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기 소나무
-권정생-
동산에 떠오른 달님은 만져질 듯이 가까이에 있었습니다.
오늘은 팔월 한가위, 1년 중 가장 커다란 달님이기 때문입니다.
희고 둥근 달님의 얼굴이 온 세상을 아름답게 비추었습니다.
"달님 아줌마! 달님 아줌마!"
산등성이 외딴 봉우리에서 작지만
또랑또랑한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어엉, 누구니?"
달님은 소리나는 쪽으로 눈과 귀를 한꺼번에 돌렸습니다.
"저예요. 여잖아요!"
달님이 자세히 내려다보니, 조그만 소리로 부른건 바로 아기소나무였습니다.
세 살짜리 아기소나무는 봉우리꼭대기에 팔을 번쩍 치켜들고 서 있었습니다.
"오오! 너였구나. 그래 나를 왜 불렀니?"
"저. 말예요."
"으응."
"지난 여름, 억수같이 퍼붓던 물 누가 쉬한 거에요?"
"....?"
"아줌마가 눈 거예요? 아니면 해님 아저씨가 눈 거에요?"
달님은 금방 얼굴이 빨개지고 말았습니다.
"아기소나무야, 그건 쉬한 게 아니다."
"에그 거짓말. 아줌마 얼굴이 빨개진 걸 보니 달님이 쉬했군요. 그렇죠?"
"아니야, 그건 오줌이 아니고 '비'라고 하는 거야. 온 세상의 나무들이 잘 자라라고 하느님이 내려 주시는 거야."
"그럼, 그때 시커먼 포장은 왜 잔뜩 가려 놓았어요? 누가 볼까봐 궁둥이 감추느라 그랬죠?"
"포장이 아니고 그게 바로 '구름'이라는 물통이야. 여름엔 날씨가 덥고 농사철이기 때문에 물이 굉장히 많아야 되거든. 시원하고 달짝한 비를 너도 실컷 마시고 컸잖니?"
달님은 진땀이 나도록 차근차근 들려 주었습니다. 아기소나무는 약간 알아들은 듯했습니다.
"참말 그랬어요. 시원하고 달짝한 걸 보니 쉬는 아닌 것 같아요."
"아닌 것 같은 게 아니라 정말 아니다."
아기소나무는 입을 다물었습니다. 자꾸 따지고 들면 버릇이 없을 테니까요. 달님은 그런 아기소나무가 맘에 들었습니다. 무명베처럼 희고 질긴 달빛을 쏟아 비춰 주었습니다.
"아기소나무야, 너는 이담에 키가 얼마만큼 크고 싶니?" 달님이 물었습니다.
"달님한테 내 손이 닿도록 크고 싶어요."
"어머나! 그만치 커서 무얼 하려고 그러니?"
"언젠가 바람이 내게 가르쳐 줬어요. 저어기 산골짜기랑, 시냇가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 슬픈 사람들이래요. 아들들은 군인으로 뽑혀 가고, 딸들은 도시의 공장으로 돈벌이 가고....."
"쯧쯧, 안됐구나. 정말....."
"그래서 할머니랑 할아버지들은 달님만 쳐다보고 '저기 저기 저 달속에 초가삼간 집 짓고 살고 싶어라.' 한데요."
"정말 그렇겠구나."
"그러니까 내가 하늘만큼 키가 자라서 튼튼해지면, 그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나를 베다가 초가집 짓고 살으시라고요."
아기소나무는 가슴에 두 손을 모아 쥐면서 정성껏 말했습니다.
달님은 갑자기 목이 메려고 해서 억지로 참았습니다.
"아기소나무야, 고맙다."
"달님 아줌마도 저 아래 산 밑, 한국의 할아버지랑 할머니들이 불쌍하세요?"
"그래, 할아버지 할머니들뿐만도 아니지. 군인으로 간 아들들도, 공장으로 간 딸들도, 한국에 살고 있는 모두가 불쌍하지."
"그럼, 내 키가 얼른얼른 자라게 도와 주세요."
"도와 주고 말고지. 하느님도 네가 제일 착하다고 하실 거야."
"아니에요. 제일로 착한 건 싫어요. 보통으로 착하면 되어요."
"그래그래, 아기소나무야."
달님은 한 번 더 목이 메려는 것을 꾹 참았습니다.
권정생동화집 '하느님의 눈물' 中1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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