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기도할 것인가? |
기도는 무엇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반응 |
기도훈련 기도는 무엇을 구하는 것이 아니고, 누구를 구하는 것이다. 즉 기도는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우리 개인의 반응입니다. 기도는 경외감을 가지고 그 분에게 귀를 기울이는 마음의 자세로부터 시작된다. 들으려는 자세를 가질 때 우리는 그 분께 가까이 다가가게 된다. 그 분이 먼저 말씀하신다. 우리는 기도 속에서 그 분이 우리와 함께 계심을 느끼고 감사와 사랑하는 반응하는 것이다. 기도의 관심은 우리의 일이 아니고 언제나 하나님이시며 그가 행하신 일이 되어야 한다. 진정한 기도는 우리 안에서 성령의 임재를 확신하는 것으로부터 비롯된다. 그리고 지속적인 성령의 영감에 대한 확신으로부터 비롯된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의 모든 기도는 성령께서 하시는 것이다. 말하자면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기도하시고 우리는 그것에 대해서 순종하려는 태도가 기도이다. 이 과정 속에서 개인은 성령의 소욕과 육신의 소욕 사이에서 모순과 갈등을 느끼면서 격렬한 투쟁을 경험하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기도를 투쟁이라고 한다. 기도의 뿌리는 '내적인 침묵'에 있다. 관상기도는 생각으로부터 초연(detachment)하는 것이다. 말과 생각과 감정으로부터 떨어져 있는 상태(객관화 시킨 상태)에서 우리의 생각과 마음(mind and heart)을 하나님께 올리는 것이다. 마음과 감정을 반추하면서 마음을 잔잔케 함으로 기도를 준비하게 된다. 우리의 마음은 하나님의 전이고 성령의 전이다(고전 3:16). 성령은 마치 우리 자신이 그 방에 익숙하도록, 또 그 방에서 어떻게 행동하도록 가르쳐 주신다. 성령의 인도에 따라 우리의 내면으로 여행하는 동안 우리의 생각과 느낌 등이 그 방에 익숙해지면서 우리는 점점 하나님의 뜻과 일치되는 기도에 이르게 된다. 테레사 (하나님을 향한 내적인 여행으로부터 얻은 경험을 매우 날카롭고 정확하게 묘사함으로서 내적인 여행을 시도하는 모든 이들에게 보편적인 길잡이 역할을 해주는 [영혼의 성] 이라는 글을 썼다.)는 인간의 영혼을 수많은 방을 가지고 있는 수정 혹은 다이아몬드로 만든 아름다운 성이라고 했다. 이 성에 들어가기 위한 정문은 기도와 명상이다. 이 성에 들어가기까지 만나야할 많은 장애물들이 있다. 이 장애물과 싸우면서 내면으로 내면으로 들어가는 것이 기도이다. 하나님이 거하시는 내면 깊은 세계로 들어가는 동안 인간성과 마귀에 대항하는 싸움을 격렬하게 치루어야 한다. 그러므로 온전히 기도의 삶에 헌신된 이들에게 있어서 기도는 인간본성과 마귀를 향한 선전포고나 다름없다. 기도는 하나님과 세상 사이에 끼어있는 우리 자신안에서 맹렬한 전투를 심화시킨다. 우리는 기도를 통해서 이 성 깊이로 들어가는 동안 자기 자신의 삶을 수정하고 여러 덕들을 쌓게 된다. 우리는 이러한 전투를 감당하기 위해서 홀로 투쟁할 수 없다. 성령님의 인도와 도움을 받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의 의지로 기도하려 말고, 그 대신 우리의 의지를 통해서 온전히 성령님께 우리의 전존재를 맡겨드리도록 힘써야 한다. 기도를 크게 두 종류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다. 첫째는 청원기도요, 두 번째는 관계형성의 기도이다. 청원기도는 내면적인 욕구를 하나님께 드러내고 씨름하는 것이며, 그것을 성취하려는 욕구와의 씨름이다. 진심으로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심령으로 드려지는 기도는 때로 포기할 용기도 얻지만, 자신의 욕구에만을 집착해 있을 때 성령의 인도를 받기 어려울 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외면한 자신의 욕구 실현을 위한 집요한 기도는 자칫 자신의 인격 형성에 영향을 줄 수 있으나, 영성형성에는 크게 도움을 주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관계형성을 위한 기도는 나 자신과 하나님과의 관계실현이 그 목적이지, 우리 자신의 욕구는 지극히 부차적인 요소이다. 우리의 욕구실현에 관심이 있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하나님과의 관계 형성에 도움을 주는 범위에 제한된다. 예수님은 당신의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구하면 이루시겠다고 했다.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거시오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라 (눅 11:9)." 여기에는 아무 조건이 없다. 조건이 있다면 단지 '내 이름으로 (예수님의 이름으로)라는 것이다.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요 16:24)고 했다. 