 여기에 계시지 않습니다.” 여기에라는 의미는 그 여인들에게 지금까지 공간으로 여겨오던 것을 모두 부인하는 것입니다. 그 공간은 그 여인들이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에 이르기까지 그 숱안 시간을 걸려온 모든 장소들입니다. 각자의 긴 여행 끝에 도달한 무덤은 그 여인들을 좁은 공간안으로 폐쇄시키고 그들을 시간의 인질로 삼습니다.

예수님은 무덤의 밤에까지 갔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분에 여기에 계시지 않습니다. 공간도 시간도 이제는 그분을 붙잡아 둘 수 없습니다. 이제 부활하신 예수님은 이곳에서, 저곳에서, 광활한 우주 전체에서, 조그만 우리 몸속에서, 과거에서, 현재에서, 그리고 미래에서 만날 수 있는 분이 되신 것입니다. 오늘 하루 부활하셔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예수님을 묵상하며 그 예수님을 만나보고 느껴봅시다.

 서른다섯째날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고후5:17)

묵상할 성경말씀:고린도후서5:17

오늘부터 고난주간이 시작됩니다. 특별히 경건한 마음으로 예수님의 고난과 부활을 깊이 묵상하며 보냅시다. 이번 주 목요일은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것을 기념하는 세족 목요일, 금요일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성금요일입니다. 금요일에는 가능한 금식하며 예수님의 고통을 함께 느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지난 6주동안 여덟 단계에 걸쳐 우리들의 영성훈련을 해왔습니다. 이제 마지막 단계에 이르렀습니다. 이 마지막 단계에서 우리는 부활의 의미를 더욱 깊이 묵상하면서 우리들의 모습을 더욱 새롭게 해봅니다.

우리들은 첫 단계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사람들이라는 것을 묵상하였는데, 우리는 부활한 그리스도 안에서만 그 표현의 의미를 이해하게 됩니다.

사람은 부활한 그리스도와 함께 새로운 사람이 되기 시작합니다. 부활한 그리스도 안에서 창조주의 손에 의해 진흙으로 빚어집니다. 시조 아담의 때에 잃었던 낙원이 이제 우리 앞에 있습니다. 이제 그분 안에서 새로운 세상이 시작됩니다. 부활은 모든 것, 역사와 성경을 비추는 태양입니다. 우리는 부활을 출발점으로 삼아 역사도 성경도 새롭게 읽어나갈 수 있습니다.

부활한 그분의 삶은 육안으로 보고 느낄 수 없는 하나의 새로운 현존방식입니다. “세상은 나를 보지 못하나 너희는 나를 볼 것이다.” 이 말씀은 새로운 삶의 비밀을 알려주는 가장 본질적인 말씀입니다. 그 비밀의 열쇠는 성령과 함께 하는 삶에 있습니다. 또한 그분의 사랑의 계명을 지킴으로써 그분 안에 현존하게 되며, 이렇게 해서 예수님과 새로운 친족관계의 현존이 시작됩니다. 그리고 이같은 영광스런 일은 십자가에서 시작됩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만나 새로운 삶을 시작하고자 하는 거룩한 욕심을 품고 오늘 하루를 보냅시다.

서른여섯째날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엡3:18)

묵상할 성경말씀:에베소서3:8-21

오늘은 우리로 하여금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하고, 그분과의 교제를 가능케하는 성도들의 모임인 교회의 신비에 관해 묵상해 봅니다. 교회를 통해서 우리는 새롭게 태어납니다.

교회는 예수님을 향한 믿음을 통해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사랑의 공간’으로 태어납니다. 교회라는 이 공간을 통하여, 사랑을 갈망하는 사람과 그 갈망에 응답하는 하나님 사이의 만남과, 인간이자 또 하나님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이룩되는 올라가고 내려오는 두 움직임의 만남이 발생합니다.

교회는 완벽성만을 추구하는 모든 사람에게 일률적으로 질서만을 부과하는 깨끗한 자들의 사회가 아닙니다. 교회는 죄스런 사람들을 통해 그리스도의 얼굴을 발견하게 해주는 통과의 공간입니다. 사람들 중에서 가장 가난한 사람도, 권위를 가지고 있는 사람도 우리에게는 모두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소유한 그리스도의 지체, 그리스도가 됩니다. 믿음을 통해 대립과 알력은 사라지고 서로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온전한 몸을 이루어갑니다.

교회 안에서 다양하고도 특수한 소명들이 있음을 체험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각자에게 고유한 소명을 주십니다. 우리 각자는 각자에게 주어진 소명을 통해 나 자신을 발견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소명의 선물을 받은 자는 나이지만 동시에 그 선물은 너의 것이기도 합니다. 너와 나 안에서 그리스도는 당신의 일을 계속하고 계십니다. 나 혼자서는 아무런 의미도 찾을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몸을 나 혼자 이루어 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신비를 체험한 사람들은 결코 자기에게 적대적인 사람도, 이방인으로 남아있는 사람도 무시하거나 동정의 대상으로만 보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부여하신 고유한 소명을 인정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하루 우리 교회에 함께 생활하는 지체들을 돌아보며 그들에게서 발견되는 그리스도의 모습을 묵상해 봅시다.

 서른일곱째날

여러분은 이 시대의 풍조를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서(롬12:1)

묵상할 성경말씀:로마서12:1-2

우리는 부활하신 예수님과 다양한 차원에서의 새로운 삶에 관한 말씀을 묵상하고 있다. 오늘은 우리들의 일상생활에서 만나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묵상해 봅시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교회 안에만 계시는 분입니까? 아닙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우리들의 일상의 삶에서 만날 수 있는 분입니다. 그런데 부활하신 예수님은 우리들이 일상의 삶을 새롭게 살아가도록 하십니다.

우리가 체험하고 있는 현실은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도 공통되는 것입니다. 다른 이들이 학교에 다니는 것처럼 나도 학교에 다니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 현실을 새로운 존재와 새로운 행동방식을 따라 살고 있습니다. 힘, 권력, 학력, 용모 등의 지배를 통해서가 아니라 사랑을 통해 우리는 그 현실에 대처하고 있습니다. 모든 상황 속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은 언제나 단순하고도 따뜻한 형제, 자매처럼 나타나십니다. 그리하여 모든 인간적인 상황은 그분안에서 가치를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는 모든 현실 속에서 사랑으로 나타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하고, 하나님을 체험하기 때문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 안에서 인간의 자유는 가장 완벽하게 행사될 수 있습니다. 그 자유는 결핍에 대해서는 불평하고, 있는 것에 대해서는 거드름을 피우는 사람들의 자유와는 다른 것입니다. 그 자유는 모든 것이 사랑하는 사람들의 행복을 위해 협력한다는 것을 확신하는 사람의 자유요, 자기에게 현재 주어진 상황에 만족하며 평화를 누리는 사람의 자유입니다.

이런 사람의 자유 안에서, 현재의 삶의 어려움들이나 여러 억압들은 새로운 의미를 지니게 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그곳에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을 따라, 모든 사람들이 그러한 어려움과 억압 속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일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오늘 하루를 보내며 우리의 삶에서 현장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이 일하고 계신 곳을 발견하며 그분의 사역에 참여해 봅시다.

  서른여덟째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눅24:32)

묵상할 성경말씀:누가복음24:13-35

이제 우리는 마지막 단게의 마지막 날에 이르렀습니다. 오늘의 묵상 주제는 우리가 어떻게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분과 함께 역동적이고 뜨거운 살을 살아갈 수 있을까 하는 것입니다. 힘이 빠져 엠마오로 내려가던 제자들이 예수님을 만나 힘을 얻어 가던 길을 돌이켜서 다시 예루살렘으로 올라오는 것처럼 말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제자들이 자기를 알아볼 수 있도록 당신의 현존 앞으로 인도하십니다. 슬픔에 빠진 사람을 기쁨으로 건너가게 하십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제자들에 성경 말씀을 풀어주셨습니다. 십자가의 의미가 그 성경의 말씀을 통해서 분명해졌습니다. 예수님의 부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셨습니다. 그 때 제자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떡을 떼어 주는 모습은 성찬식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배를 통하여 우리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부활하신 주님을 사랑의 사건 속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서로 사랑하라. 그리하면 사람들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사랑의 사건 속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은 당신의 모습을 드러내시기에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보게 되고, 그래서 사랑하는 사람들이 예수님의 제자인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들은 어느 순간에나 어디에서나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면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며 그분의 인도하심을 따라서 살아가는 것이 영생의 길이요, 참 인간의 길입니다. 이 사순절 묵상의 기간이 끝나더라도 끊임없이 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며 우리들을 풍성하게 만들어가시기 바랍니다.

 서른아홉째날

예수께서 자기의 십자가를 지시고 해골이라 하는 곳에 나오시니 거기서 십자가에 (요19:17)

 

묵상할 성경말씀:요한복음18-19장

오늘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날인 성금요일입니다. 요한복음 18-19장을 읽으며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을 우리 마음 깊이 새기며, 금식함으로 조금이나마 그 고난과 죽음에 참여하여, 그 고통을 느껴 봅시다.

    마흔째날

묵상할 성경말씀: 침묵

오늘은 예수님이 죽음 속에서 무덤에 머무신 날입니다. 부활을 기다리면서.. 오늘 하루 침묵 속에서 부활의 주님을 기다리며 보냅시다. 죄로 죽은 우리들의 모습을 묵상하며, 예수님과 함께 새롭게 살아나는 우리들을 기대하며 보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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