그러나 후에 사도들은 응답되어지는 기도의 조건을 별도로 붙이고 있는 듯한 인상을 준다. 야 4:3절에 보면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니라." 요일 3:21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 요일 5:14 " 그를 향하여 우리의 가진바 담대한 것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고 어떤 조건이 붙어 있다. 이것은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한 사도들의 경험이요 깨달음이요 이해일 것이다. 예수님이 가르치는 기도는 욕구 성취의 도구라기 보다는, 하나님과의 교제요, 관계형성이요,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기 위함이요,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으로까지 자라기 위한 과정이다. 그러므로 영성훈련을 영성형성이라는 말로 바꾸어 말할 수 있다면 무엇보다도 성숙한 기도는 하나님과의 관계형성을 위한 가장 기본적이고 기초적인 과정이다. 우리의 뜻이 아니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기도하고, 우리의 정욕이 아니고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요구에 적응키 위함이다. 그것은 분명 성서로부터 출발되어진 기도일 것이다. 그리고 영성훈련이 예수님의 인격을 닮아가고 나아가서 베드로의 말대로 '신의 성품'에 참여하기 것이라면, 영성훈련은 그리스도의 성육신적인 삶을 내면화 하는 과정이라 말할 수 있다. 아타나시우는 "성육신은 인간을 하나님 되게 하기 위함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동시에 "기도는 하나님이다"라는 말을 남기기도 있다. 성육신 하신 그리스도는 오늘 우리에게 말씀으로 남겨져 있다. 그 말씀을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내면화 할 때 우리는 그리스도의 성육신에 참여하게 되고, 우리의 인격은 그리스도의 인격을 덧입게 될 것이다. 즉 말씀이 단계적으로 기도를 통해서 내면화 된다면 그것은 곧 우리가 지속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형성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함과 온전함을 이루게 될 것이다. 성서를 내면화 하는데 있어서 가장 보편적으로 알려진 기도 방법은 관상기도이다. 관상기도란 기도자와 대상이 하나 되는 일치의 상태를 말한다. 말씀을 묵상하는 과정속에서 관상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침의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그 말씀은 하나의 사건이요. 나 자신이 그 사건의 인물로 참여하게 된다. 그 속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명령과 뜻을 전달받고 우리는 그분과의 솔직한 관계 속에서 응답하게 된다. 이런 과정이 지속되는 가정 속에 영성형성은 꽃필 것이다. 5. 기독교적인 묵상(관상)기도 읽은 텍스트를 상상력을 통해서 생생하게 살려 내고 그 실존 속으로 우리 자신이 들어가서 그 텍스트와 대화를 시작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실존을 우리의 내면 속에서 경험키 위해서 그 매개체로서 우리 영혼이 말씀에 직면하게 하는 것이다. 말씀과 평정한 마음이 부딪히게 될 때 하나님의 실존과 만나고 우리는 이에 상응한 응답을 하게 된다. (히 4: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낱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과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성숙한 기도는 상황적인 욕구를 성취하기보다는 내면 깊은 곳에서 일어나는 영적인 갈망에 응답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응답하려는 행위이다. 요한 아른트(Johann Arndt)는 '기도는 하나님을 찾고 만나는 수단이다'라고 했다. 이에 가장 적합한 기도의 출발점은 상황적인 욕구보다는 성서가 알려진 내면이고 영적인 욕구가 되어야 할 것이다. 성서는 하나님의 실존이기 때문에 우리의 영혼이 그것에 정면으로 부딪힘으로서 영적 체험을 구성하게 될 것이다. 성령님의 인도를 경험하고 있는 기도자는 주님과의 교제를 하는 동안 가운데 [yes]혹은 [no]를 반복되면서 영적인 성장을 꾀하게 된다. 유해룡교수는 서강대, 장신대학원, 미국 포담대학에서 영성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장신대학원 영성학 교수로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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